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06 성령의 양심
사도행전 22:30-23:5
요즘 양심 없는 사람들이 진짜 너무 많아요. 우리 청년이 보이스 피싱을 당했어요. 금액이 2천만원인데, 어렸을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천 만원을 모으고 회사 들어가서 천 만원을 모아서 평생 재산 2천만원인데 아침서부터 전화를 끊지 않고 4시까지 전화를 했데요. 회사에서 조퇴를 하고 은행을 가는 동안에 전화를 끊지 않고 거래 내역과 모든 서류가 너무 완벽했고, 검찰 조사 양식을 카톡을 보내면서 비밀리에 수사하고 만약에 주변에 알리면 부모님하고 가족들에게 불이익이 가니까 잘 협조하라면서 계속 협박을 했답니다. 은행 직원이 물어볼 때는 급한 전세 자금이라고 답변까지 알려주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학생, 청년은 평생 알뜰하게 모든 돈인데 이거 어떻게, 돈보다 보통 문제가 아니자나요. 러시아의 푸틴부터 화인 맞은 양심이 참 많은 거 같아요. 이럴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성령의 양심으로 해결해야 돼요. 그래서 성령의 양심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들어볼게요.
1. 구원을 위해 주목하는 양심입니다. (30, 1절)
바울이 성령의 시민으로서 권세를 가지고 날 때부터 로마 시민임을 밝히자 천부장은 바울을 결박할 수도 안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두려워서 채찍질 심문은 멈췄어요. 그렇게 밤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대체 지성인인 바울이 왜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는지 천부장이 당최 지금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에 관해 진상을 알고 싶었습니다. 함께 둘러 앉다라는 뜻의 유대인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했어요. 산헤드린 공회도 처음에는 이렇게 둘러 앉았는데 나중에 이렇게 변질됐네요. 우리들교회도 정말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산헤드린 공회는 71명의 회원, 즉 서기관들, 장로들, 대제사장 가문 중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거기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았어요. 로마는 이 산헤드린 공회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였고, 심지어 로마가 허락할 경우에는 사형을 내릴 이런 판결의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바로 예전에 이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어요. 그런데 바울을 늘 회개케 하는 스데반을 죽인 공로를 인정받아서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었어요. 진짜 우리 인생을 생각하면 슬플 일 밖에 없어요. 너무 아이러니컬 하죠?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려면 30세 이상이어야 되고 결혼을 해야 되고 자녀를 둔 아버지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결혼도 했고 자녀도 있었다는 얘기죠. 여러분 바울의 슬픔을 이해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같은 공회원이었던 자신의 동료들 앞에 그 유능하고 권세 있는 바울의 예전 모습이 아니라 죄인의 모습으로 서게 된 이 바울이에요. 그리고 1절에 그들을 주목하여 봅니다. 주목하여는 그냥 쳐다보는 게 아니예요. 쳐다보면서 내가 너희보다 공부 얼마나 잘했는데 너 나 알지? 이런 게 아니라요. 보통 그러겠죠? 내 눈을 고정시켜 진지하게 유의해서 보다라는 뜻인데요. 이 단어가 똑같은 표현으로 사도행전 14장 9절에 쓰였죠. 여러분 기억하세요? 14장 9절에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그때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을 만났죠. 그런데 바울은 그 사람의 장애나 어떤 불쌍한 형편을 주목하기 보다는 그 사람 속에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지를 주목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 제자들 만났죠.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만났어요. 그리고 폭도도 만났어요. 군대 만났고, 천부장도 만났어요. 이제 유대의 최고 지도자들 지금 만나고 있어요. 