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7 끝까지 수고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28:10-22
김의환 목사
제가 코로나로 힘든 시간을 보내서 이번주에 혹시 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목요일부터 마스크를 두 개씩 쓰면서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이렇게 나왔습니다. 제 인생은 늘 기본이 3수 이상인 거 같아요. 처음에 베드로 설교를 준비하고 이삭 설교를 준비했는데 결국은 야곱을 설교하게 되네요. 하나님의 최고의 세팅인 줄 믿습니다. 이 강단이 야곱인 제가 말씀이 들리고 회개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구요. 저나 우리 듣는 성도님들이나 인간의 최고의 감정을 느끼시는 성령의 황홀한 시간되기를 축복합니다.
1. 나를 빈들로 인도하십니다. (10-15절)
브엘세바는 어떤 곳입니까?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은 곳입니다. 맺은 언약이 지속되기를 바라며 에셀나무를 심고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한 곳이죠. 이 브엘세바 공동체, 이 교회 공동체를 떠나고 또 가족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특히 자신이 너무나도 의지했고 사랑했던 리브가 엄마의 품을 야곱은 떠났습니다.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아무것이 없는 빈 들로 내몰리죠. 창세기 35장 10절 말씀으로 볼 때 지팡이와 약간의 소지품만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첫날은 어느 목동의 오두막에서 잤을 것이고 둘째 밤은 친절한 낯선 사람과 보냈겠죠. 그리고 사흘 후에 집에서 100km 떨어진 광야에서 길을 잃다라는 뜻을 가진 루스라는 곳에, 야곱의 처지와 너무 닯은 루스라는 곳에 도착을 합니다.
11절 읽겠습니다.
한 곳, 루스에 이르렀는데 해가 뉘엿뉘엿 집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엄마 생각에 눈물도 흘리고 하나님의 축복은 이런 것인가? 이런 것이면 내가 괜히 아버지와 형을 속여집안에 분란만 일으킨 것인가? 나의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 에서가 쫓아올까봐 급하게 달려온 터라 피곤에 지친 야곱은 단단한 심령과 닮아 있는 돌베개를 베고 깜박 잠이 듭니다. 이 장면을 보는데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모범생인 저는 고등학교 때 딱 한 번 10일 정도 가출한 적이 있습니다. 성적이 떨어지고 사춘기가 늦게 와서 무기력할 때예요. 원래는 총명했는데 무기력하니까 아버지와 갈등이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늘 잔소리를 하시니 늘 집에서 도망 나오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방에 들어가서 침대 커버를 딱 제끼니까 만원짜리가 수북이 있더라고요. 바로 이거다.해서 가방에 그 만원짜리를 넣고 지팡이 대신 모자와 간단한 소지품을 챙겨 서울행, 중학교 때는 서울에 있었으니까, 서울행 버스를 탔습니다.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지더라고요. 친구에게 연락했는데 엄한 아버지가 안된다고 그러셔가지고 갑자기 갈 데가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 절망적인 그 시간에 무엇이 생각났겠습니까. 교회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여름인데도 배고프고 옷도 없고 반팔인데 춥더라고요. 긴 장의자에 누워서 추우니까 신문지를 이불로 삼고 누워 잔 기억이 있습니다. 집을 나오면 그때나 지금이나 고생인 건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반복되는 지시대명사가 있습니다. 한 곳, 거기서, 그 곳, 거기 한 절에 장소가 4번이나 강조되어 나오죠. 어떤 메시지입니까? 야곱은 정처없이 떠났지만 야곱을 위한 하나님의 예비된 세팅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세팅입니다. 왜 광야가, 빈 들이 최고의 세팅입니까? 죄인 된 인간은 내가 의지할 것이 있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거든요.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야곱은 족장의 가문으로 모태 신앙이고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부유했을 것이에요. 그러니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을 야곱은 만나지 못했고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늘 자신의 머리를 의지했고 자신의 편을 드는 엄마를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 자체보다는 그 하나님에 손에 들린 복만을 구하는 기복 신앙이었습니다. 전혀 말씀이 들리지 않을 단단한 돌같은 심령이니 택자인 야곱을 하나님은 말씀이 들리는 환경인 빈 들로 인도하십니다. 저번 주일에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아야 부활을 소망한다고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야곱의 자아가 펄펄 살아있으니 아무것도 없는 광야 한복판에 눈과 귀와 입을 닫고 잠을 자는 죽음의 환경으로 하나님께서 몰아가시는 것이죠. 야곱을 죽이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이 야곱과 같이 낮아지셔서 이 땅에 오심으로 야곱을 구원하고 부활의 소망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12절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51절을 보면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야곱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인자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죄와 허물이 많은 야곱에게 친히 그 수준으로 낮아지셔서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죠.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늘 오르락 내리락 하십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수행을 하고, 고행을 하고 사닥다리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유일신인 하나님만이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셔서 죄인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내려오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은혜의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13절, 14절 읽겠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친히 찾아오실 뿐만 아니라 외롭고 힘든 그 날 밤에 오셔서 앉지도 않고 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스스로 계신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주었던 그 언약의 말씀을 다시 생각나게 하십니다. 늘 들었던 말씀이지만 편안한 환경에서는 안 들리는 것이죠. 광야에서 이 말씀이 무엇인지 야곱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너무나도 두렵고 불안한 야곱에게 딱 필요한 말씀을 추가적으로 주십니다.
