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3 성령의 격분
사도행전 17:16-23
이런 글이 있더라고요.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상대를 죽이고 싶으면 백까지 세라고. 결국 화는 다스려야 하는 감정이며 화가 더해지면 파괴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영어로 읽는 Anger에다가, 위험이라는 단어는 Danger인데 거기 글자 하나가 빠진 단어가 Anger죠.
성령의 신사인 바울이 오늘 아덴에서 격분했다고 해요. 바울은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에서 쫓겨나고 지금 아덴에 와 있습니다.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이 있는데요. 그 상상 속에서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 예술가, 작가를 한 장소에 모아두고 그 이름을 봉숭아 학당이 아니고, 아테네 학당이로 했는데요. 아덴이 바로 이런 곳입니다. 바울은 이 대단한 아덴에서 마음에 격분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썼던 단어가 나왔어요. 바울의 격분은 어떤 것인지 오늘은 성령의 격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1. 영혼을 향한 애타는 관심입니다. (16-17절)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들의 안내로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베뢰아의 잠깐 남겨둔 실라와 디모데에게 빨리 아덴으로 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아덴에서 혼자 사역을 먼저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빨리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다립니다. 여기 쓰인 이런 단어가 간절한 기다림을 말하고 있어요. 그러면 바울은 왜 실라와 디모데를 이렇게 간절히 기다렸을까요? 물론 바울이 독불장군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베뢰아를 위해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 두었지만 이제 아덴에 도착해서 사역을 하려니까 동역자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했던 이유는 실라와 디모데를 사랑해서 양육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바울도 지금 아덴에는 처음 왔자나요. 그런데 로마제국 때 아덴은 세가 많이 기울어서 일류 도시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바울도 혼자 와도 괜찮을거다 그렇게 예상했던 것 같은데 막상 도착하니까 아덴이 생각보다 너무 대단한 거예요. 분화적으로 여전히 헬라 문화 전체를 대표하는 곳임을 직접 보았습니다. 아시아나 마게도냐와는 차원이 다른 아주 문화적 선진 도시였던 것이에요. 따라서 아덴에서의 사역이 앞으로 이어질 아가야 사역을 위해서 실라와 디모데를 훈련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너무 대단하니까 디모데하고 실라를 여기를 보여주고 싶었고, 여기서 어떻게 양육하는지 같이 양육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바울은 동역자를 도구가 아니라 한 사람의 귀한 영혼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이 사역에 보태는 도움도 중요했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한 명의 온전한 사역자로 양육하는 것이었죠. 거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기다림이에요.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고, 함께하며 배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죠. 이런 기다림은 한 영혼을 위한 애타는 관심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이 누군지 알고, 그들을 어떻게 쓸지 아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들이 말씀의 사역자로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에 대해서, 또 하나님의 사역 앞에 어떻게 서 잇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을 것이에요. 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 최고의 목적임을 알기 때문에 그 영혼을 위해 끊임없이 애타는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고 분별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다리라고 그 당시 돌로 치는 유대인들을 사랑한다면서 기다리라는 거 하고 달라요. 이런 말이 여러분들은 참 헷릴 것 같아요. 다 차별하지 말라면서요. 왜 이 사람은 왜 차별하는데요? 그건 차별이 아닙니다. 택자가 지금 아닌 거예요. 이 사람들은.
