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스타벅스
참석: 이은혜 강혜림 박세현
말씀: 창 48:8-22
제목: 마지막 분별
설교:
우리가 생명 내놓는 사랑을 받아서 화해를 해도 참 끝까지 분별이 어렵습니다. 야곱은 일생 라헬과 요셉과 특별한 사랑을 하느라고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48장 7절에 라헬이 죽었는데요, 죽음이 다가오니까, 이제 원어로 보면, “갑자기 죽었다” 도 되는데, “무엇을 인하여 죽었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드라빔을 훔친 라헬을 내가 저주해서 나로 인해서 죽었다” 는 고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뜬금없이 라헬이 죽었다는 얘기가 35장에도 나왔었는데, 이 얘기를 씀으로 내가 요셉에게 실질적 장자로서 두 몫의 축복을 주고자 하는 모습을 암시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힘든 훈련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으면, 당연히 힘든 것을 경험한 자녀가 그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생명을 내놓는 사랑으로 화해를 시킨 유다가 믿음이 좋다는 것은 야곱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너무 사랑하니, 요셉을 바로 그 믿음의 유다의 자리에 놓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행위가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에. 이 요셉과 유다, 이 둘이 무엇이 다를까요. 야곱과 요셉의 관계는 일생을 통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믿음까지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라서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라헬까지는 내려 놓았는데, 아직까지도 야곱은 요셉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내려 놓지 못했습니다. 사랑을 주고 싶은 사람은 여전히 요셉이고, 그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인 것입니다. 사람을 믿음으로 분별한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그래도 사랑하고 축복할 때 상대방이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서 저절로 분별되어 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말 분별하기 어려운 마지막 분별에 대해서 오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마지막까지 사랑합니다. (8절)
오늘 야곱은 분별하는 과정에서 요셉의 아들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축복이 야곱의 인생에서 37번 나오는데, 정말 야곱이 축복 좋아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아버지 이삭에게 그야말로 거짓말로 속여서 받아 낸 축복인데, 요셉에게는 손자를 보고 이들은 누구냐고 물은 것은 정말 제대로 된 축복을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10절입니다. 이삭은 인생이 평탄해서인지 야곱에게 속아서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분별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인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아서인지, 육신은 쇠했지만 아주 영안이 밝아져 있었습니다. 눈이 어두워도 믿음이란 보지 못 하는 것을 실상으로 놓고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축복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11절입니다. 이 말은, “요셉아, 나는 네가 짐승에게 찢겨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보게 되고, 네 자식까지 보게 될 줄 내가 어떻게 생각 했겠니?” 하면서 마지막까지 사랑이 절절이 묻어납니다. 하여튼 이 집은 마지막까지 요셉 밖에 없고, 요셉의 자녀 에브라임, 므낫세 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을 겪는 집들이 있습니다. 집집마다 믿음의 집안이라도, ‘우리 아버지는 형 밖에 몰라. 우리는 사람도 아닌 가봐.’ 이렇게 생각하는 집이 많겠지만, 맞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서 안 쳐다 보는 것을 당연히 알아야지, 뭘 사람인 것처럼 비교하고 그러세요. 여러분은 사람이 아니에요. 아버지 마음이고, 엄마 마음입니다. 여기 보니 형들이 그것을 알고 일절 말을 안 하는 것을 보니 형들도 대단합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에 다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요셉도 항상 자녀들을 축복받는 자리에 데리고 가는 열성 아버진 것 같아요. 자기가 애굽의 총리지만, 믿음이 최고야. 아버지 축복을 받아야만 해. 굉장히 믿음이 좋아보이죠? 그렇지만 여기에 인간적인 요소가 끼어있는 축복이라는 것이죠. 12절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장손자 므낫세를 축복하기 쉽게 앉혔습니다. 요셉에게는 장자, 차자 순서가 확실하기 때문에 1절에 데리고 올 때부터 므낫세부터 데리고 왔습니다. 오른손은 권위와, 능력과, 축복과 은혜의 상징이기 때문에 당연히 맏아들 므낫세가 축복을 받아야만 하고, 왼손은 그 모든 것의 반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므낫세가 왼손의 축복을 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스라엘이 팔을 어긋나게 해서 므낫세를 축복하지 않고 에브라임을 축복했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눈이 어두운 그가 이렇게 행동한 것은 영적인 행동입니다. 마지막까지 특별한 사랑을 내려놓지 못 했지만, 야곱으로서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 해서 구원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다고, 너는 틀렸어. 이러고 끝납니까? 믿지 않아도 최선을 다 해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자녀가 안 받아 들이는 것은 그의 몫입니다.또 부모가 안 받아 들이는 것도 그의 몫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Q. 자녀의 구원을 위해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데, 여러분의 사랑은 끝까지 세상의 사랑입니까, 구원의 사랑입니까?
