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3. 25 위한나 목장 보고서 (16)>
어린 양께 속한 자
일시 : 18. 3. 25 주일
말씀 : 요한계시록 14:1-5
설교 : 김양재 목사님
- 여전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나 이번 주는 고난 주일이니 경건하게 수요예배 금요예배 다 참석해주시길 바랍니다.
- 교회가 커져서 도마 위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정말 기도해줄 문제는 이 장소를 학습권을 침해했다고 했잖아요. 이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겠지만, 못쓰면 어떡하나 하고 있습니다. 을의 입장이니 어떻게 될지 몰라 여러분들이 기도하기 바랍니다.
- 오늘은 14만 4천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데 저촉(抵觸)되는 것이 없어서 영상으로 듣겠습니다.

이름에 대해서 오늘 얘기 좀 해보고자 합니다. 제 이름은 쇠 김(金)자에 어질 양(良)자에 있을 재(在)자입니다. 금은 쇠와 금과 돈과 귀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질 良자에는 옳고 바르고 훌륭하고 곧고 착하고 아름답고 길하고 진실로 참으로 별 좋은 뜻은 다가지고 있습니다. 있을 재는 이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뜻이니깐, 이름대로라면 착하고 훌륭하고 어진 것이 계속 있으면 귀하게 되고 돈도 많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름에 치어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이 良자에는 남편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오죽이나 (어머니께서) 아들을 낳고 싶었으면... 목사님께 점지를 받아서 완전 남자이름을 저에게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깐 저희 목사님은 너무 헌금도 많이 갖다 바치는 저희 엄마 때문에 가장 좋은 이름을, 완전 남자이름을 (태어나지도 않은 저에게) 지어줄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 이름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연애편지를 썼잖아요? 그 당시 E-Mail도 없었고, 사랑하는 영~ 하는데 그런 저는 이름 나빠 연애도 못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연애편지를 받는 생각을 하면 나도 우습습니다. 선생님들이 내 이름을 보고 제 얼굴을 쳐다보시고는 웃으셨습니다. 그때부터 내 이름이 참 이상하구나.를 생각했습니다. 이름만 보고 저한테 편지하는 사람 단 한명도 없고 이름 탓인지 제가 연애편지를 한번 도 못 받아 봤습니다. 너무 좋은 이름 지어주지 마세요. 아이들이 괴롭습니다. 제가 그 이름대로 살려면 너무나 옳고 바르고 착하고 진실 되고 길하고, 이런 삶을 사려면 얼마나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이름이겠습니까? 이기적인 제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름을 주어도 그 이름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어린 양께 속한 자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어린양께 속한 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시온산을 바라보는 자, (쉽게 말하면) 거룩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1절)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기억나시겠지만, 6장에도 이 진노의 대접에서 누가 능히 서리오? 그랬더니 7장에는 14만 4천명이 있다고 했죠? 이처럼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잘 알고 읽어야 합니다. 제가 하늘을 보고 누웠습니다. 입체화면이 돌아가서 동서남북 정중앙이 있는데 여기는 1장이고 여기는 2장이고 그 밑에는 3장, 4장이고 그리고 각자 소계시록이 7개가 있습니다. 서쪽에는 1장이라고 하면 동쪽에서는 2장, 그러니깐, 이게 다 각자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모두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입니다. 동시대에 일어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것을 세대주의적으로 세계적으로 연대기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뭐라구요? 다 동시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지금도 짐승 이름 666이 있으니 지혜가 여기 있느니라하셨고 사방이 나에게 와서 꾄다고 했는데 14장에 동쪽에서는 짐승이 나를 꾀는 게 있는데 서쪽을 바라보니 어린 양과 십사만 사천명이 딱 서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힘든 것 같지만, 이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아셨죠?