실라와 디모데를 향한 관심으로 그들을 기다리면서 바울은 아덴을 조사하며 사역을 준비하려고 했을 것이에요. 그래서 도시 곳곳을 살폈는데, 아덴, 그 아테네 하면 아까도 말했듯이 철학과 예술의 고향으로 유명하죠.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이 여기서 다 활동을 했고, 민주주의도 여기서 시작을 했고요. 신화와 문학이 다 아덴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오늘날까지 음악과 미술의 근간을 이루는 이론과 기법들이 모두 이 아덴에서 나왔어요. 인류 문명의 품격을 담당하는 도시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인류 품격의 본고장, 그러니 아덴 사람들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겠죠? 로마의 정복된 이후 세력이 크게 약해졌던 바울 당시에도 이 자부심이 여전했는데요. 이 품격 있는 자부심의 열매는 바울이 딱 보니까 온 도시가 그냥 다 우상 밭, 수상 숲, 우상 뿐이었어요. 우상이 판을 치는 거예요. 너무나 안 믿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암직하고 탐나는 예술품이었지만 그냥 우상신들을 숭배하는, 그냥 온 도시가, 테노펜이라는 역사가는 이 아테네를 한마디로 전부가 하나의 제단이다., 곳곳에 우상을 섬기는 제단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상상이 안되는 그곳을 보고 바울이 마음에 격분했어요. 우리가 분노가 일어나면 다 때려부시고 화내고 그러자나요. 그런데 여기서 격분했다는 말은 단순히 화가 났다는 말이 아니예요. 신약에서는 조금 쓰였는데 구약의 그 헬라어 70인 번역에서 보면 이 격분했다는 거의 하나님에 대해서만 쓰였어요. 그것도 대부분 금송아지 숭배나 백성들의 우상 숭배와 반역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음을 표현할 때 이 말이 쓰였어요. 그래서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너무도 애통한 마음으로 그들의 죄악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로 격분을 했다는 거예요.
마음이 불붙은 바울은 주말에는 회당에서, 주중에는 매일 장터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강론을 했는데 17절의 변론이라는 말은 우리가 2절의 강론이라는 말과 같아요. 이 아덴에서는 들리지가 않는 사람들이 거의예요. 교양이 있자나요. 그렇죠? 안 들려요.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치워달라는 예수님의 자기 부인의 고백처럼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격분은 제자들은 사랑으로 기다리며, 또 아덴의 영혼들을 향한 그 애타는 관심으로, 그래서 격분이니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하여튼 이 격분이라는 단어는 아덴 사람한테만 썼기 때문에 바울이 지금 어떻게 돌로 치는 이고니온이나 빌립보나 이런데서도 안 썼던, 가장 교양 있는 이 아덴에서 격분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부자가 하늘나라 못 간다는 게 진짜 맞습니다. 적용해 보세요.
[적용] 목장에서 한 사람을 양육하기 위해 얼마나 기다려 주나요? 겉으로는 품격의 도시 아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상 밭인 내 안의, 내 가정의 죄악은 무엇입니까?
2. 세상의 정신 앞에 격분해야 합니다. (18-21절)
강론을 하고 복음을 전하러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니까 그 시대의 세상 정신이 바울을 맞이하자나요. 뭔가 하면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딱 나뉘어 졌어요. 다들 이 둘은 아주 라이벌 관계라는 것을 아시죠? 쾌락과 금욕의 라이벌 관계가 서로 옳다고 하면서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니까 딱 그들이 한 패가 되어서 바울과 쟁론을 합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인들이 완전히 적인데 예수님 죽이는데는 한 패가 돼요. 여기도 바울 죽이고자 한 패가 됩니다. 세상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예요. 예나 지금이나 사상과 종교의 목적은 다 행복이예요.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 역시 다 행복이 목적이지만 행복으로 가는 길이 달라요.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추구해요.