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완수 2020. 12.27 주일말씀
1. 첫째로 기막힌 시기와 배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19)
[적용1] 은혜를 입고도 하루아침에 배신한 적이 있습니까? 거꾸로 은혜를 끼치고도 하루아침에 배신 당한 적이 있습니까?
성령의 완수 두 번째는, 이렇게 지독한 시기와 배신에,
2. 회개하며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19-20)
[적용2] 여러분은 배반당해서 지금 죽어있습니까? 자기 죄를 보고 훌훌 털고 일어났습니까?
그래서 성령의 완수 세 번째는 첫 번째는 기막힌 시기와 배신을 겪어서 두 번째는 그냥 예 그 이제 훌훌 털고 인제 일어난다 그랬잖아요. 어떻게? 회개하면서. 자기 죄를 보고.
그러면 이제 완수는 뭔가 하면,
3. 제자를 키우는 것입니다.(21-22)
[적용3] 여러분의 환난으로 한 사람이라도 전도했습니까? 제자가 키워졌습니까? 아직도 환난만 바라보고 계세요?
그러니까 성령의 완수는 결론적으로는
4. 네 번째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23-28)
[적용4] 나는 어떤 보고(나눔)을 합니까? 말씀과 믿음에 의한 보고를 하며 교회를 세워갑니까? 나의 감정, 고생, 사건(펙트)만 보고하며 교회를 헐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제목:
공통: 아무리 배반 당해도 자기 죄를 보고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내 환난으로 제자가 키워지게 하시고, 비교하지 않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오늘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되는 인생되게 하옵소서
이은영
1. 가정, 회사 모든 사명지에서 성령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2. 몸에 스트레스의 영향이 있는데 안정될수있도록
3. 회개의 사건들 21년에도 계속해서 그날 주신 말씀으로 새롭게 새롭게 회개하며 갈 수 있도록.
4. 3.4월 호 원고 수급이 순적히 이루어지도록.
5. 엄마, 남동생의 구원을 위해.
6. 우리 목장 식구들 신교제, 신결혼을 위해.
차한나
1. 아빠의 영혼 구원을 위해
2. 대학원 공부와 병행 가능한 알바자리
구해지길
3. 멍울이 사라질 수 있도록
4. 2020년 감사한 마음으로 잘 보내고
2021년 은혜로 시작 할 수 있도록
장승영
1. 직장과 집에서 겪는 시기와 배반에 옳고그름이 올라올 때 '그럴수도 있지'를 입술로도 고백하며 감당하게 해주세요. 열광과 비난에 내 주제를 알고 감정의 절제를 하게해주세요.
2. 왔던 길을 따라 다시 돌아가는 바울처럼 그간의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지윤이와 목장에서 함께 성령의 동역을 할수 있게 도와주세요. 우리의 목적이 문제 해결의 성취가 아닌 말씀의 순종으로 모두 성령의 제자로 키워지는 성령의 완수를 이루게 도와주세요.
루스드라 사람들처럼 며칠만에 포기하고 돌아서지 않도록 마음을 굳게 하여 이 환난을 통과하여 하나님 나라에 모두들 입성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럼에도 연약합니다. 빚을 갚는.. 성취도 이루어주세요.
4. 일을 결정할 때 말씀대로 선택하고, 나누고, 버티며 처음과 끝이 같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5. 가족들의 건강과 구원, 직장의 연말 업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도와세요.
정지윤
1. 아침 시작을 큐티로 시작 할 수 있도록
2. 말씀따라 일 할것을 공동체와 함께하며 성전 짓기 할 수 있도록
3. 가계부와 나의 생활에 대한 마음과 태도가 정리되어 다부져질 수 있도록
4. 성전을 짓는 동안 마귀가 틈타지 않음이 뭔지 느끼는것 있도록
5. 회사생활에도 균형 잡아 갈 수 있도록
문지수
1.직장 인도해주시는 가운데 분별할 수 있도록
2.엄마 백내장 수술한 두 눈 온전히 회복되도록
3.할머니, 큰아빠, 아빠, 오빠의 구원 위해
2020.12.27. 성령의 완수 행14:19-28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이 세상에 업적이나 성취는 영원히 목마르기에 목표를 정해도 늘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오늘 1차 전도 여행을 마치는데 오늘 본문에 26절에 이 일을 두 사도가 이룬 일이라고 해요. 이걸 완수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목적을 완수했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제자는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이제 그때 그때 완수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2020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완수를 했다고 하시는 것 같아서 감사해요. 그러나 또 여전히 이루어야할 성령의 완수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게요.
