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1일, '애가를 지어 부르라' (에스겔 19:1-14), 정정환 목사님
15년쯤 전 개봉한 로맨스영화 ampndash 이프온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당장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그를 바라보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간절하겠는가? 경험해 본 자는 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망할 수 밖에 없는 운명 앞에서 그를 위해 눈물로 노래를 지어부르라고 하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있다.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 없는 주님은 에스겔을 향해, 우리를 향해 애가를 지어부르라고 하신다. 그럼 애가를 부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1. 애굽 땅에 끌려가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1-4절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고관들을 위해 애가를 지어 부르라고 하신다. 패역한 왕과 유다지도자들에게 애가를 불러주라 하신다. 애가는 개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식장에서 부르는 슬픈 노래이다. 하나님은 왜 애가를 지어 부르라고 하시나? 남유다의 패망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당면하게 될 현실이 너무나 절망적임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에게 말로 행동으로 해도 안들으니 이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애가를 지어 부르라고 하신다. 그것을 젊은 사자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암사자가 키운 젊은 사자가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서 사람을 삼키다 잡혀 애굽 땅으로 끌려간다. 여기서 암사자는 유다 젊은 사자는 여호아하스 왕. 젊은 사자의 문제는 사람을 삼킨다는 것이다. 있어서는 안될 일을 한다. 짐승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삼킨다. 이처럼 여호아하스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신을 숭배하고 폭정으로 백성들을 희생시켰다. 그래서 열왕기하에서는 그에 대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한다. 결국 애굽으로 끌려간 것은 자기 삶의 결론이다.
목사님 주일설교 확정 이후 식구들과 저녁식사 한 이야기
아들이 제가 화가 났을 때 하는 행동 하고, 딸도 자기도 그렇게 한다고 함. 새끼 사자인 딸이 목사님과 똑같은 사자가 되어가고 있었다고 하심.
아들이 몸집 큰 친구로부터 괴롭힘 당한 이야기
아들이 괴롭힘을 당한 이후 목사님이 틈만 나면 헤드락으로 장난치기 시작해서 아들을 넘어뜨림. 격한 장난에 흥분한 아들이 목사님을 치려 함. 그 이후로 정신이 번쩍 들어 그 장난을 치지 않음. 아들과 함께 큐티하고 힘든 사건을 해석하고 알려주려고 하기보다 친구와 싸워 이기는 기술을 알려주는 제가 영락없는 암사자였음.
이렇듯 우리는 젊은 사자일 때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물어뜯고 삼키려 하다가 암사자가 되어서는 허탄한 소망으로 새끼사자를 키운다. 그리고 자녀를 좀 더 잘 물어뜯고 삼키는 유능하고 용맹스러운 사자로 키우려고 한다 성령의 흥왕이 아니라 세상과 스펙의 흥왕을 꿈꾸며 새끼사자를 달달 볶는다. 그러다 그 사자에게 역으로 물리고 뜯기는 날이 오면 뒤늦게 후회한다.
오늘 본문의 젊은 사자인 여호야하스의 아버지는 요시야이다. 유대 역대왕들 중 가장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한 왕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배워야 할 것을 보고 배우기는 커녕 죄만 지었다. 그러다 애굽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저도 인생의 목적이 거룩 아닌 행복이어서 배우고 남 주기 보다는 배워서 물어뜯었다. 때로는 잘 물어뜯기 위해 스펙 쌓고 지식의 바벨탑을 높였다. 집에서 식구들을 물어뜯고 직장에서는 동료들을 판단하며 물어뜯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내가 들은 말씀으로 지체들을 물어뜯었다. 물어뜯고 삼키려는 행동의 이면에는 세상성공 우상과 자기 의와 허영심이 있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내가 가진 생각과 기준이 맞다는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이 깔려있었다.
청년시절 공동체 섬길 때 공동체의 문제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글을 쓰고 주위 지체들에게 메일을 뿌렸다. 당시 제 비판의 대상은 청년부 리더와 담당 사역자였다. 그러던 중 한 지체가 그 글을 청년부 주보에 그대로 실었다. 주일에 교회를 갔더니 난리가 났다. 제가 쓴 글에 물어뜯긴 지체들과 사역자들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글로 인해 옳고 그름을 서로 따지고 삼킬 듯이 싸우다가 사람들이 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그 패악을 그치지 않았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써서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알아내어 뿌리기도 했다. 그 당시 다니던 학교 신문에는 학교 행정을 비판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교회에서 회의 하다 리더쉽을 또 비판했고 결국 그날 목사님으로부터 그러려면 공동체를 나가라는 말에 쫓겨나 한동안 교회를 떠나있었다.
