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동역자 2021. 2.14. 주일말씀
기도제목:
장승영
1. 말씀이 들려서 형제의식이 생기는 성령의 견고함주시길
2. 인간적으로, 인본주의로 결정하고 나서 후회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하루하루 말씀으로 구원을 위한 분별을 하고 적용할 수 있는 은혜주시길.
3. 혼자 일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알아가며 목장, 가정,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법을 잘 배울 수 있도록.
4. 남동생이 성령의 동역자들을 만날 수 있는 목장에 들어갈 수 있게 인도해주시길.
5. 부모님과 언니의 수행원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은혜주시고, 때마다 나를 도와주는 동생의 수고에 구체적인 감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6. 윤미와 혜진이, 예인이가 목장에서 함께 동역할 수 있도록.
7. 큐페 기도로 준비하고, 성령 충만주시길.. 방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
정지윤
1. 하나님이 내 안에 함께하시고 부데껴주시는 게 감사한데 예배를 들을 때 전후만 반짝하니 예배 목장에 잘 붙어가도록
2. 가계부 정리에 맞춰 생활하기 의식하도록
3. 마음이 예배와 형제의식(우리목장) 가운데 평안하도록
4. 회사 잘 섬기는 거.. 거창한 거 말고 그냥 거기서 감사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이은영
1. 앞으로 시작될 5,6월 호 업무 가운데도 감당할만한 지혜와 체력을 허락해주세요.
2. 큐페 은혜 많이 받게 해주세요.
3. 거처 문제 하나님의 때와 방법 인도함 받기까지 잘 인내하게 도와주세요.
4. 오프라인 목장 너무 좋아요. 만나서 편히 목장하는 날, 속히 올 순 없을까요?
5. 어머니, 동생의 구원을 위해.
차한나
1. 이번 주 수요일부터 월수금 알바 시작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잘 시작하고, 공부하는 시간에는 집중할 수 있고 지혜주시길.
2. 24일에는 아빠 혈관외과 진료, 18일에는 엄마 내분비내과 골다골증 진료 및 추가 검진받을 예정인데 그날의 일정 가운데 함께해 주시길.
3. 큐페온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거 잘 듣고 순종 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동역자 2월 14일
1차 전도여행에서 수행원의 사명을 중도 포기한 마가를 다시 데리고 다닐 수 없다면서 거절 한 바울이 인정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매몰찬 것 같아요. 독불장군 처럼 보일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바울은 늘 동역자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신약 성경에 동역자란 단어가 13번 나오는데 그중 바울 서신에 12번이 들어갔어요.
동역자라는 말 자체가 바울의 단어 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죠. 하나님도 혼자 일하지 않으셨어요. 삼위 일체 하나님 아시죠? 나아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 함께 일 하십니다. 바울도 2차 선교 전도 여행을 이제 아무리 사람을 의지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렇게 같이 갈 동역자가 필요해요. 그래서 실라를 택해서 같이 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듯 앞으로 바울의 가장 중요한 동역자가 될 디모데를 발탁합니다.
오늘은 성령의 동역자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성령의 동역자는 첫째로,
1.수행원이어야 합니다.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메 ampndash 1절 상반절입니다. 이 2차 전도 여행은 41절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여러 교회들을 심방하면서 교회들을 견고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6장 오늘 4절에도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 라고 했는데, 이게 미완료로 이 지방을 바울이 쉴 새 없이 계속 다녔다는 뜻이예요.
수리아 안디옥 지금 이제 떠났던 곳에서 루스드라까지 바로 안디옥이 수리아 지방이고, 그 다음에 길리기아, 다소 바울의 고향인데 길리기아 지방을 해서 1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더베가 갈라디아 지방이거든요? 그래서 여기를 이제 계속 다녔다는 뜻입니다.
