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3 우리들의 예배
시편 8:1-9
손윤상 목사
국수 말고 국시, 무디 말고 문디 손윤상 목사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제가 '누군가?'라고 아마 많이 생각을 하실 겁니다. 제가 온지 4개월 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주일 강단에 서게 되어서 우리 성도님들도 되게 의아해하시고 저도 놀랐습니다. 갑자기 주일 설교를 하라고 하셔서 제가 수요 설교를 한 번도 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주일 설교를 하라고 하셔서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막 새벽 큐티 설교를 마쳤기 때문에 '혹시 주일 새벽 큐티 설교 말씀이십니까?' 재차 물었는데 아니라고, 주일 설교라고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셔서 제 다리가 이렇게 확 풀려 버렸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배운대로 '가만가만 주일 큐티 본문이 뭐지?'하고 살펴보니까 오늘 2절에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하는 말씀이 제 눈에 확 들어오게 되었어요.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우리들교회 온지 4개월 된 젖먹이가 뭘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의 권능만 드러내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설교가 주님만 의지하는 성령의 호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참 놀랍게도 이렇게 설교를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간증거리를 이렇게 주시더라고요. 설교 하라는 전화를 받고 10분 후에 정말 거짓말같이 바로 전화가 왔는데 지난 교회에서 함께 사역했던 권사님이 전화가 왔어요. 이 권사님은 강남 사시다가 의정부로 오신 권사님이십니다. 아시다시피 강남에서 의정부로 오려면 웬만해서 망하지 않고는 이렇게 올 수가 없습니다. 폭삭 망해야 올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의정부를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의정부 45만의 아름다운 도시이고 저도 그곳에 살고 있는데 이렇게 상황 가운데 오게 되신 거죠. 많은 재산을 남편이 몽땅 날려버려 가지고 유일하게 남은 자신의 명의로 된 의정부 건물에서 세를 받으시며 사시는 권사님이신데 이 권사님의 남편이 사업도 여러 번 실패하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여러 번 차리면서 권사님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15년쯤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권사님이 이혼하지 않고 늘 남편이 돌아오기를, 예수 믿게 되기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전화가 오셔서 '남편이 돌아왔다.'고, '남편이 뼈만 남아서 쇠약해졌지만 돌아와서 함께 신앙 생활하게 되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했는데 사실 저는 주변의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의 시선과 같이 '왜 이 권사님은 이렇게 남편에게 집착하시는가?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 이렇게 거지가 되어서 떠돌아다니신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기다리시는가? 이 떠난 남편을 기다리지 말고 이혼은 아니더라도 정서적인 분리는 하셨으면 좋겠다. 집착을 내려 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마음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권사님이 저한테 감사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겁니다. '목사님 우리들교회 가셨죠. 너무 잘됐습니다. 목사님 제가 김양재 목사님 설교 듣고 15년 동안 남편하고 이혼 안하고 예수를 믿기 위해서 기도했다.'고 '지금도 김양재 목사님 설교 듣고 있다.'고 목사님 너무 좋은 교회 가셨다.'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는 거예요. 제가 참 많이 부끄러웠어요. 저도 그제서야 '이 권사님이 남편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공동체를 섬기고 말씀에 붙들리게 되는 성령의 호의를 받으신 것이구나.' 이게 깨달아졌고 지난 저의 사역이 얄팍하고 천박했는지 너무나 마음이 아파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담임 목사님 전하시는 이 생명의 말씀이 이 절박한 영혼을 살려 놓는지, 많은 목마른 영혼들을 살려 놓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강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사역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시지만 이미 그 말씀이 강에서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 좀 나누라고 이렇게 설교자로 세우셨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본문의 말씀은 시편의 대표적인 찬송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인이 여호와 우리 주여라고 표현하죠. 이렇게 고백하는 걸 보면 회중이 한 자리에 모여서 부른 찬송시인 거죠. 마치 주일이 되면 개인 업무, 개인 약속을 다 내려놓고 온 회중이 한 자리에 모여서 찬송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우리들의 예배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블루스가 아니라 우리들의 예배. 2년 동안 이 코로나비대면 기간으로 인해서 모여서 드리는 우리들의 예배가 많이 퇴색되어져 가는 것 같아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우리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위대함을 주목하는 예배입니다. (1, 9절)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 1절과 9절의 말씀을 보시면
