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30 성령의 알리심
사도행전 17:23-34
에피쿠로스, 스토아 둘 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기 때문에 이 두 철학은 온통 아덴을 우상 천지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쾌락주의나 경건주의나 예수가 없으면 둘 다 다 육은 악하기 때문에 다 선한 게 없다는 걸 아셔야 돼요. 아무리 쾌락주의고, 아무리 경건주의라 그래도 예수가 없으면 말짱 꽝인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늘 새것을 알고자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제사를 드리지만 아덴 사람들이 추구하며 목말라 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 앎이었어요. 물이 범람하는 홍수에 가장 필요한 것이 마실 물이라고 하죠? 그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했고, 또한 안다고 생각하며 정답이라고 생각했기에 또한 두려워했습니다. 이 알지 못하는 두려움은 결국 종교심이 되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숭배하는 행동으로 이어졌고 이 세계의 지성이라고 불리운 사람들이 한 일은 결국 돌과 신상을 세워 숭배하는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바울이 전쟁터같은 아레오바고에 끌려가 그런 이 사람들 앞에 무슨 메세지를 선포했을까요?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오늘 성령의 알리심을 선포합니다. 오늘은 성령의 알리심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1. 바른 앎을 알게 하십니다. (23절)
어떤 목자님은 지난주 나눔에서 목사님이 새로운 것 추구를 평가절하하는 것 같이 들려서 인정이 잘 안되는데 아마도 담임 목사님은 이런 새로운 학문에 매력을 못 느끼시는 때문일 듯하다고 나눔을 하셨어요. 이분은 인공지능에 굉장히 몰입하고 계시다고.
주전 3세기 헬라의 과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왕으로부터 아주 어려운 문제를 받습니다. 새로 제작한 왕관이 왕에게 제공한 그 순금으로 제작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불순물이 섞였는지를 확인하라는 거예요. 겉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고 무게를 재도 다르지 않고, 그렇다고 다 만들어진 왕관을 다시 녹일수도 없고 너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생각해도 방법이 보이지 않자 머리를 식힐 겸 목욕탕에 갔어요. 물이 가득찬 욕조에 몸을 담그자 물이 넘칩니다. 그때 머릿속에 뭔가 번쩍 떠오른 아르키메데스가 찾았다! 알았다!라고 외치면서 벌거벗은 몸으로 거기로 뛰어나왔다고 그래요. 밀도가 다른 물체의 부피를 물로 잴 수 있다는 원리를 발견한 것이죠. 이 발견의 기쁨이 부끄러움도 다 잊게 했어요. 이 원리로 아르키메데스는 왕이 낸 이 어려운 문제를 풀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늘 새로운 것을 알고자 했던 아덴 사람들이야 말로 이런 발견의 기쁨을 추구했을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기쁨조차 죄로 부패했기에 엉뚱한 방향으로 이끈다는 거예요. 우리가 더 자극적인 죄악을 발견하는데 더 빠르고 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증거입니다. 그래서 늘 대부분은 아덴 사람처럼 이기고 이기려고 알기를 소원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발견하고 기뻐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또 발견하고. 그래서 결국은 내가 직장을 얼마나 다닐 수 있는지, 내 자녀는 대학교 입학할 수 있는지, 내가 장차 결혼을 할 수 있는지, 코로나 백신은 부작용이 없는지 우리는 정말 너무 너무 알고 싶어합니다. 이 땅의 삶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 그리고 죽음 너머를 알고 싶어하고 그 때와 그 시를 너무 알고 싶어해요. 하지만 내일 일을 알지 못해서 두려워하고 또 알기 때문에 두려워해서 뭔가 믿을 만한 우상을 세워놓습니다. 나의 노후를 보장해 줄 것 같은 돈, 우리 아까 집사님이 백 년 노후를 위해서 선물 옵션을 했다자나요. 돈, 자식, 학벌, 외모 등 그런 우상들을 세워놓고 결국은 그 우상들의 통치를 받죠. 아덴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어요. 아덴 사람들을 보면 바른 앎이 없으니까 결국 나무와 돌에 신상을 만들고,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의지하여 숭배하고 절하는 행위를 하는 거예요. 이 똑똑한 아덴 사람들이. 우리와 너무 똑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아레오바고 설교가 이래서 선포됩니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합니다. 뭔가 지식을 가르치뎄다는 의미가 아니예요. 너희를 옭아매는 그 앎이라는 것에서 벗어나는 앎, 깨달음을 알게 하리라 합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에서 평안을 주는 바른 앎을 알게 하리라 합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적용] 여러분의 앎은 두렵게 하는 앎입니까? 편안하게 하는 바른 앎입니까?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죽어라고 위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2.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알리십니다. (24-27절)
