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8.14. '성령의 상소' (행 25:10-22) 김양재 담임목사님
내일은 77주년 광복절이다. 뼈저리게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세대로써 나라가 없으면 예배도 못드린다는 것을 수없이 이야기했지만 여러분들 세대는 이 말이 무슨말인지 몰라서 안타깝다. 저희 부모님들도 북한에서 디아스포라로 남한땅에 오셔서 결국 갔다오라는 말 한번 하고 고향에 못 돌아가시고 소천하셨다.
미국의 디아스포라 동포들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천국의 디아스포라로써 고향에서 만나자고, 미국에 가서 성령의 상소를 했다. 성령의 호의로 워싱턴 크리스천 커뮤니티 교회, 뉴저지 초대교회, 워싱턴 중앙장로교회, 샬롯 제일장로교회, 랄리 한인장로교회, 빛의 교회, 얼바인 벧엘교회 성도 여러분과 선교사 대회의 선교사님들, 목세로 모이신 목사님과 사역자 열정과 환대를 생각하며 안부를 전한다. 또한 약속했다가 못간 펠로우쉽과 베다니와 디사이플 교회 성도여러분께도 안부를 전한다. 정말 성령의 호의 말씀대로 코로나로 인한 잠시 거절의 격리도 당하면서 말씀대로 되니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우리들 역시 언젠가는 그 심판이 구원일지 영원한 사망일지 모르지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세번까지 재판을 받을 수 있다. 거기서 계속 상급심에 요청하는 항소 상고 항고 재항고를 모두 통틀어 상소라고 부른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심판 받게 되는 것은 축복이다. 왜인가? 아직 심판이 확정되지 않았고 돌이키라는 심판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는 그래도 상소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 수많은 심판을 통해 회개로 돌이켜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심판이 오기 전에 우리가 성령의 상소를 해야 한다.
오늘 11-26절까지 상소라는 것이 네번 나온다. 오늘은 성령의 상소에 대해 함께 듣겠다.
성령의 상소
1. 인내의 때를 채워야 합니다.
10-11절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3차 전도여행 마지막에 바울은 아시아 각 교회의 부조를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드리려고 도착했다. 열심히 선교하고 모태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위험을 무릅쓰고 헌금 가져다 준 결론이 감옥이다. 바울을 이렇게까지 죽이려고 할 줄 몰랐다. 바울이 무슨 욕심이 있었겠는가? 주님 만나서 70여곳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런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집요하게 고발한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오히려 장로들의 조언에 순종하여 결례를 행했다. 그리고 결례를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소동이 나서 체포되었다.
이것이 21장의 내용이다. 그러나 지금 25장인데 여전히 피고로 감금되어 있다.
21-25장의 유대인들에게 잡히고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고 로마군에게 결박되어 영내에 감금되고 천부장에게 심문 받고 벨릭스와 베스도 총독에게 조사받고 있는 이 모든 고난을, 바울은 처음부터 지난 2년간 가이사랴의 재판자리 앞에 섰다고 한다. 우리도 계속 하나님의 응답대로 가지만 바울이 그것이 가이사랴의 재판자리 앞에 섰다고 하는 것 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재판자리에 섰다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감당하시기를 바란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이기에 이 땅에서 최고의 심판관인 로마 황제에게 심판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동안 쓸 수 있었던 상소권을 왜 이제서야 쓸까? 이리치고 저리 치이고 유대인들에게 오해받고 벨릭스의 욕심에 이용당한 모든 상황들을 인내하며 기다렸다. 이 지긋지긋한 유대땅을 떠날 수 있는 로마시민의 당연한 권리가 있었지만 그 고난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도와줄 것 같았던 새로 부임한 성실한 베스도가 노골적으로 유대 지도자들에게 유리한 처리방법을 내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하니 죽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 자기 편들은 저 밖에 있었다. 혼자서 이 사건을 감당하고 있다.
