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일, '성령의 동행', 김양재 담임목사님 (행13:13-14)
성령의 보내심을 받고 가는데 동행이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여정을 향해 가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행인 것 같다. 세상사람들과의 동행은 끝이 안좋다. 우리는 정치를 보면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어제의 친구가 배신하는 것을 언론을 통해 수없이 보고 듣는다.
이땅은 유한하고 천국은 영원하다. 그러니 천국여행에는 동행이 정말 중요하다. 결혼 친구 가정 직장 등에서의 동행이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에서조차 동행이 되지 못하고 로터리 클럽처럼 허무한 동행일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의 동행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성령의 동행을 하려면
1. 사람의 수행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13절
이제부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바울 일행의 전도활동을 다룬다. 바울 일행이 바보에서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밤빌리아 버가 이다. 해안에서 25km 정도 들어간 도시이다. 이 도시는 큰 배가 정박할 항구가 없어서 14절의 앗달리아 항구에 도착해서 버가까지 걸어간 것 같다. 앗달리아에서 버가까지는 20키로 정도 되고 해안에서는 25km 정도 된다.
도착한 그 앗달리아 항구는 안탈리아라고 하는 해변이 참 아름다운 곳이다. 근데 앗달랴에서는 복음 전했다는 말이 없다. 너무 아름다워서 전할 엄두가 안난 것 같다. 지금도 그곳은 골프장이 그리 아름답다고 한다.
우리도 바울 같은 사도가 내곁을 지나면서 말도 못붙이게 하는 사람일 수 있다. 실루기아는 성공해서 지나쳤고 안탈리아는 안탈랴는 아름다워서 지나친것 같다.
어떤 목자님의 조카가 삼성전자 서울대 나온 박사인데 복음 전하려는데 성경이 유럽의 역사책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힘들었다고 한다. 믿음의 4대째인데 4대째 와서 믿음이 흐지부지 되는 것 같아 힘들다고 한다. 성공했고 아름다운 사람이 믿기가 정말 어렵다.
그들은 앗달리아에서부터 버가로 걸어갔을 것이다. 밤빌리아주의 수도인 버가에는 아고라 광장이 있고 아르테미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당시 13000명 정도의 대단한 도시였다.
지금까지 구브로 섬 횡단했어도 총독 서기오 바울 한사람만 건졌고 백성들의 열매는 없었다. 이곳 버가에서 처음으로 선교다운 선교 하려고 도착한 첫 기지라 할 수 있다.
오늘의 주제는 버가와 비시디아 안디옥이다.
버가에 도착해서 복음 전해야 하는데 대형사고가 터졌다. 마가라 하는 요한이 돌아갔다고 한다. 엄청난 사건이다. 다락방 섬김으로 바울의 수행원이 된 요한은 왜 돌아갔을까? 누가는 그 이야기를 자세히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울의 양육으로 해석되었고 요한은 그 뒤에 다시 합류했기에 덮기로 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번에 묵상을 정말 많이 했다.
요한이 왜 돌아갔을까?
1) 바울의 리더쉽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즉, 윗질서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3절
바나바를 동행하는 사람으로 표시했다. 선교팀의 수장이 바울로 바뀐것을 나타낸다. 왜 바뀌었나? 지난 12절 까지 바보에서 마귀 바예수를 성령이 충만하여 주목한 사람은 바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예수를 분별하여 막았고 눈까지 잠시 멀게 해서 엄청난 능력을 보였으니 서기오 바울 총독이 놀랍게 여긴것은 복음때문이기도 하지만 바울의 능력보고 놀란 것이다. 바울의 진면목이 나타났다. 거칠것 없이 바예수를 주목하고 할 말을 했다.
여기서 보니 바나바는 그동안 성경을 가르쳤어도 바예수를 분별하거나 야단치지도 못해다. 그러나 바울은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주의 바른길을 굳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했는데, 정말 바예수의 짓은 마귀의 짓이기 때문에 그를 위해 야단칠수도 있어야 한다. 복음에는 타협이 없어야 한다. 구원때문에 무릎꿇어야 하지만 전할 때는 타협이 없어야 한다.
