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너희>
구속사와 세속사는 차별이다. 차이가 차별이다. 세속적이라는 것은 나와 친구하고 싶은 아이들은 싫고 내가 친구하고 싶은 아이들은 그들이 싫어하는 것이라고 한다. 양쪽에서 괴리감을 느끼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외롭기만 하였다. 엄마가 안 돌봐주니 더 외로웠다. 지난 시간에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야 하고 디모데나 삼류도시 같은 골로새 같은 사람들을 차별없이 전해야하며 헬라와 히브리 문화를 이해하되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련지어야 한다고 하였다.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공동체의 소명을 이루는 우리와 너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1. 기도와 감사가 있는 우리와 너희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노라 하였다. 살아갈수록 주 안에서 지체가 옆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성도님들의 기도 요청이 많이 올라오며 많은 기도 부탁을 받는다. 기도 응답이 오면 목사님께 오셔서 감사한다고 인사를 한다. 바울은 오늘 우리가 기도했다고 한다. 찔리는 죄 이야기를 하면 내가 죄인이 아니고 우리가 죄인이라고 한다. 죄 이야기 하면 우리고 기도 해줬다는 칭찬에는 내가 했다고 한다. 기도 응답이 안 되는 지체에게도 우리 교회가 기도 안 해서 그렇다고 슬쩍 넘긴다. 죄를 언급할 때는 우리 보다는 나로 적용할 때가 옳을 때가 많고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는 내가 기도했다기 보다는 우리로 적용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우리가 기도 했다고 하기 위해서 함께 기도할 우리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 서로에게 감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목장에 나가야 한다.
사사기를 보면 입다에게는 잡류 친구가 있었다. 기드온에게는 300명 정예병이 있었다. 하지만 나실인 삼손은 친구가 없었다. 삼손은 혼자 잘나서 혼자 논다. 집안도 좋고 여호와의 사자들하고만 어울리니 너무나 위대해서 혼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목장에 안 나가는 분들은 모든 것을 갖추어서 혹은 죄가 너무 많아서 혼자 노는 것이다. 자기가 칭찬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 생각해야 하는데 모두가 칭찬을 하고 있기에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공동체가 없어서 삼손이 무너졌다.
학교와 교회에서 괴리감을 느끼면서 중학교 때 교회 반주를 시작하면서 모두가 박수를 쳐 주니 혼자 다니고 지체가 없었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녀도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 소명도 없었고 같이 말씀을 나눔을 했던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부터 좋아하는 모든 것을 갖춘 친구가 유학을 가였다. 언니가 결혼하면서 18k 금 반지를 끼고 다녔다. 친구에게 정표로 주었다. 그 당시에 굉장히 비싸고 의미가 있었다. 부자 친구는 지금까지 기억도 하고 있지 않으며 남편도 없다고 하니 무시가 되던지 더욱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해석이 안 되었을 것이다. 개척 첫 설교로 골로새서 설교를 했는데 진정한 공동체의 의미를 가지기 원했기 때문이다. 이런 공동체를 다니다가 불신결혼이라도 했다고 해도 생각나는 친구들이 많았을 것이다. 실력은 좋은 친구들이 많이 가지는 것이다. 좋은 친구는 믿음의 친구들이다.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친구를 넘어서는 기도해줄 지체가 있어야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적용) 성도 여러분은 기도해 줄 우리가 있고 너희가 있는가? 나랑 친구하고 싶어하는, 내가 친구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이 뜻대로 잘 되는가?
무엇 때문에 감사했는가? 너희들이 감옥에 와서 사식 넣어주고 면회 와서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다. 사실 골로새 교회는 두 번의 지진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나눔이 계속적으로 있었다. 골로새 교인의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듣고 감사한 것이다. 진정한 지체는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보다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다. 감옥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감사한 너희가 있어서 감사한 것이다.
적용) 무엇때문에 감사하는가? 내가 감사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나에게 감사해줄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믿음, 선교 소식이 많지만 잘 듣지 않는다. 교회 홈페이지 안에 있는 선교 소식에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원한다. 핍박과 압박의 알 수 없는 일이 네팔의 지진처럼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내 식구, 모임, 교회,가정에 대한 감사만 생각하고 산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전도도 하지 않은 교회의 소식에 감사하였다. 사람은 자기가 기도하고 궁금하면 소식이 들리게 되어 있다. 내 가정, 교회뿐만 아니라 나라, 민족, 세계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관심이고 그것이 내 가족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란다.
그래서 가정 중수가 되어야 세계 선교도 나가는 것이다. 기초가 잘 서 있어야 한다. 아무 자본이 들지 않는 말씀 묵상이 펼쳐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놀라운 열매를 맺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려면 어떤 소식이 들리는 자리에 가야 한다. 그래서 듣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마음이 없다면 들려지기가 어렵다.
