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30. 성령의 말함 (행 22:1-8), 김양재 담임목사님
성령의 허락을 받기 위해 바울이 구원의 언어를 얼마나 디테일하게 쓰는지, 우리는 모두 감탄한다. 죄가 없으면 이런 환경에서 매 맞고 묶여가는 것에 할말이 많다. 그러나 자기 죄를 깨달으면 인생의 눈이 떠진다. 신세계가 열린다. 그래서 인내하게 된다. 그 죄를 깨닫게 된 경험이 놀라워서 한번만 말하게 해달라는 것이 성령의 말함이고 간증이고 사명이다.
오늘 변론의 핵심은 행 9장에 기록된 바울의 회심사건에 대한 간증이다. 2절에 바울의 간증은 간증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말함으로 표현했다. 그래서오늘은 성령의 말함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성령의 말함은
1. 내 자랑이 아니라 우리를 대표하는 이야기입니다.
1-2절
바울이 손짓하자 성난 유대인 군중이 성령의 허락으로 조용해진다. 그런데 바울이 히브리어로 존경하며 부형들아 라고 부르며 자기 말을 들으라고 하자 더욱 조용해졌다. 헬라말만 할 수 있는 헬라주의자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유대인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쓰니 호기심이 생겼다.
3절
바울이 본격적으로 말을 시작한다.
여기서 첫마디는 나는 이다. 바울은 교리 이론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감동적인 예화로 시작하지도 않는다. 단순하게 나로 시작한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오늘 변명을 들으라고 했다. 변명은 말씀으로부터 풀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말씀에 그 단어는 없지만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성령의 말함이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성령의 말함이다.
그럼 바울은 어떻게 자기 고백을 할까? 오늘 3절에서 5가지를 소개한다.
첫째는 유대인이라 한다. 지금 바울 앞의 군중은 다 유대인이다. 지금 여러분은 저를 민족의 원수, 배신자, 반역자로 보지만 사실 저는 유대인이라고, 여러분과 똑같다 한다.
두번째, 저는 길리기아 다소 출생, 즉 유대인 중에서도 디아스포라, 부자 도시이자 교육의 도시인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한다. 천부장이 인정할 만큼 헬라어를 구사하는 것도, 또 이방인과 함께 다니는 것도, 이방인에게 유대교에 대해 잘못된 가르침을 전한다는 오해도, 자신이 태생적으로 다소시 출신이기에, 디아스포라 유대인이기에 이 오해가 생긴다는 것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흩어진 유대인이다. 바벨론 앗수르 포로로 갔다가 흩어진 유대인이다.
세번째, 이 성, 즉 예루살렘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다소 출신이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성장했다는 것은 자신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네번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고 한다. 가말리엘의 문하는 그 제자라는 뜻이다. 그곳에 입학하려면 모세 오경을 다 외워야 한다. 그래서 시험봐서 일년에 3-4명 뽑는다.들어갈대도 그런데 졸업할 때는 어떻겠는가? 율법 박사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율법이면 율법, 따라갈 자가 없다는 것이다. 가말리엘은 그만큼 유대인도 인정하는 율법사였다는 것이다.
원래 행 5장에 사도들이 앉은뱅이 고쳐주니 대제사장과 무리들이 시기심이 가득해서 사도들을 죽이고자 한다. 그때 가말리엘이 나서서 구해주었다.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고,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 났으면 만일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하노라 하니 그들이 옳게 여겼다고 했다. 그래서 공회는 교법사인 가말리엘의 권고대로 교회를 박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만큼 유대인이지만 유대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자의 제자라는 것이다.
다섯째, 이 많은 대단한 스펙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대해 열심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무엇이라 했는가? 3절에 너희 모든 사람처럼 저도 똑같이 하나님께 대해 열심이 있다고 했다.