24절에 만물을 지으신 천지의 주재이신 성부 하나님의 이 감추어진 경륜은 너무 커서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실 수가 없죠. 하나님은 감추어져 있기에 우리 욕심대로 부릴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26절에 연대를 정하시고 경계를 한정하셔서 이 땅의 여인의 자궁속에 점으로 낮아지심으로 이 땅 속으로 디자인하시면서 성자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어요. 그래서 25절에 성령 하나님이 생령으로 호흡과 생명을 주시고 효과적으로 도우셔서, 삼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알리시는데 그 감추어진 하나님이 결코 멀리 계시지 않지만 인생은 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게 하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무 감추어져 있는데, 바로 옆에 있는데 이게 고난이 없이는 찾아지지 않는 거예요. 옆에 있는데도 몰라요. 오래됐어도 이 말씀이 안들리자나요. 그러니까 기다림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그것도 더듬어 찾는다고 그래요. 내 옆에 하나님이 계신데. 아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에요. 삼위 일체 하나님을 일단 모두 언급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아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소개를 한 거예요. 왜냐하면 이들은 구약도 모르고, 하나님도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아덴의 철학자들인 그들에게 스토아 학파의 사상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25절에서 바울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이렇게 인용을 했는데 이거는 세네카의 말이에요. 신이 인간들을 섬기려 하기 때문에 신은 섬기는 자를 원하지 않는다를 그대로 인용한 거예요. 26절도 세네카의 말과,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런 거 세네카의 말과 거의 같다고 합니다. 바울은 무신론자인 에피쿠로스 학파보다 신의 존재를 인정했던 스토아 학파의 논리를 따라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님 때도 사두개파는 잘 살자나요. 귀족이에요. 그래서 거기는 부활이 없어요. 그런데 바리새파는 경건해요. 그래서 부활을 믿어요. 부활을 믿으면 멋있어 보이자나요. 그런데 예수님 죽일 때는 둘이 한 패가 돼요. 그러니까 우리도 다 진영 논리로 싸우지만 예수를 믿는 거를 핍박하는데는 다 한 패가 되는 거죠. 우리가. 바울은 당대의 가장 유명한 세네카의 명문장들을 이용하면서 아주 제발 좀 들으라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문화적 자긍심에 충만했던 아테네 철학자들과 시민들이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기들보다 더 잘 아는, 세네카를 막 언급하니까 입이 다물어졌어요. 이렇게 히브리어, 헬라어를 잘한다는 사람 앞에서 막 히브리어를 더 잘하는 사람이 얘기하면 이 사람이 입을 다물자나요. 이건 나만 아는 건데. 바울 사도는 그 사람의 눈높이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영혼 구원이 목적이 되면 그런 것이 저절로 되는 게 있어요. 각자 인생이 다르기에 그 인생의 언어를 우리가 공감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귀신들린 여인에게도 공감하지만 우리가 아덴 사람하고도 공감하기 위해서 공부는 어렸을 때부터 좀 해둘 필요가 있기는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고기잡는 어부에게는 어부의 언어로, 또 목동에게는 목동의 언어로, 세리에게는 세리의 언어로. 다 이렇게 제자로 부르셨자나요. 또 농부에게는 농부의 언어로. 또 유대인들에게 관습과 전통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의 언어로 알리셨어요. 우리 인생도 이혼의 언어가 있고 사별의 언어, 도박, 상인, 농사, 학자의 언어가 다 달라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한 분야의 전공 고난이 있고 큐티를 열심히 하다 보니까, 영혼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니까 그 사람, 그 사람에 맞춰서 언어를 좀 쓸 수 있는 그런 힘을 주신 것 같아요. 영혼 구원 때문에 안타까워하니까. 그런데 어떤 분이 제 설교 리플을 달면서 목사님, 사별을 하는 가정의 고통은 어디 가서 얘기를 해야 되나요? 