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0 성령의 소망
사도행전 23:6-11
102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인터뷰 내용이에요. 국가나 사회가 올라가는 단계에 필요한 게 갈등이라고요. 갈등이 전혀 없는 민족은 살아남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무 갈등 없이 열매나 따먹고 살았던 하와이나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은 소멸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 대선이 이제 끝났죠. 당선인, 또 낙선인들 다들 가면 갈등들이 많을텐데 갈등 충만이 성령 충만이라고 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라는 소망이 야망이 아닌, 욕심이 아닌 성령의 소망이 되어야 하겠는데요. 오늘은 성령의 소망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듣도록 해보겠습니다.
1. 죽은 자의 소망입니다. (6-8절)
산헤드린 공회에서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다가 그 입을 치라하고 심문을 받던 바울이 이제 위기에 놓였습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산헤드린 공회는 국회나 마찬가지죠. 바울 한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도 모으고, 수많은 유대인 무리들도 모으고, 로마 천부장도 부르고 이제 한 나라의 국회도 소집을 했네요. 놀랍죠? 로마 황제가 와도 이렇게는 못합니다. 로마 황제가 오면 도리어 기독교 지도자, 또 무슨 교회지도자들 다 숨어버리겠죠. 바울은 그냥 죄인으로 묶여 있는데 온 나라가 지금 바울에게 몰려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바울이 죄인으로 공회 앞에 서 있는 거 같아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바울 앞에 이 공회가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때문에 그 공회를 소집시키고 바울 앞에 이 공회를 세워 둔 것이죠. 그 순간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바울은 구원의 관점으로 주목을 하고 있으니 생각지도 못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파의 신학 사상이 딱 보였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다른 국면으로 끌고 가려는 바울의 기지가 이제 빛을 발하죠. 바울은 오늘 부활을 죽은 자의 소망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 말 앞에서도 이렇게 둘로 나뉘어져서 다툴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러니까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아야 부활을 소망하겠죠. 죽지 않고 살아있는데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두개인은 내 인생 오늘만 같아라.하면서 이 땅에서 너무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까 부활이 소망이 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사두개인은 그 이름에 다윗의 제사장 사독이 있는 만큼 자기들의 그 뿌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알다시피 아주 충신이었자나요. 그래서 대대로 대제사장, 제사장을 담당하면서 정치, 사회, 경제, 종교를 장악했어요. 그래서 예루살렘 부근의 토지들을 다 자기들이 가지고 돈과 권력과 명예를 다 가지니까 그 사람들이 죽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부활이 당연히 없어요. 이 땅이 천국 같아요. 그래서 부활할 까봐 걱정인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이 백성들은 굉장히 사두개인들을 혐오했어요. 민중들은.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사두개인은 법률가 답게 빈틈없는 자신의 모습에 우쭐해져 가지고 계대 혼인법을 들고 예수님을 골탕 먹이려고 질문을 했죠. 후손 없이 죽은 형제를 위해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것이 계대 혼인법인데 아들이 일곱인데 아들이 다 죽고 며느리가 차례 차례 일곱 아들의 부인이 됐다면 부활의 날에 누가 그 며느리의 남편인가 이런 질문을 했어요. 너무 참 우스운 질문이지만 이건 박사도 모르는 심각한 질문이죠. 이 땅의 박사들, 가고 오는 사람들이 다 질문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아마 코너로 몰았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시집도 장가도 안 간다 그랬죠? 구원받은 성도들만 있다 그랬어요. 그런데 또 이 말이 어떻게 믿어지겠어요. 부활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예요. 물론 증명을 해도 믿을 사람만 믿습니다. 