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주 예수의 은혜로
본문: 사도행전 15:1~11
심한섭 목사님
저는 2014년에 욥기말씀 적용으로 교회를 떠나서 정확히 7년만에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었어요. 그동안 우리들교회에서 나오고 다른교회에 가서 사역을 하고 또 결혼을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에 건너가서 공부를하고 지금도 계속 공부중입니다. 저를 모르시는분들도 많이 계실텐데 저희고향 친정집에 와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얻는 구원받은자라는 확신을 가지는것과 동시에 여전히 되었다함이 없는 어떤인생속에서 거룩하게 되어지게 되어지는길을 걸어가야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계속되는 우리인생에 구원의 여정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거룩하게 되어져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가 여전히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우리들교회가 역사를 가졌다고 말할만큼 꽤나 긴 시간의 여정을 지나온 교회가 되었습니다. 휘문고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2006년 부활주일에 저는 오랜방황의 맞침표를 찍는 회개를 하면서 이승민 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청년부 새가족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중고등부 청년부 청년부수련회 스텝 청년부 부목자,목자 분당채플 중고등부 간사 그리고 이제 휘문유년부 전도사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쥬얼리 스쿨이란데가 있었는데요 그 부서의 담당사역자이기도 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젊은 날들을 교회에서 형제같은 지체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수백명의 수천명의 교회성도분들이 마치 한몸인것처럼 우리들교회는 하나가 되어서 움직였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당시에 교회를 섬기던 그 어떤분도 그 어떠한 교회일을 하더라도 노동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전도사로 섬기던시절에도 저에게 교회는 직장이 될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일하러 교회를 다닌것이 아니라 은혜를 참여했기때문에 한번의 예배를 위해서 정말 많은 분들이 자기일처럼 헌신을 했습니다. 휘문고 강당에서 예배드릴때마다 그 더운강당에서 예배를 셋팅하던 우리 임승조집사님을 비롯한 헌신된 많은 집사님들이 계셨습니다. 항상 좁은 방송실 구석에서 누구보다 정말 많은 수고를 했던 지금은 실장님이 되신 전선규 간사님과 우리 방송실스텝 여러분들 더운 강당에서 무거운 스피커와 악기들을 옮기면서 그렇게 음향을 셋팅하고 예배를 섬기던 박종률 집사님과 찬양 팀원들 교회의 수련회를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모든 삶을 헌신했었던 유병철 집사님과 모든 형제자매님들 그리고 각 교회의 아이들에 각 부서의 구원을 위해서 손과 발이가는 믿음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모든 부서의 부장집사님들과 부장집사 선생님들 그리고 스텝분들 저의 유년부의 부장집사님이셨던 박미숙 집사님을 정말 잊어본적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의 구원을 위해 밤을 지새우며 큐티페스티벌과 행사들을 준비하던 섬김을 손길들 사실은 엄청난 인재들이였지만 좁은 사무실에서 알아주는이 하나없이 밤낮으로 수고해주신 큐티인 관계자분들 교회 사무실에서 온갖 어지러운 행정일을 처리해주시던 간사님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름도 빛도없이 교회에 곧곧에서 섬겨주시던 수많은 집사님들 그리고 무엇보다 늘 은혜의 시간마다 저와 함께했던 저의 사랑했던 목원분들.. 여러분 모두 함께 했던 지난 시간을 교회를 떠나있던 7년동안 단한순간도 잊은적이 없습니다. 우리들 모두 한명한명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들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수있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살려고, 살고 싶어서 찾아왔던 교회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경험한 사람들이였습니다. 절망에서 소망을 맞본 사람들이였습니다. 쓸모없는 나의 인생을 사람살리는 인생이 되도록 변화시켜주시는 그 은혜를 주 예수의 은혜를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이였습니다. 우리안에 살아난 흔적과 열매와 간증이 있었습니다.
