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9 성령의 강론
사도행전 17:2-9
한주동안 가정에서, 직장에서 성령의 전략을 잘 따르셨나요? 자기를 많이 부인하셨어요?
이렇게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날마다 말씀의 인도를 받아 평범한 일상을 잘 사는 것이 자기 부인이고 성령의 전략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전략을 따라 자기의 관례를 지켜 데살로니가 회당에 들어갔죠. 거기서 3주 동안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다고 해요. 이 강론으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졌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강론에 대해서 한 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1. 성경으로 구속사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2-3절)
성령의 전략에는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이자나요. 성령의 강론이죠. 지난주에 뜻을 풀어 설명했습니다만, 여전히 자기 부인, 성령의 강론, 이 강론을 어려워하셔서 이 부분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설명하고자 합니다. 2절, 3절이에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는 3주간 유했는데 바울은 자기 전략이 없었고 자발적인 자기 관례대로 성경을 강론했죠. 자기 전략이라면 가는 곳곳 유대인의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데 뭐하려고 그 회당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도 핍박 받으니까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겠다 그렇게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회당이 없던 루스드라에서는 노방전도를 했는데 오히려 열매가 많았어요. 그러면 자기 경험으로는 회당에 안 들어가야 되자나요. 한결같이 핍박을 받고 매를 맞았는데. 지금은 문화적으로 노방전도가 훨씬 쉬운 헬라 본토에 와 있자나요. 그것도 대도시 데살로니가에 말이죠. 그래서 인간적인 전략으로는 안 들어갔겠지만 관례대로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거룩을 위한 관례에 자신을 쳐 복종시킨 것이죠. 자기를 부인했어요. 그래서 3주 동안 회당 예배에 참석해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잘 보면 바울이 성경에 대해서 강론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고 합니다. 성경을 설명의 대상으로 삼은게 아니예요. 성경에 대한 이론을 가르친 게 아니예요. 성경 공부가 아니예요. 성경을 가지고 성경을 근거로 해서 성경을 교과서로 삼아 다른 어떤 내용에 대해 강론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마치 역사 얘기를 하듯 전했다면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증언했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예요. 음식을 잘 차려놓듯이 예수남의 복음을 듣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증언이라고 했자나요. 그럼 가장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물론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과 사건들이 예수님을 가르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증언하는 것이겠죠. 그리고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여 잘 알려주는 것도 증언하는 것이고요. 하지만 가장 강력한 증거는 지금 회당의 청중을 향해 강론하고 있는 설교자 바울 자신 아니겠어요? 설교자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듯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설명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무슨 강론이 되고 증언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설명으로 청중을 설득하겠어요. 설득했다기보다 성경을 펼쳐 놓고 그저 아는 사실을 증명하면 되는 거예요. 이걸 구속사로 전했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그 얘기만 듣고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음을 확실하게 갖게 됐습니다. 3주만에 믿었다는 것은 오래 전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믿음은 정말 선물이라는 거예요. 부유하고 성경 공부도 많이 한, 1년 6개월이나 한 고린도 교회는 음행과 이단 등 아주 문제가 많았죠. 데살로니가 교회는 3주간만 머물렀는데 기복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다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이 복음에 교인들이 반응했어요. 왜 입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핍박이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혼자 본다는 건 공산권이나 저처럼 시집살이에 묶여 아무데도 못간 사람의 이야기지 우리는 혼자서 성경 보기 어렵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체를 허락하시고 스승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스승이 누구였는가?, 내가 어떻게 복음을 받았냐?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구속사를 자신의 구속사로 증거를 제시해서 증언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 부활이 자기 때문에 일어난 구원의 사건이고,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임을 간증하는 것이 성령의 강론이라는 거죠. 예수님의 구속사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라고 고백을 하는 게 성경의 강론입니다. 내 인생이 세속사에 있지 않고 구속사에 있음을 깨닫고, 구속사의 일부임을 깨닫고 간증하는 거죠. 이렇게 성경을 교과서로 삼아서 예수님이 완성하여 지금 내게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구속사를 고백하고 간증하고 증언하는 것이 바로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는 것입니다. 적용해보세요.
