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14. '성령의 동역자' (사도행전 16:1-5) 김양재 담임목사님
1차 전도여행에서 수행원의 사명을 중도포기한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갈 수 없다고 거절했던 바울은, 인정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매몰찬 것 같다. 독불장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바울은 늘 동역자를 귀하게 여겼다. 신약성경에 동역자라는 단어가 13번 나오는데, 그 중 바울 서신에 12번 나온다. 동역자라는 말 자체가 바울의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도 혼자 일하지 않으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나아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 함께 일하신다.
바울도 2차 전도여행을 아무리 사람을 의지하지 않아도 같이갈 동역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실라를 택해서 간다. 그리고 앞으로 가장 중요한 동역자가 될 디모데를 발탁한다.오늘은 성령의 동역자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성령의 동역자는,
1. 수행원이어야 합니다.
1절
2차 전도여행은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수리아 길리기아 여러 교회들을 심방하면서 교회들을 견고하게 했다고 한다.
16:4에도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 라고 했다. 이 지방을 바울이 쉴새없이 다녔다는 뜻이다.
이때 바나바는 구브로 고향으로 돌아갔고 심한 다툼으로 갈라섰을 때 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길리기아 바로 위에 고향 다소가 있지만 고향에 갔다는 말은 없다. 복음은 기쁜 소식인데 친척들이 옆에서 아무도 기뻐하지 않으니 바울도 가족 이야기 하면 할말이 없었을 것이다.바울은 가족 이야기를 안했다. 영육간의 스펙이 너무 대단해서 가족들이 무서웠던 것 같다.
바울은 영적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다. 그래서 다소를 지나면서도 들리지 않았다. 겸손한 사람이 없고 환경이 겸손하다고 했는데, 바울은 이런 애통함으로 잠시도 쉬려는 마음이 없게 하셨다. 가족 뿐 아니라 유대인 전체가 바울을 대적하니 정말 외로웠을것 같다. 그래서 저절로 생명 내려놓고 힘쓰는 수고를 하게 하신다.
수리아에서 길리기아까지 가려면 해발 2천미터가 넘는 아마누스 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거기서 길리기아 지역 심방 마치고 갈라디아로 넘어갈 때 토로스 산맥도 넘어가야 했다.높고 험한 산맥을 두개나 넘어서 바울은 드디어 1차 전도여행의 종착지인 더베에 도착한다. 수리아 안디옥부터 380키로 이상을 걸어온 것이다. 거기서 다시 100km를 더 가서 루스드라에 이른다.이때 여행 하면서 실라가 있지만 바울이 바나바 생각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자기에게 맞는 동역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의지하지 않아도 일을 할때는 동역자가 필요하다.
루스드라는 바나바와 바울의 팀웍이 빛을 발했던 곳이었다. 나면서 걷지 못했던 사람을 걷게 하는 기적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바울을 돌로 잡아죽이려고도 했다. 영광과 비난을 동시에 받게한 곳이다. 산맥을 두개나 넘고 강도의 위협과 어려움이 있는데사명이 아니면이곳을어떻게 가겠는가? 형제의식으로 가지 않았다면 디모데를 만날 수 없었다. 디모데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열매이다.
16장부터 이어지는 누가의 표현을 보면 실라의 위치는 바나바처럼 바울과 대등한 동역자가 아니라 마가같은 수행원이었던 것 같다.바울과 바나바를 두 사도라 불렀던 호칭도 없다.
1차 여행에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함께 기록했지만 2차에서는 많은 경우 바울만 단독으로 기록한다. 이것을 동역자를 향한 바울의 마음에 생긴 변화를 보여준다.
이전에 바울은 바나바를 많이 의지했다. 그러나 1차 전도여행 다니면서도 바나바가 설교 한번 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도 바울은 바나바를 계속 모셔야 했을 것이다. 근데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설교도 하고 이방인들 전도도 하고 배척하는 유대인 섬겨야 했기에 마가처럼 수행원 역할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그런데 바나바까지 섬겨야 하는 것이 바울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면서 나면서 걷지못하는 자를 거쳐도 영광은 인물 좋은 바나바가 받아서 그를 제우스라 부르며 루스드라 백성들이 열광했다. 그것이 문제되지 않았지만 바울은 점점 바나바를 섬겨야 했다.
