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4 성령의 상소
사도행전 25:10-22
내일은 77주년 광복절입니다. 뼈 저리게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세대로써 나라가 없으면 예배도 못 드린다는 것을 수 없이 얘기했지만 다음 세대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안타깝습니다. 저희 부모님들도 북한에서의 디아스포라로 남한 땅에 오셔서 결국은 고향 땅에 못 돌아가시고 소천하셨습니다. 미국에 디아스포라 동포들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천국의 디아스포라로써 고향에서 만나자고 미국에 가서 이번에 성령의 상소를 했습니다. 성령의 호의로 워싱턴 크리스찬 커뮤니티교회와 또 뉴저지 초대교회, 또 워싱턴 중앙장로교회, 샬롯 제일장로교회, 랄리 한인 장로교회, 빛의 교회, 얼바인 베델교회 성도 여러분과 선교사대회 선교사님들 목회자 세미나로 모이신 목사님과 사역자 여러분의 사랑과 열정과 환대를 생각하며 안부를 전합니다. 또한 약속했다가 못 간 펠로우십과 베다니와 디사이플교회 성도 여러분들에게도 안부를 전합니다. 정말 성령의 호의 말씀대로 코로나로 인해 잠시 거절의 격리도 당하면서 말씀대로 되어지니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울 뿐입니다. 우리들 역시 언젠가는 그 심판이 구원일지 영원한 사망일지 모르지만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지방 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이렇게 세 번까지 재판을 받을 수 있는데 거기에서 계속 상급심에 요청을 하는 항소, 상고, 항고 재항고를 모두 통 틀어서 상소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아주 축복입니다. 왜죠? 아직 심판이 확정되지 않았고 돌이키라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상소할 수 있는 기회가 그래도 있는 거예요. 이 땅에서 심판 받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수많은 심판을 통해 회개로 돌이켜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심판이 오기 전에 우리가 성령의 상소를 해야 합니다. 11절에서 26절까지 상소라는 말이 네 번 나오는데요. 그래서 오늘 성령의 상소에 대해서 함께 듣겠습니다.
1. 인내의 때를 채워야 합니다. (10-11절)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 자, 3차 전도여행 마지막에 바울은 아시아 각 교회에서 부조를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드리려고 도착을 했어요. 열심히 선교하고 헌금도 얼마나 지혜롭게 가져왔는데 결론이 감옥입니다. 바울을 이렇게까지 죽이려고 할 줄 몰랐어요. 바울이 무슨 욕심으로 이 선교를 합니까? 주님 만나서 70여 곳 되는 곳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유대인들, 지도자들은 이런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지금 집요하게 고발을 하고 있어요.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오히려 장로들의 조언에 순종해서 결례를 행했죠. 그래서 결례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소동이 나서 체포가 됐습니다. 이것이 21장의 내용이에요. 지금 25장이거든요. 그런데 여전히 감금된 피고
예요. 그동안 21장부터 25장까지 유대인들에게 잡히고,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고, 로마군에게 결박되어 영내에 감금되고, 천부장에게 심문을 받고, 벨릭스에게, 이제 또 베스도 총독에게 조사를 받는 이 모든 고난을 바울은 처음부터 지난 2년 동안 오늘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다고 해요. 뭐, 당연히 일단 로마 시민권자기 때문에 이 땅에서 최고의 심판관인 로마 황제에게 심판 받을 자격이 있죠.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계속 하나님 응답대로 가는데 그게 가이사의 재판 자리에 섰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재판 자리에 섰다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이 믿음이에요. 그러나 바울은 그동안 쓸 수 있었던 상소권을 왜 이 상황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사용하는 것일까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유대인에게 오해 받고, 벨릭스의 욕심에 이용당하고. 이런 모든 상황들을 바울은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유대 땅을 떠날 수 있는 로마 시민의 당연한 권리가 있지만 그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새로 부임한 이 성실한 베스도가 도와줄 줄 알았더니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노골적으로 유리하게 처리하려 해요. 진짜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자기 편들은 다 저 밖에 있어요. 지금 혼자서 이 사건을 지금 감당하고 있어요. 바울이 드디어 로마 시민의 상소권을 사용합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그 날, 그 시간, 그 밤이 왔어요. 이 상소권이 얼마나 대단한지 바울이 이렇게 한마디 하자마자 총독 베스도는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왜죠? 로마 시민권자죠. 그렇지만 로마 시민권자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내의 때를 채운 거예요. 권한은 쓰는 것보다 안 쓰는 게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권한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을 때 더 높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 한 번 쓰는 것을 얼마나 신중하게 생각했는지, 그 권을 쓰기 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리고 인내했는지 우리는 이미 빌립보 감옥에서도 충분히 봤어요. 빌립보 감옥에서도 붙잡히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그 고난을 다 견뎌낼 때까지 인내했습니다. 인내의 때를 다 채운 뒤에 비로소 자기가 로마 시민인 것을 밝혔죠. 그마저도 자기 안위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었죠. 빌립보 교회의 보호를 위해서 빌립보의 형제 자매들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떠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썼습니다. 진작 쓸 수 있는 권리를 쓰지 않고 참다가 때가 차매 쓰니까 이 상소가 빛이 납니다. 여러분들의 상소가 여러분들의 기도가 빛이 나는 상소와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내도 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기도만 한다고 들어주시는 게 아니예요. 이렇게 참으니까 그 기도 응답이 되는 것이죠. 적용해 보세요.