1. 기막힌 시기와 배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내치니라 - 안디옥에서 이고니온까지는 180km정도 되고요.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까지는 35km 정도 떨어져있습니다. 일단 유대주의자들의 시기가 가득해서 자기들이 다 쫓아놓고도 아직 성이 안풀려 그 루스드라에서 인기가 있단 얘기를 듣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그 먼곳, 또 가까운 이고니온에서도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와서 루스드라 백성을 충동하기 위해서 왔다고 해요. 충동은요 설득인데요, 18절에 앉음뱅이를 일으킨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알고 돌진해서 제사까지 지내려고 했잖아요? 근데 겨우 그 무리를 말렸다고 해요.
그랬는데 유대인들의 설득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그냥 순식간에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는 폭도로 돌변하게 한거죠. 유대인의 기막힌 시기고 루스드라의 기막힌 배신인거예요.
성경은 인간론 맞습니다. 그러니 너무 놀라지 말기 바래요. 어떤 시기와 배신을 당해도.
그런데 유대인들이 막상 와보니 유대인 회당에 없는거예요.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섬기겠다는 것을 헛된 일이라고 하면서 창조주 주관자이신 하나님만 섬기라고 그랬으니 그 말이 틀린말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바울을 유대인의 법으로 죽이기도 어렵죠. 그럼 어떻게 설득했을까요?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었기에 (루스드라 무리들) 바울과 바나바를 우상처럼 섬기려고 했지요. 그러니 그 기저에는 기복이 꽉 차있는거예요. 그런데 바울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당시 서기오 총독의 여에 있던 사신 엘루마 (점쟁이) 처럼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했던 시몬처럼, 점을 쳐주고 우상숭배로 돈을 벌어들이는, 헌금이나 재물 판매등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너희 이제 망한다'.
우리가 항상 끝에보면 돈이 있어요.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하기에 나의 이권과 정욕에 눈이 멀면 여러분들 살려두질 않아요. 뭐 기업도 살려두지 않지요.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달콤한 말을 해도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그냥 자기 이해타산이 걸리면 폭도로 돌변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어도 배반을 하고,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와도 그야말로 폭도로 변합니다. 사탄은 못된 열심으로 끊임없이 밀까부르듯이 주의 제자가 되지 못하게 흔들어댑니다. 시기와 박해가 모습을 달리해서 온다는 것이 믿어지세요?
우리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설교가 끝나고 나서 시기와 반박과 비방과 악감과 돌로 침에서 이젠 배신에서 돌로 죽임까지 끝없이 이런 모습이 오는거예요.
주님은 주의 일을 하는 바울에게 이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하실 수 있어요. 돌로 침을 당하지 않게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다윗이 열다섯 광야를 지나게 하신 것처럼 바울에게도 이 모든 광야를 건너가게 하십니다.
지독한 시기를 당하게 하십니다. 그것도 같은 부류,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 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예방주사를 맞고 가면 그것이 성령의 완수입니다.
정말 신앙은 버티는 것이 실력이예요. 말이 안되는 사람이 집집마다 회사마다 있지요. 시기와 그러나 배신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되면, 오늘을 잘 살게 되는거예요.
그것이 성령의 완수입니다. 그래서 하루 내일 일을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는 언제 어디서나 정답입니다.
적용: 은혜를 입고도 하루아침에 배신한 적이 있습니까?
사장에게 월급도 받으며 은혜를 입었는데 배신할 생각을 했다는 집사님 나눔이예요. 지금 직장에 오기 전에 근무를 했던 회사의 사장님은 일벌레고 일 중독자여서 직원들이 잠깐도 쉬는 꼴을 못 보는 분이었어요. 게다가 야근을 하면 새벽 2시까지 하고 당시 제가 부목자로 섬기면서 말씀에 은혜 가운데 있었지만, 제 인내에도 한계가 와서 어느날에 그 사장을 CCTV가 없는 창고 구석으로 데려가서 사정없이 때리고 너 인생 그렇게 살지마 하고 사표쓰고 나올 계획을 세웠답니다. 하지만 그주에 선포된 말씀이 욥기 23:10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의 말씀이 저를 인내케 하여서 그 계획을 접고 순종하기로 다시 결단하며 그 회사에서 2년 4개월을 더 훈련을 받고 참는 과정을 거치니 지금의 최상의 직장으로 인도함 받아 말씀과 기도도 하지만 일하고 소득도 취하는 그리고 내 업무에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는 이런 복락을 허락하셨어요. 예. 오죽하면 제가 월급 받는 사장의 자리에 있다고 하겠습니까. 마음대로 한다는 아마 이런 뜻인 것 같아요. 저를 만드시고 창조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분 정말 사장님한테 감사하셔야될 거 같아요. 돈도 주고 훈련도 시켜주시고. 하나님을 그래도 배신하지 않으시고 성령의 완수 하셨네요? 그때 사장 때려줬으면 어떻게 될 뻔 했어요.. 우리가 다 그러죠? 각 집에서 회사에서 사정없이 때려주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죠. 제가 대신 때려드릴 테니까 여러분들은 그냥 배신하지 마세요.