바울이 드디어 로마시민의 상소권을 사용한다. 더이상 지체할 수 없는 그 날, 그 시간, 그 밤이 왔다. 이 상소권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 말 한마디로 베스도가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 시민권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자라기 보다는 하나님 보시기에 인내의 때를 채운 것이다. 권한은 쓰는 것 보다 안쓰는 것이 더 어렵다. 그래서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을 때 더 높은 지혜가 필요하다. 어리석은 사람이 우리 아버지가 뭐 한다고 한다.
바울이 로마시민권 쓰는 것을 얼마나 신중하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그 권을 쓰기 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리고 인내했는지 우리는 이미 빌립보 감옥에서도 충분히 봤다. 빌립보 감옥에서 붙잡히고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그 고난을 다 겪을 때 까지 인내했다. 인내의 때를 다 채운 후에 비로소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혔다. 그 마저도 자기 안위나 복수가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보호를 위해 빌립보의 형제자매들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떠나면서 자기가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혔다. 진작 쓸 수 있는 권리를 쓰지 않고 참다가 쓰니 그 상소가 빛이 난다. 여러분의 상소와 기도가 빛이나는 상소와 기도가 되기를 바란다. 인내도 하지 않고 날마다 기도만 한다고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다. 참으니 그 기도응답이 된다.
적용) 구원을 위해 쓰는 권과 쓰지 않는 권은 무엇입니까? 할 수만 있다면 상소해서라도 당장 해결하고 싶은 억울한 일은 무엇입니까?
구원을 위해 얼마나 인내하고 있습니까? 도리어 상대방을 인내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의 상소 두번째
2. 부르짖어야 합니다.
12절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상소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피칼레오, 이름을 부르다 이다. 이 단어가 동일하게 쓰인 곳은 다음과 같다.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이것이 상소이다. 간절히 부르짖고 구원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부르짖는 것,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상소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어줄 수 없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온 것은 부르짖게 하기 위함이다. 나를 능히 죄에서 구원할 만왕의 왕이신 내 아버지께 부르짖는 것이다. 그런데 묶이지 않았다면 나를 감옥에서 내줘서 자유롭게 다녔더라면 결코 부르짖지 않는다. 큰 세력들이 나를 에워싸고 여전히 갇혀있는, 내어줄 수 없는 환경이기에 우리는 부르짖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의 목소리를 간절히 듣기 원하신다. 작은 시련 속에서 늘 하나님을 부르짖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큰 시련이 닥쳐올때도 절대 부르지 못하고 찾지 못한다. 무릎 꿇어야 하고 부르짖어야 한다. 사람 찾고 방법 찾고 나를 내어줄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여러분들이 혼자 부르는 것이 안되면 예배 현장으로 나오고 두 손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최고의 상급기관인 내아버지를 불러야 한다.
우리는 부를 힘도 없고 상황이 기가 막혀 멍하니 있는 분들이 많다. 넋 나간 환경가운데 있고 일어날 힘이 전혀 없다고 해도 미약한 음성이라도 주여를 불러야 한다. 주여가 절로 나오는 것, 이것이 성령의 상소이다. 하나님이 나를 내어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서 성령의 상소가 아니다.
이런 마음으로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를 했다. 자기가 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주여 했다. 성령의 상소이니 이타적이다. 이렇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 로마시민인 바울의 상소에도 베스도가 즉각적으로 응답했다. 그러니 천국 시민권자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지 않으시겠는가? 반드시 응답하신다.
그런데 그 응답은 우리의 생각과 기대와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우리는 바울이 2년간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풀려나고 예루살렘교회의 환대를 받고, 능력이 생기고 힘이 생겨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 생각한다. 어느 누가 바울이 2년간 갇혀 있고, 2년이 지나도 여전히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뜻을 접지 않고, 이 힘과 권세에 둘러싸여 바울을 죽이려는 이 상황을 누가 응답이라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이 상황이 바울에게는 가장 안전한 상황이고 바울을 용서하심이고 은혜임을, 카리스임을, 가장 최고의 응답임을, 때가 되면 황제 앞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알게 된다.
