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13일, '성령의 제자' 김양재 담임목사님 (행 13:50-14:7)
성령의 제자는 제자훈련을 해서 제자가 아니라 성경을 읽어가다 보니 저절로 제자가 되어가는 것 같다.
성령의 살리심 일으키심에 반응하니 긍정 부정 무반응의 옳고 그름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시각으로 반응하게 되니 저절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성령의 제자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카일 아이들머는 제자로 부르실 때 가장 행복한 부르심은 나를 따르라 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부르심은 나를 부인하라 이고 가장 충격적인 부르심은 와서 죽으라는 것이라 한다.
성령의 제자는 이런 과정을 겪어가며 되어가는 것이다.
오늘은 성령의 제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1. 성령의 제자는 쫓겨나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합니다.
50절
유대인들이 시기 비난 반박을 해도 바울사도가 담대하게 전하니 주의 말씀이 두루 퍼졌다고 한다.그럼 사단도 총 궐기대회를 한다.
근데 오늘 보니 유대인도 지체가 있다. 경건한 귀부인과 유력자이다. 이들은 다신론을 인정한 로마 사회에서 유대교로 개종하기에는 부담스럽지만 유대인과의 관계를 아예 끊을 수 없는 그런 처지의 요즘 정치인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회당에 나온 경건한 귀부인들은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로 개종한 여인들이었을 텐데, 하나님을 알고 교양도 있고 예의도 있는 자들인데 선동에 넘어갔다. 이들은 어떻게 선동이 될까? 유대인들의 빠른 계산으로 가장 적은 수고로 큰 효과를 볼 것 같은 작전을 수행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이 부자들인 것을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보이는 외모가 중요한 사람이기에 돈으로 충동된 안디옥의 고위층이다. 이들은 공권력을 이용해 끼리끼리 모여 볼품없어 보이는 외모의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낸 것이다. 허튼 소리에 귀가 솔깃하는 사람을 사단이 좋아한다.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은 순수한 것도 착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는 귀부인들이 두 사도를 쫓아냈다.
그렇다면 경건한 귀부인의 경건은 어떤 것인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정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경건의 능력이 없으니 껍데기만 갖고 능력은 없는 사람이다.
영화배우가 실제의 역할을 하면 실제 보다 더 멋있어서 속는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진짜 어려울 때는 이길 수 없다. 껍데기만 가지고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들은 회당에 나오면서도 바울 사도의 구속사가 들리지 않는다. 육이 무너지지 않아서 그렇다. 그러니 채워진 육에 복은 받아야 한다. 그들의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는 회당에 오면 늘 상석에 오게 해준다. 그러니 유대인 회당장들은 그들에게 복을 넘치도록 빌어준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 비해 너희들이 예수로 인해 죄사함과 의로움 받는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망한다고 경고를 한다. 그러니 이를 갈았을 것이다. 자기를 지지할 세력을 부추겨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자는 복음의 원수이다. 공동체에서 나의 불만을 동정하고 지지하는 사람의 선동을 조심해야 한다. 그에 비해 예수님의 제자는 누구인가? 세리나 창기나 귀신들린 자들이 초대교회의 직분자였을 것이다. 안디옥 교회도 그 당시 살인자라고 한 바울이나 노예 헤롯의 젖동생 등이 있는데, 그들은 전부 유력자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쫒아내었다.
51절
바울과 바나바가 발에 티끌을 떨어버린 행위는 상대가 복음을 영접지 않을 때 먼지를 떨어버리라 고 했던 말씀대로 한 것이다. 주님의 명령이니 말씀대로 그 명령을 충실히 적용한 것이다. 자신과 그 지방은 더 이상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믿는 제자들이 이미 생겼는데 그 도시에 심판을 내리려는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유력자라고 해도 티끌에 불과하다는 상징도 있다. 그래서 이 쫓겨남이 말씀대로 이루어진 일이기에 말씀대로 이루어진 쫓겨난 일은 낙심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쫓겨나서 동쪽으로 145키로미터 떨어진 이고니온으로 향했다. 이고니온은 글라디우스 황제로부터 클라우디고니온이라는 영예로는 칭호를 받기도 했던 고대 소아시아 교통의 요충지로, 비시디아 안디옥을 능가한 도시이다.
