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7일, '성령의 견고함' (행 15:36-41), 김양재 담임목사님
초대교회가 할례와 율법 문제로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교회 두개로 쪼개질뻔 했지만 성령의 결정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러면 앞길이 열렸으면 좋겠는데 본문 보니 가장 큰 갈등상황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갈등충만은 성령충만이라 한 것 처럼 그 갈등은 성도를 견고케 한다.
찰싹거리는 파도를 지나야 깊은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나 깊은 바다로 들어갈수록 어떤 상황에도 요동함이 없다. 오늘은 성령의 견고함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안디옥 교회가 할례 문제로 흔들리고 있었다.
많은 이방인을 전도하고 세계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여 여러 교회를 세우기도 했는데, 율법주의자들의 거센 공격을 받아 기초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율법을 지켜야 할지, 아니면 이단될 것을 감수하고 무시해야 할지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지난주 32절과 오늘 41절의 '견고하게 하다' 는 흔들리는 것을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다 는 뜻이다. 즉 기대거나 붙어있을 지지대가 없어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을 튼튼한 지지대에 붙이는 것이다. 흔들림을 멈추게 한 지지대가 31절 부터의 유다와 실라가 전한 위로의 권면의 말씀, 주님의 말씀이었다.
말씀이 들리면 마구 흔들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돈과 환경이 아니라 말씀이 들리면 그렇다. 바울과 바나바도 유다와 실라가 말씀을 전한 그 여세를 몰아 수다한 다른사람들과 함께 사명의 자리를 찾아 유하며 사명의 자리를 닦아서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했다.
그러면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이 들릴 때, 제대로 들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인가? 계속 강조했듯이 형제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안디옥 교회를 말씀 안에서 뿌리내리고 자라나게 하는 일에 전념하던 중 1차 전도여행 중에 말씀을 전했던 형제들을 다시 가서 돌아보자고 바울이 제안한다.
여기서 며칠 후에 는 길어야 두세달 밖에 안되는 기간이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이후 사도바울이 잠시도 개인적인 일로 시간을 보내지 않고 하나님 일에 매진하였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도 지닌다. 안디옥에서 사람을 변화시키며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칭함 받게 된 것이다. 그때 성령이 강권적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1차 선교여행을 보내셨다.
근데 2차는 거창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고 자신이 전도한 형제들을 다시 돌아보자는 소박한 생각으로 떠난 것이다.
이런 형제의식이 참으로 견고함인 것 같다. 궁극적으로 성령의 역사이긴 하지만 이렇게 소박하게 떠났던 형제의식이 대단한 유럽전도를 가져왔다.
지나고 보면 항상 형제를 돌아보는 이런 사람을 쓰신다. 늘 형제의식이 나온다. 머리로 알지만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은 참 어렵다. 그러니 형제의식은 아무리 지나쳐도 강조함이 없다. 설교를 아무리 해도 형제의식 때문이고, 교회 나오는 목적이 형제의식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떨 때 요동하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요동한다. 가족 목장 회사 관계 전부가 평안해지는 것이다. 성령의 결정을 하면 형제의식의 축복을 주신다.
목사가 설교만 잘 하면 된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대인 회당장들이 얼마나 설교를 잘 했겠는가? 그들도 자기들끼리의 형제의식이 대단하다.
그러나 바울에게 항상 있는 형제의식은 이방인도 유대인도 전도한 자도 형제이다. 이런 형제의식이 참으로 진정한 형제의식이고 사람을 견고케 하는 것 같다. 이 형제의식 때문에 그는 편지에서도 성도를 직접 방문하고 싶은 마음을 종종 표현했다.
