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2 주일예배 '성령의 임하심' (행19:1-7) 김양재 담임목사님
땅에 씨앗을 뿌리면 자라나 생명을 맺는다. 과학자들이 씨앗을 똑같이 만들어 심어 물을 주면 자라나는가? 썩어서 악취만 난다. 아무리 조건을 똑같이 해도 생명이 자라지 않는다. 생명은 좁쌀만한것 하나라도 만들어낼 수 없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밝혀낼 수 없는 비밀이다.마찬가지로 삼위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같은 은혜는 가르친다고 되지 않는다.
제자양육과 성령 받는 것 중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시간적으로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의 제자양육은 그 출발이 성령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이 땅에서 개미처럼 수고하고 썩어질 뿐이다.
예수님이 승천 이후에 사도행전 이후에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있었다. 본토 예루살렘에 임한 성령님이었다. 이제 이방선교 하며 거점도시인 에베소에서 성령강림이 일어나야 한다.
18장 마지막의 제자양육과 이어지는 본문이 오늘 본문이다. 제자양육은 성령의 임하심이 절대적이다. 성령이 가르쳐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기에 가르치기도 해야 한다. 오늘은 성령의 임하심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1. 구원의 분별에 절대적입니다.
1절
18장 마지막에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제자양육을 받고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아볼로가 성령의 격려를 받으며 고린도에 가서 힘있게 전도한다. 그 사이에 바울이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지방의 교회들을 심방한 후에 에베소에 도착했다고 한다.그런데 19:1에 아볼로로 시작한다. 바울에게 아볼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는 큰 역할을 했다 보여진다.
원래 바울은 에베소에 가고 싶었으나 성령이 막아 마게도냐로 갔다. 그때 베드로의 구역이라 분별하여 안갔다. 2차여행에서도 사람들이 다 잡았는데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오겠다며 또 떠났다. 바울은 에베소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고 반드시 전도해야겠다 생각하지만 분별해서 성령의 작별을 했다. 그런데 돌고 돌아 에베소에 오게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여기 오게 되었을까?
고후 7:10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 했는데, 바울은 아볼로에 대해 살짝 근심한 것 같다. 아볼로는 출신이 탁월하다. 히브리서가 저자 미상이라 하지만 루터 이후에는 아볼로 저자설이 유력하다. 히브리서를 쓸 정도면 대단한 사람이다. 바울과 문체가 다르다. 구약 전체를 통달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볼로의 이름을 안 남겨주셨다. 하다 못해 베드로 전후서는 마가가 써도 베드로 이름을 붙여주셨고 디모데전후서는 바울이 써도 디모데 이름을 남겨주셨다. 근데 아볼로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가르친 후 후임으로 보냈는데 정말 잘 가르쳐서 고린도 교회가 반해서 도리어 바울보고 약하다는 말을 했다. 결과적으로 잘 가르쳤는데 고린도 교회의 파당을 가져왔다. 파당이 생기니 바울이 고린도전서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나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왜 비교하냐고 썼다.
결국 바울은 아볼로를 조심스레 유리그릇으로 다루었다 할 수 있다. 아볼로가 관계가 안된 것 같다. 고린도교회를 넘기는 엄청난 동역을 했음에도 아볼로 이름이 바울의 로마서 16절의 마지막 문안하는 그 사람들 이름가운데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똑똑하고 기독론과 구속사를 잘 알지만 바울과 한 마음이 안되는 부분이 있다. 이 사람이 분명히 브리스길라의 성령의 제자 양육을 다 받았고 은혜가 있는데 아볼로의 언어와 명칭과 법이, 그를 사로잡고 넘어가지 못하는 본인의 지식 때문에 거기까지인 사람이었다.
아볼로는 히브리서 하나 썼다는 것 만으로도 이땅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히브리서를 너무 잘 쓴 것만으로도 아볼로가 무시되었을 것 같다.이것이 아볼로에 대한 결론이다.
근데 왜 이때가 에베소에 올 때인가? 에베소가 황금어장이긴 하지만 항상 바울은 성령의 임하심으로 십자가 지혜와 타이밍을 분별한다.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 성중 내 백성이 많다는 하나님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양육의 시간을 내니 열매가 많았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이 맞다. 의로운 아덴에서는 열매가 없기에 금세 떠났다. 그러니 에베소에도 바른 복음이 들어가야 했다.