갈 곳이 없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니 욕을 먹으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럼 이것을 나에게 주신 음성으로 어떻게 듣는가?
적용점을 생각해보자. 성에서 나가서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라는 것은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 문자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가족을 떠나야 할 때도 있고 그 지역을 떠나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오늘 나에게 주는 음성으로 어떻게 들을 것인가? 안 믿는 식구들의 문화와 가치관에서 떠나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다. 배우자와 부모가 복음을 계속 거부한다면 그들이 제공해주는 안락함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안 믿는 남편이 주는 돈의 안락함, 안믿는 아내가 베푸는 친절을 과감하게 떨어버리고 당신이 하나님 믿지 않으면 아무리 돈 주고 사랑해줘도 하나도 기쁘지 않다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말로만 해서는 안된다. 삶으로 돈을 떨어버리고 집착을 떨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물론 지혜롭게 해야 한다.
적용) 성령의 제자의 삶, 복음을 위해 떨어버려야 할 세상 가치관의 돈과 안락함과 친절함은 무엇인가? 어디에서 기쁨과 성령이 충만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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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절
남아있는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다 했다. 바울의 전도를 듣고 믿게 된 이방인들이 성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제자들이라는 단어로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자기 전통과 이익에 사로잡혀 시기에 가득 찬 유대인과는 달리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방인들은 두 사도가 쫓겨났는데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다고 했다. 이런 상태는 말씀을 받고 회개하여 새사람이 된 자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러면 그들에게 박해가 없었을까? 시기가 충만한 유대인들이 그들을 가만 두었겠는가? 계속 괴롭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로부터 은혜에 머물러 있으라고 거듭 들은 말씀이 있었다. 버티고 인내해서 끝까지 거듭 권고 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14:21절
돌아오는 길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들은 말씀으로 구속사를 이해했기에 박해속에서도 성령의 일으키심으로 일어나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주님의 말씀은 듣고 기뻐하고 영광 돌리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이 성령의 제자이다. 시기와 반박과 비방을 당하고 경건한 귀부인과 성내 유력한 자를 선동해도, 주의 일이면 박해가 와도 하나님의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고 나의 일이면 낙심이 물밀듯 밀려온다. 낙심이 충만하면 나의 일이라서 그렇다. 내 욕심이라서 그렇다. 주의 제자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세계에 눈이 떠지는 것이다. 그래서 알 수 없는 비밀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의 기쁨과 성령 충만함을 기록한 것은 복음 사역의 실패담이 아니라 확실한 성공담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성공한 것이다.
적용) 여러분은 어디에서 기쁨과 성령이 충만합니까? 아이가 수능을 잘 봤는가? 주식이 올랐는가? 연봉이 올랐는가? 고과 평가가 좋았는가? 말씀을 들을 때인가?
2. 여전한 방식으로 전도하고 배척을 당합니다.
1절
이에는 박해에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 이고니온에서 복음 전파사역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두 사도가 함께 회당에 들어가서 말했다고 한다.이때 함께는 평소대로 여전한 방식이라는 뜻이다.
완악한 동족에 대한 감정을 앞세운다면 어떻게 들어갔겠는가? 그러나 항상 구원을 위한 사명에 충성하면 길이 보인다. 여전한 방식으로 회당에 들어갔다. 그러니 유대인과 헬라인이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유대인이 박해하니 어차피 이방인들이 믿을 것이니 회당이 아닌 극장이나 광장에서 복음을 전해야겠다 생각할 수 있다. 안디옥에서는 온 시민이 다 모였는데 당연히 이리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있는 미움과 자기 의를 보시는 하나님이 속지 않으셨을 것이다. 영혼구원의 열매는 고난 가운데 내가 말씀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길러놓는 여전한 방식으로 원칙을 지킬 때 말씀 적용하며 매일 살아갈 때 주님이 맺게 해주시는 것이다. 극장에서 했다면 미움과 자기 의를 보시는 하나님이 속지 않으셨을거라 생각한다. 내 일이 매일 안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지만 내 속의 욕심과 자기 의와 복수를 하겠다 하는 등등의 이유가 있기에 그렇다. 이것이 성령의 여전함이고 진리중의 진리이다.
