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8. '주 예수의 은혜로' (행15:1-11) 심한섭 목사님
이미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믿음도 있는 내가 왜 여전히 양육 받아야 하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이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신다.
1. 여전히 율법과 행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2절
안디옥 교회 안에 구원에 관한 문제로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른 구원을 말하는 유대의 어떤 사람과 할례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요지로논쟁을 벌인다. 구원받은 자를 증명해 보이는 행위의 증표 없이는 구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들이 많이 들었기에 뻔하고 익숙하게 들렸을 것이다. 행위와 은혜가 아주 미묘한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자신도 모르게 행위와 율법에 얽매여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아니라고, 나는 행위로 판단하지 않는다 할 수 있지만 우리 사람들 중 행위와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행위와 은혜의 미묘한 관계를 두가지로 설명하고자 한다.
첫번째는 행위는 은혜 다음이어야 한다.순서가 중요하다.
제가 청년부 출신의 자매를 만나결혼했다. 청년부 출신의 자매였다.결혼할 때 뭘 못 내려놓으냐 물었을 때 하얀피부와 오밀조밀하게 생긴 얼굴이라 했다. 아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저에게 아름다워보였던 더 큰 이유는 제 아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일평생 함께할 수 있겠다 하고 살았다.
결혼 후 바로 미국에 갔다. 한국처럼 가족 친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 문제 생겼을 때 도움 요청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어도 잘 안되는 곳에서 둘이서 수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오롯이 저희 힘으로 헤쳐나가야 했다.
결혼해서 살다보니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줄 알았던 제 아내가 세상의 두려움이 많았다. 두려움과 염려가 많고 고민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때도 생각하는게 많아서 쉽게 말을 못했다. 저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졌다. 담임목사님께서 두려움은 욕심때문이라 하셨었기에 아내의 이런 행동들을 욕심이 많다 생각하며 고치길 바랬다.
와이프는 불안이 많은 반면 저는 기준에 어긋나는 것을 못본다. 강박적으로 몰두해서 집착하는 저만의 율법이 있다. 저의 율법 안에 사람을 가두어 놓고 그대로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강박이 있다. 물건을 사용하고 나면 그 물건을 항상 제자리에 두는 것이 인생의 화두이다.
아내가 부엌에서 요리할 때 찬장을 다 열고 요리하고 다 끝나면 정리한다. 저는 쓰고 바로 넣어두는 스타일이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찬장을 다 열고 다 넣는다. 그럼 저는 아내가 열어둔 모든 것을 다 닫는다. 이러다 저의 강박이 발동하면 혈기가 올라오고 이것이 터지면 아내의 두려움이 올라온다.
강박쟁이는 금방 혈기쟁이로 변신하고 두려움쟁이는 울보가 된다. 강박쟁이인 저는 끝까지 문제의 원인을 캐어 따지고 알아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두려움쟁이인 아내는 강박쟁이인 제가 겁이 나서 눈물흘리며 회피한다. 저와 아내가 각자의 두려움과 강박이 해결되길 바랬지만 저희는 행위로 드러나는 어떠한 문제가 은혜로밖에는 해결되지 않음을 모르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저는 아내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를 경험시켜 줬어야 했는데 오히려 아내에게 강박과 혈기로 대할 때가 많았고 아내의 구원과 은혜를 더 멀어지게 만들곤 했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인 인간에게 율법과 행위라는 문제는 우리의 삶의 부분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매일 이야기하는 것이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 강박이 고쳐지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중독이 끊어지면 큐티 매일하면 부지런해지면 열심히 살면, 무언가 행위가 변화되면,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과 행위의 구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녀양육도 마찬가지이다. 엄마 말 잘 들으면 착한 아이, 숙제 잘 하면 훌륭한 아이라고 생각한다. 산타할아버지가 알고계신다는 노래도 있다. 모든 세상이 착하고 나쁘고 라는 율법과 행위의 굴레 안에서 돌아간다.
순서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행위로 올바르게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행위는 은혜 뒤에 따라온다.
요 15:5
행위는 열매이다. 사람이 열매 맺을 수 있는 가장 은혜로운 방식은 포도나무인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은혜가 먼저고 행위는 나중이다. 우리는 이 순서를 거꾸로 하려 한다.