그 당시 자기 의에 충천한 저는 화가 나서 하나님께 서원했다. 이런 한국교회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그러니 목사가 되어 주의 일을 하겠다고 홧김에 서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서원기도를 받으시기 보다 애굽땅으로 인도해주셨다.
대학 졸업 후 약 10년동안 이런 완악한 저를 갈고리에 끼워 애굽으로 끌어간 사람은 저의 직장상사였다. 그들의 공로로 제가 얼마나 자기 의와 공명심과 시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인지를 보게 되었다. 상사의 차별과 무시 불 같은 분노 이해되지 않는 그들의 요구에 하루 종일 물어뜯기며 왜 저 사람은 죽지도 않고 나타나 나를 힘들게 하나 하는 마음에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메일 써서 사장과 임원에게 뿌릴 수는 없었다. 직장에서는 짤리기 때문에 주특기를 발휘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갈고리고 꿰어 끌려간 애굽이야말로 저에게는 관계질서 속에서 순종을 배우게 하신 기막힌 세팅이었다. 직장 고난에서는 내가 자랑삼았던 날카로운 이빨도 발톱도 다 소용없었다. 오직 순종만을 배울 뿐이었다. 그러면서 제가 얼마나 관계질서에 순종 안되고 자기애로 가득 찬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 야생에서 사람을 삼키는 사자는 우리에 갇혀봐야 자기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음을 알게되는데 딱 제가 그랬다.
내가 갈고리에 꿰어 애굽에 끌려간 아픔을 겪을 때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나의 완악함으로 사람들을 사람들을 삼켜왔는지 그 실상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애굽으로 끌려가는 것은 심판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나를 결코 포기하지도 않고 나를 그분의 백성으로 견인해가시려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다. 나 스스로는 절대 낮아지지 않을 것 같으니 애굽이라는 겸손한 환경을 통해 나를 낮추시고 또 이런 비천한 환경을 통해 내 주제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돌아보면 저를 갈고리에 끼워준 직장 상사도 종살이 했던 애굽도 나의 죄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었다. 젊은 사자처럼 사람들을 물어뜯고 삼키려는 저에게 관계 질서 안에서의 순종을 배우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카이로스의 시간이었다.
적용) 나는 요즘 누구를 물어뜯고 삼키려고 합니까? 나의 완악함 때문에 갈고리에 끼워서 끌고 간 애굽은 어디입니까?
2. 바벨론에서 우는 소리를 그쳐야 합니다.
5-9절
암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 알고 새끼 하나를 골라 젊은 사자를 다시 키운다.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끌려간 후 돌아오기만을 고대했던 유다백성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자신들의 소망이 끊어진 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여호야김의 후계자인 여호야긴에게 소망을 두게 된다. 그러나 그 또한 조상이 행했던 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했다. 왕하 24장에는 여호야긴이 그의 아버지가 했던 모든 행위를 답습했다고 한다. 첫번째 젊은 사자가 사람을 삼켰다면 두번째 젊은 사자는 사람을 삼킬 뿐 아니라 궁궐을 헐고 성읍을 부수고 우는 소리로 황폐하게 만들었다.
여호야긴은 여호아하스가 악을 행하다가 애굽으로 끌려간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전혀 악을 돌이키지 않았다. 선왕들의 쇠락을 보고 경계로 삼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도 결국 통치 3개월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역사를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말씀 앞에서 겸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회개하지 않음으로 멸망을 자초한 앞선 왕들의 초라한 뒤안길을 보았다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회개함으로 돌이켜야 살아나게 된다. 그러나 그러지 않다가 자신 또한 바벨론에서 37년간 감옥에 갇혀 지낸다.
우리도 그렇다. 내가 죄악 중 거하다가 심판을 겪었다는 것을 언제나 간증으로 듣는다. 왜 그걸 듣게 하시나? 너도 그런 죄가 있다면 돌이키고 회개함으로 멸망에 이르지 말라는 것이다. 천국 가라고 듣게 하신다. 그래서 예배 때 마다 듣고 있는 이 모든 고백이 하나님의 절절한 애가이다.