13장을 요약해보면, 거짓 선지자가 우리를 때려눕히는 과정이 나왔습니다. 먼저 어린 양, 새끼양의 모습으로 와서 짐승을 경배하게 하고 눈에 보이는 이적으로 달려들어 넘어가면, 666의 표시를 이마와 오른 손에 하고 완전히 짐승의 표시로 하면 사단의 수하로 들어갔다 이 뜻입니다. 이럴 때 안 넘어가기 어려운데 진짜 지혜는 이것을 구별해낸다고 했습니다. 구별해 내려면, 내가 또 봐야 될 것이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일어난 일이니 고개를 들어서 동쪽을 봤다가 서쪽을 봤다고 했습니다. 계시록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얘기가 또 내가 보매라는 말입니다. 20번 이상 나옵니다. 이렇게 봐야지 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알 수 없습니다.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선 것을 딱 보게 된 것입니다.
12장과 13장까지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 교회와 싸우려고 삼위일체로 덤벼들면서 용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와서 덤비는데 어린 양과 핍박에 견딘 성도들이 시온산에 선 것을 봤습니다. 시온산은 예루살렘 성을 의미하고 온갖 출애굽에 산은 율법을 주는 두려운 곳이라면, 여기 시온산은 은혜의 장소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 족속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포로 시대 이후에는 시온산은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가리켰습니다. 그때는 핍박 받을 때 예루살렘 성전은 없어졌습니다. 여기가 의미하는 것은 이 땅에 실현되어질 주님의 주권이 살아 숨 쉬는 메시아 왕국 이것이 시온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제 지하 감옥에서 힘든데, 메시야 왕국에서 어린 양과 함께 섰는데 14만 4천명이 서있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도 14만 4천명을 해석했지만은 궁극적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한 명도 낙오되지 않고 승리자로 시온산에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14만 4천명은 무엇인가? 3X4X10의 세제곱입니다. 3은 하나님의 수이고 4는 땅의 수입니다. 하늘에도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 이것이 합해지면 12는 완전수입니다. 여기에서 충만수인 10의 세제곱을 하면 셀 수 없는 큰 무리, 이런 사람들이 한 명도 낙오 되지 않고 시온산에 다 선다고 하는데 신천지에서는 이것을 실제 숫자라고 14만 4천명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런 잘 못된 해석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 내 설교를 듣고 이단들이 교회로 안 오나 이상합니다. 왜 이상한 설교에 왜 속아 넘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14만 4천은) 셀 수 없는 큰 무리라는 뜻입니다. 정말 이 방송을 듣고 이단들은 속지 말고 빨리 그 공동체가 이단이라는 말을 하면 그곳은 이단입니다. 빨리 나오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단에 속한 자들 때문에 계시록 설교 합니다. 물론 계시록 설교는 창세기나, 로만서나 다름없는 똑같은 평범한 설교인데 이것을 가지고 이단들이 너무나 그럴 듯한 말로 장난치는 것 같지 않게 잘못 해석하기 때문에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다시 얘기합니다. 14만 4천명이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섰는데 거기에 어린양과 아버지 이름이 쓴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이름이 성도이름에 써져 있는 것인데 13장 마지막에는 짐승의 표를 받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는 금세 14장 1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써졌으니 가치관이 변화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바뀌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 1:24에 아들을 나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자기의 백성을 구할자니라
하였는데, 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을 어린양 예수님이세요. 어떤 목사님이 저의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모르지만, 목사님께서 이름을 참 잘 지어주었다고 생각한 것이 비록 아들 이름이지만 어질 량이 어린양이 되지 않았습니까? 만세전부터 택해서 (꿈보다 해몽이니깐) 재물이 되는 이름이라 생각해요. 어질 양자로 살기를 원하지만, 인생은 내 힘으로 그렇게 옳고 바르게 살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13장 16절을 보면 부자나 빈곤한 자나 차별 없이 짐승의 수에 눈이 어두워서 짐승의 표를 받는 것에 다 끌려간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이 세상에 최고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일류를 좋아하기 때문에 저 또한 어질 량자로 태어났지만 일류 좋아하다가 지옥 갈 뻔 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류는 육적인 것뿐 만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도 포함이 됩니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일류가 되려고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 여러 가지 사건으로 내 바닥이 보이게 하시고 나는 정말 착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이 내 인생에 들어오신 것이 제 이마에 이름이 쓰여지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사역을 하는데 훌륭하고 착하다는 이런 평가를 내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전혀 그러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오직 어린 양만이 평가를 받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적 칭호입니다. 저도 어린 양처럼 재물이 되어야 하는 이런 가치관이 들어 온 것입니다. 양자는 별 뜻이 다 있습니다. 남편이라는 뜻도 있다고 하였는데 잠깐이라는 뜻도 있더랍니다. 한자사전 찾아보세요. 저는 그러니깐 잠깐의 짧은 인생의 재물이 되었다가 가야 되지 않는가? 예수님도 짧은 인생을 사시다가 가셨습니다. 과연 이름을 잘 지어주셨구나, 평생을 살아보면서. 어린 양의 가치관이 내 이마에 와서 나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입니다라는 것이 남에게 보여지는 것이 어린 양의 이름이 이마에 써진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인가?
