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8 주일예배
'성령의 선물'(행2:36-47) - 김양재 목사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높아지셔서 모두에게 성령 부어주신다. 성령충만 받고 성령의 설교하니 성령의 선물 주신다. 선물은 공짜다. 받기만 하면 된다. 성령의 선물에 대해 생각해보고 받기 바란다.
1. 찔림 받아야 합니다.
(36절) 오순절 성령은 미리 약속된 사건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문자적으로 빌라도가 판결해서 로마 병사가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백프로 죄인인 인간의 생각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네가 죽였다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다가 내가 예수를 못 박았다는 것 깨닫게 되는 것이 구속사이다. 구속사가 들려야 찔림 받는다.
성령의 말씀으로 찔림 받는 것은 가장 큰 성령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속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죄가 다 드러나서 찔렸다. 내 속의 시기, 미움, 질투, 음란 가지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교양 있게 변장해도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기에 이게 다 드러나서 견딜 수 없어 찔림 받는 것이다.
분명 아프고 힘들지만 하나님의 구원 갈망하며 우리 죄 때문에 기꺼이 애통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때마다 성령의 선물 주신다. 이것이 권능이고 기사고 표적이다. 말씀 듣고 찔림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한결같이 애통하게 하셔서, 강단에만 서면 눈물 흘릴 때가 많다. 여자라서, 과부라서 슬퍼한다고 그러는 분들 많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예수님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나요가 되기 때문이다.
(적용) 성령의 말씀에 찔림 받는가? 사람의 지나가는 말에 찔림 받고 괴로워하는가?
2. 어찌할꼬 하며 묻습니다.
(37절) 내 속에 사단이 또아리 치고 있구나, 나의 더러운 피고름 봐야 어찌할꼬가 저절로 된다. 성령님이 임하지 않으면 잘못이 보이지 않는다. 수치도 모른다.
11살에 뇌성마비 진단받은 눈깜박이 시인 미즈노 겐조는 전신마비에 언어능력 다 사라졌다. 그런 그의 시집에 나사렛 예수여 나사렛 예수여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나이다하는 고백이 있다. 성령이 임하시면 아무 죄 없어 보이는 겐조가 찔림 받고 어찌할꼬 내가 예수를 죽였나이다 고백하는 신비가 임한다.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는 무조건 신자가 잘못한 것이고, 신자 사이에는 믿음 좋은 사람이 무조건 잘못한 것이다. 내 죄 보이는 만큼 영이 세워진다. 하나님 믿는다면서 매사에 나는 잘못 없어 한다면 그것이 성령님의 선물 받지 못한 사람이다.
찔림 받게 되면 한때 갈릴리 사람이라고, 어부들이라고 무시하고 상대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형제여 어찌할꼬 하며 간절히 묻기 시작한다. 주님을 보고 듣고 만지는 사람은 공동체의 사귐 있다. 귀히 여긴다.
말씀이 들린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직면해서, 단지 돈이 없다는 것보다, 없는 것 통해 내 속의 추하고 더러운 욕심이 다 드러나는 것이다.
여러분은 다들 내가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성령의 선물을 받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여러분이 성령 받는 것이 내 유언이다.
(적용) 여러분은 돈 없어서 어찌할꼬 하는가? 성령의 찔림 받고 어찌할꼬 하는가?
성령의 선물은 어떻게 받을까,
3. 회개입니다.
(38절) 회개하여 각각 개인구원이니까 세례 받고 죄 사함 받고 성령의 선물 받으라고 하신다.
회개, 죄 사함, 선물, 순서적으로 올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동시다발적으로 다 같이 올 수도 있다. 개인의 경험과 믿음의 분량이 다 달라서 그렇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 있고,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구원(already, but not yet)이 있다. 예수 믿고 나서 날마다 사명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루어지지 않은 그 구원이 있다. 그럼 해야 할 일이 뭔가? 세상이 감당 못할 구원 보이기 위해 내가 세상을 뛰어넘는 끝없는 회개하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 설교를 유대인, 이스라엘 형제들에게 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예수님을 죽였다. 죽였던 유대인들 중 찔림 받고 예수 믿고 구원받고 회개해서 공개적으로 세례 받았다. 믿음 고백하는 세례 받아서 죄 사함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 세례가 굉장히 중요했다. 인정한다고 고백하니까 유대인공동체에서는 출교당하는 것이다. 그들의 조롱 뛰어넘는 전혀 알지 못했던 기쁨을 성령의 징표로 주신 것이다. 이제 전 세계로 복음이 퍼져나가야 하니까 사명 감당하라고 성령의 선물 주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찔림 받아 어찌할꼬하는 회개의 상태에 있었다. 여기서 베드로의 성령의 설교는 너희가 회개하면 이 땅에서 복 받는다는 것보다는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설교이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는지 알라는 것이다. 너희에게 어찌할꼬 회개가 임했다면 더욱 진정한 회개하라고 처방 내린다. 그래야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한 이 세상에서 탈출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본능이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 세상에서 날마다 세상을 뛰어넘어가야 한다. 이 세상에 내 방식, 내 생각, 내 고집 다 내려놓고 죽으라는 것이 세례이다.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 상관없어 보이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내가 못 박았다는 것을 날마다 인정하는 것이 회개이다. 성령의 선물로 주어지는 이 회개는 본질적인 회개이다.
