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령의 안아주심
본문: 사도행전 20:1-12
설교:김양재목사님
아무리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요즘은 서로 끌어안고 인사할 수가 없습니다. 손으로 악수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존락이라는 심리학자는 안아주는 것이 굉장히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줄여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 안아주면 혈압과 심박수도 아주 낮아진다고 합니다. 안긴다는 것은 전인격으로 흥분하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안아주면이렇게 좋은데, 하나님께서 안아주면 얼마나 더 흥분이 되겠습니까. 첫사랑의 흥분은 알겠는데, 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안아주심은 안 믿어집니까? 오늘은 10절에 유두고를 안아주심처럼 성령의 안아주심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1.(성령의 안아주심은)권면의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1-2절, 에베소 연극장 소동을 겪으며 에베소 성도들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습니까. 온 도시가 교회의 적이 되어서 일으킨 소동입니다. 군중이 정말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서기장을 쓰셔서 성령의 진정을 주셨지만, 심리적으로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돈이 좋아 성령의 세력을 여전히 대적하는 데메드리오 세력이 나에게도 모두에게도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언제든 선동 당해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군중도 있고, 제가 설교를 아무리 해도 여러분들도 여전히 진영 논리에 갇혀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소요가 그친 후에 바울이 제자들을 부릅니다. 이제 소동이 끝났으니까 한숨 돌리고 에베소에서 편하게 사역해야 되겠다 이래야 되는데,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을 불러 무엇을 했습니까? 권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원어로 파라칼레오입니다. 파라는 옆에,칼레오는 부르다는 뜻입니다. 외치다, 부르짖다의 뜻도 있는데, 곁에 불러 놓고 부모의 심정으로 끊임없이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파라칼레오는 그저 옆에 있을 뿐인데, 그저 내 이름 한 번 불러주고, 그저 내 처절한 현실을 들어줬을 뿐인데, 손 한번 잡아주고 부르는데, 이것이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일으켜 세워서 우리를 안아주심이 되는 것입니다. 옆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 이 성령님의 이름도 파라클레토스입니다. 똑같은 뜻입니다. 안아주심입니다. 그래서 그 안아주심으로 바울도 자신도 파라칼레오 해서 마게도냐로 떠납니다. 우리가 하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참 우리하고 다릅니다. 소동이 있을 때는 죽자고 그곳에 있고, 소동이 끝나니 권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소동에 있지 않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거대한 에베소도 아니고, 거기에 모인 거대한 무리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제자라는 뜻이 자발적으로 묶여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부른 그를 위해 사는 사람, 나를 부르신 이의 뜻을 자발적으로 묶여 있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바울도 예수님도 무리에 집중하지 않고, 소수에 집중을 합니다. 그래서 보고 싶은 마게도냐,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참 그리운 이름들입니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칭찬과 인정 받았습니까. 매 맞고 옥에 갇히고 괴롭힘 당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시 그 지역을 심방 하면서 그곳 제자들을 여러 말로 권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사회로부터 경계와 무시와 비난의 대상이 된 형제와 자매들을 향한 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여러 말로 표현 되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라도 더 전해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여러 말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야말로 여러 성경으로 룻기로 어린 나를 에스겔로 제가 결혼한 이후에 목회자가 되기까지의 삶을 여러 성경책으로 전해 왔고 또 전하고 가르칠 것입니다. 세상에 기댈 것 하나 없는 성도들에게는 바울이 전해주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유일한 피난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코리아 갓 탈렌트>로 너무 유명해진 최성범 형제는 우리에게 희망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본인이 말기 암에 걸렸다고 했는데, 그것이 거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들 뭐라 그러지만, 왜 그럴까... 생각할 수 없는 주목을 봤다가 콘텐츠가 끝나고 잠잠해지니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5살부터 공중 화장실에서 먹고 자고 매 맞고.. 그에게 얼마나 트라우마가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누구도 파라칼레오 하면서 옆에 있어주고, 같이 부르짖고 외쳐줄- 이름 한번 불러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고아든 아니든 에베소든 아시아든 마게도냐든 성도의 삶은 말씀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성도를 고아처럼 내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파라칼레오하며 권면의 말씀을, 보혜사 성령님이옆에 계시는 것입니다. 왜 소동이 오는지, 왜 분란이 일어나는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말씀으로 해석해야 통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하루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내는 것이 파라칼레오 하고 옆에서 도와주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성령의 안아주심입니다. 인간적인 게 아니라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안아주심입니다. 해석이 되어야 통과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극복하다는 얘기가 없다고 했습니다. 암을 극복하고, 부도를 극복하고가 아니라 암을 통과하여서 하나님을 나타내야 됩니다. 부도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나타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안아주심입니다.
