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말>
우리 가족 왜 이래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주인공 아버지가 3개월의 시한부를 선고 받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자녀들은 일생 두부 팔아서 공부를 시키고 마련한 집을 미리 증여해달라고 지분을 주장한다. 주인공 아버지가 속이 상해서 불효 소송을 청구한다. 등록금, 생활비 등을 청구하였다. 이것을 보면서 아버지에게 집 하나라도 있으면 돌아가시고 나서 원수가 되지 않는 집이 없다고 한다. 큰 아들의 장모는 자네 편은 처가 밖에 없다고 부추긴다. 우리의 마지막에 이렇게 부모에게 돈 내놓으라고 아비규환의 집이 안 되리라고 보장하겠는가? 드라마는 주인공 아버지를 이 시대의 아버지 상으로 휴머니즘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을 위해서 평생 살았지만 더 중요한 것을 놓쳤기에 죽음을 앞에 놓고도 집집마다 우리 가족 왜 이래 가 주제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남겨야 할 최고의 유언은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다. 유아세례를 할 때에 늘 기도를 한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먼저 예배하고 사랑하도록 부부가 서로 사랑하라’ 고 부탁의 기도를 한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라’가 최고의 유언인가? 다윗의 전 생애를 통해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올 때마다 전능하신 삼위의 하나님의 역사로 도우심을 받았다. 그 하나님께서 ‘너희도 도우실 것이기에 삼위의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사랑하라’ 고 마지막 막을 남기고 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의 내용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을 말한다.
1. 성자 하나님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다윗이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의 사역을 위주로 삼위 하나님을 보여 주고 있다. 22장이 구원의 노래였다면 23장은 두번째 시인 메시야, 대망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사무엘 상 2장의 한나의 노래와 구조가 비슷하다. 오늘 의로운 통치와 사악한 통치를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 말은 일생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다윗의 일생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 마지막 말씀은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라고 열왕기상 2장에서 유언을 하였지만 자신도 완전히 살지는 못 했다. 그러나 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야 살인 후에 회개를 하였고 나단 선지자로부터 주어진 다윗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지켜주셨다. 압살롬의, 세바의 반란에도 지켜주셨다. 이 큰 두 반역은 다윗 왕조의 큰 위기였다. 다윗 왕조도 무너질 수 있는 위기가 들었을 것이다. 다윗은 다윗 왕조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로서, 유언으로서 찬양을 한 것이다. 여기서 다윗은 삼위의 하나님의 역할을 주지시키면서 후손에게 성도로서 살아야 될 지침을 주고 있다.
1절에 나오는 이세의 아들은 스스로를 낮추는 말이다. 사울이 다윗을 비난할 때, 세바가 다윗을 배반할 때 저것이 이세의 아들이라고 비하의 목적으로 쓰이던 말이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을 극도로 낮추면서 그들이 한 말로 자신을 소개하며 마지막 말을 한다. 왕으로서 유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지금까지 비천한 존재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이라고 쓰기도 송구스럽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야곱은 속이는 자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긴 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야곱처럼 여자 좋아하고 속이는 자에 불과하지만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 받은 것을 야곱의 하나님에게 받았다고 표현을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관용어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무엘보다 하나님에 의해 기름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비천한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킨 하나님께서 미천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변화 시켰다는 것이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이 다윗에게 나타나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점처럼 오신 낮아짐처럼 평범한 촌부의 여덟아들로 가장 별 볼일 없는 막내 아들로 태어난 다윗이 노래 잘 하는 자가 되어서 지금 유언을 하고 있다. 이렇게 미천한 이새의 아들이었지만 높이 세워지고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총애를 받은 것이다. 사무엘 상에서 보면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자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했다고 한다. 그 날에 이 땅에 관계와 질서 속에 오신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우리는 감추어진 성부 하나님의 경륜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눈 만 뜨면 보이는 세계를 보고 절망을 한다. 천억 곱하기 천억 개의 별을 보고 그 찬란한 은하계의 예를 보고 점 하나에 불과한 창백하고 푸르스름한 점 하나에 불과한 그런 지구 같은 나를 보면 세상에서 저절로 주눅이 드는 것이다. 이 숨겨진 하나님의 뜻이 세상과 역사 속에 나타나실 때에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혹은 관계와 질서 속에서 같은 하나님의 뜻으로 성자 하나님께서 디자인 하시면서 나타내신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공감하기 위해서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지기 아니하시고’ 이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높고 높은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인간을 공감하신 것이 성자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체성인 것이다. 남편, 자녀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점처럼 오신 예수님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예수님처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라는 것이다. 