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30 성령의 말함
사도행전 22:1-8
성령의 허락을 받기 위해 바울이 구원의 언어를 얼마나 디테일하게 쓰는지 우리는 모두 지금 감탄하면서 옵니다. 죄가 없으면 이런 환경에서 바울처럼 매맞고 묶여가는 것에 할 말이 많죠. 그런데 자기 죄를 깨달으면 인생의 눈이 떠집니다. 신세계가 열립니다. 그래서 인내를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죄를 깨닫게 된 그 경험이 너무 놀라워서 한 번만 말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말함이고, 간증이고, 사명의 인생입니다.
오늘 변론의 핵심은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된 바울의 회심 사건에 대한 간증이에요 그런데 늘 제가 제목을 거의 본문에서 가져오는데 그걸 그렇게 오랫동안 목자를 하면서 몰랐다고 하는 목자님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우습죠. 그래서 2절의 바울의 간증을, 간증이란 단어가 없어요. 말함으로 표현을 했기 때문에 오늘은 성령의 말함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정말 제가 말씀을 너무나 정말 하나 하나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에요.
1. 내 자랑이 아니라 우리를 대표하는 이야기입니다. (1-3절)
성난 유대인 군중들이 바울이 손짓하자 성령의 허락으로 조용해졌어요. 그런데 바울이 또 히브리 말로 존경하면서 부형들아라고 부르며 자기 말을 들으라고 하자 더욱 조용해졌습니다. 헬라 말만 할 수 있는 헬라주의자인 줄 알았더니 바울이 갑자기 유대인의 언어 히브리 말을 하니까 호기심에 귀가 쫑긋해졌습니다. 이제 바울이 본격적으로 성령의 말을 시작하는데요. 3절입니다.
여기서 첫 마디가 나는입니다. 바울은 교리, 이론에서 시작하지 않아요. 감동적인 예화도 동원하지도 않아요. 아주 단순하게 나로 시작을 하는데 이 얘기는 바울 자신의 이야기라는 거예요. 오늘 변명을 들으라 그랬는데 변명은 말씀으로부터 풀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탁 단어가 없어도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말씀이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거가 성령의 말함이에요.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성령의 말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 자기 고백을 할까요? 오늘 3절에서 다섯가지로 소개를 하죠. 첫째는 유대인이라고 해요. 지금 바울 앞에 있는 군중은 다 유대인이자나요. 지금 여러분은 저를 민족의 원수, 배신자, 반역자로 보지만 사실 저는 유대인이에요. 여러분하고 똑같아요. 두번째는 저는 길리기아 다소 출생, 즉 유대인 중에서도 디아스포라, 그 흩어진, 그러나 굉장히 아주 부자 도시고 교육의 도시인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는 거죠. 자 천부장이 인정할 만큼 헬라어를 구사하는 것도, 그리고 또 이방인과 함께 다니는 것도, 또 이방인에게 유대교에 대해 잘못된 가르침을 전한다는 오해도 자신이 태생적으로 이 다소시 출신이기 때문에, 디아스포라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 오해가 생긴다는 거예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뭔지 알죠? 흩어진 유대인, 그 바벨론 포로나 앗수르 포로로 갔다가 다 흩어졌어요. 여기 저기로 다. 셋째는 이 성, 즉 예루살렘에서 자랐다는 거예요. 다소 출생이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성장했다는 것은 자신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너무나 가지고 잊을 수가 없다는 거에요. 자 넷째는 가말리아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가말리엘의 문하라면 이 제자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곳에 입학하려면 모세오경을 다 외워야 돼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거를. 여러분들 어떻게 외울 수 있겠어요? 자 한 절 외워봐요. 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거 몰라요?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그거를 다 외워야 되는데 거기 또 시험을 보면 일년에 3-4명 밖에 안 뽑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들어갈 때도 그걸 다 외웠는데 졸업할 때는 어떻겠어요? 율법 박사도 그런 박사가 없겠죠. 그러니까 한 마디로 율법이면 율법, 따라갈 자가 없다는 거죠. 가멜리엘은 그만큼 유대인들도 인정하는 율법사였다는 거죠. 원래 사도행전 5장에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고쳐주니까 대제사장하고 무리들이 시기심이 가득해가지고 죽이고 했어요. 이 사도들을. 그때 누가 나서서 구해주냐면 바로 가말리엘이 38 ....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그들이 옳게 여겨 ....라고 했죠. 그래서 이 공회는 교법사인 가말리엘의 권고대로 교회를 박해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던 것 기억나시나요? 몇 명만. 그만큼 유대인이지만 유대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분의 제자라는 거에요. 