출애굽기 3장 14절에
(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that I am, I am who I am. 짐승이 아무리 머리가 좋아서 성공을 하고 성공을 하기 위해서 갖은 고통을 준다고 해도 여러분 성공도 고통도 다 지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이 땅에 성공도 지나가 고통도 지나가고 그런데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 지나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비교가 안 되는 신분에 아버지의 이름이 내 이마에 새겨져 있는 것을 이 핍박받고 참소 받고 있는 이때에 동쪽에서 일어나는 데 서쪽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어린 양께 속한 자가 볼 수 있는 특권인 것입니다. 온통 666, 7에 아무리 가까이 가고 싶어도 666입니다. 666이 20에 가도 못 도달하는 것이 짐승의 수란 말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은 비교가 안 됩니다. 정말 7에 가까운 것이 인본주의라고 했습니다. 가장 착해 보이는데 제일 예수 믿기 어려운 것이 인본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렇게 둘러쌓인 이때 어린양이 14만 4천명과 함께 시온 산에 섰는데 구속의 14만 4천명과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잘 기억하면 힘들 때 힘이 됩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쓴 것은 자력으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린양이 피 흘리심으로 그들에게 써주신 것입니다. 내 힘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그로 말미암아 구속받았고 이 짐승은 이기고 또 이기려는 수를 자랑하는 이름이지만, 성도의 이마에는 주 예수님의 이름이 찬란하게 써있다는 것은 구속주의 인격에 동참하면서 세상 자랑을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언제나 이기는 것 같지만 사단의 어떠한 핍박에도 성도는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짐승의 표를 받지 말고 예수의 이름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베리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데 베리칩을 안 받아야겠다고 하시는데 베리칩을 왜 그렇게 우숩게 여기냐고 하는데 베리칩을 무서워하지 맙시다. 이천년 동안 바코드 등의 베리칩 대상은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어렸을 때 카드 쓰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의료보험 때문에 칩 인식하라고하면 윗 권세에 순종을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게 무서워서 다 옛날 이단들이 산으로 가라고 해서 신앙촌으로 팔구 들어갔습니다. 산으로 기도원으로 올라오라고 이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도 다 산으로 도망가라 합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베리칩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죽음이 두려워서 (무서워하는 것) 그런 것입니다. 나중이 어떨까? 두려워하는 것보다 이제 오늘을 어린 양의 이름이 쓰여진 것은 오늘 어떻게 사느냐를 오늘 걱정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칩을 받을까? 걱정을 하지 말고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하는 것이 거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을 어떻게 살까 주님이 물어보시면, 내가 오늘 예수님이라면 어땠을까? 갈등 충만이 성령충만인 것입니다. 거룩을 바라보는 길로 날마다 가야하는데
목장 보고서를 보니깐, 지난 번 목사님이 꿈에 나오셔서 걱정하지 말라 하셨다 합니다. 그래서 복권을 5장을 샀다고 합니다. 그런데 확인해보니 하나도 당첨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질문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녀도 계속해서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용 옆에 있다가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과 먼 것입니다. 이단이 꼭 그렇습니다. 3은 하나님의 수고 4는 땅의 수고 이딴 것을 풀어가면서 마지막에는 누가 풀 힘을 줬냐? 하면 나에게 보혜사가 있다. 그게 우리 교주다라고 설명합니다. 감람나무이시고 교주이신 보헤사가 성경을 풀게 해준다. 그래서 나도 보혜사에게 힘을 얻어 성경을 풀 수 있다.라고 합니다. 이런 것에 속지 마시고 빨리 나오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에 보혜사는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구원자 심판자, 보혜사가 되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신앙 공동체가 너무나도 중요하고 시온에 서있는 14만 4천명, 어린 양께 서있는 14만 4천명의 공동체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 없이 서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 구속함의 새노래를 부르는 자들, 세상은 배울 수가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자들입니다. (2-3절)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자가 없더라)
로마에서는 핍박을 받고 고문을 받고 경제 활동도 제재를 가하니 매매를 못하게 하니 짐승에게 절하지 않으면, 거기에 승리를 하고 시온산에 서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뭔가요? 성도가 승리한 것 때문에 천사들이 환영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너 승리를 했구나~ 천사들도 환영하는 이 노래를 배울 자는 14만 4천명 밖에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오늘 하나님 때문에 적용하고 예수님 때문에 갈 껄 안 가고 아까도 그랬습니다.