우리도 죽을 것 같이 힘든 고난가운데 있지만 주님 만나고 주님의 종과 수행원이 되지 않았다면 구원 때문에 이혼하지마라, 감옥은 가라 이런 이야기를 못한다.
그러나 마음씨 좋은 바나바는 우리가 아는 고난은 없다. 그가 마음씨 좋은 부자라서 우리는 너무 좋다. 1절의 5명의 리더쉽 목사 중 한 교회를 고르라고 하면 바나바 목사님이 가장 좋다. 야단도 안치고 부자라서 우리도 부자가 될 것 같다. 그런 사람도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없었다면 누가 바울을 소개해주었겠는가? 그러나 이방지역에 파송 받고 보니 그는 바예수를 분별하지도 꾸짖지도 못한다.
근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서기오 총독이 자기가 총애하던 바예수를 야단치던 바울을 신뢰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이다. 그래서 서기오 바울이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겼다고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니 영적인 카리스마로 바울이 금세 선교팀의 리더가 되었다. 그것은 바나바가 인정하니 되는 것이다. 갑자기 바울 주도로 모든 것이 돌아가니 요한이 인정되지 않았다. 삼촌인 바나바의 헌신과 위상은 바울과는 비교가 안되는데 바보에서 바울이 한번 짠 했다고 어떻게 리더가 바뀔 수 있나 생각한 것 같다. 이것이 성령의 보내심이고 성령이 동행하는 결정이다. 바나바가 인정했는데 요한이 인정 못하는 것이다. 개인큐티 합심기도로 성령이 이르셔서 동행한 것인데 성령이 내 옆에 있는 것을 잊으면 이렇게 되는 것 같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다. 지금은 마가라는 선교적 이름을 쓸 데가 아니라 계속 요한이라고 호칭한다. 근데 변화된 이후에는 마가라고 해준다. 그래서 성경대로 요한이라고 부르겠다.
복음의 위력의 절대가치를 경험하지 못한 요한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는 믿음인 것 같다. 오직 바나바의 위상만 생각한다. 이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 혹은 사촌이라고 한다. 지역감정만 해도 대단하고 유대인의 선민의식도 대단한데 요한은 집에 대한 자긍심도 대단했던것 같다. 편견에서 못 벗어난다. 당사자인 바나바가 더 자존심 상할 수 있는데 바나바는 전혀 불만 표시하지 않고 끝까지 동행했다. 물론 이 사건은 바울과 바나바를 갈라지게 하는 사건이 되긴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자신이 안 되는 것을 인정한 것이 참 훌륭하다. 근데 요한은 바예수를 꾸짖고 서기오 총독이 예수를 믿었지만 그런 바울에게 하나도 은혜를 못받은 것이다. 요한은 수행원이라 했다. 신분이 망각되는 것은 순간인 것 같다. 수행원은 종이다. 자기가 앞날을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수행원이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내가 가준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요한은 환경이 겸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안디옥 교회가 아니라 자기집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다.
적용) 인정이 안 되는 리더가 승진해서 사표 쓴 적이 있나요? 그 후에 될 사람이었다고 인정한 적도 있나요?
요한은 분명히 힘든 일이 있었다.
2) 사울의 질병문제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요한이 안면몰수하는 문제가 있었다. 사람의 수행원을 하면 안면몰수하는게 있다.
14절에 보면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고자 했다. 근데 버가를 지나치려고 들린 것이 아니라 복음 전하려고 갔다. 복음 전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실루기아 항구도 앗달리아도 배타고 가려면 지나쳐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화려한 곳에서 시간낭비 하지 않기에 지나친다. 그런 적용도 할 수 있어야 한다. 항구도시는 사람말을 안 듣는다. 버가는 일부러 간 곳이라서 그런 문제는 아니다. 대단한 곳이나 그 문제는 아니다.
버가에 도착해보니 저지대여서 습한 기후 때문에 바울이 그곳에서 심각한 질병이 발병한 것 같다. 갈 4:13에 보면 내가 처음에 갈라디아에 갔을 때 육체의 약함으로 너희가 시험에 들뻔 했다고 한다. 갈라디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을 포함한 1차 전도여행지였다. 아팠던 것 같다.