부활은 증명되는 것이 아니고 전제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너무 존경하는 순수이성비판을 쓴 칸트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데 그럼 그 전에도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은 뭐라고 하는가? 창조 이전의 그 공간은 또 뭐라고 하느냐? 만물의 최소 단위가 원자인데 더 쪼갤 수 있는 원인자가 있을 것 아니냐?' 그러면서 '인간의 이성으로 있다, 없다 하는 것이지 안 보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신앙은 전혀 증명될 수 없고 자기 맘대로 있다, 없다 하는 것이다.' 이 칸트가 이성으로는 인간이 선하다고 하면서 기독교를 변질시켜서 어떻게 하면 안 믿게 할까 연구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을 타파하자고 일어난 바리새인들은 또 이상주의자였어요. 그러니까 개혁파였죠. 그러니까 귀족이 아닌 평민도 율법으로, 율법만 잘 지키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어요. 그들은 부활을 믿어요. 그러나 그 믿음은 그들 자신이 믿음이 필요해서 간절한 소망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요. 그들의 믿음은 명분을 위한 것입니다. 사두개인처럼 모세 오경만 믿는 게 아니라 모든 구약을 다 믿어요. 그리고 천사와 영의 활동도 믿고 죽은 자의 부활도 믿는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내세우면서 자기들은 저 사두개인들하고 다르다고 권력에 빌붙어서 타락한 귀족들과 달리 깨끗하다고 주장하고 싶어했어요. 그러니까 늘 겉으로 거룩, 거룩을 외치면서 스스로 특별한 존재로 여기려고 했지요. 그래서 이 바리새인의 어원도 분리하다, 구별하다라는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라도 가난해야 됐어요. 그리고 또 가난해요. 그러니까 부활은 믿었어요. 힘드니까 부활을 믿었죠. 믿음이 있어서 믿은 게 아니예요. 이런 포장으로 대중에게 존경을 받았어요. 이 회칠한 담은 바리새인을 두고 하는 얘기예요. 명예를 얻었어요. 결국 바리새인은 개념 속에서 부활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작 진짜 부활하신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둘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교만한 자아가 펄펄 살아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합니다.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인정하지 않아요. 자아가 죽지 않았으니까 부활이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세상 성공을 붙잡으려고 몸부림치다가 죽음 앞에서 평생 쌓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싫어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거죠. 하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 자신이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깨닫는 사람은 저절로 부활을 소망하게 됩니다. 바리새로 표현되는 이 경건주의, 사두개로 표현되는 쾌락주의 중 우리가 경건이 옳아 보이지만 사실 그 둘 중에서 더 나쁜 건 경건주의예요. 왜냐하면 영적 교만이 제일 무섭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늘 화 있을진저 이 바리새인들, 예수님 독사의 자식들아 그러죠. 그리고 우리가 기독교인들끼리도 '김 바리새인, 이 바리새인'이러지 '이 사두개인, 김 사두개인' 이러진 않자나요. 그렇죠? 그러니까 둘이 싸우는 거예요. 이 세상의 학설은 모두 바리새의 경건과 사두개의 쾌락과의 싸움이에요. 보수, 진보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막 진보가 좋아 보여서 권력을 가지면 또 다 똑같이 갑니다. 끝에는 다 돈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예외가 없어요. 경건적 요소와 쾌락적 요소는 예수가 없으면 다 똑같이 선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양심으로 하니까 자기 양심이 선한 게 없고 인간은 100%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것이 우리는 분별이 되지 않아요. 어쨌든 겉보기에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고 존중하던 바리새인들은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이러니까. 그리고 게다가 가난하기에 서민들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바리새인들이 부활은 사실은 잘 모르고, 바울의 부활은 육체적인 부활이고 이들의 부활은 이 세상 마지막에 일어나는 부활, 굉장히 다른 겁니다. 그래도 부활은 모르지만 말씀을 알고 말씀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는 이 바리새인을 1차 대상으로 삼아 지금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외칩니다. '나 역시 당신들과 같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말씀을 공부하고 지켰던 바리새인입니다.' 