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03 성령의 구원
사도행전 15:1-5
2021년 벽두에 우리에게 화두로 주어지는 주제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죠. 그러려면 구원의 확신 있어야 되는데요.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인데,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의와 희락과 화평인 것이죠. 이거를 누리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에요. 그런데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누릴 자가 없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 볼게요.
1. 구원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1절)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가 1년간 가르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그런 교회자나요.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교회를 비우고 선교 여행을 다녀온 사이에 요란케 하는 다른 복음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24절에 보면 야고보 사도가 보낸 사람이 아니라 그냥 단지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에 불과한 사람이었어요. 5절에 보면 유대로부터 내려온 그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파에서 개종한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래서 개종해서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유대의 전통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자꾸 유포를 하는 거죠. 그런데 초신자가 많은 안디옥 교회들은 율법을 좔좔 꿰고 있는 그들이 너무 위대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 유대인들은 안디옥 이후에도 갈라디아 지방 그리스도인들도 혼란에 빠지게 한 것이죠.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사도회에서 시키지도 않고 가결되지도 않은 내용이었는데 그걸 와가지고 가르친 거죠.
그들은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에게 전도해서 엄청나게 부흥했다는 소문을 듣고 500km나 되는 길을 달려왔어요. 왕복을 하면 1000km에 해당되는 길을 오가며 한 달을 길에서 보내야 되는 긴 여정인데, 굉장한 열심이죠? 대체 무슨 열심일까요? 자신들의 자랑인 율법을 가르치고자 하는 대상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믿음의 반대는 무서운 열심이 맞습니다. 그래서 열심인 사람이 믿기가 참 힘든 것 같아요. 그들의 특징은 공개적이지 않고 음성적이고 그래서 굉장히 피해가 컸는데요. 바울은 이들을 갈라디아서(2장 4절)에서 보면 가만히 들어온 거짓 존재로 그들로 보이는 사람을 이렇게 지칭을 했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한다고 신랄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아야 한다, 5절에 보면 모세가 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한 번만 가르친 것이 아니고 미완료로 지속적이고 부지런하게 열성적으로 가르치니까 여기 안디옥 교회 교인들 중에 구원이 흔들린 사람들이 생긴 거예요.
한편 신학적으로 사도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의 성취와 신약 교회의 태동으로 신약 교회의 시대가 지금 시작이 됐어요. 그런데 아직 신약의 신학은 완전히 적립되지 못한 과도기에 있기도 했죠. 그런데 본래 유대인 출신들로만 구성되었던 초기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아직은 이스라엘 선민사상과 구약 율법조항에 얽매여 있는 그런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안디옥 교회도 이방인이 쏟아져 들어오니까 선민의식이 누구보다 하늘을 찌르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의 유입이 교회의 순수성과 특히 윤리적 기준을 저해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것도 맞습니다. 동시에 그 이면에는 자신들은 이처럼 수고해서 율법을 지키며 할례를 받으며 살아왔는데 세속 문화를 마음껏 누리다가 회심한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한 구원을 받으면 너무 손해 아니냐. 