이 다섯가지 소개의 핵심이 이것이다. 나는 유대인이고, 유대인 중 디아스포라 유대인이고,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에게 배웠고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이 모든 것을 소개하면서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바울이 자기 자랑한 것이 아니라 저도 똑같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서 들어야 하는가? 예수 믿기 전에 나는 이렇게 학벌 좋아했고 좋은 동네에서 살았고 그것을 위해 무서운 열심으로 살아서 쟁취했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것이 여러분과 다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을 세상 자랑으로 하면 자기와 듣는 청중을 분리하게 된다.자신을 돋보이도록 분리하는 것이다. 너희가 내가 누군 줄 알아? 하면 이것이 성령의 말이 안된다. 약점은 감추고 장점만 드러내며 그 장점으로 차이점을 가능한 한 많이 밝히면서 나는 너희와 다르다 주장하면 자기 자랑이다. 이런 자기 자랑이 간증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무언가 맞는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실제로 많은 간증이 자기 자랑처럼 되곤 한다. 너무 훌륭한 나머지 동질감을 느끼기 어렵다. 그러나똑 같은 이야기가 성령의 말함이 되면 내 자랑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통해 나와 너를 포함한 우리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렇기에 성령의 말함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훌륭해서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너희와 똑같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모두 좋은 동네 사는 것 좋아하고 학벌 좋아하고 열심 좋아하고 성공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너희들이 원하는 것 내가 다 가졌다. 간증을 하려니 이렇게 시작한다. 근데 이것을 자랑으로 하면 안된다.
그럼 자랑과 아닌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듣는 사람을 향한 태도가 차이난다. 내 자랑만 하는 사람은 청중을 그저 내 이야기 듣고 박수 쳐 주는 관계처럼 대한다. 그러니 내가 말했는데 박수 안쳐주면 화가 난다. 그것이 자랑질 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말 하는 사람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을 나와 같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한 영혼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별 인생이 없다, 다 죄인이다, 나와 너는 똑같은 죄인이다 하며 간증하는 것이다.
복음의 시작은 나의 이야기를 우리의 말 그들의 말 그들의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목장에서 연습할 수 있다. 아직 죄인인 것을몰라도 우리 공동체가 타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늘 듣다 보면 자기 이야기를 우리를 대표하는 이야기로 하게 될 날이 올 줄 믿는다.
우리가 다 죄인이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 입장에 서게 되면 공감 배려의 언어가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실제 모습-그것이 자랑거리든 연약함이든 한계이든-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그 모습을 내가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말이다. 그러니 늘 나만 특별하지 않다. 우리가 다 똑같다. 우리의 간증이 우리를 대표하는 성령의 말함이 되어야 하겠다. 그러나 아무리 죄를 고백하는 말이어도 인간의 자존적 교만함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자랑으로 흘러가기 쉽다. 그래서 내 간증의 목적이 구원에 있는지 늘 생각해야한다. 늘 내 말의 목적이 구원에 있는지 보라. 그래서 이타적인 사랑을 주시길 기도하며 준비하며 목장에서 나눠야 한다.
적용) 내 말 내 간증을 듣는 사람을 박수쳐 주는 관객처럼 대합니까, 나와 같은 죄인인 우리로 대합니까? 간증을 하면서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집안에 서울대 나온 사람 한 사람만 있으면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1-2시간 지나면 반드시 그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시어머니 10년 20년 모셨다는 이야기는 30분이면 나온다 한다. 내가 힘들게 했던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자 한다는데, 우리가 그것이 자랑인지 아닌지 안다고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자랑은 나와 이 청중을 분리시킨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로 하면 하나가 된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근데 이것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하나 될 수 있다.
성령의 말함 두번째
2. 내 죄가 내 고난보다 더 크다는 고백입니다.
4-5절
다섯가지 소개로 자신이 유대인 군중과 똑같은 우리 임을 고백한 바울은 이어서 전에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밝힌다. 바울의 간증이 세번 나오는데 그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당시 사울 (바울의 전 이름)은 주의 제자들에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한다. 사울이 생각하는 율법은 신명기에 보면 십자가에 달린 죄인은 저주받은 자인데 예수가 어찌 구원 받은자가 될 수 있냐 였다.
사울은 하나님의 율법과 613가지의 계명을 다 알고 어려서부터 다 지키고 있기에 자기는 죄가 없다. 자기 구원은 자기가 하는 것이고 자기는 흠이 없다. 그래서 사울은 스데반의 설교가 하나도 안 들리는 정도가 아니다. 그리고살기 등등하다. 스데반의 설교는 다 개소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스데반 죽이는데 증인까지 섰다. 이것은 죽이는 것보다 더 나쁘다. 머리가 좋고 교활하니 그렇다.그런데 이렇게 행위를 산처럼 쌓아 놓은 바울 같은 사람에게 당신이 멸망 받을 죄인이고 우리는 다 죄인이라서 행위로 공로로 천국갈 수 없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소름 끼치겠는가? 그 이야기를 행함이 없어 보이는 망한 사람, 암 걸린 사람, 이혼한 사람이 와서 예수 믿으라고, 너는 멸망 받을 죄인이라고 하면 소름 끼치지 않겠는가?