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탐욕적으로 쾌락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요. 여기도 철학이니까 아주 고차원적인 쾌락을 가르쳐요. 낮은 수준의 욕망, 이런 건 억제하고 유혹을 이겨내서 즐거운 상태가 돼라. 내가 많이 가지는 게 아니라 내 욕심을 버리고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는 것. 이거 우리 사회가 가르치자나요. 왜 이렇게 행복을 추구하냐 하면 이들의 출발이 원자론이고, 유물론, 즉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살아있을 때 행복하자. 그러므로 이 가르침은 고난과 고통을 너무 싫어해요. 그래서 오늘도 무사히의 철학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오늘만 살면 되는 거예요. 이에 비해 스토아 학파는 이성주의자들인데 금욕주의, 경건주의라고도 하기도 하고요. 이 스토아는 기둥이라는 뜻이죠. 기둥에서 거닐면서 이 가르침을 전했다고 해서 스토아 철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이 최고의 판단 기준이고 그래서 냉철한 이성적 생각 끝에 마음의 평화에 도달해서 운명적으로 주어진 일을 더욱 더 능동적으로 해내야 된다. 그러면 다 비슷해 보여요. 그런데 이성을 따라서 생각하면서 모든 걸 충족하고 이 사상이 발전해서 영지주의가 되는데, 아주 아덴의 전체가 신, 거대한 신의 그 이성의 하나가 된다고 해서 신이 많자나요. 범신론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은 한마디로 이성이 왕 노릇하는 슈퍼맨, 또는 슈퍼 히어로가 되기를 추구하는 철학이에요. 그래서 로마의 지도층과 황제들이 이 스토아 철학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체를 부정하니까, 육체는 더러운 거니까, 이성만 있으니까, 물질을 부정하니까, 그래서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자살을 아주 선한 것이라고 가르쳤어요. 자살 또한 이성적으로 심사숙고한 뒤에 행할 수 있는 거예요. 이성이 중요하니까.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이 고통스러울 때는 정당한 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에 실제로 이 스토아 학파를 창설한 제논이 자살을 했어요. 두번째 후계자 클레안테스도 자살을 했어요. 네로의 스승인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노년이 되어 육체적 쇠락이 와서 자살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주장을 했어요. 이 세네카도 자살을 했어요. 그 제자인 네로 황제도 자살을 했습니다. 그러한 논리에 따라 로마의 스토아 학파는 심사숙고한 사람, 이성적으로. 자살을 원할 때면 정맥을 자르는데 능숙한 자를 보내주는 서비스를 제공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지도자들도 이 스토아 학파라서 자살들을 할까요? 예쩐에는 상상도 못한 자살이 너무 쉽게 행해집니다. 우리나라가 예전보다 굉장히 아덴이 됐자나요. 그러니까 이 황제들이 좋아하는 이 자살, 황제들이 좋아하는 동성애. 쾌락의 끝판왕이고 그리고 나중에 딱 육체를 부정하니까 나의 이성과 이런 명성에 맞지 않으면 딱 자살을 하는. 이게 얼마나 매력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추구하는 삶은 결국 이 두 종류의 삶이 적당히 섞인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에피쿠로스 학파처럼 무사안위를 추구하는 부분도 있고, 스토아 학파처럼 군계일학을 추구하는 부분도 있어요. 상황에 맞게 이 두 부분을 잘 조합해서 대처하는 게 인간의 지략이라고 하는 거예요. 결국 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본적인 노력이 되겠습니다. 예수가 없으면 그러니까 다 이렇게 살아가는 거죠. 여러분은 쾌락주의입니까? 금욕주의입니까? 경건주의입니까? 그런데 결국은 겉으로 쾌락, 겉으로 경건해도 뒤로가면 다 똑같다고요. 결국은 다 끝에 가보면 자살을 하든지, 끝에 가면 음란의 문제가 있든지. 인간의 한계인거죠. 그러니까 이런 스토아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가르침을 듣고 어떻게 격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그러니까 이성과 쾌락이 아닌 이 복음을 가지고, 이 현장에 나가서 이 시대정신과 싸워야 되는 게 성령의 격분인 거예요. 이 시대정신, 여기 쾌락과 이런 금욕주의의 정신 앞에 격분하고 신앙을 정립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성령의 격분인 거예요.