자기는 어딜 가야 하는데 주일을 빠지기 때문에 안 갈까보다라고. 자기는 연예인 화보 촬영으로 출장이 있는데 주일이 껴서 안 갈거래요. 이러기 너무 힘든데, 이런 적용을 하면 하늘도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여행도 가야 할 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하는 사람이 여기 지금 한 몇 백 명이 있습니다. 4명이라고 안 그럽니다. 몇 백 명이 있습니다. 새노래는 오직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사람들,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만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데 ,죄 가운데 있는 옛 사람은 배울 수 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 지식이 새로워지고 마음이 새로워지고 생명이 새로워진 사람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인 것입니다. 어린 양의 보혈로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천사가 이 14만 4천명을 위해 합창을 불러줍니다. 새노래를 불러주는 것입니다. 그 천사가 들려주는 노래를 14만 4천명만 듣는다고 하니깐, 하늘나라의 언어이고 하늘나라의 가치관의 얘기인 것입니다. 맑은 물소리는 하늘에서 나는 소리인데 천사가 많은 뇌성 같이 힘찬 찬양을 하는 것인데 그 소리가 거문고 소리처럼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당당하고 힘차고 용기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너무 정적이고 섬세한 천사의 선율로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은혜가 되는 사람은 병력 같은 소리로 얘기를 해도 신비로운 거문고처럼 섬세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군대 같은 소리일자라도 거부감이 없는데 제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음성부터 싫다고 합니다. 그렇죠? 어떤 사람은 굉장히 크게 소리를 해서 거부감이 드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소리를 크게 하는 사람이 아닌데 왜 그렇게 땍땍 거리냐고 합니다. 설교가 은혜가 되는 사람은 다 좋아 보입니다. 숨을 쉬어도 좋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도 왜 저렇게 땍땍거리냐 하는 사람 5명 정도는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끌려 온 사람들.
성도들이라 하면 권위가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뇌성 같지만은 거문고처럼 아름다워야 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이 엄청난 진리를 전하니깐, 권세가 있지만, 전해지는 나의 그릇은 아름답고 부드러워야지 다른 사람이 하늘나라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레루야!
시온산에 섰지만은, 그 소리가 하늘에서 들린다고 했잖습니까? 시온에 선 것은 예수그리스도와 사단의 핍박을 이겨낸 자들이 선 것이죠? 시온 산 자체가 천국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지체로 묶여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나중에 사랑만 남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갔는데 믿음이, 소망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사랑만 남습니다. 우리가 믿기 위해 은사도 필요하고 시온산도 필요하고 십자가도 필요하지만, 천국가면 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시온산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공동체가 중요한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무도 배울 수 없는 그들만의 경험의 노래인 것입니다.