우리들교회 성도 중에서도 제 설교와 우리들교회 간증이 소름끼치도록 싫어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바울을 보니 이해가 된다. 우리는 이렇게 이해가 된다. 이해를 하니 우리와 너희의 이야기가 된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가 아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런 분이 바울같이 되니 반드시 크게 쓰임 받을 줄 믿는다. 당시 사울은 이런 일이 죄라고 상상도 못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 확신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라고 믿었다.
18세기 미국 대각성 운동의 주역이었던 복음전도자는 자기 의는 우리 마음에서 빼내야 할 마지막 우상 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래서 대단한 스펙을 가진 열심으로 사울은 스데반을 죽였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니 이 열심이 얼마나 사람 죽이는 열심인가?
그러나 지금 바울의 형편이 어떤가? 자신이 박해를 똑같이 받고 있고 자신이 죽임 당할 처지고 결박 당해서 옥에 들어갈 판이다. 이 결박과 환란을, 억울한 고난을 바울이 당하고 있다. 근데 이 박해 당할 때 바울이 한마디도 안했다. 묵묵히 다 받아냈다. 잔멸했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받아내는가?
바울 자신이 잔멸했을 때 장로들과 증인들이 있었다 한다. 스데반을 볼 때도 자신이 증인이었으나 자기가 죽일 때도 대제사장들과 증인이 있었다고 한다. 인생은 다 똑같다.
여기서 어떻게 내 죄를 보는가?내 죄를 보는 것은 신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다. 바울이 이렇게 변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의 의로 분기탱천해서 나는 의의 사나이라고 부르짖으며 나는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제일 무섭다. 절대 바뀌지 않을 사람이었다.
만일 바울이 자기가 당한 고난을 더 크고 무겁게 여겼다면 1-3차 선교여행을 하며 얼마나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세웠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런 결박과 환란을 줄 수 있는가, 그것도 예루살렘 유대인들이 어떻게 그럴수 있냐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간증한 것처럼 자기 죄악을 생각한다. 문제만 생기면 자기 죄악을 생각한다. 사울이 바울이 되니 자기가 선한 일인줄 알고 행했던 일들이 주님의 도를 박해하고 사람을 죽이고 선량한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던 것이라고, 그것이 죄라고 인정했다. 이것이 중요하다.
내가 당한 고난을 간증하는 것도 굉장히 감동이고 은혜를 줄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역경을 통과했는지 도전이 된다. 그러나 내가 당한 고난만 강조하는 것도 결국 내 자랑과 다름이 없다. 그것은 성령의 말함이 아니다. 성령의 말함은 고난보다 더 큰 내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고난을 당했다 설명하는 것은 쉽다. 훨씬 어려운 나눔은 이런 고난을 당한 것이 결국 내 죄 때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당하는 고난이 내 인생의 결론이라 고백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어리석게 여겨질 수 있다. 이미 피해자인 사람이 왜 더 피해자로 자처하냐며 조롱받을 수 있다. 그러나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고난은 결국 내가 죄인임을 알고 깨달아서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려는 수단이자 통로이다.주님을 저절로 찾을 수 있다면 그 아니 좋겠는가. 고난 없이, 자기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 없이 날마다 내 죄와 싸우는 영적 전쟁 없이 매일같이 똑같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없이 홀로 설 수 있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존재로 지어졌다. 그러니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할 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는데 우리가 그런 질문을 한다. 모세 때 모세만 살고 애들이 다 죽었는데 그 아이들이 지옥가냐 한다. 세종대왕 천국갔냐 지옥갔냐 이순신은 어떻게 되었냐 뭐 이런다. 우리는 로마서에도 보면 사시사철만 봐도 하나님 계신 것을 핑계하지 못한다 했다. 아주 소수지만 일반계시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아기들은 죄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우리는 천국 갔다고 하는 것이다. 그 아이들은 모세시대에서 그 역할에 순종한 것이다. 모세는 살았으니 축복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역할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깨달음이 들어와 배움이 많아질수록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래서 남녀를 막론하고 예수 믿도록 결박 당하는 것은 너무 좋은 일이다.