너무 괴로운데 어디를 가도 위로 되는 곳이 없네요. 글쎄 제 설교 밑에다 그렇게 리플을 다셨어요. 제가 사별한 사람들의 언어로 다가가지 못했나봐요. 아니면 이분은 전혀 설교가 안 들릴 수 있죠. 그리고 또 그 설교에서 문자적으로 제가 사별했다는 얘기를 안하면 이렇게 나하고 다르다고 생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 들리는 종류가 참 많자나요. 이 고난이 와도 안 들리시는 분이 있자나요. 말씀이 없어서 안 들리고, 저를 신뢰하지 않아서 안 들리고. 그런 그 글에 답글로 이런 답글이 달렸어요. 저도 남편 사별한지 한달 되었어요.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가는 목장을 통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힘들도 괴로움을 토해낼 수 있는 공동체에 속하시면 좋겠습니다. 따끈따끈한 사별의 언어로 공감을 해주시니까 제가 너무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이렇게 아덴 사람들의 언어로 해도 못 알아들었죠. 하여튼 그 삶 속의 그들의 언어로 알리는 것은 성령의 알리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격분을 잘못 이해하여 함부로 말하고, 낮아지기 보다는 정죄하고, 껴안기 보다는 판단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오해하고, 알린다고 하면서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들의 언어로 말할 때는 낮아짐이 필요하고 자기 부인이 필요한 거예요. 누군가를 공감해주는 거는 낮아짐과 자기 부인이 필요해요. 그냥 말로 안됐어. 위로 받아. 이래서 위로 되는 게 아니예요. 천지를 창조하시고 삶 속에 생명을 불어넣으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역사하시는 게 아니예요. 오늘 가장 중요한 구절은 26절이에요. 구체적으로 오늘, 지금 내 혈통, 내 수명의 연대, 내 거주의 경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알리신다고 말씀하세요. 철학자들이 일생 찾고, 찾고, 또 찾았던 진리, 그것을 오는 내 삶 속에 임한 말씀으로 우리는 그분을 더듬어 찾을 수 있고 만나며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게 가장 중요한 구속사인데요. 성부, 성자, 성령 중에서 예수님의 사역 정말 중요하죠. 왜냐하면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이 이 땅에 예수님이 낮아지심으로 이 땅의 경계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셨다면 이 구속사는 일어날 수가 없는 거자나요. 성령님도 그럼 효과적으로 도와주실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의 경계 속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 예수님의 자기 비하 이거는 굉장한 것이죠. 그런데 죄인인 우리의 특징은 이 모든 경계를 허물고 싶어해요. 시편 16편 6절에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하셨는데도 혈통을 허물고, 연대를 허물고, 경계를 허물어 하나님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벌어 오래 살고 싶어하고, 혈통을 벗어나고 싶어해요. 부모의 자리, 아내의 자리 다 벗어나고 싶어해요. 하나님이 허락한 거주의 경계를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어요. 왜 못 벗어나느냐? 돈이 없어서, 갈 데가 없어서. 그런데 조금만 힘이 생기면 끊임없이 거주의 경계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혈통을 벗어나고자 해요. 바람 피고 돌아다니면서 경계를 허물어요. 내 가정과 경계를 버리고 도박하거나, 경마하면서 전부 다 명분은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을 위해서 그랬다는 거예요. 우리도 주식했다가 내가 사랑하는 아무 아무개를 위하여서 이렇게 주식을 하는 거라고 얘기해요. 나아가서 창조질서인 남자와 여자의 경계도 허물고 싶어하고, 그래서 부부의 경계, 부모 자식간 속상하면 다 가출해서 몇 년 동안 안 와. 다 이거를 경계를 허물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죄성입니다. 아담도 창조주와 피조물인 이 경계, 이것을 허물고 하나님이 되고자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우리가 자녀를 낳는 수고를 하고 땀 흘려 수고하는 수고를 겪게 하셔서 이 죄인의 경계를 알게 하셨어요.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으시고 끊없는 한계 상황과 전쟁으로 아레오바고 같은 이 지옥 같은 삶의 전쟁으로 내가 이 경계를 자각해서 아내의 경계, 남편의 경계, 자녀와 부모의 경계 나아가 창조 질서인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잘 지켜 그 경계에 맞는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이 그 때 자신을 알리시고 더듬어서 찾아서 알게 하시고. 우리의 삶의 언어로 하나님을 알리시는 이 말씀이 기억이 나고. 이 경계 속으로, 거주의 경계, 혈통의 경계 속으로 찾아오신 그 분을 만나는 것이죠. 이것이 성령의 알리심입니다. 아덴 사람에게 이렇게 설교했어요. 바울이.