자 다섯째는 이 많은 아주 대단한 스펙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열심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에 오늘 뭐라고 그랬냐면 3절에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저도 똑같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에요. 이 다섯가지 소개에 핵심이 바로 이거에요. 다시. 나는 유대인이고, 유대인 중에 디아스포라 유대인이고,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에게 배웠고,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고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소개하면서 결국 하고싶은 얘기는 뭔가 하면, 이게 바울이 자기 자랑한 게 아니고 여러분 모두와 마찬가지로 저도 똑같아요. 이런 얘기예요. 그럼 이제 우리가 이걸 어떻게 해석해서 들어야 할까요? 예수 믿기 전에 나는 이렇게 학벌을 좋아했고, 좋은 동네에서 살았고, 그것을 위해서 무서운 열심으로 살아서 다 쟁취했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것이 여러분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물론 이 말을 세상 자랑으로 하면 자기와 듣는 청중, 자기와 유대인들을 분리하는 거예요. 자신을 돋보이도록 분리하는 것이에요. 너희 내가 누군 줄 알아? 이렇게 얘기했으면 이게 성령의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약점은 감추고 장점만 드러내면서 그 장점으로 차이점을 가능한 한 많이 밝히면서 나는 너희들과 달라. 이렇게 주장하면 이런 자기 자랑이 간증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죠. 뭔가 맞는 얘기한 거 같은데, 실제로 많은 간증들이 자기 자랑처럼 되곤 하죠. 그래서 너무 훌륭한 나머지 동질감을 느끼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이 똑같은 얘기를 성령의 말함으로 하면 내 자랑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통해서 나와 너를 포함한 우리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말함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분리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훌륭해서 너희들과 다르다.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나도 너희와 똑같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 인간이 모두 이렇게 좋은 동네 사는 거 좋아하고, 학벌 좋아하고, 열심 좋아하고, 성공하는 거 좋아한다. 그런데 너희들이 원하는 걸 내가 다 가졌다. 간증을 하려니까 이렇게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자랑으로 하면 안된다는 거죠.
그럼 자랑과 아닌 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듣는 사람을 향한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이 됩니다. 그러니까 내 자랑만 하는 사람을 이 청중을 그저 듣고 박수 쳐주는 관객처럼 대해요. 그러니까 내가 말했는데 박수 안 쳐주면 막 화가 나는 거예요. 그게 자랑한 거예요. 자랑질 한 거죠. 그런데 성령의 말을 한 사람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을 나와 같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한 영혼으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별 인생이 없다. 다 죄인이다. 나와 너는 똑같이 죄인이다. 이렇게 해서 간증을 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복음의 시작은 나의 이야기를 우리의 말, 그들의 말, 그들의 언어로 대화를 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목장에서 연습할 수가 있어요. 아직 죄인임을 몰라도 이 우리 공동체가 타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늘 듣다 보면 자기 이야기를 우리를 대표하는 이야기로 하게 될 줄 믿습니다. 아 이렇게 얘기했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다 죄인이자나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 입장에 서게 되니까 공감, 배려 이런 언어가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가 있다는 거죠. 우리의 실제 모습, 그것이 자랑거리든 연약함이든, 또 한계이든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을 하고 그 모습을 내가 대표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게 바로 성령의 말이에요. 그러니까 늘 나만 특별하지 않아요. 우리가 다 똑같아요. 우리의 간증이 이렇게 우리를 대표하는 성령의 말함이 돼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죄를 고백하는 말이어도 이렇게 인간의 자전적 교만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자랑으로 흘러가기 쉬운 거예요. 그래서 내 간증의 목적이 구원에 있는지 늘 생각을 해야 되는 거예요. 내 말의 목적이 구원에 있는지, 그래서 이타적인 사랑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준비하면서 목장에서 이렇게 나눠야 하는 거예요.
