주일예배
일시: 2022.08.21
제목: 성령의 위엄
설교: 김양재 목사님
본문: 사도행전25:23~27
23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성령의 위엄
성경 구절 하나로 사람들을 살려내면 우리들의 모든 찌질함이 감추어지고 성령의 위엄이 따름을 믿습니다.구원은 이 세상 어떤 좋은 일보다도 좋은 일이기에 구원 때문에 인내하면 성령의 위엄을 주십니다.우리에게 허락된 성령의 위엄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 과시가 아니라 자신의 수치를 드러낼 때 주어집니다.(23절)
호화찬란한 모습으로 들어온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일행, 여기서의 위엄은 누가가 쓴 단어는 판타시아이다. 판타지가 여기서 온 말이고 공상 상상 환상이라는 뜻이고 신약에서 여기서만 단 한번 쓰인 단어이다. 구름이나 바다의 움직임을 사람의 움직임처럼 상상해서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나머지 두번은 하박국, 우상에 대한 번역으로 사용되었다. 우상은 진짜 신이 아니라 인간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구라는 뜻이다. 판타지는 아무리 좋아도 허구이다. 이 쇼를 대단히 화려하게 한 것은 그만큼 바울에게 열등감이 있어서 꾸몄다고 생각한다.
그 높은 사람들에게 바울이 구경거리가 되어서 심문을 받는거다. 위엄을 뽐내는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세상 위엄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초라하게 서 있는 바울이 택자이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노인.. 대머리에 매부리코에.. 외모로도 밀리는 바울.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닮은 기품과 자신감으로 법정을 압도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한 것이다. MRI를 찍으러 가는 데 있는 그대로 치장하면 얼마나 웃기겠는가? 내장을 찍는 것이 중요한 건데.. 바울만 유일하게 세상의 위엄이 허상인 것을 알았다.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에게 성령의 위엄이 있었다. 화려한 치장 속에 자신을 숨긴 아그립바 왕 일행. 자신들의 실체를 숨기고 있기에 성령의 위엄이 주어질 수가 없는 거다.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열등감의 근원은 무엇인가? 당시 친여동생과 근친상간 했던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와 같이 이들도 근친상간의 의심을 받고 있었다. 아그립바 2세는 로마의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기 전 전임 티베리오 황제의 일에 연루되어 감옥에 갈 일이 있었는데 아그립바 2세 왕이 대신 들어갔었다. 후에 황제가 된 칼리굴라가 아그립바 2세를 얼마나 치하했겠는가? 이런 사람을 세상에서는 정치를 잘하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헤롯대왕의 아들이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 안디바는 빌라도와 한편이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이고 이 조카가 헤롯 아그립바 1세이다. 오늘 아그립바 2세처럼 왕복을 입고 단상에 선 사람인데 벌레에 먹혀 비참하게 죽은 사람이다. 유대 왕이 된 아그립바 2세는 로마편에 선 사람이다. 헤롯 대왕부터 악인의 형통을 보여준 집안이다. 이 땅에서 아그립바처럼 악인으로 살다가 벼락출세한다는 게 좋은 것이 아닌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칼리굴라 왕에게 줄 잘섰다고 부러워한다. 기회를 잡아서 출세하는 것을 인생 최고의 출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버니게는 언제든지 돌아갈 나의 고향이 있었다. 아무 아쉬움 없이 이혼하고 쿨하게 돌아오길 반복했다. 예수님의 예언을 성취시킨 디도장군과 버니게가 눈이 맞았다. 자기의 정욕을 위해서는 어떤것도 상관 없었던 버니게. 나중에 황제가 될 정도로 모든 것을 갖춘 디도장군이 11살의 나이차임에도 불구하고 만난 것을 봤을 때 부럽나? 더 나아가 그렇게 이쁘면서도 드루실라의 미모를 부러워 했다고 한다. 드루실라와 버니게의 만남은 계속 지속되었으나 로마의 반대로 황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아그립바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들의 편력은 정말 판타스틱하다. 이런 배경으로 화려한 청문회장에 나타난 아그립바와 버니게. 교양과 화려한 치장으로 나타났지만 이런 배경들을 드러냈어야 한다. 우리의 깊은 죄성과 열등감이 자신의 외적인 것을 끊임없이 자랑하게 한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아야 성령의 위엄이 주어지는데, 버니게는 자신의 자리를 몰랐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죄인의 자리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죄인임을 아는 자리. 그 때 성령의 위엄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위엄이 우리를 이끈다.
