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4 성령의 작정
사도행전 20:13-21
성령의 안아주심으로 유두고 같은 사람들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사랑의 아들의 내라로 옮긴 일이 일어났어요.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이 다 환호를 하고 좋아할까요?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이 성령의 사람이죠. 그래서 십자가는 지혜이고 타이밍입니다. 그래서 때마다 성령의 작정을 해야 구원의 최종 목적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번주에 수능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결정을 하던 작정을 잘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오늘은 성령의 작정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1.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13절)
우리가 탄 배에 정관사가 붙어서 그 배로 표현이 되었는데 그러면 그 배를 임대했을 가능성이 있죠. 그러면 바울을 기다릴 수도 있었는데 바울이 혼자 가겠다고 작정했기 때문에 앗소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에요. 왜 그랬을까? 왜 걸어가겠다고 작정했는지 성경에 나와있지 않지만 이런 거를 앞뒤로 THINK해서 바울의 눈길과 숨소리를 느껴보고자 합니다. 저는 이 바울의 걸어가고자가 너무 크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걸어가고자 작정하여 소지품을 두고 떠났기 때문에 후에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디모데에게 감옥에서 겉옷과 책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을 했어요. 이게 한 32km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요. 거기서 에게해로 흘러 나가는 강들이 너무 많아서 강과 산을 굉장히 넘어서 걸었어요. 아주 급한 여행 길인데 이렇게 먼 곳을, 유두고 때문에도 힘들고 날이 새도록 얘기했기 때문에 너무 잠도 못 자는데 이 먼 곳을 혼자 걸었습니다. 드로아에서 성령께서 전투에 임하는 비장한 마음을 주신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유두고를 살렸으니 드로아 성도들은 너무 좋아서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위로 받고 뜨거운 사랑을 나눴자나요. 큐티를 하면, 이렇게 앞뒤를 성경을 많이 알게 되면 굉장히 적용이, 깨달음이 풍성해지니까 처음 듣는 사람은 어려우시겠고 그렇겠지만 그냥 들어두면 후에는 생각 나리라. 그러나 앞으로 들어갈 예루살렘은 지금까지 예로 보아 이 살아난 일을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났기 때문에 더 뒤에 24절을 보면 죽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지금 받은 것 같아요. 결국은 후에 로마에서 순교를 했죠.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그렇다고 내가 살렸다고 하면 그건 이단의 교주나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래야 되자나요. 또 기억한다면 예수님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을 보여주셨기에 바로 그때부터 요한복음 11장 이후부터 예수님 죽이는 모의가 시작이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가실 때가 되신 것을 예감하시고 십자가 지시기 전에 기도하시러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죠. 그래서 바울도 예감하고 걸어가고자 작정을 한 것 아닌가 싶어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고 바울이 유두고를 살린 것은 사람은 할 수 없는 기적이에요. 그런데 세상이 보기에는 유대교나 기독교나 똑같지만 유대교는 생명을 살린 예수님과 바울이 유대교를 위협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바울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바울은 예감했어요. 예수님도 바울도 참 외로웠겠죠? 사람을 살렸기에 죽이고자 하는 이 전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이 바울은 주님과 혼자 독대하며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주님 제가 죄인 아닙니까? 제가 성경을 제대로 몰라서 믿는 자들을 잔멸하며 스데반이 죽는 일에 가담했죠. 그러니 저들도 몰라서 나를 죽이고자 하지만 그리할지라도 제가 잘 죽게 하시고 그들이 몰라서 그러니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찾아오셔서 저를 만나주신 것처럼 그들도 만나 주세요.라고 기도했을 것 같아요. 마태복음 26장에도 보면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 예수님이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세요 라고 기도하셨자나요.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주님이세요. 42절에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또 세번째 기도하시고는 45절에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떠나신 것처럼 바울도 걸으며 기도하며 이 응답을 받았을 것이에요.