[적용] 위로 받아야 할 트라우마는 무엇입니까? 힘든 사람 옆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며 소리치나요? 보기도 힘들어하나요?
2.(성령의 안아주심은) 함께 가는 우리공동체 그 자체입니다.
3-4절, 마게도냐 심방을 마치고, 헬라 아가야 지역으로 간 바울은 거기서 석 달을 머물게 됩니다. 특히 2절에 헬라라고 유일하게 표현을 했는데, 아가야 고린도라고 더 알아 듣기 쉬울텐데, 헬라의 문화적 선민 의식은 대단하고, 유대인들의 선민 의식도 대단합니다. 그런데 헬라에 대해서 이들이 너무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심을 가지니, 그 선민 의식을 인정해주려고 너희 대단하다.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바울의 기막힌 구원을 위한 이 디테일에 제가 놀랍니다. 헬라라고 표현한 곳은 여기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헬라 가운데에서 바울의 피땀으로 세워진 고린도교회, 고린도인은 아주 음란합니다. 예를 들어 남자는 기둥서방, 여자는 창녀라고 표현이 되는 그곳에서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1년 6개월이나 자비량 선교를 하면서 떠났는데, 들리는 소식이 아비의 마음으로 낳은 그들이 고린도전서9:1-2절을 보면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여러 가지 음란으로 큰 눌림과 걱정과 눈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배신감으로 보고 싶지도 않은 고린도였겠지만, 그곳에 석 달이나 머물며 계획을 가지고 사랑과 관심으로 양육을 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석 달 머무르면서 자신이 꼭 방문해야 하는 19장 21절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하는 성령의 경영으로 원수같은 고린도, 배신 당한 고린도에서 석 달 동안 또 머무르면서 최대의 걸작 로마서를 이 때 기록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곳곳, 원수인데도 가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하고는 다 거꾸로 가는데 하나님께서는 갈 때마다 바울도 키워 가시고, 메세지도 키워 가시고가 정말 맞습니다. 이번 목요집회도 코로나라는 막혀 있던 길이 열리자 제가 늘 미국도 보아야 하리라는 저의 작정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경영으로 미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교회 베델교회의 첫 세미나 주제가 이었습니다. 정말 그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저를 미국에 던져 놓으셨습니다. 항상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목회도 하시고, 또 미국이라는 땅까지 이끄셨는데, 이 미국 계획이 최대의 걸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렇게 가르치고 3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로마서를 쓴 후에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있어서 여러 교회에서 모은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배 타고 파송해준 수리아의 안디옥에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 때가 마침 유월절 기간이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배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시기였습니다. 바울이 늘 좋은 뜻으로 가려고 하는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쥐도 새도 모르게 배에서 죽이고, 바다에 빠뜨리려는 공모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를 알고 다시 마게도니야 지방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맞서 싸우지 않습니다. 항상 바울의 적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괴롭힌다고 해도 자녀가 적이겠습니까. 부부가 적이겠습니까. 형제가 적이겠습니까. 바울의 적은 혈과 육이 아니라 어둠의 권세이기 때문에 싸우면 안됩니다. 바울은 그들을 피해서 수로를 나두고 육로로 먼 길로 돌아갑니다. 신약 성경 중 사본에는 3절에 성령이 그에게라는 부분이 삽입 되어, 바울이 유대인들의 대한 음모를 들은 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으로 성령께서 알려 주셔서 파라칼레오 하셔서 바울이 늘 권면하고 위로하고 가르치니, 성령께서도 바울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권면 해주셔서 늘 위협을 피하게 해주십니다. 바울이 잘난 것도 아니고 정말 성령님이 내 옆에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을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땅에 점처럼 낮아져 있는데, 효과적인 성령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점으로 왔다가 밟혀 죽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이 임하셔야 됩니다. 순간 순간 파라칼레오 하셔야 됩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내 옆에서 딱 달라 붙어 도와주셔야 됩니다. 