바울은 지금 아레오바고 광장에 홀로 서 있습니다. 이 도시를 변화시켜 보겠다고 스스로 온 게 아니예요. 그냥 저도 우리 나라, 서울을 변화시켜 보겠다고 한 적이 없어요. 쫓기고 쫓기고 이끌려 와 보니까 그곳이 아레오바고가 됐어요. 전쟁의 언덕이 됐어요. 그런데 내가 그때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수도 없고, 이제 말씀 있으니까 치지도 않고 내게 허락하신 이 자리에서 여전한 방식으로, 애통한 마음으로 전하고 알리니까 이끌려 왔지만 결국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사명의 자리가 된 줄 믿습니다.
야곱도 열 두 아들 중에 평생 요셉 바라기를 했죠. 그런데 결국 주님을 더욱 진하게 만난 유다를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어요. 왜냐하면 유다는 며느리와 동침하고 아들을 낳았어요. 그리고 눈에 보이는 베레스가 가문의 수치로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고 있어요. 언제 봐도 항상 부끄럽습니다. 이 혈통을 벗어나고 싶어요. 저절로 죽을 때까지 유다는 겸손합니다. 우리 오픈이 우리를 겸손케 해서, 우리가 여기가 죄인들이 많아서 우리는 늘 예배 때마다 눈물이 있어요.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세요. 요셉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고, 후에 형들에게 팔려 가서 흉년에 백성까지 구하고, 보디발의 아내의 그런 유혹도 다 거절하고. 그 누가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유다라고 하겠습니까?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성령의 알리심으로 구속사를 알아야 되는데. 요셉이 맨 처음에는 고난이 있어서 너무 가다가, 그 다음에는 계속 너무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만 받고. 유다는 아무리 믿었어도 맨날 손가락질만 받고. 여러분들 우리가 오픈을 했다고 모두가 우러러봅니까? 그냥 아는 사람이나 우러러보지. 우리들교회나. 다른데 가면 여전히 손가락질당하죠. 요셉은 총리 대신이 됐자나요. 올림픽에서 금메달 하나만 따도 평생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우러러보니까 하나님 자리에 갔죠. 요셉이. 그래서 마지막에 경계를 넘었어요. 그 당시 하나님의 대리자인 영적 아버지, 아버지죠. 야곱. 그런 영적 아버지가 장자, 차자를 거꾸로 축복을 했자고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서 아버지 틀렸다!고 성을 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거죠. 요셉이. 마지막에 창세기 48장에 그 얘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영적 경계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정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평생에 입을 다물고 살아요. 우리는 전부 다 요셉이 주인공인 줄 알고 창세기 37장부터 48장까지. 우리는 요셉이 너무 좋자나요. 아무리 유다가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라고 해도 우리는 눈만 뜨면 요셉이 좋아. 부르다가 죽을 이름, 요셉. 요셉만 있다면 경계를 허물고, 그 혈통을 다 벗어나고 싶고, 유다 집에서 탈출하고 싶어. 저 시아버지하고 며느리하고 동침한 이 집안! 나는 싫어! 니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냥 예수를 알면 최고라 이거죠. 구속사가 이렇게 인간의 힘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이 유다를 부르짖는 교회가 진짜 얼마나 모든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교회겠어요. 마태복음 설교를 올리고도 이거 올려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의 고정 관념이 대단하거든요. 늘 기도해주시기를 바래요. 그런데 오늘 아덴 사람들을 위해서 오늘 제가 설교해요. 제발 우리들 교회 아덴, 이 설교를 듣는 아덴 사람들이 오늘 이 설교로 좀 돌아왔음 좋겠는데 안 돌아오더라고. 아덴 사람들이. 이런 마음으로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있어요. 적용 질문이에요.