이때는 바나바는 구브로 고향으로 돌아갔고 심한 다툼으로 갈라섰을 때이죠. 그러나 바울은 그 길리기아의 바로 위에 고향 다소가 있지만, 고향에 갔다는 말이 없습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데, 친척들이 옆에서 아무도 듣고 기뻐하지 않으니까 바울도 가족얘기만 하면 할 말이 없었을 것 같아요. 우리 전체 바울이 가정얘기 안 하는거 아시죠? 영육간 스펙이 너무 대단해가지고 가족들이 무서웠던 것 같아요. 진짜 한 마디도 안 했어요. 우리가 오픈도 너무 무서우면 할 수가 없어요. 바울은 영적으로도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기 때문에, 영육간에 또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잖아요. 그래서 가족의 다소를 지나면서도 들리질 않은 것 같아요. 겸손한 사람이 없고, 환경이 겸손하다고 했는데, 바울에게는 그런 애통함으로 잠시도 힘들다고 쉴려는 마음이 없게 하셨습니다. 가족뿐 아니라, 유대인 전체가 바울을 대적하니까, 정말 외로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절로 생명을 내놓는 이 힘쓰는 수고를 하게 하십니다. 아까 그 수리아 안디옥, 수리아에서 길리기아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이제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아마누스 산맥을 넘어야만 했는데, 거기에서 길리기아 지역의 심방을 마치고 갈라디아 지방을 넘어갈 때 토루스 산맥을 또 넘어가야 했습니다. 높고 험한 산맥을 두개나 넘어서 바울은 드디어 1차 여행의 정착지였던 더베에 도착합니다. 수리아 안디옥 에서부터 80키로미터 이상을 건너왔고 거기서 또 100키로미터를 넘어 루스드라에 도착합니다. 여행을 하면서 옆에 실라가 있지마는 정말 바나바 생각이 많이 났을 거 같아요. 여러분은 첫 사랑하고 헤어지고 나서 생각 많이 해봤자 말짱 꽝이니까 바나바를 생각 하면서, 이런 생각은 안 해야 될 생각이라는 걸 이럴 때, 그러니까 자기에게 맞는 동역자가 정말 필요한데, 우리는 의지하지 않아도 정말 일을 할 때 동역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루스드라는 어떤 곳인가요? 다른 어떤 곳 보다도 바울과 바나바의 팀워크가 빛을 발휘했던 곳이었어요. 거기에서 나면서 걷지 못했던 사람이 걸었던 기적을 보게 한 곳이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또 바울을 돌로 잡아 죽이겠다고 하는, 영광과 비난을 동시에 경험했던 곳이었는데, 이게 사명이 아니라면 여기 누가 가겠습니까? 산맥을 두개나 넘어서 강도의 위험과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
그러나 형제의식으로 갔잖아요? 여기를 안 왔다면 디모데를 어떻게 만날수가 있었겠습니까?
디모데는 이 모든 거를 넘어서는 그런 열매 거든요. 16장부터 이어지는 누가의 표현을 보면, 실라의 위치는 바나바처럼 바울과 대등한 동역자가 아니라 마가 같은 수행원이었던 것 같아요.
바울과 바나바를 두 사도라고 불렀던 거 같은 호칭도 없고 일차 여행때는 늘 바울과 바나바를 함께 기록했던 것 과 달리, 2차에서는 많은 경우에 바울만 단독으로 기록이 됩니다.
이것은 동역자를 향한 바울의 마음에 생기는 변화를 보여줍니다. 여러분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아무리 얘기해도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아서 오늘 다시 언급합니다. 이 전에 바울은 바나바를 정말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생각 해보세요. 1차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바나바가 설교 한 번 했다는 기록이 없어요. 그런데도 바울은 바나바를 계속 모셔야 했을 거예요. 근데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이제 보니까 자기가 설교 해야죠? 또 이방인들 전도 해야죠. 배척하는 유대인들도 섬겨야죠. 바빴지만, 마가처럼 바나바가 수행을 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되죠. 도리어 이 바나바까지 섬겨야 하는게 바울의 일인 거예요. 게다가 나면서 걷지 못한 자를 고쳐도 영광은 인물 좋은 바나바가 받아서 그를 제우스라고 하면서 루스드라 백성들이 열광을 했잖아요. 그런것이 문제가 된건 아니었지만, 자연히 그러니까 점점 바울은 바나바를 섬겨야되는 거예요.
그런데 맨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는데, 안디옥에서는 둘이 같이 성경을 가르쳤는데 많은 성도들이 섬겨줬으니까. 그게 드러나지가 않았는데, 이제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구브로에 도착해서 바울의 복음 전하는 능력이 너무 압도적이라서 거기서는 한 사람만 전했는데도 서기오 총독 바울이 전도가 됐잖아요. 일당 백을 하는. 너무 압도적이니까 저절로 바울에게 리더십이 갔다고 했어요. 이제 구브로 섬을 떠나서는 저절로 갔어요.
그런데 바나바가 그정도는 인정 하는거예요. 말만 하면, 바울은 회개를 시키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제 변화가 되는 거예요. 지금 1차 전도 여행 때. 근데 바나바 때문에 변화되는 사람이 있었단건 하나도 없고. 그 흔한 설교도 하나 없고. 그러니까 달리 열등감이 아니고. 바나바가 말하면 사람이 안 변하는 거예요. 거기서 열등감이 느껴졌으리라 생각 합니다. 그러니까 돌아와서 이방인과 밥을 안 먹은 척하는 외식사건이 일어난거예요. 이게 외식하는 사람들 열등감이 있을 때 유혹을 받고 이러잖아요. 게다가 예루살렘 총회에 같이 갔으나, 총회에서나 안디옥에서나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신뢰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서서 확신 있게 할례와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 있게 외쳐 주었다면, 미리 일이 다 끝났을 수 있어요.
