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04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사도행전 2:14-21
할렐루야! 로 인사하고 싶지만 인사가 잘 나오지가 않습니다. 이번 주 중에 주일 설교를 하라는 말씀을 듣고 7월달 큐티책을 펼쳤는데 사도행전인 겁니다. 목사님께서 매주마다 하시는 이 사도행전을 도대체 어떻게 설교해야 되나 근심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오늘 주일 본문을 딱 펼쳤는데 아뿔사 4년 전에 목사님께서 항암을 시작하시기 전에 설교하셨던 성령 충만의 말씀인 겁니다. 우리들 공동체 기념비적인 말씀이지 않습니까? 성도님들이 눈물로 기도했던 설교 말씀인데 도대체 어떻게 설교해야 되나 말씀에 붙잡힌 게 아니라 걱정과 근심에 붙잡힌 채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제 얼굴을 보는 아내가 이러는 겁니다. 여보 사도행전 감당할 수 있겠어? 안쓰럽다. 그러더니 설교 원고는 줄 수 있지? 나 목장 인도해야 돼. 이러는데 정말 아무런 말이 나오지가 않았습니다. 그래도 금식하면서 기도해주겠다는 말에 좀 위로는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나오면서 물어보니까 한 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러면서. 그러다보니 수요 예배 때는 진짜 이렇게 눈물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하나님 우리 공동체에는 힘들고 고통 가운데 계신 성도님들이 참 많은데 저같은 자가 어떻게 말씀을 전해야 될 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게 지금 고난인데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렇게 기도로 보낸 한 주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저의 작은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여러분도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라는 시를 보면 이런 시구가 나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여러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나의 마음을 그에게 준다는 뜻이겠죠. 그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114로 전화를 걸었을 대 친절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멘트가 있죠. 사랑합니다. 고객님. 그런데 이 말에 사랑을 느끼시는 분 계십니까? 아마 계신다면 요즘 정말 힘든 분이겠죠. 하지만 별로 친하지 않은 관계에서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다정히 누구야하고 불러주었을 때는 여러분 어떠셨습니까? 굉장히 친근감과 따뜻함을 느끼게 되죠. 저도 제가 과거에 몸 담았던 공동체에서 알게 된 제 아내가 저에게 형제님 이러지 않고 정환아라고 이렇게 불러줬을 때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아 이 누나가 나를 친하게 생각하나보다. 그런데 결혼하고 한 십년 정도 넘게 살다 보니까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제 이름을 부르면 내가 혹시 뭘 잘못했나? 아내가 나 때문에 열받았나? 싶어서 화들짝 놀라곤 합니다. 사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그렇죠. 제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정환아 내게 축복 더하노라 제가 과거에 고향 교회에 몸 담았을 때 거기서 제 선배, 후배가 작사, 작곡한 찬양인데요. 이 가사에다가 내 이름을 딱 넣어서 부르면 마치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 주신 것 같아서 더 위로가 되고 또 은혜를 받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주님의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은 그분을 향한 사랑과 신뢰의 표현이겠죠. 그렇다면 이 시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공동체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14-16절)
자 오늘 이 본문은 베드로가 했던 첫번째 설교의 도입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입니다. 많은 무리 앞에서 담대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소리를 높입니다. 불과 50여일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여종 앞에서 벌벌 떨면서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 이상 그 베드로가 아닌 겁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베드로를 변화시켰을까요?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해지다 보니까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성령이 나에게 임하시면 더 이상 나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합니다. 지체들이 저마다 다른 곳을 바라 보면서 자기만 알아듣는 방언을 하기 보다는 함께 서서 서로를 붙잡아주죠. 담대함으로 소리를 높여서 내가 알게된 예수를 전하고 그리고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간증합니다. 목장을 할 때에도, 전도를 할 때에도, 봉사를 할 때에도 공동체 지체들과 함께 서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죠. 담임 목사님께서도 설교 때마다 공동체 고백을 통해서 지체들의 삶의 고백과 간증을 함께 나눠주시지 않습니까. 제가 지난주에 영접과 영접을 위한 심방이나, 장례, 결혼, 개업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다녔습니다. 정말 가는 곳곳마다 우리 집사님들께서 소리를 높여 주셨습니다. 그곳에 같이 있던 불신자 식구들을 위해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소개해 주시고 기꺼이 자기의 죄와 수치를 간증해주셨습니다. 모압 땅에서 흉년을 겪다가 공동체로 오셔서 내가 살아난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눠주셨어요. 그렇게 함께 서서 연약한 지체들을 케어하고 또 격려해주시다 보니까 옆에 있던 저로써도 너무 고맙고 은혜가 되었습니다. 