2년동안 그 어느때에 석방되었으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자지도 졸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다. 나가면 죽는다. 그러나 끝까지 성령의 상소로 하루하루 상소하고 말씀보고 있고 잘 기다리면 그것이 응답인 줄 믿는다.
로마로 가게 되는 2240km는 그 누구도 호송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을 얻게 되면 로마 군대가 동원이 되어 황제로 가는 그 길까지 안전하게 가게 하신다. 그것이 복음 때문에 응답되어야 한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안위와 안녕과 복락을 위해 기도하니 매번 응답이 없다고 한다. 내가 날마다 큐티하고 기도하고 기다리면 그것 자체가 응답인 줄 믿는다. 내가 오늘 힘들다고 성경 내팽겨치고 하나님 없다고 하는 것은 불순종하는 것이다. 오늘도 눈뜨고 큐티하고 기다리면 그것 자체가 날마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응답인 줄 믿는다. 응답은 꼭 풀려나고 잘먹고 잘되는것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가장 나에게 좋은 방법으로 응답하신다.
적용) 문제가 생기면 나는 누구를 가장 먼저 찾습니까? 주님께서 나의 상소를 들으신다고 믿어지십니까? 최고의 응답을 주심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의 상소를 들어주신다. 큐티하고 기도할 때 그 믿음이 있어야 한다. 최고의 응답을 주신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응답을 다 정해두었기에 매일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성령의 상소
3.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할 때 기회를 주십니다.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베스도에게 있어 바울은 전임 총독인 벨릭스가 남기고 간 잔류물 중 하나였고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베스도는 바울이 상급 법정인 가이사에게 재판을 청했기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과 바울 사이에 있었던 고소와 변론을 보니 가이사에게 상소할 재료가 없었다. 바울이 죄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대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주 난제였다.
근데 바로 그때 아그립바 왕과 여동생 버니게가 나타났다. 아그립바 왕은 헤롯대왕의 손자이고 야고보를 칼로 죽인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인 아그립바 2세인데, 거기에 누이동생 버니게는 문제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것 다 떠나서 아그립바왕은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는 아주 골수 유대교 신자이다. 그리고 유대교와 관련한 상당한 실력을 가졌다. 그러다보니 유대인의 종교문제에 아주 전문가라는 평판이 나 있었다. 바울의 문제는 로마 실정법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의 종교에 관한 문제였기에 거기의 최고 의논상대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아그립바 1세는 분봉왕이기 때문에 로마총독의 의논 상대일 뿐 아니라 그에게 책임 전가할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베스도가 일처리에 있어서만큼은 대단히 지혜롭고 노련했음을 발견하다.
이렇게 내 옆의 의논상대가 있다는 것은 복이다. 그러나 베스도가 이것을 의논했기에 망정이지 의논하지 않았다면 이 기회를 날려버렸을 것이다. 우리가 목장에서도 어마어마한 의논상대이다. 그러나 욕심이 앞서면 의논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한다고 하면 다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 내놓는다.
우리가 목장에서 물어보고 의논할 상대를 일주일에 한번씩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것이다. 최고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목자도 욕심이 생기면 이야기를 안한다. 나누지 않는다. 꼭 망하고 나서 나눈다. 그러니 작은것도 나누면 그 나눈다는 사실이 겸손한 것이 되어 나누는 것 자체가 응답이 된다. 벌써 거기에 겸손함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 우리가 매 주일 우리가 나눈다. 그래서 우리들교회 교인들이 환란당하고 빚지고 원통하게 왔지만 결론적으로 다 회복되는 것이다. 영이 잘됨 같이 범사에 강건하기 때문이다.
동족에게 고소당한 피고 바울에 대해 베스도가 아그립바 왕에게 설명한다. 원고가 유대인이고 피고가 바울이다.
