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골1: 1-2]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이 예상되면 그 일을 안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 그러나 교회의 사역은 역설적입니다. 고통이 예상된다고 회피하면 교회는 그 자체로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교회는 병이 들어서 성장을 멈춘 식물과 같아집니다. 사역에서 섬세함이란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대하여 마음의 결을 맞추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먹는 다는 뜻입니다. 이 사역은 예배 공동체인 교회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도 수가 많아진 지금의 우리들 교회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사역의 섬세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심을 잃지 않았는가 생각하며 개척초기의 골로세서를 펴보았습니다. 그 때가 지금보다 더 뜨겁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감사하게도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굳이 찾는다면 사역의 지경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는 것이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뿐 아니라 교회에 공동체적 사명을 주시고 이에 응답하는지 아니면 내 가족과 우리 교회만 생각하고 안주하며 우리끼리만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지켜보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기까지만 이라고 생각했고 사무엘이 끝나며 난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다며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본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집으로 가는 길을 발견한 것 때문이 아니고 그 곳에서 줄곧 부르시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부르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길을 알기에 내가 쉬고 싶다고 쉬고 여기까지라고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부르심처럼 생애 마지막까지 구원의 복음이 미처 전해지지 못한 그 곳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들 교회를 부르신 소명에 응답하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골로세서는 에베소서와 같이 교회에 대하여 다룬 쌍둥이 서신입니다. 골로세 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는 아닙니다. 가정을 중심으로 조그맣게 모인 교회였는데 금욕주의, 천사숭배 등 우상 주의적 요소와 거짓가르침, 영지 주의등 이단사상 등이 거기에 침투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잘 전해지지 않았던 초대기독교는 이단이 많았기에 전체 서신에 이단을 주의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종교적 혼합주의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개척자 에바브라는 이 사실을 옥중에 갇혀있는 바울에게 보고했을 정도로 바울은 감옥에서도 서신을 쓰며 다른 사람을 위하는 소명을 받은 자였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수많은 사설이 난무하지만 오직 그리스도께만 완전함과 탁월하심이 있습니다. 고난이 해결되어서, 아니면 고난이 너무 오래 유지되어 신앙이 어려운 분이 있습니까? 그런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부르신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완전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야 하고 교회 밖 사람들에게도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골로세서 1장 1절과 2절을 살펴보며 나와 우리들 교회에 주신 공동체적 소명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1. 소명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한 개인에 대한 의도와 기대를 말합니다. 그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소명입니다. 소명은 부르심으로 번역됩니다. 성경은 소명이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그 메시지의 중심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부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르신다는 것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만들거나 존재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것에 창조적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것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셨을 때 이름을 붙이셨고 그로인해 자기 백성으로 재정하시고 창조하셨습니다. 소명이란 지금 우리의 모습과 관련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장차 우리가 될 모습과도 관련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러 그 분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처럼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실 때에는 개별적인 소명 뿐 아니라 공동체적 소명을 주십니다. 우리들 교회에는 말씀묵상으로 가정을 살리는 이런 소명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사사기 큐티에서 드보라가 사사가 되어 통치하는 시절 바락이 2인자를 자청하며 드보라를 의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나안 장군 시스라를 죽인 것은 야엘이었습니다. 믿음장에 보니 드보라, 야엘도 아닌 바락이 올라있습니다. 왜 일까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자가 리더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태평성대를 맞으며 이스라엘 남자들은 약해졌습니다. 20년의 학대를 견디지 못할 때 드보라를 세우셨습니다. 군대 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자 바락이 드보라에게 순종했기에 믿음장에 올라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를 보아도 전쟁을 지나 태평시대가 지나니 남자들은 약해지고 음란해지며 이 때문에 가정이 깨지고 여자들의 통곡소리가 진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시대가 이렇기에 쓰임을 받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에서도 여성 지도자는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여성의 역할은 남편과 자녀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일차적으로 보입니다. 여성 리더십을 인정하기 어렵기에 바락이 올라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여성이 힘든데 그 때는 얼마나 어려웠을까 생각합니다. 바락이 세워주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였습니다. 큐티를 하며 이런 것이 깨달아지니 제 주제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늘 제 갈 길을 알려주십니다. 이 것이 우리들 교회의 소명인 것 같습니다. 시대적으로 저를 잠깐 쓰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해서는 안 되고 뜻이면 어떤 일도 해야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이 있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 받은 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름 부으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가 힘들다면 소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소명은 구원과 동의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2. 소명에는 동역 자가 있습니다.
