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록
성령의 신사. 독불장군이 와닿았다. 새로운 선생님 2명이 왔는데 그 중 영어과 여선생님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온 경우다. 막내동생과 나이가 같더라. 나한테는 석사여야 하고 자격증이 있어야 하고.. 여러가지 요구를 했는데 그 선생님은 학사 출신에 자격증도 없고.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았다. 하는 행동도 요즘 대학생 같은 느낌. 자기가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저랑 같은 부서여서 회식을 했는데 자기 소개하라고 했더니 나한테 질문을 해달라 하고. 그냥 맘에 다 안들었다. 그래서 궁금한게 없다고 그랬다. 나도 참 신사적이지 않았다. 저만의 고리타분한 독불장군같은게 참 많은 거 같다. 속으로 이사람은 아닌 거같은데.. 하는 게 많다. 순종하고 협력하는 센스가 정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이번학기가 처음인데 그 선생님만 어리다고 우쭈쭈해주는 거 같고.
-> 외로웠는데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성향이 너무 안 맞는다. 말도 직설적이고 에너지도 넘치는 스타일이고. 말씀들으면서 나한테 독불장군이라고 하는 건지. 영적인게 없다는 말로 들려서 하나님 너무하시다 생각했다. 나만의 기준이 많아서 이에 맞춰 사는게 참 힘들다. 예를 들면 술을 안마셔서 술자리 가는 것도 안 좋아한다. 어색한 사이에서는 더 하다. 그래서 안 친한 사람들이 오해를 하게 된다. 어디까지 가야하고 어디까지 안해야 하고 사회생활하는 거고 분별하는게 어려운거같다.
->상고함으로 분별하라고 하시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이것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큐티하면서 계속 생각해보는 것을 해야된다고. 때마다 정확한 법과 기준이 있어서 그거대로만 살면 좋겠는데 성경에서도 옥문이 열려도 나가야할 때, 있어야 할때가 있다고 해서 골치가 아프다. 어렵지만 그때그때 주시는 말씀으로 해석하고 가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정
이번주 회사에서 너무 힘들어서 내내 울면서 일했다. 민원이 너무 벅차고 다른 일들도 너무 나한테는 버겁게 느껴졌다. 내가 할일이 아니라는 생색과 억울함이 너무 올라오는데 팀원들은 나의 힘듦을 알아주기는 커녕 민원전화오면 넘기기 바쁜거 같아서 서운했다. 이대로 병가를 한달간 내서 남은 팀원들을 힘들게 해야겠다는 복수심이 타올랐다.이번주 내내스스로를 더 우울함에 빠지게 몰았다가 목요일에는 감정이 폭발해서 팀원들을 내내 굳은 표정으로 대했다. 점심 먹으며힘든일 있냐는 질문에 눈물을 흘렸다. 내 분노를 터뜨리고 지랄 총량을 팀원들 앞에서 채우면서 세상에서의 인정이 나에게는 없애지 못하는 산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사의 너그러운 마음은 하나도 없고 독불장군이 되어 팀 분위기를 흐리고 내 힘듦을 알아달라며 난리를 피웠다. 양교 때 나누니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것도 내가 해야할 일이며 분노 폭발에 대한 책임도 따른다고 조언해주셨다. 폭발한 사건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조언이 정말 인정이 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백프로 선하다고 하시는데 아직 왜 이런 힘듦을 주셨는지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는다. 그래도 회사 동기와의 대화, 목장 나눔을 통해 조금은 해소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또다시 폭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물이 감정표현에 꽤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힘들면 적절히 표현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성은
회사에서 화장실도 잘 못가고 핸드폰확인도 못하고 일을 한다. 팀분위기가 그렇다. 다들 일만 하고 심지어 점심시간에 밥먹고 바로 들어와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나는 점심시간이라도 꽉채워서 휴식을 누리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이런 환경을 주신거 같기도 하다. 그 전 회사에서는 농땡이도 많이 피우고 그랬는데 여기서는 순종적으로 하라는 의미인가 싶기도 하고. 에어팟으로 몰래 큐티를 듣기도 하고. 잠시 누리는 농땡이다. 사람들은 괜찮은데 일이 너무 힘들다. 회사에서 우리 팀은 을 입장이다. 엠디들이 우리한테 의뢰를 하는데 열 몇명의 사람들이 일을 주고..