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가는 그 산과 강의 영상을 보았어요. 2천년 전에 바울 사도가 걸었을 그 길과 다리와 가다가 이렇게 물, 샘물 등을 보면서 그냥 너무나 마음이 뭉클하고 진짜 눈물이 나더라고요. 여기를 이제 혼자 걸으셨구나. 여러분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쪽을 가게 되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한 번 걸어보세요. 이제 나중에는 이런 것들이 기억 날 거예요. 아마도. 이후로 바울에게는 정말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지난 주일 큐티가 에스겔 47장 1절부터였어요. 성전에서 물리 흘러나오는데 제일 먼저 회개의 제단인 번제단을 적시자나요. 우리의 더러움을 내어 놓으면 주님이 그 성전에서 제일 먼저 씻어주시는 거예요. 그러나 거룩한 강단에서 어찌 더러운 인간의 죄 얘기를 그렇게 하냐. 앞으로 또 죄를 지을 것이기에 간증하지 마라. 그렇다면 하늘의 얘기 땅의 얘기를 분리하는 거예요. 여러분 번제단은 짐승의 제물을 나의 죄를 대신해서 드리는 제물이기 때문에 그 짐승의 울음소리와 통곡소리와 그냥 핏방울이 피비린내가 나는 곳이에요. 그런데 그게 바로 성전에 있어요. 바울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강단에서 간증한 설교들이 2천년 동안 우리를 살리고 있어요. 성전이 그렇게 교양 있게 아름다운 곳이 아니예요. 간증이 문하면 위험하다고 하는데 이단들의 간증은 정말 위험합니다. 수치만 고백하게 해놓고 그 수치 때문에 그 집단을 나가지 못하게 하는게 이단이에요. 그야말로 망하는 간증입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보는 구속사적 큐티 간증은 사람을 살립니다. 가정을 살립니다. 그 열매가 증명합니다. 그러나 멀리서 보기에는 God이나 Gold나 비슷해서 분별이 안되는 것처럼 이 간증, 저 간증 분별이 잘 안됩니다. 큐티도 별로 하지 않는 이 시대에 진정한 큐티 사역이 문화가 되기에는 우리들교회의 큐티 사역이 너무 알려지지 않았고 연륜도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듭니다. 며느리 다말과 시아버지 유다의 동침한 간증, 다윗의 밧세바와의 불륜 간증 이런 것들이 솔직하게 오픈 되어있고 바로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에요. 유다와 다윗은. 그런데 이런 게 솔직하게 오픈 되어있기 때문에 이미 선진들이 본을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이에요.
저는 죽을 것 같을 때 하나님과 독대해가지고 나가지 못했자나요. 독대하는 게 꼭 산을 올라가는 것만은 아니예요. 독대해서 이런 성경이 깨달아졌기 때문에 제가 죽지도 않았고 이혼도 하지 않았어요. 공동체 속으로 들어와 보기 전에는 이런 간증이 이해가 안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들교회가 소위 부흥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너무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늘 더욱 눈물로 사명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보고 지금 유대인들이 곳곳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 죽이려고 하자나요. 그런데 제가 바울은 아니지만 그냥 바울이 너무도 체휼이 되기도 합니다. 적용해보세요.
[적용] 영육 간에 가장 좋은 일이 일어났는데 (유두고가 살아난 일 승진, 합격 등) 흘러 떠내려가지 않고 하나님과 독대하며 사명 감당하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며 작정한 적이 있습니까?
2. 지체치 않아야 합니다. (14-16절)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32km 남짓 되니까 걸어서 하루 이틀 걸렸겠죠. 앗소까지 걸어가서 기다리던 일행을 만납니다. 그런데 앗소에서 미둘레네까지, 미둘레네에서 기오까지, 기오에서 사모까지, 사모에서 밀레도까지 딱 하루씩 걸려서 항해를 했습니다. 바울 일행이 급히 갔다는 것은 이 항구도시에 머물지 않고 배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 배를 타고, 계속 밤에는 머물고 낮에는 항해하고, 그때 밤에는 항해할 수 없었어요. 그런 뜻인데요. 그런데 이 배가 지난 도시들은 하나같이 유서가 깊은 곳이에요. 앗소는 그 유명한 스토아 학파의 2대 지도자 클레안테스의 고향이고요, 미둘레네는 고대 그리스 7대 현자 중 한명인 피타코스의 고향입니다. 기오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의 저자인 호메르스의 고향입니다. 사모는 우리가 아는 이솝 우화의 이솝과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고향이에요. 밀레도는 탈레스 등 최초의 철학자들의 고향이에요. 배타고 하룻길 거리에 있는 도시들인데 듣기만 해도 유명인사들이 많이 배출된 곳인데 이 유명한 곳에서 전도를 한다면 얼마나 뜻이 있는 길이겠습니까? 하루 이틀 머물며 구경만해도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이 모든 도시를 그냥 지나갑니다. 심지어 3년 가까이 사역한 에베소조차 들리지 않고 그냥 지나쳐요. 이 모든 아름다운 곳은 불신 지역이지만 에베소는 차원이 다른 곳이자나요. 2년 3개월 동안 구속사로 성경을 가르치며 눈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께 인도해서 아시아 교회 지도자들을 탄생시킨 그런 회예요. 