주님은 잃어버린 어린양에게 가라고 하셨다. 유대인에게 먼저 가라고 명령하셨고 이방의 빛으로 삼았다. 그러나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도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여전함이고 때마다 여전한 방식은 진리 중의 진리이고 오랫동안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이다. 그 결과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분 없이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되었다. 이 때부터 헬라인은 민족적 구분이 아니라 문화적 언어적 구분으로, 전체 이방인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2절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되니 유대인 지도자들이 또 등장해서 그들의 시기와 반박과 비방이 발전해서 형제들의 악감을 품게 하는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불순종의 영으로 이방인을 선동한다. 누구를 향해 악한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은 결국 그 영혼을 해하고 망가뜨리는 것이다. 구속사의 결론은 예수 믿고 죄 사함 받고 의로워진다는 것인데 이것을 안 믿는다는 것은 너희는 멸망할거라고 하는 것이다. 근데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시원케 되어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되었다. 근데 유대인들은 기가 막히다.
이는 기득권 철밥통과 다 연결된다. 그러니 교묘한 말로 그들을 또 선동한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한다. 예수는 처녀가 낳은 사생아라고, 빌라도 법정에서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십자가 사형을 받은 죄인이라고, 예수를 전하는 바울도 유대교를 배반한 배신자라고 했다. 이렇게 계속 세뇌시키니 유대교 회당에서 말씀듣던 사람들은 자꾸 들으니 헷갈린다. 자꾸 들으면 진짜인가 싶다. 돈 많은 귀부인들은 여기에 선동되기가 아주 쉽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불편한 것은 못 참는다. 그래서 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해서 그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했다.
근데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힘 만으로 하는 것으로 부족해서 유대인의 유력자들도 동원했다. 권력으로 죄인을 의인되게, 의인도 죄인 되게 하는 것이 이세상의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살인자가 공로자가 된다. 여기는 법이 없고 오직 내 편만 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아간다. 이쯤 되면 아무리 자기 골육이 귀하다고 하더라도 신물이 나지 않겠는가? 근데 바울과 바나바는 말로는 이방에게 간다고 해도 또 유대인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고향을 못버리고 찾았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가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전도는 그저 믿지 않는 이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다. 교회만 데려다 놓으면 될 수도 있지만 복음은 영생을 얻는다고 할 때 영생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관계 전도 생활 전도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적용, 세상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원수를 용서하라는 것 까지는 안다. 그러나 사랑하라는 것은 모른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전도이다.
그래서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하니 일흔번씩 일곱번이라고 하라고 했다. 인간이 그럴 사람이 어딨겠는가. 즉 내 힘으로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끝없이 반복해서 용서하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못한다.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손녀딸에게 이야기를 해 주면 또 해달라고 한다. 계속 다시 해달라고 한다. 근데 제가 몇 번이나 반복하겠는가? 그러나 교육은 반복이고 반복을 잘 하고 잘 해주는 사람이 최고이다.
큐티도 반복이다. 아이들이 깨닫지 못해도 한 구절이라도 큐티일기를 쓰게 하라. 읽고 쓸 것 없어도 무엇이든지 쓰게 하라. 자기 생각을 쓰게 하는 반복훈련은 최고의 훈련이다.
프린스턴 총장님이 제작년에 오셔서 설교하셨다.
우주의 행성들이 그들 중 하나라도 그들의 충실한 일상을 멈추면 지구도 멈춘다. 그러니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인지 모른다. 반복하는 일상에 복이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일상에 모든 복이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마찬가지로 전도 배척 핍박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수없이 반복해서 하고 받고 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개인예배 큐티예배 공예배 주일예배 수요예배 목장예배도 똑같이 반복해서 듣고 가고 해야 한다. 안하면 사단에게 사로잡히고 또 사로잡을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목장이 노아의 방주인줄 알아야 한다.
수 십년을 똑같이 전도와 배척 받기 위해 여전한 방식의 예배를 드리니까 저절로 제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 같다. 똑같은 행위를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창조물인 우리들은 집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똑같은 일상의 생활패턴을 가지고 지루하게 사는 것 같아도 여전한 방식으로 충성되게 사는 것이 가장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최고의 삶이다.
