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12. '성령의 자유' (행 24:17-23) 김양재 담임목사님
제가 없는 동안 성령의 고백으로 사과 많이 하셨나요?
이번 선교 여행에 고위직에 계신 어떤 분을 만나 복음제시를 했는데 영접하셨다. 그분의 문제는 직장의 관계문제였는데, 상대에게 아무리 사과해도 진정성이 없다고 했다 한다. 그 분 때문에 저를 찾아오셨고 천하보다 귀한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그분이 사실 얼마나 공로자이고 고마운 분인가, 그 생각으로 가서 그대로 그렇게 사과를 해보시라고 했더니 그분이 적용해서 사과를 하셨다. 그랬더니 상대와는 상관없이 평강이 임했다고, 이것이 자유함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는 집회 참석하시고 예배 때 다시한번 일어나 확실히 영접하셨다. 이번에 이 한 분 때문에 간 것만 해도 제가 소기의 목적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한 분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오늘은 성령의 자유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합니다.
21절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오순절의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에 내려오시며 사도행전이 시작된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 예루살렘교회가 시작되고 세워지고, 바울에 의해 소아시아와 유럽에까지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계속 보고 읽고 듣고 있다. 오늘은 선교보고 겸 해서 말씀을 전하겠다.
이번에 간 터키가 바로 소아시아에 세워진 교회가 있는 곳이다. 얼마나 핍박받으며 세워진 교회인가? 서머나 교회 에베소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의 무너진 터를 보았다. 바울의 눈물로 세워진 선교지, 터키를 거의 다 이슬람이 꽉 잡고 있었다. 그 곳에서 예수 믿기가 너무 힘들었다.
왜 그럴까 THINK 해본다. 아마 그곳에 이스라엘 예루살렘교회나 터키 소아시아 교회가 그대로 있다면 전세계의 성지가 되어 터져나갈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건물이 우상화 된 것을 안좋아 하시니 무너지게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도 시신도 없게 하셨다. 그런데 샘플로 로마 바티칸 성당에 베드로 시신이 있다고 하니 거기에 미어지게 간다. 그 곳에 가보면 남대문 시장이 따로 없다. 성당 안에서도 다 떠밀려 간다. 이 땅에 우상 삼을 것은 하나도 없어야 함을 것을 보여준다.
이번에 중동선교사 수련회를 갔기에 중동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다. 소아시아 교회가 있던 터키가 알라를 믿는 이슬람으로 채워졌다. 이슬람은 이스마엘의 후예들이고, 이스라엘을 내쫓을 때 큰 나라를 이루리라 한 것 기억나시는가?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큰 자라는 생각 때문인지 영적인 피해의식이 있는 것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영적 피해의식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정말 믿기 힘들어 보인다. 그런데 그들은 아이들을 10명 이상씩 낳아서 점점 큰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이슬람국가만도 43개국에 달하고, 한국에 2009년에 3만5천명이었던 그들은 이미 100만명이 훨씬 넘은 지가 오래되었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알라로 무장되어 있고, 행위로 천국가야 하니 착해보여서 경건함과 종교심이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스마엘의 후예인 마호멧을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일생에 한번 사우디를 가야 하는 것이 5개 조항에 들어가 있다. 마호멧의 출생지 사우디의 메카가 성지가 되어 평생 돈 모아서 거기 가는 것이 소원이다. 그것도 특별히 12월, 한번에 수백만명이 해마다 참배한다. 수백만명이 해마다 참배하면서 돌던지기 행사로 마귀 쫓는다고 돌을 던진다. 그것도 가까이 가서 던져야 하기에 사람들이 많이 참사가 일어난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매해 많다. 근데 그들의 종교관이 거기서 죽으면 순교하고 천국 간다고 생각해서 부러워한다고 한다. 이들의 종교관이 무섭다. 그래서 자살폭탄 테러를 하다 죽어도, 알라를 섬기다 죽는 것이기에 다 기쁨으로 할 수 있다. 사우디 성지 한번 가려고 목숨을 건다. 우리도 현장예배를 그렇게 사모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모든 것을 갖춘 것 같은데 그들에게 없는 것이 자유함이다. 너무 경직되어 있다. 여자들이 이 더운데 부르카를 첩첩이 쓰고 다닌다. 땀띠 날까 걱정이 된다. 남자들의 종속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보기에도 멋있는 여자가 남편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데 그 남편은 오면서 그 여자에게 눈도 안 마주친다. 문화가 그렇다. 철저히 남자중심의 세계이지만 그들은 도덕의 유치원 시대에 살고 있고 영적 문맹자들로 보인다. 무섭다.