아볼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오래 양육한 후에 후임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에베소는 아볼로가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근심이 되어 아볼로가 떠나고 갈라디아 지방을 다니는 중에 급하게 온 것 같다.
그러나 또 분별한 것은 바울은 그가 가고 싶었던 에베소가 베드로 사도 구역이었기에 시간이 지난 지 한참 지나도 에베소에서 전도가 되지 않았음에도 안갔다. 그리고 아볼로가 전할 때에도 사람들이 아볼로를 너무 대단하게 여기니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았기에 가지 않았다.
이것이 사도행전,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다.둘은 서로 만난적이 없었다. 아볼로가 인도함 받고 에베소 형제들이 추천서 써줘서 격려해주어 자발적으로 고린도로 떠났다. 바울은 에베소가 요한의 세례만 아는 것 같아서 이 때가 전할 때라 생각하여 누구 마음도 안 다치게 하며 왔다.
에베소가 너무나 좋은 거점지이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때마다 분별한다. 그래서 고린도 에베소 모두 성령의 작별로 윈윈하게 하셨다. 황금어장이라고 무턱대고 가는 것이 선교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끝없이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심이 아니면 분별이 안된다.
또 하나 분별 한 것은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이 아볼로의 말은 듣고 좋다고 하니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아볼로는 모두가 좋아하고 잘 가르치는데 박해받았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성경박사가 그 후에 교회 맡았다는 말도 없다. 히브리서를 쓴 저자로써는 놀랄만 한 일이다. 바울을 넘어서는 탁월함이 있는데도 그렇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의 구원과 직결되기에 바울은 이것을 분별해야 했다. 성경은 인간론이기에 아볼로의 서론 본론 결론을 아는 것은 성령이 임하신 바울의 정확한 분별이었다 생각한다. 항상 성령이 임하신 구원의 분별이 엄청난 역사를 가져온다. 그리고 순간의 판단이 영원을 좌우할 수 있다.
적용) 성령의 임하심으로 항상 분별합니까, 내 생각으로 판단합니까? 나는 주변 사람들이 편하다고 합니까 어려워합니까? 나는 뒤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프간 철수에 대한 바이든의 결정이 분별일지 판단일지는 역사가 증언해 줄 것이다. 한 사람의 분별이 세계를 좌우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임하심은
2. 어떤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중 어떤 제자를 만났다.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를 의미하기에 보통 정관사 the 가 붙는다. 근데 the가 안붙은걸로 봐서는 누구의 제자인지 모르는 제자를 말한다.
여기서 만났다는 말은 찾았다는 말이다. 우연히 마주친 만남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만났다는 말이다. 자신을 반기는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자기를 반기는 사람보다는 목적을 가지고 어떤 사람을 찾았다는 말이다. 이 때 가장 마지막에 가르친 사람이 아볼로였다. 그렇게 영향을 끼쳤으니아볼로 제자였을 것이다. 그럼 살짝 근심이 될 수 있다. 근심이 되니 2절에 이렇게 말한다.
2절
그 어떤 도시를 방문했을 때도 이런 기록이 안나온다. 늘 다른 곳에서는 회당 찾고 성경을 펼쳐 강론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는 아볼로 제자라 하면 잘난 척 했을 것이기에 성령 받았는지 먼저 묻는 말로 사역이 시작된다.즉 너희가 누구 제자냐, 성령을 받았냐 한다.근데 성령이 계심을 듣지 못했다 했다. 그러니 바울의 근심이 맞았다.
바울이 만난 사람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제자였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을 유심히 보니 성령받지 않았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성령 받아야 하고 성령 받지 못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것이다. 명목상 제자일 수는 있어도 실제 제자는 아니다.
그러나 성령받지 못하면 이 힘든 에베소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없다. 그만큼 에베소가 힘든 곳이기에 이것을 오자마자 확인했다. 성령 없이는 결코 에베소 같은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를 감당할 수 없다.
에베소 같은 돈 많고 인물 좋고 다 갖춘 남편 아내 자녀, 금그릇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다. 성령이 없으면 그 금그릇을 깰 수가 없다. 의인을 좋아하지만 그 의인은 아무리 해도 깰 수가 없다. 도무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저 사람, 에베소 같은 저 인간의 마음에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믿을 때 성령을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다.
