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12
사도행전 20:32-38 성령의 부탁
1. 은혜의 말씀에 부탁해야 합니다. 32
우리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어디에 누구에게 부탁하나요? 유명한 사람 능력있는 사람 믿을만한 후임자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계속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 앞에서 마지막 설교인 고별설교를 묵상하고 있어요. 바울은 오직 3년 동안 가르치고 전파하여서 세워진 에베소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노심초사 걱정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잡히는 그 밤에도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에 귀를 잘랐잖아요. 그 귀까지 붙여주시면서 제자들의 실수까지 뒷수습하시면서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부탁한다는 말의 원어가 파라티데미에요. 지난번 성령의 안아주심 설교에서 파라(옆에) 칼레오(소리치다) 기억하시나요? 옆에서 함께 소리치고 울어주는 것이 안아주심이라고 했어요. 오늘 파라(옆에) 티데미(놓아두다) 단어의 부탁한다는 말은 옆에 놓아두다라는 의미에요. 옆에 함께 간다는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탁하는 대상입니다. 이 교회를 감독자들에게 부탁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리더에게 부탁하는 것도 아니에요. 바울은 오늘 무엇을 부탁하고 있나요?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친근하게 표현했어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 옆에 놓는 것이 부탁하는 것이에요. 내가 내 자녀의 감독자가 될 수 없음을 알고 내가 내 남편과 내 아내를 책임질 수 없음을 깨닫고 내 자녀를 내 가족을 주의 말씀 옆에 놓아두는 것 이것이 성령의 감독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거죠. 하나님께서 내 가정의 직장에 공동체에 감독자로 삼으셨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사람을 말씀 옆에 놓아두는 것입니다. 말씀이 안 들리는 내 자녀 내 남편 내 아내를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주여! 나는 감독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께 부탁드립니다. 고백하면서 그들을 말씀 옆에 데려다 놓도록 우리가 순종하고 사랑하고 대화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이 누가복음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 부탁하다가 바로 파라티데미에요. 즉 아버지의 손에 나를 놓아둔다 성부 하나님 옆에 나를 둔다는 것이죠. 이것이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마지막 말씀이셨는데요. 우리는 이렇게 내 자녀 내 가족을 말씀 옆에 놓아두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에요. 이것이 성령의 부탁이에요. 도무지 말씀과 상관없는 나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씀 옆에 내 인생이 놓여 졌다면 이제 내게 맡겨준 한 사람을 말씀 옆에 두기 위함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왜 말씀 옆에 두려고 이렇게 노력해야 하나요? 32절 후 반절입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말씀 옆에 두었더니 그 말씀이 능히 든든히 세운다고 하시는 거에요. 능히는 넉넉히 그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디나마이라는 단어인데 다이나마이트의 어원이에요. 폭발력 있게 충분히 넉넉히 든든히 세운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넉넉히 강한 힘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세운다고 해요. 말씀이 한 사람의 인생을 세워 간다는 거에요. 터를 닦고 기반을 다지고 한 발자국씩 한 스텝씩 말씀으로 세워가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건축한다고 합니까? 거룩하게요. 우리의 인생을 거룩하게 건축한다고 해요. 잡초가 있으면 뽑아야 하고 불법건축물이 있으면 철거해야 하고 더러운 물건들은 치워야 하기때문에 고난이 따릅니다. 육이 무너질수록 영이 세워지고 영이 세워질수록 육이 세워져서 영육이 일원론이에요. 결국은 하나님 앞에 항상 영이 세워지면 육이 세워지고 육이 세워지면 영이 세워지고 그 마지막 종착지 기업을 주시는 거죠. 이 기업은 구원입니다.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고난 아픔이 있지만 이 땅은 영원하지 않기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주시기 위해서 나를 건축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눈물이 따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의 손에 그 영혼을 부탁하시니 그 영혼을 옆에 놓아두시니 능히 영혼을 죽음에서 살리시는 그 능력이 우리 주님을 살리시죠. 무덤을 깨트리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든든히 세우사 기업으로 둘 왕으로 아들로 다시 살아나시며 우리에게 자신을 첫 열매로 보이시는 거에요. 너희도 나와 같이 될 것을 지금 보이시는 거에요. 이 얘기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그들을 말씀 앞에 놓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파라티데미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먼저 말씀 앞에 내 인생을 내 존재를 내 삶을 데려다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를 든든히 세워간다면 이제 내게 맡겨준 한 영혼을 말씀 앞에 데려다 놓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감독자가 해야 할 일이고 성령의 부탁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아버지 손에 먼저 부탁하셨어요. 말씀 옆에 놓아두셨어요. 예수님도 그랬는데 우리가 남을 탓할 것이 아니고 나부터 말씀 앞에 바로 서야 한다는 거죠.