이렇게 다양한 무리를 그냥 억지로 스케쥴을 짜려고 해도 못 짤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만났나요? 한결같이 모두 죄인의 모습으로 만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왜 바울은 이렇게 짧은 시간에 다양한 무리를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셨을까? 궁금하죠. 바로 이제 한결같이 구원 때문인데, 이 천차만별의 다양한 무리들을 어떻게 구원 때문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다 만나게 한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 그동안도 쭉 봤지만, 오늘 산헤드린 공회원 한 명, 한 명 얼굴을 봤어요. 거기에는 원로가 된 친구들도 쫙 앉아 있었겠죠. 죄인의 모습으로 그 공회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어쩌면 부끄러웠을 법도 하죠.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당당히 그들을 주목하여 봅니다. 무엇 때문예요? 구원 때문예요. 누가 죄인이고 누가 재판관인지 모를 정도의 자신감, 자존감을 가졌어요. 이는 바울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고 그의 관심이 오직 구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찾아온 이 십자가를 버리지 않고 붙든 사람,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사람들은 죄로 인해 죽어 있던 양심이 바르게 작동하기 시작을 해요. 이제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향하여 주목하며 하나님이 기뻐할 만한 선한 일을 할 힘과 능력을 공급받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의 양심이에요. 즉 성령의 양심은 내 죄를 주목하고 십자가를 주목하여 구원을 주목할 때 바르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보이스 피싱 당한 그 딸의 구원 때문에 주목한 아빠는 우리들교회 목자님이시죠. 또 마을님이시기도 해요. 그런데 평생 모은 돈 없어진 것 보다 딸의 사회 생활 적응 때문에 너무 우려가 되었어요. 그래서 톡방에 올린 글을, 정말 너무 은혜를 받았어요. 가족 예배식으로 드리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아이들을 불러 놓고 내가 해 줄 말이 세가지 있다고 하셨어요. '첫째,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동안 이런 자리하지 못한 부분이 안타깝고 직접 경험도 중요하지만 간접 경험을 하는 게 아주 중요해. 목장이나 엄마, 아빠가 얘기했을 때 들으려고 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거 같은데 이런 보이스 피싱 얘기도 그동안 했던 거 같다. 그런데 누구의 말이든 간접 경험을 위해서는 관심이 없더라도 들어야 한단다. 둘째는 아빠가 모은 모든 돈을 채워 줄 수 없지만 10분의 1을 줄 테니 다시 시작하자. 큰 헌금을 하고 남을 도와줬다고 생각하고 줄 테니 이제 10분의 1을 주는 이유는 니가 모은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이 네게 주신 돈이니까 십일조는 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했으면 좋겠다.' 다 가져가셨자나요. 평생 모은 거. '셋째, 니가 직장에 들어가서 1년 먼전 들어온 직원에게 따돌림을 받았을 때 엄청나게 분을 내면서 들어주면서 함께 욕을 했는데 부모로서 그 아이도 불쌍한 아이로 생각하고 기도해주며 가정 환경이나 원인이 있어서 그러지 않았겠냐 얘기를 해줬어요. 했어. 그런데 너는 5개월 만에 정규직이 되고 그 아이는 계속 계약직이다가 퇴사를 했다니 욕을 같이 한 부모로서의 그 모습을 회개한다. 이번 사건이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게 한 사건이야. 그래서 이겨내고 말씀으로 해석을 했으면 좋겠다.' 이 자매가 올해부터 청년 목장에 나가기 시작했고 지금 이제 그 목장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중이라고 해요. 모두가 이렇게 구원을 주목하니까 이런 성령의 양심으로 장년부, 청년부 목장에서 해석을 하니까 해결을 하자나요. 이걸 누가 해결을 할 수가 있겠어요. 진짜 그 상한 마음 누가 해결해 줄 수가 없는 건데 이런 모습이 성령의 양심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여러분 너무 은혜 받으셨죠? 항상 우리한테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말씀이 있으면 이렇게 해결이 되는 거예요. 적용해보세요.
[적용] 사람을 만날 때 무엇에 주목하고 있나요? 구원인가요, 겉모습인가요? 믿기 전 옛 동료들을 만난다면 내 모습이 초라해 숨고 싶지는 않나요?