목장 나눔이에요.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예뻤던 딸이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무기력해지더니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무기력합니다. 저는 딸의 마음을 맞춰 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개학을 앞두고 말도 안 되는 색으로 머리를 염색을 한다고 했을 때도 직접 염색을 해 주었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마음을 풀어주려고 하고, 언제든지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도록 밥과 간식을 챙겨줍니다. 학교도 버스 타고 가면 되는데, 늦어서 지각 할까봐 차로 데려다 줍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지만, 고등학교에 가서도 지각을 하기 시작했고, 아침마다 살벌하게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이번 주 큐티 말씀이 힘들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정답은 믿음의 유산이라는 걸 아는데, 아니까 더 힘듭니다. 사실 전 제가 죽기 전에 자녀가 축복 받는 걸 보고 싶습니다. 이랬는데, 이 분은 직분을 가지고 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섬기시고, 우리들 교회도 감사함으로 다니시는 엘리트 부부입니다. 집이 있어서 오자마자 직분을 가졌고, (집 있으면 빨리 빨리 섬기라고). 그런데 그것도 기쁘게 생각하시고, 한 번도 무너져 본 적이 없고, 형평이 어려웠지만 부족함 없이 사랑 받으며 인정 받으며 자랐기에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부모님 때문에 힘들었다고 하는 지체들의 나눔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큐티도 열심히 하고 예배도 열심히 참석하는데, 항상 그 결론이 딸이 학원을 빠지지 않고 공부를 잘 하고 좋은 학교를 가야 하는 것에 딱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내가 딸을 때리고 키우지 않아서 이런 결과가 왔다고 화만 내고, 회개가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딸이 이 집의 구원의 푯대가 되어서 이 집안을 이끌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딸이 계속 더 속을 썩여 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끝까지 세상 사랑 말고 구원의 사랑으로 나가기를 바랍니다. 이 집에 이 딸이 그러지 않았으면 우리들 교회에 붙어있기가 영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이 딸을 축복합니다. 제가 축복한다 그러면 축복이 옵니다. 할렐루야.
2. 마지막까지 축복합니다. (15절-)
자, 이 축복의 내용을 세 가지로 줄여서 이야기를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즉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란 의미가 있구요, 나를 지금까지 기르신 하나님은 내 앞에서 걸으시면서 동행하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지성으로 섬기던 하나님이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하나님을 섬겼지만, 야곱은, 자기는 하나님을 섬길 만큼 전혀 성숙하지 못 해서, 어린 아이 같은 자신을 엄마와 아빠와 같이 길러주시고, 때마다 인도를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아버지가 섬기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같이 걸어주시며, 나를 기르시고, 또한 환란에서 건져주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건져 주셨나요? 형에게서 건져주시고, 삼촌에게서 건져주시고, 기근에서 건져주시고, 늘 이렇게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건지셨다’는 ‘고엘’이라는 표현인데, ‘기업’이라는 뜻이 있어요. 항상 하나님의 기업을 위해서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나를 건지신 하나님이 우리 집안을 건져 주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 주시고, 온 세계를 건져 주실 것이라는 굉장한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요셉의 하나님이 되셔서 요셉으로 하여금 언약의 계승자가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도 가장 좋은 곳에 거하면서, 역사의 중심부에 활동하게 해 달라는 간결하지만 엄청난 축복의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요셉과 그 아들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하면서, 끝까지 사랑을 하고, 축복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적으로도 자녀를 축복해야 되겠죠.
Q. 자녀에게 늘 축복을 해주기 바랍니다. 이것은 좋은 이야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고 환란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알도록 말씀으로, 표정으로, 언어로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 되면 억지로라도, 가식적으로라도 축복 해보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까지 분별합니다.
