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6. 성령의 권능 사도행전 3:11-26
서론.
무식하고 비천한 베드로가 성령받고 컸다면, 우리도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므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들교회는 못할 것이 없다. 성령 안 받아 문제가 많다.
- 사람을 주목치 않고 오직 예수를 주목합니다.
11/ 성령의 기적으로 40 년 앉은뱅이가 걸으니, 그 거지를 아는 사람들은 다 물었을 것. 개중에는 임시적인것 아니냐며 의심도 있었을 것. 베드로는 기적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기회를 얻었다. 예수님을 죽인 그 사람들은 기적만 바란다. 게다가 지혜까지 좋아하나 베드로는 성령으로 지혜를 부리고, 사람을 모이게 한다. 성령을 베푸는 그들은 오직 예수만 전한다. 성령은 오직 예수님을 전하는 기적을 부른다. 오직 예수님만 전하는 게 우리의 기도 응답이다. 그것이 클라이막스다. 그러니 속상할 일보단 예수님만 전하면 그 뿐이다.
12/ 베드로에 비해 유대인들은 오직 자기들에게만(백성들이 아니라) 포커스 맞춘다. 의복도 예배도 기도도 늘 알리고자 애썼다. 그들과 베드로는 달랐다. 성령님은 베드로를 감추게 하시고 하나님만 높이도록 도우셨다. 사람들의 주목을 자기에게 오도록 이끌었다면 오늘 날 베드로의 사도행전은 없었을 것. 그러므로 유대인의 경우엔 십계명 1계명을 어겼기에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결론이 난다.
내가 주목 받지 않겠다고 결심을 해도 사람인 이상 불가능하다. 사람은 생색과 의로 차있기에 마지막에 맨 얼굴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것이 주목받지 않을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이다. 이야말로 성령의 권능이다.
13/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고, 그 분은 산 자의 하나님이다. 산 자들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했고, 이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약속을 성취하는 것. 그럼 어떻게 영화롭게 하셨나?
그는 근본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태로, 죽기까지, 그러므로 모든 이름위에 떠오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는 예수님이다. 잘 살고 죽고 다시 살고 높아지신 예수님. 종의 위치로 가셨기에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이름에 무릎 꿇으시게 되는 것.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을 때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실 수 있었다.
- 영화롭게 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을 인정하는 것.
14-15/ 베드로는 이 예수님을 빌라도에 넘긴 사람이 너희다! 라고 고발했다. 누가봐도 살인자인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 한 사람을 고발할 최후의 기회에도, 자기 이익에 반한다고 생각하니, 예수님을 넘기고 살인자 바라바를 연호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불신자들에게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얘기해야하는데, 우리는 예수님만 전할려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못 박았다하는 죄 얘기를 뺄 수 없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인 일에도, 다시 부활하심에도 우리가 증인이다 얘기한다. 16절로,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앉은 뱅이를 성하게 했다. 하고 확실히 고백 ampbull 선포했다. 앉은뱅이를 다시 서게 하는 능력이 예수님을 믿어서 그렇다고 확실히 얘기한다. 이 일의 증인이라고 확실히 얘기한다. 베드로는 나는 고친게 아니라 주님이 고쳤다고 강조한다. 예수의 이름이 앉은뱅이를 일으켰다면,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에, 이름만 가지고도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즉,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해 고치시는 역사를 냈다. 예수님은 성전을 뛰어넘는 성전 자체가 되었다.
이름은 모든 인격과 하는 일을 나타낸다고 했다. 예수 이름과 권능을 사회와 연결시켜, 개인구원에서 사회구원으로 나아가야한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생각해보면 앉은뱅이가 40년만에 일어섰으니, 베드로 입장에선 한 몫 챙길 기회가 생긴 셈이다. 돈 벌 궁리가 자연스럽게 될텐데, 베드로와 초대 교회는 철저하게 우리의 권능이 아니라고. 예수님의 죽어지심으로 - 나같이 무식한 사람도 통로로 쓰였다고 고백한다.
앉은뱅이입장에서 그는 나았으니 이제 뭘해야 하나? 그는, 예배를 잘 드려야 한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이 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했으니, 예수님도 예배의 대상이다. 내가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음을 인정하고, 나를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면 - 즉, 내가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전하려면, 말로가 아니라 예베드리는 모습을 보여줘야한다. 한결같이.
