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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08 목장보고서 (김지용 00)- 참석자ABCD[본토에서 떠났더라]열왕기하 25 : 18~21예배 마치면 보통 집으로 간다. 예배당 밖을 나서는데 그대로 끌려가야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오늘 본문이 그런 느낌이다. 마지막까지 성 안에 있던 사람들마저 사로잡혀 나간다. 한 나라가 통째로 땅에서 떠난다. 성경은 이것을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다고 한다. 이건 유다만의 이야기가 아닌, 예배가 끝나면 세상으로 갈 우리도 나그네와 같다고 한다. 본토에서 떠난 나그네는 어떨까?1. 사로잡혔습니다.(18) 우리가 지난번 본문에서 금으로 만든 것, 은으로 만든 것 모두를 시위대장이 가져갔다. 그 손으로 이제는 사람이 잡혀간다. 맨 앞에는 대제사장이다. 그리고 부제사장, 성전 문지기까지 맨 위부터 아래까지 잡혀나간다. 요시야가 성을 깨끗하게 할 때 성전 지킨 사람들, 이 세 직분이 한 세대가 지나니까 성전 밖으로 끌려나간다. 이 대제사장 스라야는 요시야 때 대제사장 힐기야의 손자이다. 율법책을 발견했다던 그 사람의 손자이다. 잊혔던 말씀을 찾은 사람의 핏줄인데 사로잡힌 것이다. 하나님의 집을 맡은 사람도 심판 앞에서는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심판할 때 자기 집부터 다루신다. (19) 성전 다음은 성 중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군대, 왕궁, 행정, 백성까지 어느한 곳도 빠지지 않고 나라를 떠받치던 사람들이 총 60명이 잡혀간다. 이 사람들은 남이 아니다. 바로 자신이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사로잡힌 것은 결과이다. 죄에 사로잡힌 값이다. 이 죄의 사로잡힘은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도 사로잡혔다고 한다. 마음은 하나님 쪽으로 가고 싶지만 육체의 죄가 끌고 간다. 이런 싸움은 성도들간에 흔하다. 바벨론이 안와도 우리는 이미 사로잡혀있다. 날마다 끊게 해달라고 해도 밤마다 키는 화면이 있고, 터지는 혈기가 있고, 내려놓겠다고하고 붙잡는 중독이 있다. 그게 다 나를 사로잡고 있다. 사로잡혔다한게 내 힘으로는 못빠져나온다는 것이다. 결심하고 또 결심해도 거기에 가있다. 이 대제사장 이야기가 목사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목장에선 목자, 학교에선 교사, 일터에선 담당자, 가정에선 부모가 해당된다. 우리를 돌아보자. 우리는 모두 지인과 친구, 가족들에게 이 정도는 다 한다면서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을까? 목원에게는 용서하라고 하지만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있지는 않을까? 이 사로잡힌 명단에 내가 있고,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적용: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남에게 하라고 하면서 나는 안하고 있는 것은? 최근에 내 죄를 보게 해준 사람은? 그 때 나는 너나 잘해라고 했나요 아니면 당신이 옳다고 했나요?2.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20) 또 사로잡는다. 르블라에 사로잡힌 처음 사람은 여호아하스였다. 안해도 될 싸움을 애굽과 결탁하다가 잡혀갔다. 그리고 그 동생이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이다. 첫번째 르블라를 보고도 돌이키지 않는 유다이다. 일만, 시험만, 형편만 나아지면 아직 시간이 있는 줄 알고 미루다가 세번째 르블라가 온다. (21) 우리는 대제사장도 문지기도, 백성 60명도 다 죽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심문이라도 받았는데 이 사람들은 재판도 없이 그냥 다 쳐죽였다. 히브리서에는 한번의 기회가 있다고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성경은 우리 몸을 죽을 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자신, 체면을 못놓아서 영원히 가질 것처럼 움켜쥐고 산다. 사로잡힌 죄인은 죽을 수 밖에 없다. 독안에 든 쥐 신세이다. 하지만 죽음은 사고가 아닌 말씀이다.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차지할 땅에서 뽑힐 것이라고 신명기에 말했다. 그리고 또 열왕기는 17장에서 북이스라엘이 망하는 장면에서 유다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전부 미리미리 말씀하셨지만 유다가 듣지 않았다. 이 장면 앞에서 잔인하다고 느낄 수 있다. 본문을 읽다보면 우리는 멈칫한다. 르블라에서 죽은 사람이 나보다 더 큰 죄인이라 죽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죽은 사람에 대해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게 주신 말씀으로 기억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고 하신 것이다. 내가 겪은 일이 죄의 결과인지 따지지 말고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기억하고 보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자복을 해야한다. 내 죄를 내 입으로 인정해야한다. 130년쯤 된 뒤 나온 제사장이 에스라이다. 