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2. 15 주일예배>
일시 2019. 12. 15.
찬양 이것이 영원한 삶 ┃ 놀라우신 은혜 ┃ Everyday (날마다)┃ 공감하시네 ┃ 주 말씀 향하여 달려가리라
성령의 전도
본문 사도행전 5 : 33-42
설교 김양재 목사님
성령의 설교를 시작해서 여러 단계를 거쳐 성령의 핍박을 받고 성령의 전도를 하게 하십니다. 전도면 전도지 성령의 전도는 무엇인가 하시겠지만 사도행전의 성령의 전도는 전도학교를 졸업해서 하는 전도도 아니구요, 전도의 이론으로 하는 전도도 아니에요. 그야말로 치열한 전쟁 같은 삶의 현장에서 성령이 도와주셔서 복음이 흥왕해지는 것이 진정한 전도의 현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전도는
첫째로, 분노를 감당해야 합니다. (33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그들이 누군가요? 대제사장, 성전 맡은 자, 공회원들과 원로들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국회라고 보면 됩니다. 그때는 로마의 식민지 시대였으니깐요. 그런데 그들이 크게 노하여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분노를 했다는 말이에요. 교회를 다니는 대단한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전했는데 이렇게 적대감을 가집니다. 아니 그들이 무시하는 어부들의 말을 듣고 왜 이렇게 크게 노하나요? 그들에게 너희가 죽인 예수를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하나님이 살리셔서 임금과 구주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들이 봤다. 증인이다.라는 체험적인 간증을 통해서 믿고 회개하라고 하니깐 완벽한 복음전파거든요. 너무 설득력 있는 메시지에요. 그런데 아무리 받아들이려 해도 자기들이 살인자, 여호와를 거역한 자들이잖요. 그것부터 인정을 해야 하잖아요. 그걸 인정하지 못하겠으니 예수를 거절하는 것은 그 배후에 사탄이 또아리를 트고 있는 것이죠. 내 죄를 봐야겠는데 죄 보면 기득권을 내려 놓아야 하니깐. 사탄은 익지 않은 나무는 흔들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리스도인만 시험하고 괴롭힌다는 의미입니다. 끝에는 돈이 있다고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사두개 당파니깐 예배전문가 아닙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할 때마다 3천만, 5천만명이 빠져나가니깐 이들이 죽을 지경이 되었어요.
그러면 왜 그럴까? 연구하고 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하실 것인데 인간적인 생각만 하니깐 다 가버리고 내가 망할 것 같아서 불안하고 가슴이 터집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 엘리트이고 교양있고 가진 자에요. 이들이 죄가 안보이니깐 못 할 짓이 없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들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었는데 격분한 나머지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에요. 이들이 기득권에 목숨을 거니깐 사도들의 목숨까지 노리는 거에요. 못 할 짓이 없어요. 들키지 않으면 인간은 못 할 짓이 없어요.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은 기쁘지만은 그것 때문에 죽이려고 하는 지도자들을 감당해야내야 해요. 예수님도 이들에게 죽임을 당했잖아요. 제자들도 똑같은 일을 당하고 가는데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기 때문에 이것은 있어야 할 일이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에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제가 살아있을 때 많이 당하고 가는 여러분에게 보여야 여러분들이 후일에 기억날 일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목사님은 당할 때 어떻게 하나? 여러분들에게 보여야 할 것 같아서 저도 이제 많이 당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전도인 것입니다.
믿는 사람끼리의 싸움, 종교지도자, 예배 전문가와의 싸움이 밖보다 안의 싸움이 더 무서운 것을 보여주는데 이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에요. 우리 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나 사도들처럼 누군가가 나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고 성령의 설교 주제인 예수를 믿으라하면 회개하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고 복음의 증인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저주하고 미워한다면 성령의 전도는 할 수 없습니다.