박해하고 결박할 때는 남녀 차별이 없다. 그런데 주의 일을 하는 데는 차별이 있다. 창 1장에 보면 남녀를 창조하실 때 비분리 접속사를 써서 분리하지 않았는데 죄가 들어온 이후부터 분리가 되었다. 남녀 차별의 문제도 성령이 임해야 원래대로 구별과 차별이 없어진다. 그러니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면 남녀차별도 해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역감정 진영논리도 우리나라 세종대왕이 살아 돌아와도 안된다. 세종대왕때도 당파싸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그러니 여기 책임은 기독교인들에게 있다. 죄를 보는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말을 해야 하는데 책임이 크다. 성령의 말을 하지 않고 똑같이 싸우니 하나님이 크게 심판하신다.
그래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난은 자꾸 자존적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우리를 돌이키게 하는 하나님의 손이다. 때로는 흔들어 깨우는 손이고 때로는 때려서 깨우는 손이고 때로는 멈춰 세우는 손이고 때로는 잡아당겨 끌어오는 손이다. 어떤 방식이든 하나님이 손을 대시는 목적은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이고 살아나라는 것이다. 하나님 전혀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면 내가 돌이켜야 하는 그 죄악을 봐야 한다. 당하는 고난이 내 죄보다 작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철저히 내 죄를 직면해야 한다. 내 죄악의 크기를 깨달은 만큼 내 간증이 성령의 말함이 된다. 성령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에게 베푸신 은혜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휘문에서 예배드릴 때 겨울에 너무 춥고 여름에 너무 더워도 내 죄가 당하는 고난보다 더 크다 하니 하나도 안덥고 안춥다 했다. 그러나 죄를 안보는 사람은 춥고 더워서 안간다 한다. 교회짓기까지 안간다 한다. 그렇다고 교회 지었다고 오시는 것도 아니다. 내 죄가 깨달아지면 신세계가 열린다.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다.
적용) 예전에 죄인 줄 몰랐는데, 이제 큰 죄임을 깨닫게 된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나눔할 때 늘 나의 고난만 크다고 나눕니까, 그로 인한 나의 죄도 나눕니까? 내 고난보다 내 죄가 더 크다고 몇 프로 생각하나요?
정신과 의사인 정해신 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누군가와 고통과 상처를 이야기 할때는 충조평판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충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은 소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다. 이것의 다른 말은 바른 말이다. 바른 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 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만 배쯤 많이 봤다.
이처럼 우리가 상대방이나 부모 자녀에게 하는 바른 말이 더 심한 상처를 줄 수 있다. 그 바른 말에는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공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항상 좋은 소리만 하는 것이 위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 이야기도 죄를 모르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리 바른 말 하지 않고 좋은 말 해줘도 해결되는 건 아니다. 죄를 알아야 이 말도 지혜롭게 쓸 수 있다.
바울은 9장부터는 간증하며 자신이 당한 고난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죄인 줄 몰랐지만 이제 보니 심각한 죄라고 인정되는 행위들에 대해 군중 앞에서 낱낱히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말함이고 성령의 간증이다. 그러면 이렇게 박해했던 바울이 어떻게 죄를 보게 되었을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성령의 말함은
3. 엎드러져 들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6절
행 9장의 간증에는 없었던 오정이라는 시간이 나온다. 하늘로부터 큰 빛이 둘러 비췄다고 한다. 어두운 데 있다가 환한 곳에 나오면 눈이 부시고 시리다. 근데 정오의 빛, 이스라엘의 정오의 빛은 용광로 같다고 한다. 그것을 쳐다보면 정말 눈이 멀게 된다 한다. 근데 그 정오에 그 밝은 빛 보다 더 밝은 빛인 예수님의 영광의 큰 빛이 사울에게 비춰진 것이다. 그 빛은 광채를 넘어 사람이 보면 죽는 빛이다.