[적용] 성경 이야기를 남 이야기로 읽습니까? 내 이야기로 읽습니까?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증언할 내 구속사의 간증은 무엇입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2. 따르는 딱풀 성도가 생깁니다. (4, 9절)
4절입니다. 회당 예배 중에 모인 사람들, 유대인의 회당이니까 유대인들만 모이자나요. 그런데 거기 개종하고 온 경건한 헬라인이 모인다 해도 유대인보다 많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 바울이 전하는 성경의 강론을 듣고 믿은 사람들은 대부분 헬라인인 거예요. 그리고 또 귀부인도 헬라인 인 거에요. 그랬는데 권함을 받고 여기 따랐다고 그랬는데, 이 따랐다가 4절에 딱 신약에 한 번 나오는 따르나라는 단어인데요. 이 따르다는 제비를 뽑아서 몫을 정해주다 수동태 부정 과거 직설법으로 신적 수동태로 볼수도 있는대요. 즉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바울과 실라의 몫으로 딱 할당이 되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가 있는 거예요. 핍박 받아서 떠난 바울과 실라에게 이렇게 딱풀같은 성도가 딱 생겼어요. 그들에게는 초로이고 초라하게 보이는 노인이지만 영적으로 통하니까 매력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딱풀 성도가 되는 거죠. 강론이 올바르니까 성령의 따름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구속사적으로 권함을 받은 사람은 가치관이 변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다 거룩을 위해 살고, 이기려는 삶에서 회개하는 삶으로 돌이키게 되어있어요. 매력이 있어요. 진짜. 자기 전략에서 성령의 전략으로 바뀐 삶을 살게 되죠. 그러니까 단지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과 한 편이 되어서 따라가는 사람은 특징이 뭔가 하면, 멀찌감치 따라가면 뒤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수가 없죠. 딱 한 편이 되어서 따라가는 사람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안 질 수가 없습니다. 승리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수고와 고통과 희생을 함께 나누는 것이 한 편인 거죠. 딱풀 성도가 이렇습니다.
똑같은 귀부인이라도 1차 선교 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력자들과 경건한 귀부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선동되어서 바울을 박해하고 쫓아냈자나요. 겉모습의 귀부인 가지고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호강만 하던 겉모습의 귀부인들이었을 건데, 데살로니가 귀부인들은 데살로니가에 있어 자타가 인정하는 유력한 지도자들의 부인이었어요. 귀자가 원어로 그런 소리예요. 그런데 이 자유도시에서 왜 그렇게 복음을 따랐을까? 저는 거기에서 남편의 타락을 맛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인생이 허무했을 것이고 그래서 외로웠을 것 같아요. 예외가 없자나요.
그런데 데살로니가는 이런 가운데에서도 그 때 그런 타이밍이 헬라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잘 살면 굉장히 자유롭자나요. 인권이 왕노릇하니까. 여자들이 간섭없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데살로니가 귀부인들이 딱풀 성도로 딱 바울 복음을 듣고 딱 달라 붙었어요. 자, 딱풀 성도 한 사람 또 있습니다. 9절이에요.
바울의 구속사적 강론을 듣고 야손이 따르게 됐는데 그의 집을 선교사들의 숙소로 제공을 하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거기서 시작되었고. 그런데 유대인들이 고용한 불량배들에 의해서 야손과 그 집에 있는 형제들이 아주 어려움을 당하죠. 법정에 끌려가 감옥에 갇힐 뻔 합니다. 선동 당한 시민들이 일으킨 소동을 다 받아냅니다. 그리고 큰 금액의 보석금을 내고 겨우 풀려납니다. 아니, 야손이 바울과 한 팀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바울 때문에 영육간에 이 고난, 십자가를 다 홀롤 질 수가 있겠어요. 성령의 강론에 감화되어서 바울과 실라, 나아가 에수님과 한 편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엄청난 적용을 자발적으로 자기 관례가 되어서, 하나님이 몫으로 할당을 해줬다 그랬기 때문에 그것도 야손이 잘난척 할 건 없어요. 바울도 야손도. 하나님의 복음 때문에 딱풀 성도도 있게 하시고, 또 아니게도 하시고. 이게 전부 하나님의 전략이라는 것을 믿고 가시면 너무 미워할 사람도 없고, 너무 좋아할 사람도 없을 것 같애. 물론 인간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딱풀 성도니까 서로 신뢰하고 가야되겠지만. 적용해보세요.