15절 읽겠습니다.
야곱을 떠나지 아니하시겠다 라는 말은 '내가 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내가 변화될 때까지 내가 끝까지 수고하겠다.'라는 주님의 위로의 약속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날 밤에 곁에 계신 주님의 위로의 말씀으로 살아났습니다. 인생의 그 날 밤에 어떤 사람의 말이 우리를 위로하겠습니다.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말씀 읽고 기도하고, 그래서 하늘로부터 위로의 말씀을 들으면 살아나는 줄 믿습니다. 야곱은 죽음의 그 날 밤에 빈 들에서 말씀이 들리고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들리는 빈 들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최고의 세팅인 줄 믿습니다. 저도 야곱과 같이 모태 신앙이지만 기복주의 가치관으로 일평생 '누가 크냐?' 풀어서 '너는 어디 학교 나왔냐? 무슨 일을 하냐? 연봉이 얼마냐? 교회도 어디 교회 다니냐? 거기서 직분이 뭐냐?'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가 저의 삶에 큰 비중이었습니다. 그래도 중학교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젊은 날 저의 방탕한 이야기를 듣고 저를 많이 오해하시는데 원래는 장래가 촉망되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얼굴도 모범생 아닙니까? 역삼동에 유명한 대형 교회 영아부 출신으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5살 때 다 외우는 신동으로 시작해서 초등학교 때도 공부를 잘하고 명랑하고 신앙심이 깊은 아이였습니다. 성가대를 한다고 혼자 고덕동에서 강남까지 멀미하면서 2시간을 버스를 타고 매주 한 번씩 성가대 연습을 가서 홀로 하고, 또한 집에서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 어린 초등학생이 스스로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서 회개 기도를 하는 그런 어린 아이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회개의 감정을 아는 어린 아이인 거 같아요. 그리고 공부도 잘해서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세우신 배지 학당에 중1 때 종교 부장으로 그렇게 입학을 했습니다. 이후 사춘기가 오면서 이성에 관심이 생겼는데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니 오랫동안 방황하게 되고 가고 싶었던 특목고도 떨어지고 집도 대전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대전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많이 힘이 들었어요. 이상하게 중학교 때는 IQ가 136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IQ 테스트에서 106으로 나오더라고요. 왜 그렇게 하락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에는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수능을 다섯 번이나 봤지만 결국에는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하고 걸어다니는 입시 정보 사전이라는 별명만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고 술을 몰랐는데 정말 술을 마시며 방탕한 삶을 살다가 카드의 빚을 지게 되는 지금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교차로에 찾아보니까 월급을 많이 주는 데는 용모 단정한데 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술과 음악이 있는 단란한 가게에서 5개월 알바하는, 모범생이 상상할 수 없는 바닥까지 내려가는 그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해석해 줄 공동체도 없었고 이제 고등학교도 졸업했으니 부모님이 제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었습니다. 늘 혼자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였습니다. 그래도 간간히 교회 나갔지만 기복적인 말씀을 주로 들었던 것 같아요. 당시 몇몇 교회에서 유행하던 이론은 고지론이었습니다. 등산가가 고지를 정복하듯이 세상을 정복하고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는 논리이죠. 경쟁 사회에서 고지를 정복해서 세상에서 이왕이면 잘돼서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다니엘이 돼야 되고, 이 시대의 요셉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아이비 리그 출신들의 간증과 책이 유행했고, 꼴찌하던 사람이 기도해서 서울대에 가고 그런 간증 테이프가 유행했었어요. 