여기서 외치다라는 뜻은 단순히 소리를 크게 지른 게 아니고요. 이 단어는 예수님이 지날 때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크게 소리질렀다 그랬자나요. 그때 두 번 외쳤는데 첫번째는 크게 비명을 지르다의 뜻이고 두번째는 막 울며 힘을 다해서 외쳤다. 이때 크게 울며 외치다가 오늘 바울이 사용한 단어예요. '형제들이여 나도 바리새인이에요. 나의 아버지도 바리새인. 찐 바리새인이에요.' 그리고 뭐라고 외칩니까? '그런데 내가 지금 공회에서 심문을 받는 이유가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때문이에요.' 외쳤어요. '그런데 내가 예수 믿는 자를 죽이려고 다메섹에서 고문받아 가지고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어요.'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자나요. 그런데 이 바울의 울부짖음과 외침은 예수 믿기 전에 죄인들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죽은 자의 소망되시는 주님의 부활을, 진짜 주 안에서 자기의 죄 됨을 보는 그런 주님의 부활을 천둥과 같은 울부짖음으로 외치면서 그 외침이 공회를 휩싸고 강타했습니다. 사두개인도 바리새인들도 처음에 출발은 다 좋았어요. 권력을 잡으면 다 타락을 해요. 이 쾌락이나 경건이나 주님이 없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을 외쳤지만 이렇게 산헤드린 공회인은 부활을 개념적으로 믿는 자, 안 믿는 자가 같이 국회에 앉아있네요.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는 입법, 사법, 행정, 종교를 다 총 망라하는 최고의 의결 기관이에요. 그래서 뽑히고 뽑히고 뽑혀서 71명 가운데 들어왔는데, 평생 국회에서 같이 보는 사이인데. 여기는 삼십 세 이상 되가지고 항존직이자나요. 그런데 결국은 보니까 뭐예요. 무서운 경쟁자들이죠. 서로가. 일류를 향해서 왔는데 무서운 경쟁자들이 최고의 학벌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며칠 전 작고한 이어령 교수가 마지막 수업에서 남긴 말이에요. 평생 살면서 후회한 한 가지에 대해서 뭐라고 주제를 얘기하냐면 '친구가 있어야 성공한 인생이다. 그러나 나는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다. 그래서 외로웠다. 그리고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것이다. 남들이 보는 나는 문필가, 교수, 장관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보지만 나는 사실상 겸손이 아니라 실패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느낀다. 내게는 친구가 없다. 그래서 내 삶은 실패했다. 혼자서 나의 그림자만 보고 달려온 삶이다. 동행자 없이 숨가쁘게 여기까지 달려왔다. 더러는 동행자가 있다고 생각도 했지만 나중에 보니 경쟁자였다. 정기적으로 만나 밥 먹고 커피 마시면서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를 만들어야 삶이 풍성해진다. 나이 차이, 성별, 직업에 관계없이 함께 만나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이분이 수다 떨 친구가 없다고 지금 하신 거자나요. 그렇지만 여러분 수다를 떨어도 나중에 가보면 다 또 경쟁자인 건 아시죠? 인간이 100% 죄인이라서 그래요. 그냥 너무 가깝다고 그렇게 수다를 떨었는데 그게 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들어서 다 녹취록이 나오고 이러자나요. 그렇죠? 뭐 그냥 친척도 누구도 다 그렇죠? 수다를 떨었는데. 그래서 진짜 수다를 떨려면 자기 죄를 보는 사람이어야 수다 떠는 게 친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 시대의 지성인,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교수께서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이분이 믿음의 그게 없자나요? 그래도 믿은 지 꽤 또 오래 되셨어요. 근래에. 그런데 이분이 목장을 나가시지 않아서 그러지 않았을까. 너무 훌륭하신 분이니까 목장을 나갈 수가 없었을 것 같아요. 다른 교회에서는 그거를 권유할 수도 없었을 것 같고. 그런데 우리의 목장은 수다를 넘어서 진솔한 죄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게 신분 격차, 차별 없이 다 친구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맞죠? 시대의 지성인이 우리들교회를 이렇게 굉장히 변증해주고 있네요. 왜 가만히 계세요? 인생에서 존경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이 있는데 서로 죄를 보는 가장 차원 높은 사랑의 만남이, 가장 차원 높은 만남이 아닐까 싶어요. 맞죠? 여러분들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죄를 못 보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죄를 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있어도 친구가 돼요. 수다 떨 친구가 돼요. 그거는 전적으로 여러분한테 책임이 있는 거예요. 적용해보세요.
[적용] 바리새인의 경건주의와 사두개인의 쾌락주의 중에 어디에 더 가깝습니까? 여러분은 편하게 수다 떨 친구가 있습니까?
