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2 성령의 전략
사도행전 17:1-3
바울이 오늘부터 시작되는 17장에서 이제부터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등 엄청난 전도를 하니 대단한 전략가로 보입니다. 이 전략은 솔로몬 아들 르호보암처럼 스스로 세력을 굳게 하여 다스린 것이 아니고요. 그래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게 하셨는데요. 이거는 세상과 성도의 전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믿으면 편하고 항상 아름다워라가 아닙니다. 지나고보면 그 전쟁이 도리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었지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형제 나라이지만 우리가 보기에 믿음이 좋은 유다가 맞는데도 계속 전젱이 있게 하시는 거예요. 에스겔 37장 22절에 결국 양쪽이 다 망해서 사로잡혀간 나라에서 인도해 내실 때까지 싸우다가 한 임금 예수님의 통치를 받게 되니까 그제서야 화해를 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한 임금 예수님의 통치를 받기 전에는 화해를 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우리의 전략과 하나님의 전략은 그래서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내 전략이 없는 것이 전략이고 하루하루 말씀으로 인도받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미 한 임금 예수님의 통치를 받고 있기에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오늘도 성령의 성령의 전략은
1. 다녀갈 곳 이를 곳을 인도하셨습니다. (1절)
여기서 그들은 누굽니까? 4명에서 누가와 디모데는 빠진 바울과 실라입니다. 빌립보 때 너무 위험해서 조심스럽게 둘만 움직인 것 같아요. 빌립보에서 로마 제국의 대로인 이그나티아 길을 따라서 서쪽으로 진행을 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동을 했을까요? 결과적으로는 데살로니가가 전략적인 요충지였어요. 그러나 바울이 처음부터 요충지를 알고 갔을까요? 바울 사도가 늘 승리하면서 전략적으로 좋은 전도지를 찾아갔다는 것 보다는 빌립보에서 유대인의 회당이 없어서 너무나도 채찍 맞고 옥에 갇힌 것 기억나시죠? 1차 때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늘 전했는데 그 때도 돌에 맞았어요. 그런데 유대인의 회당이 없던 빌립보에서는 굉장히 힘들게 고난을 겪었어요. 이번에는 트라우마가 있어서 유대인의 회당이 없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는 아예 지나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도 바울이 너무 훌륭한 사람이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서 큐티를 하시면 안 돼요. 기억나시겠지만 귀신들린 여종이 나 좀 살려 달라는 외침으로 구해줬죠. 대가가 수 없는 매질이고, 으스러지는 매질로 바울의 온 몸이 상처와 피투성이가 되었었어요. 그래도 죄패가 호패가 되어서 결국은 바울은 늘 승리하게 하셨어요. 그런데도 죄패가 호패가 되니까 늘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지 않을까 이것을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면서 매를 자꾸 맞고 하니까 더욱 용감해지면서, 또 매를 맞으니까 더욱 신중해져 갔어요.
그래서 여기를 이렇게 지나쳤는데, 암비볼리는 빌립보에서 남서쪽으로 약 5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게도냐 북부 지방의 수도예요. 두른 도시라는 뜻대로 판게오 산 남서쪽에 위치하고 스트리몬이라는 아름다운 강에 둘러싸여 있는 도시예요. 이 판게오 산은 금이 많이 나가지고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보 2세가 금으로 부자가 되가지고 막대한 군자금으로 그리스를 통일해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따가지고 빌립보라는 도시를 지은 만큼 금이 나기로 유명한 산이 있는 곳이었어요. 여기 맑은 강이 있고 화려한 금이 있어요. 어떤 생각이 드세요? 바울은 지금 몸이 너무 아파요. 쉬고 싶지 않을까요? 그러나 주치의 누가가 없고, 사랑하는 디모데도 없으니까 쉬자고 하는 제자들도 지금 없어요. 그러니까 금이 있는 이 곳을 다녀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아볼로니아는 남서쪽으로 계속 가면서 암비볼리 너머서 약 43km 지점에 위치한 도시인데요. 여기는 그리스에서 두번째로 큰 볼비 호수 남서쪽에 위치해 있어요. 볼비 호수는 갈릴리 바다 정도 되는데 이 호수에서 바울이 짧게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 비문이 적혀있어요. 그래서 이 도시에 사도 바울 기념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잘 보세요. 1절에 지나쳤다고 하지 아니하고 다녀갔다고 해요. 바울도 결정 장애를 겪었을 거에요. 거기가 여긴가? 여기가 거긴가? 암비볼리 가서 여긴가? 그러면서 다녀갔는데, 우리는 그 때 어떻게 결정하죠? 큐티하고 물어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이것이 전략인 거예요. 사실 올라갈수록 물어볼 사람이 없죠. 그래서 그게 힘든 거예요. 바울이 지나친 어려운 지명의 이름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이렇게 다녀갔다고 표현한 것은 지나가며 기도했기 때문이고요, 바울을 다녀가게 했지만 이름이 언급된 것은 하나님의 관심 속에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랬기에 2천 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이름이 언급이 되고 있자나요. 그래서 저는 그 도시들은 사도 바울이 다녀가기만 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참 미안하셨나보다 그래서 이름을 이렇게 적어 놓으셨구나.