[적용] 내 간증을 듣는 사람을 박수 쳐주는 관객처럼 대합니까, 나와 같은 죄인인 우리로 대합니까? 간증을 하면서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 그러더라고요. 집안에 서울대학교 나온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처음 만났는데 한, 두 시간 지나면 반드시 그 서울대학교 얘기를 한대요. 처음 만나도. 그리고 이제 내가 시어머니 10년, 20년 모셨다. 이것도, 그거는 30분이면 나오죠. 늘 이렇게, 그런데 자기가 정말 내가 힘들게 했던 것들을 은근히 자랑하고자 하는데 자랑인지 아닌지 안다는 거죠. 우리가. 이게 중요한 거죠. 자랑은 나와 이 청중을 분리시켜요. 그런데 우리의 이야기로 하면 하나가 되는 거죠. 이게 굉장히 중요한 얘기인 거예요. 자기가 죄인인 걸 알아야 하나가 되는 거죠.
2. 내 죄가 내 고난보다 더 크다는 고백입니다. (4-5절)
다섯 가지 소개로 자신이 유대인 군중과 똑같은 우리임을 고백한 바울은 이어서 전에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밝힙니다. 9장 1절에 바울의 간증이 나왔죠. 9장, 22장, 26장 세 번 간증을 하는데 때마다 조금씩 달라집니다. 당시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해요. 막 보면 바울이 소름 끼쳤을 것 같아요. 그런데 사울이 생각하는 율법은 신명기에 보면 십자가에 달린 죄인은 저주받은 자인데 어찌 구원자가 될 수 있냐. 그러니까 사울은 자기는, 이 사울은 초대 왕 사울하고 다른 바울의 전 이름이에요. 사울은 자기는 하나님의 율법과 613가지의 계명을 다 알고 어려서부터 다 지키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죄가 없어요. 자기의 구원은 자기가 하는 거예요. 자기는 흠이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스데반의 설교가 하나도 안 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살기가 등등하니까 스데반의 설교는 모두 다 개소리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스데반 죽이는데 증인까지 선 거예요. 죽인 거 보다 더 나쁜 거 같아요. 이 사람 머리가 좋고 교활하니까. 증인까지 섰어요. 그런데 이렇게 행위를 산처럼 쌓아 놓은 이런 바울 같은 사람에게 당신은 멸망받을 죄인이고 우리는 다 죄인이라서 행위로 공로로 천국 갈 수 없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소름이 끼치겠습니까? 그런데 그 얘기를 누가 하냐 그러면 그것도 행함이 없어 보이는 망한 사람, 암 걸린 사람, 이혼한 사람이 와서 예수 믿으라.고 너는 멸망받을 죄인이라고 그러면 소름 안 끼치겠습니까? 우리들교회 성도 중에서도 이 설교와 우리들교회 간증이 소름 끼치도록 싫어서 떠난다는 분이 있더라구요. 그런데 오늘 바울을 보니까 이해가 되시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이해를 해요. 이걸 이해를 해야지 우리와 너희의 얘기가 되는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가 아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런 분이 바울같이 되니까 반드시 크게 쓰임 받을 줄 믿습니다. 당시 사울은 이런 일이 죄라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확신을 했어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라고 믿었어요. 18세기 미국 대각성 운동의 주도자 복음 전도자 조지 윗필드 자기 의는 우리 마음에서 빼내야 할 마지막 우상이라고까지 말했어요. 그래서 이 대단한 스펙을 가진 열심으로 결국 사울은 스데반을 죽였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어요. 그러니까 이 열심이 얼마나 사람 죽이는 열심인가 이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거꾸로 바울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자신이 박해를 똑같이 받고 있고, 자신이 죽임을 당할 처지에 있고, 자신이 결방을 당해서 옥에 들어갈 판이에요. 이 결박과 환난을, 이 억울한 고난을 바울이 당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박해를 당할 때 바울이 한마디도 안 했자나요. 묵묵히 다 받아냈자나요. 그러니 어떻게 이거를 받아내죠? 이렇게 잔멸을 했던 사람이? 그 잔멸을 했을 때 장로들과 여기 증인이 있었다 그러자나요. 자기 어떻게 잔멸을 했는지. 그러니까 스데반을 볼 때도 자기가 증인이었지만 자기가 죽이는 것 때도 이 대제사장들과 증인이 있었다고 그래요. 인생은 다 똑같아요.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내 죄를 봐요. 내 죄를 보는 것은 신세계가 열리는 거죠. 이거는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거죠. 그러니까 바울이 이렇게 변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의 의로 분기탱천해서 나는 의리의 사나이다.