[적용] 구원을 위해 쓰는 권과 쓰지 않는 권은 무엇입니까? 할 수만 있다면 상소해서라도 당장 해결하고 싶은 억울한 일은 무엇입니까? 구원을 위해 얼마나 인내하고 있습니까? 상대방을 인내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2. 부르짖어야 합니다. (12절)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 이 상소하다는 헬라어는 에피칼레오인데 이 단어의 1차적 뜻은 이름을 부르다예요. 그런데 이 단어가 동일하게 쓰인 곳이 사도행전 2장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부르는 자. 22장 16절에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그러니까 이 상소하다는 간절히 부르짖는 것, 구원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부르짖는 것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상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어줄 수 없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이 온 것은 부르짖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능히 죄에서 구원할 만왕의 왕이신 내 아버지께 부르짖는 것이죠. 그런데 묶이지 않았다면, 나를 감옥에서 내어줘서 자유롭게 다녔더라면 결코 부르짖지 않죠. 큰 세력들이 나를 둘러싸고 여전히 갇혀 있는 내어줄 수 없는 환경이기에 우리는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나의 목소리를 간절히 듣기 원하십니다. 작은 시련 속에서 늘 하나님을 부르짖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큰 시련이 닥쳐올 때도 절대로 부르지 못해 찾지 못합니다.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사람을 찾고, 방법을 찾고 나를 내어줄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 아버지를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혼자 부르는 것이 안되면 이렇게 예배의 현장으로 나오셔요. 두 손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상급기관인 내 아버지를 불러야 합니다. 우리는 부를 힘도 없고 상황이 기가 막혀서 멍하니 넋이 나간 환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미약한 음성이나마 '주여. 주여. 주여.' 불러야 합니다. 하루 종일 제가 '주여.' 부르고 다니는 것 같아요. 뭐 하나에도 '주여. 주여, 아버지. 주여, 아버지.' 절로 나와요. 이게 성령의 상소입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서 성령의 상소가 아니고. 이런 마음으로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를 했습니다. 자기 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제 성령의 상소니까 이타적인 거 아니예요? 이렇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로마 시민인 바울의 상소에 베스도도 바로 응답했자나요? 그러면 천국 시민권자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수가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바울이 2년 동안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풀려나고, 예루살렘 교회의 환대를 받고, 능력이 생기고 힘이 생겨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을 하죠. 어느 누가 이렇게 바울이 2년 동안 갇혀 있고, 2년이 지나도 여전히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뜻을 접지 않고, 이 힘과 권세에 둘러싸여가지고 바울을 죽이려는 이 상황을 누가 응답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하지만 이 상황이 바울에게는 가장 안전한 상황이고, 바울을 용서하심이고, 은혜임을, 이 카리스임을, 가장 최고의 응답임을 오늘 이제 보게 되는 거죠. 왜, 왜 입니까? 지금 2년 동안 그 어느 때에 석방이 되었으면 그 자리에서 죽는 거예요. 자지도, 졸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딱 포진해 있어요. 나가면 죽는 거예요. 그러나 이렇게 끝까지 성령의 상소로 하나님의 응답을 얻게 되면, 이제 로마, 로마로 가는 게 목적이자나요. 비전이자나요. 거기까지 2240km를 그 누구도 같이 호송할 수가 없어요. 로마 군대가 동원이 돼서 황제에게 가는 그 길까지 전혀 안전하게 그렇게 가게 하시는 것이 복음 때문에, 복음 때문에 응답이 돼야 되는 거지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안위와 안녕과 이 복락을 위해서 기도하니까 맨날 응답이 없다고 이래요. 내가 날마다 큐티하고 그냥 기도하고 기다리면 그거 자체가 응답인 줄 믿습니다. 내가 오늘 힘들다고 다 성경 내팽겨치고 '하나님이 없나봐.' 그거는 불순종하는 것이고. 오늘도 눈을 뜨고, 큐티를 하고, 기다리면 그거 자체가 날마다 하루 하루가 하나님의 응답인 줄 믿습니다. 적용해 보세요.