그 얘기를 들으면 저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에 가서 제 손을 머리에 얹고 아이큐를 회복하게 달라고 다시 머리 좋게 해달라고 안수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공부하면 잘된다고 해서 새벽 2-3시에 일어나서 공부도 해봤는데 아침 잠이 많은 저랑은 안 맞더라고요. 오히려 더 낮에 많이 자가지고 역효과를 봤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볼 때 기도하고 찍어보기도 하고 결국에는 다 잘 안되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나봐.' 절망도 많이하고 그래서 부모에게 반항하는 아이처럼 세상에 나가서 더 막 살은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들교회 와서 느낀 것인데 제가 공부에 은사가 없다 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공부를 안 해도 시험을 잘 보시는 우리 이성훈 목사님이 계시더라고요. 저는 해도 안 되는데. 그래도 담임 목사님이 안되는 역할도 있다 라고 하시니 제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목장에 박사님만 다 있으면 재밌겠습니까? 청소년 큐페에서 김정태 목사님이 본인의 수능 점수가 제 중학교 때 IQ 정도라고 오픈해주셔서 제가 너무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그런 공부 안하는 우리 김정태 목사님도 있고, 해도 안 되는 우수한 저도 있고, 공부 안 해도 시험 잘보는 우리 이성훈 목사님도 있어야 목장이 재밌고 평균케 되지 않겠습니까? 당시 제가 재수생 큐티 모임을 알았다면 참석해서 말씀을 깨달아 정말 세월을 낭비하지 않고 더 귀하게 쓰임 받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늘 있습니다. '다니엘 아니고, 요셉이 아니고, 유다야, 다말이야.' 이런 말씀을 일찍 들었다면. 여러분 '너는 나보다 옳도다.'의 지혜로 하나님 나라 리더가 되는 유다와 다말 학습법 들어보신적 있나요? 다니엘 학습법, 요셉 학습법 들어보셨어도 이거는 못 들어보셨을 거예요. 영어 이름도 Daniel, Joseph은 많아요. 그러나 유다, 다말, 라합은 별로 없죠. 우리들교회 일찍 오셔서 아이들을 붙회떨감의 가치관으로 공동체에 붙어 가게 하시는 분들은 정말 수지맞은 인생입니다. 5년 동안 수능 이후에도 고시와 공무원 시험도 5년 동안 시간을 낭비하고 중간에 편입 시험도 세 번이나 보았습니다. 시험의 광야에 온전히 던져져 죽임을 당하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완전히 망하고 실패한 그 빈 들의 순간에 나의 확신과 기복의 헛된 고지론이 깨어지고 낮은 자리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방탕한 그곳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계시더라고요. 한 때는 술에 취에 거울을 보면서 '이런 추한 제 모습도 사랑하시나요?' 주님께 물은 적이 있는데 그 마음 가운데도 '그럼에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피투성이라도 살아만 있어라.' 언뜻 들은 말씀들이 그 광야의 시간에도 제 마음속 깊이 울렸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돌아보니 교만하고 기복적인 내가 낮아지고 죽어지기 위해서 바닥까지 내려가는 빈 들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음이 인정이 됩니다. 죄 짓고 망가져서 은혜 없이는 살 소망이 없는 가운데 바닥까지 내려오신 성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김의환의 하나님'이라는 언약의 말씀이 들리는 축복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빈 들과 광야에 계신 분들이 있다 라면 돌과 같은 나의 가치관이 깨어지고 약속의 말씀이 들리기에 가장 좋은 환경임을 알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에 잘 통과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적용] 나의 빈들은 어디입니까? 나의 광야와 빈 들이 말씀이 들리기에 최고의 환경임이 인정되십니까? 깨어져야 할 돌 같은 나의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나의 벧엘 간증은 무엇입니까?
2. 나를 말씀으로 양육해 가십니다. (야곱의 자립신앙) (16-19절)
여기서 알지는 히브리어 야다입니다. 부부 관계의 친밀한 앎을 의미합니다. 모태신앙인 야곱은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너무 잘 알았지만 야다의 앎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 가운데 말씀의 양육을 받으니 그 당시에는 신들마다 자기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고대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치관이 깨어지고 브엘세바 뿐만 아니라 루스, 이곳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므로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거룩한 두려움, 건강한 두려움이 생기고 이곳 또한 하나님의 집이요 성전이라고 고백합니다.