-> 힘드니까 말씀을 찾게 되고.. 오늘 신사는 너그럽다고 했는데 나자신에게 너그럽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너그럽지 못하는 거 같다.
은미
이번에 신사적인게 성품으로 되지 말씀으로 안된다는 걸 알았던게 저번주에 큐티하면서 여호사밧과 아합이 전쟁을 나가며 아합이 변장하고 나가고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나갔다고 한 내용이 있다. 여호사밧이 위기에 처하니까 소리를 지르고 기품없이 .. 얼마나 웃겼을까 생각이 드는데, 아합은 결국 화살을 맞았다. 근데 전쟁이 너무 치열해서 저녁까지 적군을 상대하다 죽었다고 한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적군을 죽이다가 죽었다. 소리한번 안지르고. 근데 결국 돌아온 사람은 여호사밧이라고 한다. 하나님앞에서 무슨 교양이 있겠는가. 교양없이 살려달라고 소리쳐야 하는데 나는 끝까지 내힘으로 버티느라 소리를 못지르는 아합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양을 내려놓지 못하고 너무 힘들고 불안하고 죽을거같아도 내 앞에 적군을 열심히 쳐낸다. 이번에 학기를 마무리하고 방학을 1주일간하고 다시 학기를 시작했다. 내가 저번 학기때 그런식으로 해왔던 거 같다. 방학을 1주일해도 회복이 안되는 거다. 쉬면서 체력을 쌓으면 플러스 되겠지 했는데 마이너스의 상태에서 회복이 안되었다. 일이 감당이 안되고 책임과 부담감이 많고. 소진이 많이 돼서 악몽도 계속 꾸고. 그러고 나니까 일들이 나에게 참 힘들고 불안했구나 깨달아졌다. 내힘으로 애써서 신사다운 모습이 있었고.. 말씀을 상고하라고 하시는데 이번 학기를 시작하면서부터는 큐티를 많이 하며 소리를 많이 질렀다. 나를 여기 보내시고 왜이렇게 힘드시게 하느냐, 못하겠다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교감선생님께서 신입 교사들을 교육을 하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다. 국가를 만드려면 국민 영토 법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일단 애굽에서 번창하게 해서 국민을 만들고 광야길에서 십계명=볍을 주시고 다음에 땅을 주셨다고 한다. 집이 없으면 얼마나 불안한데 왜 집도절도 없을 때 법을 주셨을까. 생각해보았는데 안정된 상태에서는 법이 안들어갔을거 같다는 생각이 드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이곳에 와서 매일 새로운 일들을 해야하고 누가 도와주지 않고 잘 해야하고 들키면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 가운데 일을 하게 하시는게 이렇게 해야 말씀을 상고하며 의지하고 갈 수 있기때문에 그랬을 거 같다는, 교감선생님의 말을 통해 하나님이 응답해주신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선하신데 불안함을 갖고 가는 일 조차도 선하시구나 인정하게 되었다. 바울도 기뻤으니까 했을텐데 나에게도 기쁨을 달라 소리치고 있는데 교양을 내려놓고 상고하고 소리치고 하라고 우리를 계속 깨시려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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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신사
사도행전 17:10-15
여러가지가 부족해도 믿음만 있으면 된다가 우리들교회 슬로건인데 우리는 아무리 믿음이 좋으면 뭐해, 성품이 있어야지 합니다. 어른들은 살아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너무 당연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부족해도 믿음이 최고입니다. 교회다니면서 이얘기하기가 너무 어려울지 몰랐어요. 다 돌로 칠 태세에요. 요즘 사도바울이 돌로맞는게 너무 체휼이 되는데 그때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무명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베리아의 유대인들은 복음에 대해 매우 신사적이란 표현을 합니다. 베리아의 신사들입니다. 베리아 교회 모습을 묵상합니다.