[적용] 문제가 생기면 나는 누구를 가장 먼저 찾습니까? 주님께서 나의 상소를 들으신다고 믿어지십니까? 최고의 응답을 주심을 믿습니까?
3.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할 때 기회를 주십니다. (13-19절)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 이제 베스도에게 있어서 바울은 벨릭스 전 총독이 남기고 간 잔류물 중 하나였고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베스도는 바울이 상급 법정에, 이제 이렇게 가이사에게 재판을 청했기 때문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어요. 그런데 유대인과 바울 사이에 있었던 고소와 변론을 보니까 가이사에게 상소할 재료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바울이 죄가 없자나요. 그렇죠? 그런데 그렇다고 또 유대인들을 무시할 수가 없자나요. 이게 아주 난제입니다. 바로 그때 아그립바 왕과 여동생 버니게 짠하고 나타난 거예요. 바로 이 아그립바 왕은 헤롯 대왕의 손자고 야고보를 칼로 죽인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인 이 아그립바 2세인데 거기에 누이 동생 버니게는 또 문제 많은 지금 아주 이런 당사자였어요. 그러나 그런 거 다 떠나서 아그립바 왕은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 신실한 유대교 신자예요. 그 유대교와 관련된 아주 상당한 지식을 가졌어요. 그러다보니까 유대인의 종교 문제에 아주 전문가라는 평판이 나 있었습니다. 바울의 문제는 로마의 실정법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의 종교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거기에 최고의 의논 상대가 지금 딱 찾아온 거예요. 그리고 그가 로마 총독보다 더 윗 직급 분봉왕이기 때문에 책임을 전가할 수가 있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베스도가 일 처리에 있어서만큼은 아주 대단히 지혜롭고 노련했음을 발견하는데요. 이렇게 내 옆에 의논 상대가 참 있다는 것은 복이에요. 그런데 의논도 욕심이 앞서면 친구하고도 의논을 안 해요.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서 이런 걸 물어보고 의논할 수 있는 그런 상대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날 수 있고. 이런 상대가 있다는 거는 우리가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최고의 공동체라는 거죠. 그러나 목자도 욕심이 생기면 얘기를 안 해요. 안 나눠요. 꼭 망하고 나서 나눠요. 그러니까 작은 것도 이렇게 나누면 그 나눈다는 사실이 겸손하자나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게 응답이에요. 내가 나누는 거 자체가 응답이에요. 벌써 거기에 겸손함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매 주일 목장에서 나누는 거는, 이거는 그래서 우리들교회 교인들이 환난 당하고 빚지고 원통하게 왔는데 결론적으로는 다 회복이 되는 거예요. 영이 잘 됨 같이 범사에 강건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동족에게 고소당한 피고 바울에 대해서 베스도가 설명을 하는 거예요. 원고가 유대인들이죠? 피고가 바울이에요.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 16절부터입니다. 이걸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거예요.