정말 말씀에 붙잡힌 게 이런 거구나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다는 그 말씀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가든, 경조사 예배를 드리든 그곳에는 성령의 백성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저는 누군가와 함께 서 있는 것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아까 목사님께서도 말씀해 주셨는데 늘 외딴 섬처럼 혼자만 있으려고 했던 나홀로 신앙이었습니다.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혼자서 그곳에 조용히 들어가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청년들과 여름 아웃 리치를 간 적이 있었는데요. 아내의 말에 따르면 제 아들과 딸이 며칠 동안 저를 찾지를 않았다 하더라고요. 아내가 이러더라고요. 아빠가 여전한 방식으로 자기 방에 칩거하고 있는 줄 알았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제 실상을 더욱 적나라하게 알게 되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이런 제 행동의 이면에는 안일함의 우상이 있었던 겁니다. 이런 저에게 담임 목사님께서는 혼자서 뭘 좀 하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사역하라고 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양육을 받으면서 적용도 해봤지만 이런 제가 잘 바뀌어지지가 않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지난주에 이런 저런 사역을 하면서 공동체에 함께 서서 소리를 높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다 보니까 정말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내 안에 기쁨이 생기는 겁니다. 구원의 일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구나, 지체들과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서 말하는 거구나, 함께 하는 기쁨이 이런 거구나 그제야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여러분 목장도 결코 혼자서 할 수 없자나요. 목원들과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는 곳이 목장이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체들을 위해서 설명해주고 붙들어주고 같이 서 있게 됩니다. 성냥개비 하나는 쉽게 타고 금방 꺼지지만 여러 개의 성냥은 함께 있으면 잘 꺼지지가 않고 또 활활 타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럴 때 꼭 옆에서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본 일부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고 있어요. 그러자 베드로는 15절,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 지금이 아침 9시에 불과한데 어찌 이 사람들이 아침부터 술에 취할 수가 있겠냐는 겁니다. 게다가 이 오순절에는 유대인들이 오전 10시까지 금식을 해야됐기 때문에 절대 그럴 수가 없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조롱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알아듣도록 부드럽고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전 같으면 베드로가 어떻게 했을까요? 예수님이 눈 앞에 계셔도 대제사장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내리치지 않았습니까? 성질 급한 다혈질의 아이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아니라 우리 베드로 형님이, 오빠가 달라졌어요. 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충만하다보면 나의 내면이 변화되고 나의 언어가 달라집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용서하게 되고 미움과 분노의 말이 아니라 사랑과 화해의 말을 하게 되죠. 내가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던 그것을 넘어가게 해 주시죠. 내가 알고 있었던 가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에 대해서 담대하게 소리를 높여서 말하게 됩니다. 혹 조롱을 받더라도 혈기로 맞받아치지 않고 오히려 반대의 영으로 인내하면서 객관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여러분 내가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하다는 것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잇을까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보고 조롱했을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니가 나 예수 믿는 거 보태준 거 있냐, 예수 믿고 좀 잘 살아보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나를 시험 들게 하냐, 이 사탄같은 인간아. 혹시 이렇게 혈기로 반응하십니까? 아니면 이렇게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내가 저 인간하고는 상종을 말아야지. 내가 말을 섞지를 말아야지. 이러면서 정죄와 판단을 넘어서 마음으로 살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어제 오후에 THINK 양육 교사를 인도하는데 어제의 주제도 갈등 충만은 성령 충만이다 이 주제였습니다. 배우자의 외도와 조롱, 부모, 형제의 비방과 구타를 겪으셨던 집사님들의 나눔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정말 관계 고난을 겪는 분들이 참 많으시더라고요. 그런데 그중에 한 분이 이런 나눔을 하셨습니다. 남편이 쓰레기통을 비워주는데 계란 껍데기가 있는 것을 보면서 이 남편 집사님이 쓰레기 좀 제대로 버리라고 치우는 사람 생각도 좀 하라고 핀잔을 하고 아내 집사님에게 잔소리를 했답니다. 그러자 이 집사님이 그거 아들 계란 찜 해주느라고 내가 급해서 버리게 됐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러자 또 이 남편분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뭐냐. 이러면서 계속 잽을 날리니까 이 아내 집사님이 치명적인 펀치 한 방을 날리셨습니다. 당신이나 어머니나 똑같아 순간 이 남편 집사님도 화가 나셔가지고 좀 조용히 하라고 폭발하시고 아내 집사님은 나에게 소리지르지 마라고 서로 난타전을 치르다가 급기야 이 아내 집사님은 쓰레기통을 부셔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의 적용은 앞으로 남편에게 어떤 말을 듣더라도 여보 계란 껍데기를 제대로 못 버려서 미안해요. 