1.독불장군이 아닙니다.
베레아는 서남쪽으로 80킬로정도 떨어진 소도시로 별로 안중요한 도시에요. 데살로니가 형제들은 바울에 대해 소동이 일자 밤중에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게 합니다. 밤중 여행은 위험한 일이에요. 빌립보에서 당한 일을 다시 당하는 것 보다는 그래도 밤에 나가는게 덜 위험하겠다 생각했죠. 야반도주는 비겁해 보일 수 있지만 성령의 전략에 따라 수치를 무릅쓰고 탈출합니다. 베레아에 도착한 바울이 여전한 방식으로 유대인의 회당으로 들어가는 거를 볼때 유대인을 피하는 게 바울의 전략이 아님을 알 수 있죠. 전도를 멈추지 않았어요. 바울은 다소사람이었습니다. 환상을 보기까지는 아시아 전도만 생각하고 유럽은 생각을 못했어요. 마게도냐는 순종해서 왔지만 아는게 없어요. 그것을 인정을 하고 시키는대로 하는걸 보게됩니다. 항상 바울이 주도적이라 이런 모습이 생소하기도 해요.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형제들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게 합니다. 야반도주와 베레아에 순종하는 바울을 보게 되면서 우리는 바울의 태도가 이해가 안됩니다. 어떤분은 바울이 유대인과 얼마나 성격이 안좋으면 가는 곳마다 핍박을 당하냐 합니다. 구속사와 세속사의 차이인데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이에요. 바나바와도 심히 다퉜는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는가. 바울이 바나바를 순종해서 끝까지 같이 가려 했어요. 떠난 사람은 바나바이지 바울이 아니에요. 똑같아 보이지만 복음의 본질 비본질을 잘 구별해야 신사입니다. 즉시 순종합니다. 결코 독불장군처럼 하지 않았어요. 늘 다른사람과 협력했습니다. 딱풀이라고 자기들끼리만 붙어있는게 아니죠. 주님께 딱 붙어있는 성도는 주님의 뜻대로 이타적인 협력을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에게 배운거죠. 바울은 동역자를 중시여겨요. 데살로니가, 베레아 성도들은 이것을 알고 알아서 주도적으로 보냈어요. 이렇게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가 있었기에 바울이 어딜가던 여전한 방식으로 전도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적용)
구원을 빙자하여 매사에 독불장군인가, 순종과 협력하는 센스와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에서도 남녀간에도 센스가 있으면 좋겠어요. 어제 어떤 아들님에게 편지를 받았어요. 저희 어머니는 3대째 크리스찬 집안으로 믿음이 확고하십니다. 하지만 교회에 매달려 있고 집안일은 신경을 안쓰세요. 이런 사연이 길게 왔어요. 이 집사님도 이해가 되고 남편과 아들도 이해가 되는데요, 아들님께서 유학생이라 온 동안에 온라인으로 드린대요. 날마다 설교를 듣는데 엄마가 이해가 안되는거죠. 집사님도 이걸 뭐라고 하는 식구들에게 센스있게 독불장군 되지 말기를 바라요. 이게 끝이 없어요.
2.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봅니다.