그런데 여기서 지체하지 않았다, 지체하다의 뜻은 꼭 여기서만 쓰였는데요. 간을 비비고 문질러서 없애다라는 뜻인 거예요. 얼마나 좋으면 막 시간을 비비고 문질러서 없앴을 만한 도시들만 쫙쫙 나왔자나요. 그죠? 그런데 이 항해에서 바울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서둘렀다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것, 볼 것이 많은 장소도, 그리고 보고싶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이라도 거기 들리는 것이 시간 낭비일 때가 있어요. 어떤 때입니까? 더 중요한 최종 목적지가 있을 때 그렇죠. 이번 여행에서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에요. 이제 더 나가서 로마이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55년이 지난 이 오순절에 이 엄청난 열매를 예루살렘 교회에서 나눈다면 얼마나 그곳과 모두가 위로와 격려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이 모아준 헌금을 가지고 지금 예루살렘 교회에 가고 있어요. 특별한 의미가 있죠. 1차 전도 여행 이후에 한 10년쯤 지났는데 아주 이방인 선교를 두고 끊임없는 논쟁이 있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이방 선교의 문이 열렸거든요. 그리고 세 차례 전도 여행의 결과 갈라디아, 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에 많은 이방인 교회들이 세워졌어요. 그리고 이제 어려움에 처한 모교회를 돕겠다고 하는 거예요. 물론 바울은 헌금 전달이 목적은 아니예요. 그건 제자들 시켜도 돼요. 그나마 돈 갖다 준다니까 갈 명분이 생겼어요. 아니면 말씀의 전문가들이 모였는데 바울보고 오라고 그러겠습니까? 그러니까 복음 전파가 최종 목적이었어요. 저는 그냥 이런 것들이 참 THINK가 잘 되네요. 그런데 이건 욕심 때문에 무서운 열심으로 직진하는 거하고 다르고요. 지금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또 거기를 왜 가는지, 지금 얼마나 와 있는지,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를 아는 것이 최종 목적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의 태도예요. 그래야 때마다 성령의 작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눌러 앉고 싶은 곳들이 다 있어요. 그리고 그곳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다 발을 뗄 수 없는 지점들이 있어요. 과거의 상처일수도 있고, 집착하는 것일수도 있고, 중독된 것일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요즘에 중독, 비트코인, 비트코인도 유투브가 있대요. 구독자 수가 2만명이래요. 그걸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고 그러네요. 비트코인이 무조건 나쁜가, 은행 대신에 가상의 이런 게 생긴 건데. 그런데 그게 너무 좋아가지고 시간을 비비고 문질러서 지금 없애고 있으니까, 그것이 목적이 되서 내가 너무 돈 때문에 예배가 소홀히 될까봐 그래서 이걸 안한다 이런 적용도 다들 하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시간을 비비고 문질러서 없애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과 독대한 바울에게는 우리가 있었어요.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이거는 계속적인 미완료 과거 거든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계속해서 영적 교제를 할 수 있는 우리가 있다는 거예요. 성경이 어쩜 이렇게 날마다 똑같은 얘기를 해요. 홀로 하나님과 독대하는 사람은 동역자들과의 관계가 잘 되는 사람이에요. 나는 하나님과 혼자 있는 것이 제일 좋아.하면서 사람들과의 교제를 회피하는 사람은 앞뒤가 안 맞는 사람이에요. 물론 바울은 유대교인에게는 배신자, 기독교인들에게는 잔멸자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그들 모두에게 기피 대상이었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바울이 관계가 안되는 사람으로 보이죠. 그러나 박해를 받는 것과 관계를 싫어하는 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성경이 인간론이에요. 구원론이에요. 굉장히 디테일한 거예요. 이런 거를 모르고 사역을 하겠다. 목회를 하겠다. 또 부부관계. 아무리 소수지만 일당백을 우리가 있으면 인생을 헛된 곳에서 지체하지 않고 제대로 성령의 작정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앞에 두고 하나님께 독대하고, 기도하고,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물으니 지체할 곳, 지체하지 않아야 할 곳들을 일사천리로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거를 보면서 모두 저한테 하는 얘기인데, 제가 생명을 내놓고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구원이 됐기 때문에 제가 그동안 30 몇 년 살아온 날마다의 시간이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이런 위기감을 저한테 줬기 때문에 이렇게 이런 것들이 제가 깨달아지는 것 같아요.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잘 되었을 때도 제가 눈물로 기도를 할 수가 있겠어요. 적용 질문이에요.