인상적인 일은 하루면 족하다. 먹고 마시고 취하고 욕하고 음란하게 사는 것이 잠시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그 끝은 허무하고 황폐함이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 유명한 연예인들이 잘 나가다가 술먹고 어떻게 되고 음주운전 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예수 믿는 우리도 찬양사역자가 멋있으면 다 넘어지는 것이 있다. 우리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안목의 자랑을 피해갈 수 없다.
저도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살았다. 똑 같은 삶을 살아도 날마다 설렘이 있다. 하나님의 창조이고 창조물이니 그렇다. 말로 설명이 안된다. 이것을 세상은 이것을 모르기에 교회를 핍박한다. 우리는 배척받아도 창조물이니 기쁨이 있는 것이다. 성령님의 의도대로 빠지지 않고 읽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여전한 방식으로 그날그날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 있는 것이다. 오늘도 그날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큐티기도회 기도제목 나눔
남자 목장 ampndash 권찰님을 선교사 보내고 싶다는 나눔
남편 뿐 아니라 아들 딸 아내의 언제 끝이 날까 하는 일들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 여러분이 있다는 것만 해도 성령의 제자이다. 이렇게 기도제목 내놓고 기도하는 것 처럼 축복이 없다. 다 잘먹고 잘사는데 왜 큐티기도회에 들어와서 기도하겠는가? 우리가 늘 이야기 하듯 이런 분들 때문에 늘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다. 고난 당한 한 사람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적용) 끝이 안 보이는, 반복해서 참아야 하는 일은 무엇이고, 몇 번이나 몇 년이나 참았습니까?
끝이 안보이는 것을 반복해서 참는 것이 가장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했다. 별 인생이 없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나가지도 만나지도 못한다. 근데 힘든 딸 아들 때문에 예배가 사모된다. 그러면 예배가 축복이다. 그런데 잘 되면 큐티 기도회도 안들어온다. 이 땅은 참 짧다. 지옥은 있다. 이 땅에서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렇게 잘 살려면 성령의 제자는 양육이 필요하다.
3. 전도할 때 양육이 필요합니다.
양육이 필요하다. 그냥 참는 것은 어렵다.
3절
3절에 보면 안디옥에서와는 달리 두 사도가 오래있었다고 증거한다. 오래 라는 단어는 얼마를 의미하는가? 이 뜻은 넉넉한 충분한 이라는 뜻이다. 하루를 머물러도 충분할 수 있지만 10년 20년 있어도 부족할 수 있다. 70년 있어도 부족할 수 있다. 그러니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크로노스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최적의 시간인 카이로스의 시간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주어진 삶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 이걸 하려면 양육이 필요하다. 오래있어 양육해야 한다.
1절에 보면 이고니온에서는 이미 허다한 무리가 믿었는데 이곳에 왜 머물러 있었는가? 양육하기위해서이다. 사도바울의 큰 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양육이다. 그래서 에베소에서도 2년, 고린도에서도 1년 6개월을 가르쳤다. 교인들이 많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아무리 은혜를 직접 체험해도 소용없다. 말씀을 제대로 배워 구속사적인 신앙이 있어야 한다.
파송했던 안디옥에서도 1년동안 가르치니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다고 한다. 교인수가 많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은혜를 직접 체험해도 소용없다.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 신앙인으로 설 수 있다. 안디옥 교회는 배움이 있게 되니 모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했고 전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양육이 없는 전도는 미완성의 전도이다. 오직 양육을 통해서 전도는 완성된다. 무디가 전도를 많이 했지만 정착은 거의 안되었다. 근데 찰 스피니는 회심을 통한 양육에 앞장서니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고 남아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주체는 전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전도자와 하나님 사이에는 분명히 역할 분담이 있다.