접견 장소는 영어로 듣는 장소라는 뜻이다. 우리에게 듣는 장소는 어디인가? 바로 목장이다. 목장에서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못했던 화려한 편력을 들어냈다면 성령의 위엄이 동일하게 임했을 것이다. 그런데 목장에서 나눌 때 아니 왜 저런 이야기를 해? 교양있게 잘 된 이야기를 하면 바로 그 사람이 헤롯이고 버니게이다.
<적용질문>
세상의 위엄이 허상이라는데 몇 퍼센트 동의합니까?
꿈에서라도 한번 누리고 싶은 판타지는 무엇입니까?
나의 갖추어진 모습 속에 감추고 싶은 모습은 무엇입니까?
내가 끝까지 지켜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2. 한 영혼을 살필 때 위엄이 주어집니다.(24절~26절)
큰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접견장소인 목장에 나와있다. 이 때 베스도 목자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이 사람은 유대무리가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잘 살펴봤는데 죽일 죄가 없었다. 황제에게 보내야 하는데 뭐가 문제인지 몰라서 당신들을 불렀다. 이 거를 짧게 요약하면 나는 이 과정을 처리하는데 문제가 없었고 잘했다. 살펴보면 바울은 죄가 없는데 그가 문제이다.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를 해서 복잡하게 되었다. 베스도는 이미 확실한 실상을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핑계를 댄다. 자기 위엄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 바울을 이용할 뿐인데 이것마저 자신이 황제에게 더 정확한 보고를 하는 것처럼 연출을 하고 있다.
성경이 인간론이다. 베스도는 정직한 관리이다. 그러나 베스도에게 위엄이 있다고는 못한다. 자신이 책임지려는 태도, 나는 잘못없다는 태도는 어떤 존경도 위엄도 이끌어낼 수 없다. 사회에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맹점은 나는 죄가 없다이다. 우리의 선함은 우리를 지옥으로 이끌기에도 충분하다. 즉, 착한 게 악한거다. 베스도는 바울을 풀어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음에도 듣는 자리에서 나는 신임 총독인데다가 유대인 원고들이 너무 유력하기에.. 이런 모습은 빌라도와 비슷하다. 예수님을 넘길 때 손을 씻을 때 너희가 원해서 그런거니 너희가 책임져라의 태도. 우리가 날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2천년 동안 레코드처럼 빌라도를 외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때 책임질 자리가 로마 총독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성령의 위엄은 나에게 맡겨질 책임을 지려고 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 책임지지 않는 모습에 하나님께서도 나도 너와 상관없다 나도 너를 책임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목자에게 위엄을 주어진 것은 정말 죽어가는 한 영혼, 한 가정을 살리려고 할 때 성령의 위엄이 주어지는 거다. 죄가 없다는 목자는 아주 곤란하다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큰 죄를 물으신다. 목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러니 이혼했지, 난 처방 다했으니 알아서해. 너가 책임져. 그게 맞는 얘기여도, 엇나가더라도 고통이 있더라도 '네 문제가 나의 문제고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다.' 이럴 때 성령의 위엄이 우리를 뒤엎어 하나님께서 위엄을 주실 것을 믿는다. 상대의 구원을 살필 때, 위엄을 허락해 주신다. 나에게 허락한 가족의 아픔을 책임지려고 결단하고 적용하려고 할 때, 아파하는 너를 살필 때 위엄이 주어진다. 약속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위엄이 내 앞에가면 모든 원수를 물리쳐주신다.