근데 이 성령은 어떻게 받는가? 마술사 시몬이 이 성령을 받고 싶어 간절히 원했지만 받지 못했다.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했다가 책망 받기까지 했다. 우리가 교회와서 헌금내면 성령 받는가? 열심히 섬기면 성령 받는가? 돈으로 살수도 간절히 원해도 받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한다. 믿을 때 받는 것이다. 믿을 때 라는 말은 조건이 아니다. 믿음이 조건이 되어 성령을 받는다면 믿음조차 행위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믿을때 라는 말은 만일 너희가 믿었다면 성령 받았을 텐데 왜 너희 모습에 성령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믿었다면 동시에 성령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아무리 탁월한 교회와 탁월한 양육을 받아도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사람의 어떤 제자로 살아갈 뿐이다.
이 어떤 제자들이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했다고 한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라는 것을 듣지도 못했다고 한다.
어떤 한 집사님이 우리들 교회에 한달 전에 처음 와서 성령의 문제 설교를 듣고 일제히 달려드는 그 사건을 듣고 언어와 명칭과 법으로 피투성이가 된 사람 앞에 내가 죄인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믿기 때문에 우리는 죽기보다 싫은 어떤 수치를 당할 수 있는 것이고, 믿기 때문에 죽기보다 싫은 적용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남편은 내가 죽어서 아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자주 든다고 한다. 이분은 정말 요한의 세례에 전념하는 것 처럼 기도와 성경 필사에 전념하고 계시는 제자 반열에 있는 분이다.
실제로 이 아내가 마지막으로 거룩한 남편에게 왔을 때 정신과 같이 가자고 했는데 아내에게 내가 왜 거기 가야 하냐며 3시간을 따지고 반박하며 당신이 예수 믿는다면 나를 용서해야 한다고 아내를 향해 용서와 사랑을 외치니 아내가 그 이후로 모든 연락을 끊고 이혼서류를 보내왔다고 한다. 용서는 가해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분을 볼 때 이 질문을 하게 된다.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도대체 누구 제자냐?'
믿음이 무엇인가? 내 수치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죽어지는 적용을 하는 것이다. 근데 이 분은 아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조용히 목숨을 끊고 싶다고 고백하셨다. 죽기보다 싫은 것이 인정하는 것이고 정신과 가는 것이고 나 자신과 직면하는 것이고 사과하는 것이고 공동체에 내 수치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을 때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제자들이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한 것 처럼 이 집사님도 아내와의 문제에 있어서 자기가 죄인임을 한번도 듣지도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한다. 평생 교회를 다니고 평생 성경 필사하고 기도를 하는데도 내가 죄인이라며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무엇을 믿는가? 무엇을 믿어야 할까?
내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한다. 오늘 내게 들려주시는 그 한 말씀을 믿는 것이다. 큐티 할 때 오늘 한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 이는 말씀을 믿는 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큐티하는 것이 적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한 말씀을 믿고 붙들고 적용할 때 내 속의 성령께서 효과적으로 나를 도와주신다.
지금 이 시대는 에베소보다 더 악한 시대이다. 우리는 어떤 제자로 성령을 모른 채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없기에 바울이 이것을 간파했다. 험한 전도 여행을 다니며 온갖 수모와 핍박을 당했다. 그러니 진실과 구원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아볼로를 구별했다. 그리고 1절의 어떤 제자도 분별했다.
교회를 하거나 양육하거나 회사 하거나 하려면 이렇게 분별해야 한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성령님이 임하셔야 한다.
바울은 예수 믿는 성도로, 제자로 무서운 열심 뒤에 감추어진 빈자리, 영적 공허함을 보았다. 그래서 에베소에 와서 어떤 도시에서도 던지지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은 실존적 질문이고 그들의 수준을 드러내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목사에게 쉽게 말하면 구원은 받으셨어요? 라고 물어보는 것 같은 종류의 질문이다.
적용) 내 실체를 드러내주었던 질문은 어떤 질문이었습니까? 지금 나에게 죽기보다 싫은 적용은 무엇입니까?