쾌락을 추구하는 우리는 각자의 소견대로 한다. 어려울 때는 학교가야한다고, 할 게 많고, 그렇게 돈 많아지면 골프치러 다녀야 한다고. 즉 우리는 지속적으로 주목받지 않고 내가 한 것이 아니다 하려면, 예배를 잘 드려야한다. 내가 예배드리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모습이다. 성령의 권능 없이는 불가능 하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인정하는 자만 예배가 사모된다. 그것을 알게 되는 것도 성령의 권능이다. 찔림이 성령의 권능이다.
예배드리는 모습 보여주는 것만이 좁은 길이다. 믿음 없는 우리가 각종 고난에서 회복되자마자 예배를 드리기 힘들다. 고난이 없어도 예배를 다닌다 amprarr 천국시민 가능성이 크다. 권능이다. 말없이 '예배드리러 가야해' 이것이 전도다. 이것만 평생해도 우리는 천국에서 만난다.
내 죄가 너무 알알이 기억나서 예배가 설레지만은 않는다. 죄를 못 보니 혹독하게 용광로에 들어가게 하셨다. 죄가 없는데, 하나님 종전에 나가게 되니 나의 모범생적 태도자체가 - 타인에게는 드러나는 게 되어, 존재론적 가해자가 되어 잔인하기도 하다. 즉 집탕이 돌탕보다 무섭다.
집의 탕자는 의로 꽉차 드러나는 죄가 없으니 타인을 힘들게 하고, 이기기만 하니 예배가 설레지가 않다. 그럼에도 앉아는 잘 있으니, 저절로 잘난척이라는 것을 또 본인은 모른다는 것. 집탕이 무서운 것 많다.
내 주 예수님이 계신 것을 보고가기에, 주님의 영광을 보았기에 내 죄를 보고 갈 수 있다. 내 열심으로 가니까 설렘이 없었는데, 그래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겨주셨다. 하루종일 읊조리게 된다.
유대인들과 베드로가 같은 교회를 다녔어도 안 통했듯, 같은 식구라도 같은 성령이 아니면 안 통한다. 앉은뱅이가 서도 안 믿는다. 안 통한다. 오죽하면 베드로가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안 돌아온다 그런다. 유대인들은 노벨상 제일 잘 타는 족속이다. 반면, 바울은 가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명이기에 수준이 높다. 바울은 십자가에 자기가 스스로 예수님을 박았음이 인정했기에 감당할 수 있었다.
적용/ 성령의 권능으로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았다고 인정이 됩니까?
- 성령의 권능으로 회개하면 복 주시는 하나님.
17-18/ 지금껏 통렬히 죄를 질책 했고, 다음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베드로. 그치만 알지 못해 했던 죄다. 너가 안 죽였어도 죽었을 예수님이라고. 자책말자고. 하나님 뜻이었다고 회개하자고 촉구한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미리 예언되었기에, 완전히 십자가 사건을 성경대로 읊어줬다.
제자들이 예수님 십자가 사건과 모든 일을 성경으로 꿰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이 들리는 축복을 받자.
19,20/ 회개는 돌이키는 것을 말하고 유턴이다. 베드로의 성령의 권능 설교의 목적 = 회개. 날마다 설교의 목적은 회개다. 이 설교는 믿는자가 5천 명이나 있는 명 설교다. 복음의 핵심을 전하는 설교이므로. 회개만 하면 받는 복이 있다.
A. 죄사함의 복. = 자기 죄만 봐도, 일단 회개만 하면 모든 죄는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B. 19/ 새롭게 되는 복 = 유쾌하게 된다. 죄를 가진 우리가 본질적으로 유쾌할 수 없다. 죄책감에 눌리기 때문. 예수님으로 하여금 해방된다.
새 성품,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9가지 열매를 맺게 된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 새롭게 되는 날= 카이로스다. 특별한 기회라는 뜻도 있다. 즉, 영원을 얻는 기회다. 유대인들은 누구보다 그 기회를 먼저 얻었으나 배척함으로 기회를 상실한다. 구원을 얻는 단 한번의 기회의 인생을 구원 얻는데만 써야하고 아껴야 한다. 날들이 악한데, 해야할 것을 구원을 위해 쓰는 시간으로 바뀌어야 한다. 죄 사함의 복을 받고 새롭게 되는 복 - 지난 주에 있었다. 청년의 간증 / 남친과 문자 주고 받다가 내렸어야 할 때 못 내렸다. 그때 백인 여경이, 자기 집에 문 열려있더니, 모르는 흑인이 자기 집에 아이스크림 먹고 있더라. 촉망받는 회개사인데, 보자마자 강도로 생각하여 총 쏴서 죽였다.