이렇게 알라를 믿고 있는데도 바울의 행적으로 관광객으로 먹고 산다. 터키 이스탄불만 해도 인구가 2천만명인데, 소아시가 일곱교회나 로마시대 지하 묘지 갑바도기아 등을 보러 이스탄불에 관광객이 1년에 4천만명이 들어온다고 한다. 바울이 전해 놓은 복음은 간 곳이 없고 바울 때문에 먹고 살면서 아무도 예수를 믿지는 않는다.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있다.
요즘 바울의 사도행전을 너무 감격하며 읽고 있는데 이 대단한 그곳을 이방인 중 이방인, 여자인 제가 그곳에 가서 복음의 메카인 소아시아 터키에서 복음을 전하다니, 이야말로 차별없는 복음의 진수가 아닌가?
이번에 중동지역 선교사 수련회를 터키에서 했다. 오프라인으로 처음 열리는 수련회에 비행기타고 와야 하는데 150여분이 참석하셨다. 이런 곳에서 선교하시니 얼마나 힘드시겠는가? 그런데 그 힘든 것도 이번에 가서 삶으로 전하니 다들 큐티인에 대해 관심이 폭발했다.
저를 불러주신 중동선교사협회 회장님은 서울대 조선공학과 졸업하시고 요르단과 모로코에서 20년간 사역하고 계신 분이었다. 3여년 전 THINK 세미나를 참석하시고 저를 아주 기다려서 부르셨다. 그 2년 7개월을하루도 안 빠지고 큐티인으로 큐티하고 계시다고 간증하셨다. 한글 4종세트 영문 4종세트를 가지고 나오셔서 큐티를 계속 비교하며 하신다 한다. 장년 큐티인이 안 깨달아지면 청소년 큐티인, 그것도 안 깨달아지면 새싹 큐티인까지 보니 새싹 큐티인의 한줄 큐티에도 깨달을 것이 있다 하셨다. 그리고 영어도 보신다고 열변을 토하시며 간증을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좋은데 큐티인 4종 한세트 보내려면 10만원 넘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곳에서는 종이 큐티인이 얼마나 귀한지 나가보면 안다. 그 곳에서 큐티인을 너무나 갖고싶고 하고싶어하신다. 그래서 이번에는 선교사님 전체에게 pdf 파일로 보내드렸다. 그런데 종이 큐티인과는 비교가 안된다. 그 선교사님께도 그동안 pdf 로 드리다가 종이를 드리니 비교가 안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서는 종이책도 안보고 큐티엠만 보는 분도 있다. 그래서 이번에 오신 분이 큐티인 사라고 하시는 것이다. 큐티인으로 목회하고 싶은데 이 4종세트만 있다면 하시는 선교사님이 너무 많았다. 책이 없으니 번역할 일 밖에 없다. 큐티 선교회가, 우리들교회가 너무나 할 일이 많다.
이번 선교사 수련회에서 마지막 피드백 하신 선교사님은 보통 수련회 끝나고 성령충만 받고 너무 좋아서 갔는데, 이번 수련회에서는 큐티를 반드시 해야 할 것 같다고, 여기서 복음 전하려면 기복이 아니라 팔복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셨다. 십자가를 길로 놓아야 하니 아주 무거운 마음으로 숙제 안고 간다고, 그러나 그 길을 안것 같아서 기쁘다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부담이 아닐까 싶다. 죽은 자의 부활을 만나고 전하셔서 자유를 만끽하며 경직된 중동지역 백성들에게 바로 이 자유를 선물로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지구상에서 가장 경직된 백성은 바로 우리 동포인 북한이다. 이 세상 아무곳을 가도 가장 땅끝은 북한이다. 제가 북한에 3번 다녀왔지만 문자적으로 그렇게 무서운 독재국가는 보지 못했다. 입을 다물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나라가 있을수 있나 생각이 든다. 그곳에 자유가 선포되기를 기도한다. 죽은 자의 부활인 예수님이 전해져야 한다.