그래서 가르치니까 오늘 18절에 바울을 보고 말쟁이라고 그래요. 이거는 바닥에 떨어진 먹이를 정신없이 쪼아 먹는 참새를 보고 만든 표현인데요. 그런 참새처럼 여기 저기서 단편적인 지식을 주워다 짧게꿰어서 그럴듯한 썰을 만들어 풀어 대는 거리의 철학자들을 아주 폄하하는 말인데 그걸 바울에다가 딱 하면서 이 말쟁이가. 바울이 이 비아냥을 몰랐을리가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멈추지 않고 전했어요. 수치와 조롱르 당해도 복음을 전하는 사명의 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의 신사예요. 날마다 장터에 나가서 예수와 부활을 전하고 또 전했어요. 왜냐? 빌립보서 8장 3절 ....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 그 어떤 지식보다도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뛰어난 지식이고 최고의 지식임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성령의 격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덴 사람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시기심에 때리고 가두고 매질하고 그러지 않고 선동도 하지 않으면서 이 새로운 가르침이 이상하지만 그 뜻을 알고 싶네. 굉장히 멋있어 보이죠? 그렇지만 이 아덴 사람이 제일 안 믿었어요. 도리어 항상 때리고 이런 사람들이 진도가 빨라요. 그러니까 자고로 때리는 사람들은 이혼 안해요. 안 때리는 사람들이 이혼해요. 말 한마디 안하고 이렇게 있다가, 교양 있게 있다가 내일 이혼해요. 교양 있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진짜 더 안 변하는 사람이 바로 진짜 아덴 사람이에요.
아레오바고로 끌고 갔어요. 아레이오스 파고스는 예부터 이어진 아테네의 최고 법정인대요. 종교 문화에 대해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레오라는 말은 전쟁이고요, 바고는 언덕이라는 말이에요. 의미상 전쟁의 언덕으로 바울은 이 시대정신 앞에 붙들려 갔어요. 말쟁이라고 해서. 옥에 갇힌 빌립보에서도, 소동이 일어난 데살로니가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강론할 때 늘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믿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 아덴에 현재 지금까지. 아무도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쟁이라고 조롱하는 이 아레오바고, 이 전쟁터에 우리는 붙들려 가야 합니다. 전쟁터로 나가야 합니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어요. 왜냐하면 전쟁을 통해서만 나의 단단한 이 행복을 추구하는 가치관이 깨지기 때문이에요. 이 땅에서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예요.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한 손에는 신문 보면서 우리는 거대한 시대정신 앞에 격분하면서 싸워야 돼요. 그 세력이 너무 너무 강력한 짐승과 용의 세력이라고 계시록 할 때 들었자나요. 싸우다 보니까, 계속 싸우고 싸우고 싸우다 보니까, 내가 싸울 상대가 배우자인줄 알았는데, 자녀인 줄 알았는데, 돈인 줄 알았는데. 이 전쟁을 통해, 바로 내가, 내 자아가, 나의 옳음이, 내 생각이 이 전쟁 가운데 죽어져야 할 대상임을 깨닫고, 바로 내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최고의 원수임을 깨닫고. 우리는 맨날 상대방 보고 뭐라 그래요. 내 죄를 깨달어야 되는데 날마다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상고하면서 판단하고 분별을 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죽어져야만 부활의 승리를 경험할 수가 있는데 날마다 상대방 보고 잘못했대요. 아직도 해결이 안된대요. 어떤 경우에도 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어져야 될 죄인 중의 괴수가 나인데, 자꾸 상대방. 나는 그것만은 용서 못해. 그것만은 안돼. 그게 어디서 이런. 아니 예수님이 십자가 달려 돌아가셨는데. 학교 현장에서, 시장에서, 삶의 현장에서 자녀들에게 그냥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성은 네가 선택하는 거다. 남성과 여성도 네가 선택하는 거야. 생명까지도 네가 선택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이 시대의 현장, 우리나라의 현장이죠. 