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09 주일예배
'어루만지시는 주님' (왕상 19:1-8) - 김양재 목사님
택자는 비록 죽고 싶을 때에도 주님이 어루만져 주셔서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신다. 엘리야 같은 택자를 언제 어루만져 주시는지 보자.
1. 믿음으로 행한 일의 결과가 참담할 때도 어루만져 주십니다.
(1-2절) 엘리야의 행한 일은 놀라운 사역이었다. 엘리야는 고생 끝에 이제야 개혁의 발판 마련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뿌리 깊은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그렇게 쉽게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이세벨은 바알 종교 들여온 장본인이다. 자기가 아끼던 바알선지자들 떼죽음 당하니까 눈 뒤집혀서 엘리야에게 체포명령 내렸다. 이세벨이 다양한 우상들 염두에 두고 널 죽이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내림이 마땅하다고 했는데, 엘리야가 만군의 여호와께 맹세한 것과 대조된다. 끊임없이 850개의 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성도를 교란시킨다. 진짜 바알선지자의 괴수는 이세벨이다. 모든 것을 다 가졌기 때문이다.
엘리야도 그렇지만, 죄 없는 예수님도 어떤 가족보다 더 많은 고통 겪었다. 고난에 대한 시각 바꿔야 한다. 고난과 상관없는 하나님 자리에 있는 바알우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극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개성, 자율성, 다양성 중요시하고 절대이념 거부한다. 탈이념이라는 정치이념이 인권으로 집약된다.
아합은 이세벨의 치마폭에 숨어서 갈멜산에서의 일들을 이세벨에게 조치하라고 한다. 금슬이 좋은 부부가 민중을 도탄에 빠뜨릴 수도 있다. 우리 집만 잘 되면 된다는 포스트모더니즘 가치관으로 인해 결국 모두를 망하게 했다. 율법교육 받은 아합이 율법 전혀 모르는 이세벨의 코치를 날마다 받는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의 코치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위협했다. 개성을 중시하는 것이 하나님 자리에 가서 인권으로 연결되기에 동성애, 이혼, 불신결혼 마음대로 하고 이걸 반대하면 차별이라고 한다. 인권이라는 말만 나와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 시대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람들은 신앙이 진짜 작동하는가 묻는다. 신자들은 간증을 해줌으로써 실제로 작동하는 믿음체계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전도는 교회를 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신앙이 작동하는 믿음체계를 보여줌으로 이미지와 스토리로 복음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죄를 보는 간증을 하는 것이 신앙의 작동이고 전도이다. 그런데 잘 먹고 잘 살수록 어렵다. 육이 너무 가득 쌓여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처럼 오직 성령의 사역만이 강퍅한 마음 부수고 변화시킬 수 있다. 칼, 총, 군대의 힘으로 절대 누구를 변화시킬 수 없다.
엘리야의 믿음으로 행한 일의 결과는 참담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여인의 자궁에 점 하나로 오시고 이 땅에서 십자가의 낮아짐으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숨겨진 하나님의 경륜 드러내셨다.
참담함을 느끼는 이유는, 숨은 죄 때문이다. 참담함 통해서 숨은 죄 하나씩 깨닫게 하신다.
(적용) 여러분은 믿음으로 행한 일에 참담한 결과를 경험한 적 있는가? 여러분은 인권에 대해서 어떤 생각 가지고 있는가? 믿음과 인권은 이원론인가, 일원론인가?
2. 이 세상 형편이 하나님보다 더 커 보일 때도 어루만져 주십니다.
(3절) 엘리야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도망했다. 850명 물리치게 하신 주님이 이세벨 물리쳐 주실 텐데 갑자기 이세벨이 온몸으로 무서워졌다. 우리는 순간순간 세상 형편이 하나님보다 더 커 보인다. 왜 커 보일까? 이세벨은 아버지도 시돈왕 엣바알, 시아버지도 왕, 남편도 왕, 아들도 왕, 딸도 왕이었다. 이 땅에서 이세벨은 왕 제조기로 모든 것을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는, 하나님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 엘리야는 이세벨을 도무지 넘어설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갈멜산 대결 때처럼 그가 만일 굳건히 서서 이세벨에게 기별 보내 바알선지자들 이기게 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자신 버리지 않았다고 선포했다면, 놀라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이세벨에게 임해서 백성들에게 대단한 인상 줬을 것이고 개혁이 전국을 휩쓸었을 것이다.