성령의 완수 두 번째는
2. 기막힌 시기와 기막힌 배신에서 회개하며 툴툴 털고 일어나는것입니다.
19-20: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틑날 바나바와 함게 더베로 가서 -
루스드라에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제자들이 이미 생겼음을 표시합니다. 아마 디모데도 이 제자들 가운데 있었을 거예요. 이들이 바울이 돌에 맞아 성 밖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모였어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죽은 바울을 다 둘러서서 쳐다보고 있는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요. 여러분은 이런 상황에서 다시 루스드라 성으로 들어갈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일어나서 가던 길을 계속 가시겠습니까? 예를들면 제가, 낙태법 개정 청원하다가 오해로인해 돌에 맞아서 정말 죽은 듯이 누워있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여러분들이 둘러서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둘러서서 구경하겠죠. 제가 이걸 보니까 그렇겠다.. 아무도 날 도와줄 사람이 없겠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여기서 자기의 생각, 느낌, 허탈, 허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각자 다 자기의 느낌만 있어요. 자기의 아픔만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좌절을 겪어도 사명의 길을 딱 포기합니다. 일어서기를 거부합니다. 루스드라처럼 복음을 어제 받았는데 오늘 딱 돌로 칩니다. 돈하고 연결되니까 자기 이권하고 연결되니까.
열왕기상 19절에 보면 기진한 엘리야에게, 최대의 선지자잖아요? 그런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 니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 - 음성이 사도바울에게 들렸죠. 말씀의 능력을 힘입은 사람이예요. 일어섰어요. 자기의 길을 갔어요. 우리는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나야 합니다. 계속 넘어지라고 시기와 배신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죽은 것 같은 바울이 - 이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내다 버렸으니, 어제까지 열광했던 주민들이 죽을 때가지 때린거예요. 죽은 것을 확인 할때까지 때린거예요. 사람이 이렇게 무서워요. 바울이 숨도 안쉬고 있다가 기적적으로 일어났어요.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듯 일어나서 루스드라 성 사람들을 욕해야 될탠데 퉅툴 털고 일어나서 루스드라 성 안으로 들어가서 제자들을 챙겼겠지요. 하룻밤을 보내고 이틑날 다음 목적지 더베를 향해서 떠납니다. 더베에 도착했다는 것이 아니라 더베를 향해서 루스드라로 나갔다는 뜻이예요. 돌로 치면은 먼지를 떨고 티끌을 떨고 떠나면 됩니다.
흥분하지 말고. 루스드라 성으로 하룻 밤 거기 들어갔다 나왔다는게 굉장히 대단한 것 같아요. 제자들 때문에 들어갔겠죠.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바울처럼 되야지. 그럼 될 수 있는것입니까? 바울은 너무 위대해. 그럼 이걸 또 따라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바울이 어떻게 이랬을까? 구속사는 항상 바울이 잘나서 이렇게 했다는게 아닌거예요.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거예요. 이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하나님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모든걸 하셨습니다. 그것도 좋은데, 우리는 성경을 자세히 읽어갈때는 어떻게 왜, 하나님께서 하셨는가 추상적인 것 말고 구체적인 질문을 나한테 해야하는 거예요.
어찌하여서 지금 이렇게 바울이 할 수 있었는가. 그들이 기절한 바울을 성밖으로 끌어 내쳤다고 했잖아요. 이 단어는 바울이 성도들을 끌어낸 장면에서 쓴 단어와 같은 거예요. 끌어 내쳤다. 우리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적용도 풍성해지거든요. 안디옥에서 쫓겨난 일은 스데반이 성 밖으로 쫓겨난 일을 - 도 이고니온에서 돌에 맞은 일은: 스데반이 돌에 맞은 일을- 기절하여 성 밖으로 질질 끌려 내쳐진 일은 - 성도들이 바울에 의해서 각자의 집에서 질질 끌려 체포된 일을 생각했단 것을 지금 생각나게 하는 일이죠. 실제로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 아주 주도적인 역할을 했죠. 스데반이 그때에, 스데반을 돌로 치는데 스데반이 성령의 얼굴이었다고 그랬잖아요. 그런 설교도 했는데 돌로 맞을 때 성령의 얼굴을 하고 저들의 죄로 돌리지 말라고하는 스데반을 바울이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을것이죠. 사람은 내가 돌에 맞을 때 보여주는게 참 중요합니다. 제가 싸이코지만 괜찮아 라는 드라마를 잠깐 봤는데, 끝없이 계속 되는 싸이코 환자를 저렇게 대하는거구나를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제 삶에서 싸이코 같은 식구들을 대하면서 때마다 툴툴 털며 일어나는건 너무 어렵죠. 요즘 이런저런 정신질환자가
