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성령의 말함 - 김양재 담임목사님
사도행전 22:1 ~ 8
죄가 없으면 바울처럼 매맞고 묶여 가는 것에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기 죄를 깨달으면 인생의 눈이 떠지고 신세계가 열립니다. 그래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게 된 경험이 너무 놀라워서 한 번만 말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말함이고 간증이고 사명의 인생입니다.
1. 내 자랑이 아니라 우리를 대표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변명을 들으라고 했는데 변명은 말씀으로부터 풀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단어가 없어도 삼위 하나님이신 자신의 말씀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성령의 말함입니다.
약점을 감추고 장점만 들어내면서 장점으로 차이점을 가능한 많이 밝히면서 나는 너희들과 달라 주장하면 이것은 자기 자랑이고 간증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실제로 많은 간증들이 자기 자랑처럼 되곤 합니다. 그래서 너무 훌륭한 나머지 동질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똑같은 얘기를 성령의 말함으로 하면 내 자랑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통해서 나와 너를 포함한 우리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말함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분리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훌륭해서 너희들과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나도 너희와 똑같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가졌다 이것을 자랑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랑과 아닌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듣는 사람을 향한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내 자랑만 하는 사람은 청중을 그저 듣고 박수 쳐주는 관계처럼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말을 하는 사람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을 나와 같은 죄인,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한 영혼으로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별 인생이 없다. 다 죄인이다. 나와 너는 똑같은 죄인이다. 이렇게 간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나의 이야기를 우리의 말, 그들의 말과 언어로 대화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목장에서 연습할 수 있습니다.
아직 죄인임을 몰라도 우리 공동체가 타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듣다보면 자기 이야기를 우리를 대표하는 이야기로 하게될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그 모습을 내가 대표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게 바로 성령의 말입니다. 나만 특별하지 않고 우리는 다 똑같습니다.
아무리 죄를 고백하는 말이어도 인간의 자존적 교만함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자랑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 간증의 목적이 구원에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적용질문)
내 간증을 듣는 사람을 박수 쳐주는 관객처럼 대합니까, 나와 같은 죄인인 우리로 대합니까?
간증을 하면서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2. 내 죄가 내 고난보다 더 크다는 고백입니다.
나는 한 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이런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절대로 바뀌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가 당한 고난을 간증하는 것도 감동이고 은혜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한 고난만 강조하는 것도 결국은 내 자랑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말함이 아닙니다.
성령의 말함은 고난보다 더 큰 내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고난을 당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어려운 나눔은 고난을 당한 것이 결국 내 죄 때문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내가 당하는 고난이 내 인생의 결론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미 피해자인 사람이 왜 더 피해자를 자처 하느냐며 조롱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고난은 결국 내가 죄인임을 알고 깨닫는 수단이자 통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저절로 찾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난없이 자기 주에 대한 철저한 회개없이 날마다 싸우는 영적 전쟁없이 매일같이 똑같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없이 홀로 설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 바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서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할 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깨달음이 들어와서 배움이 많아질 수록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죄를 보는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말을 해야 하는데 똑같이 싸우니까 하나님이 크게 심판하십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난은 자꾸만 자존적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우리를 돌이키게 하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때로는 흔들어 깨우는 손이고 때로는 때려서 깨우는 손이고 때로는 멈춰세우는 손이고 때로는 잡아당겨 끌어오는 손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이 손을 대시는 목적은 회개하고 돌이키고 살아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전혀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면 내가 돌이켜야 하는 죄악을 봐야 됩니다. 당하는 고난이 내 죄보다 작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그렇게 철저히 내 죄를 직면해야 합니다.
내 죄악의 크기를 깨달은 만큼 내 간증이 성령의 말함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에게 베푸신 은혜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죄가 깨달아 지면 신세계가 열립니다.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적용질문)
예전에 죄인줄 몰랐는데, 이제 큰 죄임을 깨닫게 된 일은 무엇입니까?
나눔할 때 늘 나의 고난만 나눕니까, 그로 인한 죄도 나눕니까?
내 고난보다 내 죄가 더 크다고 몇% 생각하나요?
3. 엎드러져 들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주님은 생명이 빛이십니다. 그래서 죽음의 속한 자는 주님의 빛을 두려워 합니다. 우리들교회도 죄가 많은데 목장 오라고 하면 뭔가 드러날까봐 싫어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아서 그런 사람들이 오면 은혜 받을텐데 바울의 전 상황처럼 맨 처음에 빛을 보면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엎드려져 나에게 주신 음성으로 들으니까 그때부터 성령의 말함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지금껏 가족을 위해 자녀를 위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내 열심이 주님을 박해한 것입니다.
나의 학벌 내 능력 내 스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 말씀하십니다. 엎드려지지 않으면 결코 동의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말입니다.
그러니 무너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은 말씀이 안 들리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안들린다는 것은 이제 엎드러져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말함은 내 속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내 속에 죄와 악함 내 열심, 이기심만 가득하기 때문에 성령이 말하면 내가 들어야지 기도도 하고 말과 간증도 합니다.
말씀이 안들리는 사람은 가증한 기도를 하고 가증한 상담을 하고 가증한 나눔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배시간, 목장에서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 내 가증이 땅에 엎드려 지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 입술을 통해 성령의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죄가 안보이면 말씀이 안들립니다.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환경과 엎드려진 사건 속에서 나사렛 예수가 바울에게 귓가에 들리는 것입니다. 엎드려지는 것이 죄인됨을 보게 하는 축복입니다. 엎드려 지는 것이 신세계가 열리는 비결입니다.
금그릇은 안들립니다. 질그릇도 깨어져야 보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말함은 엎드려지는 사건 속에서 나사렛 예수를 만나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고난은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합니다.
구속사라는 것은 자신의 죄성의 깊이를 깨닫고 성령의 말함을 아는 자들은 나사렛 예수를 만나는 것이 구속사의 정점이고 처음으로 엎드려지니까 바울에게 구속사가 들린 것입니다.
성경을 좔좔 외워도 홀연히 빛이 와서 엎드려지지 않으면 구속사가 안들리고, 내 죄를 모르면 나에게 주시는 음성이 안들립니다.
나의 엎드려 지는 사건 속에서 나에게 들리는 소리로 로마의 황제로 오신 예수가 아니라, 나에게 들리는 말씀이 날마다 나에게 들리는 소리가 있어야 우리가 성령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 내가 들은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적용질문)
빛에 둘러싸여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선 채, 나를 구원해 줄 환경만 바라봅니까?
엎드러져 나사렛 예수를 만나서 말씀이 들립니까? 그래서 성령의 말을 합니까?
내가 죄인인 사람은 인간관계가 나쁠수가 없습니다. 의인이라서 나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옳기 때문에 날마다 인간관계 타령을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바로 내가 변하고 우리 가정이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