아내도 남편도 자녀도 모든 부모도 다 맞다고 말하는데 나 혼자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누구의 제자입니까? 내가 제일 기억나는 스승은 누구입니까?
성령의 임하심은 구원의 분별에 절대적이다. 사람의 제자가 아니라 주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3.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 것입니다.
3-5절
예수 믿는다 하는 제자라 하는 사람들이 성령이 계심도 모른다 하니 바울의 근심이 맞았다. 바울이 분별 잘 했다. 삶의 능력도 적용도 자기 수치를 드러냄도 없는 어떤 제자들을 향해 바울이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는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양육한 것 처럼 바울은 이 어떤 제자들을 기다리며 양육 해 가고 있다. 양육은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 하는 것이다. 정답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목장에서도 그가 대답할 수 있도록 질문 하는 것이다. 질문을 통해 자신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살핌으로 양육이 되어지는 것이다.
바울은 다시 질문한다.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그러자 그 제자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하버드 제자다 하는 것이다. 아볼로도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 하면서 굉장히 자랑했듯이 이들도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 하면서 자랑한다. 아볼로의 제자라 하면 그것은 빛난 자격증이다. 바울의 제자라 하면 십자가에 달린 부끄러운 이름이다.
그 대답을 듣고 바울은 그 요한이 세례를 베풀며 어떤 말을 했는지 그들이 믿는 요한의 입을 빌려 이야기 해준다.
마3:11
요한의 세례는 물로 베푼다. 우리는 요한이 어떤 세례를 베푸는지 어떤 인물인지 함께 묵상했다. 요한은 회개하라 독사의 자식들아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회개합니다 한다. 요한의 메시지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비한다. 그러니 아직 오지 않은 소리, 예비하는 자의 소리라면 예수님의 설교는 이미 하나님 나라 자체가 임한 메시지 이다. 그 능력 차이는 예비하는 자와 이미 임하는 자이기에 비교할 수 없다. 세례 요한의 설교가 듣기에 의롭고 멋있어서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은 많아도 속 사람의 죄를 보기는 너무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 그 더러운 내 속을 찌르는 임박한 설교이기에 도전이 되고 변화가 일어난다. 사람이 많고 적고가 아니라 변해야 한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과 불의 세례이다. 불은 심판이다. 즉 예수님의 세례는 구원과 심판이 임하는 세례이다. 내가 예수 믿어 잘 된다가 아니라 내가 예수 믿어 심판받는다 하는 것이다.
내가 독사의 자식입니다 회개합니다 하는 사람은 내가 어떤 불의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임이 깨달아진다는 것이 예수님의 세례이다. 요한의 용서하고 깨끗하게 씻겨주는 세례임과 동시에 태우고 심판하는 불의 세례인 것이다. 그러니 용서받아서 내가 이혼을 안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고 독사의 자식이고 이혼당해도 사업망해도 할말 없는 인생이예요, 심판 가운데서도 심판보다 내 죄가 가볍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하는 세례이다.
우리는 심판을 싫어한다. 매일 용서 물 깨끗함만 원한다. 그러나 내 속의 쭉정이가 내 속의 끝없는 죄악이 이땅에서 불의 심판을 받는 것이 영원한 심판을 면하는 은혜이다. 그래서 예수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내가 어떤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한다.
저도 어떤 불의 심판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하는 것이 깨달아졌기에 남편의 말을 들어낸 것이다.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혼을 막아도 당해도 은혜이다. 이미 구원을 하나님의 상급을 받았기에 환경의 어떠함에 영향 받지 않는다. 그러니 예수의 세례 불세례를 아는 자들은 현 시국에 내 죄 때문에 깨어진 가정이라면 끝없이 애통해 하며 눈물 흘려야 한다. 나로 인해 저 영혼까지 불의 심판을 받기에 이 심판 속에 나를 살릴 예수의 마음이 불 붙듯 일어나며 갈급하게 되기에 이것이 예수의 세례이다. 예수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이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아는 자는 내가 열심히 살았고 용서함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 한다. 이는 예수 이름으로 받는 세례, 불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 임이 자신임을 절대로 깨닫지 못하기에 조용히 죽어 아내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불의 세례로 모든 것이 무너짐을 경험하는 것은 축복이다. 이런 무너짐을 경험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심판과 형벌을 피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내 죄가 깨달아 지기 때문이다. 이땅에서 무너져 보지 않으면 절대로 모른다. 아무리 고난이 와도 안 깨달아지는 사람은 요한의 세례밖에 몰라서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의 세례가 아닌 그 세례 요한이 외쳤던 예수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정리하면 성령세례란 정확한 복음, 내 뒤에 오실 예수님을 확실히 아는 것이다. 바울은 그 예수님을 정확하게 설명했다. 바울이 수없이 강론했던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심과 부활하심, 다시 사심과 승천하심, 다시 오시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기에 믿는 것이다. 그 말씀을 믿는 것이다.