그 에스라가 백성의 죄를 듣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에스라 9장에서 조상부터 자신 세대의 죄가 크니 죄악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았다고 한다. 열왕기의 전반적인 내용이다. 에스라는 자기들이 망해서 포로로 갔다가 다시 오는데, 이걸 조상이나 바벨론 탓을 하지 않고 우리의 죄라고 한다. 그 죄 안에 자기를 넣어서 우리 죄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셨다는 고백까지 한다. 하나님이 잔인해보일 수 있어도, 조상이 칼에 죽은 에스라는 하나님이 잔인하신게 아니라 오히려 가벼웠다고 고백한다. 내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몰랐다며 자복하는 것이 회개이다. 진영논리와 지역감정을 해결할 수 조차 없이 심각한 시대이다. 지나간 것에 대해서 이렇게 용서하지 못하면 안된다. 일만 터지면 우리는 늘 탓을 한다. 저 사람만 아니었으면, 남탓, 부모탓, 자식탓을 하지만 말씀 앞에만 서면 항상 나 때문임을 알고 엎드려 고백해야한다. 내 탓임을 알고 죽어야 마땅한 죄인은 나고 하나님이 옳다고 고백하고,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뿐임을 고백해야한다. 로마서 7장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한다. 사도 바울도, 에스라도 왜 이렇게 회개를 할까? 성경을 다 읽어가면 왜 이렇게 회개할 수 밖에 없나 알게해주는 구절이 나온다. 많은 존경받을만한 사람 중 예레미야는 어떤 죄를 지고 죽었는지, 에스라가 왜 회개했는지 고민해보면 좋다. 성경을 보며 항상 내 죄를 보고 가야한다. 예레미야 38장을 보면 예고를 미리한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함락되는 날까지 갇혀있었다고 한다. 시드기야는 이전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숨기지 말고 말해달라고 했다. 이 장면은 길게 나온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살고 아니하면 죽고 불사름을 당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말해달란 시드기야는 민족주의에 젖어 조롱도 두렵고 결사항전도 하자고 한다. 무시를 하고 무시를 당해도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앞날이 안보인다. 이 땅의 지도자들이 그렇다. 인본주의적인 지도자, 좋은 지도자 같다. 예레미야도 편들어주는 것 같다. 고관들에게 이 말 하지 말라고까지 한다. 고관들이 와서 협박을 해도 시드기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라는대로 해서 탄로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구원받을 기회를 놓친 것과도 같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고관들에게 이야기를 해야했다. 하지만 계속 시드기야가 죽음을 가지고 협박하니 40여년간 하지 않았던 거짓증언을 하고, 이 때 망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는 증거이다. 그렇기에 죄의 증인이 되어 나누면서 가는게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예레미야는 평생 잘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마지막 실수는 너무도 치명적이다. 그리고 성전이 그 말을 하자마자 불탔다. 겸손한 환경만 있다고 하는데 예레미야는 천국가는 날까지 회개를 했을 것 같다. 망하게 될 때 히스기야, 예레미야, 요시야가 다 실수를 크게 한다. 그런데 바벨론의 식민지로 간 결과에도 두 왕과 선지자를 매국노라고 할까? 행위로 천국가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성군인 것은 오직 예수만 믿고 갔는데도 우리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성군으로 불리냐면 자기들의 실책을 얼마나 했는지 써놓았다. 하나님은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회개하고 자복하는 것은 자손 대대로 가장 큰 유산이 될 것이다. 이게 회개의 고백이다. 예레미야가 회개를 하지 않았다면 이것을 알리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시드기야 같은 사람도 회개했기에 눈 뽑히고 편안히 갔다는 것을 봤다. 행위 때문에 죄를 욕하는 것이 세속사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가 십자가 지는 적용이다. 적용: 내가 아직 저 사람 때문이라고 하고 있는 일은? 시드기야같이 회유와 협박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3. 그러나 영원한 기업을 얻었습니다.(21) 본토에서 떠났다고 한다. 나라의 끝을 적은 판결문이다. 본토라는 뜻이 아담이 돌아갈 흙이란 말이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던 일이 되풀이된 것이다. 징계는 징계대로 임했다. 그러나 징계가 마지막 말씀이 아니다. 역대상 6장을 보면 아사랴는 스라야를 낳고, 스라야가 여호사닥을 낳았다고 한다. 스라야는 르블라에서 죽었지만 그 집은 끊이지 않았다. 끌고간 것은 느부갓네살이지만 옮기신 것은 하나님이다. 사로잡혀 끌려가고 있는 것 같은 환경에도 그 길이 우리 집에 여호사닥도 간다는 것, 여호와의 씨조차 가져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임을 봐야한다. 물론 그 뒤 제사장들도 다 죽는다. 