엘리야가 절망한 이유는 하나님에게서 찾을 것이 없었다. 기근 예고한 때부터 이세벨은 엘리야의 대적이었다. 엘리야의 절망은 하나님께서 당장 이세벨을 심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에 대한 절대신앙을 잃었기 때문이다. 1-4절까지 한 번도 여호와가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날마다 큐티하며 이 일이 왜 왔나 생각해야 한다. 엘리야는 말씀으로 자신에게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났는지 묵상했어야 했는데 안 했다. 말씀묵상하지 않으니까 갑자기 자기 생명 구하기 위해 도망했다. 그리고 원수의 밥이 되었다.
절대신앙이 무너지면 하는 일이 무엇일까. 주위 형편부터 살피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고정되었던 시선을 떼어서 사방을 둘러보니까 자기에게 이롭게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를 죽이려는 이세벨에게서 한 발자국이라도 멀리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소명 받은 자리 북이스라엘을 떠났다.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다. 바알이냐 하나님이냐 선포하면 도와주시는데 선포 안 하니까 안 도와주신다. 우리들교회에서 간증, 나눔하는 것이 주의 이름 부르고 선포하는 것이다. 선포하면 늘 책임져주신다. 간증하기 싫어서 도망가고 목장도 도망가면, 엘리야처럼 도망갈 일이 생긴다. 하나님은 850명 바알 선지자들 성실하게 물리쳐 주셨다. 신결혼이 왜 중요한가. 난 하나님을 택했다 이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 기존 교회에서는 흉거리가 우리들교회에서는 흉거리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헌금이 많아서 공개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총수에 들어오라는 것이고 모든 것의 끝에는 돈이 있기 때문에 집에서 드리는 첫 주일 때부터 성도수와 헌금을 공개했다. 구원의 총수를 날마다 주보에 계수하고 헌금 액수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은 우리 재정이 다 알려지니까 조금도 다르게 쓸 수 없는 것이다.
엘리야는 잘 나가다가 말씀이 없어서 이세벨의 협박에 쪼그라들었다. 아무리 잘 나가도 말씀 내려놓으면 쪼그라들어서 도망간다. 엘리야가 도망간 브엘세바는 남유다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치우친 곳이다. 갈멜산부터 브엘세바의 거리는 250킬로미터이다. 국경 넘어 남쪽 끝 가장 구석탱이까지 가서 웅크리고 있는 선지자의 모습이다. 위대한 사람도 다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이 스스로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범죄한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연약함을 감출 수 없다. 엘리야가 자기 사역 과대평가하면 말 한마디도 못 견디고 자존심 상해서 떠난다. 자존심이 문제다.
목사님도 꼭 올라갔다 싶으면, 주님은 이건 네가 한 게 아니다라고 내리치신다. 하나님은 열매 있을 때마다 내리누르시면서 겸손케 될 수밖에 없는 사건을 주신다. 그만 걱정하셔도 될 것 같은데 주님은 걱정이 많으시다. 참담한 일이 날마다 일어나서 눈물 흘릴 일이 많다.
(적용) 하나님보다 내 형편이 더 커보여서 도망간 브엘세바 구석탱이는 어디인가?
3. 홀로서기가 아니고 혼자라고 생각할 때도 어루만져 주십니다.
(3-4절) 사환을 브엘세바에 머물게 하고 엘리야는 하룻길 더 가서 광야로 들어갔다. 낙담할 대로 낙담했다. 스스로 죽기를 원했다. 마침내 죽기로 한 것은 소명을 버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소명의식이 없으면, 사건 오면 절망밖에 없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아무리 은사와 재주가 많아도 소명이 없으면 쉽게 절망한다. 절대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소명은 너무 중요하다. 로뎀나무는 1-2미터 크기로 자라는데, 유일한, 하나의가 수식어 되어서 광야의 한 그루 로뎀나무 아래 힘없이 앉아 있는 엘리야의 초라한 모습 보여준다. 잔가지가 많아서 바람과 햇볕을 잘 막아주는 나무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광야에서 도움의 로뎀나무가 될 수 있다. 근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로뎀나무에 앉아 있나 이런다. 엘리야는 나는 믿음의 조상보다 나은 게 없어요. 어찌하여 이 길을 가게 하십니까. 내가 특권이고 감사한 거 머리로는 알겠는데 갑자기 심장이 멎을 것 같이 답답해요. 터질 것 같아요. 이러는 것이다. 왜 이렇게 극도로 낙심할까? 자기 옆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충성스런 사환도 믿을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아합을 피해 어디로 가겠는가. 유다로 온들 피할 수 있겠는가. 아합은 왕궁에 잘있는데, 바알선지자 다 죽인 나는 어디로 가야하나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 광야로 들어갔음을 강조한다.