1) 총리 요셉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17절)
요셉이 아버지가 에브라임의 머리에 손을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이걸 직역하면 ‘그의 눈에 악했다.’ 이런 뜻이 있어요. 이 단어의 기본형이 ‘악하다, 근심하다, 사납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축복 선포하는 것을 볼 때, 자기의 생각과 다른 것을 보고, 므낫세(맏아들)가 축복 받지 못 하는 것에 대해 근심하고, 근심하면서 악하여지고, 사나워져서, 너무 너무 못마땅 해 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이런 축복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교양과 도덕과 지적 능력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셉은 세상의 총리로, 기근 때도 살리는 경제 정책으로 애굽 전역을 다 살리고, 이스라엘을 살리고 있어서, 세상 눈은 밝았지만, 영안은 한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대리자이고, 믿음의 조상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내려오는, 이런 믿음의 조상이었는데, 자신의 영안이 그 아버지를 넘어선다고 착각했습니다. 사람이 총리 정도가 되면 이렇게 됩니다. 이 세상 기준과 하나님 기준은 다른데, 총리 요셉의 한계입니다. 사랑 받고, 총명하고, 총리까지 된 요셉은 여기서 드디어 옳고 그름으로 이 사건을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므낫세가 장자 아니에요? 장자 우선 아닙니까? 집안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우리도 어렸을 때부터 장자가 최고고, 형님이 최고이고, 시댁에 가면 형님을 챙기는 동생들 때문에 아주 살 수 없는 며느리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유교 개념으로 형님이 아버지 대신입니다. 지금 요셉이, ‘장자가 아닙니까?’ 이러는 것은, 그 사람 똑똑한 사람 아닙니까? 그 사람은 학벌 좋지 않아요? 그 사람은 돈이 많지 않아요? 착하지 않습니까? 이런 말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 재밌는 것은, 장자 타령을, 장자가 축복 받아야 된다고 이렇게 부르짖었는데, 자기도 장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해 달라고 하면서 축복도 자기 혼자 받고, 자기 아들이 받아야 하는데, 아들 중에서도 맏아들이 받아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싸여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열한 형들의 아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자기가 형들을 살리고 용서했다고,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병든 야곱의 손을 들어서 억지로 축복을 받아내려고 합니다.
18절입니다. 원어에 보면, 요셉이 얼마나 급한지, ‘안 돼요! 그렇게는! 아버지!’ 너무 급해서 원어도 문장이 뒤죽박죽하면서 급하게 외쳤어요. 빨리 이 축복을 바꿀라고. 요셉은 앞날의 믿음을 보는 눈이 없습니다. 우리가 야곱과 에서의 축복권 다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삭은 야곱이 속여서 축복을 받아낸 후에도 그것이 잘못된 축복인 줄 알았지만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야곱은 의도적으로 동생을 축복했는데 왜 뒤집겠습니까. 에서는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빌 복이 하나 뿐이니이까. 나를 축복하소서. 그리하소서.’ 하면서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훨씬 교양이 있어서 병든 아버지 앞에서 무섭게 자기 감정을 조절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우리가 조용한 사람이 단호한 게 더 무서운 거 아시죠?) 무섭게 단단히 붙드는 행동입니다. 바위 같은 마음과 행동으로 강하게 명령조로 아버지에게 표현합니다. “반드시 돌이켜야 합니다, 아버지! 오른손을 우리 장자 므낫세 위에 얹으세요, 아버지!” 이게 맞는 표현이에요. 그렇게 무섭게 표현했어요.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의 어두운 눈을 이용해서 축복을 받아낸 것처럼 요셉도 아버지 눈이 어두우니, 빨리 바꾸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안수를 너무 쉽게 여겼습니다.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몽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배부르고 등 따뜻한 요셉에게 자기 아들의 앞으로의 앞 날은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길로 놓은 꿈은 해몽할 수 있었지만, 항상 자기 유익의 길로 가고자 하면, 자녀의 앞 날을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것 같아도 길고 짧은 것은 끝까지 가 봐야 압니다. 요셉이 옛날에는 십자가를 졌는데, 지금 배가 불러서 십자가에서 내려왔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요셉의 하나님으로 지금 되게 해달라고, 므낫세의 하나님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정도로 요셉은 자타가 공인하는 출중한 인물이었어요. 요셉은 이 집의 구원자입니다. 요셉은 돈이 많으니, 못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돈으로 해 주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드디어 야곱이 죽기 전에 요셉이 결정적 한계를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는 교양과 도덕으로는 선택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선택론을 이해하지 못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사를 이해하지 못 하고, 맏아들이 믿음이 좋아야 하고, .. 아니, 노력한 부자가 믿음이 좋은 거 아니냐고. 아니, 노력해서 학벌 좋으면 그게 믿음이 좋은 거 아니냐고. 이렇게 고정 관념에 딱 싸여있는 거예요. 결정적으로 믿음의 선택론을 마지막에 이해하지 못했어요. 왜냐면 이미 요셉은 부자이고 권세가 있기에 가진 자로서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것 보다는, 자기처럼 지금 가진 자로 육적인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거꾸로 어긋 맡겨서 한 축복을 ‘기뻐하지 않았다.’ 정도가 아니라, ‘아니, 이 양반이 노망이 들어서 눈이 안 보이나?’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악했다는 얘기에요. 요셉이 너무 불쾌하고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아버지한테도 자신이 총리인 줄 압니다. 사람이 부드럽다가도 자기 이해 타산에 걸리니 본성이 이렇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그 당사자인 므낫세는 장자의 축복을 갑자기 빼앗겼습니다. 그러면 므낫세가 난리를 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 아벨의 제사를 받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을 때, 가인은 너무나도 안색이 달라져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긴 에서도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장자권이 굉장한데, 그들은 뭔지 모르고 이렇게 장자권이 굉장한가, 이거는 영생의 축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네들도 모르면서..) 그런데 므낫세는 이것을 듣자마자 하나도 원망,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알았습니다, 아멘.” 으로 받아 들였는데, 여기서 인정하지 못 하는 사람이 이 믿음 좋은 아버지 요셉인 것이에요. 그래서 항상 믿음의 부모라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문제아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습니다.