구원을 목적으로 구속사의 가치관으로 양육하시는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우리는 항상 반복적으로 들었습니다. 다들 기억하실겁니다. 출근할때도 퇴근할때도 밥을 먹을때도 잠을 자기전에도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우리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대로 교회안에서 양육되어 왔습니다. 그안에 담긴 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공동체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수치과 죄패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러한 죄패와 수치를 가지고 어떤사람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격려했고 서로에게 아낌없는 조언과 필요한 처방들을 했지만 공격적이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늘 서로를 위해 울어주었고 서로가 더 힘든일을 자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일이라면 언제나 기꺼이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서로 각자 자기의 죄를 생각하면서 회개했지 상대방을 독사의 자식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차별없이 은혜를 경험한 형제였고 자매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각자의 지체가 되어 담임목사님과 많은 영적지도자분들의 양육을 받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섬김의 흔적과 생명의 간증을 나눈 우리들에게 아직도 여전히 양육이 필요함을 이야기 합니다. 이미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여전히 걸어가야할 성화의 길이 있다는것입니다. 아직 되었다함이 없이 성장하고 자라나야할 이유들을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누구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맞보았으며 목격했으며 경험했습니다. 어느교회보다 많은 간증을 가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난 열매들을 목도한 성도들입니다.
엄청난 자부심과 영적인 자산이 우리마음속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 즉 사도와 장로님들입니다. 이들을 예수님과 함께 살았고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였으며 누구보다 영적인 자부심이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멤버들이였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들조차도 여전히 온전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제자로서 양육되어져가야합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와 여러분 우리들교회가 생각이 났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루살렘 공회의 사도와 장로들뿐아니라 믿음있는 바리새파사람들 바울 바나바 베드로까지 여러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느부류에 속해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부류에 속해있든지 우리는 계속 양육되어지고 믿음안에서 굳건히 자라나기를 성화의 길을 걸어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이미 구원을 경험했고 믿음을 가졌고 이제는 어느정도 교회안에서 신앙의 원리도 깨닫고 목사님이 늘 하시던 설교가 무슨말인지 알겠고 늘 내가 다 아는이야기고 이렇게 생각이 드셔서 아 이집사님은 이러시구나 저 집사님은 이러시구나 이분은 믿음이 있구나 없구나 바로바로 알수 있을것같고 목사로 초원으로 평원으로 섬기시면서 야 이제 이정도면 내가 믿음이 있구나 내가 다된거같다 이런생각이 드실수도 있을것 같은데요. 이미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많은것을 깨닫고 믿음도 있는 내가 왜 여전히 양육을 받아야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그 이유를 설명해주십니다.
첫번째로 여전히 율법과 행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2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1~2절에 보시면 안디옥교회안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내용은 구원에 관한 문제였는데요. 얼마전에 담임목사님께서 이 본문을 이제 두번의 설교로 나누어서
성령의 구원과 성령의 의논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설교를 해주셨기 때문에 자세한 배경설명은 지역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른 구원을 말하는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데요 이들의 요지는 할례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수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구원받은자를 증명해보이는 이정도 삶은 살아야 구원받은거 아닌가 이런 행위의 징표 없이는 구원을 인정할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얘기죠.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들교회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저에게 사실 너무나 많이 들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뻔하고 익숙하게 들리실겁니다. 행위와 은혜가 아주 미묘한 관계에 놓여있어서
우리가 우리 자신도 모르는사이에 행위와 율법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아닐거라도 나는 율법적이지 않다고 나는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수 있겠지만
제가 생각할때 인간인 우리중에 행위와 율법의 굴레를 자유롭게 벗어날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것 같습니다. 행위와 은혜의 미묘한 관계를 제가 두가지정도로 설명해보려 합니다.
1.행위와 은혜를 이해할때 순서가 너무나 중요하다는것입니다.
순서라하면 행위는 은혜 다음이여야 한다는것이죠.
제가이제 교회에서 나와서 다른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아내를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물론 아내는 우리들교회 청년부에 계시던 자매구요 제가 1:1양육교사를 시키던 양육교사 훈련을 받던 자매였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러셨는데 .. 양을 그렇게 꼬셔가지고 결혼을 했습니다. 제 와이프는 참 제가 이제 내려놓지 못하는 외적인 행위와 보여지는것에 대한 내려놓지못하는것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때 결혼할때 누가 저에게 뭐가 제일중요하세요? 하면 제가 늘 하던말이 하얀피부와 오밀조밀하게 예쁘게 생긴 얼굴 그런것을 내려놓을수가 없었습니다. 제 와이프는 참 그런사람이였습니다.