성경을 나의 죄를 위해 죽어주신 이야기로 정확하게 읽어가기에 성경이 나를 읽고 가는 것이 성령세례이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세례란 죽는 것이기에 십자가 지는 것이다.
이들이 어떤 제자인 이유는 아볼로의 가르침이기 보다, 아볼로도 어떤 제자도 그들이 지는 십자가가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 지는 것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던져버리고 싶은 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각자의 자기 십자가를 다 지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것이라 (마16:24) 한다.
마 16:24 본문은 교파마다 해석 다르게 하는 어려운 본문이다. 다시 세례 받는다고 하니 재세례파, 방언받아야 성령세례 받아야 한다고 하는 오순절 파가 나왔다. 성령은 오순절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계셨으며 지금도 장차도 계실 것이다. 성령 세례의 표적은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의 부류도 달라지는 것이다.
제가 서울에서 일류를 원했지만 지금 제가 함께하는 사람은 여러분, 전혀 알지 못했지만 저절로 우리가 된 여러분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가 생각해 보라. 그 좋아하는 사람의 부류에 여러분의 믿음이 있다. 물세례 성령세례는 동시에 올 수도 있고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성령세례를 알려주기 위해 바울이 가르친 것은 정확한 복음이다.
우리가 큐티 하고 말씀 통해 얼마나 정확한 복음을 듣는지 모른다. 여러분이 성령세례 받았다고 생각한다.
적용) 내가 예수 믿으면 잘 된다가 아니라, 내가 당한 불의 심판은 무엇인가요? 그 사건 앞에 나는 어떤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임이 얼마나 인정됩니까? 내가 예수 믿으면 잘 된다가 아니라 내가 당한 불의 심판은 무엇인가요? 사건 앞에 나는 어떤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임이 인정됩니까?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하나 지금 던져버리고 싶은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물세례도 안받으신 분들은 왜 안받으시는지요?
4. 방언과 예언을 합니다.
6-7절
바울의 안수 직후 사람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 여기서의 시제는 계속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말은 두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선교적 의미의 바벨탑 사건을 풀어주신 외국어, 개인의 신앙을 확실히 하기 위한 은사로 주신 방언이다. 고전 13:1 에서 외국어는 사람의 방언어, 랄랄랄라는 천사의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받는 것을 생각 할 때 방언이나 예언, 기적같은 은사에만 관심 가지기 쉽다. 그래서 그런 가시적 능력이 있어야 성령 받았다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가 예전에 기도원 갔는데 방언 받아야 성령받는다고 하며 방언 훈련을 했다. 그러다 방언 터지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생각은 성령을 하나님이 아닌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에너지로 쓰는 것이다. 기준이 우리에게 행하는 은사에 있으면 성령은 한낱 에너지나 자원이 된다. 잘못된 예이다. 내 생각 내 가치관 외모만 취하던 세상 가치관에 따라 내 삶이 말씀으로 해석되니 성령이 임하시고 방언과 예언을 말하게 된다고 한다. 방언은 소통의 능력이고 공감의 능력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는 타락해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셔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내 모든 고통과 고난이 이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려고 허락한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이라고, 소통할 수 없던 내가 우리 주님과 소통하게 되는 것이 방언이다.