므낫세는 열두 지파에 찬란하게 들어갔습니다. 이 때부터 400년이 지난 후, 출애굽 당시 민수기에서 보면, 1차 인구 조사에서 에브라임은 40,500명이고, 므낫세는 32,000명이었는데, 광야 생활 40년 지나고 나서 두 번째 인구 조사에서 에브라임은 32,500명으로 8,000명이 줄었어요. 그런데 므낫세는 20,000명이 늘어서 52,700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고, 약한 자를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므낫세가 이 기가 막힌 상황을 인정하고 있으니, 장자도 아닌, 아들도 없는 가장 불쌍한 이 슬로보앗의 딸들을 통해서 므낫세 지파를 20,000명이나 증가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집도 아들이 없어서 이 슬로보앗의 딸들을 아주 잘 외우고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가면 또 바뀌어 지지만, 항상 이렇게 약한 자를 들어 쓰시고, 겸손한 자를 쓰시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떻게 아버지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이 나라를 먹여 살리고, 당신들 먹여 살렸는데, 어떻게 내가 원하는 대로 축복을 안 해 줄 수가 있습니까?” 이러는 거예요. 선택론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아니, 목사님 왜 그 훌륭한 요셉을 끌어내리지 못 해서 저러시나.” 이래가지고 제가 이 설교할 때 얼마나 욕을 바가지로 먹고 여기까지 왔는지 몰라요. 요셉은 훌륭하신 분인데 왜 맨날 요셉을 욕하나. 요셉을 욕하는 게 아니구요, 이 성경에, 제가 한 절도 안 빠지고 읽어 가잖아요. 요셉 너무 열두 지파 중에 훌륭한 사람인데, 이제 잘 들어보세요. 그게 아니구요, 야곱조차 너무나 요셉이 훌륭하니까 분별이 되지 않는 이 믿음과 행위가 있는 거예요. 요셉의 행위가 너무 훌륭해서, 막판이 되기까지는 분별이 안 될 정도로 훌륭한데, 물론 열두 지파에 다 믿음의 조상으로 들어갑니다. 그래도 있잖아요, 이 열둘 중에서 예수님의 직계 조상을 가려 내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분별입니다. 근데 거기가 유단데, 야곱은 끝까지 요셉을 밀고 싶은 거예요. 유다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며느리하고 시아버지하고 동침을 했으니까 저노무 찌질한 놈. 근데 거기 믿음 있는 거 알아요. 근데 요셉이 너무 훌륭한 거예요. 우리도 다 요셉이 좋잖아요, 그죠? 우리도 끝까지 요셉하고 살고 싶어. 안 그래요? (뭔지 하나도 몰라요.) 우린 너무 이걸 많이 들어서 아시는데, 처음 오신 분은 이게 무거운 주젭니다. 어렵습니다. 그래도한 번 들어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드디어 야곱이, 요셉의 믿음과 성품의 마지막 분별을 합니다. 진짜 믿음이냐, 성품이냐. 이 분별을 합니다.