집집마다 너무 심각하다는거예요. 80%정도는 요즘 이렇게 속해있다고 봐야 된다고 그랬는데, 이럴 때 어떻게 툴툴 털겠습니까. 우리는 보이는 것 때문에 열광을 하면 그게 보이는 것, 눈 앞에서 병도 낫고 이런것 때문에 열광하면, 안보이면 통곡을 하죠.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열광을 했던 무리들이 일주일 후에 십자가에 못박아라! 외쳤기 때문에 교회를 다녀도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열광과 비난을 초월해야합니다. 우리의 주기도문은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해야하는 내용이지 박수치며 소리지르는 기도 내용은 아니죠. 소경처럼 낮은 환경에서 무시당할때는 그냥, 모두가 꾸짖을때는 모두가 들으라고 소리지르며 불쌍히 여기소서 나사렛 다윗의 자손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게 하면 주님까지 들으시는 기도가 되는거예요. 우리가 기뻐하면서 소리지를 내용은 전도이고 제자 양육이고 삶의 변화이고 슬퍼할 이유도 전도가 안되서 제자 양육이 안되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서, 슬퍼해야하는거예요. 그런데 기복적인 것으로 열광하면서 소리지르면 아이가 붙었대!! 그럼 떨어지면 너무 슬퍼해야되겠죠. 사업이 성공했대!! 그러면 망하면 너무 슬퍼야 되죠. 뭔가 안됐을때는 배신을 순식간에 하는거죠. 바울은 쓸데없는 열광에 옷을 찢으며 패스했기에 돌로 치는 배반에도 훌훌 털고 떠날 수 가 있는거예요. 이것이 성령의 완수입니다.
적용: 여러분은 배반당해서 지금 죽어있습니까? 자기 죄를 보고 털고 일어났습니까?
배신중에 배반중에는 자녀에게 배신당하는 것이 가장 힘들죠, 자녀는 정말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요. 한 부목자님이 저희 가족중에 큰 딸이 고2인데 한 학기 전부터 자퇴를 하겠다고 해가지고 자퇴는 안된다고 했다가 얘가 너무 자퇴한다고 그러니까 쿨하게 그러라고 자퇴숙려 기간을 7주간을 보낸거예요. 그래도 학교는 졸업 하겠다고 그래서 실낱 같은 희망을 갖고 7주가 끝나는데 곧장 기말고사인데 글쎄 또 7주가 되는 날 학교를 안갔다는거죠. 3일을 방에 들어가가지고 나오질 않은거예요. 이러니 뭐 별 생각을 3일동안 다 했다는 거예요. 나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그 주일인 지난주일 아침에 나와서 식사도 하고 온라인 예배를 같이 드리게 되었는데 딸 아이가 처음 나와서 저에게 하는 말이 아빠는 내가 방에서 3일동안 있었을 때 어떤 말씀으로 지냈어? - 하고 물어보는 것이었어요. 그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고 말씀을 붙잡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 아이만 무사히 나았으면 하는 걱정으로만 지냈다는거죠. 그래서 방 안에 귀를 갖다 대고 인기척이 있는지 없는지, 그냥 두렵기만했는데 딸이 그렇게 물어보니까 너무나 부끄러웠고 그래서 너는 3일을 어떻게 지냈냐? 그랬더니 누워서 계속 울었지만 그 와중에 자기는 큐티영상도 보고 말씀도 보고 했다는거예요. 저는 그 기간에도 큐티를 형식적으로 하고 딸을 주목하면서 딸만 주목하면서 깊이 하지도 못했는데, 그리고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못했는데 지난주 설교 말씀을 들으며 딸아이도 주목하지 못하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딸에게 필요한 것이 자퇴가 아니라 공감해주는 것이었는데 딸이 자퇴한다고 할 때 저는 쿨하게 응, 자퇴 해. 그랬는데 이 딸에게는 그것이 도리어 안좋은 모습으로 보였다는 거예요. 여러분 항상 그렇게 교양있게만 대하려고 하지 말고 너무 안될때는 욕도 하고 때리기도 좀 하고 .. 요새 잡혀가나요?
좀 이제 마음이 회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딸아이를 주목하며 공감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저께 설교한 우리 초원님도 아주 집에서 그냥 권력 서열 부동의 1위인데 사춘기 아들이 반항을 하기 시작하니 딱 권력의 서열이 그리로 넘어갔다는 거예요.
아빠하고 딸이 TV를 보고 있다가 아들이 들어오면 전부 소파에서 일어나서 리모콘을 넘겨줘야된다는거예요. 쇼미더머니 이런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는데, 걔 혼자서 두시간을 차지하는데 자기가 직장에서 와서 이게 뭐하는 꼴인가... 그러고 나중에 걔가 두시간을 혼자서 보면 재미가 없잖아요. 아빠는 왜 내가 보는걸 안봐? 해서 두시간을 같이 앉아서 그것을 보다가 그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 공감을 하게 됐노라고 이번주 수요일날에 간증을 하십니다. 서열이 딱 바뀌었다는거예요.