근데 예루살렘 총회에서도 바나바는 말 한마디 안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바나바가 바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이해했어도, 자기가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이게 무슨 차이 일까요? 바울은 이미 10년 이상 풀무 망대에서 수고를 했습니다. 자기의 열심과 성경 지식으로 눈이 멀었었어요.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이쪽 저쪽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무너졌고, 그리고 고난중에 가장 큰 고난, 죽이려는 고난을 당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아세요? 나를 맨날 누군가 죽이려고 해... 이렇게. 그러면서 바울에게는 사람 보는 눈이 생겼습니다. 이게 하루 아침에 되는게 아니예요. 누구에게 줄 서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해야 구원과 연결되는 가를 생각 해야 하는데, 고난을 거치지 않으면 결정적일 때 분별이 안 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게 지혜의 근원이라고 하지만 그걸로 박사학위를 하라시는게
아니거든요. 바나바는 애초에 성품이 좋고 인정을 받으니까, 구원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바울하고 비교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안타까운 사람들이 일을 해야 성공을 합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구원 때문에 할 일이 생각나는 사람이예요. 그래서 전도 한 곳도 돌아보자고 하고. 예루살렘 가기 싫어도 갔고. 안디옥은 너무 머물고 싶은데도 떠났어요. 구원의 열정이 없으면, 이렇게 못합니다. 이거는 무서운 열심하고는 다른거예요.
그래서 그 윤여정씨가 어떻게 이렇게 연기를 잘 하냐고 물어 보니까, 내가 너무 아이들 데리고 살기가 힘드니까 온 몸에 절박,. 그러니까 연기가 잘 되더라고. 그게 살아있는 연기를 하더라고. 너무 안타까워요.. 그니까, 이제 2차 전도 여행을 가는데 바울이 바나바를 동역자로 모시기에는 너무 힘이 들게 됐죠. 바울이.. 왜냐하면 지금 동역자가 아니고 때마다 지금 신경 써야 되잖아요. 바나바를. 계속 결정도 둘이 다르고, 외식도 하고. 여러가지로. 바나바는 사도이지 수행원이 아닌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전적으로 바울을 돕는 수행원이 필요한 시대인거예요. 이게 너무 중요한 포인튼거예요. 바나바하고 그렇다고 헤어진다고 안 그랬어요.
마가 사건으로 헤어진거, 본인이 떠난거지, 바울이 떠나라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마가를 택한 거를 이렇게 이제..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는거죠. 동역을 하려면 이런 자기 자리를 알아야 하는데, 이게 다 공동 목회를 한다고 하다가 실패를 하는 이유는 머리가 하나여야 하는데 둘이니까 다 같이 죽어요. 머리가 둘인 뱀이 있었대요. 오래 살지 못하는거죠. 부족해도 어디나 머리는 하나여야 한다는 거예요. 그니까 집에서도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의 질서는 남편이 머리기 때문에 남편이 머리가 되어야 해요. 그렇다고 똑똑한 아내가 죽는 게 아니예요. 남편의 인격에 순종하는 게 아니고 역할에. 그 머리를 세웠을 때 결국 온 집안이, 아내도. 다 살아나는 거예요. 능력으로 하게 되면 다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나바와 바울은 생각이 너무 다른 거예요. 그럼에도 원어를 보면 바울은 구원을 초점으로 마가를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으로 데려가고자 했지만, 그것이 역부족이라는 자기 주재를 알기 때문에 이 구원을 위해 단 번에 거절 한거예요. 바울이. 이렇게 거절할 때도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도 책임지지 않고 사역도 책임 지지 못할 거면서 무조건 지금 데리고 가면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찌 이 일을 분별하겠습니까? 사람은 잠시 뒤면 이 일을 생각하기 싫어해요. 지금은 욕 먹는게 싫고, 지금은 돈 생기는 것만 좋아합니다. 책임지는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하기도 싫어 합니다. 바나바가 이 바울 사도의 말을 들었다면, 다투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같은 레벨의 사도라고 생각 했기 때문에 다투고 갈라서게 된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사실 바나바는 너무 착해보이지만 구원의 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교회 어록 있죠? 착한 것이 악한 것이다. 바로 이거예요. 이게 사실 가장 악한거예요. 바울이 너무 못 돼 보이지마는 가장 선한 선택을 한 것은 그게 구원의 선택이기 때문이예요. 왜냐하면 이 후에 바나바는 사도행전에서 사라지잖아요. 하나님이 바울 편을 들었어요. 성경이 이렇다는데, 여러분은 자꾸 성경을 넘어가는.. 그런 인도를 자꾸 받으려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절대적으로 지금 수행원이 필요 했는데, 마가가 저절로 자기가 결정하고 떠난 거예요. 바울이 한 번도 떠나란 소리를 한 적이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너무 해석을 못 하기 때문에 오늘 다시 한 번 설명을 했는데도, 이런 해석조차 안 들릴수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바나바이거나, 유대인.. 구속사가 안 들리면, 말씀도 안들리고 아주 그놈의 구속사라면 듣기 싫다고, 아주 구속사라면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그렇게 있어요. 지금 바울하고 바나바하고 그렇게 싸우잖아요. 그래서 바울파하고 바나바파하고 모여서 손 들잖아요. 유교적인 우리 문화에서 사실 바나바 편을 지지하죠. 한 사람을 끝까지 품고 가야지. 그래서 구속사가 힘든거예요..