진정한 성령의 선물은 죽는 경험이다. 믿는 사람이 능력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죽는 경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례 받았다 해도 내 몸이 기억하는 죄가 얼마나 많겠는가. 다른 사람 보면 훨씬 낫고, 내 사랑하는 식구들 하나도 안 믿고 너무 안타까운 것이다. 내 사랑하는 식구들 안 변하면 아픔이 있다. 날마다 만나야 하니까. 아픔이 계속되면 자기 부인하는 내 속의 죄 보게 하신다. 성령의 선물 받은 자는 어김없이 어떤 상황에도 자기 죄를 보게 하신다. 결국 돌고 돌아도 결론은 내 죄 보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을 주로 방언, 신유, 신비한 은사와 연관해서 생각하는 경향 있다. 우리에게 성령 주시는 이유는 오직 깨끗함과 거룩함과 새로운 삶이다. 성령의 선물은 은사가 아닌 성령 자체다. 성령의 선물의 결국은 거룩이다. 인생의 목적이 거룩이다.
날마다 우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에 속한 날 보며 애통하며 찔림 받고 회개하며 거룩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성령의 선물을 2차적으로 강력하게 받아야 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탈출한 줄 알았는데, 예수 믿고 가는데,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푸른 하늘 끝 다음 저기가 거긴가, 가도 가도 가보면 또 아닌 거다. 아직도 이 세상이 영원한 줄 아는 나와의 싸움이 계속된다.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삶이로다 이게 거듭난 후의 고백이다. 날마다 이 고백하고 또 살아날 때마다 나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몸인데 주께서 죽으심으로 이런 나를 살리셨다 고백하는 것이다. 네가 이 예수 죽였다 할 때 맞습니다 하는 것이다. 소명 위해 바울 사도 연단시켜 가시는 것처럼 우리를 연단시켜 가신다.
자기를 복종시키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막8:34). 이 세상에서 보기에 윤리, 도덕적 죄 지었을 땐 인정한다. 그러나 자기 속 드러나지 않는 음란, 시기, 질투 등의 본질적 죄의 문제는 인정하기도 싫고 인정 안한다. 인정하지 않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드러내실까? 여러 가지 긴 시간의 고통과 환경을 통해서. 고통만큼 죄가 보이고, 죄가 보이는 만큼 회개가 된다. 나오미가 진정한 회개하기까지 3차 흉년 허락하셨다.
초대교회도 핍박받고 사자 밥 되는 환경 속에서 예루살렘교회에서 해석이 안 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식한 베드로의 성령의 설교가 꿰뚫고 들어온 것이다. 고난이 축복이다. 처음이나 나중이나 성령의 선물은 회개의 역사 가운데 임한다.
(적용) 여러분의 회개는 입으로 하는 회개인가, 성령께서 함께 하는 회개인가?
4. 3000명 속에 들어가는 공동체의 축복
(39절) 이 약속은 시대와 장소 초월해서 차별 없이 임한다. 구원의 범주는 국적, 인종 차별 없이 온다. 이런 부르심 받은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든다.
(40절) 패역한 세대는 신약에서 오직 여기서만 나온다. 심판 아래 놓인 악하고 음란한 세대 의미한다. 베드로가 이 패역한 세대와 하나님 나라 비교하면서 자기가 여러 말로 확증할 수 있는 간증이 있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 수제자였던 유다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유다가 예수님 팔아먹고 저주했지만, 나도 예수님 세 번 부인했다. 유다처럼 후회하지 않고 난 회개했다. 예수님의 죽음도 부활도 내 눈으로 다 보았는데 난 물고기 잡으러 다시 나갔다. 근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 번 회복시켜주시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성령 기다리며 나의 수치스런 치명적 죄 오픈하고 죽은 유다 대신 새로운 맛디야 채워 넣으니까 성령이 임했다.' 베드로가 정말 간증하기 싫었을 것 같다.
