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5
제목 : 성령의 회심
본문 : 사도행전 9:1 - 9
김양재 목사님
바울이 시작되는 성령의 회심을 오늘 말씀하신다. 큰 권세를 가지고 회심해서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야한다.
온라인 7주차. 영적 진실성의 결론은 인내. 인내로써 우리가 진실함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스데반의 권세와 사도 바울의 권세 중 누가 더 뛰어난지는 모르겠지만 스데반은 너무 뛰어났기에 빨리 데려가신것 같다. 그의 삶은 알려진게 많이 없지만 성령과 지혜와 권세가 충만했던 사람이다.
12사도가 있었으나 지나고보면 바울이 없이는 신약이 성립이 안된다. 신약을 바울복음이라고 한다. 그러니 늦었다 할때가 없다. 예수 믿는 나를 핍박하는 사람중에 일꾼이 준비되고 있다.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회심은 가다가 유턴한다는 의미가 있다. 근데 사울에게는 거듭남과 회개가 동시에 일어나서 흔히 회심이라고 한다. 성령의 회심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성령의 회심 전에는,
1.무섭고 가치없는 열심을 크게 낼 때가 많습니다.
1-2절 : 살기는 살기를 가진 위협이 여전히와 합해져서 지속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는 뜻. 야수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적의로 계속 가득차서 그 살기로 숨을 내뿜고 들이마시고 있다는 것이다. 사울의 적대감이 왜 이렇게 대단한가. 사울은 율법의 의로는613계명을 지키고 구원은 자기가 하는 것이라고 흠이 없는 자로 스데반의 설교는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서쪽 200-300키로 떨어진 매우 오래되고 큰 도시다. 4-5만명의 유대인이 있다. 그 유대인 중 상당수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이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갈것 같으니 한쪽에서는 무의식적으로 기독교인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울이 생각할때는 신천지와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를 믿는것을 이단이라고 생각한다. 종교 신념으로 유대교 믿어야 되는데 그리스도를 믿으니 핍박을 한다.생각할수록 신천지는 불쌍하고 이 확신을 누가 깨주나싶다.
사울이 율법만 능통한게 아니라 가말리엘의 문화에서 히브리어 헬라어가 모두 가능하고 초대 왕족에 다소시 출신이니 똑똑한 헬라파인이다. 이런사람이 하나님보다 자기열심이 앞서면 사람을 죽일수도 있다. 무지한 열심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이다. 강이 범람하면 진멸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망하는 것이다.자신의 똑똑함이 경계수위를 계속 넘게 되어있다. 그러니 이 무지한 열심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다.
결국 사울은 스데반을 죽였다. 그리고 구별된 바리새인들은 창조주 예수님을 죽였다. 그 스펙과 열심이 사람죽이는 열심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가치없는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망하고 저주받은 것같은, 행한게 하나도 없어보이는 사람이 와서 행위로 천국갈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냥 들어주는게 아니라 살기등등해지는 것이다. 나보고 감히 멸망받으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도바울을 생각하다보니 남편이 생각났다. 남편의 율법주의를 생각해보니까 살기등등한 율법주의라고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올렸던 반찬중에 몇가지 똑같이 올릴수있는데 점심에 또 올려놨다고 난리를 쳤다. 무차별적으로 화를 내길래 방에 들어가서 한마디 했다가 잔멸을 당했다.
부모님이 아무리 싸워도 어머니처럼 싸워야 치매가 안온다고 하셨다. 무조건 어머니가 옳다. 내가 힘든 결혼생활을 한것은 시어머니보다 남편에게 있다. 지나고 보면 어머니가 남편을 좋아한게 아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자신의 일이상식적이지 않으니 아들을 좋아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아들을 무서워하셨다. 그러니 시어머니도 남편에게는 한마디도 안하셨다. (엄빠)빠라는게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자기가 외박 안하니까 어디 한번을 못나가게 하고, 나시옷을 입지도 못하게 했다. 알파벳이 들어간 보세 티를 샀는데 그 앞에 영문이 쓰여있으니 미제라고 못입게 하셨다. 대단한 율법이다. 여자가~ 를 부르짖었다. 사람 앞에서 웃지도 말라하고, 미용실도 못가게 하셨다. 남편이 해외갔을때 머리를 잘랐다가 잔멸을 당했었다. 자기가 좋다는데 옷은 왜 사입냐고, 남편 보라고 옷사입는건데 내가 좋다는데 옷을 왜 사입냐고 했었다. 남편밥은 아내가 차려야한다. 도와주시는 분은 산모밥만 차리면 되고 남편 밥은 아내가 차려야한다고 하셨다. 자녀에게도 자비로운 아버지였다. 입만 열면 율법이 쏟아져나왔다. 다맞는것같은 말만 하는것 같다.