죄를 고백할 때 우리는 행위로 지은 죄를 많이 고백한다. 모두가 그 행위를 고치는 데 집중한다. 행위가 끊어지면 믿음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것인 것 처럼 말한다. 중독을 끊어내면, 배우자가 돈을 잘 벌어오면, 배우자가 내 말을 잘 들어주면, 그 사람의 행위가 변화되면 예수의 은혜를 경험받는 것이 아니다. 할례를 받기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은혜를 받지 않고 행위로 바르고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무서운 사람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따라서 행위와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은 행위의 죄만 생각한다. 하지만 은혜의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은혜를 떠난 모든 것이 죄였음을 고백한다.
아내에게 90세 넘은 할아버지가 계신다. 일평생 법조인으로 바르고 의롭게 살아오셨다 생각하신다. 한국와서 기회 올 때 마다 할아버님 만나 복음을 전했다.
하루는 사도행전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의 말씀을 들려드리며 죄인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내가 죄인이냐 하며 웃으셨다. 어떻게 평생 법을 지키며 살아온 내가 죄인이 될 수 있는지 의아해하셨다.
할아버지 이야기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종종 적용이라며 행위구원이라 하는 말들을 한다. 예수 없이 은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행위가 변화된다면 그것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 아내와 남편이 은혜 경험 없이 행위가 올바르게 변했다면 정말 병원에 가볼 일이다.
저는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위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다. 행위로 지은 죄가 많다. 악하고 이기적인것도 말할 것이 없다. 선교사였고 신학생이고 목회자였을 때에도 거짓과 음란을 일삼은 야곱같은 죄인이다. 제 삶의 행위를 생각하면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 요즘에도 잠자다가도 제가 지은 죄가 생각나 잠을 설칠 때가 있다. 내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 선한 것이 없어 지금도 괴롭다. 오직 예수의 은혜로 지금 저는 이 자리에 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순서를 혼동하시면 안된다. 제가 설교의 자리에 있기에 은혜받은 자라 생각하시면 안된다. 은혜 받은 자이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순서가 바뀌면 다른 복음이 된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잃으면 곧바로 육체의 율법과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주 예수를 잊으면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죄짓는 공장일 수 밖에 없다. 오늘 제가 은혜를 잊으면 저는 그저 죄 짓는 강박쟁이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의 은혜가 아직 제가 죄인 되었을 때 저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신 예수의 은혜가 제 안에 있어서 오늘도 저는 제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강박적인 제 모습을 고쳐달라고 기도한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 못할 것이 없다. 이것을 담임목사님과 어머님에게 일평생 배웠다. 상대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기도하고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셔서라도 내 옆의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것이 없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내 아내 내 남편도 구원해주실 줄 믿는다.
그러나 헷갈리면 안된다.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에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경험했기에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다. 제가 아무리 아내를 사랑한다 해도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제가 악한 행동을 다 끊는다고 해도 주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 없이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무섭다.
순서가 중요하다. 예수를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모든 이유가 되어야 한다. 구원을 받으면 할례 받은 자의 삶을 소망하게 된다.
둘째로 율법은 인과응보를 말한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다는 말은 무엇을 하면 복받고 안하면 저주 받는다는 말이다.
이것을 기복이라 하지만 세상은 합리적이라 한다. 세상은 give and take의 원리로 돌아간다. 내가 준 만큼 돌려받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할례 받으면 구원받는 것은 상당히 인과적으로 볼 때 논리적인 일이다. 율법은 인과관계이고 합리적으로 설명되지만 이것은 은혜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오랜 시간 사역으로 섬겼지만 여전히 제 안에 율법을 넘지 못하는 기복이 있다. 제 아내가 무엇을 부탁할 때 저도 모르게 저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해줬나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아내를 위해 무언가 했을때 생색이 올라올 때도 있다. 내가 줬으면 받아야 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이것이 기복이고 율법이다.
우리가 예수로부터 받은 은혜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내가 예수 위해 무엇을 해야 복받는 거라면 이라면 어느 누구도 복받을 자격이 없다. 내가 준 만큼 받는 것이라면 이 자리에서 구원 받을 만큼 드린 사람이 없다. 우리는 이렇듯 은혜를 경험했지만 자녀 부모 대할 때 기복으로 대하고 논리와 합리라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율법을 들이대는 사람이 늘 그런 관계에서 승리한다. 그렇게 우리는 이긴다. 니가 해준게 없으니 내가 줄 것이 없다. 이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율법의 방식이다. 나는 배우자와 자녀를 어떻게 대하는가 보자.
율법은 이기려 들지만 은혜는 절대 이기지 않는다. 오히려 죽어짐으로 승리한다.