드디어 그래서 160km 여정 끝에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동족으로 빌립보와 네압볼리를 로마로 연결하는 그 에그나티아 도로를 지나고 있었고,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누이이자 아내인 데살로니가를 기념해서 명명된 도시였어요. 그리고 여기는 아주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그때 인구기 20만 정도였는데 남유럽 소아시아의 상인, 군인, 정치인 중에 다섯에 하나는 이 도시를 거쳐 지나간다는 아주 로마 제국의 심장으로까지 부를 정도라고 키케로가 말했어요. 그러니까 도착하고 보니까 복음의 황금 어장이었는데요. 그런데 뭐가 있냐 하면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 거예요. 인도하심을 그렇게 받는 거죠. 그러니까 바울이 한 것이 없고 다 성령의 전략인 인도하심이었어요.
[적용] 지나고 보니 성령의 전략을 위해 다녀간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가 있습니까? 도달하고 보니 전략요충지인 데살로니가의 간증이 있습니까? 오직 말씀과 공동체가 전략이라는 것이 인정되십니까?
2. 자기의 관례대로가 중요합니다. (2절)
이제 바울은 어디로 가든지 성경을 가르치는 것, 그런데 가르치는 게 아니고 저도 어디를 가든지 이 구속사의 큐티, 이 애기를 하자나요. 간증을 하는 거죠. 어디를 가든지 구속사를 외쳤어요. 이게 자기 관례가 됐는데,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의 관례이기도 했어요. 누가복음 4장 1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그래서 늘 하시던 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간 것은 바울도 예수님도 그 관례를 지켰어요. 전통, 유대인의 관례. 그런데 이 전통을 지키면서 그 유대인의 관례가 바울에게 자기 관례가 됐어요. 바울이 나서부터 8일만에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니까 얼마나 관례가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부터 전통과 종교 행위가 아닌 자발적인 자기 관례가 되었습니다. 겉모습은 같아 보여도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관례, 유대인의 관례가 아닌 자기 관례가 생겼어요. 이것이 최고의 전략입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위해서 하루 아침에 유대인의 관례를 버리면 안 돼요. 전통을 버리면 안 돼요. 가정에서 듣든지 아니 듣든지 성경 말씀을 많이 접하게 하는 관례가 나중에 내 가족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가장 큰 전략입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부모가 주일 예배, 목장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전략이에요. 이게 이타적인 것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다른 게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와 말씀을 어떻게 귀하게 여기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전략입니다. 그래서 그 전략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윗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관례를 배우게 하는 것이에요. 그거 어렸을 때부터 교회 가면서 자연스럽게, 그런데 어렸을 때는 내가 인격에 순종하는 것 어떻게 알겠어요. 그러니까 무조건 교회 안에서 이거를 배우게 해야 돼요. 억지로 배우면 공산주의라 안되고. 그러다 보면 질서에 순종하는 훈련이 최고의 전략이라서 결국은 어디를 가든지 신뢰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자기 관례가 될 때 결국은 신뢰를 받아서 내가 하고자 하는 개혁의 물꼬를 트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아주 옳고 그름을 따지기 때문에 윗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십자가예요. 모든 사람은 인권을 부르짖으며 옳고 그름을 외치는 것이 이 시대가 걸어가는 그거예요. 우리가 윗 질서에 순종한다는 것 굉장히 바보같죠.