한번은 제주도에 지점장하는 친구를 만나러가셨다. 근데 금방 돌아오길래 여쭤보니 5분 기다렸는데 안나와서 그냥 왔다고 한다. 이 사람은 시간을 안지키는 사람과는 상종을 안한다. 제주도까지 갔는데 5분 늦었다고 그냥 돌아오신 것이다. 그의 율법이 상상이 되나? 제자 훈련을 100번해도 이런 사람과 살아봐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노예근성이 있어서 그 무서운 사람 앞에 잠시만 겪어도 인간이 된다. 무서운 곳에서 겪어본 사람은 여기와서 말씀이 들어간다. 이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게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그때도 있고 지금도 있다. 유대교 기독교 분명히 맞는게 있다. 남녀를 막론하고 박해하고 결박할때는 남녀 차별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주의 일을 할때는 차별이 많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남녀를 창조하실때 비분리 접속사로 분리를 하지 않았는데 죄가 들어오면서 분리가 된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면 남녀차별이 있을수 밖에 없는 것이고 지역감정도 있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돌아와도 남녀차별 지역감정을 해결할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으로 회심을 해야 분리가 없어진다. 그러니 우리의 책임이 큰것이다.
>>나의 어리석은 열심, 무가치한 열심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사람죽이는 열심이라는 것은 아세요?
>>여러분은 죄인입니까? 죄인 잡는 의인입니까?
성령의 회심은
2.내가 예수를 박해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회심은 인격의 변화까지 온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개종이라는 말까지 쓰인다. 사울은 유대교를 너무 잘 믿어서 사람까지 죽이고 있으니 이 사람은 개종을 해야한다. 신천지가 포교를 위해서는 사기, 테러까지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사울에게는 불가항력적인 방법을 쓰지않을 수없다.
3절 : 26장 13절에는 정오에 빛이라고 한다. 정오에 빛은 사막에서 살인적인 빛, 강렬한 빛이다. 정오에 빛만 잘못봐도 눈이 먼다고 한다. 그 해보다 더 밝은 빛.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사울에게 비춰진 것이다. 그 빛은 광채를 넘어서 사람이 보면 죽는 빛이다. 주님은 생명의 빛인데 생명으로 오셨는데 죽음에 속한 자는 이 빛을 보면 두려운 것이다. 그만큼 주님의 빛은 뜨겁고 거룩하고 무섭다. 그 빛이 믿음의 분량대로 다가온다.
22장 간증에서는 큰 빛, 26장에는 해보다 더 큰 빛을 봤다고 한다. 간증도 할때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다. 그때는 몰랐지만 주님 만난 의미가 달라진다. 또 다른 이야기가 오늘 말씀에 의거해서 나온다. 주님에 대한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말씀을 알수록 달라지는 것이다.
사울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변화되지 않았다. 그런데 스데반이 죽을때 생명의 빛이신 인자의 영광으로 스데반이 일어나서 영접해주시는 것을 보고 들었다. 그땐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인자의 영광을 보던 스데반을 보고 계속해서 기억났을것이다. 성령의 얼굴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말라는 기도를 들었다. 햇빛보다 더 밝은 얼굴, 용서의 얼굴을 본 것이다. 그 얼굴에 그 빛이 강권적으로 사울에게 임했다. 뜻을 몰라도 그 자리에서 보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사울이 지금은 그 빛을 받아낼 수준이 못된다. 그래서 땅에 엎드러졌다.
4절 : 엎드러져는 것은 굴복한다는 뜻이다. 그의 모든 것이 엎드렸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울이 사울아 사울아 두번에 걸쳐서 부르신것에 엎드러진다. 이렇게 불렀던 때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녹아지게 부르신것이다. 교회를 잔멸하던 사울을 이렇게 다정하게 부르셨을까. 회심하는데 사울이 한 일이 무엇이 있나?아무것도 없다. 찾아 헤매지도 않고 찾지도 않았다. 직전까지 잡아죽이려고 살기등등했던 것 밖에는 없다. 주님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기와 다르다고 죽이지못해 안달인 악질이었다. 그러니 무엇이라고 표현해야할까요. 나중에 훗날에도 은혜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이 찬송하지 않겠나요. 지극히 작은 나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한다. 생각하면 눈물밖에 날 것이 없는 사울아 사울아. 주님의 부르심이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은 놀랍게도 교회와 자신을 같이 생각하셨다. 교회를 핍박한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한다.