이미 1차여행에서도 그는 성도들을 심방하기 위해 더 짧고 편한 길을 마다하고 토로스 산맥을 다시 돌아왔다. 이방인 성도의 할례 논쟁으로 시작된 갈등이 성령의 결정으로 해소되었지만 실제로 이미 유대인의 핍박이 있는 곳이니 할례주의자들의 공격이 얼마나 큰 위협이 될 지 뻔했기에 공격이 시작된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등의 상황을 매우 염려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편지를 빨리 가져다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는 안디옥에서 돌아와서 아주 안정된 사역자가 되었다. 선교도 성공했고 예루살렘교회에서 인정도 받았다. 이렇게 완전히 안정된 곳을 내려놓고 형제들을 돌아보고자 한 것이다. 전 이것이 견고함이라 생각한다.
바울이 제안하는 이 제안은 15:14에 나왔던 '돌보심'이다. (파카드, 에피스케토마이)
성령의 결정에 따라 이방인을 괴롭히려 했던 죄에서 돌이켜 마음을 활짝 열고 다시 이방인에게로 향하는 교회의 적용을 바울이 대표 하여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 부정과거로 썼는데 결정에 단번에 따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바울의 관심은 항상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구원의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 형제의식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형제의식이 없다면 돌봄이 자기 의가 되고 만다. 돌보아도 형제의식이 없으면 무섭다. 유대인들도 형제를 잘 돌본다. 그러나 형제의식이 없다. 형제의식과 끼리끼리는 다르다.
'형제'라고 하면 베드로 야곱의 '형제들아' 라는 간증을 기억하고 듣기를 바란다
적용) 거친 파도가 와도 날 견고하게 하는 것은 형제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정되세요?
형제의식이 가장 발휘되는 곳이 목장이다. 목장에 붙어있는 것 때문에 주시는 축복은 대대손손 내려갈 것이다.
세상 모임에 가면 이런 영양가 있는 나눔을 어디서 하겠는가? 목장은 천국 공동체이기에 인내 연습 말하기 연습 듣는 연습도 하는 최고의 장소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이런 훈련 하면 축복받을 수 밖에 없다. 청년부에서 늘 나눔하며 훈련했기에 결혼하고 아무도 이혼 안하는 것이다. 청년부에서 늘 나누는 훈련을 하니 한 마디를 해도 잘 들어낸다. 목장이 축복의 근원이다
어머니는 저를 못보고 가셨으나 딸인 제가 사명자가 되어 걸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진정한 형제의식은 당대라도 후손으로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섬김을 손톱만한 것도 다 기억하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다 기억하신다.
적용) 여러분은 목장에서 어떤 목원인지 나눠보세요. 끊임없이 돌보고 있습니까 돌봄을 받고만 있습니까?
가자고 하니 바나바도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가고자 했다. 그러나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다.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 출신이다. 영적 육적 다이아몬드 수저이다. 게다가 바나바의 조카이다. 바나바가 많이 아낀 혈육이다. 그러니 마가를 잘 세워주는 것이 교회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1차여행에도 데려갔었다.그러나 마가는 토로스 산맥을 앞에두고 밤빌리아 버가에서 힘들다고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아 루스드라 더베에서 세운 교회는 구경도 못했다. 그가 돌아가는 순간 힘들어 못한다고 했으니 바울이 얼마나 화가 치밀었겠는가? 그러나 마가가 예루살렘 가서는 부끄러웠을 것이다. 걸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을 바나바는 바울의 제안을 받자마자 마가를 생각했다. 그 수치를 다 씻어주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가를 데려가자 하는데 바울이 반대한다.
바울은 밤빌리아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을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고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일로 평가한다. 바울이 판단하기에 마가의 중도포기는 자신들을 배신한 것 뿐 아니라 이방선교의 사명도 배신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한번 배신한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은 바울에게 옳지 않은 일이라 언급한다. 단순히 옳고 그름으로 판단했다기 보다는 이번 일을 심각하고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 지역이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으로 얼마나 휘청거릴 지 알기 때문에 언제든 포기하고 돌아갈 수 있는 마가를 데려갈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때 바울 편을 들겠는가 바나바 편을 들겠는가?