성령의 완수 툴툴 털고 일어나면 세 번째는
3. 제자를 키워야해요.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더베에서 사역이 자세히 기록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거기에서도 예수님의 제자가 세워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하나 있는데, 바울이 더베에서 안디옥까지 육로로 가는 것이 더 가깝고 쉬웠는데, 게다가 자기 고향 다소가 있어서 쉴수도 있었는데, 궂이 자신이 왔던 길을 따라서 돌아가는거예요. 지도를 좀 보십시다. 그러니까. 수리아 안디옥에서 와서 앗달리아 - 버가를 통해-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 더베가 1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더베에서 맨 처음에 출발한 안디옥 있잖아요? 안디옥으로 가기에는 육로로 가는게 훨씬 가깝잖아요? 그러고 중간에 다소가 있는거예요. 자기 고향. 이리 가도 되는데, 다시 왔던 길을 -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 버가- 앗달리아- 이렇게 그대로 해서 구브로는 안가고 도로 안디옥으로 도로 돌아오는 길을 택해서 왔다는거죠.
돌에 맞아 죽을뻔했던 루스드라, 자신을 죽이려고 계획을 세웠던 이고니온, 자신을 추방했던 안디옥으로 지금 이제 다시 돌아가는거예요. 왜죠? 그곳에 방금 믿기 시작한 제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걸 다시 돌아보는거죠. 성도 인생의 목적은 편한게 아니예요. 자기가 당한 사건에 갖혀있다면 가지 못할 곳을 바울은 주께로 돌아온 한 영혼이 너무 귀하기에 갈 수 있었습니다. 항상 성령의 완수를 생각할 수 있었기에 때려도 죽여도 악감을 가지고 있어도 제자가 생겼기에 둘러보려고 그 위험한 곳을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태도를 세상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박해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경건에서 벗어나도록 유혹을 하고 낙심을 주어서 벗어나도록 공작을 끊임없이 합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했다가도 포기하고 다 세상으로 금새 돌아가는 거예요. 루스드라 주민들이 그렇게 열광하다가 금새 배신하고 돌아가는거죠. 초신자에 새신자의 교회 정착은 교회 몫이라고 생각해서 관심없이 방치하지는 않습니까? 어떤 초신자 새신자도 해산하는, 또 양육하는 수고가 없이는 절대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합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이 새신자가 정착하는 비율이 높은 교회예요. 늘 돌봐야되는데 주님을 만남이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겠어요.
그러니 이게 우리 교회 부흥을 위해서 정착을 시키는게 아녜요. 하나님 나라 부흥을 위해서이죠. 감사하게도. 힘든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듣고 이혼도 안하고 회사에서도 잘 감내하면서 간다는 편지를 제가 너무 많이 봤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거죠.
그런데 가가지고 무슨 설교를 하나요? 22절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제자들을 무장시키는 말을 하고있어요. 막 세워진 교회를 다시 방문했는데 그들에게 무얼 가르쳐주냐면 다가올 미래가 꼭 성공과 안녕이 아닌 환란이기 때문에 이 얘기를 해줘야 되는거죠. 물론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예요. 그러나 악하고 음란한 이 땅에서 구원의 여정을 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많은 환란이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복음은 또한 장차 받을 환란입니다. 이 둘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예요. 환란이래는 것은 짓눌림을 당하는 듯 한 압박이나 옥죄는 듯한 고통을 말해요. 환란이 쉬우면, 누가 환란이라 그러겠어요. 옥죄는거예요. 짓눌림을 당하는거예요.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인간관계에서 옥죄는거, 숨이 안쉬어지는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겪어야 통과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거죠. 이 환란이래는건 각자에 맞게 주셨어요. 내 환란 니 환란이 달라요. 그런데 그 환란을 통해서 내 환란으로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주님께로 이끄는거예요. 그런데 그걸 비교하면 안되는거죠. 내 자녀, 니 자녀, 내 남편 니 남편,. 그 자녀기 때문에, 그 남편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되고 또 들어가게 할 수 있는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환란을 잘 통과하려면 믿음에 머물러 있어야되고 그러려면 제자가 되야하고 그리고 내가 제자가 되면 제자를 키워내야 되는거예요. 바울이 돌아가면서 순회를 하면서 다시 독려하는 것은 이 하나님 나라가 계속 흥왕해가기 위해서 일꾼들을 세워야되잖아요. 제자를 세우려 순회를 한거죠.