구속사가 1+1=2. 이렇게 되면 얼마나 쉽겠어요.. 그런데 이게 영 적인 거니까, 깨닫기가 어렵고. 바나바가 그렇게 바울과 같이 다녔는데도 이게 안 깨닳아지는데.. 여러분들이 어떻게 깨닫겠습니까? 사도행전을 묵상하면서 적용이 다르지만 이 내용은 옛날에도 똑 같았어요. 제가 옛날에 설교한게 오늘하고 똑 같다고 어떤 목사님이 아까 저한테 말 해주시더라고요.
적용: 바울과 바나바에 대해서 이번 주일에 다시 한 번 나눠 보세요.
여러분은 어디서나 수행원입니까? 대접받으려는 사도 입니까?
물론 본래 사도의 의미를 말 하는건 아녜요. 여기에서, 이 입장에서 사도냐.. 수행원이냐.. 이걸 나눠 보라는 거죠.
한 목자님이 부목자가 양육 훈련을 받고 있는데, 양육 숙제, 목보까지, 힘들다는 생각에 제가 목원들에게 목장 보고서를 좀 ampndash 부목자님 양육 받는 동안에 좀 돌아가면서 쓰자는 의견을 냈더니 모두 ok해서 진행되고 있대요. 그러니까, 부목자님도 목원들의 형제의식에 감동하면서 양육 과정을 잘 마칠 수 있도록 하겠다.. 이게 양육 받을 때까지 유연하게 도와줄 수도 있는게 사실 동역자 아니겠습니까? 대단한 사람만 동역자 되는게 아니구요. 그러나.. But 부목자님 들 중에서는 보고서를 쓰지 않는 분도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 이렇게 취합해서 올려준다.. 뭐 부목자때는 그게 양육이기 때문에 부목자가 목장 보고서를 쓰는 게 가장 휼륭한 양육이기 때문에 그걸 넘기시면 안되는 거예요. 그 분들은 성령의 동역자가 되셔서 쓰시기 바랍니다.
2. 제자여야 합니다.
1절 중반절 입니다. ampndash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ampndash
이제 지난 번 15장 41절부터 오늘 16장 4절 까지 바울이 열심히 다녔대요. 이게 다 미완료 입니다. 그랬더니 5절에 교회가 이제 부흥 했다고.. 이 얘기를 계속 수리아.. 길리기아.. 갈라디아 지방을 다 다녔는데, 여기서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1절부터 3절까지 디모데 얘기만 하나가 나오는 거예요. 수 많은 곳에 방문을 능가해서 언급 할 사람이 한 사람 디모데 제자라는거예요.
바울을 다 배척을 해도 이 한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신약이 전해져 오는 것이고 이런 동역자를 한 사람씩 찾았기 때문에, 동역자 한 사람이 없고 제자 한 사람이 없어서 그 교회가 망하는 거예요. 사람이 많다고 다 제자가 있고 수행원이 되는 건 아니죠. 디모데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이름 뜻을 지닙니다. 그래서 여기, - 제자가 있으니 ampndash 이것도 미완료 과거동사로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기 전부터, 바울의 1차 선교 여행 때부터 이미 제자가 돼서 살고 있었다는 거죠. 계속. 제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 라는 의미로써, 복음의 가르침을 받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을 따라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를 말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는 사도보다는 자기 말을 듣고 반응해서 적극적으로 적용 하고 사는 이런 제자가 지금, 수행원으로 필요 한거죠.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듯 쓰러졌을 때, 제자들이 그를 둘러쌌다고 했어요. 그 제자들 중에 디모데가 있었겠죠. 그리고 이제 바울은, (디모데는 바울이 겪은 일을 다 봤어요.) 그래서 후에 디모데후서 3장 11~12절에 ampndash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ampndash
수 많은 박해를 받았다는 거예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본 바울이 주님의 수행원이 된 것 처럼, 디모데도 바울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면서 이 박해 충만한 삶으로 변론하는 바울을 통해서 그 때 바울이 돌에 맞을 때에 스데반 같은 그 천사의 얼굴을 하는 것을 디모데가 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이렇게 -, 제자 이어야 하고, 성령의 동역자 세번째는,
3. 가정에서부터 말씀으로 양육되어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1절 하반절 이예요. ampndash 그 어머니는 믿는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인데, 바울의 1차 여행 때 예수를 믿게 되었겠죠. 그리고 그 이름은 디모데후서 1:5절에 보면, 유니게예요. 외조모는 로이스고. 그런데 유대 여잔데 헬라인과 결혼을 했다는거죠. 그 당시에는 흩어진 디아스포라 사람들이 유대인 만나기가 어려웠겠죠. 그래서 이런 불신결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불신결혼은 죄악이죠. 그러므로 이제, 그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행하지 못한 것 같아요. 