주님은 생명의 빛이시다. 그래서 죽음에 속한 자는 이 빛을 보면 다 두렵다. 우리들 교회도 죄가 많은데 목장 오라 하면 다 싫어한다. 우리들교회 오라는 것도 싫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그 사람들이 오면 은혜 받을 텐데 바울의 전 상황처럼 빛을 보면 두렵다. 그런데 9장에서는 빛을 봤다 하고 22장에서는 큰 빛을 봤다 하고 26장에서는 해보다 더 밝은 빛을 봤다 한다. 간증도 때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주님에 대한 넓이 높이 깊이가 달라져 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주는 말씀으로 들어봐야 한다. 홀연히 해가 비친 것, 그래서 죽는 것이 무엇인가? 이러지도 못하는 상황 앞으로 뒤로도 못 가는 상황, 기세 등등했던 바울이 어떤 것 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야 할 정오에, 이제 곧 도착하는 다메섹 성읍에서 내가 승전보를 울려야 하는데, 내가 모두에게 짠 하고 나타나야 하는데, 바로 앞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사건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큰 빛이 비춰서 바울이 예수 믿었다 하면 우리가 적용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 빛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이스라엘 가야하나 생각한다. 근데 그때 이 기세 등등한 바울이 어찌 되었나?
7절
엎드러지니 소리가 들린다. 나에게 주시는 음성이다. 엎드러지니 말씀이 들린다. 이렇게 엎드러져야 말씀이 들리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엎드러지니 나에게 주신 음성이 들린다. 사도 바울은 구약을 외우지만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음성은 안 들렸다. 이것이 큰 차이다. 우리가 들으니 엎드러져 나에게 주는 음성으로 들으니 그때부터 성령의 말함이 시작된다. 지금껏 가족 위해 자녀 위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내 열심이 주님을 박해한 일이라는 것이다. 나의 학벌 내 능력 내 스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 말씀하신다. 엎드러지지 않으면 결코 동의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말이다. 무너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이 이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결국 말씀이 안 들린다는 것은 엎드러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 설교가 너무 어렵다.
성령의 말함은 내 속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속에는 죄와 악함 이기심만 가득하다. 성령이 말하려면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기도하고 말도 하고 간증도 한다.
잠 28:9에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다고 했다. 말씀이 안 들리는 사람은 가증한 기도를 하고, 가증한 상담을 하고, 가증한 나눔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예배시간, 목장에서 들어야 한다. 내 생각과 내 가증이 땅에 엎드러지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내 입술을 통해 성령의 말을 하기 시작하신다.
결정적으로 무엇에 엎드러졌는가? 바울은 자기만 알아들었던 보이스, 주님께서 자기에게 특별히 듣게 하신 말씀을 듣게 한다. 살기 등등해서 다른 교인들을 잡아 죽이러 가는 이 때에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는 말씀이다. 어찌 교회를 잔멸하려던 사울을 어찌 이렇게 다정하게 부르실 수 있는가?
사명 주실 때 바울이 잘나서 불렀는가? 행위가 있어 불렀는가? 바울의 공로가 들어갈 틈이 어딨는가? 잔멸하러 씩씩거리며 죽이러 가는데 사울아 사울아 하시는 것이다. 생각하면 눈물밖에 날 것이 없는 주님의 부르심이다.
주님은 교회와 자신을 같이 생각하셨다. 그러니 정말 죄가 안보이면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설교가 이해되지 않는다. 박사학위를 몇 개나 가진 바울은 주님이 만나주시기 직전까지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스펙 동네 자기 열심 성공을 매일 자랑했다. 자기 자랑으로 모든 사람을 자신과 분리하고 있었다.너와 내가 똑같다고 해야 한다.
8절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났는가? 베들레헴이다. 그러나 베들레헴 예수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한다. 우리는 늘 나사렛 예수라 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나사렛 예수라 소개하신다. 이것이 사도행전과 바울의 간증에서 여기만 나오는 부분이다.
예수께서는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엎드러져 있는 바울에게 자신을 나사렛 예수로 소개한다.
나사렛이라 하면 3가지가 있다. 저주 멸시 천대.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이다. 당시 구약을 잘 알던 사람들의 인식 속에 버림 받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저주받은 땅을 통칭하는 것이 나사렛이고 나사렛 지역이다. 가불땅 기억나는가? 성전 건축 마치고 솔로몬이 히람에게 준 땅인데 히람이 쓸모 없다고 땅을 받지도 않고 도리어 자신이 돈을 주었다. 그래서 하마터면 그 쓸모 없는 땅이 두로에게 갈 뻔했다. 예수님이 이 나사렛 출신이다. 버릴 만한 나사렛, 엄청나게 쓰이는 가불땅이 갈릴리 땅의 성읍 스무곳이다. 바로 그 나사렛 예수라 소개하신다. 이 꼼짝달싹 못하는 환경과 엎드러진 사건 속에서 드디어 나사렛 예수가 바울의 귓가에 들린다. 엎드러지는 것이 죄인임을 보게 하는 축복이다. 엎드러지는 것이 신세계가 열리는 비결이다. 금그릇이면 안들린다. 질그릇도 깨어져야 보배가 보인다. 성령의 말함은 엎드러지는 사건 속에서 나사렛 예수를 만나야 할 수 있다.