더 나아가 가정도 이성적으로 선택해서 이혼하고, 또 선택해서 재혼하고, 또 선택해서 이혼하고. 네 삶을 네 이성으로 선택해야 된다는 이 스토아의 이 철학적인 현실 앞에 우리는 삶의 치열한 터전인 이 시장으로 들어가서 변론을 할 때 바울처럼 말쟁이다, 고리타분하다, 배타적이다 조롱을 받을 수 있어야 되는 거죠. 이게 성령의 격분이라는 거예요 애통하면서 네가 죽게 생겼는데 내가 어떻게 교양 있게 얘기를 할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이제 아레오바고에 끌려가서 계속 전쟁을 하다 보니까, 거기서 그 사람들 연구하다 보니까 아덴 사람들이 오직 새것에만 관심을 쏟는 게 보였어요. 아덴 사람들이 너무 똑똑하고 가진 게 많아가지고 어제 들은 철학에도 식상해합니다. 모든 것은 새것만 가치를 두는 거예요. 사실 하나님이 만드신 태양은 역사상 가장 오래 되었어도 우리는 날마다 새롭지 않습니까?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날마다 새로운 거예요. 그래서 불신결혼을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헌 거라고 자꾸 갈아치우니까. 그런데 그들은 너무 똑똑해서 태양까지 가보겠다고 날마다 촌음을 아끼며 연구를 하는 거예요. 우주선을 날리고, 인공위성을 날리고. 그러니까 새로 되는 학설로 말하고 듣기 위하여 촌음을 다투는 거예요. 그렇게 시간을 씁니다. 그래서 이 아덴이 아마 나사 본부고 실리콘 밸리인 거 같아요. 그래서 그곳에 유학 간 자도 많았습니다. 나그네도 외국인도 많았어요. 항상 성경은 오늘 나에게 주시는 얘기로 읽어야 되는 거예요. 늘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박사들만 모여 있는, 소유 세계 지성인들이 모든 이곳이, 여러분들 다 인간이 별 인간이 없어요. 별 인생이 없어요. 그렇게 새 거를 좋아해요. 그래서 그냥 지성인들이 반복을 싫어해요. 반복되는 말을 듣기도 싫어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건 더 싫어하고, 자기는 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들어야 하는데 반복하면 자존심이 딱 상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물어볼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우리 이성훈 목사한테밖에 이걸 더 물어보겠어요? 그래서 그렇게 반복하는 게 싫으냐고 그랬더니 정말 제가 싫었어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같은 말을 두 번 하기가 싫었다고. 그런데 아내가 속을 썩여줘서 좀 달라졌다고 요새.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한다고. 모든 것은 교육은 반복에서부터 시작이 되자나요. 그렇죠? 늘 그러니까 맨날 새로운 얘기만 하니까, 계속 새 걸 더 만들어내야 되니까 새로운 걸 깨우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제 이 지성으로, 탐구만으로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자처럼 보이니까, 아주 너무 그럴듯해 보여요. 이 사람들이 새 거를 좋아하니까 거룩해 보이지만 자기네가 추구하는 게 다를 뿐이지 여자도, 집도, 차도, 학문도 늘 새것에 목말라 있어요. 세상은 그런 사람을 또 부지런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 것이 좋은 것이 연애나 여행이 대표적이에요. 여러분 연애는 10년을 만나도 늘 새 옷을 입고 만나는 것 아시죠? 여행도 늘 새로운 도시에서 눈을 뜹니다. 그런데 10년을, 20년을 연애해도 결혼을 하면 그날부터 헌 옷을 입자나요. 그러니까 이제 딱 싫은 거예요. 헌 옷 입고 만나니까. 그래서 삶은 헌 것이에요. 새것의 한계는 너무 얄팍해요. 새 옷 입고 만나는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너무나 얄팍하게 알 수밖에 없어요. 생각, 사고도 깊을 수가 없습니다. 미인은 3년이 행복하고 요리를 잘하면 30년이 행복한데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만나면 영원히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뭘 택하시겠어요? 이만큼 인생이 짧은 거예요. 그래서 200년된 간장은 상상을 불허하는 맛이라고 하자나요. 여러분은 새 걸 좋아하세요? 헌 걸 좋아하세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은 하지도 마세요. 이렇게. 이 질문조차도 또 뭔 뜻인지를 몰라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나눔 질문만 가지고 하시면 완전히 도덕적인 나눔이에요.