요지는 '자신은 로마 총독으로써 법대로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했다.'고 생색을 냅니다. '그런데 바울의 악행 혐의는 증명할 수 없었고, 그러고보니까 바울이 계속 줄창 주장하는 일은 예수라 하는 이의 부활입디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종교적 논쟁에 불과하더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나 베스도나 아는 것에서는 별 차이가 없어요. '나 다 알어. 큐티, 나 옛날부터 해봤지. 그거 모르는 사람 어디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 바울에게는 영혼의 떨림이 있고 감격이 있어요. 그런데 베스도는 너무나 드라이한 목소리로 '예수의 부활을 전합디다.' 이렇게 이 둘 사이에는 굉장히 베스도가 엘리트지만 아주 차이가 있는 거예요. 맞습니다. 여러분 다 알아요. 성경도 알아, 예수도 알아, 큐티도 알아. 그런데 하나도 감격과 떨림이 없어요. 말할 때마다 감격과 떨림이 있어야 되는데. 그러니까 바울이 유대교와 충돌을 일으키게 된 것은 다른데 있지가 않아요. '부활의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그건 사실이자나요. 그런데 바울은 떨림이 있고 그들은 떨림이 없어. 이것 때문에 충돌을 계속 해요. 바울이 틀린 말을 하는 게 아닌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의 줄로 기독교,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 이것 때문에 충돌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면 바울이 아니라 그러겠습니까? 제가 목청이 큰 사람이 아니죠. 그런데 바로 이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사를 줄창 외쳐요.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직속 계보인 그 유다, 맨날 제가 주장하자나요. 이 구속사를 외쳐요. 또 많은 사람이 살아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제가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사를 외치는 그 자리에 여자 목사는 낄 자리가 없죠. 그런데 여자 목사라는 것 때문에 십자가와 부활 복음이 훼방 받을 때가 많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런 사도행전을 읽으면 바울이 정말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전하는 복음을 제가 아니라고 합니까? 바울에 관한 이런 보고가 벌써 몇 번째 인가요? 바울 자신도 백성 앞에서, 공회에서, 벨릭스에게, 또 베스도에게 여러 차례 이 변명, 설명을 했어요.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 내용도 이미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나왔습니다.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벨릭스 총독에게 보고한 이 편지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시간을 다 인내하면서 통과했어요. 그래서 이제 때가 되어 상소권을 써서 드디어 끝나나 했더니 또 반복되는, 아그립바 앞에서 또 얘기를 해야 되는 거예요. 정말 지겨운 괴롭힘이에요. 그러니까 1, 2, 3차 전도 여행보다 이 변론하는 게 더 길자나요. 지금. 참 이단들도 판을 치고 이러다보니까 이 복음을 이렇게 논증한다는 게, 이게 그냥 우리들의, 성도들의 걸어가는 길인가봐요. 그런데 아무리 지겨운 괴롭힘이더라도 내 힘을 빼고, 열심을 멈추고, 판단을 괄호 치고,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통과하면 여호와께서, 이거 어디 나오는 얘기죠? 출애굽기 14장. 가만히 있어 구원을 보라고 그러자나요. 그러면 변명이 필요할 때는 변명할 기회를 주시고, 이렇게 상소가 필요할 때는 상소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기회조차 우리가 만들려고 해서 문제인 것 같아요. 지금 나를 덮고 있는 지긋지긋한 사람이나 상황이나 사건이나,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이 지겹게 반복되는 고난에서 단 번에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어디 있을까? 어떻게 그런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 늘 두리번 두리번거리면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환경을 꿈꾸는 거예요.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이런 불평과 원망이 우리 주제가가 된 듯한 그런 지옥을 다 살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기회는 만드는 것이 아니예요. 성경에 기회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와요. 그런데 기회를 얻으려고 찾는 이 주체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누가 기회를 찾는가? 악인이 기회를 찾아요. 시편 37편.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아요. 마태복음 26장. 또 죄가 기회를 타서, 즉 잡아서 탐심을 이루고 우리를 속이고 죽인다고 로마서 7장에 되어 있죠. 그런데 거룩할 성, 성도가 기회를 탄 다거나, 기회를 찾거나 노린다는 말은 성경에 없어요. 성도는 그저 기회 있는 대로 착한 일을 할 뿐이라고 그랬어요. 갈라디아서.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주님 보내신 곳에 간다고 하죠. 그러므로 성도의 그 때나 기회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우리는 이타적으로 회개할 기회, 착한 일을 할 기회. 이런 거를 찾는다고 하는 거지, 악인의 기회 찾는 거,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는 거. 그런데 예수 없는 사람들은 다 그 기회를 찾으려고 그렇게 아주 그냥 전심전력을 다해서 기회를 잡아야 된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우리는 완전히 그런 기회와 이 기회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회가 올 때 잡는 것이 우리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지겨운 괴롭힘에서 벗어날 기회를 내가 얻겠다는 헛된 욕심을 버리는 것이 가만히 서서 주가 행하시는 구원을 보는 비결입니다. 