19절입니다. 야곱이,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이것이 오늘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말은, “니가 원하는 것처럼 나도 너를 다 축복하고 싶단다. 니가 그렇게 당하고도 형들을 용서하고, 먹여살리고, 애굽까지 초청했는데, 내가 어찌 니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지 않겠니. 그러나 내가 주고자 하는 것은 영생의 영적인 장자권이란다. 세상의 장자권이 아니야. 그런데 그 장자권은 잘난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보면 의외의 사람이 받아왔단다.” 맞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아닌 셋이 받았고, 맏아들, 잘난 아들 이스마엘이 아닌,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 이삭이 받았고, 힘센 에서보다는 사기꾼인 야곱이 받았습니다. 유다와 다말의 자식 중에서도 먼저 나온 세라보다 나중에 나온 베레스가 받았습니다. 너무나 훌륭한 형들보다 말째 아들인 다윗이 선택을 받았습니다. 먼저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참석하지 못 하고 절름발이, 소경, 가난한 자, 문둥이들이 오히려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야곱의 일생을 다시 보면, “요셉아, 내가 외삼촌 집에서 너희 엄마 얻기 위해서 14년 고생을 했다. 그래서 너희 엄마를 얻고 거기서 잘 살아보고자 했는데, 외삼촌이 쫓아내 가지고 떠날 수 밖에 없었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까 너희 엄마가 하나님이 그렇게도 싫어하시는 이방 신상인 드라빔을 훔쳐서 떠날 줄을 내가 어떻게 알았겠니. (근데 그 드라빔을 가진 자는 저주했잖아요, 야곱이. 죽어도 좋다고. 외삼촌한테 막 큰 소리를 치면서. 그러니까 자기가 결국 사랑하는 라헬은 저주한 꼴이 됐어요.) 정말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단다. 그래서 내가 벨엘로 돌아온다고 약속해서, 벧엘로 돌아와야 하는데, 정말 하도 하나님 믿는 것이 지겨워 가지고, 세겜에서 잘 살아보려고 눌러 앉았다가 누나 디나가 강간 당하지 않았니? 그리고 너무나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 않냐.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벧엘로 돌아가라고 명령을 해주셔서 내가 벧엘로 돌아왔다. 하나님이 아니다,그러시면 아닌 거야. 그런데 나는 꼭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야 그것을 알았단다. 처음부터 알지를 못 했어. 내가 너를 열두 아들 중에서도 얼마나 특별히 사랑했니. 그런데도 네가 열 일곱 살까지만 나랑 있었지, 그 다음부터 너는 내 인생에서 죽은 아들 아니었니? 그러니까 네 엄마 라헬도 내가 사랑했지만 내가 죽인 꼴이 되었고, 너도 그렇고, 내가 사랑하고 싶다고 사랑하고, 함께 있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더라. 내가 또 130살이 되었을 때, 이제는 가나안 땅에서 안정되게 살고 싶은데 어떻게 기근이 올 수가 있니. 그래도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총리가 되었다고 하니 또 어떻게 안 오겠니. 사람은 늙을 때 고향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데, 그것도 못 하고 여기 왔다. 그러니, 하나님이 가라 그래서 왔어. 이것처럼, 오른손을 들어 축복하고 싶은 것은 므낫세인데, 내가 오늘 오른손을 들어 큰 손자를 축복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아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하고 손을 어긋 맡긴 것이지. 성령께서 감동을 주셔서 이제는 내가 일을 당하지 않고도 알게 된 것이 있단다. 내가 내 맘대로 인생을 살아봤자 우리는 돌아갈 뿐이야. 내가 이것을, 그냥 너를 분별해 내는 것은 147세가 되어서야 내가 너를 분별해냈다. 니가 하도 훌륭해 가지고.” 이것이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손을 어긋 맡긴 야곱을 기뻐 아니하여, “아버지!” 하고 욕을 했더니,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요렇게 반응을 하신 거예요. 요셉보고 그렇게 좋아하다가 마지막에 천국 문 앞에서 요셉을 분별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빨리 알았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가라는 길을 가면 실수가 없습니다. 말씀 묵상하고 목장의 처방을 받아서 가면, 그것이 더디 가는 일 같아도 나중에 가보면 실수가 아닙니다. 아들이 대학에 떨어져도 나중에 가보면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다 합해도 우리 자녀들의 길을 우리는 알지 못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로 호칭을 하십니다. 이스라엘로 부를 만큼 야곱이 성숙해졌습니다. 야곱이 격이 있어졌습니다. 아직도 내가 믿는 것 같아도, 세상의 경험과 지식을 자기가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예수를 믿은 지 오래 되어도 아직 야곱입니다. 그런데 믿은 지 얼마 안 되었어도 나는 하나님의 인도 하심 으로만 산다. 이렇게 가는 사람은 이미 이스라엘입니다. 오늘 세례 받은 우리 최재호 성도가 여기 오래 된 어떤 사람보다도 신앙 고백이 확실했어요. 전 정말 이런 사람 보면 감동이 와요. 여기 오래 되었어도 신앙 고백이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너무 애통합니다. ‘야곱’의 뜻은 ‘사기꾼, 속이는 자, 도둑’이라는 뜻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셔도, 얼마나 야곱과 이스라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이스라엘로 자리 매김을 하면서 드디어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나를 이기시는, 결국은 이기실 것을 바라보면서 야곱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그 이스라엘이 되어서, 마지막에 그런 사랑하는 요셉을 정확하게 분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야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에브라임을 앞 세우며 축복했습니다. 자기 말대로 에브라임을 그대로 축복했고, 그 이후에 그리도 원하던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요셉에게 이어지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요셉의 마지막에 이 어이없는 태도로 인해서 ‘모든 걸 갖추고도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을까. 우리 요셉을 보면 그럴 것 같애. 그렇지만 그럴 수가 있을까. 이 2% 부족하게 생각했던 것이 과연 결정적인 것 이구나.’ 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짜 고난 없이 예수 믿는 건 거의 불가능 한 것 같아요. 근데 요셉이, 고난이 옛날에 있었지만, 이제 총리가 되고서도 잘 믿을까 했는데, 결국에 요셉이 너무나 좋은 사람인데 이 믿음의 말을 못 알아 듣습니다. 결정적으로 구속사를 깨닫지 못 합니다.