다른 제사장들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냐고 외치듯, 히브리서 9장에서 르블라에서 나를 끝내 죽게 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예수님을 세우셨다. 예수님은 자기의 피로 영혼의 숙제를 이루사 피로 값을 치루셨다. 스라야는 심판받고 죽었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죽어 마땅한 나를 위해 죽으셨다. 바울은 저 외침 뒤에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리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한다. 예수 안에서 정죄함을 벗는다. 예레미야가 이게 아니면 어떻게 죄책감을 이겨낼까? 요시야가 안해도 될 전쟁을 해서 유다가 잡혀가고, 치명적인 실수를 히스기야와 예레미야도 했다. 이게 매국노같은 일이지만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해석해야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고 지켜나갈 것이기에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오는 사건의 목적은 멸망이 아닌 구원이다. 영원한 기업의 약속이다. 유다에게는 그게 땅이었지만 그걸 떠난다. 명단 맨 앞에 있던 제사장은 땅 대신 하나님 자체가 기업이라고 했다. 그래서 제사장 집안인 예레미야는 땅이 다 떠나가도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라고 고백한다. 건강이든, 일이든, 사람이든, 실연이든 그걸 잃었다고 기억까지 잃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놓을 수 있다. 이것만은 못놓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기업이면 놓을 수 있다. 빼앗길 수 있는 땅이 아닌 하나님을 영원히 이루는 기업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이다. 내 약속은 흔들리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미 죽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한 기업을 얻었다. 얻어서 받을 때까지 가는 길에 소망이 희미해지는 날이 오기도 한다. 이런 소망이 없는 날에, 내가 기도할 힘이 없는 그 밤에도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고 가시는 것이다. 힘든 일이 끊이지 않으면 버리셨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간구하기를 멈추지 않으신다. 우리는 죄를 들고 하나님께 힘 입어 나아가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얻게 하신 분이 지키신다. 그래서 기업은 빼앗기지 않는다. 소망이 희미해졌다고해서 나를 간구하심도 약해진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한다. 본토에서 떠난 우리에게 베드로는 왕같은 제사장, 나그네라고 한다. 제사장은 남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는 자이다. 그러니 나그네의 길은 함께 걷는 길이다. 이제 우리가 힘든 지체 옆에 서는 것이다. 지금 생각나는 그 사람, 그 지체 옆에 함께 간구하는 것이다. 그 땅에서 떠나도 그 지체와 함께, 공동체와 함께 하기를 간구한다. 하나님과 친하게 되면 우러나오는 중보를 하게 되고, 간절한 기도를 하게되고, 이타적인 기도를 하게 된다. 인간적으로 가족을 위하려고하고, 이끌어내려고하면 영원토록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하고 말을 섞게 되고 묵상하면 카리스마가 들어가게 되면 남편이 큰 소리쳐도 계속 해서 의견을 묻고자한다. 우리가 요만큼도 양보를 못한다. 양보하는 것처럼 섬기다가 그만큼 생색 쌓이는데, 환경이 그래서 이타적으로 굴 수 있게 수고하는 것이다. 목표가 주님이 되어야한다. 우리가 잘한 것이 없는데도 속량받을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처럼 살아야한다. 행위구원이 아니다. 요시야, 히스기야, 예레미야가 매국노가 아닌 것은 회개하고 갔기 때문이다. 회개는 인간 최고의 감정이다. 회개로 이어진다. 130년 후에 에스라가 나오고, 여호사닷이 나오듯 본토가 사라져서 떠나도 우리는 영원한 기업을 얻게 되는 만인 제사장 시대의 제사장인줄 믿는다.적용: 건강, 일, 사람 등을 잃고 나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싶은 것은? 그 일 앞에서 내가 보고있는 것은? 제사장인 내가 이번 주 곁에서 기도해줄 한 사람은? - 한주간 어떻게 살았는지A: 병이 양성나옴. 기도 열심히 하고 있음. 브라질에서 온 외국인 친구와 교회에서 시간을 많이 보냄. 간만에 외국인친구 생겨서 기분이 좋음. B: 국시 얼마 안남음. 한주간 친구들과 놀러도 가고 잘 지냄. C: 시험 겨우겨우 패스함. D: 똑같이 공부함. 차라리 빨리 끝났으면 좋겠음. - 기도제목A: 병에 걸린게 해석이 잘 안되는데,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고 일주일을 또 살아낼 수 있도록. 그리고 괜히 체력이 더 떨어지는 것 같은데 체력 지켜주시길. 신약 개발될 수 있도록.B: 토익 점수 제발 잘 나올 수 있도록, 아버지랑 어머니 건강 지켜주실 수 있도록. 신교제 신결혼. C: 이번주에 과제 마감하는게 많은데, 100%는 아니더라도 성적에 문제 없게끔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이번 한주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D: 수능공부 마지막까지 열심히 하고, 수능 끝나고 하나님을 먼저 찾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