이 지겨운 괴롭힘은 벗어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예요. 만일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괴롭혔다, 풀어줬다. 주님이 새디스트예요? 아니죠. 절대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지겨운 것은 아직 내 죄가 내 고난보다 크다는 구속사가 깨달아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보는 사람은 저의 이 구속사 성경이 그냥 박사 할아버지라도 이게 깨달아지지 않아요. '성경이 다 자기 이래. 성경이 하나님의 얘기지 왜 자기 얘기야?' 이러는. 그런데 그거가 너무 싫어서 이렇게 죽이려고 하자나요. 바울을.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지금까지 왔나 모르겠어요. 정말. 그러니까 이게 이해가 안 되면 이렇게 이런 일이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지겨운 괴롭힘이 구속사가 깨달아지면 내 인생의 결론임이 인정이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 그 지겨운 괴롭힘 속에서 내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얼마나 지겨운 죄인인가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걸 피해야 되는 게 아니고 그 지겨운 괴롭힘 속에서 내 자신을 아는 거예요. 제가 이걸 경험했자나요. 우리 남편만 지겹다고 하다가 제가 그냥 제 지겨움을 보게 됐어요. 이게 입으로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바울이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하면서도 그러므로 자기 무죄에 대한 변명보다 더 강조해서 전한 것이 부활하신 주님이자나요. 바로 자신이 이렇게 지겨운 괴롭힘을 당해도 할 말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사과하는 마음으로 변명을 하면서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부활하신 주님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이 확실한 자기 인식과 하나님 인식이 있으면 이 지겨운 괴롭힘도 통과할 수 있어요. 우리 인생이 사실 지겨운 괴롭힘이에요. 외적이든, 내적이든 각자 지겨운 문제들을 지고 사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도 몰라요. 하나님과 자기를 모르면 문제만 보여요. 문제만. 그게 애굽의 바로의 관점이자나요. 그러니까 잘 살 때는 그러다가 재앙이 오면 모든 것이 재앙이 되는 거예요. 사건만 오면 이 문제 보이니까 이 열가지가 다 재앙이이에요. 이런 사람은 그 마지막 열 가지 재앙, 그걸 치지 않으면 절대로 그거 자기를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러나 이제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아니까 내 고난도 해석이 되고 이 시련, 괴롭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온 게 아니라 나를 구원시키려고, 나를 거룩하게 빚어 정금같이 빛나게 하시려는 주님의 세팅을 아니까 이스라엘의 고센 땅은 재앙이 비껴가자나요. 그럼 이스라엘이 잘났어요? 애굽이 잘났지. 엘리트들은 다 애굽에 있는데. 이 사람들은 너무 찌질하자나요. 그런데 여기만 재앙이 비껴가자나요. 왜냐? 하나님이 택했으니까.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아니까. 우리도 기가 막힌 고난을 말씀대로 적용하며 통과하니 우리의 모든 기도가 성령의 상소가 되어서 놀라운 회복과 구원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런 간증을 우리가 굉장히 어렵지 않게 들을 수가 있어요.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성령의 상소를 들어주시는 목적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이 편안한 상태에 다 취해서 멀리 멀리 떠내려 가는 일도 수 없이 봅니다. 너무 안타까워요. 고난이 오면 주님께 왔다가 해결되면 떠나는. 그러니까 고난 피하는 게 목적이 되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를 몰라요. 기복이라는 게 왜 무서운가 하면 하나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데 날마다 빌어요. 그런데 이렇게 해결되면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되는데요. 그래서 내가 젖과 꿀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을 알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동안에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그렇게 빌다가 딱 그게 오니가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떠나가는 거죠. 흘러가는. 목적이 문제 해결에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이렇게 말씀으로 주님을 알고 나를 알아 하루 하루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할 때 때가 되면 주님이 필요한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남편이 갔는데 그떄 인내의 때가 차서 그때부터 저를 주님이 쓰시자나요. 이 사명으로 쓰시자나요. 그래서 저쪽으로 안 가고 하나님 쪽으로 갔는데 하나님을 모르고 이 사건이 왔으면 저도 딴 사람 같이 흘러 떠내려 갔을 거예요. 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서 주님께 상소한 모든 신음을 주님이 낱낱이 기억하시고 결국 기회를 주세요. 저에게 기회를 주셨죠.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셨죠. 그래서 우리가 이 기회가 오기 전에 할 일이 상소예요. 성령의 상소. 자 적용해 보세요.