[적용] 주어진 시간을 닳아 없애고 있는 아름다운 앗소, 번창한 미둘레네, 유명한 기오, 사모, 사랑하는 에베소는 어디입니까? 집착, 중독, 정에 이끌림 중에 어디에 이끌리고 있습니까? 지체하지 않기 위해 같이 가는 우리가 있습니까?
3. 거리낌 없이 회개와 믿음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17-21절)
바울의 설교는 세 번이 나왔는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에게 구약 성경을 꿰어서 구속사를 좔좔 설교를 했어요. 두번째는 아덴에서 이방인을 위한 설교를 했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오늘 밀레도에서 그리스도 인들을 위한 설교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하는 설교입니다.
에베소에 바울이 왔을 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던 열두명의 제자들이 있었자나요. 그런데 그들이 성령이 임하지 않으니까 바울이 설명을 해주고 성령 세례를 받게 했어요. 성령의 임하심으로 이들이 다 에베소교회 장로가 되었을 것이에요. 그들을 청해서 이른 바 유언같은 고별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정말 고별 설교가 되었습니다. 제가 하는 설교 하나 하나가 다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시면 되겠어요. 바울은 고별 설교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라는 말로 시작을 해요. 여러분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여러분도 아는 바니 그러는데 그 성도들이 모르는데요 이러면 어떻게해요. 그런데 이런 일이 있더라고요. 미취학의 전도사님 큐티 나눔에서 다섯 살 자기 아들이 아이들의, 우리 미취학도 줌 모임이 있거든요. 너무 정말 재밌다는 거예요. 걔 보고 한가지 소원을 말하라 그러니까 큐티책이 매일 매일 집에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나랑 우리 가족이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면 좋겠어요. 그리고 엄마도 큐티를 좀 하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전도사님은 우리 아들이 내가 어떻게 하는 바를 니가 아는 바니 그랬는데 아들이 몰라요., 모르는데요. 이런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안다고 합니까? 바울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 날부터 시작해서 이 고별 설교를 하는 순간까지 항상 한결같이 보여준 그 주님을 섬기는 삶을 너희들이 안다는 거예요. 주를 섬기기 위해서 흘린 겸손과 눈물, 그리고 시험을 참는 인내로의 삶을 보여주었다는 것이죠. 이 섬긴다는 것은 새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둘로스, 종으로써, 노예로써 역할을 다했다는 뜻이죠. 그런데 특별히 오늘 인내에는 뭐가 붙었냐 하면, 19절에 유대인의 간계를 참았다는 거예요.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다는 거죠. 간계는 악한 꾀라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절이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그때도 똑같이 동일한 단어를 썼어요. 악한 꾀로 우리를 성령의 작정을 못하게 하는데, 아니 이 악한 꾀를 로마도 이방인도 아닌 함께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의 간계라고 하는 거예요. 뱀이 하와를 어떻게 미혹하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미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알려주면서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죽을까 하노라고 말씀을 살짝 비틀었어요. 유대인의 간계도 마찬가지예요. 요즘 유대인의 간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도 동성애자들을 다 사랑하셔. 분명히 죄라고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비틀어서 지금 법으로 제정하려는 것이 현실이에요. 인권을 주장하며 말씀을 비틉니다. 마치 기독교가 인권을 배격하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하지만 참된 인권, 참 사람됨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만이 이 참 사람이 시작되는 거예요. 사람 속에 무너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죄를 통해 무너진 그 하나님의 형상을 말씀을 통해 바르게 세워 나가는 것이 참 인권인 거예요. 죄를 죄라고 말하는 것이 인권이에요. 회개의 길인 십자가를 보이며 이것을 전하고 가르치고 알리는 것이 참된 인권의 시작입니다. 동성애가 죄라는 거예요. 동성애자들에게 동성애가 죄라 말해주는 게 가장 큰 사랑이라 이거예요. 그게 가장 큰 인권이라 이거예요. 성경대로. 하지만 유대인의 간계로 평화와 화합, 사랑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계속 비틀어요.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확한 말씀을 가르치며 이후에는, 가르친 다음에는 뭐해요? 모든 겸손과 모든 눈물로 참고 주님을 섬기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의 간계가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세요. 그러나 이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힘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유대인의 간계로 유대인과 싸우고 다투고 정치를 주장하며 옳고 그름으로 논쟁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주를 섬겼다고 하자나요.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주를 섬겼다고 해요. 놀랍지 않습니까? 내가 유대인의 간계를 어떻게 참았는지 너희도 아는 바라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거예요. 안 믿는 사람은 절대로 흘리지 못할 이 눈물, 눈물의 종류가 너무 다른 거예요. 그런 눈물과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원어로 보면 주를 섬긴 겸손, 주를 섬긴 눈물, 주를 위한 인내인 거예요. 그것이 나를 위한 섬김, 자식을 위한 섬김은 오래 못 가는 거예요. 결국 나에게도 자식에게도 그것은 성령의 작정이 될 수가 없습니다.