적용) 타인의 겉으로 보여지는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바라고 있나요? 남편과 아내 자녀들의 행위의 문제가 고쳐지기만을 바라고 있나요? 아니면 그들이 말씀을 듣고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나요?
믿음이 있지만 여전히 생색과 기복으로 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는 않는가? 나는 스스로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자랑합니까? 그것이 율법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우리가 여전히 양육받아야 하는 이유는
2. 우리가 기쁨 중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5절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사람들이 믿게 된 간증을 한다.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사도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고 인간이 행한 율법이 아닌 은혜에 관한 일을 말한다. 모든 공동체가 기쁨으로 은혜를 나눔에도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다. 근데 이 바리새파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이다. 믿는 우리중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1절에 등장한 사람들의 주제는 '할례받지 않은자'라면 이번에 등장한 사람들의 주제는 '마땅하니라'이다.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옳고 그름을 뛰어넘지 못한다. 항상 그것을 따지느라 공동체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함께 하지 못한다. 이것은 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설교를 준비하며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에게 저의 어떤 점이 율법이냐 물었다. 그랬더니 당신이 옳다 여기고 하고싶은 말은 앞뒤를 안가린다고 했다.
오늘 바리새파 사람들을 보며 마땅하다 외치는 타이밍은 예루살렘 공동체가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함께 들으며 기뻐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바리새인은 자신이 옳다 생각하니 공동체 기쁨은 아랑곳않고 이것이 옳다 하는 것이다. 저의 모습 같다.
저는 예전부터 무슨 말을 하고 싶으면 잘 못참았다. 그런 근본적인 이유는 늘 내가 옳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목사님이 넌 왜 오르락 내리락 할 때가 있냐고 하셨다. 저는 마음속에 저의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 좋은때도 있지만 낙담도 된다. 그러나 왜 이런지 몰랐다. 저는 제 스스로 옳다는 것이 있어서 무엇인가 잘못되어 보이면 마음이 요동치는 것이 있다. 이것이 마땅하다 하면 못 참는 것이 있다. 제가 그렇게 양육을 받았지만 바리새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끔 설교 초청해주시는 곳이 있다. 양복 입고 약력에 칼빈 신학석사 박사 이렇게 쓰면 속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제가 스스로 얼마나 율법이 극복 안되는 사람인지 아니,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음을 안다.
박사 하면서 공부로 인정받았다 느낄 때가 있었다. 그때 목사님과 우연히 메일을 주고받게 되었다. 그 때 목사님께서 환경이 교만하면 장사가 없다고 하셨다. 전 양육도 오래 받았기에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이겨낼 수 있을거라 장담하는 것이 있었다. 근데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목사님께서 환경이 교만하면 장사 없다고 해주시는 것이 감사했다.
공동체 안에서 저랑 비슷한 바리새파 분들은 옳고 그른것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할 수 있다. 맞다. 옳은 것이 있어야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명확히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윤리가 성립되고 사회도 유지된다. 그러나 그 옳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기준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같은 죄인을 값없이 살리신 예수님 만이 옳으신 것이다.
스데반을 죽인 바울도, 예수를 세번 부인한 베드로도,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거짓 일삼은 야곱도 옳지 않았다. 며느리와 동침한 유다는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우리아의 아내와 동침한 다윗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옳은 것이었다. 마땅하지 않은 자를 통해 마땅한 것을 하는 분은 오직 예수 뿐이시다. 이제 옳고 그름은 내 안에 있지 않고 예수의 복음 안에만 있음을 기억하라. 무엇이 옳으냐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가 옳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공동체가 구원의 기쁨으로 즐거워 할 때 함께 즐거워하는가? 아니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고 있는가?
적용) 나는 공동체의 기쁨에 기꺼이 참여합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왜 그런가? 지금도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마땅한지 아닌지를 내 기준과 생각과 지식으로 판단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의 은혜로 얻은 구원만이 옳은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우리들이 여전히 구원의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까닭은
3. 우리가 끊임없이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6-11절
예루살렘 사도와 장로들이 구원의 문제를 의논하러 모였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고 제자 되었던 자들이 여전히 구원에 대해 확신이 없다. 이것이 우리가 되었다 함어 함 없이 계속 구원과 양육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다.