[적용해보세요] 여러분은 복음을 듣고 회개합니까? 분노합니까? 쉽게 말하면 설교 듣고 회개합니까? 아직도 분기(憤氣) 탱천(撑天)해서 들어줄 수 없습니까? 아예 안 들립니까? 끝에 돈이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성령의 전도는
두 번째 지성과 선함도 필요합니다. (34-35)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100% 옳으신 방법으로 믿는 우리를 도우십니다. 내가 진실로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 너무도 신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뜻밖에도 하나님의 상급이라는 의미 뜻을 지니는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돕는 천사로 나타났어요. 그는 바리새파에 속한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그 시대의 아이콘이었어요.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화에서 엄한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후에 바울이 바울 되게 큰 역할을 합니다.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율법의 영광이 떠났고 율법의 순수함과 거룩함이 죽었다고 애도하기까지한 사람입니다. 이런 가말리엘이 공회에 일어난 사도들에 대해서 조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고 경외함을 받는 사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한 것이에요.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말리엘이 양심이 있는 거지요.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봐주기가 어렵잖아요. 다 이렇게 꼬였어요. 꼬인 그대로 보이는 거에요. 자기가 꼬인 대로 꼬인 그 시선으로 보는 거에요. 그런데 사도들의 모습 있는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에 우리가 열심히 선행을 할 이유가 여기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이렇게 지성의 아이콘으로 사두개파와 원수처럼 여겨지던 바리새파 양쪽에서 인정을 받았기에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어요. 그때 좌파, 우파를 전부다 설득해 낸 거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예비해 놓고 계셨어요. 결국 역사의 주관자인 하나님은 바리새파 사람인 가말리엘을 사용해서 사도들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해낸 것이에요. 사두개파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런데 바리새파는 부활을 인정해요. 이렇게 교리면에서도 다른데 가말리엘은 이 두 파를 전부 다 설득해냈어요. 우리들 교회도 이런 선함의 지성인들이 많이 나오길 축원합니다.
적용해보세요. 전도를 위해서 성경도 읽어야 하지만 신문도 책도 좀 읽어보면 어떨까요? 나는 돌아가는 거 몰라. 이러지 마시고요. 그 사람의 문화가 다 있는데 전도하기가 어렵잖아요. 왜곡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십니까? 내가 꼬이면 꼬인 시선대로 사람을 보기 때문에 왜곡하지 않는 것만도 큰 선한 행실 같아요. 영육간의 위기에서 뜻밖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수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성령의 전도를 하려면
세 번째는 역사 의식도 필요합니다.(36-37)
가말리엘은 드다와 유다를 통해서 역사적인 사례를 들어서 설득을 합니다. 그래서 공부도 하고 신문도 봐야 합니다. 그들을 통해서 교훈 받아야 할 것이 있는데,
1) 드다를 통해서는 스스로 높아지고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36)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이 말씀 그대로 드다는 A.D 44년-46년 정도라고 하는데 자기를 스스로 높이고 자칭 메시아, 구세주라 말하면서 요단강물을 자기가 가를 수 있다고 백성들을 미혹했어요. 그런데 이제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이 그를 죽였습니다. 사건이 일단락되니깐 그들 추종자들이 흩어졌습니다. 이게 부정과거가 되어서 흩어져, 없어졌고 이 두 동사가 단 번에 철저히 흩어졌다는 거에요. 사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신성 모독자로 몰아부친 것도 예수께서 스스로 메시아라고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었잖아요. 그러면 드다와 예수님의 차이가 무엇이 있는가. 드다는 자기를 스스로 높였지만,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졌기 때문에 너무 다른 거에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종의 자세인 것이 하나님 자녀로서의 태도이고 그대로 전하는 것이 성령의 전도인 거에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눈살을 찌푸리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 거에요.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야하는 것이 성령의 전도인 거에요. 요즘 기독교 인들은 절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 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지금 사람들의 중론이라는 거에요.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좋게 본 것은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기 때문에라고 하는데요.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고 해도 진리를 담아내는 그릇이 좋지 않으면 그 진리가 훼손됩니다.
2) 유다를 통해서는 로마의 무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7)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갈릴리 출신 유다라는 자가, 당시 시리아 총독이 인두세를 걷기 위해서 인구조사를 하는데 이 유다가 백성을 선동했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어떻게 로마에 세금을 낼 수 있냐며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런데 반란군을 총독 구레뇨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무참하게 진압을 했어요. 그랬더니 따르던 자들이 다 흩어져버렸어요. 왜냐 기복적으로 모였고 이해타산으로 모였기 때문에 지도자가 없으니 다 흩어져 버렸어요. 그럴듯한 것에 미혹되어서 폭력을 행하는 것은 성령의 전도가 아닙니다. .무력에 같은 폭력으로 대항하면 망하게 되어 있어요. 설사 일시적으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또 다른 보복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만듭니다. 물론 국가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면 우리는 국민의 한 사름으로 나가 싸워야 하죠. 그러나 개인의 삶에서는 이렇게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종교를 앞세워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이단일 뿐이에요. 그런데 드다와 유다의 이야기를 하며 거짓 메시아는 시간이 지나면 다 흩어졌다, 사도들을 죽여서 우리가 피를 흘리지 말자. 지혜롭게 설득을 하는 거에요. 우리가 역사도 이렇게 알아야 합니다. 진짜면 남을 것이고, 가짜이면 흩어질 것이다. 그 얘기를 하는 거죠.