<적용질문>
나는 문제 없어, 니가 문제야 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죽어도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아내입니까? 남편입니까? 부모입니까? 자녀입니까?
내게 주신 은혜는 망각하며 나만 이 가정을 책임진다고 망각하며 억울해 빌라도 베스도처럼 손을 씻고 있지 않습니까?
3. 무리한 일을 분별할 때 위엄이 주어집니다.(27절)
그 누가 와도 바울의 죄목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아이러니하게 바울은 어딜가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자신이 죄수임을 인정하며 가는 바울, 이런 사람들은 무리한 일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이 왔을 때 옳고그름만을 따지면 무리한 일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죄목만 찾다가 싸움이 나는 거다. 죄목이 없지만 내가 죄수임을 아는 것이 이것이 성도의 위엄이다. 우리가 오픈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이 죄를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이다. 그 죄를 온전히 이기지 못했더라도 그 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 고난만큼 죽었기 때문에 고백할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는 것이고 치열하게 싸우면서 갈 수 있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경계를 넘는 것이다. 그럴 때 오늘 주어주신 말씀으로 다시 경계를 끌어와야한다. 마땅히 죄인임을 온전히 인정하고 동시에 독생자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용서함 받는 것을 인정하는 것. 나는 죄인이지만 죄목이 없는 죄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간과해주셨기 때문에.
베스도는 도대체 왜 바울이 갇혀있는지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거다. 왜 이런 남편과 살고 있고 왜 이런 적용을 하고 왜 오픈을 하고 왜 나를 힘들게 하는 저 사람을 끝까지 돌보는지 구원과 십자가를 모르면 이 모든 일들을 무리한 일들이라고 말하는 거다. 이성과 합리의 토대 위에 살아온 베스도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원에 초점을 두는 것. 합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정말 객관적으로 욕심이 없는 목장에 검증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구원의 공동체니.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리한 일이 합리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분별할 수가 없다. 이 일이 무리한 일인지 아닌지 묻을 때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것이다. 세상은 죄목만 주목한다. 우리는 죄목이 아니라 옳고 그름이 아니라 내가 죄수임을 알고 갈 때 이 사건에 내가 죄목이 없더라도 내가 죄수임을 알고 갈 때 구원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100% 죄인임일 때가 가장 존엄하다고 마틴 루터 킹을 말했다. 이 존엄이 성령의 위엄 아니겠나? 루터 킹이 담배도 피고 여자들하고 놀아났지만 하나님 나라를 무너지게 했는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다. 자기 죄를 보는 사람은 날마다 날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간다. 이게 바로 성령의 위엄이 임하는 거다. 성령의 상소를 할 때 인내로 통과를 해야하는데 이 때 필요한 것이 위엄이 필요하다.
<적용질문>
지금 묻지 않고 무리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주변에서 모두 무리한 일이라 하는데 이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일은 무엇인가요?
죄목이 없다고 난 죄인이 아니라 외치고 있지는 않나요?
김준 목장 보고서
일시: 2022.08.21
장소: 카페 두레브
참석: 김준, 고영광, 윤석준, 이재찬
나눔 및 목장소식:
- 주일설교 말씀의 적용질문 중심으로 나누었고,적용질문을 통해 한주간 일상에서적용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 이재찬 형제가 9월 19일부터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 예정입니다.
기도제목:
김준 목자-말씀으로 인도받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고영광 부목자-어머니 항암치료가 화요일날 있는데 PCR 검사결과가 음성이여서 차질없이 잘 받으시길
이재찬-평생직장이 없는 시대에 주님께서 나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은혜 내려주시기를
*고영광 부목자 어머님의 코로나 검사가 음성으로 나와서 화요일(23일) 항암치료를 받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