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22년 3월 13일 주일예배
본문 : 창세기 20:1-7, 11-13, 17-18
제목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 : 김태훈 목사님
1. 택자임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반복합니다.
1절.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가 어디일까요? 1절의 거기서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 즉 헤브론을 말합니다. 헤브론은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으로 간 다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떠나온 곳입니다. 롯에게 재물을 양보하고 롯을 떠나 보낸 다음에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거주하면서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헤브론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 예배의 처소 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떠나 네게브 땅으로 옮겨갑니다. 네게브는 남방을 말합니다. 네게브에서 더 남쪽으로 가면 가데스가 있고, 가데스 왼쪽에 술이 있습니다. 술에서 더 내려가면 유명한 애굽이 있습니다. 그랄은 블레셋 땅에 있습니다. 1절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가데스와 술 사이에서 잠시 머물렀다는 동사가 있습니다. 지도를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이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을 떠나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으로 점점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계속 내려가다가 이십 년 전 애굽이 생각난 것입니다. 이십 년 전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예쁜 아내를 빼앗기고 죽을 뻔한 일이 생각나서 애굽으로 내려가지는 않고 다시 올라갔는데, 다시 올라가서 약속의 땅 헤브론에 거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블레셋 왕의 도시 그랄로 올라간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맞긴 하지만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던 헤브론과 벧엘이 아니라 가나안 땅 남쪽 접경에 위치한 그랄에 장막을 친 것입니다. 남쪽이여서 좋고, 왕이 사는 곳이라서 좋고, 안전하고 풍요로워서 좋고, 애굽에 내려간 것이 아니라서 좋다고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그렇게 믿음 좋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한마디도 묻지 않고 혼자서 뚝딱 처리합니다. 여기서부터 비극이 싹틉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헤브론을 떠나 그랄에 거류했을까요? 창세기 12장에서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해서 그때는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하는데, 지금은 기근도 없습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서 재산도 늘어났고, 거느리는 종들도 많아졌고, 사회적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믿음도 초창기보다 자랐고, 초라한 나그네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잘 영접했고, 소돔을 위해 롯을 위해 목숨걸고 중보 기도도 했습니다. 또 내년에 사라가 드디어 아들 이삭을 낳으리라는 엄청난 약속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헤브론을 떠난 것은 그런 외적인 이유보다 그 마음에 기근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기도했는데 소돔은 멸망하고 겨우 살아남은 내 사랑하는 조카 롯은 아내를 잃고 두 딸과 함께 산에서 거주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다가 롯이 두 딸과 근친상간하여 아들까지 낳았다는 소식을 접하는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내가 이러려고 목숨을 걸고 기도했나? 내 인생에 되는 건 뭐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고달픈 것일까? 이럴 바엔 차라리 남방으로 가서 힐링을 하고 내 여생을 편안히 보내야겠다. 사명이고 말씀이고 이제는 지쳤다. 육적 기근보다 무서운 것이 영적 기근입니다. 영적 기근이 찾아오면 마음이 자기 연민과 피해 의식으로 갈라집니다. 갈라진 마음에서 원망과 우울, 허무와 냉소가 잡초처럼 자라납니다. 그러면 말씀은 사라지고 약속은 잊힙니다. 사명을 망각하고 택자의 정체성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 자기 열심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2절.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택자 아브라함이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잊고 사명을 망각하니까 실수를 합니다. 자기 아내 사라를 그랄 사람에게 자기 누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아내가 예쁜 것을 보고 자기 아내를 빼앗고 자기를 죽일까봐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십 년 전 애굽에서 한 실수를 반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기근 때문에 간 것이고 믿음도 초창기라 아브라함을 정상 참작해줄 수 있지만, 지금은 이십 년이 지나고 아브라함이 산전수전을 다 겪어서 믿음의 조상으로 섰는데 지금 또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 인생의 슬픔, 비애를 느낍니다. 롯을 구하기 위해 자기 집에서 기른 군사 318명을 거느리고 엘람 왕 북부연합군을 야밤 기습 공격으로 쳐부셨던 아브라함이 이제는 일개 그랄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그들을 두려워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냥 거짓말이 아니라 자기만 살려고 자기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팔아먹는 거짓말을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우리는 흥분을 하지만, 여러분. 그럴 수 있습니다. 택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수를 반복합니다. 아무리 이전에 눈부신 공을 세우고, 대단한 적용을 했다고 하더라도 오늘 하루 주님의 은혜를 덧입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실수는 거짓말이였지만 그 거짓말의 뿌리는 불신앙이였습니다. 믿음이 흔들리자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믿음이 약해지자 엉뚱한 곳으로 갑니다. 믿음이 사라지자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와 고질적인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믿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적용질문)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과 예배의 땅 헤브론입니까, 애굽으로 향하는 남방 땅 네게브입니까, 세상 왕의 도시 그랄입니까? 나의 반복되는 실수는 무엇입니까? 그 실수의 근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택자의 연약함을 인정합니까?