21절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그래도 마지막 사랑을 하면서 요셉이라는 이름 뜻 대로 세겜 땅 일부분을 더 주었어요. 그건 자기가 칼로 뺏은 것이래요. 이렇게 요셉에 대한 사랑이 마지막까지 절절합니다. 어쨌든 요셉의 아들들은 합쳐서 많은 인구를 가지게 되었어요. 후에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에브라임은 북쪽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합하면서 중요한 지파가 되어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에서 제일 쎈 아모리 족속의 멸망을(지금 일어나지도 않은 멸망을)완료형으로 표현한 것은, 가나안에 반드시 들어갈 것인데, 요셉보고 ‘네가 능력자니까 반드시 끌고 가야 한다.’ 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그 당시는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을 지금 모세가 기록해 놓았어요. 에브라임은 과연 그 막강한 지파대로 막강한 여호수아, 사무엘 같은 선지자를 먼저 쫙 배출합니다, 성경에. 근데 축복 받은 이 찌질하게 보이는 유다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어도 숨 죽이고 있다가 구약의 맨 마지막에 다윗 지파로 짠!하고 나옵니다. 그리고 신약에는 다윗에게서 예수님으로 이어지면서 짜자잔! 하고 마지막으로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항상 마지막까지 가봐야 됩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은 큰 지파가 되었지만 축복의 장자권은 가지지를 못 했습니다. 이 때, 이 요셉이 구속사를 깨닫지 못한 차이는 참 작아 보였지만, 절대적인 것이라서, 총리를 배출해 낸 지파답게 기득권을 가지고, 때마다 예수님이 오실 남 유다 지파를 괴롭히는 지파가 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남 유다로 갈라지면서 북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요셉 지파, 에브라임 지파. 그래서 제일 예수님이 오시는 남 유다,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 앗수르도 아니고, 바벨론도 아니고, 이 북 이스라엘 형제 나란데, 우리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직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제일 힘들게 하는 거잖아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그런 것으로 성경을 여러분은 전체를 지금 여행하고 계십니다. 성경 전체의 요약을 듣고 계신 거예요. 오늘 요셉을 마지막으로 분별해 내는,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요셉을 너무 너무 사랑하니까, 이렇게 제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 분별입니다. 여러분은 제발 야곱이 요셉을 분별해 낸 얘기가 이해되기를 축원합니다. 반드시 이해 되셔야만 합니다. 라헬이 약속의 땅에 조금만 더 왔으면 되는데, 못 온 것이 야곱은 너무나 슬픕니다. 다 온 것 같아도 아직도 더 가야 하는 조금이 있습니다. 특히 라헬처럼 아름답고, 요셉처럼 효자일 때는, 그냥 그 자체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렇게도 안타까운 야곱인데, 요셉은 부모에게 형제에게 극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예수님의 표상이니까, 조금 거기서 더 나아가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을 보여줍니다. 7이 완전수인데, 가장 사단의 수가 666이라고 하잖아요. 가장 근사치로 보이는 666은 7에 도달할 수가 없는 숫자인데, 그렇다고 그것이 사단이라는 것이 아니고, 너무 완벽한 행동이 있으면 정말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얘는 조금만 하면 믿을 것 같애. 성품도 좋고, 공부도 잘 하고, 모든 걸 잘 하니까.” 근데 그 ‘조금만’ 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는. 근데 그렇게 요셉이 될 것 같은 마음이 끝까지 야곱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 분별은 구원의 분별입니다. 구원의 분별은 믿음의 분별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에요. 오직 하나님의 선택은 누구를 차별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분별이 최고의 분별입니다. 그런데 행위로 따라갈 자가 없는 요셉을 마지막에 분별해 낸 것이야 말로 야곱은 과연 믿음의 조상입니다. 너무나 요셉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분별을 해주고 갔어요. ‘요셉아, 니가 최고다.’ 그러지 아니하고. ‘너는 유다 형님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 준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직분이 많아도 믿음 좋은 사람, 감옥에 갔다 와도 믿음 좋은 사람이 믿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 둘이 비교했을 때는, 열두 지파 중에서는 유다 형님이 최고다. 이것을 가르쳐 주고 49장의 그 예언을 분별을 하는 것입니다.