요새 유튜브가 활성화 되다보니까 우리 평원님이 다른 교회에서 하신 간증이 올라왔더라구요. 그래서 들었어요. 저보다 미모도 훌륭하시고 더 잘하시더라구요. 목장과 초원과 평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을 하시는데 이분은 평원이니까 내가 이제 아줌마처럼 보여도 지금 내가 쉰 다섯 개 목장을 담당하고 목원은 5백명 이라고 웬만한 교회 목사같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간증을 하셨어요. 목장 편성할 때 성도에 대해서 부목사님이 딱 물어보면 컴퓨터도 못하지만 좔좔좔좔 나온다는거예요. 그래서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각자의 고난을 약재료로 삼아 한 사람 한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묻기만 하면 척척 나온다는 것이죠. 지금도 남편이 바람피웠어요, 아내가 바람났어요, 하면 전공과목에 평.초원님들 목자님들에게 연락하면 즉시 연락이 되잖아요. 그래서 목장 얘기를 좔좔 하시더니만 그 다음에 이 교양있는 초원님이 남편이 바람을 네 번이나 피고 아이도 낳았다 이러면서 그런데 그 남편이 여기 같이 왔다 소개했어요. 보통 교회에서 너무 놀라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전공자들이 수두룩 하잖아요. 그런분들이 우리가 평,초원님만 해도 남자 여자 합하면 백명이 훨씬 넘죠? 그러니까 우리들교회가 제자를 참 잘 키웠구나 하면서 너무 성령의 완수를 했구나 싶더라구요. 바로 나의 환란은 제자를 키워내는 일에 쓰라고 이거갖고 설왕설레 말들을 많이 하지만 성경에 다 나와있는 얘기인데요. 유다도 다말 얘기를 오픈했고 다윗도 다 오픈을 해놨고, 열다섯 광야 얘기에 밧세바 얘기까지 여리고 기생 라합얘기부터. 그랬는데 이게 너무 성경적인거예요.
적용: 여러분의 환란으로 한 사람이라도 전도 했습니까?
그래서 그 환란으로 제자가 키워졌습니까? 아직도 환란 속에서 환란만 바라보고 있으세요? (시간낭비 하시면 안되는데요...)
오늘 성령의 완수, 기막힌 시기와 배신에 회개를 하고 툴툴 털고 일어나면은 제자가 키워지고, 제자를 키워야되고.. 그 모든 것의 결론은,
4. 교회를 세워야 되는거예요.
교회를 해치는 그 어떤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세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23절 -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영적 지도자를 세워서 교회 공동체가 장차 있을 환란 가운데 질서있게 유지 될 수 있도록 해야되잖아요?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랬듯 장로의 기본적인 역할은 분별과 결정이예요.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결정에 지도자의 자격은, 오늘 보니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이 믿음이 있는거예요) 이것을 바나바와 바울이 분별해내는거죠. 믿음이 있는가. 스펙이 아니고 예루살렘 교회 출신이다 이딴게 필요없고. 믿음이 있는가.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했다고 하잖아요? 성품으로 스펙으로 지도자를 택했다가는 큰일나는거죠. 믿음으로 택해야 공동체를 위한 분별과 결정을 잘 할 수 있다고요. 주님을 향한 믿음은 다름아닌
내 생각을 버리고 오늘 주신 말씀대로 순종하고 결정하는 태도로 나타나는 거예요.
이게 가장 중요한 자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의 카리스마로 나의 실력으로 나의 경영학 지식으로 나의 법 지식으로, 모든걸 결정하면 이게 지도자의 독단이 되는거죠.
결국 독단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지혜없는 행동을 하는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은 경영교과서 인거예요. 성경은 모든 법지식의 맨 최고를., 이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결정하고 그 믿음대로 말씀대로 순종하는 태도로 있는 지도자 한 사람이 그 교회를 살리는거예요. 지도자 한 사람 잘못 뽑으면 그 사람하나 지혜 없어서 온 교회가 망하는거고 회사가 망하고 집안이 망하고 이렇게 되는거죠. 그래서 장로를 세웠어요.
24-26 -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랴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것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안디옥부터 버가까지 돌아가는 여정을 누가는 왔던 여정과 마찬가지로 한 줄에 기록을 해요.
그런데 13:14절에 보면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그 얘기가 있잖아요. 전도여행 초반에 버가에서 어려운 일을 당했잖아요. 거기서 마가가 떠나버렸죠.
바울은 아프고. 그런데 거기에서 버가에서 더 나아가 안디옥까지 갔다고 한 거 기억하시죠? 버가에서 더 나아갔다고 그랬어요. 그랬는데 이제 귀환하면서 비시디아 안디옥부터 버가까지 갔던길을 따라 도로 토로스 산맥을 가로질러서 다시 버가까지 왔다는 거예요. 굉장히 힘든 여정이잖아요. 전도하고.. 일하고.. 그런데 이게 자기의와 열심으로 했다면 사람은 처음과 끝이 같을 수가 없어요. 우린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은 것은 , 저 사람은 정말 처음과 끝이 똑같애 그럴 사람은 없다는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주께서 맡기신 사명으로 감당했기 때문에 사명 때문에 와서 살다가 가야되니까 사명을 감당하려면 말씀이 필요하잖아요. 매뉴얼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나는 간 곳이 없고 그 사명 붙들고 말씀을 붙잡았기 때문에 처음과 끝이 같은거죠.