그런데 이 외로운 바울의 여정을 함께 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사역한 마게도냐와 아가야 그리고 갈라디아와 아시아의 교회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습니다. 베뢰아교회 소바더, 데살로니가교회의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이의 가이오 그리고 루스드라 출신이자 바울을 분신처럼 수행한 디모데,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인 대표인 두기고와 드로빔모입니다. 이렇게 여러 교회 대표들이 왜 바울과 함께 가고 있을까요? 1차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모은 헌금을 바울과 함께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일을 구태여 지금 이 상황에서는 중요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바울과 함께 가는 중요한 이유가 바울과 함께 가는 그 자체, 바울과 동행이 되는 것 자체, 바울과 바울의 사역에 그리고 이 기록을 읽는 독자인 우리에게 너무나 위로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 언급을 했습니다. 1차, 2차, 3차 바울이 오직 주님을 위해 당시로서는 계획 자체가 쉽지 않은 길고 오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바울을 대적하는 원수가 계속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한 화평을 전하고 다니는데, 정작 바울 자신의 삶은 너무 외롭고 영육 간에 치열한 전쟁의 연속인 것입니다. 집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고 배우자도 없는데, 그냥 전쟁이 아니라 늘 살해의 위협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도 사실 집에서 요즘에 칼부림이 일어나는 집도 많고, 칼보다 더한 욕설이 난무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일수록 나가서 화평의 복음을 또 잘 전합니다. 그러니 성령님이 좀 안아주시기를, 등 두드려 주시기를 바랄 수 밖에 없는 처절한 외로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살기등등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죽일 때는 혼자였습니다. 주변에 지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살기등등하고, 늘 혼자인 사람은 사명이 아직 없다고 봐야 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에도 오랜 기간 홀로 지냈습니다. 혼자 아라비아에서 그리고 고향 다소에서 지냈지만, 이후에 바나바의 권유로 사명의 부름을 받았을 때부터 한 사람씩 지체가 생깁니다. 불평불만하는 사람들은 지체가 없습니다. 옆에 군중은 있지만 지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바울에게 함께 가는 지체들을 주셔서 안아주십니다. 그것도 한 교회에서 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섬긴 모든 지역에서 그 지역을 대표하는 지체들이 꼭 한 둘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길을 가게 하십니다. 바울아, 네가 지금 외롭고 힘든 거 내가 다 안다. 파라칼레오- 옆에서 이름을 불러주고, 너는 혼자가 아니야.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하지 않았니? 그 증거로 너와 함께 가는 지체들을 보낸 단다. 지체들과 끝까지 이 길을 가거라. 이것이 성령의 안아주심입니다. 그러면 이들을 신뢰한 징표는 무엇일까요? 이 여러 사람이 함께 강도의 위협을 무릅쓰고 육로로 긴 여행을 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먼저 드로아(아시아의 맨 끝)로 보냅니다. 아마 구제헌금을 들고 들어 갔을 것입니다. 큰 돈을 맡긴 채로 먼저 바다를 가게 할 정도의 신뢰가 형성된 지체들을 허락함을 볼 수 있습니다. 돈 하나에 감정이 틀어지고, 사이가 멀어지고, 사명에서 멀어지는 것이 비일비재 합니다. 돈 한 푼으로 여기저기 옮기고.. 바울은 전 마게도냐에서 모은 큰 돈을 자신과 함께 하는 자들에게 맡김에도 전혀 의심도 불안해 하지도 않습니다. 돈 때문에 싸우고 갈라지고 깨지고 평생 함께 해온 형제도 부부도 다 돈 때문에 깨지는데, 바울과 함께한 자들은 큰 돈을 맡았음에도 어느 누구도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곳곳에서 생긴 것입니다. 부부는 문화가 하나 되고, 몸이 하나 되고, 마지막에 돈이 하나 되는 게 부부라고 합니다. 계좌가 돈이 하나 되는 것이 부부관계 일지라도 힘이 드는데, 성령의 안아주심으로 한 형제 된 지체들끼리 얼마나 큰 신뢰 관계와 믿음이 생겼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단순히 좋아서, 저 사람이 나에게 잘 해줘서 그래서 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유익이 있어서 같이 간다가 아니고,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우리 구주가 얼마나 큰 값을 지불하고 나를 구원하였는지를 아는 사람만 돈을 넘어 설 수가 있습니다. 내 사명이 무엇이고, 그 사명의 무거움과 내가 받은 구원의 값을 아는 사람만 돈을 다룰 수 있습니다. 아니라면 늘 여기서 저기로 갈아탑니다. 늘 불평이 있습니다. 내 탓이 아니고 네 탓이니까.. 복음으로 말미암아 서로 믿게 되는 관계, 나를 믿어주고 또 내가 믿는 사람이 내 곁에 파라칼레오 있는 것만큼 인생의 큰 복이 없습니다. 성령의 안아주심은 이해 타산을 넘어 참 된 지체를 내 주변에 허락해 주십니다.