Q. 믿음인지 성품인지 분별하십니까? (여러분은 믿음인지 성품인지 자기를 자가적으로 진단해 보세요. 그것은 결국 외모로 차별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분별이 최고의 분별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그러니 배우자를 고르거나, 어디를 가나 이 구원 때문에 결혼을 해야 되고, 구원 때문에 직장을 택해야 되고, 구원 때문에. 내가 아픈 것도 구원 때문에. 모든 걸 해야 되는데. 결국은 지금 요셉이 자기 자식으로 국한이 됐어요. 자기 자식 축복 받겠다고. 마지막에 한 것입니다.
정말 요셉 같은 분의 큐티 나눔을 읽어 드리겠어요. 하나님은 왜 야곱과 같이 야비한 사기꾼을 선택하여 구속사의 영적 계보를 이어가게 하신 것일까. 주변의 교활한 사람 때문에, 이 약삭 빠른 사람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고, 심지어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다고 떠벌일 때마다, 나는 믿음에 대한 근본적 회의감에 빠져서 하나님의 선택이 이해 되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들 교회 와서 4년 동안 한결같이 듣고 있는 거북한 말씀. 남의 죄를 보지 말고, 네 죄만 보고 가라는 것입니다. ’죄’ 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나의 모습에서 야곱의 추한 모습을 하나씩 발견했고, 지금은 야곱보다 나을 것 없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알코올 중독과, 폭력적 주사와, 극심한 불화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1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별거를 했고, 그 전에는 말 할 수 없는 역기능 가정에서 살다가 (큰 아들인 저희 부부와 아버지가 11년 동안 같이 살다가) 2014년에 소천을 하셨어요. 아무 식구들도 부모님을 안 만나고 사는 거예요.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습니까. 췌장암 확진으로 2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항암을 포기하고 즉시 세례를 받았고, 죄를 인정하였고, 어머니를 만나 마지막 두 달 동안 따뜻한 정을 나누며 지난 50년 넘게 허송 세월을 보냈던 부부로서의 아쉬움과 후회의 시간을 달랬습니다. 동생도 아버지를 만나고 관계를 회복했으나, 누이는 아버지 소천하기 이틀 전에야 왔고, 매형은 들르지도 않았어요. 아버지의 소천은 우리 부부에게 구원의 확신을 더욱 확고하게 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후에 누나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아버지가 남기신 돈을 달라며 소송을 제기했고, 저는 세무 조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을 하며 왔다 갔다 한 것 같아요. 근데 아버지가 그야말로 조금 남기신 집은 다 팔아서 이미 치료비로 쓴지 오래 되었는데, (이 분이 변호사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걸 법대로 했는데, 그 집을 판지가 옛날인데 그게 상속에서 문제가.. 그것도 상속이라고. 없는 돈을 끌어내 가지고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오랫동안 해서 세금이 부과될 예정인데 국세청에 신고를 했기 때문에 6개월 동안 15년 동안의 모든 통장을 다 내놓고 조사를 받은 거예요. 상속 관계를 정리하니까 이제 200만원 남아있는 아버지의 통장을 정리를 해야 하는데, 어머니도 모시고 있는데 어머니 때도 소송을 하겠다고 하니까, 어머니는, 당신이 소천해도 누이에게 알라지 말라고 당부를 하십니다. 저는 20년간 어머니 생활비를 드려왔고, 찾아 뵙고, 지켜왔고, 또 이제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 살 수가 없으니, 아버지는 집에 모시고,어머니는 따로 모시고, 이렇게 왔는데, 이 분 완전 요셉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는 지금 처한 문제에 대해 분별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답을 찾고 싶습니다. 근데 나도 이삭처럼 인본적 결정과 행동을 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의 계보를 잇는 결정과 선택을 만들어 가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적용으로, 누이와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 분별력과 지혜를 주실 때까지 구체적으로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하겠습니다. 이 분은 진짜 요셉 같아요. 너무나 힘든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서 정말 개천에서 용이 나셨어요. 