그런데 교회도 야망으로, 선교도 성취를 목적으로 했다면,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가 떠나고 아팠던 버가에서부터 도저히 떠날수가 없는거예요. 왜냐하면 성취가 목적이면 이제 실패가 생겼잖아요. 그런데 이 두사도는 말씀에 순종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이 실패 같은 현실에서도 말씀에 따라서 더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고난 가운데로 지나며 모든 여정을 다 마치고 이 바울의 모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였지만, 파송해준 안디옥 교회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누가는 이 모든 일을 다 완수하고 안디옥교회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했다고 전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렇게 선교를 했다고 이렇게 얘기를 하는거예요. 나는 할 수 없다는 고백이 날마다 있어야. 성취가 아닌 순종을 할 수가 있는거예요.
그리고 곧 순종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령의 완수라 할 수 있는 길인거죠. 그러나 사람들은 처음과 끝이 다를 수 밖에 없어요. 왜죠? 사람이니까요.
사람은 그러니까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구요. 자꾸 이렇게 저렇게 합리화 시키지 말라구요. 불신결혼 안된다구요. 불신자에게 뭘 기대하지 말아요. 그런데도 우린 자꾸 이렇게 저 사람은 믿을 사람이야. 믿을 사람이 없다구요. 오늘 루스드라 주민들이 하루 아침에 그렇게 열광하다가 돌로 치는거 봤죠? 그건 언제 나타나나,. 이해타산이 걸리면 딱 나타나는 거예요. 말씀에 의지하면 말씀이 나를 읽고 지나가기 때문에 처음과 끝이 같게 해주시는거예요. 생각해보면 지난 삼십몇년동안 얼마나 많은 설교와 간증과 수많은 사람을 만났을까요? 제가 말씀없이 사람을 만났더라면 다들 인간의 생각으로 말했을 테니 전부 실언만 했을거같아요. 예전과 지금의 말이 다르다고. 제 말이 앞뒤가 안맞는다고 여기저기서 고발했을거같아요. 달라졌다고. 그런데 이제 한마디 한마디가 내 자신을 세우는 말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말로 하려고 그렇게 한 것은 제가 구속사를 그 때도 깨닳았기 때문에 구속사의 말씀이 바로 교회를 세우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런것이고 그래서 우리들교회의 성도들이 비교적 회사에서나 가정에서 신뢰를 얻는 이유가
처음과 끝이 같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큐티 사역을 위해서 저를 40년을 같은 자리에서 살게 했는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죠, 강산이 4번 변했네요. 그러면 저의 미주알 고주알이 전부 다 드러나겠죠?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숟가락까지 다 알고있는 분들이 많다는 뜻이죠.
그러니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가 맡긴 선교를 완수했지만, 이 완수는 그들이 스스로 이룬 성취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채운 순종이라는거, 이게 중요해요. 말씀을 채운 순종. 맨날 말씀만 생각하고, 잘나서가 아니고 그냥 말씀대로 하는거죠. 처음 버가에 도착했을 때 병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했던 바울은 버가가 굉장히 걸렸던 것 같아요. 다시 버가로 왔을 때 복음을 전했어요. 기회가 있으면, 툭 칠때마다 복음을 전했어요. 툭 치면 나오는 천하의 바울도 그러나 앗달랴에는 여전히 너무 화려한지 그냥 지나쳤습니다. 이렇게 갈 때도 올 때도 대 사도바울을 계속 지나치게 하는 앗달랴도 이 세상에 있어요.
정말 우리 옆에 앗달랴 같은 사람이 누군가. 나는 앗달랴 같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을 좀 해봐야 해요.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 선교 보고를 하잖아요? 그런데 이방 세계에 전도의 문이 열렸어요. 열렸지만, 사실 그들 앞에는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고생한 얘기를 우리가 다 들었지만 그 고생한 얘기만 보고하는 거를 더 객관적인 보고라고 할 수는 없는거예요. 이게 사실인데, 바울은 믿음의 문을 여셨다고 보고를 했어요. 지나고 보면 바울에게는 그 많은 환란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그걸 일부러 강조해서 말하지 않아요. 왠가요? 한번 열린 이방의 문은 열면 닫을자가 없어요. 지금까지 닫혀있다가 그걸 열은분이 주님이예요. 바울이 연게 아니예요.
주님이 열었기 때문에 지금 유대인, 사단의 방해를 미주알 고주알 얘기할게 별로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보고도 선교 보고, 무슨 보고도 말씀과 믿음에 근거해서 이렇게 구속사적으로 보고를 해야되는 거예요.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는거 이해하세요?