시인은 이 시의 시작과 끝을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하면서 반복하며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름답다라는 뜻은 원어로 보면 탁월하다, 위대하다라고 기록되어져 있어요. 시인은 이 하나님의 탁월하심 위대하심을 주목하며 감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이렇게 흠모하는 것을 보면 온통 신경이 거기에 빼앗기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영인을 보면, 관광지의 웅장한 건물이나 대자연을 보면 우리가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처럼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일에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이 하나님의 탁월하심, 위대하심을 그렇게 주목하고 거기에 깊이 빠져들어야 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이 시간 하나님을 시인처럼 하나님을 주목하고 있습니까? 성도님들은 어떤 예배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언제부터인가 주일 예배가 언제부턴가 무미건조해지지는 않고 있습니까? 내 영혼이 막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의자만 데워 놓고 가는 것은 아닙니까? 이 주일 예배에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지 않으면 삶이 바르게 정렬될 수가 없습니다. 지난 한 주간의 일이 급하게 나를 쫓아와서 나를 조급하게 만들고, 닥칠 여러가지 일들이 압력으로 다가와서 압박해서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주일은 위대하신 하나님께 압도되는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이죠. 주일 예배가 이렇게 무미 건조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러분의 이 주중의 삶을 잘 보아야 해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세속적인 것에 과도한 관심과 열렬함을 갖고 있다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다면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하는 시작부터 끝까지 냉랭한 가슴을 갖고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시편은 150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한 편, 한 편이 의미 없게 이렇게 배치된 것이 아니라 배열까지도 영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있어요. 시편의 1편, 2편은 이 시편의 서론으로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1편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다 이렇게 말을 하고 시편 2편의 말미에는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로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시편 3편과 7편은, 3편에서 7편은 탄식시인데 우리가 이제 6편, 7편을 그제께 묵상했지 않습니까? 탄식시인데 개인의 삶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고난과 핍박에서 하나님을 찾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요. 그런데 8편은 갑자기 여호와 우리 주여하면서 회중이 갖고 있던 문제와 고난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며 주목하며 하나님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혀 생뚱맞게 다른 내용으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문제에서 하나님을 찾고 찾은 그것의 응답으로 시편 8편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중에 여전히 바뀌지 않는 상사, 변하지 않는 채무, 남편, 아내와 같은 탄식시를 우리 가운데 허락하신 이유는 이 여러가지 불편한 환경들을 통해서 내 영혼이 하루 하루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가면서 하나님을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라는 것이에요.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 위해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도록 이 주중의 삶을 보내야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는 주일의 예배로의 응답이 나타나게 된다 라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다 그런 경험들이 다 있지 않습니까? 한 주간 여러 만나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주일이 그렇게 기다려져요. 삼성역에서 내려가지고 골고다 언덕 같은 그곳을 올라가는데 힘겹게 막 터벅터벅 올라가는 게 아니라 막 달려서 올라가게 됩니다. 여러분 문 앞에 딱 서게 되면 가슴부터가 쿵쾅거려요. 30분 먼저 앞에 와서 자리에 앉아 있으면 내 영혼을 먼저 올려드리는 기도를 하고 담임 목사님의 중보기도 영상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중보할 것들에 대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에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렇게 하면 다같이 일어나서 간주 소리만 나와도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돼요. 어쩜 그렇게 내 삶에 정확한 말씀을 주시는지, 어떻게 그렇게 내 삶의 고난을 해석해 주시는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에게 주시는 그 말씀을 듣고 지난 한 주를 회개하고 앞으로의 한 주를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죠.