[적용해보세요] 복음을 설득하기 위해 스스로를 높이나요? 낮추나요? 복음을 설득해야 하는데 네가 어따 대고 아빠 말을 안 들어. 교회를 가자고 하면 가는 거지. 네가 나보다 높아? 이러면서 자녀들에게 전도하실래요? 부모면 부모지, 그게 권세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부모보다 자녀들의 권세가 높아요. 정말 우리는 자녀들에게 절절 매며 살아요. 그죠? 핵가족 시대가 되어서 그런 거 같아요. 그리고 폭력을 당할 때 폭력으로 나가나요? 기도하며 참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성령의 전도
네 번째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38-40)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가말리엘은 맞는 얘기만 해요. 38절에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는 이 명령은 39절에 너희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때문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제 거짓 메시아는 시간이 지나면 다 흩어졌다는 거에요. 사람의 소행이면 무너질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나면 너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거다. 가말리엘은 사도들의 주장에 비록 동조는 하지 않지만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신관과 역사관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말리엘을 통해서 사도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하신 것은 그 가말리엘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말리엘을 통해서 하는 것이죠. 자신 있기 때문에 상관 말고 버려두라. 우리도 예수 때문에 핍박받다가 때가 되면 여러분을 버려두는 때가 옵니다. 핍박 당하다가 누군가의 명령을 통해 버려두는 때가 와요. 그래서 사탄이 자녀의 모습으로 부모의 모습으로 배우자의 모습으로 날 뛰어도 그들이 나를 버려두게 될 때가 오기도 한다는 거에요.
그러니 마태복음 13장 29절처럼,가라지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가만두라 하시는 거에요. 우리를 칼날 위에 물방울로 훈련시키기 위함인데 이 기가 막힌 구속사적인 이 말을 나를 죽이려고 하는 반대편에 서 있는 가말리엘이 한다는 것은 참으로 당대의 종교 석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초대교회에 역사를 통해 증명되고 있죠.
그러니 40절에 설득 당했다는 거에요.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모든 대제사장, 사두개인들, 종교지도자, 원로들의 이성과 감정을 사로잡아 버렸어요. 입이 헤~벌어져 가말리엘 말을 들은 거에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가말리엘이 등장했으면 좋겠어요. 양 쪽을 다 아우룰 수 있는, 기도합니다. 네 번째 대지가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된다고 했어요. 그러나 여기까지 인 거에요. 그들은 사도들을 무죄 방면하지 않고 채찍질을 가한 후에 방면하였어요. 이 채찍질은 가죽을 벗기다에 유래해서 심하게 채찍질을 가했다는 뜻이기에 율법에서 최고로 줄 수 있는 신명기 25장 3절에 보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자들의 속에 있는 인간적인 분노는 여전하여 변한 것이 하나 없어요. 이것이 가말리엘의 한계인 거에요. 그들이 가말리엘의 연설을 들었지 성령의 설교를 들을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들의 유익 때문에 때려서 내쫓은 것이지 성령의 은혜를 받아 내보낸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가말리엘의 연설을 듣고 변한 사람이 없는 거에요. 그러니 우리는 가말리엘 같은 사람을 분별하기 너무도 어렵습니다.
가말리엘이 이런 최고의 지혜를 가졌는데 이 사람은 왜 예수를 안 믿을까요? 가말리엘이 상관말고 버려두라니깐 너무 관대해보이고 너무 멋있어보이잖아요. 일단 가말리엘은 모두를 편안하게 만들었잖아요. 이 가말리엘은 교회도 다니고 지식도 있는데 진짜 단 하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이것이 정말 중요한 일인데 사람들은 간과하여 예수 안 믿어도 가말리엘이 백 번 낫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는 성품인지, 행위인지 믿음인지, 전부 분별을 못합니다. 그래서 착하면 전도 안해요. 성공해도 전도 안해요. 나이스해도 전도 안해요. 성품과 고결함과 학식과 지성과 인성의 클라이막스인 가말리엘이 예수 안 믿는다고 눈물 뿌려 애통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돌 맞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세상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가말리엘에 대해서 무엇을 분별해야할까요?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왜 안 받아들일까요? 사도들의 표적을 기적을 다 보았지만은 표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이 표적이에요. 그게 믿어지지 않아요. 성경에 대한 지식은 아무리 연구해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짧은 지식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율법학자가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한다면서 그 지식이 예수께로 인도되는 지식이 되지 못했어요. 나 하나님은 믿어, 하나님이 인정 돼. 그런데 예수님은 안 믿어 하는 사람과 똑같아요. 그러니 가말리엘을 보면서 내가 믿는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한가 말입니다. 몰라요? 그래서 성령의 전도입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예수를 주시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더 쉽게 말하면 가말리엘은 죄에 대한 인식이 심각한 인식이 없어요. 교만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인데 가말리엘은 이미 하나님 자리에 가있는 천사 같은 사람이에요. 모범생이고 착하기에 겉으로의 행함은 따라갈 자가 없는 거에요. 나는 구원 받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해야하는데 가말리엘 같은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구원받을 만한 조건을 다 가지고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돈을 못 벌어? 바람을 펴? 뭐를 해. 큐티하고 배우고 목장에 나가지만 죄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죄 얘기하는 것도 지겹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생각도 희미하고. 잘 될 때만 잠시 기쁘고 그것을 믿음이라 착각을 하고 곧 잘 되고 있으면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그게 오래되면 옳고 그름에 합리화시켜야 하니깐 옳고 그름에 천착(穿鑿)합니다. 그리고 곧 고난이 오면 주님을 부인합니다. 이것이 싸이클, 순환됩니다. 우리는 내 옆에 가말리엘 같은 존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할 것이에요.