결국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는 하나예요. 생각해보세요. 이게 인간 이해를 해야 되는데, 성적인 성욕과 식욕이 인간의 2대 본능이에요. 그런데 이 성적인 그 기쁨을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은 그걸 끊을 수가 없는데 이 쾌락이 정당하다고 하니까, 육은 다 이게 부정적이고. 그러니까 여긴 아무거나 쏟아부어도 된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에피쿠로스 학파에 표를 주고 싶고. 또한 그게 스토아 학파도 마찬가지인 거죠. 이쪽은 쾌락이고 이쪽은 경건을 가장했지만 사실은 똑 같은 거거든요. 또 죽고 싶은데 자살이 정당하다고 하니까. 옳소이다 하는 거죠. 그러나 바울의 새로운 가르침은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라는 거예요. 고난이 축복이다, 가정은 지킬 만한 최고의 가치다, 생명은 지키고 낳아야 한다. 이렇게 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우리는 계속 변론을 하고 적극적으로 전하고 격분을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너무 이혼하고 싶고 이런데 에피쿠로스 학파의 이론이 얼마나 가뭄의 단비 같습니까? 동성애자들에게 헨리 나우웬의 예수를 안 믿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자꾸 내가 죄를 지으면 진리를 자꾸 왜곡시켜요. 맨 처음에는 카톨릭에만 구원이 있다고 그러더니 본인이 못 끊으니까 그냥 아무나 예수 믿을 수 있다, 천국 갈 수 있다 이렇게 만인 구원론은 모두가 쾌락과 금욕의 원리를 다 같다 붙이니까 그들에게 우상이 되는 거죠. 그런데 너무 이해가 되는 거예요. 나는 돈 많아, 그런 환경에 있어, 맘대로 만날 수 있어, 그런데 내가 그 짜릿한 기쁨을 아는데 내가 왜 끊겠어요. 돈 많고 환경이 되는데. 그걸 뭐라고 할 수가 없어요. 예수 믿기 전에는 그런 걸 끊을 자가 없어요. 자기가 생각하는 우상이 좀 다를 뿐이에요. 이 사람은 게임이고, 여기는 성적 중독이고. 그런데 여기서 가정을 깨도 좋고, 그래서 이렇게 하다가 그 다음엔 내가 또 죽고 싶은데 또 자살을 합리화시켜 주고. 그러니까 다 맞다고 하는 거죠. 이 세상은, 주님이 악하고 음란하다고 그랬어요. 이 세상의 특징이. 그런데 이 세상의 악을 합리화시켜주는 이 정신이 바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이 철학이라는 거예요. 양쪽의 주장이 다르지만 똑 같은 거예요. 행복을, 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은 죽는, 멸망하는 길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 새로운 가르침은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야 하는 가르침인 거예요. 그러니까 악하고 음란한 본성을 거슬러야 하는 가르침에 바울은 격분을 했자나요. 그러니 이거 얼마나 좁은 길이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 하지 말라고 하니까. 우리들교회는 굉장히 아주 그냥 너무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돌로 치고 싶은 사람도 많은 교회예요. 본성을 자꾸 거스르는 가르침을 하니까 이것 때문에 살아나자나요. 살아나니까 한쪽에서 너무 싫은 거죠. 읽으면 읽을수록 아덴 사람들이 이해가 되고, 그리고 내 옆의 사람들이 돈 많고 환경이 되는데 못 끊는 것에 대해서 정죄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그럴 수가 있어요. 지금 봐요. 이 세기의 선남 선녀도 모든 것 갖추고 딱 이혼을 해버리자나요. 그러니 얼마나 이 주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기가 힘든 길이겠냐고. 격분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전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이 지도자 동무들한테 가서 얘기를 할 수가 있겠어요. 주눅이 팍 드는데. 아니 그냥 First Man한테 가서 뭐 하지 말라고 이런 말 어떻게 하겠어요. 그렇죠? 그러니까 보니까 진짜 이 길을 가는 게 진짜 힘든 일이구나. 바울에 대해서 너무 이해가 됩니다. 적용해 보세요.