바울이 말하던 육체의 가시였는지 모르겠지만 도저히 전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 지역을 벗어나서 공기도 좋고 습기도 없는 고지대로 올라가야 바울의 병에서 놓였기에 이동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래서 바울의 건강문제로 급한 그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기로 했다.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는 200키로 정도 된다. 근데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길은 평지도 있고 산지도 있다. 근데 문제는 평지는 저지대라 바울의 병 때문에 갈 수가 없다. 그래서 갈길은 산맥밖에 없었는데 산맥이 너무 험했다. 너무 거칠고 삭막한 험산이어서 늘 강도들이 출몰했다고 한다. 재산도 생명도 뺏기는 무서운 곳이었다. 위험한 여정이지만 바울의 병 때문에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요한이 못간다고 했다. 길이 없어서 못간다는 것이고 바울이 아파서 버가에 있을 수도 없는데 요한이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나이를 봐도 바울은 40대이고 요한은 20대이다. 근대의 수명은 40-50이었기에 40세면 완전 노인이다. 그런데 요한은 노인이고 병자도 간다고 하는데 본인이 짐 지고 가야 했다. 그러나 요한은 바울이 싫어 인정도 안되고 산맥은 더 싫다. 그러니 안 간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죽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바나바 삼촌도 두고 간다는 것은 죽기 싫다는 것이다. 바나바와 바울이 설득했지만 결국 이들을 두고 떠났다. 요한으로써는 가지못할 이유가 너무 많다. 말이 안된다. 다시 고향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수행해야 할 참모가 수행지에서 떠나버렸다. 사람의 수행원을 하니 천지를 지으신 성령이 동행해주신 것이 안보이니 결정적일 때 안면몰수하고 떠나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너무 못되지 않는가? 나중에 바울이 요한을 오랫동안 용서못한것이 이해되는가?
적용) 여러분은 가장 어려운 수행지에서 안면몰수하고 어디를 떠난 적이 있나요? 배우자가 힘든데 버렸는가 직장이 힘든데 나만 살겠다고 안면몰수하고 한 짓은 무엇인가?
목자님이 8400만원짜리 경매 나왔다고 해서 넣었는데 되었다. 840만원 계약금 넣고 찾아가보니 너무 아픈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들 빚 갚아주느라 대출해준 것이라고 한다. 근데 아들도 어디갔는지 모르고 본인들도 갈 곳이 없다고 사정하고 동네사람들이 들어오지 말라고 하니 남의 일 같지 않아서 계약금 840만원과 중개료 600여만원을 포기했다고 한다. 아픈 그분들을 보니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 후회하지 않는다 하신다. 대단한 적용이다. 지금은 모든 식구들이 자녀들까지 신앙생활을 너무 잘 하고 있기에 저는 최고의 것으로 갚아주셨다고 생각한다.
연세대 교수님 칼럼
아인슈타인이 결혼 16년만에 이혼하려고 하는데 결혼 유지하려는 아내에게 보낸 유지각서
이들의 동행은 대학부터 만나긴 했지만 임신해서 억지로 결혼했다고 한다. 결국 이혼했다고 한다. 이들 부부의 서로의 동행이 아무리 일류면 뭐하겠는가? 얼마나 비극이었겠는가.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남편은 결혼 후 아내로부터의 독립과 자유를 탐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친정가면 좋아한다고 한다. 결혼을 명분으로 남편을 구속하려는 아내와 아내로부터 자유를 꿈꾸는 남편은 결혼이 사람의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문명의 이기를 가져오는 어마어마한 이론이었지만 자기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지으신 것을 발견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발견해서 문명의 이기를 우리에게 주어서 이 땅에 얼마나 죄악을 많이 선사했는가?
이 땅에서 하나님 밑의 천재들은 바르게 살기가 힘든 것 같다. 그들은 결국 끝이 안 좋은 이세상의 종과 수행원일 뿐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는 천재였기에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그러니 이 땅은 마음 둘 곳이 아니다
2. 하나님의 수행원이 되어야 합니다.
1) 더 나가야 합니다.