적용) 나는 무슨 소식이 들리는 자리에 가고 싶은가? 또 무엇을 들으려는 마음이 필요한지 생각해보라
2. 말씀을 같이 보고 듣는 우리와 너희가 되어야 한다
같은 말씀을 보면서 상담을 하면 잘 된다. 말씀을 같이 보면서 공감이 되기 때문에 나눔이 활발한 것이다.
입다가 이번주 큐티 본문이다. 기생 아들로 태어나 형제들에게 쫓겨나서 돕 땅에 가서 잡류들과 어울렸다. 얼마든지 삐뚫어질 수 있었지만 그곳에서 구속사로 성경을 꽤 뚫게 되었다. 암몬과의 전쟁이 나니까 쫓아냈던 형제들이 실력이 있던 입다를 찾아서 구속사로 설득하여 전쟁을 이기는 모습을 읽었다.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입다의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첩의 아들도 서러운데 하룻 밤 쾌락의 대상인 기생의 소생이었다고 성경은 출발한다. 얼마나 그런 입장에서 나눌 일이 많은지 모른다.
이렇게 같이 들으니 입다도 자기 수치를 내어 놓고 선교사님, 초원지기도 내어놓으니 우리도 아픔을 내어 놓기가 쉬운 것이다. 그래서 같은 말씀, 구속사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리와 너희가 되는 비결 같다. ‘하늘에 쌓아둔’이라는 것은 현재 분사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이 땅에서 계속적으로 삶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것은 기본이고 필수적이다. 무엇을 들었는가 하면 참된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들었기에 소망이 생겼다. 바울만 들은 것이 아니라 골로새 교인도 들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한번 들은 말씀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지만 간증 한번을 통하여 큐티를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가 모이는 자리가 중요하고 무엇을 듣느냐가 중요하다. 성경말씀 읽기만 해도 능력인데 성령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집중해서 들으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듣게 되었고 목사님도 같이 들었다. 우리의 믿음도 소망이라는 것이 확실히 기초가 되는 것이다. 복음이라는 확실한 기초 위에 쌓아놓은 진짜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우리들교회가 복음이 진짜인지 여자 목사이기에 의심을 한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며 승전보이다. 기쁜 소식을 듣고 소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소망의 반대는 죽은 소망이 아니라 헛된 소망이다. 근데 헛된 소망을 가진다. 이런 헛된 소망은 끊임없이 채워지지 않는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였다. 베드로 전서 말씀도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말한다.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들리지 못하면 산 소망을 가질 수 없다. 우리가 암에 걸려서 슬픈 기도 제목이라는 것 보다는 영생의 소망이 있기에 기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것이 바로 하늘에 쌓아둔 소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미 암이라는 원수를 복음으로 정복하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본다. 이것이 승전보이다.
이혼, 부도 등 아픔 속에서 소망을 주신 분들이 너무나 많다. 지금 암인데도 회개를 하고 영생의 소망이 너무나 감사하셔서 목사님께 절까지 하신 분도 계신다. 이렇게 말씀을 같이 들어야 서로 서로 우리가 되고 너희가 되어서 소망 없는 세상에서 서로에게 소망이 되어서 지체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도가 지나치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교회의 성자을 가로 막는 지체가 되기도 한다. 처음 예수를 믿게 되면 주위의 믿지 않는 친구가 대부분이지만 교회를 다닐 수록 불신 친구가 자동적으로 멀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목장, 주일, 수요 예배 다니면서 굳건한 교제의 영역을 구축한다. 이렇게 사람을 만나서 친하게 되다보면 다른 사람을 사겨야 하는 필요를 느끼지 못 한다. 교회끼리 뭉쳐서 전도를 하지 않는다. 새 사람은 귀찮고 낯설기까지 하는 것이다. 형제가 혐업하여 우리들만의 나눔을 즐긴다. 이와 같은 태도는 우리만 선택 받은 선민 의식으로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이방인과의 사이에서 높은 담을 쌓았던 유대인과 같은 모습이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우리들끼리 놀다가는 교회는 부흥하지 못 한다. 지나친 친교 병은 교회 성장을 막는다고 한다. 환란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은 복음을 듣고 안식이 되어야 하지만 지금 안주하고 있는 분들은 하나님이 지시한 땅이 어딘지를 생각해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란다. 꼭 선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지도자나 목자가 적용을 해야 한다. 사람에게 애정을 가지고 말씀을 열심히 들어야 진정한 지체인 우리와 너희가 생긴다.