주님의 마음을 어떻게 소통하고 공감하겠는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한다. 말씀을 통해 말하고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방언이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이 방언이니 세상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다. 그래서 말씀으로 기도하고 처방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불신결혼 동성애 말씀에 다 나와있다. 그러나 인권이 우상이 되면 알아들을 수 없다. 알아들을 수없는 방언이다. 그래서 구속사는 방언 중 방언이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언어가 구속사의 언어이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설교를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소통하게 되니 고난이 와도 찢어지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세례를 통해 내 생각이 예수와 함께 죽고 하나님의 생각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말씀 보고 세상의 언어로 소통을 한다. 하늘의 언어를 땅으로 풀어내야 한다. 이것을 예언이라 한다.예언은 점 보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어도 사주팔자 관상 이런 것 다 좋아한다. 요즘 가장 유행은 개미들 사주팔자라고 한다. 사야 할 주식 팔아야 할 자리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예언에서 예는 미리 예가 아니라 맡길 예 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다. 예언은 감화력이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내게 맡겨주신 말씀으로 내 삶을 해석해서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언이다. 바울을 통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변화되고 이들을 통해 아볼로가 변화되는 것이 예언이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삶의 이유를 해석해서 나와 같은 고난있는 자에게 권능으로 나아가 그 사람이 내가 깨달은 이 말씀으로 변화되는 것이 예언이다.
방언과 예언도 영혼구원을 위함이며 성령이 임하시면 영혼구원을 길로 놓고 가게 된다. 이것이 성령의 임하심의 목적이다.
7절
12는 회복의 숫자이다. 이는 구약의 열두 지파, 신약의 열두 사도를 예표 한다. 그래서 12는 말씀 맡은 공동체를 뜻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져서 다시 세워졌듯이 아무리 무너졌던 공동체라도 성령이 임하시면 회복시킨다. 말씀 맡은 공동체가 무엇인가? 목장이다.
열둘은 천국을 표현하는 숫자이다. 천국 문이 열두 문이다. 그 문에 열두 보석 열두 천사가 있고 생명나무 강가에 열두 열매가 맺힌다. 요한계시록에서 맺히는 것은 다 열둘이라는 숫자이다. 성령의 임하심은 온전한 회복의 공동체이다.
목장 마스코트 7살 아이의 나눔을 시작으로 늘 우리가 여기있어요 하는 목원들의 얼굴을 보면, 한달동안 월급 못받고 불치병에 하루하루가 힘들고 이혼하고 싶고 의인인 남편 향해 예수와 사는 것 같다는 목장 모임이 열두 공동체이다.청년부 큐페온라인 조별모임에 7명이 들어왔는데 우울증약 먹고 있는 6명이 약 안먹고 힘들다는 한 명에게 약 잘 먹고 넘어가야 한다고 처방하는 것이 공동체이다.
어떤 제자들이 열두 사람으로 변했다고 한다. 한 사람 아볼로, 어떤 제자들로 시작된 요한의 세례만 알던 사람이 성령이 임하시니 오늘 마지막 절 처럼 열두 사람의 예수의 제자, 온전한 회복 공동체가 되었다.
소통과 감화 시키는 방언과 예언하는 열두 공동체 나눔
적용) 소통하는 방언과 감화를 시키는 예언을 하시나요? 회복의 지름길이 온전한 열두 공동체 목장에 가는 것임을 아시나요? 나는 무엇이 회복되고 싶나요?
[기도제목]
* 이지현
- 가정에 계속 묶여야하는 상황 속에서 내 판단 내려놓고 분별함으로 자리 잘 지키며 오늘을 잘 살아내도록
- 소동만하고 어찌할 바 모르는 집 문제 인도해주시길
- 알맞은 운동과 규칙적인 생활 잘 할 수 있도록
- 목원들이 불같은 사건 속에서 성령 받아 공동체에 온전히 속하는 12제자가 될 수 있도록
- 아빠가 코로나 백신 2차 접종 후 컨디션 안 좋으신데 회복되도록
*김교희
- 가족과 주변을 판단 정죄하기보다 분별하여 편한 사람이 되도록
- 엄마와 아빠를 객관적으로 분별하고 가도록
- 결혼준비 집준비에 대해 인내하고 때를 기다리기 어려운데 나누며 인내 잘 하고 가도록
- 이번주 아빠와의 만남에서 평안이 있도록
*류가영
- 가족, 직장, 남자친구를 판단하지 않고, 분별하기를
- 일에 빠지고 영적으로 졸고 있는데, 졸다 죽은 유두고가 되지 않고 아침 큐티로 깨어나기를
- 영육간 강건
- 남자친구 목장 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