Q. 나는 매일 나를 어디에 데려다 놓나요? TV 핸드폰 술집 유튜브 앞에 데려다 놓나요? 아니면 말씀 앞에 데려다 놓나요? 내가 가장 부탁하고 싶은 딱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내가 성령께 부탁하고 싶은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2.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됨을 기억하라고 부탁합니다. 33-35
바울은 에베소교회와 성도들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함에 설교를 끝맺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은 중요한 말일 수밖에 없죠. 마지막 남기는 유언을 통해서 장로들에게 3년 동안 바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삶의 이력서를 상기시켜줍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기억하지 않아요. 한 문장으로 기억합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인데 좁은 길의 끝에도 돈이 있다고 하는 거에요. 설교의 마지막도 돈으로 마무리를 맺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돈이기 때문이에요. 범사에 본을 보이라고 하는 바울에게도 그 당시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현대인의 성경 고린도후서 12:16-17 어쨌든 내가 여러분에게 짐을 지운 일이 없어도 간교하게 속임수로 여러분을 착취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서 여러분을 착취했습니까?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마게도니야 교회들이 구제헌금을 했는데 그 돈을 바울이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고 소문을 내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거에요. 사도바울은 그런 거짓 소문에 휩쓸리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돈의 본질에 대해서 알려주고자 합니다. 돈은 하나님 자리에 있어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착각이 들게 해요. 돈이 있으면 행복할거야 돈이 있으면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할거야 돈이 있으면 내가 먹고 마시고 입고 맘대로 할 수 있어 나를 사람들이 높게 볼거라고 착각합니다. 돈의 실상이 어떠합니까? 생명을 만들 수도 지을 수도 없고 사랑을 만들 수도 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전능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거에요. 돈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너무 귀한 도구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죄성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바울을 비방한 사람도 바울의 복음 때문에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라던가 자기 자리가 위태할까봐 그런 것이죠. 결국 돈이에요. 옳고 그름의 끝에는 돈이 있어요. 그렇게 싸우는 끝에는 늘 돈이 있어요. 바울의 얘기는 내가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했다 내 쓸 것을 충당하며 수고하며 약한 사람들을 도왔다고 합니다. 너희도 나와 같이해라 이것이 바울 설교의 마지막이에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어요. 충당하여라는 말은 선박의 맨 아래에서 노를 젓다는 의미인데 노예들이 한 일로 자신의 섬김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쓰고 있어요. 이건 모든 사역자보고 자비로 섬기라는 것이 아니에요. 보통은 구약의 십일조 정신을 가지고 그 교회에서 생계비를 주었죠. 십일조 정신으로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탐심을 갖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이 일을 하였다는 것이죠. 바울에게는 금과 은을 얻을 기회가 많았을 거에요. 너무 강력한 말씀 앞에 돈과 인기와 명성을 누릴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겠죠. 은혜를 받으면 뭔가 주고 싶은 것이 있잖아요. 내가 커지면 커질수록 자기 사명이 되어서 자신에게 부탁해요. 성령께 더이상 부탁하지 않아요. 이것이 돈의 전능성의 착각이에요. 기도하지 않아요. 성령께 부탁하지 않아요. 말씀 옆에 나를 두지 않습니다. 왜요? 돈이 있잖아요. 그러면 천국 문 앞에 섰을 때 어떠할까요? 예수가 그리스도다 라는 떨리는 고백과 죄인됨을 고백하기가 어렵겠죠. 그런 방법도 모른체 천국 문 앞에 서는 사람이 많았어요. 내 자아를 깨트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의지하는 것이 물질이 아니라 주님임을 그리고 고백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바로 물질을 약자와 공동체 교회를 위해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물질에게 부탁하지 않고 성령에게 나와 내 가정을 부탁한다는 신앙고백이에요. 그렇게 바울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쓰신 것이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가르침에서 나타나는데요. 마태복음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네 소요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음이라 또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이런 말씀을 들으면 복을 받아야 하니 우리가 열심히 주려고 하지 않겠어요? 이래서 주는 것은 주는 마음입니까? 받는 마음입니까?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여기서 복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인데요. 이것은 사람이 누리는 복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는 복이에요. 팔복아시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바로 이 복이 마카리오스의 복이에요. 팔복 전체가 마카리오스의 복이에요. 어떤 존재와 환경이 나의 기쁨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과의 연합과 관계에서 오는 기쁨이라는것이죠. 가장 최상의 상태의 복은 천국이 저의 것임이라는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주고 싶은 것이에요. 마카리오스의 복을 주고 싶으신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우리 마음대로 못 받죠. 택자여야 받잖아요.
