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녹취
* 설교 본문: 사도행전 9장 1-9절
* 설교자: 김양재 담임목사님
온라인 7주차입니다. 너무 힘드시죠? 영적 진실성의 결론은 인내니까요. 우리가 진실함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스데반의 권세와 바울의 권세 중 어떤 권세가 큰지는 모르겠지만, 스데반은 너무 큰 자라서 빨리 데려가신 것 같습니다. 스데반은 칭찬 받는 자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스데반을 착한 사람 정도로 보면 안 됩니다. 착하면 어른 말을 잘 들어야 하지만,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회와 제사장 앞에서 너희는 살인자라고 말했다가 돌 맞아서 순교했습니다. 얼마나 유대 당파 사람들이 위축되었겠습니까. 스데반의 사역을 이어 받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았을 겁니다. 그때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일꾼을 스데반을 죽인 사람 중에 있었던 그 일꾼을 불세출의 전도자로 쓰십니다. 12사도가 있지만 바울이 없었으면 신약이 완성되지 못하고 이방인 전도도 힘들었을 겁니다. 스데반이 죽기까지 아무 준비도 안 되어있었는데, 이렇게 되게 하셨습니다. 늦었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크게 핍박한 사람일수록 크게 일합니다. 거듭남, 회개, 중생 등 여러 표현이 있지만 회심은 가다가 유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울에게는 거듭남과 회개가 동시에 일어나 소위 회심했다고 말합니다.
1. 무섭고 가치 없는 열심을 크게 낼 때가 많습니다.
(1-2절) 야수가 숨을 헐떡이면서 적의로 가득차있는 채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울이 이런 상태였다고 합니다. 사울이 생각하는 율법은 신명기로 십자가에 달린 자는 저주 받은 자라고 하는데 어떻게 구원자가 될 수 있냐는 생각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사울은 율법을 어릴 적부터 잘 지키고 있었을 겁니다. 다메섹은 수리아에 매우 오래된 큰 도시입니다. 30개 정도 되는 회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곳의 유대인 중 상당수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온 세상으로 그리스도 복음이 퍼져나갈 것 같습니다. 똑똑한 사울이 예수님도 죽였던 가야바 제사장 공문을 받아서 기독교인들을 죽이려고 날뜁니다. 유대교를 잘 믿는 모범생의 대가인 사울이 보았을 때 유대교를 믿어야지 이단인 그리스도교를 믿어?라는 태도였을 겁니다. 종교적인 신념이 가장 무섭습니다. 신천지를 어떻게 잘 교회로 인도할지가 큰 기도제목입니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생명의 길에 속한 그들을 잡아와도 그들의 생명은 보전될 것을 또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가멜리엘 문하생이었고 가문(다소 시 출신)도 좋았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똑똑했다고 했잖아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열심보다 앞서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지한 열심은 하나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훼방하게 됩니다. 나의 무지한 열심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대단한 스펙을 가진 열심으로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고 바리새인들은 창조주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스펙과 무서운 열심이 사람 죽이는 열심인가 말입니다. 무섭고 가치 없는 열심입니다.
사울이 행위를 산처럼 쌓아놓았습니다. 행함 하나 없어보이는 암 걸린 사람, 이혼한 사람들이 와서 사울한테 행위로 천국 못 간다고 하면 그냥 듣겠습니까. 살기가 등등해지겠죠. 왜 복음을 못 받아들이는지 심리상태를 상상해보세요. 그래서 저는 누가 극적으로 회심했냐는 생각해봤을 때 남편밖에 없더라고요. 남편의 율법주의를 생각해보니까 살기 등등한 열심이었습니다. 효자였어요. 공휴일날 아침에 올렸던 반찬 중에 몇 가지가 점심에 올라갈 수 있잖아요. 점심에 또 올렸다고 사람 먹으라고 내놨냐고 저한테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니까 방에 들어가서 한 번 대들었다가 잔멸을 당했습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싸워도 남편은 엄빠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엄마가 옳다고 그랬습니다. 제가 힘든 결혼 생활 했던 것도 남편이 엄마밖에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아들만 예뻐해야 하는데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또 아들이었습니다. 외박 한 번 안하는 열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하루라도 어딜 다녀올 수가 없습니다. 민소매는 못 입죠. 알파벳이 들어간 티셔츠를 한 장 사왔는데 미제 좋아한다고 당장 내 앞에서 버리라고 그랬습니다. 여자가를 부르짖습니다. 아파트 살면 잠깐 어디라도 들렀다가 오면 그 집 호주부터 세대주까지 다 읊었어야 했습니다. 옷은 왜 사입냐고 힘든 사람 안 보이냐고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차는 왜 타냐고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핏덩이라고 집에 있다가 문 꼭 직접 열어주라고 그랬습니다. 전기, 보일러 다 아꼈습니다. 날 때부터 부잣집 아들이었던 우리 남편이었는데, 이렇게 아끼는 게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다 맞는 말만 합니다. 그래서 늘 큐티는 내가 하는데 적용은 남편이 한다고 그랬죠. 시간 안 지키는 사람하고는 상종을 않았습니다. 율법주의가 상상이 되십니까. 남편 같은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겁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예수 믿어서 결박 당합니다. 박해하고 결박할 때는 남녀 차별이 없는데, 주의 일 할 때는 남녀 차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성령이 임해야 원류대로 회복되어서 남녀 차별이 없어질 듯합니다. 세종대왕이 살아 돌아와도 지역 차별, 남녀 차별을 해결 못하지만, 예수 믿으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 나의 어리석은 열심, 무가치한 열심은 무엇인가요? 사람 죽이는 열심임을 알고 있나요?