공감이라는 책을 쓴 김연옥 교수는 공감을 한다는 것은 네 말이 옳다고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말하는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공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침묵을 해도 진실 되어지게 힘들었겠다, 화났겠다, 너무 어려웠겠다 그냥 이렇게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개인이 처한 상황이 환경에 따라서 다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철저하게 상대방 입장에 서는 것이 어렵다. 부모가 자녀 입장에 못 선다. 자녀가 부모 입장에 못 선다. 우리는 모두가 문제가 많지만 모두 부모님에게 사랑을 받지 못 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부모들은 다들 너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입장에 서기가 진짜 당해보지 않으면 그 입장에 서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상대와 공감하려면 모든 판단을 버려야 하고 내 입장을 버려야 하고 시비를 가리려고 하면 안 된다. 그냥 말 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수 많은 이야기를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것이다. 이럴 때에 성자의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죽어주신 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점 처럼 왔지하면서 금새 인정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자 하나님께서 나에게 들어오신 가장 확실한 정체성이다. 나의 잘남과 못남은 주님께서 선하신 뜻 데로 쓰시는 것이다. 내 삶의 모든 것은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때문에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성자 예수님께서 내 속에 들어오시는 것은 내 죄를 죽어주신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메시아적 정체성이다.
여자에게 마음을 얻는 방법 1) 칭찬 2) 공감 3) 지속적 관리와 연락인데 이것을 목장에서 적용해보라.
우리 각자의 인생은 성자 하나님께서 디자인 하신 독특한 작품이다. 그러므로 나로 인해 나타난 성자 하나님의 디자인은 무조건 감사하고 하나님의 나를 위한 계획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인생을 열 다섯 광야에서 수 많은 고난을 겪게 하셨지만, 그로 인해 후대에까지 남긴 시퍈은 인류를 구원하는 시가 되었다. 3000년동안 다윗의 시편만큼 고난 당한 자를 위로하는 시가 어디 있겠는가?
적용) 여러분의 고난이 성자 하나님의 디자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가? 여러분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라고 하고 싶은가? 잘 듣고 순종할거 같은가?
2.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과 통치로 도와주신다
1)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도와주신다
비천한 나 이지만 가장 효과적으로 도와주는 분이 진리의 성령님이라는 것이다. 성령이 나를 통하여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세지를 그대로 대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성경은 1500년에 걸쳐서 전혀 다른 환경, 각양 각색의 경험과 직장을 가진 40명의 저자가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하나님의 주제와 체계를 이루고 있다. 상호 모순이 없다. 다른 시대를 살았는데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원 저자가 성령이시고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성령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스스로를 연약한 인간의 수준만큼 낮추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대로 하면 살아날 인간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성경은 믿음의 분량만큼 읽혀진다. 그래서 연약한 인간의 수준만큼 낮추셨다.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시는 것으루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이 약속에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불순종하면 저주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약속을 진리의 성령님이 장래의 일을 효과적으로 알려주신다. 내가 예수 믿었다고 이 세상이 착해지는가? 믿는 자여도 속고 속이는 자들은 똑같은 악한 자들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예수를 믿어도 불확실할 수 밖에 없다. 디모데후서 3:14에 보면 ‘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거할 것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니까 큐티모임이나 우리들교회는 확실히 속이는 일이 드믈다. 진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쳐가시기 떄문에 세상 모임이라면 문제가 많았을 것이다.
성령이 스승이 되어서 가르쳐 주시지만 끊임없이 배우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디모데후서3:16~17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의 기능이 무언가 하면 위로한다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16절에 보면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적용함, 의로 교육하는 이 4가지 책망의 역할이 나온다.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것이라고 한다. 성경을 어릴 때부터 알고 읽었지만 문제가 하나님의 감동이 없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해가 되지 않으니 성경을 바라보는 것이 세상 스펙과 명예와 재물이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 받기가 쉽겠는가? 교회 와도 잘 된다는 소리 하고 위로만 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성경에는 위로가 없다. 큐티를 통해서 끊임없는 내 욕심을 찾아내고 말씀이 내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너무나 못 깨달으니 고난을 허락하는 것이다. 이 때 말씀이 징계의 이유를 교훈하고 책망해주니 온전하게 되어서 능력을 갖추게 된다. 2절 말씀처럼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이 내 혀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적용) 여러분은 성경을 읽음으로 위로 받기만을 좋아하는가? 책망 받기 좋아하는가?
