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1. '성령의 안아주심' (행 20:1-12) 김양재 담임목사님
아무리 반가운 사람 만나도 요즘은 서로 끌어안고 인사 할 수 없다. 손으로 악수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어느 심리학자는 안아주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한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 안아주면 혈압 심박수도 낮아진다 한다.
안긴다는 것은 전인격으로 흥분하고 반응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안아주는 것도 좋은데 하나님이 안아주면 얼마나 더 흥분이 되겠는가? 첫사랑의 흥분이 있다. 그래서 단발머리만 봐도 흥분된다는 집사님이 계신다. 그런데 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안아주심은 안 믿어지는가?
오늘은 10절의 유두고를 안아주심 처럼 성령의 안아주심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성령의 안아주심은
1. 권면의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1-2절
에베소 연극장 소동을 겪으면서 에베소 성도들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는가? 이것은 온 도시가 교회의 적이 되어 일으킨 소동이다. 제가 성경을 보니 군중이 무섭다. 하나님이 서기장 쓰셔서 성령의 진정을 주셨지만 심리적을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 같다. 돈이 좋아 여전히 바울을 대적하는 데메드리오 세력이 모두에게 그대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언제든 선동 당해 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는 군중도 있다.
그래서 소요가 그친 후 바울이 제자들을 부른다. 이제 소동 끝났으니 한숨 돌리고 이제는 에베소에서 편안히 사역해야겠다 해야 하는데 아니다.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을 불러 무엇을 했나? 권했다고 한다. 파라칼레오라고 한다. 파라는 옆에, 칼레오는 부르짖다는 뜻이다. 곁에 불러놓고 부모의 심정으로 끊임없이 위로하고 권면했다는 것이다. 파라칼레오는 그저 옆에 있어주고 내 이름 불러주고 내 처절한 현실을 들어주는 것이고 손 한번 잡아주는 것인데, 이것이 위로가 되고 격려 되어 일으켜 세워서 우리를 안아주심이 된다. 옆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이름도 파라클레토스다. 똑같이 안아주심이라는 뜻이다. 그 안아주심으로 바울 자신도 파라칼레오 해서 마게도냐로 떠난다. 우리가 하는 것이 없다.
바울은 우리와 참 다르다. 소동이 있을 때는 죽고자 거기에 있고 소동이 끝나니 권하고 거기를 떠난다. 바울의 관심은 소동에 있지 않았다. 바울의 관심은 거대한 에베소도 아니고 무리에게 있지 않았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제자들에게 있었다. 제자라는 뜻은 자발적으로 묶여있는 사람을 말한다.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부른 그를 위해 사는 사람, 나를 부르신 이의 뜻에 자발적으로 묶여있는 사람이다.
바울도 예수님도 무리에 집중하지 않고 소수에 집중한다. 그래서 보고 싶은 마게도냐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그리운 이름들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칭찬과 인정받았나? 매맞고 옥에 갇히고 괴롭힘 당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곳을 다시 심방하며 그곳의 제자들을 여러 말로 권한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사회로부터 무시 경계 비난의 대상이 된 형제와 자매들을 향한 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여러 말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한마디라도 더 전해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여러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야말로 여러 성경으로, 룻기로 에스겔로 제가 결혼한 이후에 목회자 되기까지의 삶을 여러 성경으로 전해왔고 전하고 갈 것이다.
세상에 기댈 것 없는 성도들에게는 바울이 전해주는 이 하나님 말씀이 유일한 피난처가 되었을 것이다.
코리안 갓 탈렌트로 유명해진 최성봉 형제는 희망의 아이콘이었다. 그런데 요즘엔 말기암에 걸렸다는 거짓말을 했다. 다들 뭐라 한다. 왜 그랬을까? 생각할 수 없는 주목 받다가 잠잠해지니 불안했던 것 같다. 5살부터 공중화장실에서 먹고 자고 매맞은 그에게 얼마나 트라우마가 많았을까? 그러나 그 누구도 파라칼레오 하며 옆에 있어주고 같이 부르짖고 외쳐줄, 이름 한번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
고아든 아니든 에베소 아시아든 마게도냐든 성도의 삶은 말씀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성도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파라칼레오 하며 권면의 말씀으로 옆에 계신다. 왜 소동 오고 분란 오고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말씀으로 해석해야 통과할 수 있다. 오늘 하루하루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내는 것이 파라칼레오 하는 것이고, 옆에서 도와주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성령의 안아주심이다.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안아주심이다. 해석이 되어야 통과할 수 있다.