를 부르짖으면서 나는 한 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할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절대로 바뀌지 않을 사람이었죠. 만일 바울이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더 크고 무겁게 여겼다면 고난에 대해서 내가 1, 2, 3차 선교 여행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세웠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런 결박과 환난을 줄 수가 있냐? 그것도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이래야 되자나요. 그죠. 바울은 지금 간증한 것처럼 자기 죄악을 생각하는 거예요. 문제만 생기면 자기 죄악을 생각하는 거예요. 사울이 바울이 되니까 자기가 선한 일인 줄 알고 행했던 일들이 주님의 도를 박해하고, 사람을 죽이고, 선량한 남녀를 결박하여서 옥에 넘겼던 것이 죄임을 지금 인정, 인정하는 게 참 중요하죠. 내가 당한 고난을, 그러므로 간증하는 것도 굉장히 감동이고 은혜를 줄 수 있어요. 어떻게 그런 역경을 통과했는지, 우와 도전이 막 되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당한 고난만 강조하는 것도 결국은 내 자랑과 다름이 없어요. 그거는 성령의 말함이 아니예요. 성령의 말함은 고난보다 더 큰 내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이런 고난을 당했다고 설명하는 더는 굉장히 제일 쉬운 거죠. 훨씬 더 어려운 나눔은 이런 고난을 당한 것이 결국 내 죄 때문이다.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인간적으로 보면,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당하는 고난이 내 인생의 결론으로 고백하는 거는 다른 사람에게 어리석게 여겨질 수 있죠. 이미 피해자인 사람이 왜 더 피해자를 자처하느냐?며 조롱받을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고난은 결국 내가 죄인임을 알, 또 이걸 깨달아서 히브리서 2장 10절에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려는 수단이자 통로인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저절로 찾을 수 있다면 그 아니 좋겠습니까? 고난 없이, 자기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 없이, 날마다 내 죄와 싸우는 영적 전쟁 없이 매일같이 똑같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없어요. 사실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없이 홀로 설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 바라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서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존재로 지어졌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할 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우리가 그렇게 물어요. 모세 때 모세만 살고 그 애들은 다 죽었는데 걔네들은 지옥가냐? 맨날 이런 게 굉장히 궁금하자나요. 여러분. 그래서 뭐 세종대왕은 천국 갔냐? 지옥 갔냐?, 이순신은 어떻게 됐냐? 이런데 그거에 너무 궁금해하지 말고 우리는 로마서에도 보면 사시사철만 봐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핑계하지 못한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아주 소수지만 일반 계시로도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는데 우리가 커가면서 배움이, 그러니까 깨달을 수 없는, 아기들은 정말 태어난 그 아이들이 죄를 깨달을 수 없자나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우리 천국 갔다고 그러죠. 그러니까 걔네들은 그 역할에 순종한 거예요. 모세 시대에 모세는 살았으니까 축복받았고, 그게 아니고 역할에 순종한 거죠. 그런데 깨달음이 들어와서 배움이 많아질수록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예요. 배움이 많을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죠. 그래서 남녀를 막론하고 이렇게 예수 믿기 위해 결박당하는 거는, 바울이 결박했지만, 그거는 너무나 좋은 일이에요.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고 박해할 때는 남녀 차별이 없네요. 그죠? 그런데 주의 일 할 때는 남녀차별이 그렇게 있어요. 박해할 때는 없는데. 창세기 1장에 보면 남녀를 창조하실 때 비분리 접속사를 써서 분리를 안 했는데 죄가 들어온 이후부터 분리가 됐어요. 