오래 있어 주를 담대하게 전했다고 한다. 오래는 시간이 얼마냐 라는 것인데 여기서는 머물러 있었다는 뜻의 디아트리보 라는 단어이다. 트리보는 문지르다 비비다 치다 닳게 하다는 동사이고, 디아는 운동의 방향과 크기를 강조하는 접두어이다. 즉 내 몸으로 사명의 자리를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비비고 닳도록 문지르듯 수고하며 살아낼 때 예수님이 내 삶을 통해 친히 표적과 기사로 자기 은혜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증언하신다는 말이다. 내가 그렇게 사는 삶이 있어야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담대히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구원을 위해 내가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명령을 듣고 사는 사람은 복음 전도를 담대히 하는 것이다.
제가 순종하는 것 같아도 미장원 시장에서 복음을 담대히 전했다. 남편에게는 꼼짝하지도 못하지만 거기서 비비고 닳고 문지르고 했기에 나가서 담대히 전하는 것이 표적과 기사이다. 그래서 오직 주만 힘입게 하는 오늘 내 환경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선의 세팅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비비고 닳도록 적용하며 문지르며 사는 것이 표적과 기사가 되어 최고의 증언을 하고 또 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양육이 잘 되어 표적과 기사가 되어 담대히 전했더니
4절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 주님이 직접 증언하시는 능력의 말씀이 전해지니 오히려 편이 갈리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이다. 사도들과 함께 선 주님의 편이 있는가 하면 유대인과 함께 선 사단의 편이 있는 것이다. 그럼 사단이 자기 백성을 뺏겼는데 가만히 있겠는가? 자기 백성으로 확정된 사람들을 동원해서 박해를 가하는 것이다. 그러면 믿었는데 그들의 박해가 두려워 어둠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겠는가?
사도바울은 자기가 일생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한다. 우리의 부부 자녀 모두 전쟁이다. 이 전쟁을 혼자 할 수 없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복음이 통하는 것은 없다. 구원의 관점에서 말씀을 기준으로 두고 거짓 화평이 깨어지는 고난을 감당해서 죄를 깨달으면 주님이 진정한 화평을 주신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하다. 전쟁 혼자 못한다. 함께할 지체들과 함께 해야 한다. 남편이 외도했다고 편지 보내면 참으라고 하는데 참아지는가? 돌아오는 동안 같이 전쟁할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혼자서 절대로 못한다. 그것이 사단의 속성이다. 숨기고 있다가 돌아오면 내가 이야기 할 수 없다.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고난을 줬는데 환경만 바뀌길 바라는 것이 얼마나 기복인가. 그것이 사단의 속삭임이다. 이것을 미리 듣고 양육되어야 남편이 아들이 어쩌고 할 때 놀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 교회 성도들이 어떤 사건이 와도 놀라지 않고 잘 처리해 간다고 생각한다.
적용) 양육을 어디까지 받으셨나요?
양육 받기를 사모해야 한다. 양육 안받으면 성령의 제자가 되기 어렵다. 양육 받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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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돌로 치면 도망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5절
지난 주부터 반복해서 시기 반박 비방 악감 같은 것에 이어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한다. 죽이려고 한 것이다. 돌로 치려는 것은 유대인의 관습이기에 이것은 유대인이 주동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해를 가하려 했던 자를 이방인 유대인의 관원들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보아 사도들에 대한 박해의 시도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사단의 세력들이 얼마나 큰 위기감을 느꼈는지 보여준다. 그러니 얼마나 신물나게 괴롭히는 것인가? 여러분들이 정말 괴로운 일이 있다면 바울 사도가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6절
안디옥에서는 쫓겨났다. 근데 이고니온에서는 스스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갔다고 한다. 구원을 위해서는 옥문이 열려도 도망 안 갈 수도 있지만 사명 위해서는 수치를 무릅쓰고 도망가듯 피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분별할 수가 없다. 그때그때 적용이 다 다르다. 말씀을 그날 그날 읽고 적용하는 것이 버팀목이 되는 것이다.