성경에는 극복하다는 말이 없다. 암 부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암과 부도를 통과해서 하나님을 나타내야 한다. 이것이 안아주심이다.
적용) 위로 받아야 할 트라우마는 무엇입니까? 힘든 사람 옆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며 이름을 불러주며 같이 외쳐 주나요? 보기도 싫고 힘들어하나요?
어떤 분 중 나의 트라우마는 남편이 툭 치면 나오는 여자에 대한 친절이라는 분이 있다. 우리들 공동체 와서 남편이 어려서부터 늘 여자형제와 같이 자라서 습관이 되어 그렇다고 해석되니 통과가 된다.
성령의 안아주심은
2. 함께 가는 우리 공동체 그 자체입니다.
3-4절
마게도냐 심방 마치고 헬라, 즉 아가야 지방으로 간 바울은 석 달을 머물게 된다. 특히 2절에 헬라라고 유일하게 표현이 되어 있다. 아가야나 고린도라 표현하면 더 쉬울 텐데 그렇게 쓰였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대단했듯이 헬라인의 선민의식도 대단했다. 헬라인이 유대인에 대해 너무 적개심을 가지니 선민의식을 인정해주려고 너희가 대단하다 표현한 것 같다. 바울의 구원을 위한 기막힌 디테일에 대해 놀란다.헬라 라고 표현한 곳은 여기밖에 없다.
그 헬라 가운데서 바울의 피땀으로 세워진 고린도 교회이다. 남자는 기둥서방, 여자는 창녀라 불리는 음란한 고린도 지방에서 교회를 세우고 1년 6개월간 자비량 선교하며 떠났는데 들리는 소식이 아비의 마음으로 낳은 그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여러 음란으로 큰 눌림과 걱정과 눈물이 있다고 했다. 배신감으로 보고 싶지도 않은 고린도였겠지만, 석 달을 머물며 사랑과 관심으로 양육했다고 한다. 이 고린도에 석 달을 머물며 자신이 꼭 방문해야 하는 19:21의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는 성령의 경영으로 배신당한 고린도에서 석 달간 머물며 최대의 걸작인 로마서를 기록한다. 바울이 가는 곳곳, 우리 생각하는 것과는 거꾸로 가는데 그렇게 갈 때마다 바울도 키워가시고 메세지도 키워가신다.
이번 미국집회도 코로나로 막혀있던 길이 열리자 미국도 보아야 하리라 하는 저의 작정을 아시고 성령의 경영으로 미국으로 인도하셨다. 그런데 첫 교회, 벧엘교회의 세미나 주제가 Im put here 이었다. 정말 그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저를 미국에 던져놓으셨다. 항상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목회도 하게 하시고, 미국이라는 땅 까지 이끄셨다. 이 미국행이 최대의걸작이 되길 바란다.
바울은 이렇게 가르치고 3개월 동안 머물면서 로마서를 쓴 후에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려 한다. 그 때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있어 여러 교회에서 모은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배타고 파송해 준 수리아 안디옥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가려 했다. 그 때 마침 유월절 기간이라 수많은 유대인이 배타고 같이 가는 기간이었다. 바울이 이렇게 늘 좋은 뜻으로 가려 하지만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고 바다에 빠트리려는 공모를 했다. 바울이 이를 알고 다시 마게도냐 지방으로 올라간다. 맞서 싸우지 않는다.
항상 바울의 적은 유대인이 아니다. 우리를 괴롭힌다 해도 자녀가 적이겠는가? 부부가, 형제가 적이겠는가? 바울의 적은 혈과 육이 아니라 어둠의 권세이기에 싸우면 안된다. 바울은 그들을 피해 그 수로를 두고 멀고 먼 육로로 돌아간다.