맨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안디옥에서는 둘이 같이 성경을 가르쳤고 많은 성도들이 섬겨주었으니 드러나지 않았는데, 선교여행 떠나며 구브로에 도착해서 바울의 복음전하는 능력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거기서는 한사람만 전했는데도 서기오 총독이 전도되었다. 압도적이니 저절로 바울에게 리더쉽이 갔다. 바나바가 그 정도는 인정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만하면 회개시켰고 사람들이 변화되었다. 근데 바나바 때문에 변화되는 사람은 없고 설교했다는 내용도 없다. 바나바가 말하면 사람이 안 변하는 것이다. 거기서 열등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니 돌아와서 이방인과 밥을 안먹은 척 하는 외식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바나바는 총회나 안디옥에서나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신뢰받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총회에서나서서 확신 있게 할례와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 있게 외쳐주었다면 미리 그 일이 끝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총회에서도 바나바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바나바가 바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이해했어도 자기가 당한 적이 없기에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바울은 10년 이상 수고했다. 자기 열심과 성경지식으로 눈이 멀었다. 그로 인해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인정받지 못한 13년이 지나며 무너졌고, 나를 죽이려는 고난을 당했다. 그러면서 사람 보는 눈이 생겼다. 이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 줄 서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과 연결되는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고난을 거치지 않으면 결정적일 때 분별이 안된다.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박사학위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바나바는 애초에 성품이 좋고 인정받으니 구원때문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바울과는 비교할 수 없다.
안타까운 사람들이 일을 해야 성공한다. 바울은 끊임없이 구원 때문에 할 일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전도하는 것도 돌아보자고 하고, 예루살렘 가기 싫어도 갔고, 안디옥은 너무 머물고 싶은데도 떠났다. 이는 구원의 열심이 아니면 못한다. 무서운 열심과는 다르다.
윤여정씨 이야기 - 온몸에 절박함이 있으니 살아있는 연기를 하게 되었다고 함
2차 전도여행 가는데 바울이 바나바를 동역자로 모시기에는 너무 힘들게 되었다. 왜냐하면 동역자가 아니라 때마다 바나바를 신경써야 하기 때문이다. 바나바는 사도이지 수행원이 아니다. 근데 지금은 전적으로 바울을 돕는 수행원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렇다고 바울은 바나바와 헤어진다고 하지 않았다. 바나바 본인이 떠난 것이지 바울이 떠나지 않았다. 근데 마가를 택한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동역하면 이런 자기자리를 알아야 하는데 공동목회 하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 이유는 머리가 둘이니 다같이 죽는 것이다. 머리가 둘인 뱀은 오래 살지 못한다. 부족해도 어디나 머리는 하나여야 한다. 그래서 집에서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의 질서는 남편이기에 남편이 머리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똑똑한 아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 남편의 인격이 아니라 역할이 순종하면 온 집안이, 아내도 다 살아난다. 능력으로 하게 되면 다 죽는다.
바나바와 바울은 생각이 너무 다르다. 원어를 보면 바울은 구원의 초점으로 마가를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었으나, 그것이 역부족이라는 자기 주제를 알기에 구원을 위해 단번에 거절한 것이다. 이렇게 거절할 때도 있어야 한다.
근데 바나바는 마가도 책임지지 않고 사역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면서 무조건 데리고 가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 이런 일을 분별하겠는가?
사람은 잠시 뒤의 일을 생각하기 싫어하다. 지금은 욕먹는 것이 싫고 지금은 돈생기는 것만 좋아한다.
바나바가 바울 사도의 말을 들었다면 다투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같은 레벨의 사도라고 생각하기에 다투고 갈라서게 되는 것이다.
바나바는 너무 착해 보이지만 구원의 일을 생각하지 않기에 착한 것이 악하다. 이것이 가장 악한 것이다.
바울이 나빠 보이지만 가장 선한 선택을 하는 것은 그것이 구원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후에 바나바는 사도행전에서 사라진다. 하나님이 바울 편을 들었다. 성경이 이렇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자꾸 성경을 넘어가는 인도를 받으려고 한다.
