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령의 양심
본문: 사도행전 22:30~23:5
설교자: 김양재 목사님
평생 모은 이천만원을 보이스피싱으로 모두 날린 자매가 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나?
러시아의 푸틴부터 화인맞은 양심이 참 많은 것 같다. 이럴 때 어떻게 해결해야하나?
성령의 양심으로 해결해야합니다.
1. 구원 때문에 주목하는 양심입니다.
채찍질이 멈추고 하룻밤이 지났다. 지성인인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어찌 이리 미움을 받는지 이해가 안간다. 함께 둘러앉다라는 의미의 사네드린 공회는 가장 탁월한 지성인이 모였다. 처음에 함께 둘러앉다는 의미인데 의미가 변질되었다. 대제사장 등 지식인들이 모였다. 로마인은 가장 막강한 권한과 사형을 내릴 권한도 있었다. 기가 막힌 것이 바울이 예전에 사네드린 공회원이었다. 이렇게 인생은 생각하면 슬픈 일 밖에 없다. 사네드린 공회원은 30세 이상의 결혼도 하고 자녀가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바울은 결혼도 하고 자녀도 있다는 것이다. 유능하고 권세있는 바울이 아니라 죄인의 모습인 바울로 지금 있다. 그들을 1절에 그들을 주목하여 본다. 주목은 그냥 쳐다보는 것이 아니다. 내 눈을 고정시켜 유의해서 진지하게 보다라는 뜻으로 주목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이 단어가 똑같은 표현으로 사도행전 14절 9장에 쓰였다. 루스드라에서 발을 못 쓰는 사람을 만났다. 바울은 그 사람의 장애나 불쌍한 형편보다 그 사람 속에 구원받을 만한 것이 있는지 주목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 제자를 만났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만났다. 그리고 폭도, 군대, 천부장 만났다. 이제 유대의 최고 지도자들을 만난다. 이렇게 다양한 무리를 억지로 스케쥴을 짜려해도 못 짤 사람들을 만났다. 한결같이 모두 죄인의 모습으로 만났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이렇게 짧은 시간에 다양한 무리를 만나게 하셨을까? 한결같이 구원 때문이다. 천차만별의 다양한 무리들을 구원 때문에 어떻게 전해야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려 만나게 하셨다. 사네드린 공회원 한명한명 얼굴을 보았다. 거기에 원로가 된 친구들고 앉아 있었다. 죄인의 모습으로 공회 앞에 선 자기의 모습이 부끄러웠을 법도 하다. 바울은 오히려 당당히 주목하여 본다. 구원 때문에 그렇다. 누가 죄인이고 누가 재판장인지 모를 정도의 자존감으로 했다. 그 관심이 오로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있던 양심이 바르게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구원을 주목하며 하나님이 양심을 주신다. 성령의 양심은 구원 때문에 주목할 때 바르게 작동한다. 보이스피싱 당한 구원 때문에 주목한 아버지는 마을님이시다. 평생 모은 돈 없어지는 것보다 딸의 사회 생활 적응이 우려 되었다. 일평생 모은 돈이 없어졌는데 어떻게 해석해줄 수 있겠습니까. 간접 경험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했다. 관심이 없더라고 들어야 한다고 한다. 둘째는 아빠가 모은 돈을 다 줄 수 없지만 십분의 일을 준다. 네가 모은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이 주신 돈이라는 의미이다. 셋째 직장 들어가서 일년 먼저 들어온 직원에게 따돌림 당한 직원에게 같이 욕했는데, 부모로서 같이 기도했어야 하는데 부모로서 그러지 못했다. 욕을 같이 한 부모의 모습에 회개를 한다.
[적용]사람을 만날 때 무엇에 주목하고 있나요? 구원인가요? 겉모습인가요?
믿기 전 옛 동료들을 만난다면 내 모습이 초라해 숨고 싶지는 않나요?
2.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는 양심입니다.
앞절에 부형들아 했습니다. 원수 같지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급하면 어머니 아버지보다 엄마 아빠로 친근히 말한다. 범사에 친근히 섬겼다. 결론적으로 보면 양심이란 단어는 착한 게 아니라 함께 안다고 표현한다. 우리가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내 속에서 그른 일도 옳은 일을 판단하고, 뭔가 잘못하면 숨기고 불편해한다. 그것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핑계치 못하는 우리 맘속에 하나님이 심어주신 도덕률이다. 근본적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기준이 양심이다. 누군가 배신을 받는 행위가 찬양을 받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범사에 따라 잘못없이 섬겼다는 것이 맞을까요? 선한, 좋은, 착한 이란 아가토스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히브리어 토브와 같은 뜻이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옳고 그름이 아닌 하나님이 보기시에 좋았더라의 양심이다. 우리 속의 양심은 제대로 작동하나? 다 무너져 내렸다. 내가 행하려는 일이 나쁜 일임을 알고도 어느샌가 양심과 타협해서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양심은 doing이 아닌 being의 문제이다. 아무리 선한 종이라도 예쁜 것은 자식이다. 착한 것이 양심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 보고 함께 하는 것이 양심이다. 우리에겐 선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 따라 주님과 함께 하는 이 공통의 지식과 앎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공통이 아닌 서로의 앎이 있다. 그래서 공회 앞에서 당당히 아버지를 섬겼노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곧 대통령 선거가 있다. 시민으로서 합당하게 해야한다.