이 때 신약성경 중 어떤 사본에는 성령이 그에게 라는 부분이 삽입되어 바울이 그들에 대한 음모를 들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으로, 성령께서 알려주셔서, 파라칼레오 하셔서, 바울이 늘 위로하고 권면하고 가르치니 성령께서도 바울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권면해주셔서 위협을 피하게 해 주신 것이라 한다. 바울이 잘난 것도 아니고 성령님이 내 옆에서 도와주시는 것이다.
감춰진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알 수 없다. 바울은 이 땅에서 점처럼 낮아져 있다. 이 효과적인 성령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점으로 왔다가 밟혀 죽을 것이다. 그러니 성령이 임하셔야 한다. 순간순간 파라칼레오 하셔야 한다. 보혜사 성령님이 내 옆에서 따라붙어서 나를 도와주셔야 한다.
그런데 이 외로운 바울의 여정을 함께하는 지체들이 있다. 바울이 사역하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갈라디아와 아시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 베뢰아교회의 소바도 데살로니가교회의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의 가이오, 루스드라 출신이자 바울을 분신처럼 수행한 디모데,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를 대표한 두기고와 드로비모이다.
이런 여러 교회의 대표들이 왜 바울과 함께 가고 있을까? 1차적으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 헌금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일을 이 상황에서는 중요한 일이 아니라 언급하지 않았다. 이들이 바울과 함께 가는 중요한 이유는 바울과 함께 가는 것 자체, 바울의 동행이 되는 자체, 바울과 바울의 사역과 이 것을 읽는 독자에게 위로가 되기에 여기에 언급했다.
1-3차 여행을 통해 오직 주님 위해 당시로는 계획 자체도 쉽지 않은 길고 오랜 여행을 하고 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바울을 대적하는 원수가 계속 있다. 세상을 구원하는 화평의 복음을 전하고 다니는데 정작 바울 자신의 삶은 너무 외롭고 영육간의 치열한 전쟁의 연속이다.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배우자도 없는데 그냥 전쟁도 아니고 살해의 위협을 겪어야 했다.
우리도 집에서 칼부림 일어나기도 하고 욕설이 난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분일수록 밖에서 화평의 복음을 잘 전한다. 그러니 정말 성령님이 안아주시기를, 등 두드려 주시기를 바랄 수 밖에 없는 처절한 외로움을 겪었을 것이다.
바울이 살기 등등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죽일 때는 혼자였다. 주변에 지체가 없었다. 늘 살기 등등하고 혼자인 사람은 사명이 아직 없다고 봐야 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에도 아라비아에서 오랜 기간 홀로 지냈다. 고향 다소에서도 오래 혼자 지냈다. 이후에 바나바의 권유로 사명으로 부름 받았을 때 부터 한 사람 씩 지체가 생긴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지체가 없다. 옆에 군중은 있지만 지체가 없다. 그래서 성령께서 바울에게 함께 가는 지체를 주셔서 안아주신다. 그것도 한 교회에서만 아니라 지금까지 섬긴 모든 지역에서 그 지역을 대표하는 지체들이 한 둘은 꼭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길을 가게 하신다.
바울아, 지금 네가 힘든 것 내가 다 안다, 파라칼레오, 옆에서 이름을 불러준다. 함께 한다고 하며 그 증거로 너와 함께가는 지체들을 보낸다 한다. 지체들과 끝까지 이 길을 가라 한다. 이것이 성령의 안아주심이다.
이들을 신뢰한 징표는 무엇일까? 이 여러 사람이 함께 강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육로로 긴 여행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이들을 먼저 드로아로 보낸다. 아시아의 맨 끝이다. 아마 구제 헌금을 가지고 갔을 것이다 큰 돈을 맡긴 채로 먼저 바다를 가게 할 정도의 신뢰가 형성된 지체들을 허락하심을 볼 수 있다. 돈 하나에 감정이 틀어지고 사이 멀어지고 사명에서 멀어지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근데 바울은 전 마게도냐에서 모은 큰 돈을 자신과 함께 하는 자들에게 맡겨도 전혀 의심도 불안하지도 않는다. 돈 때문에 싸우고 깨지고 하는데 바울과 함께한 자들은 큰 돈을 맡았음에도 어느 누구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곳곳에서 생긴 것이다.