왜냐면, 난지 8일 만에 행해야 하는데, 헬라인 아버지가 할례는 무슨 할례냐 이랬을 수가 있죠.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가르쳤어요. 그래서 디모데후서 3:15 ampndash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지혜가 있게 하니라 ampndash 그래서 성경 지식만 가르친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서 사는가. 이것을 보여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방인 남편하고 살면서 삶으로 밖에 보여줄 수가 없으니까, 남편한테 어떻게 순종하고 사는지, 말씀대로 어떻게 순종 하는거를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보았기 때문에 엄마 그 한 사람의 역할로 온 집안 식구가 믿음으로 서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여자가 그 안 믿을 경우에는.. 정말 자녀들이 믿기가 더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좋은 어머니는 백 사람의 학교 선생에 비길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엄마의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고, 아버지하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예. 그리고 이제
2절에 칭찬을 받아요. ampndash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자니.
믿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디모데의 태생은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약점이 되는거죠. 유대인들이 제일 무시하는 게 혼혈족이잖아요. 디모데가 혼혈아예요. 헉 ampndash 이렇게 되는거예요. 어떻게 지도자가 되겠어요. 동역자가. 그런데 칭찬을 받는자니. 이게 또 미완료가 되서 디모데는 어쩌다 칭찬을 받는 게 아니고 계속 칭찬을 모두에게 교회에서, 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이고니온은 거기서 30키로 떨어져 있거든요. 그러니까, 전방위적으로 칭찬을 계속해서 받아왔다는 것은, 엄마의 양육이 성경적이었다는 것이고요. 그러면 또 사람들은 그러죠. 하나님만 알아주면 됐지,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건 인간적이야. 그것이 성경보다 넘어가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디모데가 칭찬만 받았을까요? 욕도 당연히 먹지만 또 칭찬도 너무 받는 거예요. 바나바는 모두가 칭찬을 하죠. 바울은 너무나 모두가 죽이려고 하지만, 한 쪽에서는 또 살아난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너무 칭찬만 받는 거. 그것도 안 좋은 거예요. 맨 처음에 예수 믿을 때는 칭찬을 좀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바울이 진짜 모두에게 욕을 먹은 건 또 아닙니다.
그래서 모두를 택할 때, 신, 불신, 교인이나 외인에게 선한 증거를 얻은 자 가 장로의 자격을 얻은 자라고 디모데전서 3장 7절에 나오는데 평판은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나, 이게 성경을 쭉 읽어보면, 바나바 같은 평판이 있고 바울과 같은 평판이 있잖아요?
그런데 바나바는 그때까지 은사인거예요. 바울을 섬기는 때 까지 은사인데, 더 복음의 그릇이 넓어지는걸 감당을 못 하는거죠. 바나바가. 성경을 보면 되요.
적용: 명절을 지나며 불신자나 가족이나 또 신자에게 칭찬 받은 일이 있었나요?
이번 주 목자님이 간헐적으로 목장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건설사 임원이 현장으로 오란 말에 안 갈 수 없어서 빠지게 됐는데, 이 분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핍박을 했는데, 지난 주 하는 말이 아니.. 그렇게 핍박을 해도 교회에 빠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이 분이 우리들 교회 목자라 설명을 구원에 대해서 짧게 했더니, 너무 놀랐다면서 다시는 주일 날 당신을 부르지 않겠다고.. 이게 외인에게 칭찬 받은 잖아요? 그래서 놀라서 큐티인을 보냈고, 교회에 초청하기로 했답니다. 서로간에 관계가 더 돈독해졌어요. 우리가 줄 잘 서서 승진할 것 같아도, 내가 하나님이 목적이 되면 이 세상의 돈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놀라서 물러갔던 돈도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지금은 예수 때문에 망하나 후에 흥하고, 지금은 흥하나 예수가 없다면 나중에 망하게 되어 있어요. 적용이 가장 중요한 거예요. 망하거나 흥하거나 오늘 적용 말씀대로 하면, 이 분 처럼 이런 열매가 또 있고. 내가 계속 핍박을 받는다고 그러면, 그건 또 인내해야 될 시간인거고요. 이분은 작년에 너무 힘들었지만 새로운 프로잭트를 진행하며 관행과 리베이트 없이 진행하려고 굉장히 노력하고 있다고. 이런 분들이 다 동역자 아닌가 싶습니다.