2.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는 양심입니다. (1절)
그들을 주목하며 바울은 죽이려는 원수같은 공회원들에게 형제들아라고 친근하게 부릅니다. 이것이 구원의 언어예요. 맨 처음에 유대인들한테는 부형들아라고 했자나요. 아버지 부 빼고 형제로만 불렀습니다. 굉장히 친근한 얘기예요. 원수같지만 더 친근하게 형제라고 입으로 부르고 시인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형보다는 형제, 너무 급할 때는 어머니 보다는 엄마, 아버지 보다는 아빠가 더 절박하고 친근하고 빠른, 이런 표현일 때가 있어요. 이런 거를 디테일하게 큐티할 때, 구원의 언어는 때에 따라서 이렇게 써야 되는 구나. 그리고는 주목해서 보면서 나는 범사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양심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이렇게 들어오죠. 양심은 헬라어로는 전치사 쉰과 보다라는 에이도의 합성어예요. 그러니까 함께 보다, 함께 알다에서 파생이 되었죠. 그러니까 같은 생각, 공통적인 깨달음이 양심인 거예요.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에 우리 속에 있는 어떤 하나의 기준이며 내 속에서 옳은 일과 그른 일을 분별하고 그릇된 일에는 책임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양심이에요. 하나님과 함께 보다, 알다인데,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즉, 선한 일을 했을 때는 우리가 눈치를 보거나 숨기지 않아요. 그런데 뭔가 잘못을 하면 숨기고 눈치를 보고 책임감을 가지고 불편해합니다. 이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우리 속의 양심이 그 일이 나쁜 일임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학습되거나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핑계치 못하는 우리 마음 속에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도덕률이에요. 문화나 역사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공통된 기준이 양심이에요. 예를 들어 어떤 문화에서도, 역사에서도 누군가를 배신하는 행위를 찬양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즉, 우리 속의 양심이 그 일은 나쁘다.고 말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 양심에 따라 그 일이 선한 일인지, 나쁜 일인지 스스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이 바울이 공회원들 앞에서 나는 아무 죄가 없다. 나는 내 속의 양심의 기준에 따라 아무 잘못 없이 하나님을 섬겼다.는 뜻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잘 이해를 해야 하는데요. 이 양심 앞에 헬라어 한 단어가 번역이 생략되었는데요. 선한, 좋은, 착한이란 뜻의 아가토스라는 단어가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이 헬라어 아가토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토브와 같은 뜻인데요. 우리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그 단어가 토브예요. 즉, 선함이 도덕적인 옳고 그름의 선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속에 있는 양심은 어떠합니까? 제대로 작동합니까?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당장 나를 봐도 이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많이 봅니다. 내가 행하려는 일이 나쁨을 알고도 그 일이 나에게 유익이 되고 쾌락을 주면 어느새 양심과 타협해서 그 기준선이 모호해집니다. 외도가 분명히 잘못된 일임에도 어저께까지 너무 양심적이었는데 남편이 문제가 있으니 내가 바람 피우지. 아내가 잘못하니까 내가 바람 피우는거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어느새 그 기준이 모호해집니다. 회사에서도 상사가 시켜서 나는 할 수밖에 없었어. 우리 정치를 봐도 날마다 시켜서 했다고 해요. 분명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하며 그리고 스스로 합리화를 하는 천재가 인간이에요. 나는 시켜서 한 거야. 부모 때문에, 남편 때문에, 상사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 우리의 양심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저 역시 하늘이 열려 특별히 말씀이 저에게 임하지 않았다면 평생 남편 탓, 시어머니 탓을 하며 죄를 지으며 합리화를 하면서 지옥을 살았을 거예요. 어느 누구도 환경에 장사가 없고 그 환경에 의해서 기준이 모호해지는 것이 우리의 양심의 현 주소입니다. 심지어 요즘에는 법까지 그 기준이 모호해져서 간통죄가 사라지고, 결혼 후 다른 남자, 여자를 만나는 간음죄가 합법화되고, 내가 원치 않는 임신을 했기에 낙태를 하는 살인죄가 정당화되며,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남성과 여성의 기준까지 사라져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며, 알아도 내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며 합리화하는 것이 우리의 양심의 현실이에요. 이런 우리의 양심으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하나님을 결코 바르게 섬길 수가 없는 것이죠. 인구 절벽은 시작되었어요. 불과 얼마 전에 0.84에서 또 0.81로 또 줄었어요. 지금 내 양심, 내 자유 따질 때가 아니예요. 지금 오늘 바울이 말한 선한 양심, 착한 양심은 그 기준을 우리 속에서 찾으면 안 돼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이 아가토스, 선한 양심,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두는 양심이어야 선한 성령의 양심인 거예요. 그것은 나를 주목했을 때 내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고 이제 죄가 가득한 내 속의 양심이 아닌 그 기준을 내 밖에 두는 것, 내 밖에 두는 것이 성령의 양심입니다. 나를 밖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성령의 황홀과 마찬가지로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면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성령의 양심이에요. 그러니까 나만 믿어. 내 판단이 맞아. 말이 언어가 그렇게 늘 나오는 사람은 그 일이 설령 맞을지라도 아주 조심해야 되는 사람이에요.