18절, 19절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 것을 깨달은 야곱은 자신이 베개로 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여행자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그 비상용 약품인 그 기름을 부어서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신앙 고백을 하고 그곳을 바로 하나님의 집, 베트 엘,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야곱은 지금 무엇을 한 겁니까? 처음으로 스스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말씀 양육 후에 비로소 자립 신앙이 생긴 것이죠. 우리들교회는 야다의 앎이 없는 성도님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자립 신앙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교리나 지식 중심이 아닌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살아내게 하는 구속사적인 양육을 합니다. 저도 사실 말씀을 가르치려고 성경을 보았지 매일 매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내 죄 보는 큐티는 하지 못했거든요. 실질적인 자립신앙은 없었습니다. 우리들교회 와서 차근차근 하나씩 양육 받으면서, 또 설교를 녹취하면서 스스로 묵상하고 삶에서 적용하는 그런 자립 신앙이 비로소 생기게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말씀이 안 들리니 일대일 양육하면서 많이 혼난 기억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THINK 양육 본문인데 기억나는 몇 가지만 얘기해보면 '지옥같이 생각되던 회사, 남편, 아내, 자녀가 있는 곳이 오늘 하늘의 문이 열리는 곳입니다. 나의 배우자가 육신의 정욕으로 그러는 것을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장소가 하나님의 전이 됩니다.' 이런 말들이 지금은 너무나도 잘 이해가 되는데 그 당시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방언처럼 들리더라고요. 당시는 '내가 알지 못하였습니다.'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붙어만 갔더니, 담임 목사님 설교가 그렇게 좋은 지 제가 몰랐는데 녹취를 하니까 너무 깨달은 부분이 많더라고요. 정말 처음에 저도 9시간씩 녹취를 했어요. 그것 때문에 저도 포기할 뻔했는데 정말 그런 여러 가지 다른 방법 쓰지 마시고. 그때 화도 나고, 그러면서 또 회개가 됩니다. 꼭 녹취를 하셔서 말씀이 들리는 그런 은혜를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양육을 받는 가운데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요. 꼭 양육 받을 때 아내와 싸우게 되더라고요. 웃으신 분들은 경험하신 분들입니다. 최근에 예목 2를 받으면서 있었던 일을 나누면 아내가 '부스터 샷을 맞아서 몸이 안 좋으니 나는 쉬어야겠다.' 토요일에 예목이 있는데 토요일에 아이들 밥을 주라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예목 숙제를 해야되니까 바쁘다. 그냥 라면 주던지 배민에서 시켜먹겠다.' 그러니까 '맨날 애들 라면만 먹인다. 그리고 땅을 파봐라 돈이 나오냐. 시키긴 뭘 시키냐.' 그렇게 실갱이 하다가 저도 마음이 급하니까 그냥 방에 급히 들어가서 숙제를 했습니다. 아내가 방에 쉬다가 나와 밥을 하면서 제 욕을 계속 하는 거예요. 저도 듣다가 참다가 터져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습니다. 최근에 은혜 받은 여자 초원님 설교를 이야기하면서 '제발 권사님의 설교를 들으라.'고 '남편이 아예 나가버려도 잘 적용하지 않냐.'고 '나를 없이 생각하라고. 제발.' 그러니까 아내는 완전 뚜껑이 열려서 '눈에 너가 보이니 더 화가 난다.'라고 '나가라고 못살겠다.'고. 그렇게 이제 오전에 난리가 나니까 제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아 양육 받아 뭐하나. 이렇게 녹취해 뭐하나. 다 때려치자.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적용으로 무거운 마음으로 오후 3시 토요일날 예목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예목 1 때와, 그때도 한참 아내하고 싸울 때인데 그때 양육해 주셨던 평원님이, 동일한 분이 제 앞에 앉아있더라고요. 또 같은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고요. 남편에게 맞은 이야기, 또 여전히 지속되는 고난. 