진정한 소명에는 동역 자를 허락하십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 자가 되기에는 출신이 따르지 못했습니다. 일차전도 여행 때 그리스도인이 되어 한 결 같이 성장하며 바울의 오른 팔이 됩니다. 아들로 시작 된 디모데가 형제로 부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가르칠 때 이런 믿음의 발전이 있습니다. 늘 내 힘으로 하면 생색밖에 날 것이 없습니다. 피아노를 오랜 시간 가르쳤지만 그 많은 학생 중에 스승의 날 전화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전적으로 제 삶의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받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 성경을 보며 가르칠 때 돈을 받지 않아도 기쁨이 넘치는 경험을 하며 이 것이 소명이 아닌 가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재능과 소명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은사라고도 하는데 은사는 십자가를 통과하는 고통을 겪어보아야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잘 먹고 잘 사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쳐놓고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서 행복을 발견하고자 하면 그 것은 오산입니다. 우리 자체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 또한 불완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수준까지 끌어내시어 동역자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내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셔서 나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방의 가치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불러주셨고 더 나아가 예수의 사도로 형제와 동역자로 인정해주십니다. 바울은 유력한 집안의 대단한 스펙을 가졌는데 내세울 것 없는 디모데와 갑니다. 모든 것을 떠나서 같은 것에 울고 웃고 나눌 수 있는 지체가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갖추고 서로 기뻐하고 힘들어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사역을 통해 알았습니다.
적용- 소명의 자리에 함께할 동역 자가 있습니까? 있다면 누구입니까? 이렇게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으로 소명을 받고 디모데 같은 동역 자가 생기면 지경이 넓어지고 힘을 얻어서 2절 말씀처럼 골로세 같은 교회로 나아가게 됩니다.
3. 소명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내 힘든 환경을 잊어버리고 싶고 현실을 직면하기 싫어 이단으로 빠집니다. 씀씀이를 줄이고 열심히 사는 이런 것을 싫어합니다. 이 세상에서 회복되는 것을 바라며 이단으로 빠집니다. 진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람은 절대로 이단에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 욕심 때문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명이 있다면 디모데같은 사람, 골로세 같은 교회를 찾아가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갈 것이 뭐있습니까? 당장 내 자녀부터 차별합니다. 이게 죄 인줄도 모르고 자녀를 차별하며 교육시킵니다.
적용- 내가 찾아가야할 영육간의 힘든 소명의 대상 골로세 교회는 누구입니까?
4. 소명에는 은혜와 평강이 따릅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를 바울이 잘 쓰는데 은혜는 카리스라는 헬라어로 헬라식 인사이고, 평강은 샬롬이라는 히브리식 인사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소수민족 이였지만 선민의식이 강했기에 히브리어만 썼습니다. 이 서신이 쓰였을 당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팍스로마나 시대로 성경도 헬라어로 쓰였습니다. 영적으로 최고의 교만한 사람과 육적으로 최고의 교만한 사람이 불이 붙은 이 시대에 바울 사도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이 두 문화가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의 서신에는 항상 두 언어의 인사가 쓰였습니다. 교회에서 기존의 성도들이 새로운 성도들을 정답만 얘기하고 지적하며 상처를 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오고 있습니다. 좋은 환경에 있는 성도들과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두 문화를 맞추어야 합니다. 비 본질은 포기하고 포용하며 전해야 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인정해야 합니다. 본질적이 아닌 것은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가르치고 전도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지혜롭게 포용할 줄 아는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가르치며 본질 적인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제사를 지내거나 우상을 섬기는 것은 절대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적용- 적용 때문에 비 본질을 포기하십니까? 비 본질 때문에 본질을 포기하십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다들 자기 가치관과 생각을 최고로 여깁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분별을 잘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여렸을 때부터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양육 받는 것이 최고의 양육입니다. 이런 양육을 통해 한 사람이 소명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용-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 시켜서 하고 있습니까?
기도제목
권욱진(80)
1. 부르심의 아웃리치 기도와 말씀으로 잘 준비하도록.
2. 음란을 잘 참고 갈 수 있도록.
3. 연봉협상 잘 마무리 되도록.
김지환(79)
1. 일대일 양육 새힘을 얻어 잘 할 수 있도록.
2. 어머니와 지혜롭게 화해하도록.
3. 하고자 하는 일 잘 구해지도록.
황태훈(79)
1. 체중 감소.
2. 담배 줄이도록.
황재훈(81)
1. 일대일 양육 잘 받도록.
2.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자리 잘 지킬 수 있도록.
이승현(83)
1. 양육교사훈련 끝까지 잘 마치도록.
2. 매장 오픈 준비 가운데 내 할 일 잘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