지하감옥에서 생활하던 그들을 시온의 공동체를 의미하면서 이렇게 고난이 극심하지만 믿는 사람들, 그들끼리 모여서 겸손하게 기도하고 울고 회개하는 공동체야 말로 천상의 공동체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제가 북한에 지하 교인들이 같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또 어떤 할머니가 기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평안도 사투리로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할머니가 아바지, 아바지 이민족을 버리지 않으시는 아바지, 아바지. 살얼음 땅입니다. 살얼음 땅입니다. 아바지, 아바지. 순교의 피해 자손들이 다 살아있고 아바지, 복원하시고 역사하시는 주의 보혜사가 나타날 줄을 압니다.라고 이렇게 기도를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옛날에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 후 그때 교인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다 어디로 갔겠습니까? 지하교회가 교인들이 약 20만~ 40만은 된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아직도 똘똘 뭉쳐서 찬송가도 없어서 수첩에 적어서 부르고 다 글로 적어서 찢어지는 노트로 예배를 드리는데, 거기가 로마보다 더 한 곳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바로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가 아닐까? 구속의 새노래를 부르는 여기서 아바지, 아바지 우리는 보혜사가 나타날 줄 압니다. 이 민족을 버리지 않으시는 아바지. 이것이 그들이 지금까지 5-60년 핍박을 받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들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처형을 받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 이때처럼.
세 번째는 어린양께 속한 자는 구별되는 삶이 있는 자입니다.(4-5절)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당연히 삶이 따라오잖아요?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다고 합니다. 어린양께 속한 사람, 구원의 새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영육 간에 정절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자가 요물인데 여자로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다는 자라합니다. 정절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부로서 남편에게도 정절을 지켜야합니다. 정절을 지켜야 어디로든지 따라가지 않습니다. 남편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자기가 정절을 지키지 아니했는데 따라가겠습니까? 그래서 정절을 지켜야 되겠고 영육 간의 정절을 지켜야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비결이 됩니다.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내 신랑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는 길입니다. 자랑도 성공도 능력도 아니고 어린양 따라가는 것은 오직 순종뿐입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어떻게 북한이 저럴 수 있어? 로마가 어떻게 나를 300년 핍박할 수가 있어?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윤리 도덕을 버리고 2천년을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 시간과 내 시간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초월해야 됩니다. 멋있게 십자가 지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참함을 겪어 보지 않고는 성도의 길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29절부터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것이 어린양 따라가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싸움입니다. 내 영은 완전히 성경적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과 날마다 비교하는 삶을 싸우면서 믿음을 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절을 지키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 가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는 구별된 열매라는 것이지 서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2장 3절에
(3 그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또 출애굽기 19장 5-6절에도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내가 어린 양을 잘 따라가면 하나님의 처음열매가 되어서 온 세계의 제사장 나라가 된다고 합니다. 가만히 있는데 예수 잘 믿으면 리더쉽이 딱 오는 것입니다. 나에게 전 세계를 맡겨준다고 하잖아요? 이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손해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맡겨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입에는 5절에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라고 합니다. 인간은 거짓말과 흠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자가 거짓말을 안 하고 흠이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들은 거짓말과 흠 때문에 아파하는 자들입니다. 날마다 씻고 회개할 일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입니다. 목사님께서 얘기해주셨잖아요? 너무 꼬질꼬질하고 더러운 사람이 아무리 밥 먹다가 퉤 뱉고 재채기를 해서 꼬춧가루가 다 튀겨도 더러운 옷을 입으면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앙드레김 선생님처럼 하얀 옷을 입고 있으면 한 번 퉤하면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해 합니다. 이 흰 옷에 흰 꼬춧가루가 묻었다고. 이것이 바로 구별된 사람이 내 죄 때문에 너무 아파하는 것입니다. 쪼금만 묻어도 너무나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별된 삶인 것입니다.