너그럽다=신사적이라 그랬어요. 성경의 너그럽다 보다는 신사가 나은거 같더라고요. 원뜻으로는 잘났다는 뜻입니다. 고정관념에는 덜 사로잡히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더 열려있는 태도에요. 사실은 세상적으로 보면 고품격인간인데 모든걸 다 갖춘 사람중 대표가 헬린아우어가 아닐까 했어요. 네덜란드 출신의 석학이고 카톨릭 신자고 탁월한 영성을 갖추고 글도 잘쓰고 말도 잘하고.. 자기의 아픔을 솔직히 노출시키고 공감대 형성에 뛰어났어요. 명문대 예일, 하버드대 교수라는 것도 뛰어난데 죽기전에는 아픈 공동체에서 사니까 신사중 신사가 아니겠어요. 베레아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봤고 그 말씀이 진짜 그런지 날마다 꼼꼼히 묵상했기에 데살로니아보다 더 너그럽고 고품격 신사요, 숙녀다웠다 하는 거에요. 베레아 사람들이 더 신사적이기에 말씀을 간절히 받았다는게 아니에요. 간절함과 사모함 때문에 더 신사적이라는 말이죠. 출발점이 다른거에요. 구속사적 가치관에서 잘남의 기준과 출발점은 오직 말씀 묵상에 있다는 거죠. 어떤것도 상관없이 말씀을 받으면 그것이 정말 잘난 인생, 신사에요. 날마다 성경을 상고함으로=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반복하는, 구별하여서 판결정하다라는 동사가 합쳐진 단어에요. 판사가 재판을 위해 증거물을 꼼꼼히 볼때 이 단어를 썼어요. 말씀에 비추어 내 삶의 티를 골라낸다는 뜻이에요. 조사하고 검토하고 먹고 씹고.. 행하는데 까지 가는 거에요. 이런 인생이 진짜 잘난 인생, 너그러운 인생이라는 거죠. 베레아 사람들이 바울의 강론을 듣고 진짜 하나님의 인생인가 분별하여서 판단했겠어요. 유대인들이 소동케하니까 하나님의 말을 삶의 현장으로 가져가서 유대인들의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는 잣대로 사용했다는 거에요.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말씀을 붙들고 고민했다는 것이죠. 그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라고 번역한게 진짜인가이뜻이에요. 수용성과 비판적 마음을 겸비했다는 거에요. 구약 성경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거죠. 큐티의 결론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거에요. 여자친구가 아닌 예수가요. 그것을 발견하려고 성경을 꼼꼼히 봐요. 사심없이 정밀히 상고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어요. 그래서 베레아 사람들이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에서 꼼꼼히 조사하고 발견하고 씹어먹었기에 진짜라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대요. 열매가 많은 거죠. 간절함으로 날마다 상고했기에.. 반드시 분별함, 상고함이 따라가야해요. 성경이 구속사적으로 선포돼서 성경을 상고해야해요. 과연 그러한가 해서 큐티를 통해 날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다 이걸 밝혀내려고 큐티하고 예배오고 목장하는 거에요. 이단들은 교주를 묵상하잖아요. 이걸 여러분들이 베레아 사람처럼 간절히 상고하는 거에요. 어떻게 분별하고 판단한다고요? 삶의 현장으로 말씀을 가져오는 거에요. 내게주시는 음성을 삶에서 들어보지 않으면 분별할 수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말이에요. 항상 우리는 우리들교회 얘기를 성경에서 하는 거 같아요.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보고듣고 해서는 안되잖아요. 주일, 수요, 목장, 큐티, 양육도 다 말씀이기에 간절함와 갈급함으로 말씀을 상고해보기 좋은 환경이에요. 목장에 주일예배 안 듣고 들어오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책도 생각을 해야될 책을 읽으면 유익이 많아요. 제 설교를 들리는 사람도 일주일에 몇번씩 들어요. 안들리는 사람에겐 더욱 상고하고 분별하며 판단하기 위해 날마다 들어보길 원해요. 이렇게 생각해보는 훈련을 어디에서 해보겠어요. 동창회 동아리 다 없어요. 굉장한 거에요. 베레아 성도들이. 남미에서는 몇시간씩 예배를 드리고 미국에서도 설교가 한시간,, 베레아 교회들을 보며 설교가 긴거 가지고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요새는 전부 녹음하고 사진찍고 그래서 걸러가며 하니 여러분들은 손해가 막심해요. 이렇게 베레아처럼 하니까 믿는 사람이 많고 헬라의 귀부인 엘리트가 적지 않다고 해요. 우리들 교회와 딱맞죠. 그래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책이 있잖아요. 베레아서는 없어요. 너무 잘해서 편지 안썼어요.