병원에가면 빈혈이 있냐고 왜이렇게 창백하냐고 물어볼정도로 얼굴이 하얗습니다. 그 와이프가 그런것보다 정말 매력적이고 저에게 아름다워 보였던 큰이유는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사람이라면 일평생 함께 살수 있겠다 싶어서 결혼을 하고 살았는데요 결혼을해서 미국에 가니까 가족이나 친지분들이 있는것도 아니고 어딘가에 문제가 있을때 도움을 요청할수있는 사람도 거의없고 언어도 한국말처럼 편하게 안되는 그곳에서 와이프와 둘이만 살면서 수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가자마자 차량도 구입하고 여러가지 문제로 집도 구해야 했었고 삶의 필요한 많은일들 은행계좌,핸드폰개설,마트를가고 이런모든 일 하나하나가 오롯이 저희힘으로 헤쳐나가야하는 그런일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결혼을 해서 살다보니까 하나님만 두려워하는줄 알았던 제 아내가 세상에 두려운게 그렇게 많은겁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염려하고 걱정하고 마음을 졸이고 뭐 하나를 살때도 그냥 싼거하나를 사면서도 수십가지 사이트를 뒤져보고 부작용을 따져보고 후기들을 읽어보고 그래도 또 고민하고 막 결국엔 안사고 샀다가 뭐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염려가 너무 많은겁니다. 다른사람에게 말을 한마디 할 때도 이것저것 생각 하는 게 많아서 쉽게 말을 잘 꺼내지를 못합니다. 아 물론 그런 모습이 참 귀여워 보였고 좋게 보면 사람이 참 신중하구나 막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었겠지만
저에게는 참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두려움은 욕심 때문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기 때문에 이러한 와이프의 행동들이 우리 와이프가 욕심이 많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그것들을 고치기를 바랬습니다. 한편으로 와이프는 고민과 두려움이 많은 반면에 저는 제가 정해놓은 룰이나 어떤 기준에 어긋나는 일이 생기는 꼴을 잘 못 봅니다. 약간 강박적으로 어떤 것에 몰두해서 집착하는 저만의 율법이 있습니다. 저의 율법 안에 사람을 가두어 놓고 그대로만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그런 저의 강박이 있습니다. 물건은 사용하고 나면 그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두는 것 이것이 제 인생의 화두 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제 강박쟁이랑 두려움쟁이가 미국에서 살던 어느 날 와이프는 재밌는 습관이 하나 있는데 부엌에 보면 찬장이 있잖아요? 그 찬장을 다 열고 요리를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간장,식초,고춧가루 모든거를 다 꺼내놓고 한번에 요리를하고 요리가 다 끝나면 정리를 하는 스타일이고 저는 간장을 꺼내서 쓰고 다시 바로 간장을 넣고 찬장을 닫고 설탕을 꺼내서 쓰고 또 다시 바로 넣고 닫고 이런 스타일입니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찬장을 열고 온갖 양념을 꺼내서 요리를 합니다. 그러면 저는 또 졸졸 뒤를 쫓아다니면서 아내가 꺼내 놓은 모든 물건들을 천장에 집어놓고 닫습니다. 저의 이러한 강박이 발동하면 저는 혈기가 올라오고, 그러다 한 번씩 터지면 그 혈기는 아내의 두려움을 마주합니다. 강박쟁이와 두려움쟁이와 마주했을때 어떤일이 벌어지냐면 강박쟁이는 금방 혈기쟁이로 변신하고 두려움쟁이는 울보가 됩니다. 강박쟁이인 저는 끝까지 그 문제의 원인을 캐고 물어서 왜 그렇게 하는지 따지고 알아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두려움쟁이인 아내는 그런 강박쟁이가 질려서 겁이나서 눈물을 흘리며 회피해버리고 맙니다. 저와 아내가 서로가 각자의 두려움과 강박이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행위로 드러나는 어떤 문제가 은혜로 밖에는 해결되지 않는다는것을 간과하고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를 경험시켜주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두려움 많은 아내에게 강박과 혈기로 대할때가 많아서 아내의 구원과 은혜를 더 멀어지게 만들곤 했습니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인 인간에게 율법과 행위라는 문제는 지금 말씀드린 이런 디테일한 아주 구체적인 우리의 삶의 작은 부분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매일매일 걸려 넘어지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사이에 매일매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꼴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 강박이 고쳐지면 예수를 잘 믿는사람이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믿음이 좋은사람이다 중독이 끊어지면,큐티를 매일하면,부지런해지면, 열심히 살면,무언가 행위가 변화되면 다시 말해서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식의 율법과 행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녀 양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착한아이입니다. 숙제를 알아서하면 아주 훌륭한 아이죠. 심지어 노래도 있습니다. 산타할아버지가 알고계십니다 누가 착한앤지 나쁜앤지 그리고 오늘밤에 그 산타할아버지가 다녀가시면 심판이 일어납니다 모든 세상이 착하고 나쁘고 라는 율법과
행위의 굴레안에서 돌아갑니다. 여러분 순서가 잘못 된 것을 기억하셔야합니다. 물론 행위로 올바르게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행위는 은혜의 뒤에 따라옵니다.