본문 6-7절에서는 젊은 사자가 사람을 삼키고 궁궐까지 헐고 성읍을 부수며 울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지독한 자기애와 욕망대로 살고자 울었을 것이다. 그 우는 소리가 사람을 황폐하게 하고 자신이 있는 곳 마저 황폐하게 했다.
저도 그랬다. 사역자임에도 뜻대로 안되면 우는소리를 냈다. 판단과 정죄 미움과 원망의 소리를 내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식구들의 성읍과 지체들의 궁궐을 헐고 황폐하게 만들었다. 예배 때마다 담임목사님이 불러주시는 애가를 듣고 단에서 성도님들이 매주 부르는 애가를 들으면서도 저는 내 욕망과 자기연민에 쩔어서 우는 소리를 내곤 했다. 그러다보니 내 스스로 만들어놓은 걱정과 근심, 두려움의 옥에 갇혀있었다.
이런 저에게 주님은 얼마 전 교통사고를 통해 찾아오시고 애가를 불러주셨다. 사고 난 당시 말씀이 왕하 17장, 예후의 떠나지 않는 죄였다. 예후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여 금송아지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않았다는 말씀이었다. 여전히 떠나지 않은 죄가 내 속에 있고 그 우상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예후처럼 망하게 한다고 그날도 주님은 애가를 불러주셨다.
제가 청년부 사역 하다 보면 간혹 간담이 서늘해질 때가 있다. 한밤에 자살하겠다는 지체가 있다.
지난주 있었던 일
자정쯤 되어 침대로 가려다가 휴대폰 보니 카톡이 와 있었다. 카톡 확인하려다가 잠이 쏟아져 누웠다. 그러나 잠이 달아나 정신이 또렷해졌다. 카톡 보니 자살충동이 심해져 기도부탁한다는 말이었다. 지체와 상담했다. 조울증으로 정신 나갈 것 같고 괴롭고 죽고싶다는 말에 마음이 녹았다. 그날 큐티와 주일설교를 나누며 견디고 살아내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카톡 프로필 사진에 손 대고 기도했다. 손쓸 수 없는 이밤이지만 이 청년에게 주님의 손이 함께하사 오늘밤이 지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카톡보냈다.
한시간 반쯤 지나니 연락이 왔다. 패닉상태에 있다가 말씀을 보니 정신이 든다고 답이 왔다. 다시 약도 먹겠다고 한다. 심판에 대한 말씀을 보며 죽을까 했는데 다시금 언약관계를 맺어주신 하나님의 관계가 신기하다고 했다.
한밤의 폭풍이 지나가고 기도하려는데 눈 앞에 펼쳐진 큐티책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지체로부터 죽고 싶다는 카톡이 왔음에도 졸립다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자기 중심적인 악을 깨닫게 되었다. 자기애를 보게 하신 것이다. 말씀대로 자기 우상대로 내 마음에 들이고 죄악의 걸림돌을 치우라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하루종일 치우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하루가 지나기 전에 주님은 그 지체를 통해 누워 자려고 했던 저를 깨우셨다. 그리고 다시 무릎꿇게 하셨다. 그리고 죄악의 걸림돌을 치우셨다.
손쓸 수 없는 옥에 갇힌 사건을 통해 주님은 저와 그 지체에게 그날의 에스겔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셨다.
우리는 날마다 공동체에서 불러주는 애가를 듣는다. 그러면서도 자기애와 나르시시즘에 빠져 걸핏하면 우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나 자신도 황폐케 한다. 주님은 애가를 부르라고 하시는데 애가는 커녕 내 설움 생색에 울고 탐욕과 분노에 운다. 그 우는 소리로 밤낮 내 곁의 식구의 궁궐을 헐고 지체들의 성읍을 부순다. 원망의 소리 정죄의 소리 비난 판단 남 탓 하는 소리를 내며 내 가정과 공동체를 황폐하게 만드는 주범은 바로 나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바벨론에 사로잡힌 환경을 허락하심으로 그 우는 소리의 실상을 알게하신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손쓸 수 없는 바벨론의 옥에 갇히는 환경에서 비로소 옥중광채의 말씀이 내게 임한다. 그 말씀이 나를 향한 애가로 들려지게 될 때 비로소 내 죄가 보이고 우는소리가 그쳐지는 것이다.