4. 부르심에 순종하여 규례를 지켜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건 규례를 지켜야해요. 예수 믿는 사람이 규례를 지켜야해요.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프리카를 가는게 아니고, 규례를 순종 해야 되는거예요. 3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ampndash 여기서 또 유명한 데리고가 나오네요? 데리고 -그 지역의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리고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 ampndash 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좋은 양육을 받고 교회에서 칭찬도 받고 있던 디모데가 바울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같이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한테, 큐티를 하는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이 또 생길거예요. 그런데 바나바도 마가를 데리고 가고 싶어했잖아요? 그런데 바울도 디모데를 데리고 가고 싶어해요. 왜 바나바는 안되고 바울은 되나요?? 이런 질문이 생기나요?
왜. 이 둘 차이는, 마가가 중간에 한 번 배신을 하고 떠난게 참 결정적 차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또 원어의 표현을 보면, 바나바와 바울의 태도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는거예요. 바나바는 마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데리고 떠나기를 ampndash 데리고는 ampndash 부정과거였지만 지속적으로 가고자 한 것은 미완료로, 지속적으로 고집했다고 했잖아요?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가 스스로 자신을 따라나서면 좋겠다는 의사를 여기도 부정과거로 했지만 딱 한 번 표현 했어요.
이게 무슨 말인가요? 바나바는 자기 뜻대로 한 반면, 바울은 디모데의 선택에 맡긴 거예요. 바나바는 마가가 같이 가야 한다는 답을 자기가 정해 놓고 고집을 부린 반면에, 바울은 디모데를 동역자로 부르지만 그 결정은 디모데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 아닙니까? 아닙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왜 심히 다퉈서 갈라섰는지 이제 이해돼십니까? 아직도 안 됩니까? 디모데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과정은 루스드라 교회의 공식적인 파송도 포함됩니다. 바울도 처음에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떠났잖아요? 그런데 디모데도 루스드라 교회에 파송을 받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회에서 안수 받을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우리는 1차 여행을 마치고 귀환하면서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던 거 기억 하시나요? 각 교회 장로들을 세웠어요. 그래서 디모데를 바울의 동역자로 파송하면서 루스드라 교회에서 안수를 한 거예요. 이 때 주님께서는 이 파송을 응원하시는 뜻으로 디모데에게 예언을 주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디모데를 복음의 동역자로 세우기 위한 바울의 부르심도 있고, 교회의 파송도 있고. 주님이 직접 주신 은사도 있습니다. 디모데는 이 모든 것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 바울을 따라 나섰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곧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첫 발을 딛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동역자로 따라 나서며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할례를 받았다는 거예요. 바울이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 때문에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고 해요. 지금 바울은 이방인은 할례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이 편지를 가지고 다 전하러 다니는 거 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디모데에게 할례를 왜 행할까요? 디모데가 아까도 말 했지만, 아버지가 헬라인이고 엄마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지도자로는 결격 사유가 있다고 유대인들이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들의 고정관념이기때문에요. 굉장히 흠이라고 생각 하는거예요. 게다가 예루살렘 교회 편지는 유대인 입장에서 보기엔 이방인 위주로 그 편지가 써졌다고 생각 하는거예요. 뿐만 아니라 편지 내용을 전하는 사람이 유대인들로부터 그렇게 비난을 받고 있는 바울인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유대의 율법과 정체성을 무시하고 훼손한다고 오해를 했습니다. 물로 바울은 할례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에서는 확실했어요.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 이니라.