우리 잠시 다함께 요한복음 15장 5절을 읽겠습니다.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수 없음이라
행위는 열매입니다 사람이 열매를 맺을수 있는 가장 은혜로운 방식은 포도나무인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그 임재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먼저고 행위는 나중입니다. 이 순서를 자꾸만 거꾸로 하려고 합니다. 죄를 고백할때 우리는 우선적으로 행위로 지은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눔들도 많이 합니다. 음란을 행한사람 도박을 행한사람 외도를 한사람 중독에 빠진사람 혈기와 강박이 충천한 사람 이런 모두가
행위를 고치는것에 집중합니다. 행위가 끊어지면 믿음이 있는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것인것처럼 말합니다. 술 중독을 여자중독을 도박중독을 끊어내면
곧 내 배우자가 밖에 나가서 돈을 착실히 벌어오면 그러면 내 배우자가 고분고분 잘들어주면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행위가 변화되면 그러면 그 사람이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할례를 받으면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할례를 받으면 구원받는게 아니라는것입니다.
오히려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고 행위만 바르고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게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구원은 기본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행위와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은 행위의 죄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은혜의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은혜를 떠난 모든것이 죄였음을 고백할수 있습니다.
제 아내에게 90세가 넘은 할아버지가 계시는데요 일 평생 법조인으로 살아오셨기 때문에 바르고 의로운 삶을 사셨다고 스스로 생각하십니다. 한국에와서 기회가 될 때마다
와이프와 함께 할아버님과 만나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루는 사도행전 3장에 성전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앉은뱅이의 말씀을 들려드리면서 죄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그러자 할아버님께서 해맑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그리고는 웃으셨습니다. 어떻게 평생 법조인으로 바르게 살아온내가 죄인이 될수 있는지
아주 의아해하셨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중에 많은분들이 안믿는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이렇게 생각하실겁니다. 하지만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적용이라는 이름으로 행위구원을 부추기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요즘은 게임안하십니까 요즘은 도박안하세요? 이제 술 끊으셨습니까? 이제 남편에게 잔소리 안합니까?
이제 할례받으셨습니까? 예수가 없이 은혜를 받지 않은사람이 변화된다면 그것보다 무서운것이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남편분께서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셨는데도
술,도박,여자가 모두 끊어지고 모든행위가 올바르게 변했다면 정말 병원에 가볼일입니다. 저는 이 율법의 테두리안에서 행위로 지켜야 할것들을 지키지 못한 아주 대표적인 죄인 입니다.
행위로 지은 죄들이 정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악하고 이기적인 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저는 선교사였으며 신학생이며 목회자인 순간에도 여전히 제 말과 행동으로 거짓과 음란을 일삼는
야곱 같은 죄인입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저를 아시는 많은 분들 중에는 심한섭이 설교를 한다고? 저 죄인이? 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실겁니다. 제 삶의 행위를 생각하면
저는 두말할 나위없이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요즘에도 밤에 잠을 자다가도 제가 지었던 죄들이 생각나서 잠을 설치고 깰대가 있습니다. 내 자신이 어떻게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나님께 선한것이 없어서 저는 지금도 괴로워 합니다. 오직 예수의 은혜때문에 저는 지금 이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 순서를 혼동하시면 안됩니다.
제가 이 설교의 자리에 있기때문에 은혜받은자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제가 은혜받은자 이기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잃으면 곧바로 육체의
율법과 예전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주 예수의 은혜를 잊으면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짓는 공장일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가 은혜를 잊으면 저는 그저 죄를 짓는 강박쟁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예수의 은혜가 아직 제가 죄인되었을때 저를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예수의 은혜가 있어서 오늘도 저는 제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강박적인 제 모습을 고쳐달라고 기도합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 못할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담임목사님과 어머님에게 일평생 배워온것입니다.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고 기도하고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셔서라도 내 옆의 그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것이 없는 마음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께서 내 아내도 내 남편도 모두다 구원해주실줄 믿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여기서 또 해깔리시면 안됩니다.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기도했기
때문에 은혜를 경험한것이 아니라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목숨을 내어놓는 기도를 할수 있는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제 아내를 사랑한다고 해서 제가 주를 사랑하는것은 아닙니다.