그러니까 이 남녀차별의 문제도 성령이 임해야 원래대로 구별과 차별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면 남녀차별도 이게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이런 지역 감정, 진영 논리도 그냥 우리나라 세종 대왕이 살아 돌아와도 이거는 안돼요. 우리는 세종대왕 때도 완전히 당파 싸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자나요. 그러므로 여기 책임은 이제 기독교인들이죠. 죄를 보는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말을 해야 되는데 책임이 큰 거예요. 성령의 말을 안하고 다 똑같이 싸우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크게 심판을 하십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난은 자꾸만 자존적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우리를 돌이키게 하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때로는 흔들어 깨우는 손이고, 때로는 때려서 깨우는 손이고, 때로는 멈춰 세우는 손이고, 때로는 잡아당겨 끌어오는 손이고, 어떤 방식이든 하나님이 손을 대시는 목적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고 살아나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전혀 미워하지 않으세요.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면 내가 돌이켜야 하는 그 죄악을 봐야 되는 거예요. 당하는 고난이 내 죄보다 작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그렇게 철저히 내 죄를 직면해야 합니다. 내 죄악의 크기를 깨달은 만큼 내 간증이 성령의 말함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에게 베푸신 은혜를 알게 되기 때문이에요. 휘문에서 예배 드릴 때 너무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워도 다들 내 죄가 당하는 고난보다 더 크다 하니까 하나도 안 덥고, 하나도 안 춥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죄가 안 보이는 사람은 아 더워, 아 추워 그래서 안 와. 교회 짓기까지 안 가. 그런데 지었다고 오시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러니까 내 죄가 깨달아지면 신세계가 열려요.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어요.
[적용] 예전에 죄인 줄 몰랐는데, 이제 큰 죄임을 깨닫게 된 일은 무엇입니까? 나눔 할 때 늘 나의 고난만 나눕니까, 그로 인한 죄도 나눕니까? 내 고난보다 내 죄가 더 크다고 몇% 생각하나요?
정신과의사인 정의신씨는 누군가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된다고, 충조평판은 충고, 조언, 평가, 판단. 충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은 소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다. 이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 말이다. 바른 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쓰러진 사람보다 바른 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들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많이 봤다. 이처럼 우리가 상대방이나 부모, 자녀에게 하는 바른 말이 더 심한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 바른 말에는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공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항상 좋은 소리만 하는 게 위하는 건 아니자나요. 그죠? 물론 이 얘기도 죄를 모르면 이거 아무것도 해결 안돼요. 아무리 바른 말 안하고 좋은 말 해줘도 해결이 되는 건 아니예요. 죄를 알아야지 이 말도 다 지혜롭게 쓸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제 간증을 하면서 자신이 당한 고난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고백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9장부터. 당시에는 죄를 몰랐지만 이제 보니 심각한 죄라고 인정이 되는 행위들에 대해서 지금 군중 앞에서 낱낱이 드러내고 있죠. 유대인 군중 앞에서. 바로 이것이 성령의 말함이에요. 성령의 간증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박해자인 바울이 어떻게 죄를 보게 되었을까요? 이게 가장 중요하자나요. 키 포인트.