2. 실수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더하십니다.
2절.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택자인 아브라함이 실수를 반복하자 하나님이 사건을 주십니다. 그랄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거짓말을 듣고 사라를 자기 아내로 취하려고 데려간 것입니다. 한 구절 안에서 두 사건이 서술됩니다. 아브라함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이 죄를 즉시 다루신 것입니다. 이렇게 택자는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바로 들키게 하십니다. 택자이기에 하나님이 지체하지 않으시고 사건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다 죄짓는다고, 다 안들키고 잘 산다고 해서 나도 한번 죄지어 봐야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택자이기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보내고 사건을 보내어 여러분의 사라를 데려가십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아멘.
3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사라를 데려간 그 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 꿈에서 나타나셔서 거짓말한 아브라함을 혼내신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 꿈에 나타나셔서 아비멜렉을 혼내신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혼내신 것이 아니라 '너 아브라함의 아내 데려갔지? 너 죽는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 논리와 이치로는 이해가 안됩니다. 실수한 것은 아브라함인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편을 드시고 아비멜렉을 혼내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브라함은 실수를 반복하고 계속 넘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자이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 내 딸, 내 새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본토, 친척, 아비, 형제 집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갔고 아버지 하나님 품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연약한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내 연약함과 비참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을 믿고 그저 주님의 품에 안기면 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갈 때 하나님이 그 밤에 그 위기의 밤에 아비멜렉을 찾아가십니다. 사라같은 나의 자녀, 남편, 아내, 부모, 지체를 지켜주십니다.
4절.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절.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에 아비멜렉이 놀라서 변명을 합니다. 자신은 아직 사라와 잠자리를 갖지 않았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서로 남매간이라고 했기 때문에 데려온 것이고, 남의 아내를 빼앗는 악한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 왕은 마음대로 뺏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훌륭한 왕이였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으로 보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보다 더 나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옳고 그름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의롭고 온전하고 깨끗하니까,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하고 아내를 팔아먹으니까 나는 쟤처럼 하나님을 안 믿어도 돼. 나는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어. 이것이 성령의 양심이 아닌 인간의 양심의 한계입니다.
6절.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믿음은 없고 윤리와 도덕만 있는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은 그 수준에 맞추어서 아비멜렉의 행위를 인정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사라에게 동침하지 않은 것이 아비멜렉 스스로 절제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막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아비멜렉이 사라와 동침하면 사라를 통해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막으셨다고 합니다. 이삭이 와야 예수님이 오시고,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구원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택자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택자에게 자비를 더하시고 택자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될 때, 하나님의 보호와 자비가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에서 어떤 직분을 맡기고 섬기게 되었다면 구원을 위해 섬기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남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고 나를 살리고 나의 가정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택자인 나를 해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범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치졸한 실수를 반복하는 나를 주님은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일, 구원의 일에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적용질문) 나의 치졸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더하신 자비는 무엇입니까? 나의 일 중에서 하나님의 일은 몇 프로입니까?
3. 숨김에도 불구하고 죄를 고백하게 하십니다.
11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란 아비멜렉은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모든 신하들을 소집합니다. 그 모든 일을 신하들에게 알려주니까 신하들도 놀라고 심히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아비멜렉은 이 자리에 아브라함을 불러 아브라함의 거짓말 때문에 나와 온나라가 큰 죄에 빠질뻔했다고, 도대체 왜 그런 것이냐고 아브라함을 호되게 책망합니다. 그러자 우리의 아브라함이 숨겨왔던 죄를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곳에서 내가 아내 때문에 죽임당할까 두려웠다고, 죽는 생각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약속을 잊고, 말씀을 잊고, 약속의 땅을 떠나면 자기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사명을 잊고 안전을 추구하면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이 몰려옵니다. 말씀과 적용이 지긋지긋해서 아늑하고 안전해 보이는 그랄로 가면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이곳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택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아내 때문에 죽을까 두려워떠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12절.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아브라함은 그동안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사실을 아비멜렉과 온 신하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사라가 자신의 이복누이로서 자신은 사라와 근친결혼을 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가 창세기 11장부터 나오는데, 19장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출생의 비밀, 근친결혼의 비밀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치욕적인 실수로 치욕적인 수치를 당하는 이 사건에서 아브라함은 모든 게 치졸한 변명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숨겨진 아픔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세요. 만약 우리 아빠 엄마가 바람을 피우셨다고 하면 얼마나 상처가 될까요? 그런데 우리 아빠 엄마가 바람을 피워서 아이까지 낳았다면 그 상처는 얼마나 더 클까요? 그런데 내가 그 혼외자인 이복누이나 이복형제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여러분 그것은 대선 뉴스 바로 옆에 나올 만큼 전국이 충격에 빠질 엄청난 일일 것입니다. 이 숨겨왔던 상처를 아브라함이 지금 고백한 것입니다.