악하고 음란한 패역한 세대도 바알공동체 있다. 이 땅도 기득권층은 다 공동체 있다. 근데 새 공동체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패역한 옛 사상을 탈출해야 한다. 불신결혼해서 불신자와 함께 멍에 매려고 하면 영원히 이 세상에서 탈출 못한다.
(41절) 그리스도의 기적과 죽으심 목도한 사람들 많이 있었지만 그들이 변하지 않았다. 근데 성령의 설교가 예수님에 관한 말씀으로 선포되었을 때 변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고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성령은 말씀 통해 역사하신다. 말씀과 성령과 능력은 한 단어로 보면 된다(고전2:4). 성령이 임하면 말씀 들리고 능력이 임한다. 그래서 그 능력으로 전도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씀으로 아픈 곳 찔렸을 것이다. 네가 바로 예수님 죽였다는 아픈 말 듣고 그걸 받았다. 십자가에 예수님 내가 죽였다는 그 말 어떻게 받아들일까. 가족, 직장, 목장, 다 힘들다고 한다. 그럴 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가 아니고, 바로 내가 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걸 알아야 한다.
베드로의 권면으로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다. 120명 공동체에 3천명의 새신자 왔다. 4장 4절에는 5천명 세례 받았다. 그 이후로는 의미 없어서 숫자 기록하지 않는다. 복음이 전 세계에 퍼져나가고 2천년 동안 드디어 먼 곳 우리들교회까지 폭발적인 부흥했기에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효과적인 성령님의 도움으로 이렇게 전파된 것이다.
3천명 아니라, 그때 여자와 아이들 합치면 만 명 넘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에 전무후무한 성령의 역사 일어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주시니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죽어지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때가 되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죽어져도 일이 안 일어난다. 그때까지 때를 기다려야 한다.
여기 온 이 사람들은 자기 억울함 풀러 온 사람도 아니고, 미워서 아파서 못 살겠다고 기적을 보여 달라고 온 사람도 아니고, 내가 성령 좀 받아야겠다고 은사 좀 달라고 온 사람도 아니고, 성령의 설교 듣고 찔림 받고 어찌할꼬하면서 회개하며 마음을 찢는 3천 명이 온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회개하는 3천명만 보신다. 주님은 정확하게 보고 계신다.
(적용) 여러분은 통회하고 자복하는 3천명 속에 들어갈 것 같은가 아닌가? 누구에게 여러 말로 확증하고 구원받으라고 권유하겠는가?
♡정정환 목사님 탐방♡
정목사님 : 회복하려면 회개해야 한다. 여러분은 통회하고 자복하는 3천명 속에 들어갈 것 같은가 아닌가?
☆1 : 들어갈 것 같다
☆2 : 기복이 심해서 못 들어갈 것 같다
☆3 : 들어갈 것 같다
☆4 : 자아가 살아있어서 못 들어갈 것 같다
☆5 : 들어가고 싶은지 모르겠다
☆6 : 들어가고 싶다가도 안 들어가고 싶다가도 그런다
정목사님 : 들어가고 싶다. 과거에 목사가 되려 했던 사람이 아니어서 이렇게 믿음이 있을 줄 몰랐다. 신학교 다닐 때 어머님께서 '너는 장로로 곱게 늙어라'하셨다. 과거에 구원에 대한 갈망, 갈급함 없었다. 휴대폰도 써보면 좋다고 느껴진다. 좋다고 느껴져서 권하는 것처럼 예수님 믿다보니 좋고, 좋다고 깨닫다보니 목사로서의 사명도 주셨다. 결국 신앙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싸움이다. 요즘 세대에 하나님을 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게 너무 많다. 눈만 뜨면 습관적으로 휴대폰 누르고 세상의 소리, SNS본다. 하나님 알아가기가 너무 어렵다. 일상생활에서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흩뜨린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예수 믿기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모여 죄 고백하고 오픈하는 게 중요하다. 다음 주에 나오는데 이들이 성령 받고 어떻게 변화되는지 나온다. 성령 받고 내가 변화되는 게 시작이다.
(...)