제가 부흥하는 교회들을 참 많이 다녀봤습니다. 곳곳을 다니면서 이렇게 연구를 했어요. 저도 부흥하는 목회자가 너무 되고 싶었어요. 우리들교회도 부흥하려고 한 교회는 아니지만 대표적으로 부흥하는 교회죠. 부흥하는 교회를 보면 특징이 예배가 살아 있어요. 부흥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흥은 되어지는 것인데 이 예배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 예배의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편안한 의자, 세련된 분위기가 아니라 '거기에 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신다. 우리가 주중에 그렇게 목 말라서 사슴이 시냇물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를 찾고 찾았는데 거기에 하면 하나님께서 샘을 마련해 주신다. 생명의 떡을 예비해 놓고 계신다.'라고 하면 그곳에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달려와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교회가 환난 당하고 원통하고 빚진 자들을 위한 말씀이 항상 준비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 목마른 심령들이 달려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주일 설교하면서 이 설교자가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청중들이 설교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찬양팀과 악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도 청중들의 눈치와 분위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곳에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하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요. 이 땅뿐 아니라 온 땅의 영광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 온 땅에 그 영광이 덮으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탁월하심, 위대하심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가치관과 생각이 다 바뀌게 돼요. 1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온 하늘을 덮었다 라고 지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하늘의 언어로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땅의 언어로 좀 생각을 해보면 비중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중요도라고 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상 받을 때 보면 연예인들이 간혹가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이야기를 하자나요. 이 영광이 비중인 것은 '내가 상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상의 비중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이죠. 온 하나님의 영광이 온 하늘을 덮었다 라는 말씀은 이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비중 있고 중요한 분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없으면 만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익히 알듯이 모든 것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사람의 불행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 비중을 두고 살기보다 자신에게 비중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이 있는 것처럼 몰두하며 사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능력의 능력에 몰두하고 하나님의 선함보다 자신의 선함에 몰두하니까 늘 불만과 만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것들, 없으면 안 된다 라고 말하는 것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가 않아요. 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눈을 뜨게 된다는 거예요.
제가 참 촌놈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 강남 한복판에 이렇게 교회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은혜를 주셨는데, 대치동에 막 들어가게 되면 이 촌놈이 보니까 막 아파트도 크고, 막 큰 고층 빌딩에, 입간판을 보니까 막 휘황찬란한 거예요. '아 역시 강남이구나. 강남에서 살아야 되는 구나. 강남이 진리이구나.' 막 이런 마음들이 불쑥불쑥 일어나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휘문 고등학교 강단에서 외쳐지는, 판교 성전에서 외쳐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내 인생에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 말씀 붙들고 사는 것이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전부이구나.'하는 것을 알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이 순교의 현장에서 막 애쓰시다가 돌아오셔서 간증하시는 이야기를 들으면 참 많이 감동이 됩니다. 그곳에 만나는 성도님들이 그곳에 전도를 받아서, 선교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영혼들이, 그 영혼들이 순교의 위협 앞에서도 이렇게 믿음을 지킬 때 이렇게 선교사님들이 그들의 고백을 간증해 주시는데 은혜가 돼요. 그곳의 사람들의 관심은 자신의 굶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죽음의 위협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배척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를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 그들이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건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가?'하는 것이에요. 내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이죠. 아까 제가 간증으로 나누었던 권사님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15년간 사람들이 참, 같은 성도님들이라도 조롱하고 우습게 여기고 무시 받고 오해도 받으면서 이혼하지 않는 남편을 기다릴 때 그분이 보았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집착이나, 그냥 단절이 이렇게 필요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그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던 것이죠. 