13절.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숨은 상처를 고백했던 아브라함이 이제 더 나아가서 숨겨왔던 죄를 고백합니다. 바로 자신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나그네 인생을 살기 시작하면서 가는 곳마다 거짓말을 하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낯설고 거친 가나안 땅에 거류하면서 너무 두려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지만 또한 믿음이 없어서 거짓말을 했고, 아내를 언제라도 팔아먹으려고 했고, 이것을 아내에게 설득하고 애원하고 또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나만 살고자 했던 이기적인 남편이고, 아내를 지켜주지 못하고 팔아먹은 비겁한 남편이라고 왕과 모든 신하들 앞에서 고백한 것입니다. 아까 제가 두 번째 대지에서 택자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비를 더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거기서 끝나면 안됩니다. 택자라고 무조건 하나님이 전자동으로 지켜주시고 복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이제 우리의 숨겨진 죄를 고백하고 회개케 하기 위함입니다. 숨겨진 상처, 숨겨진 죄를 고백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묶기 때문입니다. 회칠한 담이 되어 하나님과 남들과의 관계를 막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치욕적인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수치의 현장에서 이십사 년동안 숨겨왔던 자기 상처와 죄를 고백함으로써 묶였던 마음이 자유케 되었습니다. 회칠한 담이 무너져 부부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20장 이후로 아브라함은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라는 자기의 아내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께서 택자인 우리에게 주시려는 은혜입니다. 나는 의롭고, 나는 온전하고, 나는 깨끗해 라고 외치는 아비멜렉은 결코 받지 못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과 회개가 하나님이 택자인 우리에게 베푸시는 최고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7세기 동방 교회의 영성가인 니느웨의 이삭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은 죽은 자를 일으키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 자기 죄를 위해 한 시간을 진실로 울부짖는 사람은 온 세상을 가르치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 자기 약함을 아는 사람은 천사를 볼 수 있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 저는 오늘 이 아브라함의 고백을 보면서 저의 반복된 실수 뒤에 숨겨진 죄를 묵상했습니다. 저의 욕심과 열심이라는 반복되는 실수 뒤에는 자기 연민과 피해 의식이라는 것이 동전의 양면처럼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제 내면에 끝없는 불안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잘해야 하고, 못하면 남들이 나를 싫어하고 버릴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관계가 좋다가도 의견이 안맞고 사소한 갈등이라도 생기면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와서 비굴하게 상대방에게 맞추거나, 못참겠다 싶으면 칼같이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도 그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일 자체를 즐기면서 할 수 있는데, 자꾸 결과를 두려워했습니다. 남들의 평가를 생각하고, 남들이 인정해줄까, 칭찬해줄까,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이러니 마음에 체기가 올라왔습니다. 왜 이렇게 불안이 심했을까 생각해보면 화려한 스펙을 가지신 부모님 밑에서 감정의 교류와 마음의 소통 없이 그저 착한 아들, 순한 모범생을 살면서 부모님의 간섭과 지시, 통제를 내내 받았던 영향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제 속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실수와 상처를 드러내면 하나님도 나를 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불신앙이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자비를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있고, 또 연약하고 실수하는 나를 주님이 끝까지 천국으로 인도해주신다는 믿음이 부족함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가복음 큐티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마가복음 4장 39-4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의 믿음 없음을 깨트리기 위해 하나님은 너무도 약하고 부족한 자녀를 저희 가정에 보내주셨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지만 말도 못하고, 밥도 혼자 못먹고, 걷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들 수현이로 인해 제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컸었는데, 그 연약한 아들 수현이로 인해 제 불안과 두려움이 날마다 작아지는 것을 봅니다. 별 인생이 없다는 것을 제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아내와 함께 상한 갈대를 품고 가면서 제가 그렇게 바라던 세상 인정과 칭찬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과, 주님을 의지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매일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무릎이 꿇어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적용질문) 숨겼던 것을 이제 고백하라고 주신 수치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처럼 그것을 고백하겠습니까?