실수여도 휴대전화에 인종차별적 내용이 많았어서 이제 재판으로 넘어갔고 28년 99년 구형을 받았는데, 실 재판에서는 10년대의 형을 받았다. 그때 바라바하고 외치던 관중들. 그때 형의 원수를 보고, 그는 주 안에서 사랑한다고. 감옥도 원하지 않고 나는 당신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축복한다고. 형도 원하지 않을 거라고. 남은 삶을 그리스도에게 헌신해달라고 - 대신 안아주겠다고. 울고있던 여경과 그 친구는 대화를 주고 받았다. 오히려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의 모습이고 성령의 권능이다. 18살 짜리 친구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장면이다. 흑인 브렌트가 여경을 안아주고 눈물을 흘렸다. 인종차별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묻는 게 아니라,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찾아가니, 이런 일이 생겼다. 새롭게 되는 복의 예다.
적용/ 여러분의.삶은 구원을 위한 단 한번의 기회인 줄 알고 세월을 아낍니까? 구원을 모르면 시간을 낭비하기 마련입니다 내 시간이 오늘 구원을 위한 시간인줄로 모르면 후회할 일만 생김을 압니까?
C. 재림 예수를 보내십니다.
20-21/끝으로 베드로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다시 증언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당신의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부르신다고 하셨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찾아내시는 하나님. 우리는 재림만 남겨두고 있다.
D.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
22-26/ 모세는 율법의 대표고 출애굽을 이끈 메시아다. 즉 예수님은 유대인을 구원할 모습이다. 사무엘은 선지자의 대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즉 씨로 말미암아 만물이 복을 받는다고 했다. 씨 = 단수. 즉 예수님이다.
이런 모든 믿음의 선인들이 예수님을 전했는데, 이 땅에 세우신 위대한 선지자고 마지막 선지자다.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던 하나님. 나 같은 선지자. 메시아 같은 선지자를 의미하며, 예수님이 올거라고 한다. 그런데, 모든 선지자들은 그리스도 사역을 예언했으나, 예수님은 직접 성취시키셨다. 그 이유는 그들의 악함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다.
먼저 믿은자에게 악함이 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유대인이다. 가정해보자, 예수님의 친척인 경우, 대단한 선민의식이 생길 것.
모든 구원의 기회를 유대인에게 제공했음에도, 지금까지 안 믿는 유대인을 보라. 그렇게 선민의식에 젖어들 동안 복음은 천하에 땅 끝 까지 전파된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베드로가 성경으로 너무 설명을 잘 해 주었다. 베드로는 저주 했었기에, 성령의 농도가 이제는 짙다. 예전에 저주가 부끄러움이 아니라 이제는 간증이 된다. 언제나 하나님이 주목받고 나는 죽는 게 은혜가 된다.
나만 보이면, 목장에가면 내 자랑 내 고난에 치여서, 은혜가 안 돌아간다. 늘 나한테만 집중하게 된다. 나도 공동체도 은혜가 없게 된다. 예수님만 나타내면 부끄러움이 없어질 줄 믿는다.
적용/ 회개하여 받은 복은 무엇입니까? 죄사함 재림 예수님, 복의 근원 중 여러분이 받은 복은?
정확하게 해석을 하는 게 성령의 권능이다.
아까 브렌트 진 처럼, 이 모든 요소를 가진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에게는 재림 예수님이 만나주실 것이고 그가 가는 곳이 복이 임하게 될 것이다. 복인이 움직이면 복이 다 뭍는다. 18살의 그도 가능한데 우리라고 못하는 게 아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비천하고 낮아지니,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비천할 수록 성령이 임한다.
2019. 10. 6. 기도제목
길태수
- 오늘 말씀 기억하면서, 두려움의 시간을 통과 할수있도록
- 해야할 일 할 수 있도록
- 지치지 않도록
안식
- 잘 붙어 갈 수 있도록
- 일어나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음을 깨닫고 움직일 수 있도록
- 기도를 한 주 잘 하고 지낼 수 있도록
구준호
- 병원 챙겨서 갈 수 있도록
- 체력도 지켜줄 수 있도록
조동민
박영준
- 눌리지 않도록 회복 할 수 있도록
- 큐티 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