[적용] 내가 넘고 싶은 경계는 무엇입니까? 내가 지켜야 할 혈통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부모의 자리를 벗어나고 싶습니까? 그곳이 아레오바고 같은 전쟁터입니까? 아니면 편안한 환경이라서 지키고 싶습니까?
3. 우리는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것입니다. (28-29절)
28절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익숙한 헬라 시인의 글을 지금 인용합니다. 세네카를 인용하고 지금 에피메니데스의 작품으로 간주되는 그런, BC 600년경에 활동한 크레다의 시인이죠. 그런데 이제 거기 어떤 말이 들어있냐면 왜냐하면 우리가 당신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오. 라는 시구를 지금 인용했다고 바울이 했자나요. 그런데 그의 소생이라 이 말도 에피메니데스보다 더 유명한 시인 아라투스의 시를 또 인용했어요. 바울이 그 내용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삶 속에서, 그 경계 안에서 그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너무 너무 열심히 지금 복음을 전했어요. 모두 세네카의, 에피메니데스의, 아라투스의 언어를 다 가져와서 우리가 듣기에는 성경 같은데. 그래서 그거 철학을 모르면 이게 지금 어렵다고 생각이 되죠. 이 설교가. 성령께서 아덴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알리시는 내용은 니가 그렇게 경계를 지키고, 혈통의 한계를 잘 지키고 있으면 바로 니가 하나님의 소생,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걸 알게 된다.는 거예요. 경계를 잘 지키고 있으면. 내가 그를 힘입어 살아야 되는,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야 되는 하나님의 자녀, 아들, 딸이라는, 이게 내 신분 의식이 딱 생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알아야 되는 존재가 아니라, 모르더라도 그를 힘입어 살아야 하는 존재기 때문에 뭔가를 더 알고, 또 알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은 우리가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그들의 언어로 알려주는 거예요.
아덴 사람이 지식으로 지금 이렇게 다 위장하고 있지만 두려움과 원망, 슬픔 속에 그렇게 살아가는 거. 인생의 전쟁에서 그러므로 나의 한계를 경험할 때 우리는 내 존재를 깨닫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거를 깨달아야 되는데 아덴 사람이 못 깨닫자나요. 그러니까 복음 전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왜냐하면 자기 한계 상황을 지금 못 깨달으니까. 자기가 발견한 거를 정말 벼룩이가, 저 하늘에서 보면 다 똑같은데 자기가 조금 더 낫다.고. 내가 모닝보다는 벤츠가 낫다.고. 나는 모닝하고는 다르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말씀이 안 들어가는 거예요.