다음에는 잘 버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겠다고 적용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 한마디를 못 넘어가는 게 있자나요.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라 이런 일상의 자리에서 내가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서 이 한 마디를 받아내는 겁니다. 이 한마디를 받아내는 게 순교이고 이렇게 내가 죽어질 때 이 화평의 열매가 맺어지는 거죠. 그리고 그 열매는 바로 우리 식구들이 나눠 먹는 겁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주님을 전하거나 내 신앙을 고백하는데 있어서는 참 많이 소심했습니다. 늘 다른 사람의 눈치를 쳐다보곤 했거든요. 좀 사이가 편해지고 친해지면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도 나누고는 했는데 그렇지 않은 관계에서는 늘 입을 다물고는 했습니다. 특히나 불신 친척들과 같이 있을 때는, 특히 여기 크리스찬을 조롱하고 핀잔을 주시는 어르신이 계시다 보니까 더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예수쟁이라고 폄하하고 목회자를 비판하시다 보니까 이 분 앞에서는 제가 믿는 예수님을 전할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술자리에서는 잔을 거절하지 못해서 잔을 받아 마시면서도 이 분들에게 전도해야 되는데 그 생각만 하고 또 말 한마디 꺼내는 게 너무 어렵더라고요. 왜냐하면 이 분들이 세상적으로도 남 부러울 것이 없고 식구들끼리 화기애애하던 모습을 보여주니까 예수가 들어갈 틈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그분들에 비하면 내 삶의 형편은 너무 찌질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거죠. 그러던 어느 날 외할머니께서 위중하셔서 병실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외할머니에게 복음을 전할 수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이 계속 주시는 영적인 부담감이 제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할머니의 임종을 앞둔 상황이라서 친척 어른들이 모두 모여 계시는데 그분들의 눈치만 계속 보다가 결국은 한마디 말조차 하지 못하고 병실을 나오게 됐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그 마지막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버린 거죠. 그리고 그게 할머니와의 이 땅에서 마지막 만남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가 되는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했지만 구원에 대한 안타까움도 없고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지도 않다 보니까 복음을 전하는데는 입이 열리지 않고 소심했던 저였던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조롱받는 게 너무 싫어서 신앙을 감추었었죠.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당시에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았습니다. 주일에는 예배만 드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냥 나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틈틈이 구호 선교 단체에서 봉사하고 섬기던 때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면 됐지 공동체가 뭐 그리 중요하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이 공동체를 무시하는 그 마음이 사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 곁에는 지체가 없고 교제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나의 죄를 나눌 그런 지체가 없었습니다. 외할머니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병실로 갔을 때에도 기도 제목을 부탁할 지체도 없었습니다. 한국 교회와 목회자에 대해서 비판하는 메일을 써서 뿌려대는 객기만 있었지 정작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용기는 없었던 거죠. 3년간 예수님을 그렇게 따라다니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베드로의 그 모습이 바로 저였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께서 저같은 이런 사람을 복음 전하는 사역자로 불러 주신 걸 생각하면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돌아보면 목사가 될 자격이라고는 1조차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 저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나는 공동체 지체들과 함께 서 있습니까? 아니면 혼자 서 있습니까? 누구와 함께 서서 소리 높여 말합니까? 나를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2.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말씀으로 삶을 해석합니다. (16절)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제자들에게 일어난 성령 강림은 말씀이 성취된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게 된 것은 우연히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요엘서의 계시된 말씀이 성취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나에게 일어난 사건은 바로 말씀의 성취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일어난 이 일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응한 사건이죠. 그런데 그렇게 말씀대로 이루어진 사건을 겪으면서도 믿음이 없으면 인간적인 일로만 여겨버립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이 구속사의 사건을 세속사의 사건으로 치부해버리죠. 제자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한 이 모습을 본 몇몇의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술에 취해서 그런다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그렇죠. 말씀이 응한 사건, 말씀대로 되어진 일에 대해서 내 곁에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조롱을 합니다. 재수가 좋아서 그런거 아냐? 