제가 몇 주 전에 했던 24장 말씀을 기억하시는가? 복습해보자
17-20절
17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바울은 더둘로와 대제사장에게 고발을 당했다. 처음부터 여기에 왔을 때 결례를 행하고 왔는데 무조건 잡아서 이방인과 다녔다, 성전을 더럽게 했다고 했다. 그 때 내가 어떻게 예수 믿었는지 간증해서 1차변명을 했다. 그런데 중간에 듣다 난리를 쳐서 천부장에게 잡혀 천부장과 교회 앞에서 2차 변명을 했다. 그리고 그 때도 난리가 났다. 이번에는 벨릭스 총독 앞에서 3차 변명을 하는데 바울이 너무 억울하다. 누명을 썼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염병, 전염병자라고 더둘로가 고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성령의 고백은 대제사장의 고발과는 실제가 다르다는 것을 다시 보여준다. 그래서 벨릭스 총독 앞에서 소요죄에 대해 이단의 괴수에 대해 성전 모독죄에 대해 기꺼이 변명했다고 한다.
소요죄에 대해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지 열이틀밖에 안되었고, 예루살렘성전에서 결례를 7일동안 지키는 것을 본 증인들도 있기 때문에 자기는 어떤 소란을 일으킨 일이 없다고, 증인 데려오라 했다. 이단의 괴수죄에 대해서는 나사렛 그리스도교가 이단임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믿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자신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다고 했다. 성전 모독죄에 대해서는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하면서 비로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교회에서 부조 얻고 걷어와서 드리고 갔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이기기 위해서 변론을 한 것이 아니라 내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의 목소리로 공동체적인 고백을 했다고 한다. 그들의 고발이 유효하려면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고발은 증인들도 없이 순전히 날조된 거짓말을 했다. 바울은 그 공회에서 심문받을 때 자신이 위법사실이 있다면 말해보라 한다. 그 모든 변명을 다 끝내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외친 말 한 마디를 다시 강조한다.
21절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바울은 자신에 대한 변명을 마치며 다시 한번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증거한다. 바울이 팩트로 조목조목 변명했지만 그 이유는 그 한마디, 부활의 복음 전함 때문에 그 많은 변명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지만 오직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심문을 받는다 한다.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할 수 있는 자리에 대해서 자신은 더둘로와 경쟁해서 이기겠다고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붙들림 바 되어 전한다고 한다. 이런 바울을 보며 이것이 바로 자유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로마가 신경 쓸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아니라, 종교적 교리적 이슈였다는 것이다. 이 바울의 한마디 울부짖음과 외침은 비굴하게 사과한 것이 아니다. 사과를 하지만 죄인이라서 이런 사과를 한 것이 아니다.
죽음이 가장 큰 권세라면 죽음을 이겼기에 아무리 갇혀 있어도 부활한다. 그러니 아무리 갇혀도 아무리 뭐라 해도 바울은 절망의 옥 부정의 옥 미움의 옥에 갇히지 않는다. 죽은 자의 부활인 예수가 그리스도임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 복음이 나에게 복음이 되면 우리는 자유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자유이기 때문이다.
출 3:14에 보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하다.
그렇다 우리는 다 죽은 자 이다. 이 세상에 대해 죽지 않으면 부활을 소망할 수 없다. 그러니 죽지 않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전하고 갇히고 전하고 갇히면서 간다. 결국 그들은 바울을 죄인으로 가두었지만 하나님은 누가의 기록으로 그의 진실됨을 2000년 동안 전 세계에 알려지게 하셨다. 그러니 오늘 여러분 가정의 파괴의 원인이 여러분에게 있지 않아도,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예수님이라면 여러분이 가정을 지키면서 심문 받고 있는 여러분의 죄 고백의 나눔은 기록이 되어 영원히 남아 인류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다. 우리 큐티인의 나눔이 전세계로 가고 있다. 이것이 다 남아있는 영원한 영생의 보고들이 아닌가 싶다.
적용) 부활을 믿는다면서 여전히 절망의 옥, 미움의 옥, 의심의 옥에 갇혀있는 것은 무엇인지요?
죽은 자의 부활이 안 믿어지니 여러분을 때마다 죄인으로 가두어 놓는 사람은 누구 인가요?
집집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안 믿어지니 안 믿어지는 사람은 믿는 여러분을 다 죄인으로 가두어 놓는다. 안 믿어지는 사람은 믿는 사람을 날마다 옥에 가두어 놓는 것이다. 네 죄를 보라고, 니가 잘하면 내가 안 믿겠냐고 한다. 이슬람을 전하려면 행함으로 따라가야 하는데 그 사람들은 행함으로 따라갈 수 없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절망한다. 모든 것이 대단하다.