부부는 문화 몸 마지막으로 돈이 하나된다. 부부관계라도 계좌가, 돈이 하나가 되기가 어려운데, 성령의 안아주심으로 한 형제 된 지체들이 얼마나 큰 신뢰관계와 믿음이 생겼는지 볼 수 있다. 그러나 저 사람이 단순히 좋고 잘해줘서 같이 간다가 아니고, 내가 얼마나 죄인이고 우리 구주께서 얼마나 큰 값을 지불하고 나를 구원하셨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돈을 넘어설 수 있다. 내 사명이 무엇이고 그 사명의 무거움과 내가 받은 구원의 값을 아는 사람만 돈을 다룰 수 있다. 아니라면 늘 갈아탄다. 늘 불평이 있다.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서로 믿게 되는 관계, 나를 믿어주고 또 내가 믿는 이런 사람, 내 곁의 파라칼레오가 있는 것 만큼 인생의 큰 복은 없다. 성령의 안아주심은 이해타산을 넘은 참된 지체를 내 주변에 허락해주신다.
5-6절
바울은 소수의 동역자들을 데리고 육로로 돌아서 드로아까지 갔다. 그랬더니 여기에 바로 누가가 있었다. 16:24절부터 누가는 바울 일행을 그들이라는 3인칭 복수로 표현한다. 이 구절에서 다시 우리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누가는 2차 전도 여행 때 빌립보에서 바울과 헤어진 이후, 3차 전도여행 중 다시 빌립보를 방문한 이 때에 그와 상봉했다. 그리고 유월절을 빌립보에서 보내고 드로아로 넘어온다. 예전에는 성령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환상을 보고 아시아에 가는 것을 막으셨다. 그때 드로아에서 빌립보로 갈 때는 이틀 만에 순풍으로 갔다.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로 빌립보에서 드로아로 올 때는 닷새가 걸렸다 한다. 이것은 풍랑이 심했다는 말이다. 나이도 많고 살해 위협에 시달리며 풍랑에 흔들리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래서 도착 후에 7일 머물렀다. 그만큼 힘들었다. 16장에서 성령의 환상 받던 그 때 드로아는 지나쳤는데 이번에는 7일간 머물렀다. 이후 누가는 이 때 부터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에 쭉 같이 동행하는 우리가 되었다.
바울이 이만큼 힘들다. 살해 위협에서 이쪽은 수로로 안가고 육로로 돌아왔으나 풍랑까지 왔다. 그런데 이렇게 힘든 가운데 우리라 부를 수 있는 공동체가 잇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어떤 소동이 와도 말씀으로 하나된 공동체가 있으면 진정할 수 있다. 나와 같이 고난을 당할 우리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이 죄와 싸우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이 성령께서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게 하신 우리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이 한 주 예수님을 섬기며 한 말씀을 듣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곳에서 내 말을 할 수 있고 나와 같은 지체의 말을 들을 수 있기에 우리가 된다. 바로 우리들 공동체이다. 우리들 공동체 자체가 성령의 안아주심 인줄 믿는가? 공동체에 붙어만 있는 것은 성령의 강하고 따뜻한 팔에 꼭 안겨있는 것이다.
적용) 내가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지체가 있나요? 내가 그 사람을 믿는다면 그 사람이 사명이 있어서 믿습니까, 내가 좋아서 내 감정으로 믿습니까? 믿음의 공동체가 우리가 되어 그 자체로 위로가 됨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
성령의 안아주심은 첫째는 위로, 파라칼레오의 권면의 말씀이고 둘째는 우리 자체이다.
3. 떨어지는 약함 까지도 안아주시는 회복입니다.
육로로 마게도냐를 돌아 드로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던 지체들과 만난다. 이 지체들은 이레를 기다린다. 할일 없이 다 기다린다.