바울의 가차 없는 거절과 바나바의 맹목적인 애정이 충돌하니 어떻게 되는가? 이럴 때는 원어로 살펴봐야 한다. 그러면 누가의 뛰어난 문학적 자질을 발견할 수 있다.
37절의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은 마가를 단회적으로 마가를 데려가자고 생각했고, 데리고 가고자 한 것은 바울에게 계속 지속적으로 말했다는 의미가 있다. 전도여행을 끝까지 할 만한 사람을 선택했다고 하기 보다는 조카에게 한번도 기회 주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38절에 바울이 같이 데리고 가는 것은 지속적인 행위로 같이 데리고 가는 것을 말한다. 한번 데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의 일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데리고 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나바 바울의 큰 차이다. 바나바에게 있어서는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은 단지 한번 데리고 다닌다는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지만 데리고 가는 것은 끈질기게 요구한 것이다. 그것은 사실 마가보다는 자기의 체면이 더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마가를 데리고 가는 일은 끝까지 가야 하는 것이기에 괴롭히는 것이 지속적 반복적 습관적으로 한 것 처럼 신뢰감이 없는 사람과 지속적 반복적으로 부딪혀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겨줘야 한다는 문제라고 생각한 것을 시제의 차이를 통해 읽을 수 있었다.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역해야 하니 데려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 안된다는 확고한 생각이었고, 바나바는 한번 데리고 가자고 한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바나바의 원함과 바울의 판단 간의 충돌을 볼 수 있다. 바울은 마가의 행동을 근거로 평 가내렸지만 바나바는 조카라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원함을 말하고 있다. 바나바는 감성 바울은 이성, 바나바는 정으로 바울은 구원의 시간을 가지고 접근하니 좁혀질 수가 없다. 가족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고 싶은 바나바는 마가의 객관적 평가로 거절하는 바울이 너무 섭섭하다. 반대로 구속사의 귀한 사역을 위해 최대한 믿을만한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이성적 판단이 너무나 당연한 바울은 혈연에 얽매여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는 바나바에게 실망한 것 같다. 그래서 39절에 서로 심히 다투어 심히 갈라섰다고 했다.
이방인들 눈에도 제우스와 헤르메스라 보일 정도로 환상의 팀 사역을 했고 단짝이었던 두 사람이 심히 다퉈 갈라선다. 사실 두 사람의 갈등은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에서 시작되었다. 7절의 베드로의 '형제들아' 간증에서 봤지만, 갈리디아 2장에서의 바울은 안디옥에 온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주의자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 안 어울린 척 했다고 했다. 근데 그때 바나바도 외식에 유혹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은사도 몰라보고 저럴 수 있나 할 것이다. 그런데 11절에 그렇게 책망하고 나서 20절에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하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베드로를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직 예수 위해 사는 사람이니 혈연 다 따지면 복음 전파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니 인본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바나바에게 직접 뭐라 하지 않았어도 상황에서 바나바도 유혹되었느니라고 하니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불편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바울이 보기에 바나바는 자기와 함께 이방선교까지 같이 갔다온 선교사인데 어떻게 베드로를 따라 외식 하나 하며 마음이 안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나바가 보기에 바울은 자신이 추천해서 교회로 데려온 사람이고 자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자신의 행위를 비판할 수 있나 원망스러웠을 것 같다.
그럼 바울이 너무 원칙주의자 같은가? 정확한 성격이라 그런가? 복음에 목숨을 걸었기에 그렇다.그에 비해 바나바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안좋은 상황의 이런 갈등이 있다가 마가를 두고 터진 것이다.