5절 :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는 하나님을 핍박한다고 생각한적이 없는 것이다. 사울은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핍박 받는 것이 당연하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나를 박해는 것이라고 한다.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핍박 받는 것이 당연하다. 나를 핍박하는게 아니라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한다.
(*요한복음서 16장 1-3절)
바울은 자기 믿음으로 교회를 박해하는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임을 믿어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자기가 교회를 박해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저주가 임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신천지도 포교하지 않으면 천국못가는 것도 같은 것이다. 사기를 쳐서라도 14만 4천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바울이 (빌립보3장 6절)
이렇게 자칭 흠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그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율법으로 나의 율법을 잔멸하는 것이다. 정말 율법적인 남편이 진짜 성경을 보고 있는 나에게도 성경을 보고 있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그 시간에 병원 바닥 한번 더 닦는게 하나님 믿는 것이라고 했었다. 자기 율법으로 나의 율법을 잔멸하는 것이다. 또 말만 하면 다 맞는이야기 같았다. 남편은 모르고했어도 저를 박해하는 일이 하나님 섬기는 일이 맞다. 나같은 사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온전한 적이 없다. 이런 나를 정하여 부르시고 데리고 가신다. 내가 잘나서 데리고 가시는게 아니다. 나는 형편없지만 주님이 불러서 데리고 가시는 것이다. 나를 핍박하는 일이 주님을 섬길수 있는 일이 될수있다. 그러니 말씀이 다 나의 이야기일수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과 소리에 압도 되어서 주여 누구시니이까. 말할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게 말이 안된다. 나사렛 출신인 것도 말이 안된다. 목수인 것도 처녀의 몸에서 잉태된것도 모든 것이 말이 안된다.
그러니 사울의 자기 정체성이 흔들리는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다 라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니 살기등등해서 죽이려는 것이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그러면 틀려도 기다려야하는데 틀렸다고 이 자리에서 죽이려고 한다. 변화되길 기다려야하는데 이자리에서 지금 당장 죽이려는게 나는 살고 예수님은 죽이려는것이다.
분명 틀리고 맞는 것이 있는데 성령의 회심을 한 사람이 극소수이기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 신념과 신앙을 구분되어야 한다. 나는 한다면 하는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니 예수님을 인정했다. 스데반을 생각하면서 빛과 소리에 압도되어 저절로 주여가 나왔다. 우리 남편도 암으로 그 아픈 가운데서 주여가 나왔다. 남편은 그 햇빛보다 더 밝은 거기서 눈이 멀었던 그 힘으로 암진단을 받았다. 암진단을 받고 주여가 나온 것이다. 나를 핍박했지만 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사울이 지금까지 누굴 주여라고 불렀겠습니까. 누구도 주여라고 불러보지 않았다. 가말리엘 보고 주여라고 불렀겠나요? 돈. 낮아질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성격까지 성경적이니 전도하기 힘든사람이다. 그 사람이 누굴 보고 주여라고 불렀겠나. 자기를 사울이라고 불러주시니 마음이 녹은 것이다. 사울도 이제 눈이 멀었다. 사울의 신학과 가치관이 다 무너졌다. 이세상에 죄인보다 무서운 것이 의인이다.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나요? 박해 당하고 있나요?
성령의 회심은
3.영적 소경에 대한 자각입니다.
6절 : 내가 예수님을 박해한 것을 알고있는 사람은 행할 것이 있다. 일어나라와 들어가라는 그 순간에 바로 행해야하는 것이다. 회심한 자는 하나님이 다 이끌고 간다. 씩씩거리고 사람죽이려던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이다. 사도바울에게 곧장 일거리를 주었다.
이걸 같이 가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서있다.