적용) 내가 강포함으로 갇히게 된 바벨론의 옥은 어딘가? 그 옥에서 말씀이 들려 내 죄가 보입니까? 내게 주신 애가의 말씀을 보고 이제 멈추어야 할 우는 소리는 무엇인가?
3. 권세잡은 자의 규를 붙들어야 합니다
10-14절
이스라엘은 물가에 심겨진 포도나무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를 맺고 가지도 무성케 되었다. 그런데 가지들 중 하나가 키가 유달리 높고 뛰어나 보였다. 그 가지는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아였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면전에서 선포해도 전혀 듣지 않았다. 백성들도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선지자들을 욕할 정도로 악했다. 결국 포도나무가 뿌리째 뽑혀서 땅에 던져진 것 처럼 유다는 바벨론에 대해 망하게 되었다. 게다가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끌려가서 눈 앞에서 두 아들이 죽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두 눈도 뽑혔다. 권세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 강한 가지가 하나도 없게 되고 열매가 모두 불에 탈 정도로 유다의 왕권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주님은 이 처참한 일들이 일어날 것에 대해 애가를 부르라고 하신다.
시드기야와 유다가 망한 근본적인 원인은 교만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이스라엘 고관에게 주어졌다. 그럼에도 대하36절에 보면 목을 곧게 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았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만한 자는 언제나 자기가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되려고 한다. 결국 뿌리가 뽑히고 동풍을 맞고 메마르고 불에 타는 사건이 찾아와야 교만했구나 깨닫는다.
올 1월에 청년부에 큐티페스티벌이 있었다. 1600명여명의 청년들이 은혜가운데 집회를 마쳤다. 이 큰 행사를 치르고 나니 마음에도 기대가 생겼다. 이 흐름을 타서 올해는 목장 양육 사역도 더 활성화 되겠지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코로나 터지면서 모든 것을 온라인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청년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그와 동시에 저도 제 자신을 보면서 느끼게 된 것이 있다. 포도가지 중 하나가 많은 가지 가운데 뛰어나 보이다가 뽑혀서 땅에 던져지고 동풍에 마르고 타버렸다. 저 또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길 바라는 인정우상과 교만이 있다보니 제가 자랑하고픈 것들이 뿌리째 뽑히고 불에 타 버린 것을 보게 되었다. 사역의 열매라 생각한 것이 코로나 동풍에 마르고 양육의 열매라 생각한 지체들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삼키는 모습을 보았다.
근데 문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내가 하신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맺게 하신 열매인데 내가 스스로 맺은 열매라고 착각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교만하고 가증한지 알았다. 열매가 생각한 것이 메마르게 된 것은 코로나나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임을 알게 하셨다.
지난 주일에는 청년부 지체들이 목장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셨는데, 청년부 사역자로 주님과 교회에 송구했다. 어쩌면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목장을 하지 않은 청년과 성도님들을 위해 애가를 지어 부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세팅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사실 저는 청년시절 1년 넘게 공동체를 떠나있기도 했다. 주일예배만 드리고 안개처럼 사라졌다. 근데 조용히 사라지는 안개 공동체에 머무르면서 주일예배 이외의 시간은 오로지 제 자신만을 위해 사용했다. 그 당시 공동체 안 나간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은 핑계였고 공동체를 우습게 여긴 마음이 저에게 있었다. 그 마음의 이면에는 하나님 조차도 만홀이 여긴 교만이 깔려있었다. 그렇게 1년 지나다 보니 뼈만 앙상히 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양실조 걸린 것 처럼 살았으나 시체 같은 내 민낯을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아버지가 소천하셨는데, 그 당시 이해하기 힘든 사건을 함께 나눌 사람이 내 곁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더욱이 더 힘든 것은 고통스러운 순간에 말씀으로 해석하거나 조언해줄 사람도 기도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죽겠구나 싶어 제 발로 공동체로 들어갔다.
제가 애굽 땅으로 끌려가고 바벨론의 옥에 갇히고 분노 중에 뽑혀 동풍에 마르고 불타기도 했던 모든 사건을 겪었던 것은 교만한 마음으로 공동체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면 망한다는 애가를 부르기 위해서이다.