5-6절, 바울은 소수의 동역자들을 데리고 육로로 돌아 드로아까지 갔습니다. 여기에 바로 누가가 있었습니다. 16장 24절부터 바울 일행을 누가는 그들이라는 3인칭 복수로 표현하는데, 이 구절에서 다시 우리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는 2차전도여행 때 빌립보에서 바울과 헤어진 이후에 3차전도여행 중 다시 빌립보를 방문한 이 때 그와 상봉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빌립보에서 보내고 6절에 드로아로 넘어옵니다. 예전에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의 환상을 보고 아시아에 가는 것을 성령이 막으셨습니다. 그 때 드로아에서 빌립보로 갈 때는 사모드라의 네압볼리, 이틀 만에 순풍으로 갔는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급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로 빌립보에서 드로아로 올 때는 닷새가 걸린 것입니다. 이것은 풍랑이 굉장히 심했다는 것이고, 나이도 많고, 살해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풍랑까지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서 도착한 후에 7일을 머물렀습니다. 그만큼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16장에서 성령의 환상을 봤던 드로아를 지나쳤는데, 이번에는 7칠을 머물면서 드로아교회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후 누가는 이 때부터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에 쭉 같이 동행을 하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소동이 와도 말씀으로 하나 된 우리 공동체가 있으면 진정할 수 있습니다. 나와 같이 고난을 당하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이 죄와 싸우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이 성령께서 평안에 메는 줄로 하나가 되게 하신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이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한 말씀을 듣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내 말을 할 수 있고, 나와 같은 지체의 말을 들을 수 있기에 우리가 됩니다. 바로 우리들공동체입니다. 우리들공동체 자체가 성령의 안아주심인 줄 믿습니까? 우리들공동체에 붙어만 있는 것은 결국 성령님의 강하고 따듯한 팔에 꼭 안기는 것입니다.
[적용] 내가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지체가 있나요? 믿는다면 그 사람이 사명이 있어서 믿습니까? 내 감정으로 믿습니까? 믿음의 공동체가 그 자체로 위로가 됨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
3.(성령의 안아주심은)떨어지는 약함까지 안아주시는 회복입니다.
육로로 마게도냐를 돌아서 드로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던 지체들과 만나는 것입니다. 이 지체들은 곳곳에서 만났는데 이레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할 일 없이 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 시간이 아니고, 자기를 부르신 분의 시간에 맞추어서 항상 스케줄을 정하는 것이 바로 제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7-8절, 이 주간에 첫 날은 주일이고, 여기서 떡을 떼려는- 이것은 성찬식을 말합니다. 이 때 단어가 굉장히 독특한데 떼다, 뜨다, 으깨뜨리다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께서 생명으로 오셔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찢어 떼어 깨뜨린 고난 받은 사건을 우리는 성찬식으로 묘사해서 성찬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깨뜨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구약에 나오는 안식일이 아니고 주일 예배로 모였다는 기록이 여기 처음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드로아교회가 모이는 다락방에서 주일 예배를 함께 드리며, 바울이 설교를 했습니다. 강론이 밤 늦게 까지 계속 됩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말에 졸하다고 했는데, 졸하면 설교라도 짧게 해야 하는데, 바울이 설교를 아주 길게 합니다. 그런데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내일이면 이 곳을 떠나고 이제 살아 생전 이곳에 다시 올 지 모릅니다. 저도 미국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갈 때도 이곳에 언제 다시 올지 몰라, 없는 시간까지 내어서 설교를 합니다. 목장 특강도 하고, 목장 시연도 하고, 어디 놀러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꼭 마지막이라고 생각이 드니 사도 바울의 마음이 너무 느껴지는 것입니다. 어둠이 예배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등불을 많이 켰는데, 당시는 그것이 횃불이니 당연히 다락방 안에 산소가 부족하고, 이산화탄소가 많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9절,유두고는 복되다는 행운의 뜻입니다. 그런데 로마시대에 조사를 해보니, 너무나 흔한 이름인 것입니다. 9번째로 흔한 이름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름의 대부분은 일꾼이고, 노예 이름으로 유두고가 많았다고 합니다. 드로아 성도 중에는 일꾼과 노예가 압도적으로 많으니 저녁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연히 일하다가 종 살이 하다가 늦게 도착해서 피곤했을 것입니다. 