북한이 김일성을 우상숭배 하듯이 그 당시 소아시아 우상숭배는 삶의 목숨이고 근거고 정치경제문화가 다 연결되어 있고 그러니깐 직장에서 잘리고 먹을 것도 없으니 내가 우상숭배 안하면 그만이 아니고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족인 유대인들한테도 배신을 당하고 매매를 못한다고 했잖아요. 아무 것도 사고 팔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문을 받고 있을 때, 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될 일이 눈만 뜨면 몰려오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직장에서 살기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서 타협할 일이 눈만 뜨면 너무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반대가 거짓말입니다. 문자적으로 반대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참소와 유혹과 나의 유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은 특별한 영웅이 아닙니다. 남들 고난당하는 것 실컷 볼 때는 음음 그렇지 하다가 그것이 나에게 오면 상상으로 겪는 고난과 내가 실제 경험하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너무나 체감 온도가 너무 다릅니다. 로마시대도 그렇게 일제 강점기도 어려웠습니다. 거기에서 누가 살아남을 자가 있었을까? 그런데 오늘 로마시대도 이렇게 어렵지만 14만 4천명을 보면서 그 구원을 완성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 오늘 이 장면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기드온도? 형편없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였지만 처음부터 큰 용사라고 해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성도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어린양께 속한 자들입니다. 나에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주님이 찾아오셔서 나의 이마에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이름을 찍어주셨습니다.
이처럼 로마와 똑같은 고난이 일제 강점기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어느 얘긴가 싶어서 가끔씩 해주어야 합니다. 1930년대에 한국 교회에 당면한 가장 고난은 신사참배 강요였습니다. 천황의 숭배 도전 앞에서 황제 숭배를 한 사람도 있고 마지못해 타협한 사람도 있고 끝까지 숭배를 거부한 사람들 이렇게 세 가지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것 때문에 교단과 교파가 갈라졌습니다. 황경진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했다고 했잖아요? 이것을 마지막에 다 회개했습니다. 그것이 옳고 그름 잣대가 돼서는 안 되겠지만, 그 당시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이때 가장 유명한 목사님이 소양 주기철 목사입니다. 소양(小羊)이 무엇인가요? 어린양입니다. 소양 주기철 목사님은 로마시대 면죄부의 부당성을 당당하게 외쳤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용기 이상으로 심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몇 차례의 투옥을 거쳤습니다. 너무 잔인했습니다. 나머지 투옥기간동안 소양은 자기와의 힘든 싸움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독한 감방에서 차라리 죽고 싶은 가혹한 고문과 후유증과 끊이지 않는 육체적인 아픔과 열악한 식사로 소양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죽음 앞에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지극한 권세도 아니고 지루한 고난도 아니도 의로운 죽음도 아니고 주님께 부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노모와 처자의 장래였습니다. 소양은 아이를 다섯을 낳고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을 한 엘리트 처녀 부인이 있었습니다. 오정모 사모님이십니다. 아이도 남겨놓고 부인도 남겨놓고 노모도 남겨놓고 너무 걱정이었습니다. 고독한 감방에서 자기 생명이 얼마 안남은 것을 예감하고 하루하루 병고와 싸우면서 생명을 부지하던 1944년 4월 13일자 소양의 유언에는 가족들의 장래에 대한 염려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국인 간수 안태수를 통해서 오정모 사모님에게 전달되었던 유언장에는 이렇게 써있었다고 합니다.
열흘 후에는 아무래도 내가 소천할 것 같다. 몸이 부어올랐습니다. 막내 광조에게는 생명 보험을 둔 200원으로 공부를 시키십시오. 어머님께 봉양 잘 해드리고 어머님께는 죄송합니다.
이 유서를 받아든 오정모 사모님의 첫 마디가
아니 목사님 아직까지, 무슨 가정에 무슨 미련이 있어 이런 것을 보냅니까? 였습니다.
소양이 그 두 번째 투옥에서 풀러났을 때도
아니 그래서 승리하시겠습니까? 다시 감옥에 들어가세요. 어서 다시 들어가실 준비를 하시오. 라는 첫마디를 건넸다고 합니다.
그녀는 한국 교회 장래가 소양 주기철 목사에게 달려 있음을 너무 뼈저리게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 길을 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모님에게 맡겨진 신의 섭리라고 믿었습니다. 엄청난 신앙의 결단을 하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냉철함과 정절을 지키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투지, 구별된 인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인하고 살면 무섭겠죠?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오기만 하면 들어가시라고 하시니깐, 정말 아이가 없어서 그러셨나? 투지가 하늘을 찌릅니다. 그때는 순교하는 게 소원인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구별된 인생을 살아야 하겠는데...