이 어떤 것보다 그 귀중한 영혼을 붙들고 있는 구원에 대한 마음이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볼 수 있게 된 우리들교회에 와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이 교회로 온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환경이 성령의 호의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를 경험하기 때문에 인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목하면 내가 가진 문제가 전부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내가 당한 모든 일이 안전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듯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어머니가 생각이 났어요. 우리 어머니는 중년 때 이렇게 마사지를 받으러 다니시고 절에다가 기와장을 올리는 분이셨어요 아버지는 중공업에 철판을 납품하는 공장을 운영하시는 사장님이였는데 그때 아버지가 참 허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차를 타면 이렇게 선글라스를 끼시고 세단에 앞에 운전수와 함께 가시다가 제가 지나가면 문을 살짝 내려가지고 용돈을 두둑하게 줬던 그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이 나요. 그런 가정에서 어느날부터인가 밤만 되면 어머니랑 아버지랑 막 돈 때문에 막 다투는 소리로 잠에서 깰 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나 많은 돈을 끌어다 썼는데 자금이 회수되지가 않아서 빚쟁이들이 막 찾아오기 시작하고 감당할 수 없는 빚에 아버지는 어머니와 누나와 저를 할머니 집에 보내고 소주 빈 병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하루 아침에 집이 망하고 40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고 중학교 2학년 아들과 고등학교 1학년 딸을 한창 뒷바라지해야 될 때인데 어머니는 말이 안 나오는 것이죠. 목이 탁 막히셔 가지고 집에만 가면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무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어머니는 죽고 싶었을 텐데 자식 때문에, 그리고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이죠. 어머니가 밤마다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저도 아무 말 못하고 가슴이 먹먹하게 잠이 든 기억이 있습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죽지 못해서 겨우겨우 하나님 앞에 살아가시는 분이 있습니까? 어떻게 살아내야 하나 답이 없어서 어느 것 하나 의지할 것 없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이 있습니까? 너무나 잘 오셨어요. 절망의 자리에서 그래도 예배의 자리로 나와 탄식할 때 거기에 소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기가 막힌 상황 가운데서 한 집사님의 '교회 가자.'라고 하는 전도로 그 당시 붙들게 없다보니까 '하나님이라도 붙들어야지.'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가셨는데 절박한 상황이니까 새벽 기도도 막 다니셨어요. 새벽에 기도하고 돌아오면 좁디 좁은 집에 자녀들이 있고 한숨 밖에 나오지가 않는 거예요.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 어떻게 살지?' 탄식하면서 읊조리듯 하루 하루 기도하면서 사셨는데 어느날 주일 강단에서 선포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어머니의 눈을 새롭게 열어 주셨어요. 하나님 말씀 앞에 '내가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살고 있구나. 내가 절박하고 비참한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내가 품어지고 있구나.'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 믿어지게 되니까 똑같은 집, 똑같은 상황, 똑같은 자녀들이라고 할지라도 담임 목사님께서 목세 때 해 주신 룻기 강해와 같이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절대 잃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다. 내게 남은 것이 있구나.'하는 그것을 보여주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장 좋은 나에게 구원을 주셨구나, 두 자녀를 남겨 주셨구나. 두 자녀라도 남겨주시고 이 사건으로 예수 믿게 해 하신 것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면서 어머니가 이제 어떻게 사나.'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셨습니다. 기복이 아닌 팔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삶에 막혀 있는 문제를 풀 수 있는 답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없습니다. 상황과 환경에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서면 고난이 축복으로 바뀌게 되고 우리의 삶에 남은 것을 보여주시고 갇힌 내 인생이 성령의 호의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적용] 절망적인 사건과 상황 가운데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십니까? 세상의 자리로 나아가십니까? 주중에 과도한 열심을 내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예배와 말씀에 목마른 사슴입니까? (세상에) 배부른 돼지입니까?
2. 겸손함을 회복하는 예배입니다. (2절)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 2절을 보시면
주님의 광대하심과 크심 앞에 선 사람은 특징이 자신의 주제를 정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내가 어린 아이와 젖먹이로 서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주님의 광대하심 앞에 서지 못한 사람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만유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철학, 경제, 문학,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있어요. 하나님의 크심 앞에 서지 못하면 사람은 주님의 대적과 원수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특별한 군대를 동원하시는데 어떤 군대를 동원하십니까? 천사나 세상의 영웅이나 강한 군대나 최첨단 무기나 수사학의 웅변을 사용하지 않고 너무나 약하고 미성숙해서 제대로 된 도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어린아이와 젖먹이를 가지고 모든 대적과 교만을 일거에 무너뜨리십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세상에 강해 보이는 교만한 자들을 넘어뜨리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시면 다윗은 이것을 경험했어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비웃고 조롱하는 골리앗이 막 이렇게 도전을 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용사들은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어요. 그 앞에 서지 못했지만 이 소년 다윗, 물맷돌 하나만 탁 들고 나아가서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면 칼과 창과 방패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면 물맷돌이라도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 라고 하시는 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젖먹이에게 권능을 주셔서 교만한 원수를 얼마든지 깨뜨리며 하나님을 부정하는 인생을 수치스럽게 만드신다는 거예요.