[적용] 여러분은 공동체와 한편이 되어 주님을 따르고 있는 딱풀 성도입니까? 공동체를 밀어내는 나홀로 성도입니까? (미꾸라지 성도입니까?)
3. 시기하여 소동하는 유대인도 있습니다. (5-8절)
이 바울의 강론을 듣고 사도행전 28장 24절에도 보면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거예요. 꼭 이렇게 돼요. 고난 있는 사람은 잘 들어오고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는 사람이고, 고난이 없는 사람들은 이래 저래 미꾸라지, 나 홀로 신앙이 되서 믿지 않죠. 5절부터 8절이에요.
여기서 시기하여라고 번역된 단어는 항쟁하다, 겨루다, 열광적이다라는 의미가 있는대요. 이 시기도 열광적인 사람들이 하는 거예요. 보니까. 유대인들이 시기와 같은 심리적인 역반응을 보인 것 뿐만 아니라, 광적으로 흥분이 되어서 바울 일행에 대항했다는 사실이 이 단어의 의미 가운데 포함되어 있어요. 시기, 질투, 경쟁심의 뿌리는 똑같습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대상에 대한 욕심이에요. 우리는 다른 사람이 멋진 연예인에 열광하는 것 때문에 질투하지 않아요. 내 아내, 내 남편이 그러면 질투합니다. 내 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도, 교회에서도 내가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다른 동료가 인정받을 때 더 많이 질투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은 아주 치사한 방법을 써요.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유대인들이에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 악한 거는 한계가 없어요. 치사해. 저자의 불량배들을 매수해서 시민들을 선동합니다. 그러니 교회에서도 이러는데 정치권은 안 그러겠습니까? 와, 인간이 이렇구나. 공익광고 한답시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그 반역자들이 이곳에 왔다 떠들면서 소동을 일으킵니다. 바울 일행에게 숙식을 제공한 야손의 집에서 행패를 부리며 바울을 잡으려고 해요. 바울을 놓치자 대신 야손과 그 집에 있던 성도들을 잡아서 황제의 명을 거역한 자라고 반역자로 몰아서 온 도시에 소동을 일으켜요. 이게 정치 문제로 가져갔어요. 이 사람들이 가이사 외에 다른 임금 예수가 있다고 주장을 한다고 하니 시민들은 가이사 밖에 모르는데 얼마나 소동을 했겠어요. 그리고 이 사람들은 반역은 당장 처리하지 않으면 자기네들의 안위가 무서워지니까, 안위가 위협받으니까 별 짓을 다하자나요. 그렇죠? 시기에는 이렇게 소동이 따라요. 자, 지난번에 예수님의 그 복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죽어야 되는 건데 다들 죽지를 못하니까 소동이 내 속에서, 집집마다, 교회마다, 회사마다, 나라마다 전공이 돼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하니까 그냥 소동이 그치지를 않는 거예요. 정말 열광적으로 떼를 지어 소동하게 하는 이 유대인의 모습을 봅니다. 진짜 요즘 보면 나라도 갈라져서 아주 광적으로 흥분된 것 같아요.