16-17절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바울을 달라고, 자기들이 처리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로마법이 아니라서 그렇게하지 않았다고 한다.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요지는 자신은 로마총독으로 법대로 공정하게 처리하려 했다고 생색을 낸다. 그런데 바울의 악행은 증명이 안되었다고, 그리고 바울이 주장하는 바는 예수라 하는 이의 부활이라고 한다. 즉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종교적 논쟁에 불과하다고 했다.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는 사도바울이나 베스도가 아는 것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 바울에게는 영혼의 떨림이 있고 감격이 있다. 그러나 베스도는 너무나 드라이한 목소리로 예수의 부활을 전한다고 한다. 베스도가 굉장히 엘리트이지만 이 둘사이에는 굉장히 차이가 있다.
다 안다. 성경도 알고 예수도 알고 큐티도 안다. 그러나 하나도 감격과 떨림이 없다. 말할 때 마다 감격과 떨림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바울이 유대교와 충돌을 일으키게 된 것은 다른데 있지 않다. 부활의 예수님의 믿어야 부활을 얻는다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떨림이 있고 그들은 떨림이 없다. 이것 때문에 계속 충돌한다. 바울이 틀린 말 하는 것이 아닌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줄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 이것 때문에 충돌이 계속 일어난다. 그러면 바울이 아니라 하겠는가?
제가 목청 큰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사를 줄창 외친다. 우리는 정말 예수그리스도의 직속 계보인 유다, 그리고 구속사를 외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살아나기도 한다.
그러나 부활과 십자가 부활의 구속사를 외치는 그 자리에 여자 목사는 낄 자리가 없다. 그러나 여자 목사라는 것 때문에 훼방받을 때가 많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읽으면 이해가 너무 잘 된다. 그러나 그걸 제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바울에 관한 이런 보고가 벌써 몇번째 인가? 바울 자신도 백성 앞에서 공회 앞에서 벨릭스에게 또 베스도에게 여러 차례 변명하고 설명도 했다. 유대지도자들의 고소 내용도 이미 여러차례 반복되었다.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벨릭스 총독에게 보고한 편지도 있다. 그런데 이런 시간을 다 인내하며 통과했다. 이제 때가 되어 상소권을 써서 드디어 끝나나 했더니 아그립바 앞에서 또 반복이 되었다. 인간적으로 정말 지겨운 괴롭힘이다. 1, 2, 3 차 전도여행보다 이 변론하는 것이 더 길다. 이단들도 판을 치다보니 복음을 논증한다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길인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지겨운 괴롭힘이라고 해도 내 힘을 빼고 열심을 멈추고 판단을 괄호치고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통과하면 여호와께서 가만히 있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신다. 그러면 변명 필요할 때는 변명할 기회를 주시고 상소가 필요할 때는 상소할 기회를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기회조차 우리가 만들려고 해서 문제인 것 같다. 내 열심이 앞서게 되면 기회를 우리가 만들려고 한다. 나를 덮고 있는 지긋지긋한 사람 상황 사건,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지겹게 반복되는 고난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어디있을까? 어떻게 그런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 늘 두리번거리며 새로운 사람 환경을 꿈꾼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하며 불평과 원망이 우리 주제가가 된 듯한 지옥을 산다. 지겨운 괴롭힘이면 날마다 탈출하는 꿈만 꾼다.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기회는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회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그러나 기회를 얻으려고 하는 주체는 한정되어 있다. 악인이 기회를 찾는다 (시 37편). 가롯 유다가 예수님 넘겨줄 기회를 찾는다 (마 26장), 죄가 기회를 타서 탐심을 이루고 우리를 속이고 죽인다 (롬 7장),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도가 기회를 탄다거나 기회를 찾거나 노린다는 말이 성경에 없다. 성도는 그저 기회 있는 대로 착한 일을 할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주님 보내신 곳에 간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때나 기회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주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우리는 이타적으로 회개할 기회, 착한일을 할 기회를 찾는다고 하지 악인의 기회 찾는 것,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 없는 사람들은 다 그 기회를 찾으려고 그렇게 전심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우리는 그런 기회와 이런 기회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이 주시는 기회가 올 때 잡는 것이 우리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당하고 있는 지겨운 괴롭힘에서 벗어날 기회를 내가 얻겠다는 헛된 욕심을 버리는 것이 가만히 서서 주가 행하시는 구원을 보는 비결이다. 이 지겨운 괴롭힘은 벗어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괴롭혔다 풀어줬다 하는 새디스트 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지겨운 것은 내 죄가 내 고난보다 크다는 구속사가 깨달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사람, 근본적으로 보는 사람은 저의 구속사 성경이 박사 할아버지라도 깨달아지지 않는다. 성경은 다 자기 이야기이다. 그런데 성경이 하나님의 이야기지 왜 자기 이야기지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이 너무 싫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한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지금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이해가 안되면 이런 일이 온다.