14절
요한도 떠났고 앞이 캄캄했지만 그들은 더 나갔다. 그 험한 산맥에서 짐 져 주는사람도 없이 더 나갔다고 한다.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것 보다 요한의 배신이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더 나갔다. 우리의 힘든 상황에서 묵묵히 더 나가게 되면 그것이 영적인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지금 가장 도움되는 사람이 없어지고 그 환경이 설득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더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 길은 성령이 보내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자녀이면 모든 앞일을 성령님이 인도하시기에 길이 없다면 성령님이 길이다. 반드시 인도하실 줄 믿는다.
우리도 자녀들이 부모 죽으라고 쳐다보지도 않고 원수처럼 미워하며 지내는 집이 있다. 지금 기가막힌 일이 있는가? 바울이 그랬을 것 같다. 도저히 그곳에서 더 나갈 수 없었을 것 같다. 사실 정말 아버지 같이 생각했는데 아픈 자기를 두고 떠났다는 상황에서 더 나갔다고 하는 것 처럼 우리도 기가 막힌 상황에서 더 나가야 한다. 무조건 더 나가야 한다. 그것은 큐티하고 목장예배 가는 것이다. 여전한 방식이다.
기도제목 나눔
구원을 위해 노 젓는 수고를 감당하길 원한다. 이것이 더 나가는 것이다. 천국이 우리 코 앞에 왔다. 잘난척할 시간이 별로 없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다.
수요일에 금식 기간이 최소 3일이라고 했지만 못하는 것 안다. 그래서 내가 꼭 먹어야 할 한끼라도 금식이라도 해보자. 믿음 없는 사람도 금식에 한번 참여해보자. 그럼 금식했다는 것만으로도 구원에 대한 시각이 달라질 것이다.
바울이 리더가 된 것이 카리스마 넘쳐서 된 것 아니다. 사울이 바울된 것은 고전15:9 같다. 뼛속깊이 본인이 죄인이고 작은자임을 알기에 수행원을 자청하고 있다. 17년간 엎드려 있던 그 기간의 훈련이 있다. 우리 모두를 똑같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셨다. 단지 역할이 있을 뿐이다.
제가 늘 결혼식때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다. 이것은 군사용어이다. 수행원은 배 밑창에서 노젓는 노예이다. 다 똑같이 종처럼 아래에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데 사26:16에 보면 바울을 이방인의 선교를 위해 종과 증인으로 부르셨다고 하는데 바로 종이 수행원과 같은 노예인 것이다. 바울도 노예 요한도 노예였다. 요한은 바울의 수행원이고 바울은 하나님의 수행원인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똑같은 수행원이라는 것이다. 근데 바울은 종과 수행원에 대한 체감온도가 크고 요한은 얕은 것이었다. 근데 바울은 역할이라 생각하고 요한은 인격이라 생각하기에 계속 교회를 잔멸하던 바울에 대한 고정관념과 무시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오늘 달라진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리더로 세웠으면 순종해야 하는데 인격이 좋아야 따른다고 하며 구속사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였다고 생각하니 죽을때 까지 할말이 없다. 그래서 그는 사명받고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때 이 산맥을 올라가며 강도 당했다. 그런데 후에 마가라 하는 요한이 이때의 일을 너무 후회할 것이기에 그 때 강도 당했다는 것을 안썼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여러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는 버가에서 전도하려고 했기에 버가는 돌아올 때 전도했다. 그래서 산맥을 넘어 고지대인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갔다. 특별히 산맥으로 간 이유 중 하나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다는 이유도 있다고 한다. 성령이 보내셔서 간 길은 지나고 보면 완전히 성령님의 작품이었다고 찬양하게 되는 일을 보게 된다. 그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도 갈 길이 산맥밖에 없다는 것에 동의하시는가? 바울이 산맥밖에 갈 길이 없다는 것에 동의하는가? 이 기가 막힌 일을 요한 때문에 적지 않았다. 바울의 배려이다.