그래도 남편을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섬긴 이야기. '고난보다 남편을 미워했던 나의 무시무시한 살인죄가 더 크다.'라고, 맞았는데 본인이 더 죄인이라고 고백하시는 거예요. 제가 거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고난이 있으니 진짜 한 말씀, 한 말씀 쏙쏙 들어오더라고요. 진짜 다툼과 갈등이 성령의 소망이 맞습니다. 많이 울고, 많이 위로 받는 귀한 양육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러면서 또 한 텀, 한 텀 우리가 넘어가는 것이죠. 사람은 진짜 잘 바뀌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들어야 바뀌는 것이죠. 말씀을 깨닫고 들리게 하는 방법은, 우리들교회 와서 깨달은 것인데, 빈 들의 환경과 반복되는 양육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THINK 양육을 하고 좀 변했다 싶으면 다시 돌아가고 그러면 양육 교사 받고, 그러다 좀 변했다 싶어 부목자가 되고. 또 봉사를 시작하면 생색이 나고 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그럼 예목 1을 받고, 그래서 목자가 되면 교만해져서 처방하고 가르치려다가 속 썩이는 부목자, 목원 만나서 고난 가운데 예목 2를 받고 그러면서 양육이 되어지는 것이죠. 지금 바로 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 바뀌는 것 같은데 반복적인 고난과 양육이 있으니 제 가치관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더라고요. 내 죄를 보는 큐티가 이제 조금씩 조금씩 되는 것 같습니다. THINK 양육, 양육 교사, 예목 1, 예목2. 40주의 양육이 2월 26일 오후 5시 47분 30초에 마쳤습니다. 아직 따끈따끈한 목자입니다. 성도님들 가운데서도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하시는 분들이 계실텐데요. 광야도 싫고 양육도 싫다.' 하는 돌같이 굳은 마음을 가진 분들이 있을 거예요. 끝까지 수고하시는 그 하나님이 찾아오시기 전에, 꿈에까지 찾아오셨다 라는 것은 내가 믿음이 없다 라는 거죠. 그만큼 악하다는 이야기거든요. 오늘 말씀을 깊이 새기셔서 주님이 좋은 말로 하실 때 어여 양육 받고 말씀이 들려 자립신앙이 생겨서 사명 감당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적용] 우리들교회 양육이 말씀을 들리게 하는 최고의 양육임이 인정되십니까? 말씀의 양육을 잘 받고 자립신앙이 생겼습니까? 여전히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의 수준입니까? 양육 어디까지 받으셨습니까? 양육을 받으면서 깨달은 은혜는 무엇입니까?
3. 부족한 서원도 결국엔 순종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20-22절)
빈 들에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의 양육도 받은 야곱은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사람이 이제 된 것 같습니다. 20절 상반절을 직역하면 야곱은 서원을 서약하였다.는 말입니다. 목적어와 동사를 반복해서 최상급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만큼 간절한 서원이었다 라는 것이죠. 그리고 서원의 냐용에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도 들어있고 십일조의 분명한 신앙고백도 있습니다. 진심으로 서원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만약, IF 라는 조건문으로 시작하는 그 야곱을 보면서 여전히, 그 옛 야곱의 모습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벧엘에서의 야곱은 이미 변한 야곱이지만 아직 덜 변한 야곱입니다. 실제로 20년이 지나 거부가 되어 아들, 딸 데리고 벧엘을 왔지만 그 벧엘을 지나쳐 숙곳에 머물고 세겜에 머물러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아들 시몬과 레위가 살인 사건에 연류되는 해, 달, 별이 떨어지는 사건이 와서야 깨닫고 말씀이 들립니다. 창세기 35장 1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그제서야, 사건이 오고서야 야곱은 말씀에 반응해 벧엘에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라도 그 서원을 지키게 하십니다. 야곱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끝까지 수고하신 하나님께서 부족한, 조건적인 서원도 믿음이라고 불러 주시고 결국 순종을 바꾸어 주신 줄 믿습니다.