이 지겨운 괴롭힘이 구속사가 깨달아지면 내 인생의 결론임이 인정된다. 결국 그 지겨운 괴롭힘 속에서 내가 주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을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지겨운 괴롭힘 속에서 내 자신을 아는 것이다. 제가 이것을 경험했다. 우리 남편만 지겹다고 하다가 제가 제 지겨움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입으로 설명이 안된다.
바울이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하면서도 자기 무죄에 대한 변명보다 더 강조해서 전한 것이 부활하신 주님이다. 바울 자신이 지겨운 괴롭힘을 당해도 할말 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알았기에 언제 어디서나 사과하는 마음으로 변명하며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부활하신 주님만을 전할 수 있었다. 이 확실한 자기 인식과 하나님 인식이 있으면 지겨운 괴롭힘도 통과할 수 있다.
우리 인생이 사실 지겨운 괴롭힘이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각자 지겨운 문제들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자기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도 모른다. 하나님과 자기를 모르면 문제만 보인다. 그것이 애굽 바로의 관점이다. 그러니 사건이 오면 모두가 재앙이다. 문제만 보이니 10가지가 다 재앙이다. 이런 사람은 마지막 열가지 재앙을 치게 된다. 자기를 모르고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다.
그러나 고센땅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다 비켜간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아니까 내 고난도 해석되고 이 지겨운 괴롭힘이 나를 망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나를 거룩하게 빚어 정금같이 빛나게 하시려는 주님의 세팅인 것을 안다. 그러니 이스라엘 고센땅은 재앙이 비켜간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잘났는가? 애굽이 잘났다. 엘리트들은 다 애굽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찌질하다. 그런데 여기만 재앙이 비껴간다. 이 사람이 잘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래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택했으니까,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아서 그렇다.
우리도 기가 막힌 고난을 말씀대로 적용하며 통과하니 우리의 모든 기도가 성령의 상소가 되어 놀라운 회복과 구원을 경험한다. 우리가 그런 간증도 많이 한다.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성령의 상소를 들어주시는 분명한 목적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편한 상태에 다 취해서 멀리 떠내려가는 일도 수없이 본다. 너무 안타깝다. 고난이 오면 주님께 왔다가 해결되면 주님께 떠난다. 지금까지 열심히 상소한 것 같았는데 고난피하는 것이 목적이 되니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니 비나이다 비나이다 한다. 기복이 왜 무서우냐면 하나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데 날마다 빈다. 자기를 알고 상소해야 하는데 고난이 오면 주께 왔다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해결되면 떠난다.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된다. 그래서 내가 젖과 꿀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을 알기가 너무 힘들다. 그동안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 처럼 빌다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었기에 떠난다. 목적이 문제해결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개독교라고 욕먹는 이유가 너무 기복이라서 그렇다 열심히 믿는 것 같지만 그 열심이 하나님보다 앞서면 안되는데 그렇다. 말씀으로 주님을 알고 나를 알아 하루하루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할 때 때가 되면 주님이 필요한 기회를 주신다.
제가 남편이 갔는데 그때 인내의 때가 차서 그때부터 저를 주님께서 사명으로 쓰셨다. 그래서 다른 길로 안 가고 하나님쪽으로 갔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고 이 사건이 왔으면 저도 다른 사람들 같이 흘러 떠내려갔을 것이다.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서 주님께 상소한 모든 신음을 주님이 낱낱이 기억하시고 결국 기회를 주셨다.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셨다. 우리가 이 기회가 오기 전에 할 일이 상소이다. 성령의 상소이다.