그러나 우리 모두 하나님을 알아야 내 자신을 알고 그러면 신학자가 된다고 했으니깐. 하나님을 알게 하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우리는 답이 있는 인생인 걸 믿습니까? 우리는 답이 있어요. 위대한 가말리엘보다 사도들이 위에 있는 거에요. 왭니까? 사도들은 복음을 위해서 희생, 고난이 올 때 그 고난 때문에 힘이 들지만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나를 깨닫고.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하셨으니 주님 같이 짐을 져주신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 나가는 거에요. 그런데 가말리엘은 고난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거에요. 설명은 하는데 사도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있는 자일 거에요. 이해되세요?
[적용해보세요] 여러분은 이런 가말리엘 같은 사람을 보고 어떻게 분별하시겠습니까? 좋아요? 싫어요?
고등부 목사가 아이들 빕스 캠프에 데려가서 서로 나눔을 했습니다. 너는 동생과 관계가 힘들다고 하는데 얼굴을 굉장히 선하고 착해 보인다. 그러니 학생이 우리들 교인인 엄마는 공부 못해도 상관 없다고 하면서 항상 성적을 물어봐요. 이렇게 솔직한 나눔을 하니깐 이게 가말리엘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되잖아요.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으면 옳고 그름 밖에 몰라요.
그래서 성령의 전도
다섯 번째는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기뻐합니다. (41-42)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지금 불법으로 강금을 당하고 채찍을 맞았는데 그 이름 예수를 위하여서 능욕 받는 일을 기쁘게 여겼다는 거에요. 그러니깐 여러분 사도들이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응답이 아니에요. 감옥에서 나와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감옥이 기다리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바람의 감옥에서 나왔는데 그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또 다른 바람이 기다리고 있어요. 자식에게 감옥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또 다른 감옥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깐 인생의 목적은 그 이름을 위하여가 되어야 되는 거에요. 그들이 당한 고난이 윤리, 도덕, 법적 잘 못됨이 아닌 오직 주의 이름을 위해 믿음을 지키는 데서 구속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비밀 아니겠어요?
마태복음 5장 10-12절,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제가 옛날 남편 가기 전에 이 날 큐티를 하는데 남편이 성경책 찢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상이 큼이라 이런 수준 높은 고난을 받을 수 있는가. 생각나시죠? 큐티는 어디나 똑같은 거에요. 말씀대로 순종해서 기쁜 것을 이 세상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비밀이에요. 고난이 축복이란 말은 맞는 말씀인거에요. 기도와 본문와 고난이 우리를 적용하게 하는 거에요. 다 거기서 거기 얘기지만은 여러분들은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아보셨어요? 모함을 받아보셨어요? 세상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는 기꺼이 희생을 하는 거에요. 우리 시대는 오드리햅번이 너무나 인류 최고의 일등 가는 미녀인 거에요. 그 사람은 유니세프 대사로서 아주 안팎이 아름다운 배우잖아요. 그런데 23살에 12살 많고 결혼을 두 번한 남자와 결혼했어요. 어렸을 때 너무 힘들게 살았고 유대인 포로 수용소 생활하면서 가정을 꿈꿨습니다. 얼마나 잘 해줬으면 여자가 결혼을 해줬겠어요. 멜파라가 결혼 후에 계속 바람을 피우고 때리기까지 해서 이혼을 했어요. 두 번째 결혼은 로마의 휴일부터 쭉 쫓아다닌 정신과 의사 도티가 있었어요. 몇 십년을 따라 당겼잖아요. 그녀가 우울증 상담을 도티와 했어요. 이미 도티와 결혼을 했을 때는 오드리햅번이 늙었어요. 몇 십년 쫓아 다니다가 늙으니깐 도티도 천하의 바람둥이잖아요. 거기도 또 이혼을 했어요. 몇 십년을 기다리고 별 거 다할 거 같은데 결혼을 해서 이 땅에 사랑할 땐 다 희생해요. 목적이 있잖아요. 내 것으로 갖다놔야 하니깐. 세상 사랑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거기에 빠진 거에요.