할례가 예수믿고 구원받는 일에는 아무 역할도 못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디모데처럼 바울의 동역자된 디도의 경우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게 했어요. (갈라디아서 2:3) 하지만 바울은 할례를 안 받아도 된다는 이 비본질적 원칙에 얽매여서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시험에 빠트리지 않았어요. 유대인으로 인정되는 디모데가 할례를 안 받은 채 복음의 사역을 하는 것 때문에 시험이 들 유대인들을 배려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유대인들이 믿음의 공동체에 붙어있는 그 본질적인 사역을 위해서, 비 본질적인 할례 문제에 대해서 양보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실제로 바울은 구원 때문에 타협하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타협은 바울이 하는 거예요. 바나바가 타협하는게 아니고요. 바나바는 고집이고요. 이제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 세 사람이 성령의 부르심으로 성령의 동역자가 되어 전도했던 갈라디아 남부의 여러 성으로 다녀가면서 이방인은 4가지. 곧 우상숭배와 음행과 목매어 죽인 고기와 피를 멀리하도록 가르쳤고요. 유대인들은 이 4가지 금지 외에 할례를 비롯한 다른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괴롭히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규례를 지키도록 가르쳐야 했으니 유대인 어머니를 둔 디모데가 먼저 할례의 규례를 지켜서 흠이 없는 유대인으로 인정받아야 했던 것이죠. 왜냐하면 전도는 유대인에게도 가야 되는 거거든요. 이방인을 위해서는 이런 디도가 필요하고, 유대인들을 위해서 디모데가 필요한 거죠. 말이 아닌 삶의 변론을 해야 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받지 않아도 되는 할례를 규례에 따라서 받은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이 적용은요, 제일 중요한 사람이 디모데죠. 어른으로서 할례를 받는 다는건 굉장한 고통이거든요. 그당시 진통제, 항생제도 없었을 탠데. 그 고통은 바울이 받는 게 아니고 디모데가 받아야 하는거잖아요. 이거는 디모데가 적용한건데. 그래서 바울이 진짜 본질을 위해 비본질을 양보하는 적용을 디모데가 해준거죠. 디모데는 이렇게 살을 떼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규례를 지키는 순종으로 부르심에 응답하여 교회를 말씀으로 양육하는 바울의 최고의 동역자가 된 샘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부름에 응함으로 이 때는 바울이 형편없었잖아요? 그죠. 모두가 무시하고. 세속적인 장래를 포기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22절에는 ampndash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자가 내게 없음이라. 22절- 자식이 아비에게 함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 하였느니라- 바울이 사역하는 동안 언제나 따라다닌 사람이 디모데 였습니다. 바울은 13통의 서신서를 썼는데, 2통이 디모데에게 쓴 거예요. 디모데는 자기가 글 하나 쓰지 않고 디모데서를 남겼어요.
그리고 또 고린도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서두마다 나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기억 나시죠?
형제나 아들이라는 표현을 계속 써주었어요. 디모데에게. 그것은 나이차가 있지만 영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고요. 실제적으로 디모데는 전도 여행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그리고 마지막 감옥에서도 디모데야 외투와 성경을 가져오라 ampndash 예. 그때도 언제나 바울 주변에서 끝까지 도왔고 언제나 사역을 같이 했습니다. 그러니 디모데를 만난 것이, 지금 수리아 갈라디아 지방 전도,. 모든 사역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맞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것 중에 사람 한 사람을 찾아내는게 시작이요 진짜 마지막인 거예요. 5절 :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더 늘어가니라 ampndash 이에는 결과를 15:40~부터 쭉 다니면서 비롯되는 결과를 : 여러 성으로 다녔다.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녔다. 그게 다 미완료기 때문에 아주 쉴 새 없이 여러 성을 다녀가니까, 4절에 여러 성을 다녀가니까 5절: 여러 교회들이 굳건해졌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가만히 앉아서 교회가 굳건해지는게 아니라 전도를 열심히 하니까 교회가 굳건해지는 거예요. 여러 성. 그건 교회가 아니잖아요. 여러 성을 다니니까, 교회가 굳건해져요.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인거죠. 전도도 잘 하려면 교회가 정한 규례들을 준수해야해요. 그래야 올바르게 성장합니다. 우리도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 하는데 그 비결이 오늘, 날마다 잖아요. 말씀을 한절 한절 날마다 적용하니까 믿음이 굳어질 수밖에 없고 굳어지니까 수가 더 할 수밖에 없어요. 교회만 간다고 되는게 아니라 제자가 되어야 하고, 성장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인데 성장이라는건 규례를 잘 지켜야 되는거, 원칙을 잘 지켜야 되는거예요. 이 코로나.. 전국에서 우리가 이 본질을 붙잡고 있으니까, 우리들교회가 성장할라고 애쓴적이 한 번도 없는데 날마다 큐티하고 적용하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공동체 성장을 보여 주십니다.
적용: 가정과 일터에서 구원을 위해 양보 해야할 비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요?
또 날마다 빼놓지 않고 반드시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중에 말씀 묵상은 몇 번째 입니까?
네. 성령의 동역자라고 대단한 사람만 아니고 우리 모두 동역자이기 때문에, 지난주 이제 이렇게 목자님의 나눔이었어요.