제가 악한 행동을 다 끊어낸다고 해서 주를 사랑하는것도 아닙니다. 예수없이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없이도 부부관계가 너무 좋은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것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예수를 사랑하는것 은혜를 사모하는것 그것이 모든 행위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으면 할례받는자의 삶을 소망하게 됩니다.
둘째로 율법은 인과응보를 말합니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하면 복을 받고
무엇을 안하면 저주를 받는다 뭐 우리는 이것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르지만 세상은 이것을 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이러한 기브엔 테이크의 원리로 작동됩니다.
내가 준 만큼 돌려 받는 것 이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입니다. 이러한 논리로 세상은 돌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은 상당히 인과적으로 볼 때
논리적인 일입니다. 율법은 인과관계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설명이 되지만 그런 인간의 논리와 합리성은 은혜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오랜 시간 목자로 섬기고
전도사로 섬기고 이젠 목사까지 되었지만 여전히 제안에 율법을 뛰어넘지 못하는 기복 신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의 아내가 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뭐라 할 때
자기는 나한테 뭘해줬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내를 위해 뭔 가를 또 했을 때 나는 이렇게 까지 해주는데 이런 생색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내가 주었으면
받아야하는 언뜻보면 합리적으로 보여지는 이것이 기복신앙이고 율법입니다. 우리가 예수로부터 받은 은혜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를 위해 무언가 해야 복을
받는거라면 이 예배에 참석한 어느누구도 복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준만큼만 복을 받는거라면 이자리에서 구원을 얻을 만큼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은혜를 경험했으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부부관계 속에서 자녀를 대할 때 율법으로 대하고 기복으로 대하고 그것을 논리와 합리라고 표현하며 들이댑니다.
그렇게 율법의 인과관계를 들이대는 사람이 늘 관계에서 승리합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할말이 없게 만듭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깁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넌 나에게
뭘 해줬지? 니가 해준게 없으니 나도 줄것이 없어 이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율법의 방식입니다. 나는 배우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내 자녀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논리를 가지고 이기려고 들지만 은혜는 절대로 이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어짐으로 승리합니다.
적용질문을 두가지 드리겠습니다.
[적용질문]
타인의 겉으로 보여지는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바라고 있나요?
남편과 아내, 자녀들의 행위의 문제가 고쳐지기만을 바라고 있나요?
아니면 그들이 말씀을 듣고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나요?
믿음이 있지만, 여전히 생색과 기복으로 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스스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인 것을 자랑합니까?
그것이 율법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두번째로 거룩한 성화를 목표로 여전히 양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2.우리가 기쁨 중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5절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바울과 바나와 몇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가는길에 베니게와 사마리에 들러 믿지않는자들이 믿게된 간증을 들려줍니다.
그곳에있는 형제들이 모두 기뻐합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마찬가지로 사도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일
인간이 행한 율법에 관한 일이 아닌 은혜에 관한일을 말합니다. 모든 공동체가 기쁨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나누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재밌는것은 이 바리새파 사람들이 믿는사람들이라는것입니다.
믿는 저와 여러분 중에도 이런 바리새파의 모습이 있다는 말입니다. 1절에 등장한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의 주제가가 할례받지 않으면 이였다면
이 바리새파사람들의 주제가는 마땅하다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게 맞다 저건 틀리다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항상 그것을 따지느라고 공동체안에서의 구원의 기쁨을 함께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깝게 지내던 목사님 한분께 제가 여쭈어 봤습니다. 목사님 저의 어떤점이 율법적입니까? 그랬더니 그 목사님께서 이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신목사님은 늘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당신이 하고싶은 말은 앞뒤안가리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해주셨습니다.
정말 부정할수없는 맞는말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이들이 율법을 행하라고 명령하는것이 마땅하다
외치는 이 타이밍이 지금 예루살렘 공동체가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함께 들으며 기뻐하는 순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공동체의 기쁨은 아랑곳없이 마땅하니라 이게옳다 이건 옳고 저건 틀리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저의 모습과 정말 같았습니다. 예전부터 제가 어떤말을 하고 싶어지면 잘 참지못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렇게 항상 제가 하고싶은말을
입밖으로 꺼내서 말을 해야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늘 제가 옳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들교회에서 사역을 할때 담임목사님께서 저에게 여러가지로
훈련을 양육을 시켜주셨지만 그중에 잠시 목사님을 성대모사해서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어머 얘 한섭아 너는 왜이렇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게 있어 이렇게 얘기한적이 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뭔가 마음속에 저의 감정과 이런것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것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좋을때도 있었는데 낙담이 될때도 있었습니다.