제자들은 자기 시간이 아니라 자기를 부르신 자의 시간을 맞추어 항상 스케줄을 정한다. 이것이 제자이다.
7-8절
주간의 첫 날은 주일이고, 여기서 떡을 뗀다는 것은 성찬식을 말한다. 이 때 단어가 독특하다. 떼다 뜯다 으깨뜨리다 라는 말이 나온다. 즉 예수께서 생명으로 오셔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찢어 떼어 깨어 깨뜨린 고난받는 사건을 성찬식으로 묘사해서 주의 성찬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으깨트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구약의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예배로 모였다는 것이 처음 여기에 나온다.
드로아 교회가 모이는 다락방에서 주일예배 함께 드리며 바울이 설교했는데 강론이 밤늦게까지 계속된다. 고린도 교회는 말이 졸하다고 했는데 졸하면 설교라도 짧아야 하지 않나? 그러나 바울이 설교를 길게 한다. 그러나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고 이제 살아 생전 이곳에 다시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저도 미국 뿐 아니라 어디를 갈 때 언제 다시 올지 몰라서 없는 시간 까지 내어 설교를 했다. 어디에 놀러 갈 수가 없다. 이것이 마지막이라 생각되니 사도바울의 마음이 너무 느껴졌다.
어둠이 예배에 지장 주지 않도록 등불을 많이 켰다. 그 당시에는 그 불이 횃불이니 산소가 부족하고 이산화탄소 많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래서 큰 사건이 일어난다.
9절
유두고는 복되다 행운이라는 뜻이다. 로마시대의 비석으로 조사를 해보니 너무나 흔한 이름이다. 9번째로 흔한 이름이었다. 대부분 일꾼과 노예의 이름으로 쓰였다. 드로아 성도 중에는 노예와 일꾼이 많으니 저녁에 예배를 드렸다. 당연히 일하다가, 종살이하다 늦게 도착했으니 피곤했을 것이다. 유두고는 창틀에 걸쳐 앉아있었다. 늦게 가기도 했지만 그렇게도 깨어서 바울의 강론을 들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자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 없어서 졸아도 깊이 졸았다. 그래서 3층에 있다가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예배 오면서 주차장 운동장에 있고 문턱 걸터앉다가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예배는 꼭 앞자리에 앉으셔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 우리 모두 유두고 같이 평생을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각자의 아픔과 피곤과 고난으로 떨어져 죽은 바 된 인생이었다. 예배가 중단된 삶을 살았다. 우리는 다 핑계를 댄다. 내가 피곤한데 교회 가는 것이 어디냐, 그래도 내가 창틀에 앉았다 주차장에 왔다, 그래도 운동장에 왔다 한다. 너무 감사하다. 오시기만 하면 떨어져도 바울이 살려줄 줄 믿는다. 오는 것이 어디냐. 할렐루야. 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살려주신다.
우리는 내가 피곤해서 큐티 못한다 한다. 3층에 있는데 아래 횃불들의 열기들이 몰리니 더 졸리다. 내 환경은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한다. 이것이 유두고와 우리 모두의 변이다. 다 팔자가 늘어지니 큐티도 하고 교회도 간다 한다. 근데 교회에는 노예와 일꾼들만 왔다고 한다. 우리가 평생 일 하는데 다 똑같지 않은가?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하는가?
10-11절
옳고 그름으로 율법적으로 생각하면 유두고가 연약하다. 설교 시간에 졸아서 떨어졌다. 율법적으로 판단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한다. 그래서 하는 일을 판단하고 거리를 둔다. 그러니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다. 근데 바울은 유두고가 떨어지는 그 약함의 자리로 내려갔다고 한다. 눈높이로 내려갔다. 급기야 연약해서 죽기까지 한 유두고의 몸에 자신을 떨어뜨렸다.