유두고는 창틀에 걸터 앉아 있었는데, 그렇게라도 깨어서 늦게 가기도 했고, 바울의 강론을 들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자 쏟아지는 잠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졸아도 깊이 졸았습니다. 그래서 3층 건물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오면서, 주차장에 있고, 문턱에 걸터 앉다가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꼭 앞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 우리 모두 유두고와 같이 평생을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각자의 아픔과 피곤과 고난으로 우리는 떨어져 죽은 바 된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단 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다 핑계 댑니다.내가 피곤한데, 교회 가는 게 어디냐. 그래도 내가 창틀에 앉았다. 그래도 내가 주차장에서 예배 드렸다. 그래도 운동장에 왔다. 그래도 오기만 하면 떨어져도 바울이 살려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십니다. 우리는 내가 피곤해서 큐티 못 해. 네가 나가서 일해 봐. 이러면서.. 3층에 있는데 더운 기온, 이산화탄소가 모두 3층으로 가니 조는데 더 졸게 됩니다. 내 환경은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니까.가 우리의 모두의 변입니다. 오늘 유두고의 변입니다. 다 팔자가 늘어져서 큐티도 하고 교회도 가는 거지.. 그런데 이 교회는 일꾼하고 노예들만 왔습니다. 우리 평생 일하지 않습니까. 똑같습니다. 바울은 이 때 어떻게 하나요? 10절, 옳고 그름으로 율법적으로 생각하면, 유두고가 얼마나 연약합니까. 설교 시간에 졸다가 창 밖으로 떨어졌습니다. 율법적으로 판단만 하니까 어떻게 예배를 와서 졸 수가 있어? 결국 하는 일은 거리 두기입니다. 나는 저들과 달라. 그래서 옳은 자와 그른 자를 가리면서 거리를 딱 둡니다. 그러니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두고가 떨어지는 약함에 자리로 오늘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 눈 높이로 내려 갔습니다. 연약함으로 긋기야 죽기까지 한 유두고의 몸에 자신을 떨어뜨렸습니다. 엎드려는 무언가를 밀어 넣다. 무언가를 덮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구약에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엎드리는 행위, 자기 몸을 떨어 뜨렸습니다. 다 밀어 넣고 엎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시체를 안았습니다. 안고는 두 손으로 함께 눌러서 붙들다는 뜻인데, 신약 성경 속에 1번 나오고, 구약 성경 속에서는 에스겔 5장 3절 헬라어 번역에서 1번 쓰였는데 하나님이 에스겔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명령하시면서 머리카락과 털을 옷 자락에 싸라고 하시는데 이런 이상한 명령을 주시면서 바로 이렇게 터럭을 옷으로 싸매는 것처럼 꼭 둘러 감싸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지금 내려가서 몸에 자신을 떨어뜨리고 그리고 심지어 죽은 몸, 율법적으로 부정한 시체를 성경에서 포옹을 뜻하는 단어 중 가장 강한 단어를 써서 꼭 끌어 안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구속사적인 공감, 성도의 교통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누가가 여기서만 이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꼭 안았는지 누가가 직접 보았기 때문에 강도를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표현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내려가서, 덮어주고, 꼭 안았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죄가 나의 죄에요. 나 역시 이렇게 떨어지는 인생이었는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살인하고 핍박하고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 역시 유두고와 같이 떨어지는 인생이었는데, 나에게 주신 생명이 이 청년에게도 유두고에게도 동일하게 허락해주세요.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바울처럼 내려 오셨습니다. 그 천상에서 드리던 하나님과의 예배, 그 연합을 다 중단하고, 벌레 만도 못한 우리를 살려주기 위해 내려 오셨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어쩔 수 없는 고단함과 슬픔과 부조리 속에 나 혼자 떨어져 죽은 줄 알았는데, 우리 예수님이 내 옆으로 파라칼레오 하시면서 나보다 더 낮은 종의 신분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어있던 내 몸에 정말 생기를 밀어 넣으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찢어 보혈로 우리를 덮으셨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사망이라는 심판으로 떨어져 죽게 되는 그 심판을 우리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받아야 할 심판을 유두고가 받고 있고, 사도 바울이 나같이 죽은 시신을 꼭 끌어 안고 말합니다. '떠들지 말라.' 우리는 이 떨어지는 사건 앞에서 소란스럽습니다. 누구 탓이야? 원인이 뭐야? 이게 누구지? 도대체 어떻하지? 죽음의 사건에서 다 떠들고 소란스러웠습니다. 지난 주 <성령의 소동>에서 크다! 아데미여! 크다! 에베소여! 