인본적으로 생각하면 두사람의 갈라섬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두 사람이 싸우고 갈라서는 사건은 기복적인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해석이 안되는 일이다. 성경은 구속사적으로 차례차례 읽어가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어떤 사건이 와도 구속사적으로 읽지 않으면 해석이 안된다. 억울하고 분해서 살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구속사적으로 잘 읽어야 한다. 구속사적으로 본다면 이 갈라섬의 사건은 특별히 이 이방선교를 이어가야 하는 바울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건이다. 사람을 전혀 의지하지 않도록 일어난 사건이다.
바울은 참 외로웠다. 누구보다 유대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근데 그 유대인에게 시기와 미움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다. 편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바나바가 유일한 친구이다. 바나바가 있었기에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올 수 있었고 안디옥에서 사역할 수 있었다. 옆에서 편이 되어주고 위로되어주는 바나바가 없었다면 1차 전도여행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 할례 논쟁에서도 예루살렘교회에 호소할 수 있는 것은 바나바 때문이었다. 바나바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그러니 아무리 강직한 바울이라도 저절로 바나바가 의지되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뭘해도 나에게 돈주는 안믿는 친정엄마가 시어머니가 최고다. 못 내려놓는다. 그런데 같이 복음도 전하니 더 그렇다.
인간이기에 바나바에게 기대는 마음이 없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의 구원사역을 통해 바나바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유대인 이방인 전쟁이 치열한데도 외식했다. 게다가 마가 사건에서도 인본적인 태도를 보이는 실수를 한다. 바나바 성품의 클라이막스가 여기에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선 사건이 바나바나 바울이 사람을 의지하던 마음을 온전히 깨닫고돌이키는 계기가 되었다 생각한다. 그러니 갈라섬의 사건이 화가 아니라 복이다. 갈라섬을 통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하셨다. 따라서 사람을 의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성령께서 견고하게 하시는 성령의 견고이다.
바나바와 바울이 심히 다투었다고 하는데 결별했다는 뜻이다. 똑 같은 단어가 히10:24에서는 사랑과 선행을 강하게 일으키는 자극을 주는 이라고 한다. 이렇게 강하게 다투고 헤어졌어도 사랑과 선행을 행하는 자극제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의도치 않은 갈등으로 바나바는 믿어지지도 믿을 수도 없지만 바울보다는 마가를 선택했다. 믿을 수가 없다. 그 다음에는 자기 뜻대로 조카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먼저 떠난다. 이방교회를 돌보자고 하는 사명 대신 혈육과 고향을 택했다. 우리가 가장 마지막에 고향과 혈육이 있다. 물론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다니며 계속 양육했기에 그는 후에 다시 바울의 동역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마가복음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나바는 이렇게 배 타고 떠나면서 사도행전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퇴장한다.
예루살렘 교회 초기에 밭을 팔아 헌금도 하고 좋은 성품으로 칭찬과 존경 받은 바나바이다. 안디옥 교회를 견고케 하는데도 크게 쓰임을 받았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첫 이방선교의 주역으로 쓰임 받았던 바나바가 이렇게 바울을 훌쩍 버리고 마가를 택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나 별 인생이 없다. 시종일관 인정받는 사역을 했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나바는 하나님 자리에 가지 않았을까 싶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인 죄가 있다. 그러나 바나바는 죄가 없다. 성품의 클라이막스를 보여주었지만 성품의 한계는 여기까지다.
적용) 바나바처럼 바울처럼 내가 절대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여러분의 기준은 감정입니까 구원입니까 정입니까?
나눔) 다툼을 늘 피하는 행동이 있는데, 이건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견고하다는 단어는 신약 사도행전에서만 4번 나온다. 바울 바나바가 다투고 갈라서는 이 일이 교회들을 견고케 하게 되었다는 일이 참 아이러니 하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하는데 그런 것 같다. 이 다툼은 세계적 다툼이 되고 세계적인 견고가 되어 세계적인 선교로 나가게 된 것이다.