성령의 자유는 두번째
2. 치우치지 않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치우치면 안된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무섭게 믿으면 안된다.
이번에 보니 각 나라가 예배를 드리는데 다 치우쳐 있었다. 변화되려면 특별한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오래 전에 여성 목회하는데 너무 많이 모이니 이단 소리를 듣지 않냐고 어느 기자가 물어보았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다 이단이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제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누구 비위를 맞춘 것도 아니고, 평신도 사역하며 죽은 자의 부활 복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내가 말씀으로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말씀으로 치우치지 않고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방언 본문 나오면 방언 달라고 기도하고, 신유 말씀이 나오면 신유 달라고 기도했다. 말씀을 보며 남목사님의 말, 가만가만 무엇이 부족한가 했다. 무엇이 부족한가 하루도 빠짐 없이 말씀을 묵상하며 나의 치우침을 묵상했다. Balanced life를 살려고 애썼다.
어떤 교회는 양육만 강조해서 마른뼈 같고, 어떤 교회는 구원만 강조, 기도만 강조하면 너무 시끄럽고, 신유만 강조하면 무서운 교회다. 어느 교회는 전도만 강조한다. 그런 한가지만 강조하면 아무리 좋아도 이단될 확률이 너무 높다.
우리 큐티의 꽃은 적용이고 결론은 영혼 구원이다. 우리는 영혼 구원때문에 큐티도 하고 찬양도 하고 적용도 하고 기도도 하는 것이다. 말씀이 있기에 기도했다 하면 기도도 뜨겁고 찬양도 세련되었다.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 은혜로운 것이 가장 세련된 것이다. 모든 순서가 유기적으로 은혜를 끼쳐야 한다. 이것은 예배학을 배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만 바르게 읽으면 모든 것이 나오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환란이 주제가 되고 성경이 교과서가 되고 성령이 스승되게 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날마다 가만가만 오늘 말씀이 뭐라고 하시지 하니 필요한 것을 가르쳐 주신 줄 믿는다.
우리들 교회에 뭐가 가장 치우쳐있나 보니 말씀에 치우쳐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찬양시간에 처음부터 오지 않는다. 예배는 찬양부터인데 찬양을 다 사전 찬양으로 생각한다. 찬양부터 예배이다. 말씀 부터가 예배가 아니다. 그 부분이 치우쳐 있다.
우리가 이슬람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능력도 없지만 경건의 모양도 없는 것 같다. 그분들은 그렇게 안가면 큰일 날 것 같고 죽을 것 같은데 자유함이 너무 넘쳐서 방종으로 가는 것 같다.
이번에 갔던 공산권이었던 루마니아는 30년 전만 해도 공산권이었다. 그리스 정교회가 온 나라를 도배하고 있다. 공산권에서도 그렇게 교회가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다.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중동지역도 개신교는 발붙이기가 넘 어렵다. 그런데 영문 큐티인을 2월달 우크라니아 사태 때 헌금과 같이 보냈다. 그런데 그 큐티인이 국회로 들어가게 되어 이번에 제가 국회에 초청을 받았다. 그 날이 국회의원들과 더불어 발칸반도의 대표들이 일년에 한번 모이는 날이었다고, 제가 갈 때가 마침 그 때가 되어 제가 굉장한 모임에 초청받아 간증했다. 그런데 여자인 제가 그 곳에 섰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큐티인이 보급되는데 굉장히 영향을 미칠 만한 일이라 했더니 감사하다. 그곳에 어떤 미국 여성대표도 왔는데, 제가 세계 선교사 대회를 7월에 워싱턴으로 간다고 하니 미국에 오면 초청하고 밥도 사고 싶다고 했다. 사석에서는 시장님 교장선생님도 고위직에 있는 분들도 만나서 모두 말씀으로 삶을 설명하니 다들 너무 잘 들어주셨다. 각종 교계의 교단장도 만났는데 다들 큐티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다. 사석에서 저녁에 밥 먹으며 나눔하며 간증하고, 우리 평원님들이 간증했다. 사석에서 너무 은혜를 받았다.