엎드려는 무엇인가를 밀어 넣다, 무언가를 덮어버린다 라는 것이다. 구약의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엎드린 행위, 자기 몸을 떨어뜨린 행위이다. 엎드렸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시체를 안았다. 안고는 두 손으로 함께 둘러서 붙들었다는 것이다. 이 것은 신약에서는 딱 한번 나오고 구약에서는 에스겔 5:3 헬라어 번역에서 한번 쓰였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상징적인 행위를 명령하시면서 머리카락과 털을 옷자락에 싸라고 하시는데, 이런 이상한 명령 주시면서 터럭을 옷으로 싸매는 것 처럼 꼭 둘러 감싸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지금 내려가서 몸에 자신을 떨어뜨리고 죽은 몸, 율법적으로 부정한 시체를 성경에서 포옹을 뜻하는 단어 중 가장 강한 단어를 사용해서 꼭 끌어안았다. 구속사적 공감 성도의 교통을 한 것이다. 바울이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꼭 안았다. 여기서만 그 단어를 썼다. 근데 얼마나 꼭 안았는지 누가가 직접 보았기에 그 강도를 생생히 표현하기 위해 표현한 단어라 생각한다. 내려가 덮어주고 꼭 안았다. 그리고 내려가 엎드려 그의 죄가 나의 죄라고 했다. 나 역시 이렇게 떨어지는 인생이었다고, 수많은 그리스도를 죽이고 핍박하고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나 역시 유두고와 같이 떨어진 인생이었다고, 나에게 주신 생명을 이 청년에게도 유두고에게도 동일하게 허락해달라고 했다.
우리 주님께서도 바울처럼 이렇게 내려오셨다. 천상에서 드리던 하나님과의 예배와 연합을 중단하고 벌레만도 못한 우리를 살려주기 위해 내려주셨다. 이를 보고 어쩔 수 없는 고단함 슬픔 부조리 속에 나 혼자 죽은 줄 알았는데 우리 예수님이 내 옆으로 파라칼레오 하시며 나 보다 더 낮은 종의 신분으로 내려오셨다. 그리고 죽어 있던 내 몸에 생기를 밀어 넣으셨다. 자신의 몸을 찢어 보혈로 우리를 덮으셨다. 마땅히 받아야 할 사망이라는 심판으로, 떨어져 죽게 되는 심판을 우리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 대신해서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을 유두고가 받고 있고, 이 사도바울이 나 같이 죽은 시신을 꼭 끌어안고 떠들지 말라 이야기 한다.
우리는 떨어지는 사건 앞에서 소란스럽다. 누구 탓이냐, 원인이 뭐냐 하며 죽음의 사건에서 다 떠들고 소란스럽다. 지난 주 성령의 소동에서 크다 아데미여 하고 외치던 자들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그들은 무엇 때문에 모였는지 알지도 못한 채 크다 아데미여 하며 두 시간을 떠들었다 한다. 이것이 똑같은 뜻이다. 소동했다 떠들었다 하는 죽음 앞에 어떤 대답도 못하고 입 가졌다고 그저 떠들어대고 있다.
죽은 유두고를 꼭 끌어안은 바울은 두려움과 당황에 빠져 어찌할 바 알지 못하며 소란스러운 지체들에게 떠들지 말라, 생명에 그에게 있다 한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안아주시니 이렇게 내려간 인생이 올라간다. 어디까지 올라가는가? 중단되었던 그 예배의 자리, 아들만 먹을 수 있던 떡상의 자리, 주님의 아들과 딸의 자리까지 우리를 올리신다. 떨어져 죽는 사건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말씀의 강론을 막을 수가 없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바울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하게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가장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더러운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지고 세상이 하지 못하는 적용을 하셨다. 이것이 진짜 거룩이다. 우리의 거룩도 결국 구원 때문에 연약한 가족과 지체를 끌어 안는것이다. 그 연약함과 아픔과 죄악을 내 연약함과 아픔과 죄악으로 안아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안아주심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는가?
12절
비천한 인생이었던 유두고의 삶이 다른 이에게 약재료와 위로가 된다. 유두고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저 힘들고 지친 세상의 권세 앞에 어쩔 수 없이 죽을 수 밖에 없더라도 힘든 몸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밖에 나온 것이 없다.