왜 바울에게 나사렛 예수를 소개했을까? 이런 저주받고 멸시받고 천한 땅을 네가 앞으로 전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방 땅을 너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고난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지 모른다. 주님을 만나니 4절처럼 주님을 만나니 내가 바로 당신들을 박해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결박하여 옥에 넘긴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 나사렛 예수를 듣지 못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죄의 고백이다. 그래서 구속사는 자신의 죄성의 깊이를 깨닫는 것이다.성령의 말함을 아는 자는 여인의 자궁으로 비천하게 점으로 오신 예수님, 아내를 팔아먹은 아브라함, 잘난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 에서가 아닌 속이는 자 야곱, 총리 요셉이 아닌 며느리와 동침한 자 유다, 간음하고 살인으로 범죄한 다윗, 이방여인들과 창기들의 계보속에 오신 나사렛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사의 정점이다.
바울이 처음으로 엎드러지니 구속사가 들렸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성경을 달달 외워도 홀연히 빛이 와서 엎드러지지 않으면 구속사가 안 들리고, 내 죄를 모르면 나에게 들리는 음성이 안 들린다. 그러니 제가 바울의 애통이 너무 이해가 간다. 아무리 들어도 쇠 귀에 경읽기 같다. 나의 엎드러지는 사건 속에서 나에게 들리는 소리, 로마의 황제로 오신 예수가 아니라 나에게 들리는 말씀이 나사렛 예수임이 들려야, 날마다 아침마다 나에게 들리는 이 소리가 있어야 우리가 성령의 말을 할 수 있다.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 내가 들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오늘 7절에 들리는 소리, 나에게 주시는 음성이 이해되시는가?
적용) 빛에 둘러싸여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엎드러지지 못해 여전히 선 채, 나를 구원해 줄 환경만 바라봅니까? 엎드러져 나사렛 예수를 만나서 말씀이 들립니까? 그래서 성령의 말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죄인인 사람은 인간관계가 나쁠 수가 없다. 의인이라서 나쁘다. 내가 죄인이면 바울의 구원을 위한 디테일을 볼 때 우리가 어찌 억울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이 너무 옳기 때문에 날마다 인간관계 타령을 하는 것이다.
나는 바울 같은 죄가 없다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100프로 죄인으로 태어난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엎드러지지 않으니 성령님이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한다. 아직 깨닫지 못하니 매일 상처받고 인간관계가 어렵다 한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선교하는 책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선교는 바로 내가 변하고 우리 가정이 변해야 하는 것이다. 가정부터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선교하겠는가? 이렇게 성경을 차례로 봐야 한다.
관계심리학 전문가 박상미 교수는 가족관계를 망치는 1순위는 말이라고 한다. 너 그거 하지마 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소망을 말로 표현하라고 한다. 나는 네가 사람들에게 미움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인정받았으면 좋겠어 하는 소망을 직접 말하라 한다. 우리 뇌는 6초면 생각해 낼 수 있다고 조언을 했다.
그러나 이런 말도 죄인의 마음이 아니면 모두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만사형통은 죄인이다. 이것이 신세계이다.
설날에 가족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33요법을 제시했다. 가족일수록 거리두기 해야 하고, 갈등이 생길 것 같으면 3분동안 3미터 멀어지라 한다. 나무도 3미터 이상을 띄워 심으면 산불이 나도 타 죽지 않는다 한다. 갈등이 올 때 잠깐 화장실 가거나 신발 신고 아파트 한바퀴 돌면 좋다고 한다. 우리는 더 나가서 죄인의 마음으로 성령의 말을 합시다.
어제 이 자리에서 취학 큐페 마지막 간증시간에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지만 한 아이가 나와서 우리 엄마아빠가 안 싸웠으면 좋겠다 했다. 아빠가 나와서 술먹고 아내를 더 때리지 않기 위해 수치를 무릅쓰고 나오셨다고 했다. 그러니 아내 집사님도 또 때릴까봐 무서워서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 가족을 향해 박수를 우뢰와 같이 쳐주는 우리들 공동체가 최고이다. 때렸다는데 그렇게 박수 쳐 주는 교회도 없을 것이다.