정말 예수 그 이름의 비밀하고는 너무 다른 거죠. 예수 신랑이 내 속에 있기 때문에 그 풍부함은 말할 수 없는 거에요. 우리들 교회 청년들이 이혼을 안 하는 것은 비밀, 기적이에요. 16년 동안. 아시죠? 어떻게 세계 제일의 미녀를 두고 이렇게 다 해댈 수가 있어요? 오드리 햅번은 가정을 너무 지키고 싶어했는데. 우리들 교회에 왔어야 했는데.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예수의 신부로서 품위유지를 해야하기 때문에 우리는 남편이 이러건 아내가 이러건 자녀가 이러건 누가 이러건 쓸데 없는 험담을, 예수의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니깐 험담도 안하고 너무 억울해도 변명도 안 하고. 일을 해도 공부를 해도 교회를 해도 모두가 생색을 내고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그 이름을 위해 해야지 되는 거에요. 그 이름 풍부함, 비밀, 사랑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당해도 내가 적용하고 당하면 기뻐할 수 있는 거에요. 오늘 말씀대로 적용했어요. 상대방이 비난했어요. 욕해요. 김집사님 아내가 아무리 적용해도 뚱땡이라고 그러고. 이혼하자고 해도 그걸 참았으니깐 오늘 남편을 간증 시켰습니다.
42절에,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목적은 바로 전도인 거에요. 이 본문의 제목인 전도가 여기에 나옵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파, 사두개파가 있으면 기다려보라는 가말리엘이 있습니다. 여기에 증인의 삶을 사는 사도들이 있어요. 그런데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기뻐하며 사는 것이 성령의 전도이고 그런 증인들 때문에 복음이 저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삼십 몇 년 전에 목숨을 내놓겠다는 그 한마디로 이런 열매를 주셨어요. 말만 했는데. 그들이 날마다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 고백했어요.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런 고백이 굉장히 촌스럽게 여겨지고 교양이 없어보인다고 하면 신앙도 다 메마르게 되어 있어요. 예수는 확실히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중요합니다. 저는 너무 부족하고 모르기 때문에 그 이름에 대한 확신이 확고합니다. 그래서 사두개인 파와 같은 사람과 여러 사람을 질리기도 하지만 그러므로 곤고함을 주셔서 말씀으로 확신을 주십니다.
사도들은 악인들이 악을 행한 것보다 더 열심히 뜨겁게 사명을 행했어요. 그게 중요해요. 아무리 나를 죽이고자 해도 낙심하지 말고 그들의 악보다 한 가지 더 열심히 사명감당하면 됩니다. 어느 곳에서나 그 이름의 비밀 때문에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관심은 오직 그에게 있어야 돼요. 아무리 악을 행해도 오늘 한가지 더 참고 넘어가야지. 한 가지 내가 사명을 하나 더 행하면 돼요. 그 악보다 한 가지 더 사명을 행하면 됩니다. 평신도라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것을 기뻐하면 어느 곳이든지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목사도 직업으로 하면 편한 자리만 탐합니다. 학교 다닐때는 인생의 목적이 공부니 잘해야 하니깐 교회에서 직분을 주면 손사레를 치고. 저는 분방공부, 순모임에 간 적이 없어요. 그런데는 안 갔어요. 인생이 바빴어요. 믿음도 없는 거 같은데 교회 반주, CCC, 옆에서 보면 제가 얼마나 믿음이 좋아요. 그렇게 믿음이 없었지만은 교회에서 산 것이나 마찬가지잖요. 제가 회장님 아들과 왜 안 만났냐하면 그가 완전 쌩 불신자인거에요. 문화가 안 맞잖아요. 통하는 게 없잖아요. 몸이 기억하는 예배를 가르쳐 놓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제
가 시집가서 5년이 지나고 주님을 만난 후에는 교회도 자발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몸이 가는 거에요. 그런데 자발적으로 가고 싶고 그 구역도 할 일 없는 사람이 만나는 것 같은데 그곳에 가고 싶고 저는 누구와 얘기하는 게 싫은데 목자도 시켜줬으면 좋겠다고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냥 전하고 싶었어요. 큐티를 하면서 이것을 가르쳐주고 싶었어요. 가르치고 전도하고가 저의 일이 됐습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이 전자동으로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까지는 주의 일이고 어디까지는 나의 일이다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들교회가 큐티하라고 목장하라고 해서 나는 큐티하랴, 목장하랴 너무 바빠서 내 생활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해. 그러면 주의 일은 뭐고, 내 생활은 뭡니까? 이원론 아닙니다. 일원론입니다. 온통 그 이름이 예수인 사람만이 성령의 전도를 할 수 있는 거에요. 모든 시간은 주님의 것인 거에요. 웃어도 울어도 주님을 위하여. 집에 있어도 교회에 있어도 주님을 위하여 날마다라고 그랬어요. 여러분들이 자꾸 생색내고 티껍게 굴고 그러시면 아니되어요.