적용) 괴롭도록 지겨운 사람, 지겨운 상황, 지겨운 사건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벗어날 기회를 얻으려고 누구를 또는 무엇을 기웃거리고 있나요?
괴로운 사람을 놓고 넘어갈 생각을 안하고 벗어날 기회를 얻으려고 한다. 결국 벗어나면 그동안 기도했던 것 다 어디로 갔는지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니 완전히 떠내려간다.
바울이 2년간 죽이려고 했지만 벗어날 기회를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전도했다. 복음 전하려고 해야하는데 매일 그 환경을 벗어나려고 하고 기웃거리니 지옥을 산다.
우리 장로님께서 수요 새벽설교를 하셨다. 큰 오픈을 하셨다. 우울과 조울을 반복하는 아내와 사는 것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참을 인자가 새겨있는 삶이라고 했다. 너무 힘들다가 2009년도에 우리들교회에 오셨다. 공동체 도움을 받았다. 인내할 것이 많으니 드디어 장로님까지 되셨다. 장로님이 되신 것은 아내의 공이다. 해석하고 가고 있지만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막내딸이 대학만 들어가면 졸혼을 하리라고 했는데 불행히도 그만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그래서 장로님은 올해 결단 내려서 따로 살아보고자 해서 따로 산다. 한마디로 별거하고 계신다.
장로님께 드리는 말씀이다. 세계적인 석학인 스탠리 하워즈 교수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 아내가 조울증이고 끝나지 않을 고통 가운데 있다. 매일 다른 교수와 성관계 하겠다고 한다. 매일 끝나지 않은 고통 가운데 아내를 돌보며 살았다. 그런데 이 장로님과 가장 큰 차이는 스탠리교수는 너무 저명한 사람이고 도와줄 전문의가 많다. 의사와도 친하다. 그러나 아내가 나갈 공동체가 없다. 이것을 혼자서 감당하려고 했다. 그러나 의사의 도움은 한정적이다. 이걸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면 못한다. 결국 20년간 사시고 이혼하셨다. 그리고 곧 아내는 소천을 했다.
공동체의 유무는 너무 크다. 그동안 우리는 이런것들을 다 오픈하며 목장에 들어간다. 공동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평범한 목장에 가서 나누면서 병을 통과해야 한다. 나에게 공동체가 없으면 대단한 분들은 친구로 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들 교회목장이 세계적 대안이라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장로님께서 얼마나 최고의 길로 잘 가고 계시는지 모른다. 끝나지 않는 고통의 기도제목을 오픈하셨다. 그래서 이제 교회의 기도제목이 되어 기도받는 복을 받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데 왜 장로님이 왜 별거라는 결정을 하셨나 생각해보면 요즘 회사가 너무 잘되어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아이들도 너무 학교를 잘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그 환경 가운데서 최고로 인도해주셨다. 그렇게 힘든 아내와 살았으면 다 콩가루가 되었어야 했는데 아내의 수고만 있고 다 잘되었다. 그러나 이 괴롭도록 지겨운 상황에서 환경이 나아지니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벗어나고 싶은 것 이해가 너무 된다. 본인이 답을 다 알고 계신다. 본이니 너무 교만하다고 하신다. 그래도 오늘 제가 성령의 상소로 공개적으로 처방 드린다. 너무 힘든 것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힘든 환경가운데 딸을 데리고 넘어간 권사님도 있다. 아직 거기까지는 못가신 것 같다. 성도 여러분들은 우리들교회의 저력을 보여주시고 이 가정이 모델이 되어 수많은 가정이 힘을 얻고 돌아오기를 기도해주시기를 바란다. 오픈했으니 우리의 문제가 되었다. 이분은 우리들교회 장로님이시다. 장로님은 절대 나가시면 안된다. 택자이고 우리들교회 장로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사모님 때문에 장로님 되신 것인데 이것을 간과하고 있다. 이것을 넘어가는 세계를 알면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잠잠히 봐야 하는데 일일이 반응하는 것이다.