보통은 목사님, 장로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우리 권사님 어머니 믿음 좋으시고, 우리 장로님 아버지 믿음 좋으시고 다들 이런 간증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34년 전만 해도 제가 장로님 가정에 시집와서 힘들었다.는 간증을 하면 이런 간증이 너무 드물었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유교적 관념으로 이 충효를 강조하는 우리나라에서 부모님은 존경받아 마땅한데 장로님과 권사님들이 너무 듣기 싫어하고 불경스러워하는 거죠. 저도 맨 처음에는, 거듭나기 전에는 아니 장로님이 왜 예배를 못 나가게 하는가. 끊임없이 옳고 그름의 생각으로, 그래서 결론은 죽고 싶었어요. 이혼하고 싶었어요. 믿는 부모가, 믿는 구역 식구가 나를 얼마든지 힘들 게 할 수 있더라고요. 오늘 유대인의 간계라고 그러자나요. 그런데 그 간계를 통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시험을 참고 눈물로 주 예수를 섬기는 거라고, 이런 성경이 깨달아질 때마다 제가 살아났다니까요. 예수 믿은지가 4, 5대, 6대까지 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이제 4대째 모태신앙이고 어렸을 때부터 교회 다니면서 그러다가 내가 성령이 임하시고 나서 말씀이 깨달아져가지고 큐티책을 한 권씩 주면서 큐티를 하라.고 그러면 도리어 안 믿는 사람은 큐티가 뭔데요? 물어보는데 믿고, 믿는 사람, 직분자들은 제가 큐티책을 갖다 주면 이거는 왜. 이런 거 안 해요. 그래서 그 다음에 만날 때 도로 가져다주는 거 있죠. 다 믿는 집에서 결혼을 하고 믿는 목사, 권사, 장로 부모들, 다 있는데도 전 세계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믿으면 다냐? 그 다음에도 더 하고 싶은 말 안 해요. 그러니까 저런 남편, 아내랑 못 살아하는 것이 바로 유대인의 간계입니다. 경제적 문제로 서류상 이혼을 하는 것도 이거 다 유대인 간계예요. 그 빚은 남편의 구원을 위해 평생 갚다 죽으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이 중요한데 유대인의 간계를 통해서 어떻게 행한 것을 보여줄 겸손과 눈물이 있으면 그것이 유익이에요. 그런데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를 위하는 것처럼 하면서 불신 결혼, 이혼 등을 시키는 이 가까운 친척, 엄마, 아버지의 간계가 있는 거예요. 유대인의 간계가 있어요. 그래서 유대인의 간계를 어떻게 참고 어떻게 주를 섬긴 것을 거리낌 없이 전하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눈물로 겸손으로 섬기면서 거리낌 없이 전하고 장로들도 이렇게 가르치라고 바울이 마지막 고별의 순간에 장로들에게 외치는 거예요. 장로 세울 때가 되가지고 이렇게 장로 얘기가 나오네요.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20절, 21절에
그러면 유대인의 간계로 인해서 복수를 하고 힘으로 찍어 눌러도 시원찮을 판에 그 간계를 행하는 유대인에게 자신의 회개함과 약함과 믿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내가 증언한 거 너희들 알자나. 그러니까 너희 장로들도 여기가 아무리 위험해져도 너희가 그렇게 가르치라고, 나처럼 너희도 가르치라고. 그러니까 참는 것도 기가 막힌데 거기다 회개를 하는 것은 자기의 수치와 약함을 드러내는 거자나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전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시댁에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입도 뻥긋 못하고 있다가, 왜냐하면 이런 것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온 몸의 가치관으로 자리잡고 있다가 성령이 임하시고 나서 제가 어떤 힘든 사람에게, 모든 걸 배설물로 여겼다고 그러니까, 간증했더니 어머나 어쩜 그렇게 저하고 똑같으세요? 공감대를 일으키고 그 사람이 이혼도 안하고 죽지도 않고 하는 걸 보고 내 얘기가 사람을 살릴 수 있구나. 너무나 놀랐습니다. 사람 살리는 일이 되어서 구역장을 하면서 구역에서도 하게 되고, 그리고 이제 오늘날 교회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해석되어진, 당하고 미워한 얘기만 했으면 사람을 살리지 못했을 텐데 이 회개함과 약함을 전하니 이런 설교를 듣고 다 살아나고 그래서 우리들 청년들이 사람 고르는 능력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혼을 아무도 안 하죠. 내가 누구를 골랐는지 그게 딱 내 실력이에요. 결혼하고 현주소가 드러날 때 어떻게 회개하는지 보여주는 성령의 작정을 이제부터 갖춰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과 끝이 같을 수가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돼요. 사랑을 할 수도 만들 수도 지을 수도 없고, 전적 무능이고 전적 부패를 경험하고 인정해야만 합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임을 날마다 인식해야만 해요. 이런 자기 인식, 하나님에 관한 바른 인식에서 비롯되는 이 실존적인 인식이 없으면 우리의 회개와 믿음의 간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죄고백을 천주교의 고해성사로 밖에 이해할 수 없어요. 행위 구원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간증을 한 번 하면 다시는 그런 간증을 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아니예요. 