바울에게는 수행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마가가 저절로 결정하고 떠난 것이다. 바울이 한번도 떠나라고 한 적이 없다.
구속사가 안 들리면 말씀도 안들리고 구속사라면 지겹다며 처방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유교적인 문화에서는 심정적으로 한사람을 끝까지 품고가야지 하니 바나바 편을 지지한다. 그래서 구속사가 힘들다. 구속사가 1+1=2 가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영적인 것이니 깨닫기 어렵다. 바나바가 그렇게 바울과 같이 다녔는데도 안 깨달아졌는데 어떻게 깨닫겠는가?
적용) 바울과 바나바에 대해서 다시 나눠보세요.여러분은 어디서나 수행원입니까? 대접받으려는 사도입니까?
=> 바나바를 너무 좋아한다. 여전히 대접받으려는 사도인 것 같다는 나눔
부목자의 양육기간 동안 목장보고서를 써준 목원/목장 이야기
성령의 동역자는
2. 제자여야 합니다.
1절 중반
바울이 열심히 다녔더니 5절 교회가 부흥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1-3절 까지 디모데에 대해서만 나온다. 수많은 곳의 방문을 능가해서 언급할 사람이 한 사람 디모데 제자라는 것이다. 바울을 다 배척해도 이 한사람을 만났기에, 이런 동역자 한 사람을 찾았기에 지금까지 신약이 전해져 오는 것이다. 이런 동역자 한 사람이 없어서 그 교회가 망한다. 사람이 많다고 제자가 있고 수행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디모데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뜻을 지닌다. 제자가 있으니는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기 전부터 1차 선교여행때부터 이미 제자가 되어 살고있었다는 것이다.
제자는 가르침 받는 자라는 의미로써 복음의 가르침을 받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을 따라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를 말한다. 바울에게는 사도보다는 자기 말을 듣고 반응하여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이런 제자가 수행원으로 필요한 것이다.
바울이 돌에 맞아 쓰러졌을 때 제자들이 그를 둘러섰다고 한다. 그 중 디모데가 있었다고 한다. 디모데는 바울이 겪은 일을 다 봤다. 그래서 후에 디모데에게 딤후 3:10~11 처럼 말한다.즉 수많은 박해를 봤다는 것이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본 바울이 주님의 수행원이 된 것처럼 디모데도 바울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박해충만한 삶으로 변론하는 바울을 통해서, 바울이 돌에 맞을 때 스데반의 천사의 얼굴을 보지 않았을까 싶다.
3. 가정에서부터 말씀으로 양육되어 칭찬받아야 한다.
1절 하반절
디모데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바울을 1차여행때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이름은 유니게이다(딤후 1:5). 이 사람은 유대여자인데 헬라인과 결혼했다. 그 당시에는 흩어진 디아스포라 사람들이 유대인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불신결혼을 많이 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 할례를 행하지 못한 것 같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해야 했는데 아버지가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렸을때 부터 성경을 가르쳤다. 성경지식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서 사는 가를 보여준 것 같다. 이방인 남편과 살면서 삶으로 밖에 보여준 것이 없으니 남편에게 어떻게 순종하고 사는지 말씀대로 어떻게 순종하는 것인지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보았기에 그 엄마 한 사람의 역할로 온 집안 식구가 믿음으로 서게 된 것 같다. 엄마의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고 아버지와 살기가 힘들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2절에는 칭찬을 받는다. 믿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디모데의 태생은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약점이 된다. 유대인이 제일 무시하는 것이 혼혈이다. 디모데가 혼혈아이다. 어떻게 근데 지도자 동역자가 되겠는가?
칭찬을 받는자니 라는 것은 미완료 라서 디모데는 어쩌다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계속 모두에게 전방위적으로 계속적으로 칭찬받아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마의 양육이 성경적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만 알아주면 되었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은 인간적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넘어가는 이야기이다.그래서 모두를 택할 때 신/불신 교인 외인에게 선한 증거를 얻은 자가 장로의 자녀의 자격이라고 디모데 전서에 나온다. 평판은 참 중요한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바나바 같은 평판 바울과 같은 평판이 있다. 바나바는 바울을 섬기는 것 까지는 은사이나 복음의 그릇이 더 넓어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적용) 명절을 지나며 불신자나 가족에게 칭찬받은 일이 있었나요?