당시 유다 왕은 성군에 속한 개혁의 여호사밧 왕이었다.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과 결혼동맹을 맺었다. 엘리야의 지극한 외로움 알겠는가. 홀로 고군분투하는데 850명의 바알선지자들 먹이고 입히는 악한 아합과 자기를 죽이겠다고 하는 이세벨이 여호사밧과 결혼동맹 맺고 친하게 잘 지내니까 얼마나 배신감 들었겠는가. 이제 나는 죽어도 돼, 아무도 내 편이 없어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직계 조상 여호사밧 왕이 이세벨과 사돈 맺었다. 피난 내려간 유다 땅도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 죽고자 한 이유를 합리화시켜준다. 원수는 죽고자 하는 이유를 합리화 하며 늘 우리를 정조준 한다. 죽을 이유가 충분하다고, 자기 편 하나도 없다고 원수가 정조준 한다.
불신결혼은 계속되는 열왕기의 가장 큰 주제이다. 남유다의 여호사밧이 이세벨과 혼인한 것은 정치, 경제 외에도 이세벨이 호감 주는 사람이기 때문. 악하게 생각되는 사람에게 누가 넘어가겠는가. 여호사밧까지도 넘어가게 한 여자이다. 너무 순전하게 보인다. 그래서 넘어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물론 남유다에게 까지 자기 딸과 불신결혼하게 해서, 예수님 오시는 유다까지 초토화되어서 없어질 뻔한, 예수님의 역사에서 가장 위기 가져온 이세벨이다. 불신결혼은 절대 안 된다. 우리가 보기에도 엘리야는 까마귀 공궤 받고 사르밧 과부와 노는데, 나 같아도 엘리야를 택하겠는가 아합부부를 택하겠는가. 그래서 불신결혼 다 한다.
신결혼하면 뭐하냐고 그런다. 너무 속 썩여서 신결혼할 필요가 뭐 있냐고들 한다. 근데 이세벨처럼 잘 먹고 잘 살라고 신결혼 하는 것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행복 아니고 거룩이다. 싸우면서 사는 것을 정상이라고 여겨야 한다.
엘리야는 이 얘기가 갑자기 안 들린다. 광야로 혼자 가며 홀로서기가 안 되었기에 죽고 싶었다.
(적용) 여러분은 혼자인가, 홀로서기인가? 홀로서기가 되고 있는가? 늘 나는 혼자야, 혼자야 이러는데 씩씩하게 홀로서기 잘 되고 있나?
4. 그럼에도 일어나서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5-8) 4절까지 엘리야의 삼천포로 빠지는 모습 나온다. 근데 내 모습 이대로 주님이 용납하신다. 이후 5-8절까지 한 절마다 네 번씩 일어나 먹고 마시라고 한다. 대단한 주님의 돌보심이다. 주님이 너무 미안해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번도 아니고 계속 어루만지시고 '미안하다, 일어나서 먹어라' 어루만지시고, '미안하다, 일어나서 먹어라' 어루만지시고...