이렇게 부활 얘기를 하자 공회의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2. 다툼 가운데 소망입니다. (7-10절)
바울의 말을 듣고 공회가 딱 둘로 나뉩니다. 바울이라는 골칫거리를 공공의 적으로 놓고 조사하고 있는데 바울이 던진 이 부활이라는 화두 한 마디로 두 집단이 신학적 논쟁을 벌였겠습니까? 아니죠. 그저 그들은 늘 다투고 싸우는 게 전공이에요. 또 하나의 상황을 빌미로 다시 또 싸우고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바울이 지금 바리새인과 부활을 하나로 묶어서 자신이 지금 그 이유 때문에 심문을 받는다고 하니까 바리새인들은 마치 자기들이 심문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죠. 물론 여기 또 이게 영적으로 안 깨달아지는 사람은 '어머나 바울이 이간질했네.' 이러는 분도 있어요. 이게 또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에요. 저 사두개인들이 프레임을 씌워서 공격을 하는 것이구나 반대로 사두개인들은 바울을 향해서, 또 바울과 한 패인 바리새인을 향해 그냥 또 이렇게 분이 났어요. 그래서 바울을 조사하던 공회가 자기들끼리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진영 논리를 지금 보고 있자나요. 바른말도 니 편이 말하면 안 믿어요. 거짓말도 내 편이 말하면 '맞다. 맞다.'하는 것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보면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을 보게 되면 이런 인간론을 알게 되면, 인간론을 알아야 돼요. 성경은 인간론인 거예요. 옳고 그름으로 세상이 알아주는 게 아니고요. 그런 얘기 백 번해도 아무도 안 변해요. 세상에 우리들교회도 내가 찍은 사람 안 됐다고 지금 식음을 전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그 옳고 그름으로 백 번, 천 번 해도 사람은 변화되지 않아요. 바로 이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으로, 이 똑똑한 사람들의 결정으로 예수님이 틀려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겠습니까? 바로 이 산헤드린 공회에는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이고 이제 바울을 죽이려고 재판을 하고 있자나요. 산헤드린 공회는 이스라엘 최고의 의결 기구예요. 이런 것들을 성경을 보면서 객관적으로 봐야 합니다. 항상 구원을 주목하면 보이는 게 있어요.
9절, 10절이에요.
이제 바리새인 중에서도 율법의 전문가 중 전문가인 서기관 몇 사람이 나섭니다. 자 이 서기관은 또 뭐죠? 참고로 공회는 대제사장,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는 거지 바리새인, 사두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게 아니예요. 그들 중에 신학 사상이 바리새파, 사두개파로 나누어져 있는 거예요. 아셨죠? 그래서 그들이 일어나서 다투었다고 해요. 그들의 열성과 전의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에게서 악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해요. 심문 결과 바울이 무죄. 땅땅땅. 심지어 '영이나 천사가 바울에게 말했으면 어떻게 해요?' 사도행전 5장, 바울의 스승 가말리엘도 그때 사도들에게 그런 얘기를 했었죠. 그래서 그 영이나 천사가 그들에게 말했으면 어떻게 되냐. 내버려두라. 그러나 7절에서 시작된 다툼이 더욱 심해져서 큰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바울의 이 외침이, 바울의 천둥과 같은 울부짖음은 그 공회를 휩싸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심령을 강타했는데요. 그래서 부활을 믿는 게 아니라 이게 너무 진리니까 큰 분쟁으로 이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무도 회개하는 사람 없고 싸움이 싸움이 큰 분쟁으로 이어지기 시작했어요. 지금 보세요. 어떤 누가 말을 해도 회개합니까? 늘 분쟁으로 이어지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얼마나 심하게 싸웠으면 보고 있던 천부장이 바울이 그들에 의해 둘로 찢겨질까 지금 걱정을 했어요. 여기에 쓴 단어는 굉장히 강한 의미인데요. 마가복음 5장 4절에 귀신들린 사람이 쇠사슬을 끊었다고 했을 때의 이 단어예요. 구약 헬라어 번역에서는 삼손이 사자를 찢었다고 할 때 또 이 단어를 썼어요. 그러니까 바울을, 그 사지를 찢어죽인다고 하자나요. 육시를 한다고 그러자나요. 양쪽에서 지금 이제 서로, 그러니까 이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악다구니로 지금 싸우는 거예요. 바울을 서로 붙잡고 찢어질 정도로 아주 세게 잡아당기면서 심하게 싸우니까 바울이 지금 이제 죽기 직전인 거죠. 그게 그 많은 사람들이 잡아당기면 찢어질수도 있어요. 이게 그렇게 대단한 사자를 찢는 이런 단어예요. 그 천부장은 로마 시민이자나요. 바울이. 부하들을 시켜서 바울을 무리로부터 빼앗아서 영내로 들어오게 합니다. 여기서 이 빼았다는 단어도 사도행전 8장 39절에 보면 ....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에서 그 왜 에디오피아 내시를 전도한 빌립을 주의 영이 갑자기 이끌어 내시의 눈에거 사라지게 하신 것처럼. 그때 이제 빌립도 너무 영적으로 올라가니까 하나님이 쫙 광야로 옮기셨죠. 그것도 빼앗으신 거예요. 하나님이. 흘러 떠내려 갈까봐. 지금 바울을 로마 군인들의 손을 통해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확 빼앗아서 안전한 영내로 들어가게 하셨어요. 죄인의 모습이지만. 그러니까 우리는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제일 좋은 길로 인도하세요.