2) 성령의 하나님께서는 통치로 도와주신다
하나님 나라는 영토, 백성, 주권이 3요소인데 거기에 통치 개념이 있다. 그래서 창세기에 총리 요셉이 등장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통치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구약의 대표적인 통치의 개념은 공평과 정의이다. 공평과 정의를 완전히 구현한 왕은 없다. 이사야 9:7에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라고 했다. 인간의 왕은 공평과 정의를 행할 수 없지만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신다고 한다. 그러니 다윗이 원한 것은 완전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것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두운 시대에 돋는 해의 아침 빛이 되어서 떠오르는 광명한 태양이시다. 모두 소망에 관한 표현이다. 영원한 행복을 가져주지는 못 했다. 두 반란을 경험하고 이렇게 시를 쓰고도 말년에 인구조사를 하여서 큰 고통을 당해야 했다. 공의와 정사로 다스리고 싶었지만 다윗을 하지 못 했다.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을 대망한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소망 가운데 완전케 하실 통치자이다. 어떤 나라의 지도자이도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지도자는 없다.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지도자가 도래하면 완전한 다스림으로 인해 소망하는 것을 이루지 못 할 것이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길은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전도서 1:9~10에는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라고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들은 하늘의 신령한 것들이기 때문에 항상 새롭고 아름답다. 새 언약, 새 하늘, 새 땡, 새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이 전에는 없었던 완전한 새 것이며 결코 낡아짐이나 헤어짐이 없는 영원한 새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성경을 보는 것이 지루한 적이 없다. 이 땅에 모든 공부는 지루한 것 같다.
인생은 지나 보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또 실패하게 된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가 임해야 한다. 그럴려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하고 늘 새로우신 주님의 성실과 인자를 경험하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통치를 말씀으로 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성령님이 도와주셔야만 가능하다.
적용) 나의 열심은 하나님의 열심입니까 내 열심입니까? 여러분은 인생이 항상 새롭운가? 지루한가?
3.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모든 구원은 영원한 다윗 언약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다윗을 버리지 않고 그와 동행하시므로 그의 집안과 나라를 책임져 주실 것을 분명히 약속하셨다. 다윗 언약은 다윗의 실수에 의해서 파기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지속될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만사에 구비하지 못 한다. 견고하지도 못 한다. 나의 구원과 소원을 이룰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런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연약한 자식은 눈을 뗼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나만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데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정말 거기에 안식이 있지 않겠는가?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 사도는 1차 전도 여행 후에 너무나 훌륭한 인격자인 바나바와 나중에 마가복음을 쓴 똑똑한 일꾼인 마가와 헤어지고 고른 사람이 디모데이다. 디모데는 그 당시에 너무 유대인들이 무시했던 아버지가 헬라인이고 어머니의 믿음이 내려온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쳤다. 나이도 어리고 유약하고 두려움이 많고 병도 있었다. 한 줄 글도 남기지 못 했다.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헌정한 것이다. 이렇게 누구는 글을 히브리서 처럼 아볼로가 썼지만 아볼로서라고 이름을 안 붙여줬는데 바울에게 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그를 택해서 선교 여행을 떠난 것을 본다. 바울은 그가 연약하지만 보고 싶다고 하였다. 눈물이 있고 거짓 없는 믿음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것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바울도 일을 할 때에 긴장관계, 대등관계 보다는 아무 것도 몰라서 바울을 진짜 사랑한 것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꼭 그런 사람을 사랑하신다. 항상 무엇 때문에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항상 약한 자를 들어 쓰시는 주님이시다. 다윗 언약은 그런 맥락에서 주어졌다. 주님은 무조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달려드는 그런 자를 사랑하신다. 진짜 얼마나 사랑했는지 감옥에 갖쳐서 디모데야 빨리 오라고 외투와 성경을 가져 오라고 디모데에게 유언을 하는 것을 보면서 부족해도 약속을 주면서 키워가시는 성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다. 그러나 당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처럼 천천히 그러나 항상 일관되게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궁극적인 구원과 소원을 하나님의 시간에 이루실 것을 의미한다. 메시아 대망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의 만사의 모든 것을 구비해주신다.