그러니 누구는 경건하게 살아도 구원을 못 받고, 누구는 죄만 짓다가 구원을 받으면 너무 속상하다는 거죠.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친 주동자이고 교회를 잔멸했는데 그가 전하는 복음이 맞겠냐? 교인들은 초신자라서 예수만 믿으면 구원 이거 밖에 모르는데요. 그 죄라고는 모르는 경건한 사람이 성경을 좔좔 외우면서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쓰면서 성경, 유대교 역사를 쫙 읊어주고 나서 경건하게 그러므로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러면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바울과 바나바가 떠난 안디옥 교회는 니게르, 구레네 시몬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갑자기 멋있는 사람이 와서 이러니까 헷갈리는 거죠. 우리가 어떻게 다른 복음에 안 넘어가겠습니까? 안디옥 교인들도 영접기도 다 따라하고 바울 복음에 은혜 받았던 사람들인데요.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도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 너무 대단하자나요. 그런데 처음 교회 나가는 사람이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데 들으니까 대단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가르쳐 주는 게 재밌는 거예요. 그런데다가 태어나면서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는 전통이 너무 중요하니까 이 사람들이 할례를 주장합니다. 그 아픈 거를 겪어야 우리 조직에 들어온다는 거죠. 조직의 쓴 맛을 보지 않고는 안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유대인들은 용납이 안 되는게 있는 거예요. 바울과 바나바가 떠나니까 십자가 길이 너무 좁은 길이고 팔복의 길이 좁은 길인데 오뚝이가 금세 돌아오는 건 시간 문제예요. 오뚝이처럼 돌아오는 게 무엇인가 하면 행위구원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생각해보니 내 삶이 따라주지 않아요. 결론적으로 안디옥 교인들은 분명히 믿어요. 그런데 확신이 흔들흔들 하는 거죠. 또 그에 비해서 유대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믿음은 없죠. 그런데 확신이 충천합니다. 이거를 어떻게 분별을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이거를 분별해야 되는 거예요. 바울과 바나바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는 확실한 것 같았는데 배운 연조가 너무 짧은 거예요. 그리고 거기는 모조리 이방인들만 많자나요. 그래서 이 유대인들의 가르침에 흔들렸어요.
사람은 기복이 본능이기 때문에 유대교도 아브라함의 구속사로 시작을 했는데 그냥 시기마다 변질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1차 전도하고 왔던 갈라디아 교회도 바울이 떠나자마자 이단에 빠졌다는 거예요. 요란케 하는 다른 복음에 빠졌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작심삼일이라 흘러 떠내려 가요. 그런데 계속 좁은 길로 가라 그러는데 지겹자나요. 그런데 이 유대인처럼 할례만 받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할례 하나 그거 왜 못 받겠어요. 받고 그러면 결국 합격한다, 성공한다 합격복음, 성공복음 요란하자나요. 사람들이 다 빠지는 거예요. 이게 요란케 하는 복음이예요.
[적용]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2. 말이 아닌 삶의 변론을 해야 합니다. (2절)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인본적인 가르침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거예요. 다툼이란 맞서 일어나 대항하는 것이고, 변론은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찾기 위해서 치열하게 논쟁하는데, 이 문제는 양보할 그런 문제가 아닌 거예요. 이거는 완전히 교회 정체성을 흔드는 위험천만한 주장이었기 때문에. 그랬는데 안디옥 교회에서도 찬성파, 반대파로 파당과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적지 아니한 다툼이라는 것은 수적으로도 매우 많고 기간적으로도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고 정도에 있어서도 매우 격렬하고 심각하였어요. 이게 맨 끝에는 돈이 있다고 그랬기 때문에 폭동 비슷한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정말 바울의 인생을 생각해 보니까 1차 전도 여행하고 와서 쉬어야 되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는 거죠.