엘리야가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이 역할 감당시키시고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너무 미안해하셨다. 너무 미안해서 4절이나 걸쳐서 일어나 먹고 마시라고 어루만지신다. 여러분이 택자라면 믿음이 연약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걸 주님이 아시고 너무나 주님이 안타까워하신다. 주님의 미안함이 느껴지면서 위로가 된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바란다. 하나님의 위로가 최고다. 말씀으로 위로 받아야 한다. 계속해서 먹고 마시고 일어나라고 어루만지신다. 이전에도 까마귀와 과부를 통해 공급하셨는데 이제 초자연적 존재인 천사를 보내셔서 공급하신다. 천사의 말대로 먹고 마셨는데 또 다시 누웠다. 얼마나 영육 간에 지쳤는지 다시 누웠다. 순종하려고 해도 힘이 없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돌아보심이다. 엘리야가 다시 돌아눕지만 하나님이 또다시 똑같은 언어로 똑같은 동사 쓰면서 계속 돌보신다. 먹고 마셔도 다시 누울 수밖에 없지만 택자는 하나님이 계속 돌보신다. 음식물의 힘 의지하여 40주야 가서 호렙에 이르렀지만, 영적인 것이 정말 육적인 것이다. 1절부터 4절까지 안 보인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다. 엘리야의 갈멜산 전투까지 강조된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인데, 계속 말씀 얘기 나가다가 갑자기 말씀 인도 없이 남쪽 끝까지 도망갔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때는 그게 협박도, 질병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고 인도받지 못하는 때라는 것을 보여준다. 순간적인 일인데 완전히 엘리야가 깽판치는 것이다. 죽겠다고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이다. 인생은 누구도 죄인이고 앞날을 알 수 없기에 말씀 나침반을 한시라도 보지 않으면, 골로새서 1:13처럼 흑암의 세계에서 사랑의 나라로 가려면 넘어질 수밖에 없다. 말씀의 인도를 가질 때와 아닐 때는 큰 차이가 나는데 이 사소해 보이는 차이를 간과하기에 큰 일이 일어난다. 대부분 상태 안 좋은 사람에게 오늘 큐티했냐고 물어보면 안 했다고 오늘만 안 했다고 한다. 감동도 없는 말씀 인도는 뭐 하러 받냐고 한다. 늘 말씀대로 인도하면 힘들 때 빛을 발한다. 날마다 양치질한다고 감동 있지 않다. 일주일에 한 번 닦으면 감동 있지만 병 걸린다. 감동 없어도 날마다 말씀 인도받는 것은 큰 사건에서 우리를 살려주신다. 날마다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 택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결정적일 때 도와주신다. 엘리야는 너무도 대단한 주의 일 하고 나서 기진했다. 협박받으니까 자기가 말씀 볼 능력도 없어서 여호와의 천사가 주님 대신 인도한다. 너무 힘들 때는 말씀 볼 능력도 없다. 그만큼 지쳐있다. 주님이 얼마나 미안해하시는지 그게 느껴졌다.
호렙산까지 10일이면 갈 길을 40일 동안 갔다. 아마 금식하며 천천히 갔을 것이다. 선지자로서 의로움 많이 생겼을 것이다. 굶기를 밥 먹듯 했을 엘리야에게 아이러니하게 음식 먹으라고 계속 권하신다. 육신도 자고 나면 회복되는데 영적으로도 쉼이 있어야 회복된다. 영육 간에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네 사명이 안 끝났다' 얘기하신다. 지금 엘리야의 체력으로는 호렙산에 가는 그 길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우둔한 기도 들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살아남도록 보호해주셨다. 죽기를 간구한 엘리야는 오히려 죽음 보지 않고 승천했다.
(적용) 지금 일어나서 먹고 마시라고 어루만져야 할 지체는 누구인가?
여러분의 식생활은 영적인가, 육적인가? 술, 고기, 탄산음료, 냉커피를 밥 먹듯이 먹는가?
음식물에 의지하여 호렙산에 가려면 5대 영양소를 골고루 먹어야 한다.
어루만지시는 주님..
일어나서 먹고 마시라고 어루만져 주신다. 택자인 우리는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신다고 한다. 나의 모든 발걸음을 주가 아신다.
< 기도제목 >
공통 : 신교제와 신결혼
윤소영
1. 쓰는 큐티하기
2. 잠 잘 수 있도록
3. 양육 이번 주 마무리 잘 하도록
박소영
1. 주님의 어루만지심을 경험하기를
2. 회복의 시간 보내기를
3. 가족구원
김유리
1. 사람과의 관계에서 노력하도록
2. 일대일양육 잘 마칠 수 있도록
3. 아웃리치 모임 잘 참여하기를
정지현
1.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나아가기를
2.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되 일을 나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일에서 인정받기보다는 소명가지고 하도록
3. 경제적 부분에서 회개하고 신앙고백이 되도록
4. 아웃리치 준비 잘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