근데 왜 내가 이렇게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게 해주시는것 같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가 너무 옳다고 생각하는것이
있어서 무언가가 틀려보이면 무언가가 잘못되어보이면 마음이 요동치고 울그락불그락하고 오르락내리락하는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앞뒤안가리고
말하고 싶은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양육을 받고도 여전히 바리새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가서 살면서 우리들교회를 떠나서 저의 가정을 꾸리고 나가 살면서 정말 교회가 그립고 여러분이 부러울때가 참 많았습니다. 아내와 함께 둘이 살아가는동안
나는 왜 이렇게 안되지? 나는 왜이렇게 변하질 않지?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되지? 미국에서 단둘이 아내와 살면서 정말 인생의 막다른골목과 같은 시간을 보낸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이제나는 어떻게 해야되지? 저는 아직 양육이 더 필요한데 물어볼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양육을 받고 이곳에서 어떻게 해야될지 물어볼사람이 있고
공동체가 있는 여러분들은 그 복을 충분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박사과정을 하고 이러다 보니까 여기저기서 설교해달라고 부르시는분들이 있어요
양복입고 설교를 하러 가면은 그 교회 스크린에 칼빈신학석사 박사를 양력으로 적어두세요 그러면은 사람들은 제 설교를 들으면서 양복깔끔하게 있고 저사람은참
공부도 많이한 신학도 많이한 훌륭한목사인가보다 생각하고 껌뻑다 속죠 속이는건 쉽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스스로를 너무나도 아니까 제가 어떤사람인지 제가 너무나도
율법이 극복이 안되는 사람인지 제가 잘아니까 다른사람들은 다 속일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수 없다는걸 제가 아니까 세상이 누가 저에게 얘 너는 마음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가 있다
얘 너는 교만하다 얘너는 그렇게 죄를 짓고도 아직도 변하지가 않니, 세상에 저를 그렇게 사랑해주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를 꾸중하고 어떻게 해야된다고 말하고 목사님께서
제가 이제 박사 과정에 합격하고 공부에 대해서 어느정도 인정을 받은것 같이 느껴지고 그럴때가 있었는데요 나도 박사가 됬으니 이정도면 괜찮은거 아닌가 하는 제정신이 아닌때가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목사님과 이메일을 주고받은적이 있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저에게 딱 한마디를 적어주셨어요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환경이 교만하면 장사가 없는거라고
저는 제가 우리들교회에서 양육도 오래받고 그랬기 때문에 저는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이겨낼수 있을거라고 겸손하게 그렇게 말씀으로 잘 이겨낼수 있을거라고 마음속에 장담하는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더라구요. 그때 목사님께서 환경이 교만하면 장사가 없는거라고 얘기를 해주시면서 목사님의 그런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들교회 있었을때 참 당연했던 그런것들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저랑 좀 비슷한 바리새파인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할수 있어요. 옳고 그른거 있어야 하는거 아니냐, 세상에 옳고 그른거 기준 없이 어떡해 살아가느냐
그러면 자기가 하고싶은대로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냐 맞습니다 옳은것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명확히 존재해야합니다. 그래야 윤리가 성립되고 사회도 유지가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애타게 찾고 따지시는 그 옳음 그 옳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옳고 기름의 기준이 내안에 있는 어떤것이 아니라, 나같은 죄인은 값없이 살리신
예수그리스도만이 옳은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바울의 행동도, 예수를 세번부인했던 베드로의 행동도,팥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팔도록 거짓을 일삼은 야곱의 행동도, 며느리와 동침한
유다의 행동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은 행동이였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탐한 다윗의 행동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옳은것이였습니다. 마땅하지 않은자들을 통해서 마땅한일을 하시는분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이제 옳고 그름은 내안에 있지않고
예수의 복음안에만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옳으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가 옳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공동체가 구원의 기쁨으로 즐거워할때 함께 즐거워하고 계십니까?