저는 우리들교회 와서 서원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이렇게 강단에 한 번 서는 것이고 모든 양육을 다 마치고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교회 온 지 1년 정도 지나서 수요 강단은 은혜로 섰습니다. 그런데 목자가 되는 것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쉽지 않더라고요. 부목자에서 여러 번 저도 포기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긴 양육 과정을 지나서, 제가 항상 우리들 신학교라고 부르는데, 우리들 신학교 MBD 과정을 잘 마치고 2022년도에 목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저에게 목자라는 단어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제가 나온 신학교에 입구에 들어가면 큰 돌이 있는데 거기에 신학교 교훈이 적혀 있습니다. 항상 그 교훈을 까먹어서 초성으로 암기해요. 왜냐하면 제가 입시도 항상 초성으로 외워야지 시험에서 기억나더라고요. '신학성전목.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 우리들교회 면접 볼 때도 고난의 걸레를 제가 초성으로 외웠어요. '아젖마기윤. 아씨 걸레, 젖은 걸레, 마른 걸레, 기름 걸레, 윤내는 걸레.' 같은 걸레가 아니예요. 고난이 다 다른 걸레입니다. 아씨 걸레와 윤내는 걸레는 달라요. 신학교 교훈의 시작은 신자가 되라지만 그 끝은 목자가 되라입니다. 그 순서에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왔는데 왜 목자가 되라고 하지? 저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피투성이의 시간을 지나 우리들교회에 와서 정말 신자가 되어 하나 하나 양육을 받고 이제 목자가 되니 이제 그 교훈의 의미를, 그 순서의 의미를 지금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겸손도 잠시였어요. 이제 말씀이 들리고 공동체가 편해지니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 능히 전도할 수 있겠다 라는 확신이 저에게도 생겼습니다. 초창기에는 약재료 열등감이 많았거든요. 그리고 초원님과 같이 심방 가면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제발 나는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평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질서에 순종하며 벙어리 적용을 했었거든요. 이제는 내가 목자가 되었으니 마음껏 가르치고 처방하고 해야겠다. 처방 그만 당하고 내가 처방해야겠다. 부목자는 목자 만들고 목원들은 다 부목자 만들어야겠다. 이러한 열심을 가지고 목자의 황홀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자가 되서 첫 목장을 하는데 목장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거예요. 제가 말하기보다 들어야 하는 시간이 많더라고요. 제 나눔이 마치기 전에 부목자님이 친절하게 자세하게 처방해주시고 코멘트를 해 주시더라고요. 두번째 날에는 그 부목자님이 안 오셔서 셋이 즐겁게 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지하철에서 들어오셨습니다. 원래 얼굴이 좀 붉으십니다. 에서 부목자님이신데 그날 유난히 더 붉으셔서 술 드셨구나.하는 저만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술 드신 경력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눔하는 기회를 안 드리려다가 나중에 또 속상해하실 수 있으니까 나중에 나눔의 기회를 드렸는데, 또 횡설수설하시면서 또 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분들의 얘기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중에 나누시라고 하고 말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목장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다음 목장이 되었습니다. 아내가 들어오는 것이 부담되지만 권찰이 되어서 '부부 목장은 부부가 같이 하는 거라.'고, '부부 문제가 해결이 돼야 되니까 꼭 들어오라.'고 해서 저희 아내도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나눔을 하는데 심상치가 않은 거예요. 그동안 쌓아왔던 것을 하나씩, 둘 씩 풀어놓는 것입니다. 10분, 20분, 30분 지나도 안 끝나요. 그날 저는 부스터샷을 맞아서 컨디션이 매우 안 좋았거든요. 받아내기가 힘든 거예요. 그래도 이렇게라도 털어놓으면 편하겠지. 하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김양재 목자님 이혼은 하지 말라고 해서 내가 이혼은 안 할 거지면 나중에 졸혼은 한다.'는 거예요. 제가 평생 졸혼이라는 단어를 우리들교회 와서 심방을 하면서 알았거든요. 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단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 앞에서 제가 '졸혼 당할 목자, 졸혼 당할 목사.'이니 갑자기 수치심이 올라와서 힘들더라고요. 거기에다가 부목자님이 권찰 편을 들면서 '목자님 이렇게 가정 외면하면 일찍 죽습니다.' 거기까지는 제가 잘 인내했는데 작년에 같이 목장 했던 친분 있는 목원 집사님이 이 타이밍에 갑자기 '부목자님이 술 안 드셨는데 술 먹었다고 오해하고 말 끊은 거 사과하세요.' 