성령의 상소 네번째
4. 한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20-22절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바울에 관한 베스도의 보고를 다 받은 아그립바 왕은 나도 이 사람 바울의 말을 듣고 싶다 한다.왜 아그립바가 바울의 말을 듣고자 했을까? 겉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이다. 로마 황실의 후원도 받고 있다. 로마총독 베스도도 그의 호의를 얻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보면 아버지가 가장 최고의 정점에서 충이 먹어 비참하게 죽었다. 또 로마황제의 교육을 받아도 권력의 냉혹한 현실을 알고 자기가 분봉왕이지만 모든 것은 황제의 뜻대로 해야 하고 하나도 실권이 없음을 날마다 경험했을 것이다. 또한 버니게는 여러 남편을 거쳐서 결국 여기에 와 있다. 왕위로도 관계로도 재물로도 채울 수 없는 인생의 실존적인 허무함과 죄악과 음란의 굴레에 잡혀있는 공허함이 있으니 이들이 바울의 말을 듣는다.
어떤 말을 가장 듣고 싶었을까? 예수라 하는 이가 죽었는데 살아있다고 한다. 예수의 부활을 나도 듣고 싶은 것이다. 인생의 허무함이 허무함인지도 모르고 목적 없이 살아가는 한 인생, 아그랍바 버니게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한 이후로 며칠을 더 구류 된채 기다려야 했다. 바울의 상소가 성령의 상소이기에 그 목적이 억울함을 풀고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상소의 목적이 구원이기에, 구원을 이루는 것이기에 그 자리에서 또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말씀이 필요한 그 한사람, 아그립바와 버니게에게 말씀전하라고 하는 것이다. 나아가 상소대로 로마에 가는 것 또한 말씀을 전할 한사람이라도 더 구원할 목적이다.
우리가 혐의를 벗고 억울함을 풀고 복수하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 아니라 항상 전도, 영혼구원, 전도를 통한 영혼구원이 우리의 상소의 모든 목적이 될 줄 믿는다. 그래서 큐티의 꽃은 적용이고 결론은 영혼구원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하는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이거나 구원이 최고의 가치인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구원때문에 우리 인생이 걸어가고 서고 하는 것이다. 지겨워서 벗어나려고 하면 안된다. 거기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너무 중요하다.
적용) 인생이 허무할 때가 있습니까? 허무함을 무엇으로 채우고 싶습니까? 내 인생 최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몇번째 목적입니까? 말씀 전할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눔
모태신앙으로 판단만 하신 분의 이야기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1학기 종강파티를 식당에서 했다. 그런데 종교에 대한 주제가 나와서 잠깐 전도하려 했는데 씨알도 안먹혔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분을 칭찬하며 착하고 순수한 드문 사람이라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근데 전자동으로 이 선생님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내 안에는 음란이 있고 야동을 보았다고, 그래서 교회에서 회개하고 고백했다는 이야기를 선생님 모임에서 이야기했다. 비록 거창한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찌질하고도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이 할렐루야 예수 믿으라 구원이 이르렀다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 하면 씨알도 안먹혀들어간다. 잘났다 하지 않고 자기 절망을 보는 것, 이분처럼 하는 것이 구속사적인 것이다. 이것이 유다복음이다. 죄를 보는 사람의 태도이다. 나는 칭찬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하는 것이 복음 전할 태도이다. 그러면 전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이것이 구속사 큐티의 진면목이다. 잘난척 하지 말고 입만 열면 내가 누군줄 아냐 이런 이야기 하면 결정적으로 쓸 권이 하나도 없다.
저 또한 여러분들의 성령의 상소로 미주 목세와 집회를 하고 왔다. 정말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백신을 3차까지 맞고, 또 떠나기 직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터키 선교사 수련회에서도 안걸린 코로나를 미국가서 걸렸다.