예수님이 날 위해 성육신하셨고 날 위해 죽으셨다. 이걸 예배 때마다 큐티할 때마다 기억해야 한다. 누가 날 증오하더라도, 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 것임이 인정되는 것, 난 용납 받고 사랑받은 자라는 게 딱 갖춰있으면 회복이 일어난다. 왜냐면 주님께서 가장 큰 걸 주셨다. 그게 구원이다. 그건 돈으로도 받을 수 없고 권력으로도 취할 수 없고 누구도 나에게 줄 수 없다. 예배드린다는 것은 그 구원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반추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실 정도면 엄청난 것이다.
이 자리에 아무리 콜해도 안 오는 사람들 있다. 이게 엄청난 하늘과 땅 차이이다. 이것을 자꾸 간과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만 가시적인 것들이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 비본질적인 것들만 붙들고 사는 것 있다. 신결혼, 가족구원, 진로에 대한 것도 중요하다. 그게 비본질이라고 말하는 것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을 바라보고 붙들고 살면 그것들이 해석이 된다. 덜 서운해진다. 사단은 끊임없이 그런 것들 바라보게 한다. 비본질적인 환경에 마음 빼앗기게 한다. 그러면 우리의 감정 밑바닥에 하나님의 서운함 생긴다. 그러면서 자기연민 생긴다. 내 인생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연민. 이 공동체에 와도 되는 게 없다 이러면서 시험에 든다. 순간순간 시험이 온다. 감정 헤집어놓는다. 물론 자동반사적으로 해석되진 않는다. 화도 나고 부정적 감정 올라오고 그런 말도 나온다. 정목사님 9년째 우리들교회에서 훈련받으면서 그때그때 주신 말씀이 날 위로하고 다시 돌이키게 하신다. 찔리게 하시고, 그 감정과 생각으로 가고 있을 때 발걸음 멈추고 찔리게 하신다. 내가 어찌해야 합니까 주님. 다시 주시는 말씀으로 돌이키게 하신다. 감정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 따를 때 감정을 사로잡는다. 마음은 되게 간사하다. 어떤 사람에게 호감 가지다가 한 마디 때문에 비호감 되기도 한다. 감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잡을 때 순복할 때 감정도 따라간다. 우리의 삶이 기관차와 같아서 맨 앞에 말씀, 그 뒤에 이성, 의지, 감정 있다. 말씀이 이성 붙들기 시작하면 감정도 따라간다. 근데 우리가 감정을 따라가면 흔들린다. 성령 받는 전제는 말씀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신다. 성령이 내 감정 사로잡을 때 내 상황 해석할 수 있다. 3천명 오늘 세례 받았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 암담한 상황이다. 네로 황제가 언제 죽일지 모르는 상황이다. 환경은 언제 사자밥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근데 베드로의 설교로 인해서 세례 받고 기쁨 넘친다. 말씀 듣고 생각이 바뀌고 감정이 바뀐다.
감사를 표현한 줄 아는 자녀가 되자. 늘 불평하고 달라고 하고 짜증내면 하나님도 힘드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 알아드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것에 행하신 것에, 이 자리에 와서 앉아 있는 게 택자가 아니면 절대 올 수 없다, 하나님의 택자로 살아간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엄청난 축복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불신결혼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데, 예수 없는 삶은 근본적으로 공허하다. 여기 있는 것이 얼마나 축복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알라. 안 되는 것들보다, 주신 것이 더 크다.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찔림에 대해 고백하고 회개하다보면, 감사하는 심령 주시고, 그럼 변화가 일어난다. 내 안의 내적인 변화가 되어야 외적인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 생긴다. 내적인 변화 없이 받으면 또 다른 것 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노예로 살다가 광야로 갔다. 배고파요, 힘들어요 해서 메추라기와 만나 주셨다. 차라리 애굽에서 고기 먹던 때가 낫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다 못해서 1세대 다 죽이셨다. 인식의 전환 필요하다. 무엇보다 크신 성령을 주셨다. 구원받았기에 여기 앉아 있는 것이다. 추적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어마어마한 축복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내면의 변화를 도모하고 눈이 열리길 기도하자. 바울 주변의 유대인들이 아직도 안 변하고 있다. 안 변하는 가족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절대 비교하지 말라.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 지금 내가 만나는 환경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자족하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 주신다. 하나님이 다 주신 것이다. 시선을 달리하자. 감사하고 자족하고 부모를 기쁘게 해주려는 자녀가 될 것인가, 끊임없이 부모에게 달라고 하는 자녀가 될 것인가. 하나님의 마음 알려면 말씀을 들어야 한다. 지난 모든 시간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말씀 듣고 적용질문이나 느낀 점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사적인 내용이어서 생략했습니다. 목장 탐방 와주시고 긴 시간 함께 해주신 정정환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