이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도 갑자기 참았던 분이 올라와서 '개인적으로 제가 분명히 알아서 한다고 했는데 왜 이 타이밍에 꼭 그 얘기를 했어야 했냐.'고 막 흥분해서 분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작년에 그 목원 집사님으로부터 들은 언짢은 단어가 있는데 그것까지 다시 생각해내서 막 몰아부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목장에서 편하게 다 말씀을 하실 수는 있지만 어느 정도 예의는 갖춰 주세요.' 그러니까 벌떼같이 다들 일어나서 '목장은 그런 곳이 아니라.'고 '목자의 눈치를 보면 어떻게 편하게 이야기하겠냐.'고 '그럼 우리들 목장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거기다가 쐐기를 박는 한마디를 하십니다. '세계적인 대안은 목장이지 목자가 아니다.' 그 순간에 그냥 줌을 끄고 그냥 종료하고 싶었습니다. 얼마 전에 처음 목자하다가 목장을 나갔다고 한 장로님이 너무 생각이 나고 공감이 가더라고요. 제 마음을 가라 앉히기 위해서 다른 부목자님들 나눔을 나누라고 해보고 이후 급하게 기도하고 목장을 마쳤습니다. 그 시간이 새벽 1시 반이에요. 화가 안 풀리는 거예요. 화가 안 풀려서 권찰에게 '목장의 상황을 알면서 나 처음 해가지고 힘든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이게 뭐냐.'고 '목원이 아닌데 이러면 되냐.'고. 그러니까 아내가 부목자와 목원의 편을 들면서 '당신이 잘못했다.'고 하더라고요. 더 화가나 3시까지 싸우다가 혈기 귀신에 들려가지고 제 이마를 치면서 씩씩거리면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러다 한 4시 되니까 목사가 이 정도 수준밖에 안되나? 자괴감과 수치심, 온갖 골방 감정들이 올라왔어요. 잠을 한 숨도 못 잤어요. 다음날 수요일이었습니다. 마침 사역자 나눔이 제 차례였습니다. 교회 출근할 때는 제가 목자를 내려놓는 마음으로 출근을 했어요. 그래서 제 나눔 시간에 다 오픈하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끌려가기 싫은 다메섹이 저는 목장입니다.' 그렇게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담임 목사님 들으시더니 '힘들었겠네. 가기 싫겠네.' 그렇게 체휼해 주시더라고요. '그래가지고 너는 어떻게 목회를 하겠니. 부목자 더 하라.'고 그런 말 하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체휼해 주시더라고요. 제 믿음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죠. 들으신 후에 이런 저런 얘기하면서 힘든 부목사를 내가 어떻게 섬겼는지 말씀해 주시는데 마음이 많이 녹아내렸습니다. 제일 말씀이 안 들리는 게 우리 부목사들이거든요. 정말 말도 안 듣고, 담임 목사님 늘 원칙을 중요시 여기는데 늘 실수를 많이 하고 일찌감치 우리들교회 나갔어야 할 그 한사람이 저인데 담임 목사님 너무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담임 목사님 진짜 한 분, 한 분 말씀이 들릴 때까지 사역자들을, 어느 교회가 사역자들 그냥 사역하지 양육을 해 주겠습니까.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때 담임 목사님이 위로를 해주시니까 잠깐 영적 지수가 200까지 올라왔어요. 그런데 이제 시간이 지나니까 자시 또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다음날 마음이 우러나온 것보다도 적용을 해야 되니까 카톡으로 사과를 했어요. 그런데 부목자님 답문 카톡이 또 저의 마음을 힘들 게 하는 거예요. '목자님이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서 놀랐고, 목사라는 직분이 목자의 성장을 막고 있지 않는가. 여러 사람을 구원하려는 야망을 내려놓고 한 사람의 구원에 더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 순간 못 참겠더라고요. 제가 어떻게 참았냐면 목세 오신 한 목사님이 적용한다고 장로님께 무릎 꿇고 사과를 했거든요. 그 장로님이 사과를 받아주신 게 아니라 '사과하는 척 아니냐.'고 그렇게 답변이 왔는데 그것도 담임 목사님이 받아내셨다고. 그 이야기가 제가 생각이 나서 참았습니다. 그리고 한 줄 카톡 답장을 보냈습니다. '야망을 부수고 한 영혼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려요.' 차분히 생각해보면 다 맞는 내용입니다. 부목자님에게 이런 말을 제가 듣기 너무 싫은 것이죠. 여전히 목자, 목사를 계급으로 생각하는 그런 꼰대같은 마음이 제게도 여전히 있습니다. 카톡으로 답문을 했지만 며칠 동안 소화가 안돼서 힘들어 하다가 토요일에 부목자님을 만나서 사과도 드리고 힘든 부분을 이야기했습니다. 대화를 해보니까 악의는, 제가 오해를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줌으로 하다 보니까 전화나 영상으로 하다 보면 오해를 하기 쉽지 않습니까? 악의는 없으시더라고요. 그런데 할 말은 다 하는 스타일이더라고요. 대화하면서 부목자님에 대한 스타일을 제가 많이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부목자님이 '여럿을 훌륭한 목자로 세운 공로자'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너무 감사하지만 부목자님이 아니어도 담임 목사님도 있고, 선임 목사님들도 있고, 아내도 있고, 두 딸도 있으니까. 저를 양육해주시는 분들이 너무 많다.'라고 '항상 그럴 순 없겠지만 목장이 편하게 오고 싶은 그런 목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살살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설교 성령의 황홀 말씀을 듣는데 저만을 위한 설교 같았어요. 