[적용을 해보시면] 그 이름의 비밀을 아십니까? 그 이름을 위하여가 인생의 목적입니까? 내 이름을 위하여가 인생의 목적입니까?
# 가말리엘 같은 초원님의 어제 새벽설교 인데요. 저는 요즘 법학전문대학원 강단에서 실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공적 법률가를 양성을 지향점으로 하고 있는데 제가 맡은 부분이 이 부분에 해당해요. 최근 학내 포럼에서 제 생각을 정리해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준비했던 발표 내용을 요약하면,
공적 마인드를 가진 법률가는 약자를 위하여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법률가를 의미한다하지만 약자의 개념은 상대적이다. 이주민, 장애인, 때로는 대통령이나 대기업 사주도 약자일 수 있다. 사회 전체로부터 욕을 먹는 흉악범을 변호하는 것도 공익적일 수 있다. 그리고 약자를 돕는 것이 어떤 것인지 대답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때로는 공감과 위로보다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자신이 책임질 수 있게 양육하는 것이 진정으로 돕는 것일 수 있다. 전문가나 지식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공적마인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이 배울수록 위장을 잘 하는 것일 수 있다. 결정적인 순간 큰 유혹이 닥쳐야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공적 마인드를 갖기위한 방법으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조하는 것은 우월의식에 빠질 수 있고 훌륭한 모델을 제시하는 것도 진공간 속 윤리의식에 그칠 수 있다. 각자의 내면의식을 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얼마나 돈을 좋아하는지 내가 얼마나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는지 내가 얼마나 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치사하고 불안정하는지를 알도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필요한 것은 도덕과 윤리 아무리 얘기해도 일관된 진실성이다.
저는 막상 발표가 닥치니 심히 눌리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공익이 무엇인가라는 다소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가 이 지식의 요람인 강단에서 지식적내용이 아닌 다들 알지만 선뜻 얘기하지 않는 진실을 언급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하고 자존심이 강하다는 사람들 앞에서 이런 발표를 해도 될까?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마침 그날 부부목장에서 한분은 자녀 자살시도 사건을 나누셨고 한 분은 과거 교도소에 갔던 것을 오픈하기 힘들었지만 계속 이어지는 송사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었다며 자기의 수치를 드러내는 나눔을 통해 위로와 권면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난과 수치를 드러내는 목장식구들의 나눔을 들으며 제가 한편으로 많은 회개가 되고 한편으로는 용기가 났습니다. 아 나는 여전히 지식적으로 가르치기만 하니 마음이 이렇구나. 인정받으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나의 수치와 연약을 드러내면 될 텐데 내면의 성철이니 뭐니 얘기하면서도 정작 그것조차 가르치는 입장에서 하려 했구나, 회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장식구들의 나눔에 힘입어 그 다음날 있었던 발표 때 나의 위선과 교만과 실수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가며 얘기할 수 있었고....
그런데 요즘 이런 얘기가 안 들리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잖아요. 공익 이렇게 되면 굉장히 힘든데. 이렇게 했더니만 너무 밝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포럼 참석자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는 거에요. 놀라운 경험을 초원님이 하신 거에요. 여기에도 이런 게 통하는 구나. 말과 행동이 일치, 신앙과 삶이 일치되는 일원론의 삶은 빛에 거하는 비결이 되기에 죄와 고난을 얘기해도 즐겁고 화기애애합니다. 이분이 죄가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들교회 붙어 있다보니 죄 얘기를 하게 되었어요. 죄를 보고 고백하여도 우리는 울고 웃을 수 있기에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제께 새벽설교를 했어요.