이방인이 하나님이 닫으시고 하나님이 여셨어요. 근데 거기 내가 들어갈 자리가 어딨어요? 하나님이 다 하셨는데. 내가 선교하고 내가 전도했어요? 그러니까,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그렇다고 입으로만 영광 돌리면 안되고요. 그래서 보고할때는 끝없는 자기 자랑과 특별히 내가 너무 힘들었다고 동정의 보고는 경계해야 합니다. 수많은 공로와 수고 앞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초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이라고 했기 때문이예요.
이것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 성품, 재능과 환경등 이거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주셨어요. 그런데 허물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일 하셨다는거예요.
이거는 바울의 고백으로 하면, 바울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행하셨다고 진심으로 고백한거예요. 한마디로 구원의 사명은 백프로 하나님의 일 인 동시에 백프로 우리의 일이고, 또 성령님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역하심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령의 동역이고 그래서 성령행전이 곧 사도행전이 되는 것입니다.
나타낸 열매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것이구요.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완수를 할 때 보고를 말씀대로 믿음대로 구속사적으로 해야될 말과, 안 해야될 말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를 해야 되는거예요. 간증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야되는 거예요.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
이방의 땅 끝 선교지에서나 모교에서나 제자의 삶은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는데요. 오래 있어 의 디아트리보 생각나시죠? 14:3 내 몸으로 사명의 자리를 반짝반짝 닦아서 윤이 나도록 비비고 닳도록 문지르고 걸레질 하는 것처럼 수고하는 삶이 제자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현재 오래- 시제가 14:3 이고니온에서는 부정과거이고 여기 안디옥에서는 미완료예요. 왜인가 하니 이고니온은 오래있어도 떠나야할 사역지고 안디옥 교회는 영원한 본향 모교회 라는거예요. 성도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교회에 영원히 속해 있기에 하나님이 불러주신 가시적 교회에 잘 붙어 있어야 각자의 사명지에서 잘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없이 지내는, 잘 지내는 삶 아니라 주시는 말씀듣고 공동체 안에 잘 붙어있으면 각자의 사명지에서도 잘 머물 수 있고, 사명지는 또 바뀌잖아요?
그럴 때 영원한 이방인 같은 내게 맡기신 땅끝 같은 가족과 이웃에게 믿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고 성령의 완수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고백은 서로 시기하는 상황 속에서 가족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한 순간에 인간이 배반하고 돌로 치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나는지를 읽어드릴게요.
내가 시기를 하고있는 사람은 예수를 영원히 믿을거 같지 않은 가족입니다. 아내는 나와 함께 수십년 교회를 다녔고 최고의 직분까지 받았어요. 그래서 이제 육십이 될 때까지 우리는 같이 산책도하고 교회도 같이 다니는 너무나 원앙 같은 부부고 착한 아이들이 있었던, 모두가 부러워하는 집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육십이 넘어서 아내가 우울증이 오고 갱년기가 온다고 해서 초등학교 동창모임에 나가보라고 한 것이 화근이되어 아내가 외도를 하게 되었죠. 그 후 격한 싸움을 한 뒤부터 교회를 나오고있지 않습니다. 온 집안 식구가 교회를 안나가는거예요. 이 분은 흘러흘러서 소문을 듣고 우리들교회를 오셨어요. 아내는 제가 우리들교회를 다니는 것에 대해 시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내 입장에서는 도대체가 예수가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예요. 착하고 말 잘듣는 아들은 인권과 인권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외치며 절대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착하고 활동적인 딸은 복음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습니다. 그러니 아들 딸도 내가 우리들교회를 다니는 것에 대한 시기가 있습니다. 결국 가족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자하는 불의에 대해 내가 시기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조심스레 복음을 전하려하면 무관심과 무시로 일관하는 것을 보며 불의한 이 세상에 살려면 맨날 이렇게 무너져내려가야 된다는걸 경험해야한다는 목사님 말이 인정이 됩니다. 평생 교회 다니는 것 같다가 전부 온 집안 식구가 예수가 안믿어진다고 한답니다. 나에게 시기를 당하는 역시 아내와 아들과 딸입니다. 내가 우리들교회 예배와 목장 예배를 사수하는걸 보고 내 믿음에 대한 시기를 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강권적인 가장의 권면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죄사함 없이는 하나님 없이는 하나님 나라 로열패밀리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단 것이 인정되어지며 그러한 시기와 비방에도 매일 큐티 예배 목장을 사수하며 기도하는 나의 삶이 그들에게 그림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령의 반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이것이 성령의 완수라고 생각을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령의 완수는 기막힌 시기와 배신을 감당해야 되는거예요,. 그럴 때 회개하며 툴툴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환란으로 제자를 키워내야 합니다. 내가 또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그것의 결론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