간헐적으로 목자모임을 빠졌던 목자님이 주일성수 한 이야기
내가 하나님이 목적이면 이세상에서 돈이 목적이 아니기에 물러갔던 돈도 놀라서 다시 돌아오게 되어있다. 지금은 예수 때문에 망하나 후에는 흥하고, 지금은 흥하나 예수가 없다면 망하게 된다. 적용이 가장 중요하다. 망하거나 흥하거나 오늘 적용 말씀대로 하면 이분처럼 이런 열매가 또 있다. 그리고 내가 계속 핍박받는다고 하면 그것은 또 인내해야 할 시간인 것이다.
이분은 너무 힘들었지만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관행과 리베이트 없이 진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분들이 다 동역자 아닌가 싶다.
4. 부르심에 순종하여 규례를 지켜야 합니다.
3-4절
좋은 양육을 받고 교회에서 칭찬도 받고 있던 디모데가 바울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같이 가길 원했다.
바나바도 마가를 데리고 가고 싶어했다. 근데 바울도 디모데를 데리고 가고 싶어했다. 근데 왜 바나바는 되고 바울은 안되는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이 생길 것이다.
둘의 차이는 마가가 중간에 한번 배신하고 떠나는 것이 결정적이긴 하다. 그러나 원어를 보면 바나바와 바울의 태도에서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바나바는 마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데리고 떠나기를 지속적으로 고집했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가 스스로 자신을 따라나서면 좋겠다는 의사를 딱 한번 표현했다. 바나바는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한 반면 바울은 디모데의 선택에 맡긴 것이다. 바나바는 마가가 같이 가야 한다는 답을 자기가 정해놓고 고집을 부린 반면 바울은 디모데를 동역자로 부르지만 그 결정은 디모데에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맡긴 것이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이다.
디모데가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과정은 루스드라 교회의 공식적인 파송도 포함된다. 바울도 처음에 안디옥 교회의 파송 받고 떠난다. 디모데도 루스드라 교회의 파송을 받는다.
딤전 4:14
1차 여행 마치고 귀환하면서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던 것을 기억하는가? 디모데를 바울의 동역자로 파송하면서 루스드라 교회에서 안수한 것이다. 이때 주님께서는 이 파송을 승인하시고 응원하시는 뜻으로 디모데에게 예언을 주신 것 같다.
이렇게 디모데를 복음의 동역자로 세우기 위한 바울의 부르심도 있고 교회의 파송도 있고 주님이 직접 주신 은사도 있다. 디모데는 이 모든 것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 바울을 따라나섰다. 바울의 동역자 곧 하나님의 동역자로 첫 발을 딛는 순간이다. 근데 디모데가 동역자로 따라나서며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할례를 받았다. 바울이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 때문에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고 한다. 바울은 이방인은 할례 받을 필요가 없다는 편지를 가지고 전하러 다니고 있다. 근데 갑자기 디모데에게는 왜 할례를 행할까? 디모데가 아버지가 헬라인 엄마가 유대인이기에 지도자로는 결격 사유가 있다고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의 고정관념으로 굉장히 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예루살렘교회의 편지는 이방인 위주로 써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편지의 내용을 전하는 사람이 유대인들로부터 비난 받고 있는 바울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유대의 율법과 정체성을 무시하고 훼손한다고 오해했다.