우리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간증하면 우리 안에 죄를 끊을 힘이 생기는 게 아니예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지신 그 순간까지 기도하셨자나요. 주님의 기도가 쇼는 아니자나요? 100%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100% 인간이신 주님은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가지시고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밤 구하셨어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랑은 우리 강함이 아니라 약함입니다. 우리가 약한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고백하고 자랑할 때 주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죠. 큐티는 바로 이것을 날마다 새롭게 인식하고 인정하는 THINK의 과정이고, 한 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매일 반복해서 해야 합니다. 내 강함을 자랑하는 것이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 것이고 시간을 지체하는 것이에요. 비비고 밣아서 시간을 없애는 게 강함을 자랑하는 거예요. 매일 큐티하는 것, 그리고 공동체에서 나누는 것이 처음과 끝이 같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곳 성령의 작정입니다. 큐티도 날마다 작정해야 해요. 그러니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바울이 이 행한 것을 행위로 말한 걸까요? 그렇다면 누구도 자격을 갖추기가 힘들어요. 바울은 이미 교회를 잔멸했던 자이고 나쁜 사람이라는 프레임이 일평생 씌워진 사람이에요. 저런 사람은 두 번 다시 간증할 수가 없다. 이런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20절, 21절 다시 읽어 보면 겸손과 눈물과 인내가 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가르칠 수가 있고, 겸손이 있는 사람들이 확신 있게 말할 수가 있는 거예요. 이혼을 하지 말라. 이런 확신이 있으니까 하지 말라인데 행위를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 그런 사람하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바울이 전한 행함은 주를 위한 섬김의 눈물과 겸손과 인내로 거리낌 없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인데 거리낌이 없다라는 말은 매맞고 옥에 갇혔어도 위축되거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의미예요. 복음이 훼방 받을까 걱정돼서 걱정이지 내가 할 말을 못해서 위축되거나 주저했다는 얘기가 아닌거죠. 복음은 문자 그대로 Good News예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소식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100% 죄인이자나요. 세상은 원래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들로 가득 차 있어요. 때문에 진정으로 복된 소식이 되려면 듣는 사람인 내가 죄를 인정하고 이제 회개가 따라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지 좋은 소식이 나에게 단 소식이 되는데, 그런데 교회를 다녀도 유대인 간계처럼 유대인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얘기가 죄 얘기예요. 죄 얘기. 그러니까 쓴 소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복음은 세상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쓴소리예요. 그러니까 힘든 사람들만 와서 이 쓴소리가 달게 느껴지는데, 그런데 우리는 모든 얘기를 하는데 죄 얘기만 싹 빼고 문자적으로 세례 요한처럼 한 벌 옷만 입어라., 받는 월급을 족한 줄로 알라., 세례 요한이 틀렸다. 그리고 이제 헤롯한테 가서 막 지적하자나요. 그럼 우리는 그냥 아 시원하다. 시원하다. 이러자나요. 그러니까 이제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위대한 자는 없지만 그 보다 더 큰 이가 있으시니 예수 그리스도다. 성령이 임하셔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 요한의 세례만 전하면 열광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즉 도덕과 윤리로, 이 세상에서 행위로 바람 피지 마라. 이런 얘기를 하면 좋아하지만 그런 거는 죄의 얘기를 딱 빼면 구원과는 다른 복음이 될 수 있어요. 늘 행위로 보니까 틀리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까 이혼이 줄을 잇는 거예요. 쟤가 틀렸기 때문에 이혼하는 거예요. 쟤가 틀렸기 때문에 내가 자살을 하는 거예요. 이 행위 구원이라는 거는 들을 때는 좋지만, 그러므로 이제 바울이 순서적으로 복음을 써가는 것에 대해서 하나 하나 얼마나 뜻이 있는지 걸어가고자 하여 때문에 일주일 내내 제가 일주일 내내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렸어요. 자 그래서 적용해 보세요.