그러면 대체 베레아 사람들은 간절함을 가지고 묵상할 수 있었을까요. 베레아가 1위 도시거든요. 역사적으로는 알렉산더 대왕 시절에는 2번째로 큰 도시었는데 168년에 로마가 마게도냐 지역을 정복할 때 가장 먼저 항복한. 그다음부터는 너무나 뒤쳐지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 경부고속도로가 붙어야 뭐든 잘되는데 베레아는 아주 도로에서 떨어져있는거에요. 김부선이 강남을 통과하려 하다가 그걸 못해서 굉장히 속상해하잖아요. 똑같아요. 베레아는 시골 그런데에요. 미국 캔터키같은 곳은 너무 경건하고 너그럽고 믿음이 좋다는 거에요. 똑같은 거 같아요. 비교급을 써서 더 너그럽다 합니다. 이 고난이 구속사 말씀을 들을 때 간절함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어요. 늘 남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권위 의식없이 객관적으로 듣게 된거에요. 간절한 맘으로 말씀을 듣는 사람이 고품격인거에요. 우리들교회 청년들이 결혼을 해서 매력이 있기에 이혼안하고 잘산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싸워도 말씀을 받아요. 그래서 성품이 아니고 믿음인거에요. 믿음이 있으니 살아요, 성품은 한계가 있어요. 여러 고난을 겪으며 이땅의 소망이 하나씩 끊어질 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하나씩 생겨요. 신사적이고 너그럽다는 것은 고정관념이 없는 거에요. 좋은게 좋은게 아니라 상고함과 분별, 판단이 따라야해요. 착한 사람은 매력이 없어요. 열심인 사람도요. 상고함으로 분별함과 판단이 늘 따라야 해요. 나는 몰랐어 하는 사람 매력없어요
적용)
신사적이라 말씀을 찾는가 말씀을 찾다보니 신사적으로 됐는가
고난 중에 하나님만 간절히 찾는가, 오늘도 무사히만 빌며 하나님을 찾습니까=미꾸라지
헬린아우에는 우리가 모두 부러워하죠. 그런데 소극적이고 비공식적 동성애자였어요. 내적인 갈등을 겪는 것을 외적인 선행으로 극복해갔습니다. 동성애 옹호론자였어요. 카톨릭만 구원이 있다 하다가 막판에는 만인 구원설을 외치며 내리막길을 갔어요. 이단이죠. 믿든 안믿든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거에요. 동성애를 하면 자꾸 바꿔요. 합리화 시켜야 하니까. 이겨내야할 십자가인 동성애적 성향과 씨름을 해야 했는데 하버드에서는 동성애 학생들을 엄하게 대하며 악의 존재라 얘기를 했어요. 복잡다난해요. 나우엔이 가장 절망할 때가 우정이 지속되지 못할때. 우정으로 포장된 동성애로 봐도 무방할 것 같아요. 친구들끼리 너무 관계에 천착하면 동성애 아닌가 의심을 해봐도 돼요. 너무 집착을 했다는 거죠.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데 말과 글과 너무 잘쓰고 잘할 수 있지만 삶하고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를 수 있어요. 동성애를 평생 오픈하지 못하고,, 이게 고난이라 글을 잘썼나 생각이 드는데. 주님에 의해 치유되었어야 하는데 일생에 두고 끼고 하다 상처받는 거죠. 그에 비해 죄와 벌을 쓴 작가는 사형받기 직전에 구출됐잖아요. 한계 상황을 겪었어요. 날마다 처절하게 가난해서 작가가 됐다고 하는 거죠. 이런거는 좀 읽으셔야 해요. 윤여정씨도 생계형 배우라 간절해서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었대요. 신사적으로 간절히 말씀을 상고하는 게 뭔가. 예수믿고 천국가는게 최고의 고품격 인생이라는 걸 인정하는게 구속사적 가치관이에요. 말씀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야 해요. 헬린나오웬은 고난이 없는거죠. 어렸을 때부터 동성애자인데 공부도 잘하고 어렸을 때부터 헌신했어요. 하버드 예일대 교수에요. 신학교수인데 삶에서 말씀이 진짜임을 증명하지 못했어요. 믿음이냐 성품이냐 분별을 해야해요. 이런 얘기를 하면 다 돌로 때리는 거죠. 그래서 바울을 돌로 치고 죽이려고 하는 거죠
적용)
헬린아오웨와 도프도옙스키 중 누가 말씀을 상고하여 분별하고 판단한 신사라고 생각을 하나요.