39절에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떠났다. 갈라서자마자 데리고 떠났다. 먼저 떠났으니 바울도 누군가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바울은 바나바가 떠났기에 할 수 없이 실라를 택한다. 바울은 바나바와 갈라서는 사건을 통해 사람을 의지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선교의 사명을 홀로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라면 사람을 준비시키신다. 바울과 바나바가 떠난 자리에 실라가 있는 것이다. 실라도 로마시민 이었다. 아마도 유다와 실라가 같이 편지 가지고 왔었는데 실라가 바울에게 은혜를 받은 것 같다. 유다는 돌아갔지만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정받는 지도자이지만 그것을 내려놓고 바울과 같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믿음이니 바울의 짝으로 손색이 없다. 그 당시의 마가와는 비교도 안된다. 바울이 이 사람을 쓰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바나바가 먼저 떠났기에 실라를 택한다. 주의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하면 꼭 허락하신다. 돈 있고 건물 있어도 사람이 없으면 말짱 꽝이다.
이렇게 주의 은혜에 부탁하며 떠난 결과 바울은 여정에 있는 여러교회를 심방하며 그들을 견고하게 했다. 처음에는 구브로로 떠나 같이 돌아오려고 했는데 바나바가 마음대로 먼저 떠났다. 그래서 일정을 변경해서 육로로 택해 전도를 떠났다. 그러면서 여러 교회를 심방했다.
천천히 읽어보니 바나바가 완전히 감정적으로 움직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히 다투자마자 마가를 데리고 떠나버렸다. 너무 착해 보이나 구원의 일은 다르다. 정에 약하니 감정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너무 의지했던 바나바였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정이 떨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바나바는 여기까지가 바울을 돕는 부르심의 사역으로 쓰임받았다. 은사이다. 바나바 베드로가 바울의 그릇을 못 담기에 저절로 다투게 하신 것 가다.
적용) 의지했던 사람과의 심한 다툼이 지나고 보니 우리를 견고하게 한 일이 있습니까?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람도 다툰다며 내 다툼쯤이야 하며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의 일과 인본적인 일은 늘 대결한다. 바울이 이렇게 열심히 구원의 일을 하는데 유대인 중 한명이 없었다. 바나바가 유대인 중 일당 천명을 해서 옆에 있었는데 드디어 바나바도 떠났다. 복음을 전하는 길이 얼마나 외로운 길인가. 바울이 전한 사람만 바울 복음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좋은 것이 좋은것이다 하면 안된다. 이렇게 갔기 때문에 바울의 2차전도여행때 엄청난 열매가 맺혀진 것이다. 구원의 일에 자꾸 나서서 인본적으로 뭐라고 하면 될 일도 안된다.
말씀맺음
성령의 견고함은 끊임 없는 형제의식의 돌봄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의지하게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 은혜에 맡기는 것이다. 오늘 바울이 이 고백을 하며 베드로를 책망했을 바울을 생각하니 제가 주중에도 눈물이 났다. 이것이 사랑인데 다들 욕할 것 아닌가? 어떻게 은사도 몰라보고 저럴 수 있을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그 바울의 고백을 찬양으로 불러보겠다.
1. 검사 결과가 발가락 골절이 아니길, 견고히 낫도록
2. 성품으로 내 힘과 능력으로 혼자 해결하려말고, 돌봄 잘 받을 수 있도록
1. 감정/정보다 구원의 관점으로 관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2. 엄마 주일예배와 목장 정착, 동생 구원 위해, 지혜로운 적용점 찾도록
3. 조급함/불안보다 구원의 관점에서 결혼을 볼 수 있도록
1. 일과 말씀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는데, 말씀 안에 더욱 거하기를
2. 주일에 온라인 예배시간에 근무를 하게 되는데, 주일 예배시간은 실시간 사수할 수 있기를
3. 코로나 비상대책반 중에서 다른 업무로 배정중인데, 주일 사수할 수 있는 업무로 배정될 수 있기를
4. 진정성을 떠나 아버지의 사과는 모두 감사히 잘 받아들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