사울과의 수 없는 시간을 쫓기며 비참한 도망을 하였다. 그래도 넉넉히 극복하도록 도와주셨다.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성부 하나님의 감추어진 경륜을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나를 위해서 지켜가신다는 것이다. 주님을 따른다면 아무도 고난을 피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악이 들 끓기 때문이다. 그래서 핍박을 당할 때 주님은 찾아 오셔서 구원해주신다. 이 세상을 이기려면 성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게 하시려고 성령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것이 다윗의 마지막 말이 되겠다.
그러나 삼위의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자는 불살라진다는 것이다. 사악한 자는 원어로 벨리알의 아들이라고 하늘 두려운 줄 모르는 사단을 뜻한다. 사단이 다른 곳에 있는게 아니다. 유언을 해도 듣지 아니하고 성령의 감동도 없고 말씀도 들리지 아니하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건이 오면 말씀이 안 들리기 때문에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것을 불 살라질 가시나무 같다고 하였다. 다윗의 똑같은 아들이라도 왕위로 나아가는 솔로몬 같은 아들이 있고 반역을 하여 심판을 당하는 다윗의 아들 중에서도 있는 것이다. 심판 받는 아들의 특징 압살롬과 아도니에의 특징을 보면 너무나 외모가 출중하고 성품도 좋고 머리도 좋고 관계도 좋아 백성의 마음까지 훔쳤다고 한다. 이렇게 최고를 갖추었는데 하나님이 왜 필요하겠는가? 우리 가운데 사단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못 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아니고 잘 나고 모든 것을 갖춘 사람들이다.
사단은 그래서 뿔 달린 모습이 아닌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온다고 한다.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교만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성부 하나님의 언약이 나하고는 상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적용) 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믿는가? 함부로 살면 안 되는 인생을 인식하는가?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악한 자를 분별한 적이 있는가?
우리가 날마다 결혼과 사업에 광명한 천사로 오니까 다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삼위의 하나님께서는 쓰러져 가는 그 누구라도 붙잡으신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중요한 것이 많이 있다. 스펙이나 재물, 건강도 중요하다. 그러나 천국에 가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삼위의 하나님의 결론이 무엇이겠는가? 얼마나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을 알아서 얼마나 이 땅에서 사랑했는지를 강조하실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의 나병 환자들을 위한 애양원을 위한 기도 중 일부이다.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고 하나 인간의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보다는 애양원을 그러나 더 사랑치 않게 하소서. 주께로 부터 나온 나의 사랑이었고 주를 위하여 사랑하게 되는 것인데 내 어찌 주보다 사랑케 되오리까. 그러나 나의 일신과 부모와 처자보다는 애양원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되 주를 사랑하는 그 다음은 이 애양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무슨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인지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마음을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으로 인하여 충으로 사랑케 하소서. 주여 이 애양원을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손양원 목사님도 힘이 들었다고 생각 되어진다. 마지막 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기도가 저의 마지막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윗의 마지막 삼위 하나님 중에 성자 하나님의 사역으로 도우셨다고 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알 수 없다. 오히려 남이 불러주는 것이 나이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는 남이 불러준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하나님께서 불러주신다.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라고 부르신다. 그 것이 우리의 본질이고 가치라는 것을 우리가 알았으면 한다. 날마다 간증하는 분들은 어렵고 힘들고 깨지고 그런데 눈물로 간증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사랑이고 그 연약한 성도를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
<기도제목>
신천섭
1. 신결혼
2. 말씀해석에 힘쓰게
3. 살 안빠지게
김경배
1. 신교제 말씀안에서 인도받길...
2. 곧 개학인데 새학년 새학생들에게 적응하고 섬기길..
3. 건강위해 살 빠지게...
4. 엄마가 구원의 확신을 갖길…
홍주형
1. 취업 주님의 이끄심으로
2. 생활 예배 잘 드리도록
이주홍
1. 여자친구와 온전히 잘만나기를
2. 항상 감사하기
3. 온전한 신앙 가꾸기
한덕찬
1. 아버지 건강을 위하여
2. 여자친구랑 잘 지내도록
3. 매일 잠 자기전에 기도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