이 변호사의 길을 가고 있는데, 또 자기가 그렇게 됐으니까 힘든 부모지만 다 이렇게 동생도 전부 다 지내려고 하고, 힘든 부모지만 믿음으로 모셨고, 그런데 이제 마지막에 기가 막힌, 요셉처럼 생색날 일이 생긴 거예요. 그러나 기가 막히겠지만, 믿음이 없는 누이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그 분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당대 믿음으로 가는 이 길에서(이 분이 목자십니다.) 이런 험악한 일을 당하지 않으면 정말 믿음인지 성품인지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이 험악한 일을 허락 하셨는데, 왜 그 누이가 그럴까를 생각해보면서,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고, 부모 사랑도 받지 못했는데, 오빠가 잘됐어요. 잘 되니까 오빠가 엄마 아빠도 다 독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거예요. 이 분은 그게 의무인데. 그러니까 이 분에게, 본인이 그 누이에게는 존재 자체가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을 알라고 했어요. 그것은 이유가 통하질 않는 거예요.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이렇게 된 와중에 한 사람 잘 된 사람이 있으니까. 믿음 없는 누이에게는 바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것은 성품으로 참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구속사적으로 이 인생을 해석하고 구원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그럼 여러분들 가운데서는 그럴 거예요. “그게 뭔데요? 구속사로 참는 게 뭔데요?” 이러고 지금 분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것 같아요. 근데 내가 유다처럼, 받은 구원이 있다면 참고 인내하고 용서하는 거죠. 근데 그 사랑이 없으면 옳고 그름으로 나올 수 밖에 없고 이런 집이라면 정말 죽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모셨는데 나라에 고소를 해서 직업까지 다 이렇게 한다면.. 그러나 그 정도로 되지 않았으면 집사님은 우리들 교회 붙어있지도 않을 거고, 이 죄에 대한 이야기가 거부감으로 들리지 않았냐고. 그러니까 누이한테 너무 감사하셔야 된다고. 집사님은 존재 자체가 가해자라고. 제가 이렇게 설명을 잘 해드리니 마지막으로 분별을 잘 해서 너무 기쁘고 감사하고 내가 이 얘기도 좀 써야 되겠다고 했더니 마음대로 쓰시라고 그랬어요. 누이가 수고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분별을 위해서 우리는 마지막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축복해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분별해야 합니다. 내 한계 상황에서 인생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도 안다고. 아무리 기뻐하지 아니해도 나도 안다고. 설명을 해주고 정말 이 분별의 결론이 구원이라는 것. 사람을 분별하는 이유는 구원 때문에. 그래서 정말 확실해서 하세요. 구원 때문에 천국 가고, 구원 때문에 우리가 사니까 이것을 분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알아야 되고, 아버지 눈물이 고인 곳에 우리 눈물이 있어야 되는.. 이런 믿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제목
이선애
1. 항암치료 안 하도록
2. 엄마가 영접 기도 한대로 예수 믿고 교회 나오도록
이은혜
1. 구원 때문에 분별하며 선택하며 갈 수 있도록
2. 언약궤를 중심으로 예배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3. 작은 오빠와 아빠에게 구원의 말을 잘 전할 수 있도록
4. 엄마의 온전한 사명 감당을 위해
5. 지체들의 아픔을 체휼하며100% 응답 받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6. 사업장의 축복과 만남의 축복을 위해
강혜림
1. 4월 말까지 예비 심사에 낼 논문 다 쓰고 정리해야 되는데 여전한 방식으로 지혜롭게 준비하도록
2. 진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가도록
3. 아빠 생신 모임, 남매 여행에 하나님 동행해 주시고 화평케 하는 자로서 말씀에 잘 서 있기를
4. 신결혼
박세현
1. 가족구원(아빠, 엄마, 세라, 동규)-동생 마음이 열려서 함께 예배하고 말씀 들리기를
2. 여전한 방식으로 생활 예배 잘 드릴 수 있도록
3. 매사에 분별 잘 하고 모든 관계 속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도록
4. 유치부 아이들의 영육강건
5. 약을 복용하고 있음에도 심장 상태가 나빠져서 (빈맥, 결대맥) 약을 바꾸었는데 복용하고 심장 컨디션이 좋아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