사도들이 예수님을 전하고 성령의 설교 예수님 살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전하고 사도들이 내가 그의 증인이라고 하는 이렇게 설득적인 증거가 없거든요. 이 초원님의 공익 인권에 관한 강의는 아까 강의가 예수라는 말은 안했지만 이미 복음적인 내용이 다 들어가 있잖아요. 여기에 본인의 부족과 수치를 드러내는 개인의 간증을 하니깐 우리의 구속사적인 묵상과 나눔은 상아탑과 법쪽 곳곳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줄 믿습니다. 가말리엘은 지성과 선함과 역사의식도 있었지만은 그가 믿음을 가졌는지 모르겠어요. 이 초원님은 앞으로 지성과 양심을 뛰어 넘는 성령의 전도를 하시게 될 줄 믿습니다. 큰 사명이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맺어요. 성령의 전도는 분노를 감당해야 합니다. 지성도 선함도 필요합니다. 역사의식도 필요합니다. 드다를 통해서는 스스로 높아지고자 애써서는 안 된다고 했구요. 유다를 통해서는 로마의 무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아야 된다고 했어요. 무엇보다도 선함과 지성을 뛰어넘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결론은 그 이름을 위하여 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을 기뻐할 때에 우리의 전도가 날로 날로 흥왕하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 그 이름의 비밀, 그 이름의 풍부함을 알아야 우리가 전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말씀 후 찬양 예수 그 이름
기도제목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면 집집마다 또는 여러분들이 속하고 있는 곳마다 분노가 일어날 것이에요. 어떤 경우에도 분노를 잘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고. 나부터도 다른 사람을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다른 사람들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내가 삐뚤어지면 다른 사람도 삐뚤어지게 보게 되어있어요. 왜곡하지 않고 삐뚤어지게 보지 않게 해달라고. 스스로 높아지지 않고 겸손하게 섬기게 도와달라고. 가말리엘 같은 사람이 너무 필요하지만 분별하게 해달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믿어야 되는 거에요. 예수만이 그리스도인 거에요. 그 예수가 내 인생의 목적이 돼야 하는 거에요. 차별 금지법 통과되지 않고 낙태법 통과되지 않게. 혼란한 이 나라를 붙들어 달라고 다같이 주님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기
주님, 예수는 그리스도다. 그 고백이 되지 않았을 때와 고백이 되고난 후에 제 인생은 너무나도 다른 것을 경험했습니다. 성령이 임해서 확실하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행함이 행동이 나타나지 않을지 몰라도 이 마음 속에 정말 그 이름의 비밀과 풍부함을 이루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정도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십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가 인생이 목적이 되어 걸어가고 걸어왔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열심히 하니 분노가 노도와 같이 몰려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가 없어져야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그 길을 가셨고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셨고 사도들이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잘 따라가며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것을 기뻐하면서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주님 제가 참으로 당한 일이 많아서 후 일에 여러분들이 기억할 때 여러분들의 모든 삶에서 저를 기억할 수 있는 당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많이 당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 그 이름을 위하여 사랑하는 예수님을 위하여 어느 말씀 하나 땅에 떨어지지 않고 저의 말씀인 것을 고백합니다. 주님 지금은 이 말씀이 안 들려서 제가 후일에 이 세상에 없는 그때에 저를 기억하고 제 말을 기억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정말 예수는 그리스도시고 날마다 집에서 성전에서나 그 이름을 위하여 예수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쉬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도록 주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를 위하여 능욕 받는 일을 합당히 여기는 부모가 되고 목자가 되며 저가 될 수 있게 은혜를 내려주소서. 우리나라를 위하여 정말 기도하오니 차별금지법 통과되지 않게 도와주시옵시고 낙태법 통과되지 않게 도와주시옵시고 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도와주시옵소서. 도와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9. 12. 22 주일예배>
일시 2019. 12. 22 3부 예배
찬양 공감하시네 ┃ 전능하신 하나님 ┃ 불을 내려주소서 ┃ 주님 손에 맡겨드리리(전심으로) ┃ 밀알
영 적 성 숙
말씀 요한일서 2:12-17
설교 이승민 목사님 (고별 설교)
1. 영적 성숙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12-14)
1) 갓난아이 단계 (12)
2) 아이의 단계 (14)
3) 청년의 단계 (13-14)
4) 아비의 단계(14)
2. 영적 성숙은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이루어집니다. (15-17)
말씀 후 찬양 항 해 자
나 비로소 이제 깊고 넓은 바다 간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손을
주는 결코 놓치지 않으셨다
나 비로소 이제 폭풍우를 뚫고 간다
비 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한 나를
잡아 주시는 그분은 나의 주님
주 나를 놓지 마소서 이 깊고 넓은 바다에 홀로
내 삶에 항해의 끝이 되시는 주님이시여
난 의지 합니다 날 포기하지 마소서
나 잠시 나를 의지 하여도
내 삶에 항해의 방향을 잡아 주시옵소서
이 깊은 바다에 날 홀로 버려 두지 마소서
기도제목