교회를 오래 다닌 목자의 목장 보고서를 보니깐, 어떤 집사님께서 나는 사위가 들어오면 사위를 망치거나 말거나 내가 어렵거나 말거나 어렵다면 다 퍼줄 것 같다고 나눔을 하셨습니다. 우리 적용하고 너무나 다릅니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오정모 사모님과 마지막 면회 때, 목사님이 두 간수에게 들려 오셨습니다. 서있을 힘도 없고 간수들에게 몸을 의탁하고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목사님과 사모님과 마주하셨는데 사모님 그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제 다 오셨습니다. 끝까지 승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월계관 들고 계시는 것 보이시죠? 눈을 보고 바라보세요. 주님의 얼굴을 바로 보세요. 목사님.
이렇게 힘을 드렸다고 합니다. 목사님 가만 계시다가 알았다고 내가 하나님께 가겠다고 주를 위해 순교하시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간수에게 끌려가시면서 뒤를 돌아다보면서 이렇게 얘기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보 나는 따뜻한 숭늉이 한 그릇 마시고 싶어요.
그게 마지막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을 지켰던 안희숙 사모님에게도 감방에서 마지막에 남긴 말은 동지여 천국에서 만납시다. 이래야 되겠는데 그게 아니라 나는 우물에 있던 오이를 꺼내어 쑥갓 넣고 참기름 넣고 무친 것 먹고 싶다는 것이 마지막 유언이었다고 합니다. 아니 마지막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 일제는 주목사님을 의자에 묶어 놓고 전기 고문을 했는데, 전기 찜질을 하셨으니 이제는 손톱손질을 해드려야지 하면서 대나무 바늘로 손톱과 발톱을 쑤시고 후벼 팠는데, 그때 홀연히 주목사님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며 큰 권능 얻겠네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내 마음이 약하여서 늘 엎어지고 주의 힘주사 굳세게 하소서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이것이 새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은 절대로 배울 수 없는 노래잖아요? 거기서 어떻게 찬송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나라 천상의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일제가 알아듣겠습니까? 형사들이 흉칙하게 눈을 찌뿌리며, 예수에게 힘달라고 한다고 고문당하면서 노래 부른다고 그래 노래 더 해봐라하면서 몸을 거꾸로 매달고서는 입과 코에 고춧가루 물을 들이 부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주여 나를 주님 곁으로 부르소서, 나의 육체가 슬피우니 나의 슬픔을 거두어 주소서. 정말 육체가 슬퍼요, 육체가 너무 연약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주목사님을 지키셔서 날마다 고문을 당하시느라 옷이 피범벅 되고 더럽고 옷이 다 찢어져도 그래도 오늘 하나님께서 부르실지도 모른다고 날마다 옷을 빨고 찢어진 것을 꿰매고 다듬어 놓고 언제나 부르심에 준비를 했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준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연약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가장 소원이 숭늉이고 오이 무침이라 해도 사모님은 승리하세요 숭늉이 웬말입니까? 하시면서 이렇게 승리하라고 나가셨지만, 주님은 목사님을 너무나도 어여쁘게 보시고 나의 사랑하는 자야,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초청을 해주신 것입니다. 사모님의 대쪽 같은 믿음이 물론 주목사님을 주목사님 되게 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힘든 시기를 주님은 더 아파하시면서 같이 걷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격려를 받아야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각자의 절대치의 힘든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택한 자이기 때문에 업어 가시고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어린 양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에 앞서 나간 선각자이기 앞서서 너무나 평범한 한 사람임을 발견합니다. 정말 그가 잔혹한 고문에 이겼다는 것보다도 숭늉이 드시고 싶고 오이 무침 드시고 싶은 것 때문에 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너무 위로를 받았습니다. 영웅이 아니고 어린 양께 속해서 한 걸음씩 갔다는 것이 우리의 위로가 된 줄을 믿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은 어린양께 속하면 우리는 그냥 하나님께 의탁하면 하님께서 이끌어 가실 줄을 믿습니다.