저 또한 증인으로 살려면 종으로 배 밑창 노예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수행원으로 살아야 한다. 요한처럼 윗사람인줄 착각하고 떠나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목사님 이야기
앉으나 서나 성경만 보고 큐티만 해야 하니 다른 것을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금식 하면서 나의기뻐하는 금식은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금식이라 하는데 그러니 제가 아이들의 경조사를 챙기지 못했다. 근데 이것을 당연하다 생각하고 큐티하고 할일 다한걸로 알았다. 그리고 성경보는 것을 신들리듯 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폭력이 된 것이다. 바울이 산맥을 넘어갈 생각 한 것이 요한이 보기에는 너무나 무모하고 힘들어 보이는 결정이 아니었겠는가? 그렇게 힘들어보이는 나날들을 저는 하나님의 수행원이 되었다고 성경보고 상담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아이들은 저만큼 사명이 없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저의 만족을 위해 저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겠는가? 근데 저는 착각했다.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요한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요한도 얼마나 헌신해서 온 길인가? 근데 요한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잔멸하고 스데반을 죽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내가 원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
적용) 삶의 역할에서 기가 막힌 고난에서 하나님의 수행원으로 더 나아간 경험은 무엇인가? 결혼 직장 자녀교육 등
3. 성령의 동행은 결국 최고의 열매를 맺습니다.
14절
이르러 는 안디옥 안으로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갈라디아 남부에 있는 비시디아 지방과 인접한 부르기아 지방의 한 도시이다. 바울 일행은 안디옥에 도착한 안식일에 유대인이 모인 회당에 모여 앉았다. 여기 앉은 것은 일반석이다. 회당에는 일반석 상석이 있는데 상석에는 랍비가 앉아서 가르쳤다. 그런데 유대인 회당에 들어갈 때 마다 바울이 가르쳤다고 한다. 바울은 가르칠 자격이 있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율법학자였고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고 레위인이었기에 그들은 랍비 좌석에 앉아서 가르칠 수 있었다. 성령의 보내심 세우심에서 나온 시몬들을 보냈다면 그 사람들은 유대인의 회당에는 들어갈 수 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의 세우심과 보내심은 너무나 절묘한 것이다. 정확하게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을 보내신 것이다. 시몬들은 여기 들어올 엄두가 안된다. 이것도 필요하다.
결국 성령의 동행은 최고의 열매를 맺는다. 버가를 지나쳐서 그때는 거기를 전도하지 못했지만 비시디아 안디옥을 갔기에 갈라디아 이고니온에게 전도하게 하시고 갈라디아 전도로 인해 바울 최고의 복음서인 갈라디아서를 썼기에 최고의 열매가 아닌가 한다.
이후에는 알리라 지나보면 알리라 한다. 성령님의 동행은 천지를 지으신 성령님이 나와 동행하시기에 항상 진리의 성령으로 개인 큐티하고 합심기도 하면 최고의 열매로 이루어지게 하실 줄 믿는다.
성령의 동행을 하게 된 이유리씨 이야기
세상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고 영적으로도 최고의 열매를 맺는 성령의 동행이 아닐까 싶다. 아인슈타인은 무엇의 동행인가? 아인슈타인과 너무나 비교가 되는 간증이다.
적용) 여러분은 성령의 동행을 하고 있습니까? 그로 인한 최고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말씀맺음
성령의 동행은 사람의 수행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윗질서를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질병이 와도 이해타산에 따라 안면 몰수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수행원이 되려면 이 모든 상황에서 더 나가야 한다. 더 나가야 하는 것은 뼛속 깊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가능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하고 살려달라고 하면 결국 최고의 열매를 맺습니다.
[기도제목]
* 이지현 기도제목
1. 진로에 대해 보이는 평탄한 길 찾지않고 길이 없어 보이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적용하도록
2. 현장예배와 일상을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을 갖추도록
3. 하나님의 수행원으로 부르심 받은 은혜를 기억하도록
4. 가족여행 안전하고 건강하게 잘 다녀오도록
* 김교희 기도제목
1. 회사에서 사람의 수행원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수행원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고 가도록
2. 생활예배 잘 드리도록
3. 엄마 목장정착, 동생 구원위해 기도하도록
4. 근무지 이동 문제 위해서
5. 신교제 신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