[적용] 나는 이혼, 낙태, (혼전 관계, 혼전 임신), 동성애 앞에서 말쟁이 행동쟁이가 되어 조롱받으며 격분하고 있습니까? 이성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존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새 차, 새 집, 새 여자, 새 남자, 새 학문, 새 목장 어디에 우상을 삼고 있습니까?
3. 범사에 종교심이 많음을 보고 격분해야 합니다. (22-23절)
이 종교심이 많다고 하면 좀 훌륭해보이자나요. 그런데 여기서 이 종교심은 미신이라는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붙들려 간 바울이 이렇게 딱 아덴 사람을 보니까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 이 얘기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데 넌 참 미신적이야. 이러면 굉장히 기분이 나쁘자나요. 이게 미신적이라는 거예요. 이게 욕이에요. 세상 문헌에서는 종종 쓰이는 단어가 성경에서는 여기 딱 한 번 쓰였어요. 아덴 사람들이 범사에 얼마나 종교심이 많은지 문자적으로는 귀신들을 두려워하는 이런 뜻이에요. 최고의 지성이 귀신들을 그렇게 두려워해요. 범사에 귀신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그 잘난 척하고 대단한 철학자들인, 바로 아덴 사람들인 거예요. 항상 가장 새로운 것만 찾는 그 지적 호기심 안에는 사실 귀신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이 숨어있다는 것을 그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성이 왜 이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서 방황하는 줄 아세요? 성경은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미 수많은 신들을 섬기면서도 그럴듯해 보이는 새로운 신이 등장할 때마다 신상과 제단을 만들어 섬깁니다. 지금 이렇게 언택트 시대가 될지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제단을 섬기면서 그것도 모자라서 어떻게 했어요? 자기들이 미처 알지 못해서 빠뜨린 신이 있을까 두려워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치는 신에게 바치는 제단까지 만들어 두었어요. 미처 몰랐을까 두려운 것이에요. 아는 것이 나를 지켜줄 힘인데 미처 모르면 그 힘이 없는 것이니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탐구하는 거예요. 무서운 열정으로 더 새로운 지식을 찾아서 끝없이 방황합니다. 그런데 거기 정답이 딱 생기면 오히려 두렵습니다. 왜 입니까? 그게 또 정답이 아닐 수 있자나요. 마음이 쉬지를 못해 안식을 못해요. 정말 귀신들을 두려워하는 이 두려움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거 다 잘하는 건 다 귀신이에요. 피아노를 귀신같이 잘 치네 그러지 하나님같이 잘 치네 이러지 않자나요? 이거 오늘 잘 들어야 돼요. 고린도전서 8장 1절에 ....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우리가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은 마음에 바람을 넣어서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영혼에 후까시가 팍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마음이 높아지는 거예요. 지식이 인간에게 가장 고상한 힘이자나요. 그러니까 지식을 가지면 교만해질 수밖에 없어요. 높아지니까 떨어질까봐 두렵습니다. 높아질수록 낮아지기가 무섭습니다. 그래서 많이 알면 알수록 두려움이 더 커집니다. 잃을 게 더 무서워져요. 그러니까 자살을 하는 거예요. 높았다가 내려가면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여기서 예외인 사람이 없습니다. 이 마음이 바로 교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자리는 우리 자리가 아니자나요. 그러니 그 자리에 가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거예요. 대단한 아덴 사람들의 지성 안에 감춰진 이 두려움을 바울이 정확하게 간파를 했어요. 