여러분 영적 전쟁터인 세상에서 이런 저런 고난을 겪으며 악한 자, 흉한 자, 사탄과 싸우느라 힘드십니까? 주님은 이미 이긴싸움이라고 오늘 두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탄을 이길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회색지대는 없다고 하십니다. 영적 성숙은 머뭇거리지 않는 것이고 회색지대에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기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기록된 말씀으로이기길 원한다고, 이 세상 정욕도 지나가신다고 하는데 지나가는 세상과 정욕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길 원한다고. 우리도 목사님을 닮아 영적 아비, 영적 어미가 되길 원한다고 다같이 주여 세번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기
아버지 하나님 영적 아비인 목사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큐티 모임에서 구속사 말씀을 사모하여 듣게 해주시며 우리들 교회 개척에 동참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난을 주시옵소서의 기도 응답에 찾아 온 여러 가지 고난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한 자, 흉악한 자, 사탄을 이길 수 있도록 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하지만 학벌과 능력으로 포장된 이생의 자랑을 쫓다가 미국 신학을 우상으로 삼고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미국에서 청빙받으면 명분도 좋고 사람들이 칭송해줄 것 같아 하나님께 묻지 않고 제 뜻대로 강행한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제 약점으로 또 넘어진 것은 있어야할 일이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 성령으로 주신다고 하신참 좋으신아버지 성령님을 구합니다. 성령님 찾아와주시옵소서. 성령의 탄식이 느껴지길 원합니다. 말발굽으로 쳐주시옵소서. 시기와 질투를 사랑과 평안으로 바꿔주시옵소서. 우리의 병이 낫게 해주시고 우리의 완악함이 주님의 선함으로 주님의 부드러움을 바뀌게도와주시옵소서.이 세상의 자랑도 정욕도 지나가신다고 했는데 우리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서 구원해주시옵소서. 오직 오직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오직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들 교회와 함께 한 16년 너무 소중하고 값진시간이었습니다. 부르신 자리에서 아비의 마음으로 영혼을 사랑하고 품는 목회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 묵상과 구속사의 가치관이 더 멀리 전파되게 도와주시옵시고. 한 영혼을 위해 눈물 마를날 없는 목사님을 붙들어주시옵소서. 우리 나라 불쌍히 여겨주시옵시고 차별금지법과 낙태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19. 12. 22 목장 마지막 예배>
한수진 목장 마지막 보고서
일시 2019. 12. 22. 4-7시
장소 얼큰 칼국수(샤브샤브맛집), 윌리엄카페(구들장맛집)
참석 한수진, 이은영
나눔 마지막 목장 모임은 우리 수진언니와 단둘이 오붓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목자언니와 얼큰한 칼국수와 구들장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한 해를 돌아보며 오늘 말씀을 적용해보았습니다.
수진언니의 한 해를 돌아보며.... 근 1-2년 동안 수진언니는 이직 준비 가운데 일어난 교통사고부터 올해 오빠의 불신결혼, 목원들간에 발생한 갈등 사건, 신결혼 준비, 목원의 아버지 부고 사건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겪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패대기 쳐진 청년의 때를 보냈습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를 통해 이 모든 것이 나의 영적 성숙을 이루어 가시려는 하나님을 뜻임을 알게 되었다고 나누어주었습니다.
다가올 2020년 3월, 봄에 언니가 결혼을 합니다. 중간에 언니의 결혼 예배가 앞당겨지는 일이 생겨 마음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목사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그 한 사람이 꼭 와서 말씀이 들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남은 일정 잘 준비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저는 2018년부터 시작된 취업광야와 아버지 암 사건을 겪으면서 취업에서 있어서는 그동안 잘 묻지 않고 먼저 결정하고 목장에 통보하는 식이었고 올해 5월 찾아 온 아버지 암 사건에서는 절망과 두려움에 갇혀 있었습니다. 뭐하나 되는 게 없으니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어느 하나 내가 할 수 없음을 알고 그런 나의 무력함을 알고 취업과 아버지 사건을 목장과 목사님, 공동체 지체에게 나누고 기도하고 말씀 보며 갔더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희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신명기 33:16-29)' 말씀처럼 기가 막힌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 구원의 사건을 직접 목도하였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성령의 은혜, 선물을 받은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목자: 은영이가 목장에 잘 묻고 간 것이 가장 큰 변화, 은혜인 것 같다) 올해 목자로 부르심을 받아서 이제 마지막 목장보고서가 될 것 같은데 앞으로 목자로서 잘 서 있을 수 있도록 많은 기도가 필요할 거 같습니다. 2020년에도 예배와 말씀을 더욱 가까이하고 무엇보다 붙여주신 지체들을 사랑하고 잘 섬기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는 한해를 보내길 소망합니다.
2019년 한수진 목장 마지막 기도제목입니다.
예진
1. 직장 인도 해주시도록.
2. 언니와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3. 엄마의 영육간의 건강을 위하여.
은영
1. 엄마와 동생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2. 하는 일에 대한 자존감 가지도록.
지현
1. 말씀을 삶에 적용 잘 할 수 있도록.
2. 어머니 영육간의 회복을 위하여. 목장 등록하셨는데 잘 붙어 가실 수 있도록.
3.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최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수진
1. 생활 예배 지키도록.
2. 기도생활 회복. 기도로 결정하고 기도로 준비하는 믿음이 생기도록.
이상 2019년 판교 청년2부 한수진 목장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