[적용] 내 양심이 알면서도 합리화시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판단 기준은 돈, 체면, 고향, 외모 중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양심의 기준은 자기 옳음입니까, 하나님 말씀입니까?
3. 그를 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치는 양십입이다.
회칠한 담을 어찌해야 할까? 어따대고 감히 대제사장에게 욕하나. 네가 대제사장이면 내가 하나님의 사도다 할텐데 출애굽기 22장에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지며 즉시 자신의 잘못을 시인인다. 회칠한 담을 치려면 그 입이 아닌, 내 입을 쳐야한다. 내 약점을 인정하는 것이 성령의 양심이다. 그렇다고 대제사장 자체에 사과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를 끝까지 형제로 기억했다. 성령의 양심은 내 잘못을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팩트로 대제사장을 몰라봤다고 하고 법을 바울은 다 지키는 것이다. 중독자의 회복은 내가 중독자임을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장 훌륭한 고백은 내가 틀렸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는 믿음이 있는 자가 무조건 잘못이다. 나의 회칠한 담을 보고 나를 쳐야한다. 세상 인정하는 선한 양심은 거리낌이 없다. 옳다 확신하면 절대 굽히지 않는다. 그러다 어쩌다 확신이 지나치면 자기가 너무 맞으니까 자기는 틀리면 안 되는 존재가 된다. 나도 모르게 지도자가 되어 있으면 회칠한 담이 되어 있다. 항상 목자가 될수록 올라갈수록 나를 치는 것이 성령의 양심이다. 창업주들이 자기 양심의 확신이 하늘을 찌른다한다. 그래서 믿기 어렵다 한다. 자기의 회칠한 담을 못 보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회칠한 담 보고 내 입을 보고 가야한다. 푸틴에게 밑의 부하가 바른 조언을 하려는 시도를 했다 한다. 그 부하에게 내가 틀렸다고? 맞다 아니다만 말해.라고 했다고 한다. 바울이 회칠한 담이라고 얘기해줬다. 대제사장에게. 또 자신이 시인할 것은 시인했다.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성령의 양심을 인정하는 최초의 길이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욕하는 게 아니라 가족들이 자기 입을 치고 있다. 내가 뭘 잘못했냐하면 문제가 안 풀린다.
[적용] 그래서 내 죄악을 숨기는 방패로 삼고 있는 것은 유전입니까, 상처입니까, 질병입니까? 죄악임을 인정하고 돌아서야 할 때 남의 입을 칩니까? 내 입을 칩니까? 남탓 조상탓 내탓 중에 뭘 하죠?
여러분이 참아야 될 일이 많을수록 세계의 구원이 되고 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피해야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세계를 위해 전쟁을 한다고 했다고 한다. 지난 주일에 유럽연합에 가입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에 벨기에에 이룬 회의에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해 달라, 유럽 연합은 우리와 함께할 때 훨씬 강할 것이다. 러시아 통역사가 눈물을 흘리며 통역했다. 모든 회원국들이 집단 퇴장하는 것을 보았다. 푸틴이 너무 거대해보이지만, 세계는 젤렌스키 하나 때문에 유럽과 세계가 하나로 모이고 있다. 그 분의 말대로 세계를 위한 전쟁이다.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전쟁 나자마자 도망갔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세계인이 아프가니스탄을 주목하지 못하게 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나라를 살리고 죽이고를 결정할 수 있다. 결혼도 정말 믿음이 중요하다. 자기 쾌락과 유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된다. 우리나라는 인구 절벽이 가속화되고 있다. 누가 이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을지. 여러분은 어떤 양심을 가지시겠습니까? 말씀을 맺는다. 성령의 양심은 구원을 위해 주목하는 양심이다. 양심은 함께 보고 함께 하는 공동적 지식을 갖는 공동체다. 하나님은 멀리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아냐. 이렇게 묻고 가는 것이 성령의 양심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내 양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양심,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어야 한다. 다 내 소견에 옳은대로 이 법, 저 법 해달라 한다. 우리가 못 살 때에는 몰랐다. 나밖에 모른다. 나의 자유를 자유라 하고 침해하는 것을 못 견딘다. 목소리 내는 사람이 없다. 바울이 외치면 뭐 하겠느냐. 그 입을 치라고 한다. 교회가 얼마나 많은데 지역 감정이 안 없어진다. 몰표가 나온다. 이런 게 구속사라는 게 없다고 한다. 미국도 번영신학 밖에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직장과 선교지에 가서 있는 것이다.
- 기도제목
*이소정
1. 성령의 양심으로 분별하여 투표 잘 할 수 있도록
2. 진로 인도해주시길
3. 전쟁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양세원
1. 혈기 부리지 않고 가족 구원을 위해 잘 죽어질 수 있도록
2. 오빠가 담배를 줄일 수 있게
3. 큐티와 기도를 규칙적으로 할 수 있게
*류가영
1. 세계의 민주주의을 위해 투항하는 우크라이나를 지켜주시길
2.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우리나라의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3. 다리가 다시 아픈데, 과로로부터 지켜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