오늘 주보의 청년부 아이가 간증한 것에서도 어쩌다 한번 죄 지은 사람에서 죄인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이 청년은 결혼 당일 파혼하고 우리들 교회에 왔는데 이것이 해석이 안되었다 했다. 자매가 자신을 존중해달라 했는데 그것을 끝까지 하지 않아서 파혼 했다 한다. 파혼의 사건이 이해되지 않아 왔고 그것이 숨기고 싶은 사건이었는데 목자가 되었다. 근데 해석이 안되었다. 자기는 파혼이 죄인가 했다. 그런데 목원 아이를 상담해주면서 그 아이가 힘들어하니 자기가 말하고 싶지 않았던 어학연수 가서 유부녀 만나 도망친 이야기를 해주니 그 목원이 뚝 그쳤다고 한다. 해주고 싶어 한 것이 아니다. 자기가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죄가 드러났다. 어쩌다 한번이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큰 자유함을 가져다주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리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이야기 안하면 죄인이 아니고 이야기하면 죄인인가? 이야기 하면 소름끼치고 이야기 하지 않으면 부드러운가?
아내를 때리지 않기 위해 남편이 수치를 무릅쓰고 나오셨다. 이 부부가 전문인이고 엘리트지만 그럼에도 나와서 고백했다. 이것이 귀하다 생각한다.
어제 현장에서 즉석 큐페 2행시 물었다고 했는데 이런 답변이 있었다.
큐:큐티 안하면 / 페: 패가망신 한다.
[말씀맺음]
성령의 말함은 내 자랑이 아니라 너와 나를 대표하는, 우리를 대표하는 이야기이다. 분리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목장에서도 우리이다. 내가 저지른 죄가 당하는 고난 보다 크다는 고백이다. 이것은 엎드러져 들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우리가 내 죄를 봐야 한다. 처절히 내 죄를 봐야 한다. 성령이 도와주시기를 바란다.
저의 한 마디는 이번 명절에 가서 죄인으로 쭈그리고 있으세요 이다. 이것이 오늘 설교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이다. 탕자처럼 죄인으로 쭈그리고 있자. 할렐루야.
[기도제목]
*은진
1.다메섹의밝은정오의빛으로오신주님의음성에귀기울여서무너진예배가회복되고넘어져있는자리에서일어날힘주시도록기도합니다.
* 은선
1. 엎드러지는 사직 사건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시는 말씀과 회개할 것들 잘 보고 성령의 말을 잘 할 수 있도록
* 승희
1. QT를 통해 내 죄를 잘 보고 적용을 잘 할 수 있도록
2. 이직한 회사 무탈하게 잘 적응할 수 있도록
3. 사람을 의지하는게 아닌 하나님을 의지할수 있도록
4. 남자친구가 교회다니고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 지향
1. 살려주세요 고쳐주세요 도와주세요.
* 보련
1. 2월까지 기다려보고 점점 일 찾아보기
2. 힘든 일이 많은 목장 식구들 위해 살려달라고 기도하기
* 교희
1. 파랑새 객관화 잘 하고, 내 죄로 인해 절망과 수치에 빠지기보다 안되는 나를 받아들이고 구원의 관점으로 보도록
2. 회사 업무 인정중독 회개하고 그냥 하기만 하도록
3. 영육 회복을 위해 잘 엎드러져 머무를 수 있도록
4. 동생 구원, 취업 사건에서 하나님 만나고 목장에 붙어가도록
5. 첫째이모 암 사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불쌍히 여겨주시도록
6. 이사 준비 차근차근 잘 하도록
* 크리스틴
1. 몸에 변화를 잘 캐치해서 알맞는 약 찾을 수 있도록. 남은 상담들 통해 내게 필요한 도움들을 받을 수 있도록
2. 리포트 마무리 잘 할 수 있는 힘과 마음과 지혜를 주시길. 두렵고 불안함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도록
3. 새롭게 받은 일이 있는데 전혀 모르는 것이라서 막막한데 포기하지 않고 도전 할 수 있는 마음과 정신 주시도록.
4. 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도록.
* 은우
1. 하루만 잘 살 수 있도록
2.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 거하고, 경계를 지킬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