외치던 자들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그들이 여기 왜 모였는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모였는지, 알지도 못한 채 크다! 아데미여! 2시간을 떠들었습니다. 이 것이 똑같은 뜻입니다. 소동 했다가 떠들었다가죽음 앞에 우리는 어떤 대답도 못하고 입 가졌다고 다 떠들어 대고 있습니다. 죽은 유두고를 꼭 끌어 안은 바울은 두려움과 당황에 빠져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소란스러운 지체들에게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안아주시니 내려갔던 인생이 올라갑니다. 어디까지 올라갑니까? 중단 됐던 예배의 자리, 아들만 먹을 수 있던 떡상의 자리, 주님의 아들과 딸의 자리까지 우리를 올리십니다. 떨어져 죽는 사건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말씀에 강론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살린 일은 바울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하게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더러운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지고, 세상이 하지 못하는 적용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짜 거룩입니다. 우리의 거룩도 결국 구원 때문에 연약한 가족과 지체를 끌어 안는 것입니다. 그 연약함과 아픔과 죄악을 내 연약함과 아픔과 죄악으로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안아주심입니다. 12절, 비천한 인생이었던 유두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약재료가 되며, 다른 사람의 위로가 됩니다. 유두고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힘들고 지친 그리고 세상의 권세 앞에 어쩔 수 없이 죽을 수 밖에 없더라도 힘든 몸을 이끌고 예배의 자리로 나온 것 밖에 없습니다. 유두고처럼 다 힘들고, 나는 피곤한데, 내놓을 것이 없는데, 목장에 들어오면 유두고의 삶이 약재료가 되어서 목장에서 다 은혜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로 흘러가게 생겼습니다. 유두고의 삶을 보면서 바로 적지 않게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유두고가 노예인데 창틀에 떨어져서 죽었을 뻔한 인생인데 피곤한 몸을 가서 앉아 있으니 다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연약함을 예수의 마음으로 안아주면 공동체 전체가 엄청난 위로를 받게 됩니다. 거기에 생명의 회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생명의 회복보다 더 갚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생명이 실질적으로 가깝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생명보다 돈이 명예가 쾌락이 중요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으면 그 모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유두고처럼 피투성이가 되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생각이고, 마귀가 주는 착각입니다.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령의 생각, 구원의 생각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크던 작던 성령의 안아주심을 말씀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큰 소동 중에 오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품은 분도 계실 것이고, 지금 믿음이 흔들려 큰 회의에 빠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떻든지, 여러분이 어떻게 오해를 하던지 그 떨어지는 연약함을 우리 성령님께서 이 시간 말씀으로 꼭 안아주실 줄을 믿습니다. 성령의 안아주심은 결국 여러분 안에 생명을 회복 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피투성이라도 살아만 있으면 됩니다. 여러분이 살아야 남들을 지키지 않습니까. 여러분을 안고 계시는 성령께서 여러분이 당한 모든 고난과 사건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여러분을 살려 주실 것이고 회복 시켜 주실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을 보는 모든 지체들이 살아난 여러분을 통해서 적지 않은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적용] '이제 다 끝났다!'며 떠들고 절망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를 안아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헤아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이라도 성령님의 팔을 붙잡기 위해 내려가 엎드리어 끌어안는 적용 중에 어디까지 되고 안됩니까?
*나눔
문에스더:
위로 받아야 할 트라우마는 무엇입니까?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매우 예민하셨다. 그래서 눈치를 보며,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할 때 매번 온전한 도움을 받거나 힘들 때 공감을 받지 못했다. 그 거절감이 싫어서 성인이 되어서도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공감이 필요할 때도 그 누구에게도 마음 편히 마음을 열거나 부탁하지 못한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었는데 또 거절 당하면 어떻하지.. 또 상처 받으면 어떻하지..라는 마음 때문에 도움을 받지 못하니 혼자서 끙끙 앓다가 스스로 지칠 때가 많다.