우리의 물질뿐 아니라 삶을 나누어야 해요. 내 삶의 좋은 부분뿐 아니라 내 실패 나의 연약함까지도 나누어주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에요. 가장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돈을 주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같은 아픔을 나눠줄 때 우리는 함께 평안을 누려요. 마카리오스를 누리는 것이죠. 삼위일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이죠.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을 나눌 때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연약한 자에요. 내 삶은 내 가정은 우리 주님 손에 부탁합니다 이것이 성령께 부탁드린다는 고백입니다.
Q. 내 주변에 본이 되어 힘든 지체에게 다가가 물질로 삶으로 흘려보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인생이 이 세상은 알 수 없는 천국의 마카리오스의 복이 믿어지십니까?
3.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36-38
우리의 모든 부탁은 결국 기도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목장도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기도로 인생을 맺어야 합니다. 바울의 고별설교도 기도로 마무리를 맺습니다. 이것은 이 교회를 성령께 부탁한다는 우리의 고백이며 기도로 마지막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것도 내 인생 전체를 성령께 부탁드린다는 고백이죠. 그런데 기도를 했는데 오늘은 무릎을 꿇고 했다고 해요. 그때까지 유대인들은 하늘을 향해 두 손 벌리고 서서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기도 형태였는데요. 그래도 성경에 무릎 꿇고 기도한 장면이 가끔 등장해요. 열왕기상 8장 솔로몬이 성전건축할 때 성전건축 후에 기도할 때 무릎을 꿇었어요. 에스라 9:5 에스라가 백성들이 이방인과 불신결혼 한 것을 알고 무릎을 꿇고 회개기도를 드렸어요. 다니엘 6:10 다니엘이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했어요. 누가복음 22:41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감람산에서 기도할 때 무릎을 꿇었어요. 사도행전 7:60 스데반 집사도 순교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했어요. 사도행전 9:40 그리고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위해 기도할 때 무릎을 꿇었습니다. 언제 무릎을 꿇었나요? 특별히 간절하게 기도할 때 무릎을 꿇었잖아요. 무엇 때문에 오는 간절함인가요? 나는 할 수 없다! 라는 고백에서 나오는 간절함인 것 같아요. 바울은 이제 다시는 에베소에 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자신이 3년 동안 성령의 제자양육으로 양육한 그들을 이제는 직접 도울 수가 없어요. 그들을 위해 에베소교회를 위해 바울이 직접 해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거에요. 오직 주님께 주님의 은혜에 말씀에 맡길 수밖에 없는데 떠나는 바울을 비방하는 자까지 생겼어요. 그러니까 저절로 간절함이 생겼을 것 같아요, 장로들은 어떤가요? 질 수 없는 십자가를 자꾸 지라고 하니까 도망가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이에요. 하지만 우리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라고 하시죠. 물론 무릎을 꿇고 기도해도 바울과 작별할 상황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요. 또 성령에 메여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바울의 상황도 바뀌지 않았어요. 그럼 우리가 기도할 때 상황이 바뀌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냥 기도하면 그것이 응답이에요. 그래서 아침마다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 거에요. 내가 원하는 것이 응답이 아니고 우리는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 것이 응답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끝나고 다 크게 웁니다. 울음은 일평생 한번 울어볼까 할 정도로 큰 울음을 뜻합니다. 구원을 위한 울음이고 영혼을 위한 울음이고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성령께 부탁하듯 바울의 인생을 성령께 부탁드린다는 장로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이자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크게 울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안타까운 작별을 했습니다. 근심했다는 것이 자기 자신을 심히 슬프게 하는 깊은 슬픔을 말합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느끼는 슬픔이고 슬픔의 크기가 클수록 복음으로 말미암은 그들의 연합이 얼마나 견고하고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슬픔이에요. 