4. 회개한 바울의 삶 자체가 성령의 알리심입니다. (30-34절)
자 바울은 하나님을 못하던 시대에, 30절에, 자신이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걸 모르니까 자기가 어떤, 과거에 하나님 알지 못하던 시대에 자기가 어떤 죄인인지 뼈저리게 아는 사람이었자나요. 그런데도 여기서 이것을 간과했다고 그래요. 그것은 그냥 넘어갔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해 행했던 것들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값을 치르셨다는 거예요. 이것을 아는 사람은 회개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회개란 복음을 듣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그 소식을 들어서 내가 지금 앉아있는 모압 땅에서 공동체와 함께 일어나 그 땅을 떠나는 것을 말해요. 아덴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땅을 떠나라고 하면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들었다면 지금 내가, 바울 자체가 증거라는 거예요. 나도 핍박자요, 포행자였다. 전에는,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 그런데 내가 이제 증거를, 모든 사람들에게는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 내가 바로 그 증인이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지만 알고나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 큰 진노가 임하니까 너희들 그렇게 안 믿다가는 지옥가는 거야. 바울은 생명 내놓고 지금 여기에서, 그동안에 매도 많이 맞고 감옥에도 갇혔는데 아덴이라고 안 그러겠어요? 그런데 그거를 다 불사하고 지금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바울의 아덴 사람들을 향한 이 사랑과 이 전함이 여러분 느껴집니까? 정말 바울 속에 늘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의 괴수인지, 자기가 살인자였는지. 우리는 말씀이 임하면 성령께서 자신의 모습을 알리셔요. 알게 하세요. 내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되면 우리는 진짜 십자가를 붙들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회개한 바울의 삶 자체가 성령의 알리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증거며 우리도 회개의 간증이 명백한 증거가 되어 또 다른 사람에게 회개를 불러 일으키며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사건이 너의 사건, 바울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내 사건, 나를 위해 구주께서 죽으신, 나를 자녀 삼기 위해서 죄인 중의 괴수인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신 사건임을 전하는 이것이 아레오바고 설교의 절정이고 유대인의 회당이나 이방인이나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죽은 자의 부활, 이 바울 설교에 그대로 여기서 이걸 얘기했어요. 바로 죽으심과 부활은 바울도 우리도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것을 알리신 거죠.
부활을 안 믿죠. 그 바리새파는 믿었는데 여기 세상 사람들은 지금 이제 둘 다 다, 에피쿠로스나 스토아나 부활을 안 믿어요. 안 믿는 이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니까 자신들이 안 믿는, 이 시대의 진보고 보수고 안 믿는 사람들은, 둘이는 따로 원수처럼 여기다가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데에는 한마음이 딱 되게 되어있습니다. 누구도 선한 사람이 없어요. 진짜. 복음을 그래서 전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제 부활을 안 믿는데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니까 자기들이 그렇게 돌에다가 신상을 조각해 놓고 섬기면서도, 그렇게 미신을 숭배하면서도 도리어 바울을 완전히 미신같이 보인다 그러면서 조롱을 지금 하죠. 사도 바울을. 아주 조롱을 합니다. 얼마나 조롱이 특별했는지 누가는 신약 다른 곳에 쓰이지 않는 단어로 이 조롱을 표현했어요. 이것이 이 똑똑한 철학자에게서만 나온 조롱은 아니고요. 그 어근이 같은 단어가 쓰인 곳이 딱 한군데 있는데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본 유대인들도 조롱하여 성도들을 새 술에 취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너무 잘 믿는 유대인들도 바울을 조롱했고, 성도들을 조롱했고, 지금 아덴 사람들도 바울을 조롱했자나요.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순간부터 모두에게 조롱 받을 각오를 해야 되는 거죠. 한편, 또 다른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다시 듣겠다고 했자나요. 그런데 이거는 믿기를 거부한다는 데에 대한 완곡한 거부의 표현일 뿐이에요. 왜냐하면 아덴 사람들은 정답이 생기는 순간 두려움에 빠지자나요. 이 정답이라는 걸 알게 돼서 두려움이 임해서 세상의 지성인들이 복음을 맞다고 생각해도 미꾸라지처럼 거부하면서 빠져나가니까, 그러니까 바울이 더 듣겠다고 했는데 그 다음 33절에 떠났다 그랬자나요. 들을 마음이 없다는 거죠. 그게 다 그렇게 나와있어요.
이처럼 믿을 만한 증거를 하나님이 주시는데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믿음이 없으니까 말씀을 전하는 바울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을 만한 증거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과 같아요. 증거를 주니까 알아서 믿으라는 뜻이 아니고요. 믿을 만한 증거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그 증거를 믿을 수 있는 믿음 또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사실 믿어지는 것이죠. 내가 믿어지니까 믿는 거지. 은혜입니다. 아덴 사람들이 못 믿는 것은 글쎄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안되서 그런지. 그래서 믿음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떤가요?