이 관례라는 단어는 넓게는 종교적 관습이지만 좁게는 개인적인 습관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용례로 쓰입니다. 누가복음 22장 39절에는 그래서 습관으로 표현이 됐어요. 똑같은 단어가.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십자가 달리시기 하루 전에 감람산에 가셨는데 성령의 감동으로 가셨다고 하지 않고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셨다고 하셨어요. 예수님도 습관을 따라 죽기 하루 전에 그 하는 일도 다 습관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 이 습관이 생기는 게 얼마나 전략인지 몰라요. 이 습관을 보여주는 것이 모든 사람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전략이에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최고의 궁전과 왕궁을 짓는 최고의 전문가라고 하는 이방인 후람과 같이 너무 멋있는 솔로몬 성전을 지었자나요. 그런데 멋있지만 르호보암에게 공동체에게 물어보는 것도 보여준 것이 없고 이러다 보니까 솔로몬이 죽자마자 그 아버지 시대의 원로들을 다 업신여겨서 나라가 갈라졌자나요. 싫어도 좋아도 예수 공동체를 귀히 여기는 모습을 이렇게 습관을 따라 보여주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 날마다 이를 닦아요 333 법칙에 따라서. 그런데 하루 세 번 닦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날마다 닦을 때마다 감동이 있겠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일주일에 한 번, 한달만에 닦으면 너무 감동이 물밀듯이 막 밀려와요. 막 시원해요. 그럼 우리가 그 감동을 위해서 일주일에 한 번 닦아야 되겠어요? 큐티를 날마다 해도 감동이 없어요. 그런데 결정적일 때 아주 건강한 결정을 할 수가 있는 거죠. 아침마다 성경 일고, 경고 찾고, 왜일까 생각해보고, THINK하면서, 말씀을 존중하면서 읽어 들이는 사람들이게 바로 열두 지파를 다스릴 권세를 주시는 거예요.
우리는 모든 것에 성령이 임해서 직통 계시를 받고 대단한 감정과 감동이 있어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습관을 따라 날마다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직통 계시이고 특별 계시인 줄 믿습니다.
[적용] 유대인의 관례대로, 부모의 관례대로 행합니까? 자기 관례가 되어 자발적으로 행합니까? 아직도 남 탓 비난이 습관입니까? 내 탓, 남 칭찬이 습관입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습관이 들었습니까?)
3. 자기 부인입니다. (3절)
성령의 전략은 곧 예수가 그리스도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은, 죽어야 되자나요. 자기 부인이라고 해요.
뜻을 풀어 바울이 모든 내용을 임의대로 말하지 않고 성경을 열면서, 펴면서 하나 하나 설명했다는 뜻인대요. 증언하고 신약 성경에서 많은 경우 음식이나 식탁을 사람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묘사할 때 쓰였어요. 문자적 의미가 이러하기 때문에 비유적 의미도 어떤 사실을 마치 식탁을 차려 놓듯이 듣는 사람에게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설명하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들 음식을 어떻게 놓죠? 에피타이저, 메인 디쉬, 국밥, 후식, 샐러드. 그 사람의 입맛을 돋우어서 몸에 가장 필요한 영양분을 먹을 수 있게 지혜롭게 질서 있게 순차적으로 차리는 거죠. 그러니 아무 말이나 막 던지는 게 아니라 내 삶의 수많은 사건들을 말씀으로 해석해서 듣는 사람이 가장 알맞게 먹을 수 있도록 풀어서 식탁을 차리는 것이 뜻을 풀어서 증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그래서 바울 사도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을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는 것을 가르킵니다. 구약 성경에 아브라함, 유다, 다윗이나 요즘 큐티인 본문인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또 에브라임의 자손 여로보암 등의 얘기가 남의 얘기가 아니고 내 얘기로 읽게 해주는 것이 풀어 차려 놓는 것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 죽어 주셨다는, 그 오늘 예수가 그리스도 그 얘기가 구약인 거예요. 내 죄를 봐야 성경이 내 얘기로 들리는데 구약 성경도 온통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죄 얘기로 가득 차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구약이고 신약이고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내 죄를 위해 죽어 주신 오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구약이고,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신약인 거예요. 그래서 이 뜻을 풀어 차리는 그 재료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만 강조하는 것이 이단이에요. 그런데 다들 부활만 먹고 싶어해요. 십자가 피만 강조하면 다 무섭다고 그래요. 골고루 먹어야 됩니다. 그런데 똑같이 얘기를 해도 십자가 얘기를 하면 한 번만 얘기를 해도 열 번, 백 번 했다고 그러고, 또 부활 얘기는 열 개를 해도 한 개만 했다고 그래요. 여러분들은 부활 얘기만 듣고 싶어해요. 부활 고기만 먹고 싶어해요. 똑같이 얘기를 하는데 똑같이 않아요. 예수님도 천국보다 지옥 얘기를 훨씬 더 많이 하셨어요. 여러분들이 이 세상이 짧기 때문에 지옥 얘기를 많이 해주는 게 축복이에요. 이 세상에서 천국 얘기를 많이 하면, 단 얘기는 그 때는 좋지만 이가 썩자나요.