마지막 날에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날에 큐티인에 대한 설명을 하는 기회를 가졌다. 평원님들도 간증했다. 이쪽은 우크라이나 선교사님이 통역하고 저기는 루마니아 선교사님이 따로따로 통역했다. 양쪽에서 얼마나 시끄러운가? 그리고 끝난 후 간증하는데 테이블 마다 모두 자기 나눔을 하셨다. 남편 때문에 우울하고 낙심되고 힘들고, 부모에게 차별 받아 힘들고.. 다들 처음으로 자기 나눔을 한다고 했다. 알라를 믿고 공산권인데 어떻게 그 나눔을 할 수 있겠는가? 공산권이든 이슬람권이든 사람은 다 똑같이 죄인이다. 그리고 바람은 세계 공용어였다. 그런 이야기를 다 못하고 사는 것이었다. 우리가 배울만큼 배웠다 생각하니 그렇다.
그러고 나서 루마니아 침례교 총회장 교회에서 제가 주일 설교를 했다. 가서 예배 드려보니 그리스 정교회가 아니라 침례교인데도 불구하고 들어가면 30분 찬양 30분 기도하고 30분 설교를 무려 두번이나 한다. 그리고 여자는 찬양대도 못 서고 설교도 못한다. 반드시 치마를 입어야 한다. 그런데 아침에 제가 비행기에서 내려서 왔기 때문에 바지를 입고 강단 아래에서 설교를 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안 되었다. 거기서 삶으로 간증을 하니 다들 들었다. 지루해 하다가 다들 눈을 반짝였다. 너무 형식 전통에 치우쳐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젊은이들이 다 떠난다 했다. 30년 전 공산권일 때는 환란과 핍박 중 예배가 다 살아있어서 교회가 부흥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예배 자체도 말씀만도 능력이 있어 부흥되었는데, 지금은 조금 편해져서 젊은이들이 다들 떠난다 한다. 노인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도 예배만 드리다가 삶으로 말씀을 설명하니 삶은 만국 공통어라는 것을 알았다. 삶으로 적용해주는 이야기를 하니 그 전통교회도 큐티인에 대해 관심을 표했다.
바울 때도 방해가 심했지만 지금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다 치우쳐 있기 때문에 교회 한번 나가기 위해, 또 큐티 하기 위해서 사단은 교묘하게 오기에 우리가 늘 깨어있어야 한다.
적용) 여러분은 말씀 기도 선교 구제 찬양 치유 방언 전통 등 어디에 가장 치우쳐 있습니까? 사도행전의 그 유명한 교회들이 다 무너진 것에 대해 아무리 좋은 것도 보이는 것들은 다 무너진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십니까?
동의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너무 편해진다. 자유함 100프로이다. 이것이 동의가 안되니 힘든 것이다.
성령의 자유는
3. 삶으로 살아냅니다.
22절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이렇게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니 벨릭스가 바울보다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안다고 한다. 어떻게 알았을까?
24:10절에 보면 바울이 말하기를 벨릭스 총독이 여러 해 전부터 유대민족의 재판장으로 있었으니 당연히 당시 유대민족의 종교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그래서 바울이 변명하기 쉬워서 기쁘다고 했다. 갓 부임한 총독이 아니라 오래된 총독이어서 그렇다. 더구나 아내 드루실라는 유대인이었다. 또한 가이사랴에는 오래전부터 빌립 집사가 복음을 전해왔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그러니 그는 바울이 실정법을 어긴 일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아는 고로 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뜻은 알면서도 이다. 벨릭스는 바울이 무죄임을 알면서도 석방하지 않았다. 바로 무죄 판결을 내리지 않은 것은 뇌물의 힘인 것 같다. 뇌물은 받았는데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뜻을 바로 꺾기가 민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판결을 연기했다. 그리고 다시 바울을 다시 감금한다.
또 한가지 이유는 26절에 보면 바울에게 돈을 받고자 했다. 벨릭스가 총독이면서도 돈에 대한 탐욕이 끝이 없다. 정치가 다 그런 것 같다. 정말 무죄인데, 완전히 죄가 아닌 줄 아는데 돈 받았다고 못 풀어주고 풀어주고 한다. 이것이 정치의 세계이다.
벨릭스는 예수의 도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었지만 도를 따르지 않았다. 삶으로 살지 못했다. 여기 더 잘 알고 있다고 한다. 공부 많이 해서 아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알면 뭐하겠는가, 살지 못한다. 오늘 성령의 자유는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데 그렇다. 벨릭스는 예수의 도를 따른 것이 아니라 유대인 지도자들의 눈치만 보면서 자기 욕망을 따랐다.