유두고 처럼 모두 힘들고 피곤하고 내 놓을 곳이 없는데 목장에 들어오면 그 유두고의 삶이 약재료가 되어 목장에 은혜를 끼친다. 이것이 세계로 흘러간다. 유두고의 삶을 보면서 다들 적지 않게 위로를 받는다. 유두고는 창틀에 떨어져서 죽을 뻔한 인생인데 피곤한 몸으로 가서 예배에 앉아있으니 사람들이 다 위로를 받는다.
이렇게 한 사람의 연약함을 예수의 마음으로 안아주면 공동체 전체가 엄청난 위로를 얻게 된다. 거기에 생명의 회복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생명의 회복보다 값진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생명이 실존적으로 가깝게 느껴지지 않기에 생명보다 돈 명예 쾌락이 중요하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생명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생명을 위해서 의사가 수술 잘해주면 다 신이시여 한다. 그런데 생명 주신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내 앞에서 잘한 사람 외에는 고맙지 않다. 복음을 전해준 사람은 고맙지 않다. 그래서 늘 피해의식 속에서 예수 믿어도 불평이 많다.
유두고처럼 피투성이가 되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생각이고 마귀가 주는 착각이다.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령의 생각 구원의 생각이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크든 작든 성령의 안아주심을 말씀으로 경험했다. 그래서 예수를 알게 되었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소동 중에 오신 분들이 계실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품은 분들도 있고 믿음이 흔들려 큰 회의에 빠진 분들도 있을 것이다. 오늘 간증한 집사도 얼마나 많이 흔들리고 상처와 소동 가운데 지나고 왔겠는가? 그러나 여러분이 어떻든지, 여러분이 어떻게 오해하든지 떨어지는 연약함을 우리 성령님이 이 시간 말씀으로 꼭 안아주실 줄 믿는다.
스탠리 하워즈의 아내가 정신병으로 아팠다. 가족이 너무 힘들지만 보호자가 살아만 있으라고, 보호자가 자기를 지켜야 한다고, 아프면 자괴감만 들지만 살아만 있으라고 했다. 제가 이번 주 목회자 세미나 하면서 이 말이 진짜 맞다 싶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살아내라고, 그래서 구원을 누리라고, 끌어안아주시는 주님을 만나주시기를 바란다. 성령의 안아주심은 결국 여러분 안의 생명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다. 그러니 피투성이라도 살아만 계시라. 여러분이 살아야 남들을 지킨다. 그러니 그만 자기자신을 정죄하고 자괴감에서 빠져 나와서 살아남으라.
여러분을 안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고난과 사건보다 강하시기에 여러분들을 반드시 살리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래서 결국 여러분을 보는 모든 지체들이 살아난 여러분을 보고 적지 않은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이제 그만 고민하고 정죄하라. 여러분을 지키시기를 바란다.
적용) 이제 다 끝났다며 떠들고 절망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를 안아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헤아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이라도 성령님의 팔을 붙잡기 위해 내려가 엎드려 끌어안는 적용 중에 어디까지가 되고 어디까지가 안되십니까?
말씀으로 깨닫는 것이 안아주심이기에 말씀으로 깨닫는 큐티 나눔을 하겠다.
딸이 손목 그어서 당황했다. 학교 선생님과 상담 후 딸아이에게 평균이하라는 말을 했더니 딸이 상처받고 자해했다고 한다. 아이와의 친밀도와 대화의 양과 질을 고려했을 때 우리집은 외부의 어려움에 대해 충분한 쉼터가 되어준다 생각했다고 하신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친구들이 있는데 매일 다툼이 있고 한명씩 돌아가며 따를 시킨다 한다. 믿을 수 없고 서로를 미워하나 필요에 의해 함께 지낼 수 밖에 없는 관계라 한다. 만나고 오면 진이 빠졌다. 친구 이야기 들을 때 마다 답답하기만 했다.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적잖은 지적을 받게 되었고, 선생님이 이런 지적했는데 그것이 맞냐고 물었다. 아이는 그것이 평균이라 했다. 그런 부분은 평균에서 빠진다고, 그런 평균이 어딨냐고 하니 아이가 아빠의 집요한 말에 평균 이하가 맞다고 손목을 그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손목을 그었다. 인정받고 싶어서 지푸라고 잡으려고 그랬던 아빠에게 평균 이하라는 단어를 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평균 이하라는 도장을 찍어버리고 어렵게 붙든 손을 뿌리친 셈이 되었다.