세상 정신과 한바탕 영적 전쟁을 치르고 아레오바고를 떠나는 바울을 몇 사람이 가까이합니다. 그 바울이 증언한 믿을 만한 증거,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까이한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한 사람들이에요. 여기서 이 가까이하다의 헬라어 단어의 어근은 풀이라는 뜻이에요. 성령의 강론 설교에서 바울을 따르는 딱풀 성도를 말했죠? 그때 그 따르다라는 단어처럼 이 가까이하다라는 단어는 풀로 붙인 듯 가까이 붙어서 따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에서 만 아니라 아덴에서도 비록 소수지만 딱풀 성도가 생긴 거예요.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은 없지만 교만한 도시 아덴에도 소수의 성도가 생겼다는 거예요. 디오누시오. 그러니까 수많은 설교를, 철학자들의 강론을 들었지만 이 아덴에서 이 두사람의 남, 녀의 이름이, 이 사람은 지도층이었어요. 디오누시오. 그런데 다마리는요. 이 사람은 귀부인이었는지, 술집여자였는지 모르겠지만 술집 여자였을 확률이 더 많다고도 해요. 그런데 2천년 동안 아덴에서 이름이 기록된 두사람이자나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제정신 가지고 못 믿었을 것 같아. 술집 여자쪽에 무게를 실어요. 귀부인이었으면 안 왔을 것 같아. 그러니까 이게 다 구속사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 설교가 너무 사도행전에서 정점인 설교다. 동의가 되기도, 안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 전해진 독특한 설교인 것은 사실인데, 너무 힘들었을 아덴에서 최선의 설교를 했다고 보여집니다. 오늘 저도 아덴 같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최선을 설교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믿고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아덴은 열매가 하나도 없었어요. 우리들교회는 열매가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할렐루야. 이 마음이 좀 전달이 되십니까? 교회는 회개한 사람들의 삶이 가장 강력한 성령의 알리심의 메시지예요. 이번 목욕탕 큐티 목회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딱풀 같은 디오누시오, 다마리 같은 지체들의 간증이 3일 내내 강력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온라인이지만 랜선을 너머 말씀을 통해 보여주시는 은혜가 흘러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교회가 날마다 말씀으로, 성령의 알리심으로 이 귀한 사명을 이어 가기를 소원합니다. 적용해보세요.
[적용] 알지 못했던 시대에 행했던 죄악은 무엇입니까? 나의 회개한 삶 자체가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성령의 알리심이 되고 있습니까?
기도제목
현경
가정과 직장에서 경계를 지키고 현재의 자리에서 사명 찾도록
학업과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는데 사명을 위해 사용되도록
영육의 건강한 스케줄 만들고 적용해 보도록
회사에서 누명 쓰는 사건이 있었는데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보응해 주시도록
예선
여전한 방식과 말씀으로 하루 잘 살기
하나님의 소생인 것을 알고 경계를 지킬 수 있도록
두려움이 아니라 바른 앎 알고 가도록
햇빛 알러지가 생겨서 병원에 다녀왔는데 약이 잘 들어서 가라앉도록
보련
지치는데 강한 마음 주시고 매일 큐티 하도록
오래도록 일 할 수 있는 직장 허락해 주시도록
다인
언니 순산할 수 있게 영육 지켜주시도록
연봉 협상 중에 있는데 가장 좋은 결정으로 인도해 주시고 손해 나지 않게 해주시도록
크리스틴
직장에서 지혜로운 타임프레임 적용할 수 있도록
일이 끝나면 바로 책상에서 일어나 집으로 올 수 있도록
아버지, 할머니 구원과 오빠의 용서는 주님만 하시도록
마음이 많이 아팠는데 상담 갈 수 있는 곳 찾아보고 주님 위로 받고 회복될 수 있도록
은우
주님을 바르게 알도록 매일 말씀으로 살기
살고 있는 이유가 사명이 있음을 알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