톨스토이의 인생론도 있지만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빠져서 우물에 빠져서 가지가 하나 남아서 그것을 붙들었는데 끝에 꿀이 있어 그것을 먹으려고 하고 옆에서 쥐는 갉아먹고 있는데 그 꿀을 먹으러 가는 것이다. 앞, 뒤가 꽉 막힌 상황에서도 눈 앞의 꿀에 연연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삼손이 여자에 취해 있으니까 사자를 통하여 경고하였는데 죽은 사자의 꿀을 먹고 부모에게까지 주는 모습을 본다. 부모는 꿀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든 좋은, 맛난, 멋있는 것만 먹고 입으면 되지 출처는 상관이 없는 모습이 부모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 인생에 십자가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죽은 소망의 달콤함에 속아서 사망의 나락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복음이 들리는 것이 한 없는 축복이다. 순종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곳이 우리와 너희의 지체이다.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의 말씀을 들었다. 최고의 편한 관계는 잘 들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도 잘 듣는다고 한다. 믿음은 위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서로 잘 듣고 서로 순종하니, 우리와 너희의 공동체인 우리들공동체가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적용) 여러분은 말씀을 잘 보고 듣는다고 생각하는가? 같은 시각, 공간에 있어도 전혀 안 들릴 수 있다.
3. 은혜를 깨닫는 우리와 너희가 되어야 한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메 너희가 듣고’라고 하였다. 이 복음이 주어이다. 내가 복음에게 간 것이 아니라 복음이 내게 이른 것이다. 예수님이 너는 내 것이다 하고 걸어오신 것이다. 너는 내 것이다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내 것이니까 너도 다 차지할 수있다는 뜻이다. 내가 못 갈 이유가 무엇이 그리 많은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걸어오셔서 복음이 이르렀는데 내가 시간이 없어서 못 가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태평은 가치관의 변화다. 간증할 수 없는 인생은 해결이 되어도 해결이 되나 마나이다.
복음이 아무리 이르러도 듣는 것은 내가 해야 한다. 들어야 은혜를 깨달을 수 있다. 이르는 것과 듣는 것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교회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달아야 한다. 은혜로 깨달아야 실천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은혜를 알게 되면 사람에 대한 시각이 달라진다. 바울 사도의 관심이 온 천하인것 처럼 우리도 어떤 사건이 생기면 온 천하만 부르짖었으면 좋겠다. 내 사건이 온 천하에 복음이 전해질 사건이구나.라고 해야 한다.
적용) 남편이 승진하고 아이의 성적이 오르고 물질이 생기는 것이 감사한가? 나와 내 가족의 사건으로 내 사건에서도 온 천하에 복음이 전해질 것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가?
4.서로 무엇이든 고할 수 있는 우리와 너희가 되어야 한다
에바브라는 바울에게 배운 사람이다. 그가 골로새 교회를 세우는 엄청난 사역을 하였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말씀을 배웠으면 다른 누군가를 가르쳐야 한다. 나보다 하나 더 아는 사람에게 배우고 하나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다. 내게 엄청난 능력이 있어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체험한 하나님, 그 하나님을 아는 만큼 전하면 된다. 그러면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칭해주신다. 그러나 골로새에 홀로 떨어져서 가르치기만 하면 교만해질 수 도 있고 공허할 수 있다. 사역할 이야기를 고할 우리가 있어야 한다.
예전에는 고했다, 알린 자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너희와 우리가 나온다. 에바브라는 잘 배우고 잘 가르치고 잘 알리고 자기의 자리를 잘 아는 사람 같다. 내가 전도하고 사역하는데 들어주는 사람이 바울 사도 였다면 얼마나 영광이겠는가? 이런 이야기는 한 성령이 아니면 고할 수도 알릴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이렇게 지체인 우리와 너희가 중요하기에 왜 우리들 교회를 이름을 지었는지 골로새서를 택해서 이름 설명을 하였다. 완전히 말씀이 유래가 된 것이다. 지체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사역을 나눌 지체를 허락해주시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그런 지체를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라고 칭하였다. 에바브라는 늘 바울에게 고했으니 대단한 사람에게 사역 보고를 하였다. 이건 정말 특권 아니겠는가. 나는 누군가에게 사역에 대한 보고를 할지 생각해보라. 그런 지체를 달라고 기도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목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남편에게 순종하더라도 그 일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누군가의 위로를 받아야 한다. 순종하는 것도 사역의 한 부분이다. 또 이 사역을 들어주는 것, 알리는 것, 나누는 것도 사역이다. 그래서 서로 잘 들어주고 알리고 고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적용) 이렇게 알리고 나눌 수 있는 지체가 있는가? 꼭 바울 같은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누는 것 그 자체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우리와 너희로 좋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