안다는 것은 인격적인 지식을 말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머리로만 알았을 뿐 삶으로는 전혀 깨닫지도 따르지도 않았다. 반면에 바울은 구속된 사왕에서도 자신이 알던 그 도를 따라 삶으로 담대하게 전하고 있다.
예수의 도를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을 넘어서 반드시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켜야 한다,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를 잘 누리려면 아는 것을 넘어서 살아야 한다. 모압에서 완전히 유턴해야 한다. 성령의 자유는 안다는 것을 넘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살지 않는 사람은 자유가 없다. 살지 못하기에 욕심이 없어서 늘 두려운 것이다. 자유를 누리려면 잘 살아야 한다.
바울의 선교여행지인 토로스 산맥을 우리가 굉장히 많이 묵상했다. 이번에 버스 타며 지나며 봤는데 정말 험산 준령이었다. 바위산 같은데 마가가 진짜 가기 싫었겠다는 것이 저절로 들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복음이 구속사적이라 유대인의 방해가 원색적이게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왜 바울이 전하면 저렇게 다 죽이려고 했을까? 우리가 날마다 구속사라 하는데 도대체 구속사가 무엇인가?
이번주의 구속사는, 창세기에서 믿음의 조상인 야곱이 끝까지 사랑한 사람은 라헬과 요셉이었다는 것이다. 요셉을 만나고 나서는 죽어도 좋겠다고 한다. 그러면 다른 아들은 무엇인가?
야곱이 끝까지 사랑한 라헬과 요셉은 누가 봐도 상품이 좋다. 야곱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의 조상인 야곱이 사랑했다 해도 하나님의 커트라인에는 그 사랑받지 못한 레아와 아들 중 며느리와 동침한 유다가 더 위에 올라갔다. 분명히 그렇게 라헬 타령을 했는데 레아가 약속의 땅에 묻혔다. 그리고 라헬은 베들레헴 길 가에 묻혔다고 한다. 그리고 요셉이 아니라 유다가 예수님의 직계조상이 되었다. 컷트라인이 더 위에 올라갔다.
믿음 있는 내가 좋아한다고 천국에 똑같은 순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천국은 내가 생각하는 고정관념, 예쁘고 총리로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힘들고 죄 많고 수치스러운 사람들이 회개하고 가는 곳이 천국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적인, 구속사적인 가치관이다. 우리는 이쁘지 못해서 아들이 공부 못해서 죽을 지경이다.
성경에서 레아는 사랑받지 못한 레아는 예수님 만나서 아들 이름을 내가 찬송하리로다, 연합하리로다, 후한 선물 이라고 짓는데 사랑받는 라헬은 억울하도다 형과 경쟁해서 이겼도다 죽을 때도 슬픔의 아들 베노니 라고 짓는다. 그것이 남편 사랑받은 사람이 할 말인가? 야곱도 마지막에 알아보고 레아를 약속의 땅 막벨라 굴에 묻었다. 야곱이 사랑한 것과 하나님의 컷트라인은 다르다.
그리고 요셉인 줄 알았는데, 요셉도 마지막에는 아버지를 기뻐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유다는 아버지를 위해 내 생명을 내놓겠다고 한다. 아버지를 위해 생명 내놓은 사람은 유다이다. 그러니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했다고 수치스럽게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살리는 사람이 된다.
유다와 라헬은 화평과 화목의 언어를 쓰지만 마지막 결론이 정말 아니올시다 였다. 이 구속사를 들으니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는 우리는 맹렬한 분이 일어난다. 내가 요셉이고 라헬이니 그렇다. 여러분도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이번주의 구속사적인 가치관이다. 이렇게 성경을 읽어서 다 자유함을 누리지 아니면 우리가 뭐가 다 없으니 너무 지옥을 살지 않겠는가? 이걸 젊은 날부터 듣는 여러분들은 얼마나 복된지 모른다. 이런 가치관이 있으면 어딜 가도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큰 무기를 가진다. 우리의 설교를 들은 모든 분들이 이렇게 모두 간증을 쓴다.
우리는 난민을 너무 불쌍히 여기는데, 터키에 난민들이 몰려든다. 지금 난민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하지만, 그 전도가 안되는 그 힘든 터키에 있어도 힘든 디아스포라 난민교회는 다 부흥한다. 우리가 불쌍히 여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이기를 너무 기뻐한다. 우리가 누구를 동정하는지 모른다. 그들을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신다. 그런데 우리는 돈 좀 갖다주고 너무 잘난 척 한다. 그리고 너무 행세한다.