저는 담임 목사님의 성령의 지금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해주신 진실 자매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졌습니다. 또 그 금요일날 제가 심방한 지적인 장애가 있는 형제에게 마음에 부끄러움이 막 있었어요. 이들이 말씀 앞에 반응하는 것을 보고, 말씀을 순전하게 믿고 따르고 살아내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 지적 수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지적 수준을 자랑하는 것이 주님 앞에 서지 못하게 하는 방해거리가 된다는 것을 보았어요. 하나님을 잘 안다고 말해도 여전히 말씀이 들리지 않고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겸손히 어린아이와 젖먹이처럼 주님을 찾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회개가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기준으로 나는 낮고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 아무 영향력을 나타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혹시 계십니까? 성도로 가장 큰 질병은 무엇이냐면 예수도 잘 믿고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박사 학위를 가지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하나님의 일이 잘 될 것처럼 생각한다는 거예요. 이게 가장 큰 성도의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한 과정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은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서 29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의 미련하고 약한 것을 택하셔서 세상의 지혜롭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이 세상의 가치관이 얼마나 약하고, 이 세상의 상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무능한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에 내가 미련하고 약한 자가 되는 것을 내 마음에 꺼려하는 마음이 있어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부어지게 될 것인데 내가 미련하고 약한 자라는 고백이 나오지가 않는 것입니다. 제가 10주 THINK 양육에서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면서 그 고백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정결하게 하시고 사명의 길로 보내시는 것을 묵상을 했는데 제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설 때 '화로다 나여 내가 망하게 됐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기 싫어하는 저의 모습을 보았어요. '망했습니다.'하는 말이 싫은 거예요. '잘됐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나는 능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싶지 '저는 망했습니다. 저는 화가 임했습니다.'라고 말하기가 싫은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내가 겸손하게 어린 아이와 젖먹이가 되기를 너무나 원하세요. 겸손하게 주님을 구하고 주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기를 소망하십니다. 우리들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리는 이유가 뭘까? 참 많이 놀랐습니다. 부한 자이든지 가난한 자이든지, 능한 자이든지 무능한 자이든지 그것과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이 '별 인생이 없다.'라고 고백한다는 거예요. '저희는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차별 없는 복음을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그 고백을 온 몸으로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공고를 나왔어요. 그런데 기술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학을 배우고 목회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공고 나온 게 엄청나게 부끄러웠습니다. '이 고등학교를 내가 지울 수만 있으면 어떻게라고 한 번 지우고 싶다.'라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고가 눈 앞에, 공업 고등학교 막 이런 게 보이면 일부러 돌아갔습니다. 쳐다도 안 보려고 막 했어요. 이력서에 낼 때는 고등학교를 한 번도 적어본 적이 없어요. 제가. 그냥 대학교부터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들이 한 번 '아빠는 고등학교 어디 나왔어?' 이렇게 묻는데 '아빠는 특목고를 나왔다.'고 반쯤 이렇게 속여가면서 말을 했습니다. 우리들교회는 사실 있는 그대로 써야 한다 라고 이렇게 말을 하는 거예요. 제가 이력서에다가 정말 내가 사실 그대로를 써야 될 것이 무언인가 라고 계속해서 생각을 해봤어요. 제 마음에 하나 탁 떠올랐어요. '공고를 써야 된다.' 그래서 제가 '정말 이렇게 썼는데도 제가 사역자로 부름 받는다면 진짜 이건 진짜구나.' 그래서 이력서를 썼는데 정말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망치, 스패너, 뭐 이런 나눔까지도 하면서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해주시는 것 같아요. 저는 이 공고를 한 번 만회해 보려고 정말 열심으로 사역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종이라는 걸 인정받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부르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공고를 가리려고 석사학위를 받고, 선교단체 DTS 훈련이나 성경 연구학교 가가지고 성경 전 권을 막 연구하기도 하고, 교회가 부흥했다는 곳 다 찾아가보고, 세미나가 있으면 다 찾아가서 배우려고 하고 이런 시간들을 보내면 보낼수록 내 안에 무슨 마음이 드냐면 내 안에 탈진이 오는 거예요. 기쁨이 없는 겁니다. 오히려 내 약함이 가려지기 보다 더 초라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것으로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노력한 그것으로 사역을 한다면 참 크게 쓰임 받았겠죠. 그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내 약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 젖먹이와 어린 아이가 될 때, 그냥 공고가 젖먹이와 어린 아이죠. 공고를 그냥 있는 그대로 오픈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겁니다. 