십자가 쓴 약이 몸에 좋자나요. 그런데 자꾸 내 설교가 안 들린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이 죄, 조상들의 죄도 다 언급해 놨는데 그게 이제 자기 관례가 안돼서 그렇죠. 바울은 성경을 해설했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늘 성경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교리를 선포한 적이 없어요. 성경 한 절, 한 절, 단어 하나, 미시적, 거시적으로 지금 이렇게 강해를 하는데도 결과적으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 바울의 복음을 폄하하고 핍박을 했단 말이죠. 저도 그런 얘기를 너무 많이 듣습니다. 성경 얘기를 하는데도 자꾸 딴 얘기를 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제 본문을 더 상세히 번역을 하면 여기서 반드시 해를 당해야만 하고 또 반드시 다시 살아나야만 할 것을, 반드시가 들어가 있어요.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및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의 경륜 가운데 정하신 것으로서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실로 해설했어요. 예수님은 살아나셔서 그것을 또 인정하셨어요. 그런데 음식은 그 생명으로 다른 사람의 육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힘이자나요. 동물이든 식물이든 죽고 희생함으로 그것을 받는 자가 영양분을 받자나요. 그러니까 미나리 하나도 죽어져서 내 입에 들어오는 거자나요. 돼지 하나도 죽어져서 내 입으로 들어오자나요. 생명이 이어지려면 누군가가 죽어야해요. 그런데 미나리가 죽는 것은 당연하지만 내가 미나리를 위해서 죽을 수는 없자나요. 내가 돼지를 위해서 죽을 수는 없자나요. 그러니까 이것이 잘 생각을 해보십시다.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최고의 전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인데 사단은 결코 생각을 못하는 전략이에요. 어떻게 창조주 그 분이 그 작고 하찮은 피조물을 위해서 죽을 수가 있냐 말이에요. 어떻게 내가 돼지를 위해 죽을 수가 있냐고요. 내가 어떻게 미나리를 위해서 죽을 수가 있냐고요. 어디서나 잘 산다고 하는데 그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주님이 나를 위해 죽어 주셨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낮아짐인 거예요. 그런데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죄악을 위해서 창조주인 그분이, 하나님인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그 예수의 생명을 받는 자에게 생명이 이어지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은 도무지 이 죄악의 문제를 누구도 해결할 수 없으니까 온 세계가 옳고 그름으로 싸우는 거예요. 정말 무섭게 싸우는 거예요. 이 죄의 문제를 모르면 거긴 구원이 없어요. 맨날 분열밖에 없는 거예요. 깨어짐 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혼을 하고 자살을 하고 다 깨어짐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를 살리려면 죽어지는 길 밖에 없어요. 자기 부인인 거죠. 그래서 성경을 풀어서 이거를 잘 차려서 증언해서 믿는 자에게 생명이 이어지는 것이 놀라운 신비고 이게 너무나 놀라운 전략이에요. 내가 죽어지는 게 성령의 놀라운 전략입니다.
그러나 이게 누구 얘기라 쉽겠습니까?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 예수님 고백을 보십시다. 누가복음 22장 42절에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죽어야 사는 자기 부인은 주님도 힘드신 일이었기 때문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어요. 왜 그렇습니까? 오늘 나의 삶에서 나의 원이 있고 아버지의 원이 있습니다. 병이 낫게 해주세요라는 기도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원합니다라는 기도 중에 어느 것이 어렵습니까? 우리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표적이 너무 어렵습니다. 병이 낫고 돈이 생기는 것이 너무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모든 성공하는 사람들의 제1번 특징이 뭔가 하면 먼데를 본다는 거예요. 10년 뒤를 본다는 거예요. 그래야 돈도 벌고, 건강도 해지고, 공부도 잘하는데 당장 앞에서 공부 잘하고, 당장 앞에서 돈이 벌리고, 당장 앞에서 결혼이 돼야 하고. 그렇지만 예수님이 사역하셨을 때를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수많은 치유사역을 하실 때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하나도 힘들어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문제로 달라, 달라 기도하지 않으셨어요. 광풍을 잠재울 때도 하나도 어려워하지 아니하시고 배 고물에서 주무셨어요. 그런 것은 하나도 안 어려워요. 주님은.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에 이렇게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되었다고 이렇게 어려워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기도 제목도 하나님 앞에 항상 엎드리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나의 원함을 내려놓게 해달라는 이 기도 제목은 심히 고민해서 죽게 되는 기도 제목인 거예요. 나의 원함을 내려놓게 해 달라고. 그런데 내가 습관을 따라서 기도만 해도 영육간에 사자가 나타나서 돕습니다. 예수님은 구지 십자가 지고 죽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자나요. 