1차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한 1년 정도 되는 시간이 흘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AD49년 정도) 갈라디아서를 썼다고 하죠. 그런데 이 얘기를 다 들었어요.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예수로 인해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외에는 다른 복음은 없다는 거죠. 천사가 와서 증거할지라도 우리가 전하지 않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막 바울이 강력하게 쓴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외에 갈라디아 지역에도 갔다는 거예요. 이단들이 500km도 마다하고 부흥하는 교회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러고는 이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도해 놓으면 거기 가서 훼방을 놓고 자기 편으로 끌어오려고. 그래서 예루살렘에 첫 종교회의가 열린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세워진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그런데 개인이 와서 떠들면 안 믿을텐데 진짜도 아니지만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을 했다고 하니까 논쟁이 일어난 거예요. 사실 500km를 가서 확인해야 하는 거자나요. 사실 안디옥 교회를 포함한 모든 지역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로서 특별한 권위를 가졌습니다. 그 첫번째 교회이자,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양육해준 그 대단한 사도들과,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는 교회인 거예요. 이 지위는 안디옥 교회가 아무리 크게 성장하고 이방 선교를 많이 한다 해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람들이 와서 열심히 가르칠 때 그 권위를 거스를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어떤 사람입니까? 빌립보서에도 보면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사도행전(22장 3절)에도 보면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고 하고요. 나는 너희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았던 율법교사 가말리엘로부터 배운 수재자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 이러면서 인본적인 율법 준수에서 그야말로 나는 원탑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 거예요. 예전에 딱 이 생각으로 교회를 핍박하여 스데반을 죽인 장본인이자나요. 그런데 지금 여기서 말로 논쟁했다는 그 내용은 없자나요. 왜냐하면 바리새적 가치관에 대한 바울의 변화된 태도 자체가 너무 중요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볼 때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말로 하는 논쟁은 대부분 온전한 결론을 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말에서 답을 구하니까 결론이 나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방황을 합니다. 방황을 멈추게 할 답은 말이 아닌 변화된 삶이에요. 말로 가르치기만 해서는 설득하지 못합니다. 17년이 지난 지금 한때 율법주의에 미쳐서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이 이제 교회를 위해 율법주의에 맞서 변론하고 있는 그 변화된 모습 자체가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죠. 어떤 변화가 이렇게 가능하게 했을까요?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거, 이게 전환점이 되었지만 더 중요한 거는 그 이후에 이어진 배척과 무시, 광야의 훈련, 시기와 배신을 겪을 때마다 구원의 확신을 보여주면서 삶으로 변론이 되가면서 점점점점 성령의 완수를 해 가는 바울이 된 거죠. 그 환난 가운데 말씀의 능력을 보여줘야 되니까, 옛사람의 가치관을 지금도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한 사건을 지나면 또 조금씩 버리고, 버리고. 그래서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옛사람의 가치관을 조금씩 버리게 될 때 환난이 주제가 되고 말씀이 교과서가 되고 성령이 스승이 되어서 성령의 변론을 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러니까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고난과 깨달을 수도 인본적인 가치관을 깨달을 수도 없으니까 모든 사건에 맞서 변론을 할 수도 없는 거예요. 자기 죄를 철저히 깨닫고 거기서 돌이켜야 각자 사로잡혀 있는 바리새적인 가치관에 맞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변론이 치열했어요. 이 오랜 변론을 듣고 있던 안디옥의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자기들의 지도자니까 당연히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을 거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편가르기로 하지 않고 윗질서인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묻기로 결정을 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에요. 안디옥 교회는 외적인 조건으로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잘 들은 것처럼 안디옥의 성도들은 잘 들은 거예요. 지도자가 잘 들으면 성도들이 잘 물어요. 흥왕하는 말씀으로 양육 받은 결과입니다. 바울 복음은 전세계가 인정한 복음이지만 바울과 바나바도 자기만 주장하지 않아요. 이들은 이미 안디옥 교회를 떠났자나요. 그러니까 거기 담임 목사 얘기를 들어야죠. 순종합니다. 이것이 변화된 삶으로 변론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이렇게 삶의 변론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적용] 가정에서나 회사에서나 사회에서 내 변론은 말의 변론입니까? 변화된 삶의 변론입니까? 이 인본적인 가치관에 맞설 수 있기 위해서 내가 지금 당해야 할, 당하고 있는 배척과 무시, 광야의 훈련, 시기와 배신은 무엇입니까?