제가 3년 만에 이렇게 고생하면 담임 목사가 될 것이라는 자리가 나서 원주로 가게 되었어요. 솔직히 200명, 300명 되는 곳에 이렇게 보니까 제 마음에 만족이 없는 겁니다. 더 크게 한 번 목회를 해야 인정을 받을 텐데, 그 공고를 한 번 가려볼 텐데 하는 마음을 가지고 '당신 정말 쓰임 받는 목회자다.' 이런 말을 듣고 싶어가지고 만족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막 열심히 사역을 했어요. 인정을 받아야 되니까 불붙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지난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조금 축복하시면 그대로 정확하게 맞는 일들이 있어가지고 저희 아내를 보면서 축복할 때는, 우리 아내 가정이 예수를 안 믿거든요. 그런데 정확하게 아는 거예요. '아내를 통해서 가정이 예수께로 돌아올 것이다.' 막 이러는데 '오 정확하다.'는 말, 막 소름이 돋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한테 축복을 탁 해 주시는데 '너는 디엘 무디가 니 안에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너는 디엘 무디가 있어서 가난한 자이든, 부한 자이든 많은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종이 될 것이라.' 막 축복하는데 제 마음에 기쁨이 막 넘쳤습니다. '이제야 인정을 받는구나.'하면서 막 넘쳤어요. 그러면서 부목사님들 다 있는 자리에서 '너는 3천 명 목회를 할 거라.'고, 그대로 '3천 명 목회를 할 거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행정 목사님 천 명 목회를 할 거라고 했는데 저는 3천 명 목회한다고 하니까 떨려가지고 좋아서 그걸 믿고 나아가서 했던 거죠. 그런데 저의 현실은 3천 명이 아니라 3개월 만에 사임하게 되고, 무디가 아니고 문디가 되어가지고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제가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며 가만가만 묵상하게 되었는데, 제가 깨달아진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내가 성공하는 것을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다는 것을 보았어요. 무언가 더 많은 것을 갖추라고 하시지 않더라고요. 그것을 오히려 다 버려야 한다 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내가 해내고 성공하고 부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가 어떠한 모습이든지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내가 약한 자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이 나의 삶을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라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앞에 어린 아이와 젖 먹이로 서는 것을 주님이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세요. 자신의 마음에 합한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낮추고 있습니까? 젖먹이와 어린 아이로 살고 있습니까? 화로다 나여 라는 고백을 갖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디엘 무디가 이렇게 말을 했지 않습니까? '어린아이와 젖먹이처럼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향한다면, 우리의 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망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 시대 속에 가장 큰 부흥을 주실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러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나를 괜찮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죠? 지금도 숨기고 싶은 학벌 가난 가정 환경 등 나의 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 주제를 알고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3. 주님의 돌보심과 사랑을 신뢰하는 예배입니다. (3-5절)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 3절부터 5절입니다.
여러분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억 5천만 km라고 합니다. 만약에 이것을 종이 한 장의 두께라고 생각을 해 본다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까지의 거리가 종이를 21m 쌓은 거리라고 해요. 그만큼 먼 거죠. 이 우주에 있는 별들 중 우리가 보는 은하수는 종이를 480km를 쌓아 올린 거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지구와 별이 떨어져 있어요. 우주는 사람이 측정할 수 없게 엄청나게 광대합니다. 그런 우주를 우리가 바라보게 되면, 우주 속에서 있다 라고 생각을 하면 우리는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존재죠. 개미보다 작은 먼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주의 별들을 주님의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만드시고, 태양계와 천체를 유지하시면서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붙들어 놓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보시면 누구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십니까?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관심이 있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라고 하십니다. 어거스틴은 구약에 난타난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인가 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랑을 향하여서 질투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 크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개미보다 어쩌면 먼지보다 작은 이 사람을 시기하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것, 이것이 구약의 가장 놀라운 점이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라고 할 때 히브리어로 에노쉬라고 해요. 사람을 히브리어로 에노쉬라고 해요. 