생각하는 훈련이 고품격으로 바꿔주고 말도 센스있게 하게 되고 믿음으로 하는 말은 금쟁반에 옥구슬인거에요. 사람이 매력이 있어요. 띵크하게 해주는데 이 세상에서 이렇게 생각을 해주게 하는 데는 없어요...... 아니요..안맞아요..
3. 사명의 길을 멈추지 않아요.
베레아의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바울의 구속사적 강론을 듣고 믿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니까 거기서 소동을 일으켰던 유대인들이 베레아까지 따라오는 거에요. 시기와 질투와 열등감으로. 데살로니가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소동을 일으키고 반역을 일으킨다는 프레임을 씌우는 거죠. 바울이 여기서 견뎠던 것은 자기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르심에 순종한다고 하는 거에요. 복음을 전할지라도 할 말이 없고,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사명을 받았노라. 성령의 신사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게 아니라 주님께서 불러주신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인거죠. 사명의 자리를 비비고 닦고 새롭게 하면 의지의 성화가 일어나요. 사명때문에 와서 사명때문에 살다가 사명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거에요. 목자부목자를 줬을 때 너무 싫고 믿음도 없는데 그 자리에서 상고하고 내원이 아니고 말씀을 듣다보면 하나님의 원으로 갈 수 있는 시스템이에요. 옛날에는 열녀회 청년들모임이 있으면 놀러다녀요. 우리들 교회는 너무나 치열하게 말씀을 보게 해주기 때문에 그자리에서 비비고 문대고 있었더니 하나님의 원을 알게되는 거에요. 다 변해요. 직분만 맡고 있으면 다 변해요. 양육을 받아도 말씀을 모르면 나눔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얘기를 하는 데가 없는거에요. 말씀으로 하기에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는 거에요. 유대인의 선동으로 도시가 시끄럽게 되자 베레아 성도들도 바울을 탈출시켜요. 성령의 강론에서처럼 베레아 사람들이 더 신사적으로 말씀을 상고하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보다 더 좋아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더 보내기 힘들어요. 그런데 성령의 신사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기에 협력하는거에요. 실라와 디모데를 배려하여 남겨둡니다. 디모데는 어디갔다 이제야 나타났나요. 빌립보에서 매맞고 데살갈때는 실라와만 갔잖아요. 베레아에 슬쩍 들어와있네요. 일촉즉발의 사명을 감당할때 이렇게 힘들어요. 홀로 떠나는 바울도 유대인의 박해가 시작된 베레아에 남은 실라와 디모데도 각자 사명을 잘 지키는 모습이에요. 맡은 자리에서 각자 찬양팀 목자 곳곳에서 섬길때 그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면 매력이 넘쳐서 결혼이 너무 잘 되잖아요. 구원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매력이 있게 되어 있어요. 각각 따로 있지만 베레아 성도들이 은혜를 너무 받았잖아요. 바울을 혼자 보낼 수 없죠. 아덴까지 320킬로 되는데 성도들이 동행을 하는 거에요. 돌아가면 640킬로가 되잖아요. 얼마나 무서운지 바다까지 갑니다. 바다로 갈일이 없고 육로로 가면 되는데 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려고 바다로갔다는 얘기도 있고 육로로 갔다는 얘기도 있고. 질릴 만큼 집요하고 끈질긴 방해와 괴롭힘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가장 앞에서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셨죠. 말씀묵상과 가정중수의 사명의 길에 마침표를 찍지않고 그 길을 완수하는 것이 사명감당하는 삶이에요. 영혼구원에 대한 애통함이 있어야 사명감당하는 지혜가 생겨요. 직분만 탐하고 구원의 말을 쓰지 않기에 대단한 석학이라도 말실수가 끊임없이 나오게 되고 천냥빚을 얻어들이는 거죠. 믿음은 보이는 게 아니에요. 물질이 아니라 인격이에요. 그사람을 진짜 사랑하게 되면 긴박한 상황에서도 말이 잘 나와요. 구원에 대해 여러분들이 배운게 없고 가진게 없어도 구원 받은 사람은 따라갈 수 없어요.