오늘 말씀에서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셨는데, 피투성이로 힘들어 하던 그 과거의 트라우마를 살려줄테니, 공동체에 마음을 열어라. 온전히 안겨라.라고 해주시는 것 같았다.
귄희경:
목자: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
지금까지도 괴로운 부분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해서 겪는 괴로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원해서 온 게 아닌 느낌.. 강요 받은 느낌, 부모님이나 주변을 원망하려고 하는 건지.. 스스로에 대해서 탐구를 해서 의지로 탐구 해야 하는 건지.. 이번 주 토요일에 영어시험을 보러 가기 전에 인스타를 봤는데 마음이 우울해졌다. 어떤 친구 인스타를보고 우울 해졌는데, 그 친구는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해서 결국엔 꿈꾸던 것을 이루어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부럽고 슬펐다.
목자: 엄마, 아빠가 교육계에 있으라고 하시는 거야?
안정적인 직장을 권하신다. 공무원이나.. 그래서 계속 고민이다. 이 길(가르치는 일)에 대해서 여기서 더 열심을 내는 게 힘든 것 같다.
목자: 그러면 뭘 하고 싶어?
그 친구처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원하는 것을 했으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텐데..고등학교 때 성악을 했었다. 그런데 엄마가 내가 공부를 못하니 이거라도 해서 대학을 가도록 말씀하시니 처음에는하기가 싫었다.그래서 입시를 잘 못 봤다. 나중에는 고민을 하지 않고, 나는 재능이 없으니 공부를 해야 겠다 생각하고 재수를 하여 사범대를 들어갔다.사실 실력은 재수 전이나 후나 차이는 별로 없었는데 부모님이그렇게 푸시 하신 게 영향이 있었던 것 같고, 그렇게 하면 잘할 줄 아신 것 같다. 사실 부전공으로라도 성악을 했으면 됐는데.. 그 뒤에 오디션을 보러 다니기도 했었다. 원래 뮤지컬을 하고 싶어 시 극단에 오디션을 봤고, 합격이 됐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몸도 안 좋아지고 돌발성 난청이 오고.. 도대체 뭘 해야 할 지.. 무튼 극단에 가서 작품을 하게 됐다. 근데 배우들이 다 투잡을 뛰어야 하는 것을 보고,또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를 하게 되었다.난 성악도 좋아하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하고... 그렇다.
*기도제목
신은주
1. 소화가안되고 속이안좋고 체력이 많이 떨어졌는데 건강지켜주시기를
2. 큰실수없이 하루하루 잘 견뎌낼 수 있도록
김은희
1. 아빠 우울증 잘 회복되고 진정으로 하나님 만날수 있도록 좀 더 말씀이 잘 들릴수 있도록
2. 아빠 엄마 할머니 오빠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강건하게 하여주세요
3. 남은 기간동안도 무사히 공연 잘 해 낼수있도록 다치는 사람 없이 잘 진행될수 있도록
4. 남자친구 하나님 만날수 있도록 닫힌 마음을 열어주세요
문에스더
1. 피투성이인 나를 안아 주려는 주님과 공동체에 내 마음을 활짝 열 수 있기를
2. 과거 부모님께 거절 당한 트라우마로 지체들에게 상처 받을까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안김 속에 사랑 받고 가길
3. 요즘 할 일이 많아 스트레스가 많은데, 주님 의지하여 긍휼히 여겨주셔서 감당할 힘 주시길
4. 중보기도학교가 끝났지만, 시간을 정해 큐티기도회를 주 2회 참여하여 지체들을 위해 지속해서중보기도할 수 있기를
5. 오늘 직장동료 (이제리)를 새신자 등록 할 수 있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도 예배에 새신자목장에 잘 나오게 하시고, 앞으로 주님이 인도해주시는 목장으로 인도함 잘 받고 가게 해주시길
권희경
1. 학기말까지 남은업무 기한 놓치지 않고 지혜롭게 처리하고 매 과정 가운데 잡음 없도록
2. 내년 2월 이사해야 하는데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집 허락해 주시기를
3. 내년부터 일할 학교 찾아 시험보고 있는데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4. 즐겁게 잘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5. 평택에 있는 상가에 임차인 들어올수 있도록
최혜신
1.시험날까지 체력과 건강 지켜주시길
2.불합격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묵상하지 않고, 성전건축을 통한 회복을 기억할 수 있도록
3.시험날까지 공부 마무리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도록
4.목장기도제목보며 기도하는 한주 되도록
5.임용합격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