코로나의 때를 보내며 청년부 사역하며 양육하고 교제했던 지체들이 흘러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곤 한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되나 탄식이 나오기도 하고, 옥에 갇힌 지체들을 끄집어 내려 애를 써보지만 옥에 갇힌 지체들이 요지부동하는 것을 보면 무력감과 비애가 느껴지기도 한다. 정말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으로 인해 애가를 부를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교만하고 자기애로 가득 찬 저의 죄를 보라고 연약하고 아픈 지체들이 아직도 낫지 않고 저렇게 수고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불이 가지에서부터 나와서 그 열매를 모두 태워버린것 처럼 문제는 환경 탓도 지체탓도 아니고 내 문제이고 내 탓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내 속의 교만과 완악 시기심 허영심 같은 죄악으로 인해 내가 사람들에게 자랑처럼 보이고 싶은 열매조차 불타고 가지들이 꺾이는 사건은 있어야 했다. 나 정도면 괜찮은 포도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땔감으로 태워지다 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교만에 빠져 선민의식에 빠져 사로잡혀 지냈는지를 보게 하신다. 그래서 열매를 태우고 인생의 불을 태우는 불은 바로 내 안에 있는 죄에서부터 발화되는 것이다.
저는 스스로 권세잡은 자의 규가 되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사람과 지식과 경험과 스펙을 강한 가지고 여기며 그것을 의지해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저를 버리지 않고 메마르고 가물이 든 저를 심어주시고 그분이 친히 권세잡은 규가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비록 지금 광야게 심겨져 있다 할지라도 나의 권세잡은 영원한 규가 되어주신 예수님만을 굳게 잡을 때 다시 거기서 회복의 뿌리를 내리게 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나에게 광야에서 애가를 지어 부르라고 하신다. 내가 겪은 재앙의 사건과 현재의 고난까지도 말씀으로 닦아서 고백하고 나누고 간증하라고 말씀하신다. 그게 오늘 내가 지어 부를 애가이다. 모든 것이 까맣게 불에 타 그을렸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나의 규가 되어주시기 때문에 나는 애가를 불러야 할 사명이 여전히 남아있다. 하나님이 끝내시기까지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고 하셨다. 나의 완악함 때문에 애굽으로 끌려가기도 하고, 탐욕으로 인해서 바벨론 옥에 갇히기도 하고, 교만함의 모든 가지가 동풍에 마르고 불에 탔을 지라도 이것까지도 애가로 지어 부르라고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거기서부터 시작하실거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애가를 지어 불러야 할 이유가 있다면 내가 너의 하나님이며 너는 내 백성이 됨이라는 언약을 매순간 기억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기 위해서이다.
에스겔이 이 애가를 지어 부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다는 멸망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자손들은 포로에서 귀환해서 시편 126편의 노래를 불렀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지어 불렀던 이 눈물의 애가를 70년이 지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부르는 기쁨의 찬가로 바꾸어주셨다. 오늘 내가 부르는 나의 애가가 훗날 내 식구와 자녀들과 내 곁의 지체들이 부르는 환희의 찬가가 될 것이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아 올 때 기쁨의 노래를 불렀던 것 처럼, 권세잡은 자의 규가 되신 예수님은 오늘 내가 부르는 애가를 반드시 구원의 송가로 화답해주실 줄 믿는다.
7년전 한 자매의 이야기
7년전 제가 맡고 있는 부서에서 한 자매가 혼전임신 하게 되었다. 자매가 임신했을 때만 해도 남자친구가 우리들 교회에 왔다. 아기를 책임지겠다고 하며 결혼을 약속했다. 그런데 상견례 끝나고 남자친구 부모님의 태도가 돌변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며 결혼 시킬 수 없다고 했다. 혼전임신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매에게 전가시켰다고 한다. 매일 새벽기도 하는데 하나님이 들려준 음성이 아들에게 다른 뜻이 있으니 이 결혼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기와 여자친구를 책임지겠다는 형제는 공동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매에게 아기를 입양시키라고 하고 연락을 차단했다. 고통속에 있는 자매로부터 전화나 문자메세지가 오면 참 막막했다.