여기서 범사에 하나님을 섬겼노라의 섬기다라는 단어는 글쎄 이번 주일에 대선이 있는 줄 알고 시민으로 합당하게 행하다라는 뜻이에요. 시민으로. 성령의 시민은 이 땅에서도 진짜 politic하게 이렇게 합당하게 행하라고. 하나님을 섬기는 거래요. 성령의 시민으로 내 생각, 내 마음, 내 양심이 아니라 성령의 양심, 하나님의 말씀, 이것이 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죠. 오늘 개역개정 성경에 보면 하나님 옆에 1번이라고 각주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걸 밑으로 따라가서 1번 뭐라고 되어 있냐면 하나님께 백성 노릇하였노라. 섬기다가. 그러니까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모든 면에서 주님과 함께 보고, 함께 알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섬겼다는 것이에요. 섬기다하면 늘 종이냐 주인이냐 늘 생각을 해보는데 주인과 종은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예요. 우리가 볼 때 종은 착해야 되자나요. 아들은 지 맘대로 하자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은 종이 아니고 아들이자나요. 그러니까 이 선한 양심은 관계의 문제인 거죠. doing의 문제가 아니고 being의 문제라는 것이죠. 우리는 형편없는 자녀라도 내 자식이면 보시기에 이뻐요. 하나님도 우리를 이렇게 똑같이 이렇게 대해주세요. 택자를 그렇게 챙겨주세요. 선한 양심은 관계의 문제예요.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 세상에서 관계가 안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보고, 함께 아는 그 선한 양심, 양심을 모르거나 없다는 것이에요. 아버지의 말씀이 기준이 아니고 자기 양심이 기준이기 때문에. 여러분 착한 것이 양심이 아니예요. 인생은 착할 수가 없어요. 주님과 함께 보고 듣는 것이 양심이에요. 왜요?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바울이 수많은 무시와 조롱과 매질 속에서도 간증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으로, 자신의 양심으로 주를 위해 내가 살아보리라.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과 함께하는 공통의 지식과 앎이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어요. 그러니까 주인,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공통의 지식과 앎이 있어요. 그래서 내 양심이 아니라 성령의 양심으로 이곳까지 왔기 때문에 바울은 공회 앞에서도 당당히 범사에 선한 양심에 따라 내 아버지 하나님을 섬겼노라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이제 곧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그럼 시민으로 합당하게 행해야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에 따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그랬죠? 말씀에 따라서.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주고, 내 동네에 뭔가를 깔아주고, 지하철 깔아주고, 내가 있는 회사에게 이익을 주고, 내 고향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그 기준이 내 속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에요. 요즘 철학이든 심리학이든 사회학이든 추세를 보면 인간의 타고난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요. 그래서 실수하고, 잘못하고, 죄를 져도 전부다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약함이나, 병이나, 그건 유전이야. 타고나길 이렇게 타고났어. 이렇게 접근하는 추세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이런 접근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100% 죄인이라는 것, 여기서 출발해야 되는데요. 이런 인본적인 접근을 악용하는게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에요.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켜 거룩해져야 하는데 죄를 인정하는데서 딱 멈춰버리고 유턴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쾌락과 유익에 따라서 그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만 가지 이유를 찾아서 인생을 합리화하면서 갑니다. 아파서 그렇다고, 약해서 그렇다고, 이런저런 경험 때문에 그렇다고, 내 상처 때문에 그렇다고. 여러 이류를 대면서 그 이유 뒤로 숨으면서 만 가지 이유를 대는 것이 인간의 양심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숨는 것은 성령의 양심이 아니에요.