자 오늘 보니까 다툼의 소망, 다툴 때의 특징이 나오죠. 먼저는 크게 떠들어대요. 그리고는 일어나서 막 다툽니다. 그리고는 서로 찢겨짐으로 이어집니다. 처음부터 크게 떠들지를 말아야 하는데 큰 고함 소리가 오가고 일어나 다투기 전에 우리는 찢겨질 걸 생각하면서 빼앗아 영내로 들어가야 합니다. 피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스스로 피할 수 없기에 강제적으로라도 빼앗아 영내로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 상황을 중재해 줄 천부장이 있고 피해야 할 영내가 있다면 이 분쟁은 성령의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장 예배까지 와서 졸면 너무 손해자나요. 이렇게 재밌는 걸 왜 졸아요. 그렇죠? 김형석 교수한테 질문을 했어요. '그러면 갈등 중에서는 어떤 분야의 갈등이 가장 심하자도 보십니까?' 그거는 그냥 당연히 정치 이념 갈등이 일등이라는 거예요. 미국, 유럽, 캐나다는 좌우 분열이 진보와 보수로 바뀌면서 공존하게 됐는데 갈등이 분열이 되면 그 갈등은 생명력을 잃게 되고 여기에 해결책은 좌우로 분열하지 말고 진보, 보수로 공존하는 거라는 거죠. 그래서 앞으로 그렇게 열린 사회로 가야 하는데, 그런데 권력을 가지고 갈등을 해결하려고 하면 이 승자, 패자가 생기기 때문에 이거는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그런데 여러분 대화가 됩니까? 그러니까 아까 수다 떨 친구가 있습니까? 대화가 되려고 해도 내 죄를 봐야 되고, 친구가 있을래도 내 죄를 봐야 되는데 부모가 못 보는 죄를 자녀가 보겠습니까? 그러니까 날마다 인본적인 그 생각만 이렇게 하는 거예요. 대화가 되려면 우리 가정이나 나라나 다 똑같죠. 늘 중재해 줄 소그룹이 있고, 이렇게 피하고 싶은 부부 목장이 있다면 다들 찢겨질가 하여 빼앗아서 목장으로 빨리 보내야해요. 말씀이 내 속에 던져지는 목장에서 설령 내 마음이 찢겨졌더라도 그 찢겨진 마음속에 말씀이 던져지는 목장으로 갈 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모든 분쟁이 성령의 소망이 될 줄 믿습니다. 지난주 나눔이에요. 지난주 오랜만에 아이 보는데서 욕하면서 싸웠대요. 그렇죠. 싸워도 목장을 가야 돼요. 목자님 부부예요. 믿음 얘기를 떠나서 불신앙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싸웠는데, 그런데 이번주 목장에서 아내가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목자를 고발 한 거죠. 목자가 쓰레기인 것을 가감없이 얘기해서 줌을 꺼야 하나 생각이 들었는데 내가 부목자였으면 나갔을 건데. 그러니까 목자를 만들어야지 남편을. 속으로 부글 부글 끓는데 최소한 목자 남편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좀 있다는 건 좀 남겨 놓고 작살을 내야지 완전 쓰레기를 만들어놔서 정말 힘이 들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목원들이 목자님 빨리 병원에 가야 된다고 병원까지 예약을 해주서 가지고 토요일에 병원가서 상담 받고 검사지 받아왔대요. 여러분 이렇게 찢겨지기 전에 목장으로 빼앗아 와야 합니다. 목장 가는 게 답이에요. 답. 뭐 싸우고 어쩌고 저쩌고 해도 목장가서 얘기하면 성령께서, 갈등이 성령의 분쟁이 돼서 소망으로 가게 하는 줄 믿어요. 그래서 이번주도 어떤 집사님이 사소한 싸움이 시작되서 남편에게 화가 너무 나서 남편, 둘이서 또 서로 이혼하자고 그러죠. 이혼 서류 홧김으로 사인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니까 이거 진짜 이혼 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여자 목장에 가서 막 나누었더니 그냥 다들 '절대로 이혼하면 안 된다.'고. 그런데 정작 남편이 이혼 서류 들고 가출해서 잠수 탔어요. 연락해도 받지도 않고 이혼 되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싸움 한 번 해서 이혼 되면 어떻게 하나. 그랬더니 갑자기 그 다음날 남편이 접수하러 갔더니 사인이 안됐다고, 여러 군데 빠뜨렸다고 다시 사인을 해달라고 문자를 보냈다는 거예요. 그래서 목장에서 시킨 대로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고 함께 부부 목장만 나가주면 랄랄랄랄라. 그런데 그 다음을 모르겠어요. 아직. 이 작은 다툼, 사소한 것에서 일어나서 다투다가 지금 큰 분쟁으로 이어졌네요. 이혼이 이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닌데 이 세상 사람들은 이혼을 쉽게 해요. 석 달 만에 이혼을 하고, 한 달 만에 이혼을 하고, 일년 만에 이혼을 하고, 삼 년 만에 이혼을 하고. 이 따위 짓을 하는 거예요. 이 가정 살아나기를 기도합니다.