- 죄인입니까? 죄인 잡는 의인입니까?
2. 내가 예수를 박해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회심은 인격의 변화까지 온 것을 말합니다. 회심은 개종이라는 단어로도 쓰입니다. 확실하게 돌이킨 것을 말합니다. 사울은 유대교를 잘 믿어서 그러고 있으니까 회심을 해야 하는 겁니다. 26장 13절에 보면 정오의 빛이 나옵니다. 사막에서 정오의 빛은 살인적인 빛이고 강렬한 빛입니다. 용광로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빛입니다. 정오의 빛만 잘못 봐도 눈이 멉니다. 해보다 더 밝은 빛은 영광의 큰 빛입니다. 그 빛이 비추었습니다. 사람이 보면 죽는 빛입니다. 주님은 빛이고 생명으로 오셨는데, 죽음에 속한 자는 이 빛을 보면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그만큼 주님의 빛은 뜨겁고 거룩하고 무섭습니다. 주님의 빛이 믿음의 분량대로 다가옵니다. 빛이 점점 크게 다가옵니다. 간증도 할 때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 만나는 의미가 점점 달라집니다. 오늘도 제가 남편 이야기했지만 또 다른 이야기가 간증되는 겁니다. 주님에 대한 너비, 높이, 깊이가 주님을 더 알아갈수록 달라지는 겁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죽을 때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 스데반을 일어나 영접해주신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사울이 기억했을 겁니다. 빛은 인자의 영광입니다. 성령의 얼굴로 주여,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평안한 얼굴, 용서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가서 복음을 백번 전해도 표정과 성령의 얼굴이 사도 바울에게 각인이 됩니다. 제자 훈련 백 번 해도 내가 원수 같은 자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봐야 진짜 제자로 키워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지금 그 빛을 받지 못합니다. 엎드러지다라는 것은 굴복하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모든 것이 엎드러졌습니다. 다른 사람 예수 못 믿게 하고 다른 교인들 잡아죽이러 가는 이 때에 엎드러집니다. 사울아, 사울아 두 번에 걸쳐 부르십니다. 아브라함, 사무엘도 두 번 부르셨습니다. 교회를 잔멸하던 사울을 이렇게 다정하게 부르실 수가 있을까요. 살기 등등한 그 모습밖에 없는데 다정하게 부르십니다. 주님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과 다르다고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던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이 사건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이 찬양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죄인 중의 괴수라는 표현을 쓰게 됩니다. 생각하면 눈물밖에 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놀랍게도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스데반과 본인을 동일시하셨습니다. 핍박받는 나와 주님을 동일시하십시오. 예수를 잘 믿는 사람하고만 동일시하실까요. 내가 택자면 나와 예수님을 같게 여겨주십니다.