6-11절에서 베드로가 가장 눈에 띈다. 베드로는 바울에게 꾸중들었다. 자기처럼 예수님을 목격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애제자도 아닌 사람이 자신에게 처방하고 책망한다. 베드로가 자존심 상했을 수도 있는데 바울을 변호한다. 베드로는 진정한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정한다. 베드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에 차별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차별한다는 단어는 철저하게 분리하여 의심하고 판단한다는 뜻이 있다. 즉 누군가를 나와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남과 나를 구별하고 분리한다. 나는 남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본문 7-9절에서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보자. 여기서 베드로가 구원의 핵심을 설명한다.
7-9절
사람의 일을 통해 된 일이 있는가? 율법, 육의 일을 통해 된 일이 있는가? 베드로가 설명한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오래 전 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케 하셨고 차별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로,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직분 맡은 자가 되었다. 그런데 왜 차별하는가?
저 사람이 아프다 해서 나는 안 아픈가? 나는 그럼 괜찮아진 것 같은가? 내가 믿음이 있다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제가 살면서 가장 은혜받았을 때는 제가 가장 아픈 사람이었을 때였다. 우리는 상처가 별이 됨을 간증하는 교회이고 고난이 복이라 말하는 교회였다. 가장 힘들고 아픈 순간에 찾아와주신 예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근데 이제는 별로 은혜가 안되는가? 어쩌면 이제는 여러분이 나는 아프고 상처투성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는 내가 꽤 온전하다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다. 이와 같이 내가 누군가보다 낫다 생각하고 믿음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에 차별 없다는 것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구원에 차별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른사람의 마음을 나와 같이 깨끗케 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차별없음은 관계회복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내가 하나님처럼 안될게 뭐 있어 하며 에덴동산에서 관계가 단절되었다. 내가 저사람 보다 못한게 뭐 있어 하는 생각에서 모든 관계의 단절이 시작된다.
하지만 차별 없는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관계의 회복으로 나타난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의 은혜로 내 마음을 그들보다 먼저 깨끗케 해주셨다는 이유 하나로 믿음있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형제들이라 부르며 차별하지 않으며 끊어진 관계를 회복해왔다.
오늘 본문에 형제들이라 네번이나 부르는 것이 나온다. 베드로가 형제들이라 부르는 순간에 베드로의 차별없는 사랑과 하나님의 차별없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 생각한다.
오늘 여러분은 누군가 차별하지 않는가? 저도 차별없는 구원을 이해하지 못해 단절된 사람이 있다. 항상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 처럼 남아있다. 저의 율법적 모습과 옳고 그름을 따지는 모습에 상처받은 형제가 있다. 이자리를 빌어 제가 옳고 그름만 따지고 율법의 굴레를 못벗어나는 죄인임을 고백한다. 용서해 주시면 좋겠다. 죄송하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너무나 불편하고 싫은 사람이 있는가? 상처받고 상처 주어 안보는 사람이 있는가? 여러분이 보시기에 사람되기 글러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해줬는데 내게 이렇게 해 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제 그런 분들 한분을 떠올려보길 바란다.
11절
우리가 차별하고 무시하는 그 한 사람도 우리와 동일하게 중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기를 바란다.
적용) 내가 차별하고 이방인처럼 여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관계가 단절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회복하고 싶지 않고 손 내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그 사람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까? 내가 그 사람을 차별하고 있다고 인정하십니까?
[ 기도제목 ]
*은지
- 큐티 기도 말씀 우선순위와 습관이 될 수 있도록
- 아빠 동생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마음 주시기를
- 소개팅 하는 분과 하나님 안에서 잘 만날 수 있도록
*교희
- 뺑소니 협박범 다시 연락왔는데 대응하지 않고 이 사건을 잘 해석하고 기도하고 가도록
- 엄마와의 관계 회복
- 수련회 집중 할 수 있도록
*소영
- 수련회라는 공동체의 기쁨에 잘 참여할 수 있도록
*미정
- 동네교회 청년 코로나 걸렸는데 매우 위험한 상황. 잘 낫도록
- 직장 문제 때에 맞는 지혜 주시도록
*민주
- 브랜드 브랜딩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도록
- 브랜딩 과정에서 묻고 가며 내 율법적인 부분이 깨지는 것 같은데, 계속 묻고 순종하고 가도록
- 브랜딩 진행사항 함께해 주시도록
- 수련회에서 도움을 많이 받고 싶다. 아이디어와 지혜 주시도록
*지현
- 단절되고 차별하는 관계에 대해 하나님 때에 맞게 회복될 수 있도록, 그런 마음 주시도록
- 내가 은혜 받은 처음을 기억하고 그 마음으로 수련회 참석하도록
- 진로 인도함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 뜻대로 진행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