물론 바울은 할례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갈 5:6)
할례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아무 역할도 못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도의 경우, 이방인이기에 할례를 받지 않게 했다. 하지만 바울은 할례 안받아도 된다는 비본질적 원칙에 얽매여서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시험에 빠트리지 않았다. 유대인으로 인정되는 디모데가 할례받지 않은 채 복음의 사역을 하는 것 때문에 시험 들 유대인을 배려하여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다. 유대인들이 믿음의 공동체에 붙어있는 본질적인 사역을 위해서 비본질적인 할례문제에 대해 양보한 것이다. 실제로 바울은 구원 때문에 타협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타협은 바나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한다. 바나바는 고집이다. 이제 바울 실라 디모데 세사람이 성령의 부르심으로 성령의 동역자가 되어 갈라디아 남부에 여러성으로 다녀가면서 이방인은 네가지 곧 우상숭배, 음행, 목매여 죽인고기, 피를 멀리하도록 가르쳤고 유대인들은 이 네가지 금지 외에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비롯한 다른 율법을 강요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 규례를 지키도록 가르쳐야 했으니 유대인 어머니를 둔 디모데가 먼저 할례의 규례를 지켜 흠이 없는 유대인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왜냐하면 전도는 유대인들에게도 가야했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위해서는 디도가 필요하고 유대인을 위해서는 디모데가 필요하다. 말이 아닌 삶의 변론을 해야 했기에 본질적으로 받지 안아도 된 할례를 규례에 따라 받았다. 사실 바울의 이 적용에서 중요한 사람은 디모데이다. 어른으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굉장한 고통이다. 근데 그 고통은 바울이 아니라 디모데가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디모데가 적용한 것이다. 본질을 위해 비본질을 양보한 적용을 디모데가 해준 것이다. 디모데는 살을 떼는 고통을 감수하며 규례를 지키는 순종으로 부르심에 응답하여 교회를 말씀으로 양육하는 바울의 최고의 동역자가 된 셈이다.
디모데는 바울의 부름에 응함으로 세속적인 장래를 포기했다. (빌2:20, 22) 바울이 사역하는 동안 언제나 따라다닌 사람이 디모데였다. 바울은 13통의 서신서를 썼는데 2통이 디모데에게 쓴 것이다. 그리고 여러 성경의 서두마다 나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이라고 썼다. 형제나 아들이라는 표현을 계속 써 주었다. 그것은 나이차는 있으나 영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디모데는 전도여행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바울은 마지막 감옥에서도 디모데에게 외투와 성경을 가져다달라고 했다. 언제나 바울 주변에서 바울을 도왔고 사역을 같이 했다. 그러니 디모데를 만난 것이 수리아 길리기아 갈라디아 지방 전도의 모든 사역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맞다. 그러니 모든 것 중 사람 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사역의 시작이요 마지막이다.
5절
쉴새 없이 여러 성을 다녀가니 여러 교회들이 굳건해졌다. 전도를 열심히 하니 교회가 굳건해진 것이다. 여러성을 다니니 교회가 굳건해졌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다. 전도를 잘하려면 교회가 정한 규례들을 중수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르게 성장한다.
우리도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는데, 그 비결은 날마다라고 한다. 말씀을 날마다 적용하니 믿음이 굳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니 수가 더할 수 밖에 없다. 교회만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어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규례와 원칙을 잘 지켜야 한다. 성장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다.
코로나 시국에서도 본질을 붙잡고 있으니 성장하려고 한적이 없는데, 날마다 큐티하고 적용하니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성장을 보여주신다.
적용) 가정과 일터에서 구원을 양보해야 할 비본질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빼놓지 않고 반드시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중에 말씀 묵상은 몇 번째 입니까?
교회 옮기려는 목자님의 공동체 나눔 등
말씀맺음
성령의 동역자는 수행원이어야 한다. 그리고 제자여야 한다. 이것은 가정에서부터 양육되어서 칭찬받아야 한다. 부르심에 순종하여 규례를 지켜야 한다. 각자 아내의 규례 남편의 규례 사장 사원의 규례를 잘 지키고 가정이 든든해지면 교회가 든든해지고 나라가 든든해진다. 자기 자리를 잘 알고 가야 한다. 주님과 나와 만난 기쁨이 있어야 한다.
[기도제목]
* 이지현
1. 신교제 신결혼
2. 발이 잘 낫도록
3. 건강을 찾는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4. 예배회복
*김교희
1. 엄마가 주일에 쉴수 있는 일자리가 잘 구해지도록 - 엄마 목장가게해주세요 ㅜㅜ
2. 동생이 교회에 마음 열수 있는 기회 주시도록, 그때를 위해 동생 말 잘 공감하고 들어주도록
3. 생활예배 잘 드리고 하루하루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고 갈수있도록
4. 큐페 잘 진행되고 큐페동안 은혜받을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