요즘 지체들을 속 썩히던 남편들이 돈 좀 벌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참 반갑기도 하지만,
어느 초원님의 글입니다. 돈과 지휘 때문에 영적으로 둔해지는 권세자가 될까 두렵기도 합니다. 반은 농담이겠지만, 어느 남편은 부인에게 남편인 자기를 어떻게 섬길지 계획을 써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한 짓을 생각하면 머리 털을 다 뽑아버려도 시원찮은 일인데도 말입니다. 지체를 만나면 월세가 밀리고 가스가 끊기고 차비조차 없다는 말을 들어도 걱정이고 돈을 벌었다는 소식에도 타락할까봐 걱정이 되니 이래저래 걱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린 양께 속한 자는 오늘 시온 산을 바라보는 자라고 합니다. 거룩을 바라보는 자라고 합니다. 이제 십사만 사천 명이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섰는데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이마에 쓴 것을 봐야지 우리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중심으로 바뀌어야 우리가 짐승의 세계에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속함의 노래를 배운 자들입니다. 세상은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자들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자들입니다. 정절과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는 자이고 첫 열매로 익은 열매로 드려지는 자입니다. 거짓말과 흠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자가 구별된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연약합니다. 우리는 어린 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감옥에서 한 찬양을 우리 다같이 부르겠습니다.
말씀 후 찬양 이 세상 험하고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주님의 권능은 한 없이 크오니 돌 같은 내 마음 곧 녹여 주소서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내 맘이 약하여 늘 넘어지오니 주 예수 힘 주사 굳세게 하소서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죄 사함 받은 후 새 사람 되어서 주 앞에 서는 날 늘 찬송 하겠네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기도제목
우리 모두 절대치 힘든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하나님 나를 택하셨으니 주님 업어 가시고 일으켜 세워달라고 합시다. 주님 나는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어린 양이 가자고 한 길을 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이지만, 주님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붙들어주시고 내가 시온산에 다시 서기를 원합니다.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지길 원합니다. 주님 오셔서 써주시옵소서.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기
저는 연약하고 부족하고 이 세상의 성공을 바라보면서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써지지 못해서 주눅이 든 우리를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택했다고, 어린 양에게 속한 자라고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은 배울 수 없는 노래를 불러야 세상이 감당할 수 없어 감동하고 따라 올 텐데 세상에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과 남편과 자녀와 식구들에게 위로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해서 저희의 눈물이 짓물렀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너무나 두려워서 아버지 하나님, 거짓말과 흠 때문에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주기철 목사님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저를 한걸음씩 인도해주시기를 믿습니다. 아버지, 살얼음 땅입니다라고 기도하신 북한의 할머니의 기도를 기도해주시고 북한 민족을 기억해주시옵소서. 그의 기도로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남북한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우리가 어린양에 속해서 시온 산에 선 민족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나이다. 아멘.
어린 양께
#사랑스런#사랑받는#
위한나목장 보고서(16)
일시 : 18. 3. 25 주일4-6시
장소 : 6층 소년부실
참석 : 위한나, 이은영
나눔 : 둘이서 오순도순 나눔하였습니다.
적용해 보았습니다.
1. 내가 좋아하는 윤리, 도덕을 좇다가 내 바닥이 보이고 내가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느낀 사건은 무엇이 있는지?
2. 천국에 가면 결국 사랑만 남는다고 하였는데 사랑을 나누는 천상의 공동체가 나에게는 있는지?
3.어린양 따라가는 것은세상자랑도 성공도 능력도 아니고 오직 순종뿐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 공동체가 얼마나 소중한 지에 대해서 생각보는 시간이었습니다.사랑이 가득한 우리 공동체 사랑합니다.
금주 기도제목
한나 주님께 매일 매일 의뢰할 수 있도록
은영 어머니께 복음 잘 전할 수 있도록
+++ 함께하지 못한 현경 민정 자매에게도 어린 양께 속한 사랑 전해졌기를소망합니다.
을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