그는 하나님을 핍박한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우리 남편이 나를 박해한다고 생각 안 합니다. 어떻게 감히 박해라고 생각하냐고 오히려 따집니다. 성도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핍박 받는 일이 당연한 것입니다. 나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해주시니 정말 위로가 되는 겁니다. 주님은 핍박 받을 것을 이미 말씀해주셨습니다. 바울은 자기 믿음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자기가 교회를 박해하지 않으면 도리어 자기에게 저주가 임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겁니다. 사울은 자칭 흠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그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합니다. 흠이 없는 열심으로 남편은 저를 핍박했습니다. 진짜 율법인 성경을 봐도 성경을 보고 있으면 밥이 생기냐고 떡이 생기냐고 그럴 시간 있으면 병원 바닥 한 번 더 닦아야 하나님 섬기는 거라고, 자기 율법으로 제 율법을 잔멸했습니다. 남편의 율법에 의하면 저는 정말 못마땅한 거죠. 아무리 일찍 일어나려고 해도 남편이 원하는 기준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하도 똑똑해서 골목에서 멸치 사려하면 인터폰으로 멸치 안 사냐고 전화옵니다. 어떤 것 하나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부족한 게 너무 많았습니다. 너무 약했는데 남편이 가고부터 건강해져서 지금이 최고로 건강하다는... 수없이 회개하고 자책했습니다. 그런데 남편 같은 사람에게 전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남편 전도하러 왔다가 술 마시러 나가자면 또 따라 나가니까 남편은 돌아와서 또 전도하는 사람들을 욕합니다. 남편을 보면서 내가 예수 믿는 것은 바보 같아서 믿으니 오히려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남편이 박해해준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나는 형편없지만 주님이 불러 데리고 가시는 겁니다. 나를 핍박하는 일이 주님을 핍박하는 일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남편의 구원의 회심이 다른 각도로 들리게 되었습니다.
네가 박해하는 그 사람이다라고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사울의 생각에 일일이 대답해주십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안 믿기니까 기독교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잔멸하려고 했던 것이 사울이었습니다. 틀려도 기다리면 되는데 당장 이 자리에서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정신이 아닙니다. 초신자인지 신천지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을 보여야 하는 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령의 회심을 한 사람이 극소수지만 기도하고 가야합니다. 자기가 법이고 무오(오류가 없다)하다고 생각하니까 박해합니다. 자기가 틀렸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남편도 햇빛보다 더 밝은 눈이 멀 것 같은 그 상황에서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주여 소리가 나온 것입니다. 나보고 자신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믿는 아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예수님을 핍박했다는 것을 알고 회심하고 천국간 것입니다. 사울이 누구를 주여라고 여태 불렀겠습니까. 우리 남편이 부잣집 아들이고 5분이라도 늦으면 그 친구 안 만나버릴 수 있을 정도로 돈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삽니다. 누가 우리 남편에게 예수를 전하겠습니까.
그 광채에 압도당한 사울은 사울이라고 불러주시는 그 음성에 마음이 녹았습니다. 남편도 암이 오니까 마음이 녹았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을 무의식적으로 안 것입니다. 그 한 순간에 사울의 신학과 가치관이 다 무너졌습니다. 이럴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에 나오는 게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남편이 구원받은 일은 기적 중에 기적이었습니다.
-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나요? 박해 당하고 있나요?
3. 영적 소경에 대한 자각입니다.
(6절) 나 혼자서는 못합니다. 내가 행할 일을 일러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씩씩거리는 사람에게도 행할 일을 딱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택자, 회심한 자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아무도 보지 못해서 말도 못하고 서있습니다. NIV에서는 사울이 들은 소리와 사람들이 들은 소리를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사울은 Voice를 들었고, 동행하던 자들에게는 Sound를 들었습니다. sound로 들은 사람은 감동이 없습니다. 남편의 중환자실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들었는데 그 당시 감동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감동 못 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뻐해야 증인이 됩니다.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것이 영적 소경입니다. 남편의 회심이 최고의 회심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제가 이렇게 쓰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첫째 징표는 눈을 보지 못하고 사람 손에 이끌려 장님이 되어 자기가 초토화시키려던 다메섹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영적 소경 안 되게 하시려고 육적 소경이 되게 하셨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구차한 존재인지 알라고 하십니다. 눈은 떴는데 보지 못한다는 말이 2번이나 나옵니다. 소경된 사람을 체휼하게 하셨습니다. 감기도 안 걸려본 사람에게 암 걸린다고 말하면 기분만 나쁘겠죠. 아픔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던 사울이었습니다. 어제 새벽설교하신 초원님은 반장, 회장만 만날 해봐서 미움 받아도 저러다 말겠지 했답니다. 에너지가 있던 남편은 살기를 뿜어서 박해했지만 죽기 직전에는 그 에너지로 큰 사랑을 주고 갔습니다. 남편이 살아나서 코로나 사태를 봤으면 교회를 얼마나 싸잡아서 비판했을까 싶습니다. 교회가 뭐 조금 잘못하면 그렇게 비난하던 남편이었습니다. 본인이 흠이 없으면 교회가 조금만 잘못해도 싸잡아서 비판을 합니다. 감기 한 번 안 걸려봤어도 암 걸릴 수 있으니까 건강 신경쓰라는 말은 사랑의 말입니다. 의사 남편, 부잣집 남편은 걱정이 항상 많았습니다. 천국을 살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평생의 안질을 걸렸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랬어도 사울은 할 말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위대한 선교사가 되려면 눈 멀고, 다리가 부러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처럼 대단한 사람은 눈이 멀고 다리 부러지고 차가 뒤집혀야 합니다. 미리 말씀 들으면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축복하고 싶습니다. 육적 소경보다 영적 소경이 되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 눈을 떴으나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영적 시력이 몇 점입니까?