누가는 바울이 이런 분쟁 상황에 끼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록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상상 좀 해보세요. 도대체 이 찢겨질 상황에서 바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부활 복음 전하고 찢겨 죽게 생겼자나요. 바울은 이 다툼을 통과하면서 정말 이 세상 소망은 점점 없어지고 더욱 천국 소망이 간절해졌을 것 같아요. 실제로 바울은 간절한 천국 소망을 두 번이나 기록했는대요. 고린도전서 5장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천국 소망. 빌립보서 1장 23절에도 내가 (천국과 이 땅)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그런데 내가 너희 때문에 못 간다고 바울이 그러자나요. 그렇죠? 이 세상 소망은 고난을 겪을수록 줄어들어요. 그래서 너무 싫은 다툼도 내 구원을 위해 하는 역할이 있어요. 아주 작지 않은 역할입니다. 그 다툼은 이 세상 소망을 줄여주고 천국 소망을 크게 해줍니다. 부부끼리 화목하게 잘 사는 것 좋지만 다툼이 있는 것도 구원의 관점으로는 버릴 일이 아니예요. 여러분 갈등과 다툼과 싸움이 있다고 이혼을 하면 되겠어요? 천국 가는 거룩한 여정이 힘들다고 중간에 멈추면 되겠어요? 결혼이 힘들고 고단하지만 더욱 간절해지죠. 내게 이익이 하나도 없는 것 같지만 이제 주님이 내 거룩을 위해서, 내 구원을 위해서, 내 육이 무너지고 영이 세워지기 위해서 만세 전부터 예정하신 최고의 세팅으로 지금 만나게 하신 거예요.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없으면 속도를 내지 못하자나요. 엑셀과 브레이크가 함께 있어야 자동차는 속도를 얻을 수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날개가 양쪽에 있어야 날 수 있고요. 엄마가 있어야 하고 아빠가 있어야 하고. 그런데 부부 싸움을 아이에게 보여주면 안 되기 때문에 이혼을 한대요. 그런 미련한 얘기 좀 하지 말아요. 갈등과 싸움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 갈등이 분열, 즉 이혼을 하고 분열을 하는 것이 아주 아이의 생명력을 죽이는 거예요. 갈등은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에요. 술 먹고, 바람 피고, 맨날 집어 던져서 그래서 이혼해야 된대요. 그게 이 세상 인본주의의, 날마다 인간은 선한 게 하나도 없는데 자꾸 선한 게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8년이나 바람을 피는데도, 아유 여기 우리들교회 오셔서 8년 동안 그냥 그 남편을 너무 너무 두 집 살림하고 주말에만 오는데 어찌나 '어서오세요.' 그랬는지. 결국은 하나님을 결혼을 귀하게 여기시자나요. 그래서 이 분이 돌아오셨어요. 얼마나 와이프가 모멸감을 가졌을까요. 자기가 하래는 거 다 했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거는 예수 부활을 맛본 자 아니면 못했다는 거죠.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성령의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 소망을 좀 벗어나는 걸 보여줘야 되갰는데 싸우는 거 보여주기 싫어서 이혼하고, 회사에서 갈등 관계가 싫어서 이혼을 하고 뭐 많죠. 그렇죠? 갈등은 분열이 되면 생명력을 잃어요. 자멸하게 돼요. 갈등이 이 세상 소망이 무너지고 성령의 소망 가지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적용해보세요.