3. 엎드러져 들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6-8절)
사도행전 9장의 간증에는 없었던 이 오정이라는 시간이 나와요. 하늘로부터 큰 빛이 둘러 비쳤다고 합니다. 어두운데 있다가 환한데 나오면 눈이 부시자나요. 시리자나요. 그런데 그것도 정오의 빛, 그 다음에 이스라엘의 정오의 빛은 막 용광로 불 같은 거예요. 그거 쳐다보면 진짜 이렇게 눈이 먼다고 해요. 그런데 그 정오의 그 밝은 빛보다 더 밝은 빛, 예수님의 영광의 큰 빛이 사울에게 비추어진 거죠. 그 빛은 광채를 너머서 사람이 보면 죽는 빛이에요. 주님은 생명의 빛이시죠. 그래서 죽음에 속한 자는 이 빛을 보면 다 두렵습니다. 우리들교회도 이 죄가 많은데 목장 오라고하면 다 싫어요. 뭔가 드러날까봐. 우리들교회 오라는 거도 싫고. 그래서 하여튼 그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은데, 그런 사람들 오면 은혜를 받을텐데 이 바울의 전 상황처럼 맨 처음에 빛을 보면 두려운 거예요. 그런데 9장에서는 빛을 봤다고 그러고, 22장에서는 큰 빛을 봤다고 그러고, 26장에는 해보다 더 밝은 빛을 봤다 그러니까 이제 간증도 때에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주님에 대한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점점 달라져가는 거죠. 그러면 이거를 우리한테 주는 말씀으로 들어야 되자나요. 홀연히 해가 비친 게, 그래서 그 죽는 게 이게 뭐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앞으로도 뒤로도 못 가는 상황, 기세등등했던 바울이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린 거예요. 내 인생 가장 찬란하게 빛나야 할 정오에, 이제 곧 도착하는 다메섹 성읍에서 내가 승전보를 울려야 하는데, 내가 모두를, 짠하고 나타나야 되는 그 바로 앞에서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사건이 생긴 거죠. 바로 이게, 우리는 그냥 빛이 비춰서 바울이 예수 믿었다. 이러면 여러분들한테 적용할 게 하나도 없자나요. 그 빛은 어디서부터 오는 건데? 그럼 이스라엘 가야 되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때 이 기세등등했던 바울이 어떻게 됩니까?
엎드러지니까 들어요. 들리는 거예요. 소리가. 이게 나에게 주신 음성이에요. 엎드러지니까 말씀이 들려요. 말씀이 들리는 거는 이렇게 엎드러져야지 내가 죄인이라는 걸 알게 돼요. 그러니까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 죄의 목록이 밝혀졌자나요. 엎드러지니까 들리고, 나에게 주신 음성이 들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그냥 구약을 좔좔 외우는데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음성은 안 들려요. 안 들려. 이게 큰 차이인 거죠. 그죠? 그러니까 우리가 들으니까, 엎드러져서 들으니까,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들으니까 성령의 말함이 출발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성령의 말함이 출발하는 거예요. 지금껏 자녀를 위해, 가족을 위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내 열심이 주님을 박해하는 일이라는 거예요. 나의 학벌, 내 능력, 내 스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 말씀하세요. 엎드러지지 않으면 결코 동의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말인 거예요. 그러니까 무너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이 말씀이 안 들리는 거죠. 결국 말씀이 안 들린다는 거는 이제 엎드려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 설교가 너무 어려워요. 처음부터 끝까지 구속사로 하니까. 성령의 말함은 내 속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예요. 내 속에는 죄와 악함, 내 열심, 이기심만 가득하기 때문에 지금, 그 성령이 말하려면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지 기도도 하고 말도 하자나요. 간증도 하고. 그런데 잠언 28장 9절에는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우리가 그렇게 말씀이 안 들리는 사람은 가증한 기도를 하고, 가증한 상담을 하고, 가증한 나눔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들어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고, 예배 시간에 들어야 되고, 목장에서 열심히 들어야 되고, 그래서 내 생각이, 내 가증이 땅에 엎드러지는 사건을 통해서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내 입술을 통해 성령의 말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결정적으로 무엇에 엎드러졌습니까? 