우리들교회에 온지 5년이 넘었는데 내 열심과 의로 예배를 드리니 권태기가 와가지고 딸에 이어 아들까지 고등학교를 자퇴하는 자녀 고난을 겪으며 아.. 나와 맞지 않는 교회구나. 불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이제 고난이 없으니까 일이 크게 다가왔어요. 그래서 다른 교회 가려는 고민을 했습니다. 나는 기도를 좋아하는데, 우리들 교회는 말씀만 강조하니 더욱 어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이런 이원론은 안들린다는 뜻이예요. 말씀을 보면 기도하게 되어있죠. 자녀고난에 아내와 갈등도 생기니 하나님께 기도드리게 되었고 기도내용중 가능성은 없지만 내년에 목자의 사명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연말에 설교 내용이 나와 잘 맞는 목사님을 찾았고 그 교회로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첫주에 목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교회 규칙을 깰 수가 없어서 두주간 인도했지만 기쁨이 없고 생색만 가득차서 시골에 계신 노부모를 자주 찾아뵈야 하는데 목장 목자모임.. 주일날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결국 교회 옮길 이유가 교회 예배를 스리살짝 들어냈다는거. 아니예요? 왜 주일날에 부모님 찾아뵈요? 그런데 이제 고민 끝에 목자를 내려놓고 다른 교회로 가겠다. 하고 목자모임에 안나왔어요. 야고보는 변론을 통해 모든의견을 끝까지 듣고 한 마음으로 결정했는데, 내가 중심이 된 저는 공동체와 한 마음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전 사건을 통해 모든 부분을 회개하며 목자의 사명은 성령의 결정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마음으로 목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며 동역자로 가겠습니다. 이렇게 이 분이 하니까, 평원 목자님이 이렇게 처방을 했어요. 아니 목사님도 (저죠) 이곳에 꼭 남아있으라는 말씀 안 하시잖아요. 모든 양육 받고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다고 하시고 말씀에도 성령의 은사를 받고 흩어짐이 있다고 하시니 언제일지는 몰라도 그때까지 잘 붙어 계셔서 가시기 바래요. 오늘 말씀으로 줄줄 꿰는 간증에 놀라웠습니다. 성령 충만이 갈등충만이라고 하시니 이제 자녀고난에 목장까지 지고 가셔야 하니 더 힘들어질 것이 뻔히 보이는데, 그러나 오늘 견고케 하신다고 했으니 하나님께서 이겨낼 힘도 주실 줄 믿고 있습니다. 걱정 마시고 한 걸음 한 걸음 나가시면 좋겠어요.
저는 대단한 사람만이 동역자가 아니라 이런 것들이 성령의 동역이고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세워줌인 것 같습니다. 성령의 동역자는 또 한 목원이 회사에 화재가 났는데 직원들보다 목장식구들이 먼저 왔다고..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을 하시는 거예요. 올 해 성령의 동역자가 된 분들은 청년부에 엘더들이라고 생각해요. 청년부가 2천 5백명이나 되는데 사역자가 7명이 있어서 이걸 감당 못하잖아요. 이것이 큰 문제였는데 일곱부서로 나뉘어져서 남녀 마을님들을 각 부서에 6명, 3명씩 남기고 그래서 40여명이 각 부서에 청년 주일학교 교사로 부르심을 받아가지고 양육과 상담에 투입이 됐는데 한 달 밖에 안지났는데 지금 놀랄만한 도움이 되고 있는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들교회 마을들 목자님들이 약재료들이 많잖아요. 아이들한테 이렇게 공감을 해주는 청년부. 대단합니다. 전 이야말로 성령의 동역자가 아닌가 싶은데 그동안에 혹시 그래도 청년들이 이렇게 나와서 늘 간증하고 받아들이고 또 여기서 뭐 별에별 얘기를 다 해도 우리 청년부들이 아직 17년 동안 이 많은 청년들이 이혼도 하나도 안하고 이거 너무 기적이죠? 이게 말씀 때문인거예요. 아니 왜 문제가 없겠습니까? 우울증에 별거 다 많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 때문에 가니까 마지막에는 바나바로 있다가 바울로 결정을 하니 , 목장에서 구원 때문에 이혼은 아니다. 구원 때문에 회사에 붙어있어야 된다. 이런 얘기를 걔속해서 들으니까. 우리는 이혼을 한 번도 안 했다는게 이게 지금 정말 성령의 동역을 서로 다 같이 해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맺습니다.
성령의 동역자는 수행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여야 합니다. 그것은 가정에서부터 말씀으로 양육되어서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큐페온에 부흥회는 정말 처음 하는건데, 여러분들 그런거 학원가라 그러고. 그 다음에 뭐 하지 말라고 하시면 실수하시는거예요. 잘 들으시고 부르심에 순종하여서 아프리카 선교 가는 게 아니고 규례를 지켜야 합니다. 각자 아내의 규례. 남편의 규례. 사원의 규례. 사장의 규례. 이거를 잘 지키고 가정이 든든해지면 교회가 든든해지고 나라가 든든해지고. 우리가 나가서 대모 안 해도 너무 든든하게 다 자기 자리를 잘 알고 갈 때 주님과 나와 만나 기쁨이 있어야 될 거 같아요. 찬송하고 기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