그러면 이렇게 시기, 질투, 소동 이러는 유대인들을 도대체 어찌해야 합니까? 유대인들 욕하려고 지금 설교하는 거 아니자나요. 그렇죠?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유대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이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구속사적 강론을 듣지 않아요. 잠깐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때 보니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처음 온 초라한 늙은이들에게 그냥 인심 쓰고 설교하라고 그랬는데 내 편이라고 여겼던 성도들이 다 바울을 따르니까 시기심 때문에 말씀이 안 들리죠.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를 몰라요. 진보도 없고요, 그냥 내 편이 저리로 갔어요. 우리는 네 편, 내 편. 세상의 학교에서도 오늘의 내 친구가 저쪽 친구 됐고, 그 다음에 왕따시키는 게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거기에 우리는 다 비위를 맞추고 이래요. 이 믿음이 없으면 이 사회 생활에서 어떻게 지조를 지키고 살아야 될 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말씀의 증인을 박해합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 증인을 따른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왕따가 시작돼죠. 교회가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고 고발을 하는데 정작 어지럽히는 것은 자신들이에요. 교회가 가이사를 거역한다고 비난하는데 정작 자기들이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주님께서 구속사적 강론을 통해 화평의 복음, 샬롬의 복음을 전해주시는데 화평은 커녕 이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가지고 소동만 일으키는 거예요.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얼마나 바울을 괴롭히고 훼방꾼 노릇을 하는지를 우리가 봅니다. 유대인의 간계는 바울도 생명을 내놓고 기도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유대인이 믿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안 믿는 자예요. 쉽게 생각하면 유대인은 바울의 동족이고 친척이예요. 그러니까 우리 같이 예수 믿는 동족, 친척 같은 부부, 이런 가족을 오늘 유대인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성경을 사람 살리는 구속의 일로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구속사로 성경을 꿰고 곳곳에서 강론을 하다가 막 매맞았자나요. 쫓김을 당했자나요. 그러다 보니까 이 사람이 심각해졌어요. 그러다 보니까 바나바와 베드로에게 외식하지 말라고 했던 거 기억하시죠? 왜냐하면 자기는 이것 때문에 이러는데, 이방인들하고 밥 먹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이 둘이 피했자나요. 그래서 그걸 꾸짖었어요. 그런데 사실 바나바는 돌에 맞았다는 얘기가 없자나요. 그런 설교를 안 하고 같이 다니기만 했나봐요. 그런데 워낙에 그 사람이 부자고 대단하니까 사람들이 바나바는 안 때리더라고요. 그런데 꾸짖으니까 유대인의 대표인 바나바와 베드로가 그 일로 참 기분이 나빴을 것 같아요. 그 후에 바로 바나바와 심히 바울과 다투고 헤어졌자나요. 또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1장 20절에 보면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하면서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학자들이 이거 바울에게 한 얘기라고 그러더라고요. 맞는 말이긴 해요. 성경을 자의적으로 진짜 푸는 것은 진짜 무섭습니다. 그런데 큐티를 하는 여러분들은 자의적인지 뭔지 모르니까 그냥 읽다가 보면 그 다음에 성령이 또 가르쳐 주세요. 설교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조심을 해야 되지만. 그런데 그 당시로 들어가 보면 성경을 읽는 사람도 없는데 누가 이렇게 사사로이 뜻까지 풀겠어요? 그러면서 모르는 것은 그냥 지나가라고 해요. 그런데 이거를 생각해 보세요. 큐티를 안 하는데 큐티하면 위험하다 그러면 누가 하겠어요?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얘기도 참 많이 들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성경이 이해가 되는 게 참 많습니다. 제가 큐티를 하면서 보니까 안 믿는 사람은 큐티가 뭐냐? 기저귀나 그러면서 물어도 보는데 믿는 사람이 큐티하는 걸 가장 비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바울이 성경박사자나요. 