그거 다 운이 좋아서 그런 거지 뭐. 우연의 일치 아냐? 그렇게 비웃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 사건은 말씀이 응한 사건입니다. 운이나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말씀이 성취된 사건이죠. 그 일의 결과가 내가 원하고 바랬던 대로 되었든 아니면 그 반대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 일을 보면서 맞아. 말씀대로 되어진 사건이구나 그렇게 우리는 생각하고 마음의 옷깃을 여며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성경으로 해석하고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 곁에 있는 누군가가 나를 보며 조롱하고 비아냥거린다고 할지라도 그 말에 휘둘리지 않게 되는 겁니다. 만일 내가 조롱받는다고 할지라도 구원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말을 오늘 이 베드로처럼 해 줄 수가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설교를 듣고 큐티를 하지만 왜 자꾸 조롱과 부정적인 말에 휘둘리게 될까요?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이 일을 말씀이 응한 사건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 따로, 사건 따로, 말씀 따로, 삶 따로 그렇게 이분법으로 나누어서 생각하기 때문이죠. 내가 말씀대로 해석하고, 말씀대로 이루어진 그 사건으로 내가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면 설령 이 일의 결과가 좀 좋게 나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교만하거나 우쭐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회개의 사건으로 받아들이죠. 반면에 일의 결과가 내가 원했던 것과 완전히 반대로, 거꾸로 나왔다고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예수님을 만나면 감사한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붙으면 회개하고 떨어지면 감사한 것이죠.
베드로가 오늘 이 요엘서를 인용한 것을 봤을 때 이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베드로는 구약의 말씀을 묵상하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내가 평소에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사건이 딱 일어났을 때에도 말씀으로 그걸 해석하고 누군가에게 설명해 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 공동체가 강에서 바다로 나가게 된 것도 그렇죠. 담임 목사님의 이 말씀 묵상이 온 성도의 말씀 묵상으로 이어지고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간증하다 보니까 사명의 지경이 조금씩 넓어지게 된 것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언급했던 제 친척들 가운데는 제 이종 사촌형도 있습니다. 그 사촌 형의 아내가 몇 년 전에 암으로 소천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례식장에 가게 됐는데요. 제가 우리들교회 와서 사역하고 말씀으로 양육을 받다 되니까 저의 가치관도 또 조금씩 달라지다 보면서 이전과는 달리 이 친척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도할 생각만 하면 마음이 눌렸는데 이제는 그분들 앞에서 소리 높여 전도하고, 또 이모가 구원을 받게 된 간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 이모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보살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모가 질병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을 때 제가 이모에게 가서 전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셨거든요. 그렇게 구원을 받으시고 천국에 들어간 이 사건을 불신 친척들 모두가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이모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던 제 기도의 응답이었고, 또 말씀이 이루어진 사건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친척들 앞에서 이 고백과 간증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상주로 앉아있던 그 사촌형이 이러는 겁니다. 그거는 중환자들이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섬망 증세라고, 병이 심각하면 그런 환청과 환시가 나타날 수 있다고 그러면서 의학적인 지식을 막 얘기하는 겁니다. 그 형이 의사였거든요. 그런데 자기 아내도 의사였는데 갑자기 찾아온 이 질병에 손조차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 고난 때문이라도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찾아왔자나요. 그런데 저의 이 간증에 웃으면서 반박하는데 정말 이 교양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아덴 사람이죠. 그런데 그 옆에서 또 심지어 한 친척 형은 이런 말을 합니다. 니가 아무리 여기서 전도를 하려고 해도 안 될 거라고, 지금 니 앞에 계신 외삼촌이 대학 교수님이라고, 얼마나 박식하고 깊이가 있으신데 목사가 아닌 목사 할아버지가 와도 절대 설득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제가 얘기한 복음을 거부하고, 또 이모의 구원 사건을 한낱 신비적인 현상으로 치부하는 이런 말들이 조롱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제가 구원을 위한 마음으로 애통하다 보니까 그 어떤 말에도 불편하거나 서운하지가 않더라고요. 오히려 이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안타깝고 애통이 되었습니다. 그저 제가 전해야 할 이 복음만을 끝까지 거기에서 전했습니다. 그리고 꼭 예수님 믿으시라고 그 말하고 자리를 떴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목사님의 책과 큐티인과 제 간증을 써서 그걸 집집마다 택배로 다 보내드렸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을 우연이나, 아니면 내 열심과 노력으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높이죠. 하지만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일도 말씀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죠.