우리가 창세기 5장에 에노스라고 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그 이름의 뜻을 가진 에노스를 알 듯이 에노쉬라는 것은 연약하고 유악한, 한계가 많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자는 벤 아담이라고 해서 벤은 아들이고, 아담은 흙과 먼지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먼지고 흙이라는 존재인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생각하시고 돌보신다 라는 거예요. 너무나 부족해서, 연약해서 쓰러지기 쉬운 그 사람을 생각하시고, 품으시고, 아버지와 같이 안으신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서 놀라운 점은 무엇입니까? 우주의 개미보다 더 작은 점과 같은 존재인 이 사람을 뭐라고 하고 있어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라고, 그리고 '영화와 존귀의 관을 우리 가운데 씌워 주셨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어요. 신약에서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어떻게 하셨다고 합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신, 온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온 우주 만물을 유지하시면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시청 한계와 감청 한계를 가진 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자기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사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하나님의 사랑이 누려지십니까? 이 사랑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특별한 존재이다. 문제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보시면서 하나님 나를 대하신다.'라는 것이 정말 믿어지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려면 우리 안에 상처와 쓴 뿌리가 제하여져야 합니다. 피해 의식과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이 신뢰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오직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서서 우리에게 묶여 있는 피해 의식, 자기 연민, 내면의 쓴 뿌리가 제하여져야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드릴 때 우리가 복음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연민, 피해 의식, 열등감 이런 것들이 탁 끊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중학교 2학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고 그 사건으로 인해서 제 마음에 싹튼 것은 미움과 분노와 원망이었어요. 여러분 '없는 부모가 차라리 낫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아닙니다.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부모라도 반드시 있어야 돼요. 자살은 절대로 안 됩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여도 우리가 함께 살아내야 한다는 거예요. 떠나시면 안 돼요. 저는 아버지가 부재하신 이후에 너무 힘들어서 계속해서 원망과 미움이 있었어요. 아버지를. 장례를 치르고 빚쟁이가 들이닥치고 어머니가 끙끙 앓는 모습을 보니까 배신감이 있는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는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그 분노가 자기 연민과 피해 의식과 열등감을 내 안에 자라나게 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모른 채 제가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었어요. 그런 미움 속에서 어머니가 이 예수님을 믿고 바뀌시니까 저도 마음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름 수련회를 갔는데, 여름 수련회가 정말로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다 보내셔야 돼요. 자녀들을. 제가 기도할 때 예수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데 그때 목사님의 간증을 듣는데 저랑 사정은 완전히 달랐지만 제 마음을 마치 아는 것처럼,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분의 자기 연민이 나의 자기 연민이고, 그분의 피해 의식이 나의 피해 의식이고, 그분의 열등감이 나의 열등감이에요. 분노가 꼭 나와 닮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해결해야 한다고 얘기하시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면 기도하라고, 예수님을 붙들고 매어 달려서 기도하라는 그 요청을 듣고, 그때는 제가 막 억눌린 게 많았나봐요. '예수님.'하고 찾는데 갑자기 막 떼굴떼굴 구르면서 아버지를 욕하고 저주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너무 힘들다.'고 막 엉엉 울고 나니까 주님께서 시간이 지난 후에 고요하게 저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아들을 주기까지 내가 너를 아들 삼았다.' 이렇게 하시면서 저를 많이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한 번도 이런 얘기를 누군가에게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간증을 해 본 적이 처음입니다.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으니까, 해석이 안 되니까 이걸 나눌 수가 없는 거예요. 아버지가 왜 죽으셔야 했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 늘 제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니까 '아버지가 왜 그렇게 하셨을까?'를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가 양육자님이 '아버지가 왜 그렇게 죽으셔야만 했는지 한 번 좀 생각해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6주차 때 예수 그리스도 영혼을 위한 십자가 때 그 말을 듣고 아버지를 한 번 생각을 해 보았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내가 목 마르다.' 하신 말씀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기 전에 군병들이 내민 이 몰약 탄, 쓸개 탄 포도주는 받지 않으셨어요. 왜냐하면 고난을 감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기 위해서 그냥 그것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목마르다.'고 했을 때 군병들이 주는 신 포도주는 마시는 거예요. 그게 제가 묵상이 되더라고요. '왜 그러셨을까?'