[적용질문] 나는 공동체의 기쁨에 기꺼이 참여합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왜 그렇습니까? 지금도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마땅한지 아닌지를
내 기준과 생각과 지식으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은혜로 얻은 구원만이 옳은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마지막 세번째로
3.우리가 끊임없이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6절~11절
사도와 장로들이 이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이 구원의 문제를 의논하려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바로 옆에서 목격하고
제자가 되었던 이들이 여전히 이 구원의 문제에 확신이 없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전히 되었다 함이 없이 계속해서 거룩을 향해서 구원과
양육의 길을 걸어가야할 이유입니다. 여기 6절에서~11절에 베드로가 가장 눈에 띄는데요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 게바라 불리던 베드로는
바울에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자기처럼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애제자도 아닌사람이 구원을 잘못이해했다면서 자신에게 처방을 하고 책망을 합니다.
베드로가 인간적으로 자존심이 상했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오늘 바울을 변호합니다. 자기에게 싫은소리 쓴소리 하던 그 바울의 편에 섰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진정한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할수 있었던것은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는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 차별이라고 번역된 헬라단어 디아크리노라는 단어는 철저하게 분리하다 철저하게 분리해서 의심하고 다시한번 의심하고 판단하다는뜻이 있습니다.
즉 차별을 한다는것은 누군가를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분리시키고 판단한다는뜻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여전히 남들과 나를 분리하고 판단합니다. 나는 부목자니까 목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초원이고 평원이니까 일반목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픈목원들과 나를 분리시키고 판단합니다. 저 집사님 너무 아퍼 이런말을 참 자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7절~9절의 내용을 다시한번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구원의 핵심을 잘 설명하는데요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사람의 일을 통해서 된일이 있습니까? 율법을 통해서 육의일을 통해서 된 일이 있습니까? 오늘 베드로가 설명한 그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오래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어 증언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그들이 마음을 깨끗히 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위해 하신일로 다시 말해서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한량없는 주의 은혜로 목자가 되고 부목자가 되고
직분맡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차별을 하십니까 저 집사님이 너무아파, 우리남편 너무이상하다 ,우리아내 너무 교만하다,그래서 나는 아프지 않습니까?
이제 나는 괜찮아진것같습니까?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 순간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제가 살면서 가장 은혜를 받았던 순간은 제가 가장
아픈사람이였을때 였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여러분들 제가 아는 우리들교회는 상처가 별이되는것을 간증하던 교회였습니다.
고난이 복이라고 부르짖던 교회입니다. 우리가 가장 힘들고 가장 아프던 순간에 그때 우리를 받아주시고 찾아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별로 은혜가 되지 않으십니까? 어쩌면 이제는 별로 여러분이 나는 아프고 상처투성이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것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스스로 이제는 꽤 스스로 온전하다고 생각하는건 아닌지 돌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와같이 내가 누군가보다 나은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에 차별이 없다는뜻을 절대로 이해할수 없습니다. 구원에 차별이 없다는말은 하나님께서 나와같이 다른이들의 마음도 깨끗게 하심을 믿는것입니다.
그래서 차별이 없음은 결국 관계의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인간의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때 내가 하나님처럼 안될게 뭐가있어라는 의구심을 품으면서
하나님과 관계가 에덴동산에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내가 저사람보다 못한게 뭐가있어 내가 이런얘기를 듣고 살아야되 내가 저사람한테 이런 취급을
당해야되? 이런 생각들로 부터 모든 관계의 단절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차별이 없는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관계회복으로 그것이 나타납니다.
내가 저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내가 내 남편보다 내가 내 아내보다 자녀보다 동료보다 내가 늘 아프다 말하는 목원보다 더 나아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주예수의 은혜로 내 마음을 그들의 마음보다 먼저 깨끗게 해주셨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는 믿음있는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자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차별하지 않으며 끊어졌던 관계들을 우리는 회복해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네번이나 형제들을 언급합니다. 베드로가 형제들아 라고 부르는 이순간에
제 생각에는 그 형제들을 향한 베드로의 차별없는사랑과 하나님의 차별없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저도 차별없는 구원을 이해하지 못해서 여전히 단절되어 있는 관계들이 있습니다. 가슴이 아프고 항상 마음한곳에 응어리같이 남아있습니다.