[적용] 지금 나에게 일어난 사건 가운데 말씀대로 되어진 일은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의 사건을 말씀으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3.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말세에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17-18절)
자 하나님이 말세에 그분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신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말세가 언제입니까? 종말의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간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그 때가 언제일까요? 담임 목사님께서 이 본문을 설교하실 때 그것은 나의 한계를 인식할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이 경험하는 절대치의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을 겪을 때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되죠. 그런데 자기 인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종말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내 인생의 말세에 내 자아가 죽어지고 예수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하나님은 그분의 영을 우리 육체에 부어 주십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죠.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됩니다. 세상 경험이 없고 철이 없는 자녀들이 말씀으로 자기 삶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공동체 아이들은 영아 때부터 엄마랑 같이 큐티를 하죠. 그러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양육을 받습니다.
사실 저희 집에 아이들도 그 수혜자의 반열에 들어갑니다. 제 아들과 딸이 과거에 어린이 집에 다닐 때였는데요. 다섯 살 된 동생이 일곱 살 된 누나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린이집에 자기랑 친한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니까 누나가 이렇게 대구를 했습니다. 야 걔 교회다녀? 동생이 안 다닌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누나가 이러더라고요. 야 예수님 안 믿으면 그거 불신교제야. 불신교제 안돼. 헤어져.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다섯 살 동생이 그걸 듣고 또 끄덕끄덕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옆에서 보는데 기가 찼습니다. 저나 아내가 집에서 아이들에게 신교제, 불신교제란 말을 한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그 말을 교회에서 들은 겁니다. 사실 저도 과거에 불신교제, 신교제란 말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 공동체 아이들이 이렇게 어릴 때부터 구속사의 말씀을 듣고 큐티를 하다보니까 이렇게 예언을 하는 겁니다. 한번은 희귀 질환으로 추병하던 한 아이가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장례 예배를 인도했는데 그때 이 아이 언니인 중학생, 초등학생 자매들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자신의 동생을 보면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요. 하나님께서 동생을 우리 가정에 선물로 보내 주셔서 감사하다는 그 나눔을 했습니다. 이 고백을 들으면서 함께 예배를 드리던 성도님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녀들이 예언하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이렇게 말씀을 듣다 보니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예언을 하는 것이죠.
또한 성령이 임하시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본다라고 하십니다. 다른 말로 비전을 보는 것이죠. 청년 시절의 특징이 뭡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우상으로 삼고 자기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 살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2주 전쯤 제가 교회에서 결혼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신랑, 신부였던 두 청년이 모두 초신자였거든요. 파혼과 낙태의 사건을 겪으면서 자매가 먼저 우리들교회에 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상대방 형제는 교회 홈페이지 상담 게시판에 너무 괴롭고 힘들다면서 글을 남겼습니다. 그 글에 제가 답을 해주면서 연락을 하다가 우리들 공동체에 오게 됐습니다.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어서 술을 의지하고 허무함에 죽으려고 했던 형제, 세상 문화와 쾌락에 빠져 살던 자매가 목장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기초 양육과 일대일도 받게 되었습니다. 초신자인데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큐티 기도회 들어가서 자기 연약함과 기도 제목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지난 날의 죄악을 회개하고 다시금 결혼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한 주 앞두고 이 두 사람의 관계에, 신뢰에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면서 파혼의 위기가 도래했습니다. 하지만 부부 목장과 또 여자 목장의 식구들의 기도와 권면으로 마음을 돌이키고 다시 화해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치렀습니다. 신랑, 신부가 초신자다 보니까 그 날 하객의 대부분이 불신자였습니다. 이 두 사람 덕분에 불신자 분들이 우리들교회 판교 채플에 들어오셔서 결혼 예배를 드렸던 거죠. 이렇게 성령이 임하시면 청년들도 자신이 갖고 있던 욕망과 세상적인 환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이 임하는 삶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청년은 지난주에 휘문에서 세례도 함께 받았습니다.