적용) 내게 맡기신 사명의 길을 멈추게 하려는 사람들을 원망정죄하는가 불쌍히 여기는가
형제와 무리가 되어 잘 따라가야할 지체는 누구인가
한 부부가 먼 지방에서 오는데 남편이 간암 말기래요. 이식하려면 6천만원이 드는데 사실은 너무 속을 썩이고 바람까지 피면 그 남편을 위해 수술비를 대고 싶겠어요. 죽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까지 있는데 고등학생 아들이 간 조직이 아들하고 같다는 거에요. 그래서 어떡하냐 하는데 이식을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어요. 그런데 이식을 해주면 그분이 살아나서 또 도박을 할 수도 이써요. 고마워하지도 않고요. 그때 생색을 내지 말고 그 이야기를 들을 때 택자니까 얼마나 껴앉고 울고 갔는지 몰라요. 그것이 최고의 신사가 되는 비결이기 때문에. 자녀들에게도 본이 되는 이야기잖아요. 제가 이런이야기를 하니까 다 무서워서 오기 싫어하는데. 이런 처방을 기대했을 지도 몰라요. 빚지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6천만원의 빚을 져요. 이런 적용을 기다렸을 지도 몰라요. 그 남편이 변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간을 떼줬다고 변하는 건 아니에요. 그사람이 고마워할거라는 생각은 정말 하지 않는게 좋아요. 떼어주고 바람피는 사람도 봤어요. 미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요. 내가 간을 떼줬는데.. 천국얘기만 하다가 지옥가면 왜 나한테 얘기 안해줬어 할 거 아니에요. 예방주사가 되는 거에요. 정말 그분이 수술후에 계속 도박하고 바람피는 거에요. 주님을 만난거같지가 않아요. 2008년에 와서 간이식까지 받았는데 목원이에요. 그런데 아내가 뇌경색으로 요양원에 있는 일을 계기로 좀 달라지신거같아요. 목장도 하고 목보도 쓰시고 예목도 하고 싶어계시고. 13년이 굉장히 긴 시간같지만 그럼에도 붉하고 이 가정은 교회와 목장에 계속 나와요. 믿음이 안들어가도 교회 나오는 게 어디에요. 그리고 지방에 있어요. 죽을거같으니까 오는 거에요. 이게 간절함이라고 생각해요. 딱풀성도가 되어 성령의 신사라고 말하고 싶어요. 교회에 나오는 거 자체가 기다려야 하는 거에요. 우리는 입이 간지러워서 생색을 자꾸 내고 싶어요. 성품이 아니고 믿음으로 계속 기다려야 한다는 거죠. 인간은 죄인이에요. 환경에 장사가 없어요. 조금이라도 환경이 좋아지면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더라고요. 고난이 축복이에요. 나는 할 수가 없어요. 자랑을 할 수 없어요. 내가 하려고 한게아니고 하나님이 시키신 거에요. 환경으로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