처음에는 걸린 코로나로 인해 기도와 말씀으로 상한 심령이 되었다. 스케줄이 너무 많은데 코로나에 걸렸다. 상한 심령이 되어 교회 걱정될까봐 기도제목도 못올리고 격리되어 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니 회개할 것밖에 없었다. 그 때는 아프기도 하니 이 수고를 그치고 쉬라 하시면 순종하겠는데, 그래도 제가 혹여나 저의 사역이 하나님의 열심보다 앞서가는 것이 있어 막으셨다면 저를 용서하지 말라고, 용서해 달라고가 아니라 용서하지 마시라고 기도했다. 이 땅에서 심판을 받아야 천국에 갈 것인데 했다.
결론적으로는 이번 미국 선교 여행이 가장 열매가 많은 목세가 되게 하셨다. 제가 죽어져야 열매가 맺히는 것 같다. 미국에서 생각지 못한 분들이 곳곳에서 저를 보고 자기 한사람 위해서 왔다고 한다. 구속사의 말씀으로 이혼안하고 가정을 지켰다고 한다. 어딜 가나 큐티 하는 성도들이 계셨다. 미국에서는 목사님들이 큐티목회 해서 이런 분들 목회하면 참 좋을텐데 했다. 말씀이 들리는 그 한사람이 곳곳에 어딜 가나 있었다.
이번에 참여하신 한 목사님의 편지이다. 공부도 많이 하시고 장애아들을 데리고 계속 참석하셨다.
'목사님 세미나를 5월 한국 세미나부터 한번 듣고 이번 일정을 다 따라가보자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워싱턴 랄리 캘리포니아 벧엘교회까지 비행기 타고 가게 되었다. 4번을 다 마치고 난 후에 구슬을 꿰듯 꿰어지는 은혜가 있었다. 때마다 들리는 것이 달랐다. 첫번째 14차 목세에서는 저의 죄를 보는 것이었고 두번째 워싱턴 세미나에서는 내가 100% 죄인이라는 것이 어떻게 다가왔는데, 옳고 그름으로 사람을 대했기에 구원의 열매가 없었구나 했다. 세번째 랄리 세미나에서는 받게 된 것은 복음이었다. 저는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구원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는 목사님의 말씀이 들렸고, 저의 두 뺨에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위해주시는 눈물이 흘렀다. 네번째 벧엘교회 가기 위해 비행기 타며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 책을 비행기 안에서 1/3 읽고 오는 길에 마저 책을 읽었다. 벧엘교회 세미나에서 깨닫게 된 것은 영혼을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것인지 구체적인 방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칼날 위의 물방울 처럼 말씀묵상의 꽃은 적용이요 적용의 열매는 영혼구원이라는 말이 저에게 각인이 되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굉장히 길게 써 놓은 것을 제가 줄였다.
'구속사를 이뤄가기 위해 가만가만이라는 표현을 달리 해서 조심조심 하겠습니다.'
평신도도 아닌 목사님인데 똑같은 집회를 네번 가며 들리는 포인트가 다 달랐다고 편지를 보내셨다. 여러분들은 그거 다 알아 하시겠는가?
말씀맺음
성령의 상소는 인내의 때를 채워야 한다. 그리고 부르짖어야 한다. 그러면 100% 응답받는 기도는 내 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로 응답하시는 것이다.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할 때 기회를 주신다. 이것은 이타적인, 착한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회를 엿보는 것이 아니다. 한 영혼을 주목하라고 했다. 한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도제목]
보련
1. 어떤 일이든 직장 인도함 받을 수 있도록
2. 한 주 말씀으로 살 수 있도록
교희
1. 감정 회피하지 않고 부르짖는 한 주 보낼 수 있도록
2. 죄책감과 허무의 문제를 통과하게 되도록
은우
1. 쓴물을 단물로 바뀌게 해주시고 애굽의 염병같은 사건에서 나, 가족, 목장식구, 지체들을 고쳐주시고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빚어 주소서
2. 엘림의 12개 샘 70그루의 감람나무와 같은 말씀의 장막에서 욕심을 내려 두고 매일 일용한 만나의 은총 누리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