그러니까 저런 범사에 종교심을 가지고 구원받지 못할 그들을 보니까 애통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지옥 얘기를 해줘야 천국을 갈 텐데. 이 지옥 얘기를 해주는 게 격분하는 거자나요. 사랑으로. 애통해야 되는 거예요. 이 예수가 안 들리는 이 똑똑한 사람들 때문에 거룩한 분노가 생겨야 하는데 데살로니가전서 3장 4절에 바울이 아덴에서 데살로니가 있었을 때를 기억하면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 바울의 가르침은 행복과 유토피아가 아니라 성도는 고난받는 일을 위하여 세움 받은 자들이라는 거예요. 고난 당하도록 세워졌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늘 일관되게 장차 받을 환난에 대해서 가르치니까 이들은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고. 그냥 진짜 교회를 다녀도 유대인도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바울은 가르치고 전하고 늘 일관성 있게 구속사를 말하고 욕을 먹는 거예요. 우리는 맨날 앞날이 어디로 가야 되고, 동쪽을 조심하고, 물을 조심하고, 꿈자리가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길로 놓고 가니까 종교심을 가지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해석을 받으니까 평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들었지만 정말 10년 만에 아이가 처음 생기고 우리들교회에서 기도로 힘들게 아이를 가졌어요. 그러고 그냥 또 가져서도 힘든 일이 너무 많았는데, 지금 이제 7개월째 접어들었는데 큐티책을 안본답니다. 왜냐하면 간증이 무서워서. 애기 엄마가. 그러니까 이게 믿음의 실체가 드러났어요. 말도 못하게 믿음의 집안에서 이렇게 지금 정말 다 그랬는데 거기 종교심만 있으니까 결국 기복인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보다 태교에 음악이 더 좋고 좋은 얘기가 하나님보다 더 윗자리에 있으니까 지금 이제 두려움이 몰려오는 거예요. 이 간증을 들으면 이렇게 될까 봐. 그런데 이게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은 거자나요. 너무 그냥 믿음의 깊이가 얄팍한 거예요. 이게 귀신 믿는 거 아니고 뭐겠어요? 하나님을 믿으면 그렇겠습니까? 그 자리에, 하나님 자리에 음악이 가 있고 태교가 가 있고 지금 그러는 거죠. 적용 질문 드립니다.
[적용] 여전한 방식으로 반복하기 지겨운 일은 무엇입니까? 가장 새로운 것을 찾는 대단한 지성 안에 두려움이 숨어 있다는 말이 얼마나 인정됩니까? 알지 못하고 위하는 헛된 우상은 무엇입니까?
기도제목
현경
주님이 날 기다려 주신 것 같이 지체의 구원 위해서 기다리겠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아니라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으로 하루만 살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가족에 구원위해 기도하기
영육의 건강한 스케줄 작성해 보기
예선
할아버지 가시는 날까지 자녀와 손녀의 자리 잘 지키도록
여전한 방식과 말씀으로 하루 잘 살기
사람의 어떠함이 아니라 내 모습에 격분하면서 기도하도록
보련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주 잘 살기
목장에 잘 붙어 가기
직장 인도함 받기
어머니 다리가 아주 많이 아팠었는데 같이 기도해주시고 기도의 응답으로 고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인
사람의 말과 행동에 격분하지 않고 말씀으로 나만 잘 보고 가도록
하나님이 100%인정이 안되지만, 나를 위해서 예비하시고 실수 없으신 주님 보며 왜 나에게 이런 사건을 주셨는지 말씀으로 본질을 볼 수 있도록 (붙회떨감)
언니와 남편 부부 목장 잘 참석하고 아이가 건강하도록 알맞은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은우
예수님 아는 지혜가 가장 귀한 것인 줄 알고 작품과 지식의 우상들 털어내도록
아테네인 척 하는 것이 대박 구리다는 것을 알고 말씀에 한 주 잘 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