라는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이유가 시편 69편 21절에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그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것을 받으신 거라고 이렇게 하셨는데 주석을 찾아보니까 '초로 탄 포도주는 고난을 더 극심하게 하는 것이어서 군병들이 목 마르다 하신 주님을 조롱하기 위해서 더 고난에 고난을 겪게 하려고 그 신 포도주를 먹였다.'라고 이렇게 하더라고요. 예수님은 고난을 감하는 몰약 탄 보도주는 받지 않으시고, 고난에 더 큰 고난을 가져다준 신 포도주는 받으신 것을 생각해 보니까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고난에 고난을 당한, 정말 십자가 앞에서 더 신 포도주를 받는 것과 같은 절망의 자리에서 누구도 손잡아주지 않고 초를 마시는 것과 같은 쓴 고난을 받는 자, 죽을 수밖에 없는 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묵상되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아버지도 그러한 분이셨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누구도 손잡아줄 수 없어가지고, 절벽에 낭떠러지에 서 있는데 누구도 손잡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고난에 더 극심한 고난, 절망에 더 큰 절망의 자리에 있었던 그 상황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으셨구나.' 피해자였음이 깨달아지게 되고 예수님이 그런 영혼을 위해서 죽으셨는데 나는 그런 환경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좋은 환경을 물려주는 아버지, 나에게 더 많은 기회만 주는 아버지를 찾고 그런 영혼들은 죽음에 막 던져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영혼에는 관심이 없는, 사역에는 진심이나 영혼에는 관심이 없는, 늘 몰약 탄 포도주만 마시며 내가 가해자임이 회개되어지기 시작을 했어요. 그때부터 아버지가 영혼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버지와 같은 자를 위해 주님이 애통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생각을 하니까 내 마음에 자기 연민, 피해 의식, 열등감이 막 풀려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막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내가 너무나 볼품없다고 피해 의식과 자기 연민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열등감을 가지신 분이 혹시 이 자리에 계십니까? 그것에 시달리는 분이 계세요? 아니면 저희 아버지와 같이 누구도 손잡아 줄 수 없는 절벽 위에 계신 분이 혹시 이 자리에 계십니까? '더 좋은 환경을 물려주지 못한 부모님, 왜 내게는 없는가?'하면서 자기 연민의 감옥에 갇혀 계신 분이 혹시 이 자리에 계십니까? 여러분 이 예배의 시간에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주목해 보십시오. 먼지와 같고 안개와 같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생각하시고 돌보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주기까지 사랑하시고 아들 삼으셔서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로 여러분 나아가 보십시오. 주님의 다함 없는 사랑을 맛보십시오. 아들을 주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셔서 절망의 환경에도 홀로 있지 않고 그곳에 넉넉히 이김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맛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때 자기 연민과 열등감과 분노가 다 풀려지게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적용] 주께서 하늘과 별보다 더 생각하시고 돌보시는 존재가 바로 나임이 믿어집니까? 주님의 사랑을 입은자로서 내가 생각하고 돌보아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주목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고, 그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고난이 축복이 되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이 시간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주님 앞에 겸손함을 회복합시다. 주의 은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로, 젖먹이와 어린 아이가 되어서 주님의 권능으로 살아서 차별이 없는 복음을 날마다 전하는 인생이 될 수 있도록 우리 그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어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합시다. 내 안에 쓴 뿌리, 자기 연민과 열등감을 벗어나게 하는 십자가를 붙드시면서 어떤 환경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생각하시고 돌보심을 고백하셔서 어떤 상황에서도 넉넉히 이기는 것을 누리시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목장 모임 참석
미혜, 연수, 예선, 해정, 우정, 민희
기도제목
미혜
어린이와 젖먹이 같은 나의 유한함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생각하심과 돌보심을 매일 의지할 수 있기를
아빠 부정맥 증상으로 다음 주 병원 가시는데 진료 과정과 결과에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기를
회사의 모든 장래를 인도해주시고 나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목장 식구들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생각해주시고 기도제목에 신실하게 응답해주시기를. 건강 지켜 주시기를
지영
엄마 항암 받을 수 있는 수치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또 엄마한테 꼬옥 맞는 항암제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제일 걱정되는 건 암의 내성이 생기지 않고 항암치료로 모든 암세포가 죽을 수 있도록
예선
어지럼증이 재발하지는 않았는데 귀가 조금 안 좋은 것 같아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아픈 것에 놀라 쭈그러드는 것이 아니라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 보며 하루를 잘 보내도록
자기 연민, 피해 의식,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붙들고 어린 아이와 젖먹이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누리며 가도록
목장 식구들과 아웃리치 위해 기도의 자리 지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