유대인을 상대할 큰 권세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불가항력적으로 부르시네요. 남편은 암으로 하루 아침에 가게 하셨습니다. 완벽하게 회심하고 갔습니다. 흠이 없으니 기적 같이 부름 받고 데려가셨습니다. 저는 죄가 많아 이 땅에서 이렇게 일하고 있습니다.
2. 나눔
* 목자
- 나의 어리석은 열심, 무가치한 열심은 무엇입니까?
요즘 내가 하나님보다 앞서가는 열심은 가족들을 섬기는 일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셔서 가족들과의 사연과 상처를 뛰어넘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돌로 죽이는 자들 앞에서 인자의 영광을 보고 온유한 얼굴로 중보기도를 한 스데반처럼, 이제는 가족들의 다툼과 사연 앞에서도 성령님 때문에 크게 동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온전히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성령님의 큰 능력과 권세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듣고 자세히 묵상해보니, 한쪽으로는 믿음보다 내 마음이 편하고자 또 인정받고자 성품으로 매진하는 부분도 있었음을 보게 하십니다. 피하고만 싶었던 아빠에서 이제는 예수 때문에 사랑스러운 아빠로 시선이 바뀌었지만 그런 아빠에게 예수 믿고 달라졌다라는 말 보다, 요즘 우리 집에서 가장 효녀야라는 말을 더 많이 듣는 걸 보니, 내 섬김이 그리스도를 나타내기보다 내가 영광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울의 열심은 결국 사람을 죽이는 열심이고, 주를 핍박하고 박해하는데 사용되었듯이 하나님보다 더 앞서려고 하는 열심은 결국 가족들을 영적으로 죽이는 일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저는 믿음의 수준이 연약해서 어디까지가 그리스도를 위한 열심이고, 어디까지가 사람을 죽이는 열심인지 때마다 시마다 분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울도 바울 되게 하셨듯이, 형편없는 나를 들어 쓰셔서 나로 인해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나타내실 줄 믿습니다. 저의 열심을 용서해주시고 부디 구원을 위해 사용해 주세요.
- 나는 죄인입니까, 죄인 잡는 의인입니까? 사울이 유대교를 열심히 믿으며 모든 율법과 계명을 지켜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것처럼, 예수 믿고 상담 받은 것이 내 율법의 잣대가 되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가족들을 가르치려 듭니다. 그러니 저는 죄인 잡는 의인입니다. 의인이 될 수 없는 죄인인데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내 눈에 가족들의 사연과 상처가 객관적으로 보이면서 이제 나는 예전과 다르다. 상처 많은 가족들과 다르다가 어느새 주제가가 되었습니다. 내가 아는 예수의 지식으로 가족들의 상처와 사연 앞에 살기등등하여 나대면서 처방하고 지적하고 가르칩니다. 행위로 천국 갈사람 없는데, 점점 체휼과 공감보다는 율법과 계명, 지식이 난무하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나? 박해 당하고 있나? 돈 없는 예수를 박해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다 가난하게 사는 것도,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오랫동안 신교제를 하면서도 늘 돈 때문에 결혼을 망설이는 것 같습니다. 믿음 때문이라고 가장하지만, 사실은 돈입니다. 함께 말씀 듣고 가는 것이 너무 귀하고 든든하면서도 돈 앞에서 이렇게 망설여지고 넘어지는 저를 보니 돈 없고 가난한 나사렛 예수를 박해하며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또 그런 관계를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박해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영적 시력이 몇 점입니까? 1.5시력에 절반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매일 사건 앞에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그러니 몇 년째 결혼 결정을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말씀 듣고 깨닫고 따르는 것 같다가도 금세 세상 걱정으로 휘말려 내려갑니다.
-> 코멘트
* 부목자: 가족들 앞에서 장녀이자 효녀로 사는 언니 모습이 저랑 너무 똑같아서 소름 돋았어요ㅠㅠ 같은 목장으로 묶어주신 이유가 또 느껴지는 것 같아서 너무 신기하면서도 마음이 아프네요... 집안에서 말씀 듣는 그 한 사람으로서 제 역할이 너무 중요하다고 줄곧 들어왔는데, 진짜 숨막히는 말이지만 그 역할이라는 것이 맞는 것 같고...ㅠㅠ
어찌해야할 바를 잘 모르지만 우리가 하는 것 하나 하나 하나님이 인정해주시고 가족을 구원하는 길로 인도해주시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