3. 구원을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를 허락하십니다. (3절)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베니게와 사마리아의 교회들에 들리는 거예요. 그런데 베니게는 예부터 세속적인 이방을 대표하는 중심지고, 사마리아는 앗수르하고 혼혈족으로 이방보다 더 무시를 해요. 굉장히 무시를 받았던 두 지역을 스데반 사건으로 흩어져서 교회를 세운 거예요. 여기를 지금 가면서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 여행의 보고를 했더니 너무나 크게 기뻐했다는 거예요. 왜 그럽니까? 스스로 이방인처럼 차별 받고 그 처지를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방인에게 조건 없이 주어진 은혜의 구원을 기뻐할 수 있었던 거예요. 함께 크게 기뻐한 이 성도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공동체가 되었는데 얼마나 크게 기뻐했는지 그 원어의 메갈레네, 메가스는 영어의 백만에 해당하는 Mega의 어원이 되는, 그렇게 기뻐했다는 거예요. 구원 때문에 함께 애통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지체들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이고 이런 목장이 우리의 구원 공동체임을 믿습니다. 별 인생이 없어요. 별 기쁨도 없어요. 이제 새해가 되어 목장이 새롭게 시작이 되는데 이 코로나의 슬픈 상황에서도 목장에서 가장 큰 기쁨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적용] 여러분은 구원의 증언을 들을 때 크게 기쁩니까? 여전히 옳고 그름으로 판단을 합니까?
4. 구원의 결론은 인내입니다. (4-5절)
3절에서 베니게와 사마리아 성도들이 너무 기뻐했는데 이 4절에 와서 하나님 그들과 함께 하신 모든 일을 신인 협력적이 아니라, 4장 27절에 바울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행하셔서 이 전도를 할 수 있었다고 똑같이 보고를 했습니다.
그 이단 같은 사람, 예루살렘 본교회에서 왔더니 바리새파 중에서 일어나서 틀렸다고 하는 거예요. 바울 사도가 얼마나 마음이 녹았겠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지만 구원받고 나서는 계속 적대적이고 거기 발을 붙일 수가 없는 거예요. 17년이 지나고 이방선교의 공을 혁혁하게 세우고 갔지만 여전히 살얼음판인 모교회였습니다. 구원의 열매가 있으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이렇게 바울을 공격합니다. 그러니까 이 길이 구원의 길이 힘든 길이에요. 여러분들도 같이 힘든 길을 가셔야 되는 거예요.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게 잘되고 그런 게 아니예요. 여러분 이세상이 너무 짧아요. 별 인생이 없어요. 구원의 여정은 끝이 없습니다.
루스드라에서도 돌로 칠 때 툭툭 털고 일어났듯이 이곳에서도 바울은 드러내야 되는 거예요. 바울의 스데반 사건은 일생을 따라다니며 바울을 겸손케 했습니다. 복음을 듣고 기뻐하는 공동체의 힘으로 계속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공격을 인내하며 받아내며 설득해야 하는 것이 구원받는 자의 길인 거예요. 구원 때문에 참아야 하는 일이 계속되는 것이 지금 2021년의 결론이네요. 성령의 구원의 결론은 인내인 거예요.
[적용] 구원의 결론은 인내라고 하네요. 여러분 인내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요?
[적용] 구원 때문에 우십니까? 자기 연민 때문에 우십니까?
기도제목
은우
연민에서 벗어나 구원으로 인내하는 2021년 되도록
전시와 프로젝트 주님 개입 해 주시고 말씀에 묻고 가도록
현경
예배와 목장에 잘 붙어 가기
회사에서 시기, 질투 주고 받을 때 말씀에 집중하도록
예선
생활 예배
허락하신 자리 잘 지키기
직장과 목장 가족 영육 위해 중보
지화
돌발성 난청 치료 회복 되도록
가족 지체를 위한 구원
직장에서 나의 힘을 빼고 성령과 동행 하도록
다인
직장에서 지혜롭게 대처하고 성령의 수행원 하도록
언니와 가족이 영육 보호받고 회개/회복 되도록
손목이 많이 아픈데 알맞은 치료 받도록
보련
생활예배
상담 잘 다녀오기
인생의 보호자 공급자 되시는 주님의지 하도록
직장 말씀에 인도함 받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