바울은 그 자기만 알아들었던 Voice, 주님께서 자기에게 특별히 듣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살기가 등등해서 다른 교인들 잡아 죽이러 가는 이 때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어찌 교회를 잔멸하던 사울을 이렇게 다정하게 녹아지게 부르실 수가 있어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우리 사명 주실 때 부르던, 그러니까 여기 바울이 잘나서 불렀어요? 행위가 있어서 불렀어요? 바울의 공로가 들어갈 틈이 어디 있어요. 잔멸하러 씩씩거리면서 죽이려고 가는데 사울아 사울아 생각하면 눈물밖에 날 것 없는 주님의 부르심이에요. 주님은 교회와 자신을 같이 생각하셨어요. 그러니까 정말 죄가 안 보이면 말씀이 안 들려요. 설교가 이해가 안 돼요. 이게 연 이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이 주님이 만나주시기 전에 직전까지 말씀이 안 들렸자나요. 박사 학위 몇 개 가진 바울이. 직전까지 말씀이 안 들렸어요. 그리고 맨날 자랑하는 거예요. 스펙, 동네, 자기 열심, 성공한 거, 이 얘기만 날마다 부르짖고 있어요. 자기 자랑으로 모든 사람을 분리하고 있어요. 나하고 네까짓 게 같아? 집에서도 부모하고 자식도 얘 너는 나하고 네까짓 거 하고 달라. 이렇게 자꾸 분리를 해요. 자식 보고도. 나도 너하고 똑같았단다. 나도 똑같아. 그냥 환경이 좀 되서 공부를 한 거지 얘야 이렇게 똑같다고. 제가 참 말은 잘하죠. 정답은 또 말 못하겠어요? 그렇지만 그게 원리라는 거예요. 나하고 너하고 똑같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 목자를 그렇게 오래했는데 본문에서 제목 가져오는 걸 몰랐대. 그러니까 이게 말씀이 안 들리는 거예요. 죄를 못 보니까. 그런데 또 그냥 내가 지금 너무 설교 쉽게 하지 않아요? 그런데 1부 예배 듣고 어머 어려워요. 오늘. 그게 무슨 말 이러시는 거예요. 깨달아야 될 분이. 그래서 나는 맨날 절망해요. 그래서 제 설교는 아무도 못 알아들어서 악플을 안 달자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달아줘야 돼요. 요새 설교에 다 댓글 중지자나요. 우리만 쫙 열어놨어요. 그러면 가끔가다 신천지가 하나 나와가지고 이상한 글 올리죠. 그래서 슬퍼요. 그냥. 그런데 제가 다 설교마다 성도 쫓는 설교만 하자나요. 고난이 축복이라 그러고. 하루도 안 빠지고. 성도들이 오겠어요? 소름이 끼치는데? 그런데 해요. 제가 교회 부흥하려고 교회 시작한 거 아니자나요. 한 사람 살리려고 하니까. 그래서 바울의 마음이 너무 이해가 되는 거예요.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때려 죽이려고 그러고. 내가 거기까지는 안 가도 복음을 전하는데 왜 이렇게 다 때려잡나. 너무 체휼이 되고 거기까지 못 가지만 그런 마음이 들어요.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났죠? 그렇지만 베들레헴 예수라는 소리는 들어보지를 못하자나요. 우리는 다 늘 나사렛 예수라 그래요. 예수님이 자기를 나사렛 예수라고 오늘 이렇게 딱 소개하는데 이게 사도행전과 바울의 간증에서 여기만 딱 나오는 거예요. 딱 한 번.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엎드러져 있는 바울에게 자신을 나사렛 예수로 소개하는 거예요. 나사렛하면 세 가지 기억돼요. 저주, 멸시, 천대. 나사렛은 바로 이 갈릴리 지역이에요. 당시 구약을 잘 알던 사람들의 인식 속에 버림받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저주받은 땅을 통칭하는 게 나사렛이고 나사렛 지역인 거예요. 여러분들 가불 땅 기억나시나요? 성전 건축을 마치고 솔로몬이 두로 왕에게, 희람에게 준 땅인데 그 희람이 쓸모가 없다고 땅 받지도 않았어요. 도리어 자기가 돈을 줬어. 솔로몬한테 너 웃긴다. 이래 가면서. 그래서 하마터면 이 쓸모 없는 땅이 두로에게 갈 뻔했어요. 여기가 이 예수님이 이 나사렛 출신이다. 내가 버릴만한 이 나사렛이 엄청나게 쓰이는 가불 땅의 성읍, 갈릴리의 성읍 스무 곳입니다. 바로 그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하십니다. 하지만 이 꼼짱달싹하지 못하는 에워싸인 환경과 엎드러진 사건 속에서 드디어 나사렛 예수가 바울에게 귓가에 들리는 것이죠. 엎드러진 것이 죄인 됨을 보게 하는 축복입니다. 엎드러지는 것이 신세계가 열리는 비결입니다. 그러니까 이 금그릇으로 안 들려요. 금그릇으로. 질그릇도 깨어져야 보배가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로 성령의 말함은 엎드러지는 사건 속에서 나사렛 예수를 만나야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바울에게 왜 나사렛 예수를 소개했을까요? 