[적용] 마지막 유언이 주를 섬기는 겸손, 눈물, 인내입니까, 나와 자식을 섬기는 겸손, 눈물, 인내였습니까? 자녀와 지체들에게 거침없이 단 소리를 자주하시나요, 쓴 소리를 자주하시나요? 훈육의 가르침입니까? 회개와 믿음의 간증입니까?
기도제목
현경
자립 신앙 구원 위해서 기도하도록
약속의 말씀이 없는 나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가족구원을 위해 기도하면서 나아갈 수 있도록
19일 (금) 엄마 병원에서 검사 잘 받고 오시도록
보련
동생의 말과 행동 무시하고 더 나아가 공기 바람으로 기쁘게 살 수 있도록
양교 집중해서 끝까지 마감할 수 있도록
하루를 살더라도 말씀에 깨어 있도록
예선
양육의 은혜는 성령님이 주시고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엄마, 아빠 경계 잘 지키도록
회사에서 관계 경계를 잘 지키고 회사 이전하는 것에 지혜 주시도록
큐티 말씀으로 생각의 가지를 잘 치도록
이명이 또 생겼는데 잘 지나갈 수 있도록
여동생의 영육 위해서 중보하고 구원의 사건 되도록
크리스틴
예배, 말씀이 회복되어 영육에 물이 가득히 넘치도록
수시로 기도하고 나에게 위로의 마음 가질 수 있도록
리포트와 양육의 숙제가 부담되는데 영육이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는 힘 주시도록
한국 방문 결정을 내리기가 힘이 드는데 주님의 인도함 받을 수 있도록
지향
양육 통해서 주님의 인격적인 사랑 만날 수 있도록
결혼이 예배 되게 하시고 주가 보시기에 좋았더라하는 가정 세워지도록
결혼 예배를 통해 말씀을 꼭 들어야 하는 그 한 사람, 그 한 가정, 그 한 교회가 은혜 받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회사의 주인이 예수님인 것 알고 큰 자존감으로 기쁘게 회사 생활할 수 있도록
은진
매일 말씀 묵상하면서 손 씻고 갈 수 있도록
돌아오는 화요일부터 병원에서 새로운 트라우마 치료 시작하는데 잘 받을 수 있도록
나의 모습 위로하고 말씀에 해석되어 갈 수 있도록
발 다친 것 속히 회복될 수 있도록
은우
전시가 20일날 끝나고 22일 철거하는데 끝까지 처소를 지키고 로마까지 잘 갈 수 있도록
붙여준 지체들 위해서 중보하고 남은 잔액 정산 잘 할 수 있도록
결과 보고서 최선을 다해 쓰되 지혜의 은종 말씀 붙잡을 수 있도록
몸이 지치지 않도록 영육의 경계를 잘 세우도록
다인
손목이 아픈데 영육 강건함 주시도록
본사에서 사람들이 오는데 그곳에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평강 누리도록
목요일 건강 검진이 있는데 잘 받고 올 수 있도록
1주일 동안 2번의 장례가 있었습니다. 유가족들과 상한 마음 위로 치유 해주시고 구원으로 갈 수 있도록 (부모님이 모두 소천하신 남겨진 쌍둥이들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