7절 : 4절에 사울아 사울아 하는 들었다는 것은 voice, 7절에는 같이 가던 다른사람들이 들은 소리로 sound라고 표현되어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만 말씀하시고 동행하던 사람들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똑같이 보고 들어도 사운드로 들은 사람에게는 감동이 없는 것이다. 남편이 주님을 영접할때 주변에 있던 다른사람(친척,친구)들은 들어도 모르기때문에 증인이 될수없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자각이 없는 것이다. 바울의 회심장면은 생각보다 짧다. 그래도 저는 최고의 회심을 했다고 생각한다.
8-9절 : 주님을 만난 첫번째 증표는 눈을 보지 못하고 살기 등등했던 그가 사람 손에 이끌려 장님이 되어서 자기가 초토화 시키려던 다메섹에 끌려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 후에 소경이 된 것인데 영적 소경을 깨닫게 하기 위해 육적 소경을 하셨다. 사울도 4흘동안 식음을 전패했다. 자기 자신이 소경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회심이다. 눈을 떴는데 보지못했다는 것이 2번이나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보지못하고 끌려가니 아픈사람을 체휼하게 되었다. 이 체험이 사울에게는 필요했다. 감기도 안걸린 사람에게 너 암걸려 라고 말하면 기분만 나쁘다. 아픔에 대해 수치에 대해 죄인에 대해서 회심전에는 전혀 공감할수 없었다.
요즘 코로나 사건으로 조금 열렸던 남편들이 사울처럼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본인이 흠이없는 사람은 교회가 조금만 잘못해도 싸잡아서 신천지를 교회라고 생각하고 욕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눈을 떴으나 보지못하는 자들이다. 스데반을 죽인걸 평생 울면서 복음에 매진할수 있었기 때문에 이걸 우리도 우리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예수를 박해했다는 것을 알아야 회심인데 자기만 모른다. 위대한 선교사가 되려면 꼭 눈이 멀고 다리가 부러져야하는 것은 아니다. 에티오피아 내시처럼 성경만 읽어도 은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처럼 대단한 스펙을 가진 사람은 그런 사건이 있어야 돌아올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전한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금 주고도 못사는 축복이다. 바울의 역할이 있고 스데반의 역할이 있고 빌립의 역할이 있다. 아무거나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 하면 되는건데 내가 골라서 하려고 하니 힘들다. 육적인 소경보다 영적인 소경이 무서운 것이다.
>>눈을 떴으나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영적시력이 몇점인가?
스데반은 순교로 큰 권세를 보여주었다. 그를 죽인 유대인들과 대결하려면 유대인들과 싸울 율법과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했다. 유대인들은 어부를 상대하지 않는다. 12제자들은 어부 출신들이었다. 다들 갈릴리 출신이기에 상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울은 눈이 멀었다가 돌아오게 하셨지만 남편은 암으로 그날 데려가셨다. 너무 흠이 없어서 데려가신 것 같다. 돈이 있고 그랬으면 그걸로 바람피고 자기 위해서 살아야하는데 이 사람의 다음 미션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서 사는게 미션이었다. 이렇게 흠이 없기때문에 데려가신 것같다. 우리는 스데반이면서 바울이고 바울이면서 스데반이다. 박해가 클수록 큰 일꾼이 될것이다.
성령의 회심은
회심전에는 무섭고 가치없는 열심을 크게 낼때가 많다.
회심할때는 예수를 박해한 것을 아는 것이다.
회심후에 영적 소경에 대한 자각을 할수있다. 그러면 사명이 따라온다. 이 모든 것이 은혜 아니면 내가 설수가 없다.
[기도제목]
단이
- 아빠와의 사건을 구속사의 관점으로 보고 구체적인 적용을 할 수 있도록
- 내가 사울이고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임을 인정이 될 수 있도록
- 목소리 건강회복
수연
- 내 계획대로 되길 바라며 내 열심으로 살려는 욕심 내려놓기
- 여기까지 이끌어주심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기
-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
찬미
-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기
- 시간 허비 하지 않고 시간 활용하기 그 시간에 큐티하고 책 읽기 할 거 하기
- 오전에 큐티하기
- 진로에 대해 꾸준히 기도할 수 있도록
하영
- 일어나서 핸드폰 하지 않고 큐티하기
-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기
- 이사 문제에 대해 기도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지인
-생활예배 꾸준히 지킬 수 있도록
-아빠 구원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유빈
- 말씀 해석하기
- 생활 예배드리기
미경
-상담 잘 받기
-우선순위 잘 정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