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세워 동성애를 막고, 생명을 보호하며,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이 악법을 막고, 말씀의 원리들을 잘 소화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시민으로 합당히 투표하는 것이 오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정말 교회가 수 없이 세워졌어도 해결이 안되자나요. 그렇죠? 왜냐하면 산헤드린 공회원도 바울의 말을 아무도 안 듣자나요. 그러니까 이거는 우리가 말한다고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예요. 참 좁은 길이에요. 성령의 양심이. 믿지 않는 사람도 그러나 양심이 무너져내리지 않았다면 옳은 것을 안다는 것이에요. 러시아의 푸틴도 양심도, 그걸 알 거예요. 부러 있고자 해요. 양심이 무너져 내려서 저렇게 침공을 합니다. 그런데 어제 신문에 보니까 이미 2남 1녀가 있는 친모가 계부와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그 계부가 그 9살 딸을 성폭행하기 시작을 해서 21살까지 12년 동안 수 백 번, 정기적으로. 꼭 그냥 자기 아내처럼. 그러는 가운데 낙태를 두 번이나 시켰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친모는 그러면서도 4명의 아이를 낳았다는 거예요. 알면서 철저히 방관했다고 해요. 그런데 계부가 너무 무서워서, 맨날 협박을 하니까. 막 그 9살 딸아이한테는 위치추적지 달아가지고 다른 남자를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그런데 이 친모는 7명의 아이와 살기 힘들어서 그랬을까요? 여러분 오늘 푸틴이 나쁠까요, 이 계부가 나쁠까요? 친모가 나쁠까요? 목장에서 나눠보세요. 답이 안나와. 그렇죠? 답이 안 나오는 게 이 시대의 양심이에요. 너무 끔찍하다. 이 소리만 하죠. 자기의 양심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 환경에 가면 자기의 감정, 쾌락이 최고인 거예요. 그 양심이 알지만 그 양심이 무너져 내리는 거예요. 적용해보세요.
[적용] 내 양심이 알면서도 합리화시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판단 기준은 돈, 체면, 고향, 외면 중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양심의 기준은 자기 옳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3. 그를 치는 것이 아닌 나를 치는 양심입니다. (2-5절)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이 말을 듣고 범사에 하나님을 섬긴다 이러니까 격노해가지고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제일 잘 섬기자나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모든 판단 기준이 그들도 율법이에요. 그리고 판단 기준이 자신의 양심인 거예요. 양심이 무너져 내린 사람들이지만 율법이라는 선 안에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웠기 때문에 여기도 역시 끝에 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이 사람들이 배를 채우고 있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바울을 향해서, 이리로 다 가버리면 어떻게 해요. 분노하며 그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왜 하필 입입니까? 이것은 최고의 인격 모독이에요. 그 당시에. 그 다음이 손등으로 뺨 때리는 거래요. 그러나 이 최고의 모독을 주님이 미리 당해 주셨죠. 실제로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우리가 아는 아나니아가 아니예요.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지명 AD 48년부터 59년까지 11년이나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 재임했던 자예요. 이렇게 악한 사람이 장기 집권을 했어요. 그는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탐욕스럽고, 포악하고, 성질이 급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당연히 성도들의 십일조를 횡령하며, 당연히 로마 편에 섰으니까 로마와 유대 사이에 전쟁이 났을 때 헤롯 대왕의 궁전 뜰 도수관 속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즉, 아나니아는 분노하여 사람을 시켜 바울의 입을 치라 명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치셨어요. 그는 율법주의자지만 율법을 어기며 죄도 정하지 않고 바울의 입을 치라고 했죠. 그런데 우리가 권력을 가지면, 권력을 가지기 전까지는 몰라요. 권력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꼭 내가 듣기 싫은 말을 하면 화를 내면서 입을 다물게 합니다. 내 양심과 내 기준으로 우리가 행하는 것은 남의 입을 치는 거예요. 듣기 싫다는 거예요. 목장에서, 집에서 그 입 다물라. 목자는 권찰에게, 권찰은 또 목자에게 그저 날마다 그 입 다물라. 그러니까 아까 그 계부도 얼마나 무서우면 다 입을 다물었겠습니까? 무시무시한 협박, 지금 감옥에 있는데도 만약에 나와서 계속 해코지 할까봐 그걸 지금까지도 무서워하더라고요. 이 땅에서는 이렇게 무서운 일들이 있어요. 바울은 이런 아나니아를 향해서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선포합니다. 