그 박사가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 쓰여지기 위해서 얼마나 고난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바울의 상급이 많다고는 못해요. 왜냐하면 구원이 바울에게서 난 것이 아니자나요. 그러니까 우리 다 구원이 다 하나님께 났기 때문에 이렇게 상급 타령하지 말아요. 구원의 상급보다 더 큰 건 없어요. 그런데 다섯 달란트 받았기 때문에 바울이 안됐어요. 우리 엄마 말이 맞았어요. 바울은 공부 잘해서 고난만 많아, 야 간증할 때 들으셨죠? 다섯 달란트 받아도 네 달란트 반만 이익을 내면 그건 불충한 거 거든요. 은사대로 섬기면 돼요. 이게 우리는 늘 헷갈립니다. 그러니까 장로님 가정에 시집와서 힘들었다 이러면 누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가 하면 장로님과 권사님. 듣기 싫어해요. 왜냐하면 유교적인 시각으로 생각을 하니까. 유교적 관점에서 부모는 존경받아야 하지만 성경에서 지금 유대인들이 힘들게 한다고 하는데 믿는 부모, 배우자, 목장 식구 나를 얼마든지 오늘 힘들게 할 수 있는 거예요. 먼 데 김 집사, 이웃집 아줌마가 날 힘들게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힘들면 난 안 만나면 되니까. 눈만 뜨면 내 옆에 바라다보이는 그녀와 그 남과 부모, 형제, 자녀를 안봤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안 봤으면 좋겠는 사람이 예수까지 믿어요. 눌려요. 게다가 굉장한 직분을 가졌어요. 더 힘이 들자나요. 그러면 오늘의 화두는 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것이 오늘의 우리의 큐티하면서 이 사람 나쁜 사람, 딱풀 성도는 좋은 사람. 이러면 안되는 거예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아까도 그 유대인 회당장들이 바울이 그렇게 잘해서 시기가 일어날지 자기도 몰랐어요. 여기 잘하니까 갑자기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나한테 어떤 반응이 나올지에 대해서 나도 나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없는 이런 겸손함으로 나가야 되는데, 행위 구원이 뭔가 하면 아니,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시기를 할 수 있어?,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암에 걸릴 수가 있지? 이럽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만 하면 다 붙게 되어있고, 낫게 되어있다고 생각하니까. 믿음이 없으니까 죄를 몰라요. 아프고 떨어지면, 건강하고 붙은 자를, 저절로 시기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믿음이 없으면 내가 붙어도 떨어진 애한테 가서 말을 못하는 거예요. 승진이 됐어도 퇴직한 사람한테 아유 미안해서 어떻게 얘기해 이렇게 얘기하는 게 바로 행위 구원이에요. 놀랐습니까? 이게 자유롭지 못해서 떨어지고 뭐 어쩌고 저쩌고 하면 교회를 떠나고, 바람을 피면 교회를 떠나고 이러는 거예요. 인간이 다 죄인인데. 똑같은 교회를 다니고 유대인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다 예배 열심히 드리는데 이건 완전 물과 기름인 거예요. 더 무서운 거예요. 바울이 언제 자기 목회하겠다고 그랬어요? 복음을 전할 마음은 있지만 늘 이렇게 순회 전도자로 떠나자나요. 떠날 수밖에 없는 바울의 마음은 거기가 인간적으로 내가 떠나야지 나를 높게 보겠지 그게 아니고 영혼 구원에 대한 생각이 늘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 영혼 구원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떠났는데 어디로 가든지 또 믿는 사람이, 딱풀 성도가 생기자나요. 그러니까 어디 가든지 또 밉보이는 거예요. 또 이걸 경험하지 않으면 이게 내 말로 들리기가 어렵자나요. 어쩔 수 없는 영혼 구원의 길은 좁은 길이구나. 그래서 우리가 말씀대로 묵상하고 나갔는데도 너무 이해가 안 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가 나누는 구속사라는 그 자체가 고품격으로 느껴지질 않는 거예요. 찌질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 구속사를 고품격으로 느끼는 사람은 십년 뒤를 내다보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매력이 있어요. 열매가 있게 돼 있습니다.