'목사님 기도도 하고 큐티도 하지만 너무 견디기가 힘드네요. 저의 한계가 느껴져요. 이 아이를 포기하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며 흐느끼는 자매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마음이 무너지면서 애통함과 참담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남자친구에 대한 배신감과 그의 부모님에게 받았던 모욕, 미혼모로 살아가야 할 두려운 현실,, 이런것들로 인해 자매는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공동체에 붙어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그 당시 청년부 목장과 지금 여자목장이 함께 이 자매를 붙들어주었다. 그리고 자매는 살기 위해 말씀을 붙들면서 목장의 처방에 순종하며 열달을 견뎠다. 말씀을 듣기 싫어 공동체를 떠나버린 남자친구와는 달리 이 자매는 공동체에서 불러주는 하나님의 애가를 함께 듣고 부르면서 열달을 눈물로 회개하고 건강한 딸 아이를 출산했다.
그 당시 주일 설교말씀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의 집으로 들였던 오벳에돔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말씀을 적용하며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었다. 20대 중반에 미혼모가 되어 아기를 데리고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7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바로 2일전 우리들공동체에서 만난 한 형제와 신결혼을 했다.
간혹 저는 이 자매가 속한 여자목장의 보고서를 보며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경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신결혼 한다는 소식에 정말 기뻤다.
자매의 간증
우리들 교회에서는 매주 낙태금지법과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우리나라에서 낙태로 죽는 생명이 하루 삼천명이라고 한다. 그 중 미혼의 비율이 1/3이라고 한다.
지난주에는 보건복지부에서 낙태죄 개정안을 내놓았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이 세대를 보면 너무나 애통하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패역한 이스라엘 고관을 위해 애가를 지어 부르라고 하시는데, 우리도 멈추지 않고 이 애가를 지어 불러야하지 않겠는가? 나는 누구를 위해 어떤 애가를 지어부르겠는가? 나의 죄악과 상처 그로 인해 삼키고 뜯기고 헐리고 뽑히고 황폐케 되고 동풍에 말리고 불에 타버린 모든 순간이 기억저편으로 사라질 것이 아니라 내가 돌이켜 회개하고 오늘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소리높여 불러야 할 애가라고 한다. 내 인생의 흑역사, 망하고 수치스러운 그 어떤 사건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구원의 노래가 될 것이다. 내 수치와 고난 그 어느것 하나도 주님께서 쓰시면 버릴것이 없기에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고 하신다.
공동체에서 나를 위해 울어주고 애가를 불러주었던 수많은 에스겔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여지껏 귀를 막고 있었구나, 예배 때 마다 담임목사님의 눈물의 애가를 들으면서도 나는 자기 연민에 빠져 그동안 우는 소리만 내고 있었구나. 그러면서 사람들이 나를 위해 찬가만을 불러주길 원했구나 싶어서 하나님께 죄송했다. 날마다 나에게 애가를 불러주시면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나에게 호소하셨던 주님의 가슴시린 사랑을 외면한 채 나는 세상의 성공담과 흥겨운 노래에만 귀를 기울이며 살아왔구나 싶어 눈물이 났다. 바라기는 오늘 나를 향하신 주님의 애가를 듣고 나의 애가를 지어 부르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한다.
적용) 공동체 안에서 나를 위해 불러주시는 애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내가 지어 부를 애가는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를 위해 그 애가를 부르겠는가?
[기도제목]
* 이지현
1. 생활예배와 생활습관이 몸에 익숙해지도록
2. 내 환경의 옥에서 연민, 무기력, 회피의 애가를 그치도록
3. 판단과 정죄의 교만을 멈추고 내가 어떤 죄인인지 기억하며 주를 고백할 수 있도록
4. 밖에선 인정받으려 힘을 쓰고, 안에서는 방전되어 무기력한데 둘 다 내 모습임을 인정하고 균형을 잡도록
* 안무옥
1. 엄마 수술 회복 및 아빠 폐 건강(약 복용 지속할 수 있기를)
2. 자격증 시험 결과 인도해주시기를
3. 지금의 자리를 잘 지키며 말씀으로 진로 인도함 받기를
4. 생활예배 및 우선순위 잘 지키기
* 김교희
1.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려는 자기애의 뿌리를 회개하고 의존의 우는 소리를 그치도록
2. 인정보다 이타적인 마음으로 직장생활 하도록
3. 동생의 마음을 살피고 구원을 위해 기도하도록
4. 엄마 목장정착
5. 구원이 삶의 목적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