[적용] 날 힘들게 하는 다툼과 분쟁은 무엇입니까? 분쟁 속에서 이 세상 소망이 무너졌습니까? 아직도 펄펄 살아있습니까?
3. 사명의 소망입니다. (11절)
우리 인생의 이렇게 그 날 밤이 있어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해?' 하는 그 날 밤이 다 있어요. '내가 주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지?'하는 그 날 밤, '내가 남편에게, 아내에게, 식구들에게, 회사에서 잘해보려고 하는데,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왜 다 나를 이렇게 쳐 죽이려고 하지?'하는 그 찢겨질까 너무나 말이 안되는 그 날 밤이 있어요. 왜요? 우리에게 사명 주실려고. 천부장에 의해 겨우 목숨을 지키고 산헤드린 변론 끝에 찢김을 당하기 직전에 건짐 받은 그 날 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겠어요? 이 지쳐서 위로가 필요한 이 밤에, 그 차디찬 감옥방 찾아오셔서 곁에 서서 위로해주시는 주님이세요. 사람의 격려가 필요하다기 보다 어떤 경우도 말씀 읽고 기도하면 반드시 말씀으로 위로해주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큐티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해 주세요. 저 또한 30대에 생명을 내놓고 남편의 구원의 위해서 기도하고 큐티하고 전도하고 순종하고 그랬는데 생떼 같은 남편이 하루 아침에 갔어요.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원수가 사망이라고 그랬는데 어떤 사람의 위로가 저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주님 어릴 때도, 며느리 때도, 아내의 때도 골고루 고난을 허락하셨는데 이제 성경이 인정하는 과부까지 되라고요?'라는 그 날 밤에, 성경하고 똑같자나요? 주님도 그때는 미안하셨는지 앉지도 못하시고 제 곁에 서서 '담대하라.' 제가 어떻게 담대하겠습니까? 범사에 성령의 양심으로 살아도 큰 분쟁이 오니까, 바울도 두려우니까 담대하라고 그러셨겠죠? 바울도 두려운데 제가 안 두렵겠습니까? 어려움이 클수록 두려움도 커요. 그런데 이 단어는 담대하라 이거보다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거기에 안심하라와 같은 단어예요. '안심하라. 너 할 일이 있다. 너 표징의 인생을 살아야 해. 힘내라 김양재.' 주님이 한마디 하시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게임 끝이에요. 자립 신앙이 너무 중요한 것을 저는 경험했습니다. 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에요. 바울에게는 주님과의 교제가 실제적인 교제의 힘이었어요. 다들 하나님 따로 삶 따로인데 이게 같이 연결되는. 제가 그 날 밤 에스겔 말씀으로 저에게 말씀해주시고 사명을 주셨어요. '너 표징의 인생이 돼야 돼.' 그래서 지금 목장에서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할 것이다.'처럼 그 일이 그대로 이루어졌죠. '너는 담대해라.' 그러니까 우리는 사명 때문에 살고 사명 때문에 죽는 거예요. 야망이 아닌 소망을 가지면 줄 것만 있는 인생을 살게 하세요. 그때, 그때 예루살렘에서 또 지금 우리가 당하는 것을 왜 당하는가? 생각하지 말고 '너 지금 당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리라.'가 돼야 돼요. 그런데 내가 당한대로 목장에서 지금 증거하자나요. 그렇죠?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준비하셔야 돼요. 내가 당한 것을 목장에서 그냥 증거하면 돼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 당해본 사람은 이 증거를 못해요. 그래서 전도를 못하는 거죠. 그런데도 우리들교회 같은 교회도 택자는 붙어있더라고요. 증거할 것이 없어도 택자는 붙어있더라고요. 지금 힘든 상황에서 증거하는 사람만이 싸울 것이 없도록 붙여주시고 싸울 것이 없도록 모아주십니다. 그래서 지금 예루살렘에서부터 부하거나 빈하거나 우리들의 일을 증거를 하여야 합니다. 환난과 결박이 있는 곳에서 이 일을 증거해야 우리들의 로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로마 가기 싫어. 그래서 나는 예루살렘도 버릴 거야. 나중에 주의 일을 하겠다 그런 거 싫어. 나는 지금 이혼해야 되겠어.' 