그럼 이 시기하는 유대인들을 진짜 어떻게 합니까? 오늘 이걸 세번을 질문을 합니다. 설교 내용이 어렵다고. 그래서 끊임없이 똑같은 말씀을 전했는데 이쪽은 유대인이고 저쪽은 이방인이에요. 저는 이 두 부류 보면서 그림이 쫙 그려지는 거예요. 우리들교회는 진짜 언론의 자유가 있어요. 그런데 말씀이 안 깨달아지는 사람은 저를 끊임없이 디스한다고 그러나요? 왜냐하면 저의 외적인 모습은 여자에다가 할머니자나요. 그러니까 권위가 없는 거예요. 제가 보니까 권위가 없어 보이는 거예요. 저는 그런 것들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면 여러분들에게 말씀이 들릴까. 바울이 창자가 끊어지는 애통으로 형제, 골육의 구원을 원했다고 했는데, 저같은 사람도 그게 좀 되더라고요. 제가 4대째 모태신앙이고 우리집에도 유대인들 많아요. 그런데 말씀이 안 들려도 십 몇 년 동안 와서 앉아 계시는 분들을 보면 다 또 내 책임 같고. 안되는 사람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를 하다 보니까, 그냥 계속해서 대신 깨달아 드려야 되니까. 그래서 그 깨달은 것 가지고 설교를 해서 오늘 또 한 사람 돌아올까? 그런 마음으로 제가 설교를 하는 거예요. 진짜 한 주일도 안 빼고 그랬다는. 오늘은 그 한 사람이 와서 들릴까? 그렇지만 유대인들이 3차 전도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너무도 안 돌아왔다는 거예요. 온 세계가 열광을 해도 바울의 형제, 골육들은 안 돌아왔어요. 지금까지 안 돌아오고 있어요. 저 유대인들이. 그걸 생각하면 참 슬프죠. 그래서 한쪽으로 애통이 안되는 날이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제가 얼마나 애통해 했는지 아시자나요. 그렇죠? 그러니까 옆에 식구들이 안 믿는데 내가 화를 내야되겠나? 혈기를 내야되는가? 이게 뭔가 하면 같이 예수를 믿는데 맨날 으르렁거리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데 한 마음이 안되는 거예요.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도 자기 식구 유대인들한테 이 독사의 자식들아, 화 있을진저 그랬는데 이해도 되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창자가 끊어지는 애통이 있었겠어요. 미워서 그랬겠어요? 그러나 바울이 자기 같은 살인자도 구원받았는데 유대인과 회당장들을 어찌 구원시켜주지 않겠는가? 이런 마음이 왜 또 없겠어요. 그래서 바울의 정말 그 살인은 정말 구속사에 있어서, 우리가 죄 진 것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예요. 나중에 이렇게 쓰여요. 이런 애끓는 마음으로 성령의 강론을 들어야 하는 거죠. 나혼자 도덕 잘 지키고 윤리적으로 잘 살고, 교통 질서 잘 지킨다고 영혼 구원으로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으로 이어지면 사람이 좀 촉촉해지고요. 감정적이냐 십자가냐, 이게 또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게 아니예요. 십자가를 길로 놓는 사람은 감정적인 은혜도 좀 있어요. 그런데 그 감상적인 은혜도 딱 분리되는 게 아닌데. 하여튼 뭔가 이렇게 치우치면 안되는 거예요. 말씀이 있는 사람은 감정이 없고, 감상적인 사람은 말씀이 없고.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영혼 구원은 이 두개가 다 균형이 잡혔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늘 우리들교회가 어떤 부흥회를 해야 하나, 어떤 프로그램을 돌려야 하는가 보다는 늘 그 주일에 한 사람 안되는 사람 때문에 계속 묵상하는 거예요. 그랬는데 지나고 보니까 다른 성도들이 잘 가게 하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구속사, 성경의 강론 때문에 반응하셔서 그래요. 여러분 한 사람이 중요하고, 가정의 한 사람, 목장의 한 사람, 그 한 사람 때문에 애통하고 눈물을 흘리고 가면 다른 거는 저절로 되게 하시는 것이 있더라고요. 이것이 성경의 강론의 결론입니다. 유대인같이 소동케하는 성도들이 꼭 있게 하시더라고요. 도대체 유대인들 어떻게 합니까? 욕할 게 아니라 그냥 있게 하세요. 그러니까 당연한 일로 여기고 가셔야 됩니다.
[적용] 시기나 질투나 경쟁심 등의 뿌리는 똑같은데요. 그 중의 무엇으로 소동하나요?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시기를 하냐?, 어떻게 아프냐? (어떻게 사기를 치냐?) 고 얼마나 자주 말합니까? 이것이 행위 구원이라는 것이 인정됩니까?
기도제목
현경
시기하여 소동하는 유대인의 모습이 저입니다. 내 것이라는 욕심이 올라올 때 말씀과 목장에 묻고 위로 받고 기도하면서 가도록 중보해주세요.
살아난 간증 말씀으로 디아트리보 할 수 있도록
예선
양육자 위해서 기도하고 어떤 답이 오든지 낙심하지 않도록
딱풀 성도로 공동체 잘 붙어 가도록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니라 그럴 수 있어 하도록
다인
연봉협상을 하는데 말씀과 목장에 묻고 갈 수 있도록
직장이 나의 열심으로 간 곳이 아니라 주님이 인도하셔서 잠시 허락한 곳이라는 것 알고 감사하도록
양육을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도록
가족들 위해 중보하고 건강한 거리 유지하도록
보련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 의지하도록
양육 받으면서 인생이 해석되어 방황이 끝나도록
나의 인생의 보호자 공급자 주인 되시는 주님 의지하면서 주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지화
결혼 2주 남았는데 말씀으로 준비하고 구원의 가정 이루도록
남친이 말씀이 들리고 부부 목장에 잘 참여하도록
돌발성 난청호전 되도록
엄마, 언니, 아빠, 조카, 동생 말씀 들리고 평안 누리도록
은우
그럴 수 있어 하며 기도하도록
프로젝트 진행하는데 말씀에 묻고 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