또한 성령이 임하시면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라고 말씀합니다. 과거만을 자꾸 회상하고 자꾸만 서운하고 아쉬운 게 더해지는 그때에 꿈을 꾼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죠. 그리고 모세는 80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했습니다. 갈렙은 85세에 아낙 자손과 싸우겠다면서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 공동체에도 실버와 골드 목장엔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고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는 집사님들이 많이 계시죠. 나의 인간적인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그 꿈에 사로잡혀서 공동체에서 믿음의 본이 되어주고 계시죠. 하나님은 그렇게 그 분의 영을 모든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십니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차별 않고 계층과 시대를 뛰어 넘어서 모든 종들이 예언하게 하십니다. 날마다 한 말씀으로 모든 세대에게 역사하심으로 자기 삶을 성경을 해석하고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게 하시죠. 그래서 여러분 성령은 말씀의 영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이고 말씀만을 쫓아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 마음의 모든 장벽을 깨뜨립니다. 나의 부족함과 열등감 마저도 뛰어 넘으시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면 이 땅의 자녀 문제, 젊은이 문제, 노인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문제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면 해석이 되고 해결로 나아갈 줄 믿습니다. 우리 공동체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예언과 환상과 꿈이 가득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적용] 나는 어떤 예언과 환상과 꿈을 꾸고 있습니까? 나의 인간적인 예언과 환상과 꿈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예언과 환상과 꿈입니까? 내 안에 깨어져야 할 편견과 고정관념과 마음의 장벽은 무엇입니까?
4.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흑암 속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19-21절)
자 하나님께 하늘에서는 기사를 땅에서는 징조를 베푸십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심판으로 인해서 처절한 흑암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우상으로 삼고 의지하던 해달별이 떨어지는 이 사건이 찾아오면 칠흑같이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죠.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그 밤이 도래한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심판의 시간의 때는 바로 택자에게는 구원의 시간이 되는 거죠. 바로 그 때가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셨죠. 이처럼 내 삶에도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고 붙들 만한 그 어떤 것도 지금 없다고 할지라도 내 절대치의 고난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택자에게는 어떤 환난과 고통의 사건도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이죠. 도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암담한 상황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얻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지금 나에게 해달별이 떨어지고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제 곧 이르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죠.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위탁을 의미합니다. 나의 구원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붙잡고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그렇게 예배와 목장에 붙어가면서 이 말씀 듣는 구조 속에 내가 거할 때 그 말씀이 나를 붙잡아주시는 겁니다. 흑암 중에 있는 나에게 찾아오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죠. 내가 거하고 있는 이 성 중에도 성령의 백성이 많다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게 허락하신 이 구원이 그냥 나에게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내 곁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도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인 것이죠. 바로 이게 복음입니다.