우리가 이전에 예수님이 회칠한 무덤 애기를 했었어요. 부자들은 동굴 속에 무덤을 갖지만 보통 평민들은 봉분 없이 땅에 뭍고 흙을 덮어버렸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적이니까 시체를 밟으면 부정해서 제사를 못 지내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다 하얀 석회를 발라서 시체가 맞다고 표시를 합니다. 그러면 회칠한 담은 뭘까요? 에스겔 13장에도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담을 흙으로 대충 쌓고 나서 석회를 발라서 완벽한 담처럼 보이도록 막아 놓은 거예요.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완전히 이중적인 모습이 회칠한 담입니다. 그런데 회칠한 담과 회칠한 무덤 중에 뭐가 더 나쁠까요? 무덤은 다 시체인 줄 알아요. 그런데 담은 쌓아 놓으면 안에서 밖도 안보이고 밖에서 안도 안보여요. 그래서 이 거짓, 거짓으로 만들어 놓은 이중적인 이 담은 나도, 남도 하나님께 못 가게 만드는 것, 이 거짓, 위선, 이것이 회칠한 담인데요. 그런데 이 가장 사실은 욕이라고 할 수 있는 회칠한 담을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에 대제사장 보고 당신은 회칠한 담이다. 그런 거예요. 백서오다 훨씬 나쁘다. 지금까지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매를 맞아도 아무에게도 안 한 가장 심한 저주의 말을 하나님과 가장 가깝다는 대제사장에게 회칠한 담이라고 이렇게 말을 해요. 천국 시민권 가졌으니까 단호할 때와 또 이렇게 참아야 될 때를 잘 알죠. 그러면 이제 우리가 오늘의 주제, 이 회칠한 담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4절, 5절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대제장이 최고의 직분이니까 니가 어떻게 감히 욕하느냐. 비난을 했어요. 이때 바울 같으면 야 니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이라면 나는 하나님의 사도다. 더 이상 못 참겠어. 싸우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때 출애굽기 22장 28절을 인용해서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를 인용해서 자신의 잘못을 금세 시인합니다. 그래서 회칠한 담을 무너뜨리려면 그 입을 치는게 아니라 내 입을 쳐야 합니다. 성령의 양심은 나를 쳐서 내 약점을 빨리 인정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갑자기 공회가 소집됐기에 의복을 갖추지 못한 대제사장을 몰라 볼 수 있었죠. 몰라봤다는 거예요. 이거는 비굴한 사과는 다른 팩트로 사과를 한 거예요. 그런데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이렇게 짐승처럼 대했지만 바울은 그를 끝까지 형제로 불렀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양심은 내 잘못을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중독자의 회복은 내가 중독자임을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나요. 그래서 가장 위대한 고백은 내가 틀렸음을, 상대의 회칠한 담을 무너뜨리려면 내가 회칠한 담임을 고백하는 거예요.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선한 양심과 성령의 양심이 다른 부분이에요. 세상이 인정하는 선한 양심은 거리낌이 없어요. 그러기에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면 절대 굽히지 않아요. 그 확신이 생기기까지 또 바울도 여러 가지로 매 맞는 경험을 했겠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확신이 지나치면 이제 자기는 틀리면 안되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지도자들은 회칠한 담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기에 항상 내 입을 치고 나를 치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양심입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 믿는 사람, 믿는 사람이 무조건 잘못한 거고, 믿는 사람 중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 무조건 잘못한 거예요.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이 아무리 악한 회칠한 담이라도 거기서 믿는 사람이면 구원을 위해서 주목을 해야 되기 때문에 내가 회칠한 담이라는 거를 빨리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기에 창업주들이 예수 믿기에 가장 힘들죠. 느그들이 나를 알아? 내가 어떤 고생을 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이게 주제가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못 참아. 내가 어떻게 더 참아. 이게 아니고 천국 갈 때까지 우리는 성령의 양심은 내가 회칠한 담이라는 걸 알아야 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내가 뭔가 성공을 하게 되면 그것이 나에게 확신으로 와가지고 이래야만 되는 게 있게 되는 거예요