마찬가지 원리이다. 바울의 복음 들은 사람은 확실히 구원과 심판으로 갈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도 사단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의 이 복음을 듣고 요셉과 라헬은 얼마나 싫겠는가? 어떻게 유다와 레아를 최고라고 하는가? 아는 것을 넘어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
알라를 믿는 그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지하드라 표현한다. 지하드가 성전, 전쟁이다. 각자 집에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그곳에 우리가 가서 전하니 사모님은 너무 사모해서 기뻐했다. 근데 선교사님은 문화가 너무 달라서 힘들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선교사님께 우리도 이 가정의 문제에서 목숨을 걸지 않으면 가정을 지켜낼 수가 없다고, 그런 분들이 있다고 했다. 가정을 지키려고 망치에 머리를 맞은 엄마도 있다고 했다.
그 선교사님 부부 교회는 2009년에 들어가서 2022년 현재 교인이 30여명 가량 되는데 아주 부흥하고 있는 교회이다. 그 교회에서 고등학교 자매가 찬양 인도하는데 다 죽음을 무릅쓰고 나오니 너무 은혜롭고 너무 영적이다. 이런 곳에 선교사님이 들어가 있다. 그냥 열매가 없어도 삶으로 살아내고 있어서 그렇다. 삶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전해지기가 너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아시아에서 바울이 세웠던 교회가 다 무너지고 지진에 휩쓸렸지만 전 세계에 바울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것을 보면서 저는 우리들교회가 없어진다 해도 우리가 삶으로 살아낸다면 전 세계에 이 구속사의 복음이 전파되어서 큐티인 무브먼트 사역이 강에서 바다로 나가는 운동이 일어날수 있겠다 생각했다. 우리들교회가 없어진다 해도 큐티인으로 전파되는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그래서 날마다 실제적이라고 이렇게 알려주고 계신다. 제가 처음부터 한번도 여기에서 궤도수정한 적이 없다. 그렇게 되기를 소원한다.
이번에도 주일 설교에 제가 없는 동안에 THINK 목회자 세미나를 참석하신 개척교회 시골교회 목사님, 교회는 크지만 힘든 젊은 목사님들이 큐티 무브먼트에 힘입어 차별없이 복음을 다 전해주셨다. 특별한 사람이 복음을 잘 전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님께서 말씀 묵상을 죽자고 하셨다 했다. 온 교인이 안 해도 목사님이 죽자고 하게 되니 그 시골교회도 부흥이 일어났다고 했다. 우리와 같은 마인드의 설교를 하게 되는 것을 보았다. 구원을 악세서리 쯤으로 여기는 목사인 가만가만 목사님, 큐티를 사고 들고 읽어라 목사님, 니가 나를 사랑하냐? 궤도수정 질문으로 말씀을 전한 목사님이셨다. 개척교회인 그 작은 교회는 코로나 기간에 150명으로 부흥되었고 시골교회는 1년 예산이 6천만원에서 4억으로 늘었다고 한다. 그 큰 교회 목사님은 아무도 안 알려줬는데 서고에 꽂혀있던 큐티인을 보고 아무것도 몰랐지만 천 권을 시켜서 2년째 해 오고 있다고 하셨다. 삶의 궤도수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분이 큐티하고 바뀌니 큐티 목회하는 교회로 바뀌었다. 바로 이것이다.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로 바뀌어가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너무 놀랍지 않은가? 제가 말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다. 얼마나 역사의 현장에 있는지 모르겠다. 앞으로는 설교 잘하는 목사보다 사람 살리는 목사가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교계의 지각변동을 기대한다.
적용) 말씀에 대해 안다고 하면서도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면서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4. 복음 전하는 자유입니다.