제가 첫번째 대지에서 저의 외할머니 이야기를 했는데요. 임종 전에 계신 외할머니를 만났는데 결국은 복음을 전하지 못한 채로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오고 있던 때였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순간 제 옆에 있는 동생이 한 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119 대원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소천하셔서 영안실에 계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저와 동생, 어머니가 외할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같이 있었을 때, 그 때 아버지께서 저희 집 아파트에서 투신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날 점심 식사도 아버지랑 같이 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믿겨지지가 않는 겁니다. 장례식 첫 날 빈소에서 나와서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이 캄캄한 밤하늘처럼 정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십 수년간 질병으로 건강을 회복하고자 안간힘을 쓰셨는데 이 아버지의 삶과, 또 아버지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던 우리 가정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오로지 왜라는 이 단 한 글자만 박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왜라는 질문을 안고 몇 년을 지냈습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그 어떤 지식으로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은 말씀으로 내 삶과 현실이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외할머니와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게 너무 허무하더라고요. 그리고 한 5년의 시간이 지나서 저는 우리들교회로 오게 됐습니다.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사건을 오픈하고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해석이 안되다보니 그냥 이 사건 자체만 이야기할 뿐 더 이상 그 어떤 나눔이 이어지지가 않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수요예배 때 담임 목사님께서 열왕기서로 유다 왕들의 계보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좋은 부모 나쁜 부모 할 것 없이 예수 믿게 해주신 부모가 최고의 부모라는 이 말씀이 나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순간 제 머릿속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맞아. 아버지가 나를 예수님 믿게 해주었지. 아버지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부르게 되었지. 아버지가 나의 구원의 공로자 맞아. 우리 가정이 아버지로 인해서 주님을 찾게 됐고 구원을 받게 된 거야.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염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수 년간 꼬여 있던 제 마음의 실타래를 그렇게 풀어주셨습니다. 몇 년 동안 왜, 왜라고 항변하던 저에게 주님은 그렇게 찾아오신 거죠. 아버지의 그 사건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 기사를 베푸시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으로 구원을 주시는 사건이라는 걸 알게 하셨습니다. 제가 성령 충만으로 나아가는 사건이 된 거죠. 말씀이 없었다면 그저 피와 불과 연기 속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주저 앉아있었던 저였는데 주님은 이런 저를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붙잡아주시고 그 분의 영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 보다는 언제나 내 이름 석자를 부르면서 그 이름이 불리워지기만을 바랬던 저의 죄악과 완악함과 교만함을 보게 하셨습니다. 저는 내 이름이 사람들에게 불리워지고 내 이름이 영광을 얻기를 바랬습니다. 정정환이라는 이 이름의 우상을 새기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그냥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어서 위선과 외식을 하고 가면을 쓰고 지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게 아니라 인간적으로 충만하다 보니 가장 가까이 있었던 할머니에게조차 복음을 전하지 못했던 거죠. 내 욕심과 자기애로 충만하다 보니 아버지의 아픔조차 공감하지 못한 채 집에서는 저의 편안함과 안위만을 추구했습니다. 내 열심과 자기애로 충만하다 보니 세상 성공을 부르짖고, 스펙을 부르짖고, 힘과 권세와 명예를 부르짖으면서 그저 내 인생의 목적이 잘 먹고 잘 살고 그냥 행복에만 꽂혀있던 겁니다. 그런 저에게 주님은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사건으로 찾아오신 거죠. 그리고 그 암흑 어둠 속에서 기사와 징조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바로 그건 말씀이 있는 공동체를 만나게 하신 겁니다. 매주마다 목사님께서 전해주시는 이 구속사의 복음을 듣게 하심으로 내 삶이 해석되게 하신 거죠. 내 현재의 이유를 아는 것이 진정한 권능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은 이 권능을 깨닫고 누리는 인생으로 저를 견인해 가셨습니다. 매 예배시간마다 그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서 웃고 울으면서 회개하게 됐습니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나의 죄성에 절망하는 날도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 죄를 사하시고, 내 상처를 치유하시고, 싸매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이 성령님의 손길을 경험하다 보니 그 회개의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을 내 삶에 이르게 하신 겁니다. 제가 이걸 깨닫게 되니까 아버지의 자살 사건은 더 이상 재앙의 사건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므로 나와 우리 가족이 구원받는 구원의 사건이 되게 하신 거죠. 그리고 이제는 식구의 갑작스럽고 황망한 죽음, 이해하기 힘든 죽음 앞에서 장례를 치르는 유가족들과 저의 이 약재료를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서서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이 자리에 그리고 영상을 보시는 분들 가운데 고난과 환난 중에 거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비록 오늘 내가 피와 불과 연기 속에 있을지라도 바로 이 날이 나에게 구원이 임하게 되는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약속을 하시는 겁니다.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사건이 나에게 찾아왔을지라도, 지금 내가 그 환경에 있을지라도 오직 내가 할 일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을 불러야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 무엇도 나를 죄와 사망과 중독과 고통에서부터 건져낼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 그리스도인으로써 살아가게 하시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주시는 그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은 구원의 이름이고 생명의 이름이며 소망의 이름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잘 알려진 이런 명품 브랜드가 있자나요. 구찌, 루이비통, 프라다, 샤넬. 이런 메이커들은 그냥 그 이름 하나만을 가지고 장사를 하죠. 그런 이름에 세상 사람들은 열광을 하고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서 그것을 비싼 돈을 들여서 구입을 합니다. 그런데 그 이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지금 내 안에 계십니다. 그럼에도 혹시 요즘 나는 어떤 이름에 열광하고 있습니까? 어떤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까? 사모하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우리가 평생에 불러야 할 이름이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밖에는 없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이 본문을 설교하실 때 암이 발견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암이라는 이 질병으로 인생의 한계와 말세를 겪게 하셨지만 오히려 아픈 성도님들을 체휼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광된 하나님의 신비를 알게 하시고자 이 일을 겪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함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시간 우리 각자가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있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므로 회개로 나가고 하나님께로 돌이킴으로 구원받는 역사가 나와 우리 가정에 있기를 원합니다. 나뿐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식구들도, 또 우리 자녀들에게도 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증거하므로 그들도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을 함께 경험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적용] 나에게 찾아온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 사건은 무엇입니까? 나는 어떤 이름을 사모하고 열광합니까? 나는 지금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까?