[적용] 괴롭도록 지겨운 사람, 지겨운 상황, 지겨운 사건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벗어날 기회를 얻으려고 누구를 또는 무엇을 기웃거리고 있나요?
4. 한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20-22절)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 바울에 관한 베스도의 보고를 다 들은 아그립바 왕은 '나도 이 사람 바울의 말을 듣고 싶은데?' 이렇게 됐어요. 겉으로는 아그립바, 버니게 남매는 다 가졌어요. 로마 황실의 후원을 받고 있어요. 이 로마 총독 베스도도 그 호의를 받으려고 애를 써요. 그러나 그들의 삶을 보면 아버지가 가장 최고의 정점에서 충이 먹어서 비참하게 죽었죠. 또 로마 황제 아래 교육을 받아도 권력의 냉혹한 알고 자기가 분봉왕이지만 모든 것은 황제의 뜻대로 해야 하지 하나도 실권이 없어요. 그리고 또 버니게도 여러 남편을 거쳐서 지금 같이 있어요. 왕위로도 재물로도 관계로도 채울 수 없는 인생의 실존적인 허무함과 죄악과 음란의 굴레에 잡혀 있는 공허함이 있으니까 이들이 바울에게 말을 듣는 거예요. 어떤 말요? 어떤 말 가장 듣고 싶었을까요? 오늘 강조하는 거 있자나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아있다는 주장. '그 예수의 부활을 나도 듣고 싶은데?' 그래서 인생의 허무함이 허무함인지도 모르고 목적 없이 살아가는 한 인생 아그립바 버니게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를 한 후에도 또 더 며칠을 구류된 채 기다려야 했던 것이에요. 바울의 상소가 성령의 상소이기 때문에 그 목적이 억울함을 풀고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상소의 목적이 구원이기 때문에 성령의 말씀대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또 그 자리에 며칠을 묶여서 또 기다려야 했어요. 말씀이 필요한 그 한 사람 아그립바와 버니게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죠. 나아가 상소대로 로마에 가는 것 또한 로마에서 말씀을 전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에요. 우리가 혐의를 벗고, 억울함을 풀고, 복수하는 게 기도 목적이 아니라 항상 전도와 전도를 통한 구원이 우리의 모든 기도와 상소의 목적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큐티의 꽃은 적용이고 결론은 영혼 구원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하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이거나 구원이 최고의 가치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적용해 보세요.
[적용] 인생이 허무할 때가 있습니까? 허무함을 무엇으로 채우고 싶습니까? 내 인생 최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몇 번째 목적입니까? 말씀 전할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령의 상소는 인내의 때를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부르짖어야 해요. '주여. 주여.'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할 때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기회를 엿보는 게 아니예요. 한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목장 모임 참석
미혜, 연수, 민희, 해정, 예선
기도제목
남동생이 최종합격하도록 인도해 주세요.
여동생이 교회 안, 말씀 안, 기도 안으로 들어와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도록
환청이 사라지고 온전한 회복과 쉼이 있기를
엄마 피부병 때문에 아직까지도 고생하시는 데 속히 회복시켜 주시고
아빠 새 직장에서 일하고자 이직을 계획하고 있는데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세요.
주가 쓰시겠다 하라 주가 책임 지시는 그런 인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미혜
지겹도록 괴롭히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임을 알고 현재의 상황에 원망과 불평이 아닌 예수님께 이런 나를 용납해 주시기를 매순간 상소하며 기도하기를
회사의 거처를 주님께서 인도해주시고 임대료를 지불하는데 부족함 없이 채워 주시기를
부모님 건강과 아빠 영혼 구원
우리 목장 식구들의 신음소리와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응답해주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잘 기다릴 수 있도록
예선
사건이 찾아오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찾는 것이 먼저인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목장에서 작은 것도 잘 나누고 갈 수 있는 겸손함 주시도록
인생은 원래 지겨운 괴롭힘임을 알고 허락하신 자리를 잘 지킬 수 있도록
여동생이 교회에서 관계 문제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때를 정하고 판단하며 자기 생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하심 따라서 우리들교회로 넘어올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