아이가 아빠와 평균 이하를 아내와 말하고 울었다고 했을 때 나는 너무 화가 나고 아이가 멍청하다 생각했다. 자기 인생을 책임지지 못한 채 다른 사람만 비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에스겔 말씀은 계속 성전의 구조를 보여준다. 오늘 본체와 골방 서쪽 건물을 이야기 하는데, 방의 위치 넓이 두께 길이 등등 요즘의 기준과 초라하다. 요즘의 기준과 초라한 것이 저의 믿음의 수준이라 생각한다.
아이에게 바란것도 이렇지 않았나 싶다. 지금껏 공동체에서 보여주신 기준이 아니라 현재 저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준으로 가치보다는 거대함을 쫒고 세밀한 디테일보다 거대한 담론에 마음을 두었다. 아이에게서 느꼈던 답답함이 아이에게 던졌던 말과 행동이 모두 내 기준이었다. 아이가 느꼈을 모든 감정이 성전의 모양과 겹쳐본다.
이게 뭐지 하면서 눈으로만 읽어버렸던 성전 모양처럼 아이의 아픔들의 깊이와 좌절의 넓이와 고뇌의 높이들을 쓱 읽어내렸다 생각한다. 아이는 자기 몸에 손 댈 정도로 힘들었고 더불어 노력하고 있었구나, 도와달라 하고 있었구나, 내 기준에 맞지 않아 지루하고 의미가 없어 보여 눈으로만 흘려 보냈구나 싶어 미안하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저에게 주님은 성소의 각기의 규례를 보여주신다. 살펴 관찰하고 재고 측정하고 의미와 이유를 고민하고 가장 중요한 목적인 드려야 할 예배를 드리는 것, 이것이 주님이 오늘 아침에 제게 보여주신 성전의 모습입니다. 주님 감사하다.
전 우리가 되었다 함이 아니라 이렇게 가면서도 말씀으로 안아주심이라 생각한다. 이것을 누가 해석해주겠는가?
공부 가르치다가 너 바보 아니야 해서 무릎 꿇고 싹싹 빌었다.
형제 불화 가운데 동생보고 니가 문제라고 니 죄를 보라는 말을 했더니 아이가 집을 나갔다. 부모들은 이런 말이 너무 튀어나온다.
늘 큐티하고 나눔도 잘 했는데, 어느 날 노크 좀 하고 들어오라 해서 친하게 지낸 것 같았으나 이제는 노크하고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것이 너무 어색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하나 성전 이루어 가며 적용하는 것이다. 성령의 안아주심이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치열하게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되어야 통과할 수 있는, 그래야 해결이 되는 것이 성령의 안아주심이 아닌가 싶다.
[말씀맺음]
성령의 안아주심은 권면의 말씀으로 파라칼레오 하며 위로하십니다. 함께 가는 우리 공동체 그 자체가 있어야 한다. 이런 공동체는 떨어지는 약함까지도 안아주시는 회복이다. 우리는 그래서 말씀으로 주 품에 안기기를 기도해야 한다.
[기도제목]
* 이지현
1. 주님 그냥 안아주세요
2. 전도축제에 예전 대표님 초청 할 수 있도록
* 김교희
1. 한 주 말씀으로 삶을 해석하며 파라칼레오를 떠올리며 살아만 있으라는 말씀대로 살아내도록
2. 토요일까지 마음 잘 보고 이야기 잘 하고 오도록, 붙회떨감의 사건이 되도록
3. 동생의 사건이 구원의 사건이 되도록
* 류가영
1. 교제의 과정을 잘 통과하기를
2. 계단에서 넘어져서 살이 찢기고 오른쪽 무릎이 바깥방향으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데 하나님이 회복시켜주시고 아픈 시간에 더욱 말씀 묵상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