기도제목
다인
예배 회복, 급하고 중요한 일 분별하고 목장과 예배 안으로 속히 들어올 수 있는 은혜 내려 주시도록
육체적으로 많이 지치고 힘이 드는데 마음에 평강과 여유를 찾고 처음 그 마음대로 정도를 지키고 내려놓고 퇴근할 수 있도록
양육 마무리까지 잘할 수 있도록
매일 아침 말씀 들으며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도록
현경
문제가 있을 때 마다 말씀으로 붙잡아준 목장 식구들과 [나] 위해서 중보하기
권위에 순종할 수 없는 마음들 어디서부터 왔는지 살펴보고, 말씀에 위로 받고 회개의 은혜 누리도록
앞날에 두려움이 올라오는데 하루 말씀에 살고 이력서 넣는 적용할 수 있도록
예선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영육의 상처들이 수면위로 올라와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듭니다. 모든 죄와 슬픔을 넉넉히 이기시는 주님 위로 받고 은혜 누리며 갈 수 있도록
흑암 속 같은 종말의 사건이 예수는 그리스도 오시기 위해 있어야 하는 사건임을 알고 참 평강 누리도록
약속의 말씀으로 한 주 살 수 있도록
지향
모든 것을 사용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 의지하고 혹시라도 실수로 선택한 것들도 유턴 시켜 온전한 길로 바르게 인도하는 주님 의지할 수 있도록
이 모든 일들이 죽으라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위해서 있어야 하는 일들인 것 알고, 기꺼이 받아 드리고 말씀 붙잡고 한 주 잘 살 수 있도록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손해 나는 것 같은 지금의 상황들도 주님께서 손해 없이 갚아 주실 것들 알고 십자가, 지혜, 타이밍의 담대한 적용할 수 있도록
결혼식이 아니라 결혼예배 되게 하시고 이 모든 사건들 구원을 위한 약재료가 될 수 있도록
보련
멀리서 병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병원 가는 시간 미루지 않고 약속한 시간 잘 지킬 수 있는 힘 주시도록
약은 비타민씨라고 생각하며 감사하게 잘 먹고, 영육의 일반 은총 누릴 수 있도록
깨어진 돌들도 들어다 쓰시는 주님 의지하며 기쁨으로 한주 살 수 있도록
저희 집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고쳐 주시고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주님의 은혜 누리며 모두 교회로 인도될 수 있도록
크리스틴
공허하고 어려운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한 것을 알고 말씀에 위로 받고 나를 잘 돌불 수 있도록
말씀에 뿌리가 견고하게 내려져서 천국백성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주님의 날개 아래 평강 누릴 수 있도록
한국 드라마 보는 것에 죄책감이 있는데 신나고 재미있게 잘 볼 수 있도록
나 스스로 칭찬하고 위로할 수 있도록
지유
목장에 잘 붙어서 적응을 잘 할 수 있도록
구조 안에서 잘들어 갈 수 있도록
힘든 사건들 말씀으로 해석/위로 받고 힘들었던 일들 목장에서 조금씩 나누며 나의 아픔이 약재료가 되도록
은우
프로젝트 하는 것에 지혜 있도록
선한 사업으로 사용되도록 옷깃을 여미고 가도록
주신 금액들이 투명하게 사용되고 꼭 필요한 곳에 사용되도록
돕는 손길 허락하시고 가고 서는 길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도록
붙여 주신 지체들 위해 중보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