이런 사람은 지금도 아니고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거. 그래서 신앙은 인내라고 하죠. 참는다는 거. 우리 스트레스는 다 있자나요. 상황은 똑같이 있는데 내 믿음의 분량이 안되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똑같은데. 그러니까 숨을 참아야 되자나요. 그런데 그거 못 참아서 막 숨 쉬자나요. 그렇죠? 그러면 가서 CT 찍을 때도 숨 안 쉬라 그러면 안 쉬어야 되는데. 이 땅의 육의 원리도 '숨 쉬세요.' 이거 들어야 되자나요. 그런데 '아 나 못 참아 못 참아.' 맨날 '나 로마가 싫어. 난 주님께 쓰임 받는 것도 싫어. 그래서 이 예루살렘 떠날거야.' 그러면 안 됩니다. 사람의 위로와 말씀의 위로는 아주 차원이 다릅니다. 성령의 소망은 이렇게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사명의 소망으로 이우지는 줄 믿습니다. 다툼의 소망이 사명의 소망으로 바뀌어지는 거예요. 어떤 부목자님이 모든 게 편안해진 상황에서 코로나와 맞물리며 예배가 무너졌습니다. 큐티도 안하고 예배도 잘 안드리니 세상 사람과 어울려 골프를 치러 다니며 세상에 사로잡혀 있으니 작년에도 예배를 제대를 드리지 못했고 목장에 오기는 했지만 나눌 말이 없어 골프 친 나눔 정도로 수다만 떠는 것 같으니 부목자를 내려 놓겠다고 했는데 올해도 부목자로 올려 놓았으셨네요. 그런데 부목자인 자신이 목자를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예배도 큐티도 안하고 그저 놀러 다닌다는 나눔을 할 수 없어 목장을 나오지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BUT, 얼마 전 예배에도 안 나오던 아들이 '엄마 요새 교회 안 나가는 것 같네.' 묻더니 '살만해졌나봐.' 이게 천둥처럼 들렸는데, 오랜 아들의 수고로 죽을 것 같았을 때 우리들교회 나와서 그렇게 큰 은혜를 받았는데 내가 조금 살만해졌다고 자신이 이러고 있다고 고백을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자기 현주소를 보게 해 주셨는데 일단 이번주 현장 예배부터 드리자고 목자가 권면을 드렸어요. 그래서 만난 자리에서 예배 신청을 위한 온라인교인센처 앱을 설치해드렸다는 거예요. 이 부목자님 이게 말이 됩니까? 정말 흘러 떠내려갔는데 택자니까. 그런데 수 없는 나눔 중에서 제가 이걸 읽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정말 나는 이상한 걸 읽어 늘. 그 은혜스러운 나눔을 다 마다하고. 오늘 이분이 온다고 그랬으니까 반드시 예배가 회복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래요. 살만하면 모든 사명이 무의미해 보여요. 적용해보세요.
[적용] 여러분은 큰 분쟁 앞에서 사명을 찾았습니까? 요즘 살만해서 사명이 직분이 무의미해 보입니까?
기도제목
남동생이 공무원 시험 접수를 하는 날인데 소신지원 주님이 책임지고 인도해주시길. 집중력과 함께 기억력을 더욱 높여주시고 붙어서 회개하고 구원의 사건으로 받을 수 있도록.
저 역시도 접수 잘 하고 남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구합니다.
여동생이 대기업 공채 준비하고 도전하도록 과정마다 살피심의 은혜를 내려주세요. 일본유학에서 유턴하는 적용으로 국내기업에 취업하게 해주세요.
엄마 피부병 많이 좋아지고 있는데 속히 회복시켜 주시고 재발하지 않도록
오미크론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미혜
회사 투자자 미팅이 계속 있는데 대표님(형부)과 제가 잘 분별할 수 있도록. 말씀 듣고 기도하며 가기를
내일의 회사 업무에 대한 두려움과 버거움이 느껴지는 그 날 밤 담대하라는 주님의 위로를 들으며 하루하루 감당해내기를
항생제 투여와 복용으로 체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체력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아빠의 심장 건강과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도록
목원들 모두 코로나로부터 지켜주시고 각자의 환경에서 주님의 말씀 듣고 담대하게 감당할 수 있기를
예선
생활예배 잘 드리도록
때와 장소에 맞게 중보 기도하는 지혜와 간절함 주시길
격리 해제 전까지 푹 쉴 수 있도록 평안한 마음주시고 다른 가족들에게 전파되지 않고 지나가기를
목장 식구들 오고 가는 발걸음 지켜주시고 코로나로부터 보호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