바로 이런 저주받고 멸시받고 천한 땅을 니가 앞으로 전도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방 땅을 너에게 맡겼노라 그러니까 이 나의 고난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4절처럼 이게 주님을 만나니까 내가 바로 사람들을 박해하며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하며 결박하여 옥에 넘긴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한 거예요. 사도행전 9장 이후에. 이 나사렛 예수를 듣지 못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죄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구속사라는 것은 이렇게 자신의 죄성의 깊이를 깨닫고 성령의 말함을 아는 자들은, 구속사라는 것은 점으로 오신 예수님, 비천하게 오셨자나요. 여인의 자궁에서. 아내를 팔아먹은 아브라함, 잘난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 에서가 아닌 속이는 자 야곱, 총리 요셉이 아닌 며느리와 동침한 유다, 간음하고 살인으로 범죄한 다윗, 이방 여인과 창기들의 계보 속에 오신 이 나사렛 예수를 만나는 것이 구속사의 정점이고 처음으로 엎드러지니까 이 바울에게 이 구속사가 들린 거예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성경을 좔좔 외워도 홀연히 빛이 와서 엎드러지지 않으면 구속사가 안 들리고 내 죄를 모르면 나에게 주시는 음성이 안 들려요. 안 들려요. 그래서 저는 그 바울의 애통이 너무 와 닿아요. 아무리 들어도 소 귀에 경 읽기 같은 거예요. 뭔 말인지 하나도 몰라요. 그래서 나의 엎드러지는 사건 속에서 나에게 들리는 소리, 로마의 황제로 오신 예수가 아니라 그 나에게 들리는 말씀이 나사렛 예수임이 들려야, 날마다 아침마다 나에게 들리는 이 소리가 있어야 우리가 성령의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 내가 들은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 7절에 들리는 소리, 나에게 주시는 음성 이해되셨죠?
[적용] 빛에 둘러싸여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선 채, 나를 구원해 줄 환경만 바라봅니까? 엎드러져 나사렛 예수를 만나서 말씀이 들립니까? 그래서 성령의 말을 합니까?
기도제목
엄마 피부병 때문에 고생하시는데 여호와 라파 치료의 주님이 속히 회복시켜 주시고 재발하지 않게 지켜주시도록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 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믿음 생활로 들어가기 힘쓰도록
동생들이 예배가 무너진 상황에서 다시 회복하기 위해 제가 먼저 기도하기를 힘쓰도록
개인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시험을 차근차근 착실하게 해 나갈 수 있도록 의지와 집중력, 기억력을 허락해 주시길
지혜를 구하고 총명을 더하여 주시도록
코로나 속히 물러가고 종식되도록 고통받고 있는 지체들에게 성령의 위로가 임하도록
미혜
연휴 마치고 업무상 가장 바쁜 한주가 될 것 같은데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고객들에게 말하는데 내 감정을 토로하지 않도록
가족들을 구원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아빠에게 나는 아빠와 다르다가 아니라 나는 아빠와 똑같다하며 성령의 말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도록
회사 직원 고용에 있어 연약한 저를 주님께서 아시고 온전히 인도해주시고 이에 적용할 것이 있다면 용기를 주시도록
목장식구들 한주 하나님께서 온전히 보호해주도록
지영
엄마 2번째 조직검사 후 암세포가 발견이 안돼서 연휴 끝나고 재검한다고 합니다. 신속히 정확한 병명과 그에 따른 치료가 잘되어서 암들이 다 제거가 될 수 있도록
오미크론 때문에 사업이 힘들 수 있지만 타격받지 않고 코로나 걸리지 않고 클린존이 될 수 있도록
민희
남자친구의 구원을 위해 내가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해주심을 믿고 나는 전달만 하는 역할을 잘 하도록
결혼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데 어떤 방향으로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지혜를 주시길
내 큐티 잘하도록
예선
말씀으로 하루만 잘 살도록
가족들 구원을 위해서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 내가 들은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너무 어렵습니다. 명절 때 가족들과 경계를 잘 지키도록
춥다고 집에만 있으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잠깐이지만 밖으로 나가서 시간을 보내고 그날 꼭 해야 할 일들 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