저의 율법적인 모습과 옳고그름을 따지는 모습때문에 저에게 상처받은 형제들이 있습니다. 아마 그분들은 제가 지금 본인들의 이야기를 하시는줄 아실줄
압니다. 이자리를 빌어서 제가 정말 옳고그름만을 따지고 율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죄인이였음을 고백합니다. 제가 정말 교만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너무나 불편하고 싫은사람이 있습니까? 상처받고 상처주고 이제 안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보실때 사람되기는 글러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해줬는데 나한테 이따위로 밖에 안해 그렇게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는 죽는날까지
안보기로 작정한 사람이 있습니까? 목장모임을 하실때 아 이 집사님만 안오시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시는분이 계십니까? 이제 그런분들 한명쯤을 조용히
머리속에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셋을 세는동안 머리속에 한분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하나 둘 셋
한명쯤 머리속에 떠올리셨다면 오늘말씀 1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아멘
우리가 차별하고 무시하는 한사람 내가 너무나 무시가되는 그 이방인같다고 여기는 그 한사람 그들도 그 한사람이 우리와 저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적용질문]
내가 차별하고 이방인처럼 여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관계가 단절되었는데도 불구하고,회복하고 싶지 않고 손 내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그 사람보다는 나은것 같습니까?
내가 그 사람을 차별하고 있다고 인정하십니까?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정말 열정적으로 교회를 섬겨왔고 주안에서 생명을 경험했던 사람이였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전의 사랑과
회개의 감정을 잊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믿음이 있지만 사도와 장로들처럼 이제 이것이 맞는것인지 확신이 없는분들도
계실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양육되어져 가야합니다. 이 설교는 여러분에게 하는 설교이기 이전에 저에게 하는 설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보이는것으로 판단하고 남편과 아내의 삶과 행위가 변하기를 바랄뿐 정말 예수를
만나게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은 포기하신분들도 계실겁니다. 예전에 경험했던 은혜는 다 잊은채 이제는 옳고 그름을 따지며 공동체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한분도 계실겁니다. 그런가하면 나는 좀 믿음이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인지 옆에사람들은 자꾸 차별하고 아픈사람이라고
무시하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생각이 없이 지내고 계신분도 계실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지난 7년을 이 한가지 생각으로 버티고 살았습니다.
제가 그리고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들교회 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생명을 경험하고 죽음에서 살아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제는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 육체가 아닌 성령의 일을 주목하고 옳고 그름이 내안에 있는것이 아니라 예수안에 있음을
믿으며 내가 더 아픈사람이였다고 내가 차별했다고 용서를 구하며 먼저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손을 내미는 주 예수의 은혜로 앞으로도
변함없이 든든히 세워져가는 우리들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전히 양육되어져가야하고 거룩을
향한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너무너무 여러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히 제가 죄인인 제가 여러분께 이런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우리가 함께 구원을 경험했던 그 시간을 기억하시고 더 힘차게 공동체의 기쁨에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찬양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목장참석:성화,희준,병희,상현
희준 기도제목
1.한 주간 음란한 영이 틈타지 않도록 지켜주시길
2. 교제 가운데 자꾸만 옳고 그름으로 율법적으로 차별하는 모습이 많습니다. 죄인밖에없는 차별이 없는 공동체에서 판단 하는것들로부터 자유하게 해주세요.
3.제가 무시하고 차별하는 그 한 사람도 나처럼 예수님의 은혜가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임을 기억하고 내가 어떻게 믿는자가 되었는지 떠올리며 차별하지않도록 성령님 함께해주세요.
4.논리와 합리성,겉으로보여지는것들을 뛰어넘어서 나부터가 공동체안에서 함께 즐거워하며 슬퍼하는사람이 될수 있도록
5.우리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각종 차별금지법,평등법,악법들이 통과되지 않도록
6.우리 목장식구들 신교제 신결혼 기름 부어주시도록
7.청년부 큐페, 조별 나눔 가운데 주님 은혜 함께 할 수 있도록
8.아직 나오지 못하는 우리 목장 식구들 모두 공동체의 기쁨 중에 참여 할 수 있도록
9.한 주간 말씀대로 누리며 살 수 있도록
10.일거리가 없어 카드값 때문에 걱정이있는데 소비줄이고 아껴쓸수있도록
병희 기도제목
1. 스스로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세요.
2.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도와주세요.
성화 기도제목
1. 주 예수의 은혜로 받은 은혜를 다시 기억하며 율법, 행위, 차별했던 모습을 회개합니다.
2. 부모학교 잘 섬길 수 있도록
3. 청년부 큐페 은혜 받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