그러니까 주님은 이렇게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셨어요. 믿음이 올라갈수록 누가 뭐라고 하는 게 아니예요. 믿음이 올라갈수록 자기와의 싸움인 거예요. 밑에서 아유 거기 가지 그랬어, 안 가지 그랬어, 아유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 그런데 이렇게 믿음이 좋다는 것이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해야 되니까 이 구원의 사역을 예수님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으니까 자신만 하실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에 고민해서 죽게 되실 정도로 힘겹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정말 도망하고 싶은 나의 인간적인 자아가 있습니까? 주님도 있었는데 우리가 없을 수가 없죠. 그죠? 내가 정말로 이 사람만은 피하고 싶다하는 것이 도망가고 싶은 나의 자아인 거예요. 정말 힘든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구원을 위해서 해야 할 단 한가지가 다 있어요. 누구나. 아무리 모든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구제를 하고 별 행위와 공로가 많아도 단 한가지 내가 자기 부인을 해야 할 그 한 가지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다 슬퍼가지고 잠들었다고 그랬어요. 그 다음 구절 45절에 보면. 주님이 가장 암담하고 절망 가운에 계신 이 때에 그 제자들은 자기를 위해서도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녔는데도 이 제자들은 늘 피곤합니다. 절박한 예수님께는 지금 피곤한 것도 사치인데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절박함이 다 남의 일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피곤한 것이 많습니다. 피로를 풀려고 여행을 다녀와도 그때부터 피곤합니다. 가서부터 피곤하고 늘 피곤이 입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고난 받는 것에 동참해주고, 알아주고, 함께 깨어 있어주고, 위로해주는 것이 진짜 세상 모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가장 큰 위로자나요.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이 가장 큰 절망 가운데 그 한사람이 없으셨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사건을 영적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깨어 있지 못하고 내 인생이 전부 다 시험거리인 것은 바로 습관을 따라 감란산에도 안 가고 모든 유대인의 규례가 자기 관례가 되지도 못했고 기도도 안하고 날마다 기복만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시험거리가 있겠구나 하면 되는데, 시험은 싫고 좋은 일만 생각하니까 늘 시험에 듭니다. 여러분들이. 그래서 이렇게 교회를 와도 가치관이 안 바뀌어 지니까 병이 낫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도 나 아니면 아무도 질 수 없는 십자가를 잘 지고 가게 해 주세요가 우리의 기도 제목이 돼야 합니다. 예수님 한 분이 죽으셔서 온 인류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나 한 사람이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잘 죽는 것이 우리의 변하지 않는 가족들을 살리는 가장 빠른 전략인 줄 믿습니다. 아무리 다른 것들을 잘해도 딱 하나, 주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지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을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하지만 내가 그 십자가를 지려고 마음만 먹어도 돕는 손길이 있습니다. 누가 크다는 다툼이 없이 오직 내 십자가만 지겠다는 마음으로 이제 내가 자기 관례를 따라서, 습관을 따라서 자기 부인을 하고자 한다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 되어서, 최고의 전략을 부과해서 전도의 열매를 맺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래요.
[적용] 반드시 해를 받아야 반드시 살아나는 이 반드시가 믿어집니까? 주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딱 한 가지는 무엇인 것 같습니까?
기도제목
현경
구체적으로 목장에서 묻고 나누고 큐티로 한 주 잘 살도록
회사에 거할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것 알고 하나님과 매순간 동행하도록
나의 놋 방패를 높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성전건축 할 수 있도록
보련
회사에서 관계하는 것이 쉽지가 않지만 내일 오전 회사 잘 다녀올 수 있는 용기 주시도록
말씀에 따라서 역할에 순종할 수 있는 지혜 주시도록
어머니 다리가 몹시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 중이신데 영육 강건하게 지켜 주시고 구원의 사건 되도록
저의 인생의 보호자 공급자 주인되시는 주님 의지하고 오래 다닐 수 있는 직장으로 인도받을 수 있도록
예선
양육의 은혜는 성령님만 주시도록
양육하는 동안 저의 모습 말씀으로 해석하며 갈 수 있도록
코로나로 아픈 친척들이 있는데 그들의 인생을 지켜 주시고 영육 건강하게 회복되어 다시 예배 드릴 수 있도록
할아버지가 저희 집에 머무시는 동안 잠시라도 편안하게 쉬고 갈 수 있도록
으뜸이 되고 싶어 하는 저의 모습 회개하고 보내주신 자리에서 순종할 수 있는 지혜와 겸손의 마음 허락해 주시도록
은우
관례대로 인도해 주신곳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날이 새 매의 국면을 맞이했는데 주님의 은총과 지혜 얻도록
성령의 전략으로 프로젝트 진행할 수 있도록 매일 말씀에 거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