이번에 푸틴 대통령에게 그 밑에 부하가 바른 조언을 하려고 시도를 하니까 푸틴이 강압적으로 그래서 내가 틀렸다고? 맞다, 아니다만 대답해. 이야말로 성령의 양심이 아니라 화인 맞은 양심, 악한 양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게 이해가 안 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무조건 산헤드린 공회원이 나쁘자나요. 그렇죠? 바울을 못되게 하니까. 그런데 바울이 그들을 주목했다고 그랬자나요. 그 구원의 관점으로, 구원의 관점으로 주목하는 사람은 싸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모든 것이 내 회칠한 담 때문인 거예요. 아니, 유대인들이 지금까지도 안 돌아오고 있자나요. 이 사람들이 너무 전세계적으로 잘 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안 돌아와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회칠한 담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그런데 이런 악한 아나니아가 장기 집권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너무 부조리해. 이 애기만 하면 어쩔 거예요. 우리들의 지역 감정, 진영 논리 너무 틀렸어. 그런데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교회가 성령의 양심을 가져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교회가 아무리 많아도 다 이것에 대해서는 산헤드린 공회원들 하고 똑같아. 그 프레임에 다. 그래서 내 양심이 최고고 나한테 잘못한 것들은 영원히 응징을 해야 되고 이런 세상하고 똑같은 걸 가졌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사태는 하나님 주신 사태고, 코로나도 에수 믿는 사람 회개하라고 이 사건이 왔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성령의 양심은 실수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실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일임을 깨닫고 나를 치며 거기서 돌아서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 그럽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앞장서서 막 데모를 하고 지금 그래요. 내가 먼저 삶으로 본을 보여야 되는데, 정말 아무쪼록 푸틴이 빨리 유턴하기를 기도합니다.
[적용] 내 죄악을 숨기는 방패로 삼고 있는 것은 유전입니까, 상처입니까, 질병입니까? 죄악임을 인정하고 돌아서야 할 때 남의 입을 칩니까, 내 입을 칩니까?
기도제목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지켜 주시고 엄마 피부병 회복 중에 있는데 재발하지 않도록
여동생이 대기업 취업을 위해 준비하고 임하고 있어요. 면접 준비 잘하고 붙어서 회개하도록 구원의 관점으로 보는 눈과 마음을 주시도록
남동생 지방직 공무원 직렬 소신 지원해서 후회 없도록 특별히 장시간 집중을 못하고 힘들어 하는데 주님이 집중력을 더하여 주시도록
아빠가 주일예배를 같이 드리게 되어 말씀 듣고 마음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완악한 고집이 꺾이도록
매일 큐티하며 고난을 나누고 서로 중보기도 할 수 있기를
환청이 있지만 마땅히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적용을 하도록
무기력하게 우울하게 기분이 나빠져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생활예배 잘 드리도록
민희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유지되도록
직장에서 거리 두기 잘하고, 내가 눌리고 힘들 때 기도하며 갈 수 있도록
남자친구 예수님 만나도록
미혜
고객과 언성을 높일 일도,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할 일도 잦아집니다. 그러나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진맥진하여 언제까지를 부르짖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제 배후에서 선히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으며 하루 살기를
지금의 시간과 현실을 하나님께서 왜 허락하셨는지, 구원을 위한 어떤 시간인지 나의 예측, 상황 판단, 감정 등이 아니라 말씀으로 잘 해석하며 가기를
아빠의 지질한 모습에 무시와 인간적 동정이 아닌 구원의 관점으로 보기를
우리 목장 식구들 각자의 처한 현실에서 말씀으로 해석하며 한 주 살아가기를
예선
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하루만 잘 살도록
생활예배 잘 드리도록
매일 틈틈이 운동하도록
나와 목장 식구들을 위해 울림기도회, 큐티기도회 참석하여 기도하도록
성령의 양심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투표할 수 있도록
이번주에 가족 행사가 2개 있는데 침묵할 때와 단호할 때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 구합니다. 경계를 잘 지킬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