23절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벨릭스도 자신의 연기 결정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에게 큰 호의를 베푸는 척 한다. 선고를 연기하고 자유를 주라고 한다. 친구들이 돌보는 것을 허락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베풀어주는 것 같은데, 갇혔지만 갇히지 않은 애매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며칠 전 테러를 당할 것 같은 처지를 생각하면 지금 안전하게 지켜지면서 개인적인 신변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은혜이다. 우리 공동체도 다시 한번 도약하기 위해서 사명을 위해 생각지 못한 자유라도 얻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벨릭스가 자유를 주어도 그 자유를 누리려면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 믿고 살고 누리리는것이 핵심 가치이다. 이 자유함이 없다면 편함도 갇힘도 다 못 누린다. 누린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해변에서 강만 쳐다보는 것이 누리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아무것도 안하고 누리는 것 같은가? 바울은 벨릭스가 부여한 자유를 이용하여 계속해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2년간 복음을 전했다. 바울의 몸이 구속된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억울하게 수감되게 하셨다. 갇혀 있으나 편한 환경이거나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최고의 자유함이다. 그것이 성령의 자유이다. 그런데 내가 억울하다, 왜 갇혀있나 해서 화나고 억울하고 분노조절이 안되어 분기탱천하고 있으면 교만으로 인해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는가? 감옥에 갇혔어도 자유함이 있으면 거기서 계속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갇혀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빛나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부터 입시에 갇혀 있었다. 중고등학교를 다 입시를 치뤘다. 입시지옥이라 한다. 놀아본 적이 없다. 근데 졸업 하자마자 결혼했고 다시 감옥에 갇혔다. 평생 뭘 해본게 없다. 저는 13년간 저에게 주어지면 하고싶은 버킷리스트가 너무 많다. 이렇게 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상상이 되는가? 제가 꽃띠 30대에 과부가 되었다. 이 땅이 전부라고 할 것 같으면 너무 불쌍한 인생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자유가 최고의 자유인 것을 고백한다. 어딜가도 이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리고 전하는 것이 쉼이다. 전하는 것이 저에게 낙원이다. 한마디 말하면 전하고 교회가 살아나는데 어디가서 가만히 놀고먹는 것이 너무 힘든 것이다. 그렇게 체질이 바뀌었다. 시간이 없으니 더 하다. 그러니 제가 항암하면서도 목새 20시간 강의했다. 근데 항암하면서도 듣는 사람이 더 힘들어 했다.
여러분이 나와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여러분도 다 힘들다. 가족 남편 아내 다 힘든데 목장 가서 복음 전하는 최고의 자유를 누리니 일주일을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다 똑같이 이 환경에서 갇혀 있는데 다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최고의 자유인가?
여러분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면 자유라고 생각하는가? 인생이 너무 짧다 그러니 다른 꿈을 꾸지 말라. 나의 지금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결단하면 최고의 자유함이 밀려올 줄 믿는다.
적용) 여러분의 자유는 복음 전하는 자유입니까? 나 자신을 위한 자유입니까? 여러분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말씀 맺음
성령의 자유는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임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치우치지 않는다. Balanced Life를 산다. 무섭지 않고 시끄럽지 않다. 우리는 균형 잡혀있다. 아는 것에서 나가서 한가지라도 적용해서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어떤 갇힌 곳에서도 복음 전하는 자유가 최고의 자유이다. 갇혔으니 복음이 빛이 나는 것이다.
제가 좋은 집에서 잘먹고 잘살다가 지옥갈 뻔 했다. 이렇게 복음 전하는 자유를 주셔서 상상하지 못할 성령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보셨으면 좋겠다. 살아계신 주를 만나기 때문이다.
[ 기도제목 ]
*은선
1. 진로 말씀으로 분명하게 인도함받기를, 아직 들을 마음이 되지 않아서 내 수준에 맞게 말씀해주시기를
2. 진로, 공부, 세상 성공과 관련된 모든 욕심이 결핍과 궤도이탈, 그리고 내가 왕되고자 하는 것에서 비롯됨을 깨닫고 매일 말씀으로 하나님앞에 죽어지고 회개할 수 있기를
*보련
1. 중요한 일을 할 때 내가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인되시길
2. 말씀 보면서 하루 살 수 있도록
3. 서류결과 나올 때까지 인내하는 시간 기를 수 있도록
*크리스틴
1. 큐티가 잘 깨달아 질 수 있도록
2. 어머니 다음주 어깨수술 잘 되도록
3. 일 하는데 정신과 체력 주시기를
4. 차 잘 고쳐지기를
*교희
1. 스스로를 가두는 죄책감과 트라우마와 피해의식의 감옥에서 자유로워지도록
*은우
1. 죽은 자의 부활인 예수 그리스도, 복음 전하는 자유를 누리는 분별과 지혜 그리고 성령이 함께해 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