4. 무너짐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7절. 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가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이 7절은 하나님이 꿈에서 아비멜렉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치졸한 실수를 한, 치졸한 나그네 아브라함이 선지자라고 하십니다. 이 선지자라는 말은 성경에서 여기에 처음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전쟁포로로 끌려간 롯을 위해 싸웠을 때 등장한 것이 아니고, 소돔을 위해 목숨 걸고 기도했을 때 등장한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을 때 등장한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을 해서 아내를 빼앗기고, 내 죄 때문에 아파하고 슬퍼하며 밤중에 우리 주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를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써주신 말입니다. 너는 내 선지자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수했지만 너는 택자라고 하십니다. 무너졌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무너진 아픔을 딛고 회복으로 나아갈 길을 알려주십니다. 선지자의 사명을 주시며 너를 꾸짖는 질책하는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내 택자, 내 선지자, 내 새끼이기 때문에 세상을 위하여 다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난다고 하십니다.
17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18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아비멜렉과 신하들 앞에서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자신의 숨겨진 죄를 고백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아내가 고통당하고 약속의 자녀가 오지 못할 뻔하고 아비멜렉 집에 모든 태가 닫힌 것을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은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구제불능인 자신을 향해 내 택자, 내 선지자, 아브라함아 라고 불러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나 때문에 다친 아비멜렉 집에 모든 태를 열어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불신앙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추락했습니다. 그는 무너진 세계를 경험했고 세상 왕 앞에서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는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습니다. 사라를 통해 주실 약속의 자녀도, 약속의 땅도, 너는 보게 될지라 라는 약속도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그 밤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아비멜렉을 막으시고 사라를 지켜주십니다.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의 회개를 이끌어 내십니다. 그리고 다시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므로 무너진 세계를 재건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너진 자리에서 내 죄를 고백한 후에 맡겨주신 사명을 다시 붙잡는 것입니다. 너는 내 택자, 내 선지자다 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아브라함처럼 중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의 태는 닫혔지만 남의 태를 위해 기도할 때 남들이 치료되고 생명을 얻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사명을 회복하자 21장에서 드디어 약속의 자녀 이삭을 사라가 임신하고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지극히 높으신 분을 위해 라는 책에서 우리가 실패를 경험했을 때 중보기도를 통해 어떻게 사명을 회복할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내면의 목회할 곳으로 들어가라. 주님께서는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 그의 재난을 바꾸어 놓으셨다. 영혼을 구하는 자로서 당신이 일생에 해야 할 일은 바로 중보기도이다. 그분께서 당신을 어떤 환경에 갖다 놓으셨던간에 즉시 기도하라. 그분의 용서가 당신 것이었듯이 다른 영혼의 삶에도 그 용서가 나타나도록 기도하라. 지금 친구들을 위해, 지금 당신이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라.'
적용질문) 무너진 내가 주님의 택자, 주님의 선지자라는 말씀이 믿어집니까? 아브라함처럼 남들을 위해 이타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기도제목 >
A
- 아버지의 직장 문제 인도함 받으실 수 있도록
- 공부할 때 집중 잘 할 수 있도록
- 학생으로서 학생의 본분을 다할 수 있도록
- 가족들 코로나로부터 회복될 수 있기를
B
- 이번 주 학교 가는데 안전운전 할 수 있기를
- 숨이 잘 안 쉬어지는 증상이 잦은데 안정이 잘 될 수 있기를
- 귀찮아도 실습지 알아보고 강의 잘 들을 수 있도록
- 매일 큐티할 수 있도록
- 가족과 목장 식구들 코로나로부터 안전히 지켜주시기를
- 신교제와 신결혼에 대한 소망이 생기고 할 수 있도록
C
- 연락하고 있는 친구와 대면할 예정인데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 삶의 루틴을 회복하고 매일 아침에 큐티 할 수 있도록
- 코로나와 감기로부터 가족들 지켜주시기를
- 허튼곳에 집중하지 않고 거룩을 향해서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 역류성 식도염 치유될 수 있기를
D
- 어머니 체력 지켜주시기를
- 가정, 직장, 목장에서 질서에 순종할 수 있도록
- 스스로 정죄감 덜 가질 수 있기를
- 진로 문제에 대해서 항상 하나님께 먼저 묻고 결정할 수 있기를
- 부모님의 다툼에 동요되지 않고 내 안의 가족 신화 잘 보고 갈 수 있도록
- 신교제를 위한 기도할 수 있도록
E
- 이번 한 주 무릎 꿇고 기도하는 적용할 수 있도록
- 영적 기근에서 정신 차리고 헤브론으로 갈 수 있도록
- 이번 주도 은혜로 회사생활 할 수 있도록
- 신교제를 위해 기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