7절
그래서 복음을 전했다. 이때 미완료 과거동사였다. 즉 복음 전도 활동이 어떤 환경에서도 중단 없이 전개 된 것을 의미한다. 복음이 조건반사적으로 전해졌다. 우리도 역시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가 중단 없는 전진기지이다. 복음을 전하되 지혜롭게 전하는 곳이다. 가정 직장 사업장이 전부 전도지이다. 우리는 해외로 가야 전도지라고 하지만 여전한 방식으로 날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자리를 잘 지키면 집안 목장 교회 등으로 지경이 넓어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끝날 것 같지 않은 것들을 본다. 어제 김상건 집사님 간증에서 믿기 전에는 선남선녀가 결혼했어도 3년만에 이혼했다고 한다. 잘난 사람들은 3년을 오래 참은 것이다.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집에서는 술먹고 왜 저러나 했다고 했다. 근데 참았던 기간이 3년밖에 안 된다고 한다. 우리는 70년도 참아야 하는데 그렇다. 근데 믿음이 없으니 누구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교회의 부흥이 아니라 가정을 지키기 위해 복음이 들어가고 복음이 들어가야 전세계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힘들면 선교 가고 신학 해서 목사된다고 하나? 그건 아니다. 영적 진실성의 결론은 인내인 것이다.
바울은 박해와 반대에 맞서서 노심초사 하는 마음으로 제자들을 양육한다. 우리도 노심초사 하는 마음으로 양육한다. 그럼 박해가 더 심해진다. 그럼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간다. 그럼 발길이 닿은 그 곳에서 또 전도한다. 그러면 또 다른 박해가 새롭게 시작된다. 전도 배척 박해가 죽을 때 까지 순교할 때까지 계속되는데,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이 사람 사는 일이겠는가? 이런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이 어딨겠는가? 이것을 믿음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이 길을 누가 가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가장 귀하게 생각하신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괴롭히는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바울 한 사람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의 외로움을 생각했다. 어떻게 자기 고향 동족이 이렇게 시기와 반박과 돌로 칠 수 있나 싶은 것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길인가 싶다. 좁은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을 간 사람이 있었기에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복음 전파는 외롭고 슬픈 길이지만 설레임도 있다.
그러나 별 인생이 없다. 어차피 한번 뿐인 인생이다. 쾌락 좆아서 살면 순간적인 즐거움은 있을지 모르나 그 끝에는 영벌이 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 살면 그 끝에서는 영생이 있다. 제가 아무리 힘들고 박해가 있다 한들 17년간 복음을 전하면서 주일에 기쁘지 않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적용) 여러분은 영벌의 쾌락의 삶을 살겠는가 영생의 제자의 삶을 살겠는가?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는가?
지난주 장례식 간증
한 사람이 깨어있어서 구원 때문에 기도하니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역사하셔서 성령의 제자의 삶을 살게 하셨다. 이 집사님이 오자마자 너무 사모하셨다. 성령의 제자가 되어 20일 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 온 집안식구에게 복음을 전하고 남편을 구원시키고 호적을 지켰다.
이렇게 적용하는 집사님들 보면 기가막히다. 적용하시는 것을 보면 저는 입으로만 전하는데 여러분들을 살아주시니 제가 숨어야 할 것 같다. 복은 여러분이 받는다. 저는 말씀전하고 그대로 살아내지 못하니 벌은 제가 다 받을 테니 여러분은 저에게로 나오는 말씀만 듣고 적용하시면 성령의 제자가 될 줄 믿는다.
말씀맺음
성령의 제자는 쫓겨나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다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한 방식으로 전도하고 배척당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그러나 여전한 방식으로 배척 당하려면 양육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바울이 걸어간 길을 묵상하며 우리도 이 길을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원을 위해 돌로 치면 지혜로 도망갈 때도 있다. 이것이 성령의 제자이다.
[기도제목]
* 이지현
1. 엄마에게 나는 피해자라 부추기는 내 안의 사단과 자기애를 몰아내고 엄마의 저녁 식사 챙겨드리는 손과 발이 가는 사소한 섬김부터 할 수 있도록.
2. 사소한 일상을 중요하게 여기며 운동, 취침, 식사, 청소를 매일 여전한 방식으로 충성되이 살아냄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3. 공예배와 주님께서 허락하신 목자의 자리라는 양육을 잘 받도록.
*김교희
1. 복음을 위해 적용해야 할 일을 잘 분별하도록 (엄마, 동생)
2. 이번주 팀 개편 결과에 요동하지 않고 여전한 방식으로 이타적인 업무 하도록
3. 생활예배-큐티, 수요예배, 큐티기도회 잘 드리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