말씀을 듣는데 내가 얼마나 자기 확신이 많은 사람인가 깨달아지고 성령의 황홀에 빠진 바울에게 실패에 대한 예언이, 거절의 말씀이 임하는 것이 목자의 황홀에 빠진 내게 목자의 실패의 사건이 임하는 것이랑 너무 오버랩이 되면서 있어야 할 사건임이 인정이 되니 그 주일에 회개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내 생각에 맞추어 목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말씀에 맞추어 순종하는 적용을 해야겠구나 그렇게 결단하였고, 처음에는 제 목표가 목장의 부흥이었어요. 그런데 그 목표를 조정했습니다. '목장에 잘 붙어가자.' 지금 잘 붙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분을 내고 뭐라고 한 목원 집사님이 이혼 위기 상황이시고 가족이 다 캐나다에 있고 혼자 한국에 계시고, 육종암으로 약으로 현재 항암을 하고 계신 분인데 이번에 재발에 안 되었는지 되었는지 검사 받는 날이 바로 목장 한 바로 다음날이었어요. 그래서 혹시나 저 때문에 잘못되었으면 어떻게 하나 정말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검사 결과가 깨끗하게 나온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정말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오히려 저한테 '기도해 주어서 고맙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지금 부목자님과 목원 집사님 덕분에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갈등들이 초창기에 터져서 목장은 더 단단해지고 서로가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고 가고 있습니다. 진짜 다툼과 갈등이 성령의 소망이 맞습니다. 그리고 목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목장이 세계적인 대안이 맞습니다. 자료 화면을 좀 보여주시겠어요? 저하고 갈등 있던 우리 목원 집사님, 아프신 목원 집사님. 이번에 환갑 생일이셔서 깜짝 파티를 했습니다. 옆에, 전 사진 보면 옆에 에서 부목자님도 나옵니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고, 빈 들에서 만난 그런 경험도 있고, 우리들교회에 와서 긴 시간 제가 양육을 받고 변한 것 같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바뀌지 않은 야곱과 같은 모습이 제 안에 있는 것이죠. 목자가 이미 되었지만 아직 목자가 되지 않은 것이죠. 십자가에 매달려 잘 들어주고 섬기는 그런 목자보다 옳고 그름으로 가르치고 대접받으려는 목사의 모습이 여전히 제 안에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너무 싫은 다툼과 갈등도 내 구원을 위해 하는 역할이 있는데 세상의 소망을 줄여주고 천국 소망을 크게 해주는 작지 않은 역할을 하는 것인데 여전히 기복적인 야곱의 DNA가 내 안에 있으니 아내가 없었으면, 힘들게 하는 목원이 없었으면 하고, 그런 환경이 되지 않으니 나를 없애자 하고 정죄하며 수치심에 휩싸여 회피하는 모습이 바로 저의 모습입니다. 이런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부족한 목자의 서원도 결국 십자가의 순종으로 바꾸어 주실, 끝까지 수고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이 나고 회개가 됩니다. 이 모든 다툼과 갈등의 환경이 나를 성령의 소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인 줄 믿습니다.
[적용] 나의 부족한 서원도 순종으로 바꾸시기 위해 수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아직 지키지 못한 서원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조건부 서원으로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목장에서 목자, 부목자, 목원의 역할에 잘 순종하고 계십니까?
기도제목
미혜
현재의 자리와 역할에 잘 매여가고 새로운 환경에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기도하며 준비할 수 있기를
아빠 심장이 좋지 않음에도 술을 끊지 못하고 계신데 술이 끊어지기를
일대일 양육에 하나님께서 시간마다 저와 동반자에게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우리 목장 식구들 끝까지 수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가기를
예선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인생임을 기억하고 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하루만 잘 살도록
격리 해제되었지만 몸과 마음에 후유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의 연약한 부분들을 다시 보니 쭈그러드는데 익숙한 자기 연민과 정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되었다함이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알고 말씀으로 채움 받도록 (생각의 가지치기 할 수 있도록)
나와 붙여 주신 지체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도록
직업훈련과정 신청함에 있어 선정되고 안 되고의 결과를 먼저 생각하여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절차에 따라 기간 내에 신청하도록 (4/6 신청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