바울과 장로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십자가 안에서 가족과 같은 연합으로 한 공동체가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신자의 슬픔은 다시 만날 기쁨에 비례하듯 복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보면 얼마나 기쁠까요? 우리가 이렇게 우는 것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앞으로 닥칠 환란 때문에 울고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의미에요. 스데반이 죽었을 때 경건한 자들이 크게 울었어요. 초대교회는 눈물이 많았어요. 눈물이 많은 곳은 이 세상에서 소망이 있는 곳이에요. 그들이 무릎을 꿇고 함께 드린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때로부터 한세대 즉 30년 이상 시간이 지났을 때 에베소교회는 여전히 아시아 중심교회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요한계시록에 일곱교회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비록 주님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꾸중을 들었지만 그래도 꾸중을 받을 수 있는 교회로 남아있는 것이죠. 전 이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꾸중을 받을 수 있는 교회 또 교인도 많지 않아요. 그렇게 꾸중을 받았지만 지금까지 2천년 교회사에 찬란히 에베소교회는 그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들교회가 그동안 치리를 많이 했어요. 치리를 받아내신 분들은 우리들교회의 진정성을 알렸기 때문에 갑절의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무릎을 꿇리는 사건이 오는 고난은 사실 축복이에요. 우리가 저절로 무릎을 꿇을 수 없는 교만한 존재들이잖아요.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 무릎을 꿇게 하시니 우리가 구원의 길을 벗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주시는 거에요.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을 가지고 성령에 메여 사명을 감당하는 그 인생을 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이것이 감사한 것이에요. 우리들교회는 개척 때부터 아둘람 공동체였어요. 간절함이 있어요. 하나님 말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영성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의 영성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어가기를 축복하고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Q. 여러분은 서서 기도하고 싶은 상황에 있습니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습니까? 무릎 꿇고 함께 기도할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습니까? 바깥에서 구경만 하고 있습니까?
[기도제목]
은우
1. 철거하러 갑니다. 무사히 잘 다녀오고 아카이빙 욕심내지 않도록
2. 보고서 쓰는 중에 있는데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말씀 앞에 저와 보고서를 가져다 놓도록
3. 마음대로 풀려지지 않을 때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하는 것인 줄 알고 붙여준 지체들과 저의 구원 위해서 기도하기
은진
1. 일반 은총 은혜로 회복 되도록
2. 에덴까지 돌아 나올 은혜의 말씀 심령에 심겨주시도록
3. 빨리 회복 아니라 고난의 시간을 전도할 기회로 바꿔 주시도록
크리스틴
1. 리포트 마감에 힘과 능력 주시도록
2. 선생님의 얼굴 볼 수 있는 용기 주시도록
3. 마음에 말씀 평강 은혜 부어 주시도록
예선
1. 날마다 주시는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며 하루 잘 살도록
2. 공동체에서 받은 것들을 잘 기억하며 양육 마지막까지 잘 나누고 갈 수 있도록
3. 나와 공동체를 위해서 무릎 꿇는 간절함으로 기도하도록
4. 화요일에 상담 가는데 잘 나누고 오도록
다인
1. 감기가 심하게 걸렸는데 영육간의 강건함 주시도록
2. 양교 남은 기간동안 건강회복해서 숙제 잘 제출할 수 있도록
3. 큐티로 하루 시작하고 말씀으로 하루 잘 지낼 수 있도록
보련
1. 일 인도하심에 실업급여 받을 때까지 인내하면서 갈 수 있도록
2. 섬길 수 있는 마음과 은총 내려 주시도록
3. 가족구원
4. 양교가 끝났어도 큐티 말씀에 잘 지낼 수 있도록
현경
1.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내 속의 불순종 앞에서 혈기가 아니라 무릎 꿇고 성령의 말씀에 부탁하는 기도의 자리에 먼저 설 수 있도록
2. 매일 중보해주는 목장식구들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3. 붙여주신 목장식구들 영육을 위해 기도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