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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을 가루로2026년 07월 05일 주일 열왕기하 23:4-14김양재 담임목사님지난주 월드컵 32강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니 한 사람에게 비난이 쏟아진다. 많은 사람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성이 이기고 이기는 것이라고 한다. 지면 못 견딘다. 그래서 이혼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 같다. 우리가 화가 나면 누군가를 가루로 만들고 싶어진다. 가정과 회사에서 믿는 우리도 죄와 죄인을 구별하지, 분별하지 못하고 "저걸 그냥 확 그냥!" 하는 게 주제가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정말 가루로 만드는 사람이 나온다. 요시아가 헐고, 태우고, 빻아서 뿌려버린다. 그런데 그가 가루로 만든 건 사람이 아니라 우상이다. 지난 본문에서 입으로 세운 그 언약이 오늘 본문에서 손의 행동으로 적용된 것이다. 말씀으로 회개한 사람은 이처럼 잘못한 남이 아니라 내 안의 우상을 부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상을 가루로 만들 수 있을까?1. 꺼내 불사릅니다.말씀을 자기가 듣고, 들려주고 회개한 자들이 모이면, 저절로 개혁이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를 통해서 계속 말씀이 들려지게 하는 것이 절대적이다. 교회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하면 사회가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니 성전이 더럽혀지는 것은 우리의 타락을 가져오는 지름길이다. 개인 구원이 사회 구원이기 때문에 개인 구원을 위해서 성전 청결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니 언약을 세운 요시아가 먼저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서 대제사장 힐기야부터 문지기까지 성전 섬기는 사람을 총동원 했다. 회개는 혼자 골방에서 끝내는 게 아니고 공동체가 함께 움직이는 일이다. 이들에게 우상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꺼내라고 명한다. 우상숭배의 그릇들이 이방 신전도, 산당도 아니고 여호와의 성전 안에 있었단 말이다. 할아버지 므낫세가 채워놓은 것이다. 50년이 지나도록 하나님 섬기듯 우상 섬기는 게 자연스러워져서 이제는 이상한 줄도 모른 채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릇들을 꺼내 기드론 밭에서 불사른다. 재로 만든다. 우상의 도구를 기드론에서 가루로 만드는 것이다. 다윗이 압살롬 때문에 울면서 건넜던 기드론의 밭이다. 예루살렘 성안에 재를 남겨두는 것조차 부정하기 때문에 우상숭배의 본거지인 총본부 베델에 그 잿가루를 보냈다. 북이스라엘이 열심히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다가 망한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요시아는 그들 망했지만 한 민족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경고하는 것이다. 우상을 재로 만들어 죽은 자들의 자리로 보낸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니까 생명을 준다던 우상이 사실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내가 우상처럼 떠받든 것이 다 죽음이라는 뜻이다. 요시아는 그릇만 꺼낸 게 아니고 물건을 넘어 사람까지 간다. 여기 제사장은 가나안의 우상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유다의 왕들이 대대로 자리를 주고 월급을 주며 키워 거짓 제사장들을 세워서 우상을 섬기게 했다. 이들을 요시아가 폐한 것이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중단하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요시아 왕의 요구를 이제 끝까지 거부했을 것이다. 우상 제사로 먹고살던 제사장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으니 반발이 엄청났을 것이다. 그러나 매우 단호하게 시행되었다. 얄짤없이 요시아가 폐했다. 근데 성경은 그 반발을 기록하지 않았다. 반발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요시아 언약 공동체가 너무나 대단해서 그 반발을 잠재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요시아의 믿음이 대단하고 권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말씀으로 회개하고 언약을 세운 이 공동체가 받쳐 주었기 때문에 전무후무한 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요시아의 개혁은 더 깊이 들어간다. 우상 중에 대표는 아세라 상이다. 근데 이것을 므낫세가 성전 안에 세웠다. 근데 이걸 손자 요시아가 꺼내서 태우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무덤에 뿌린 것이다. 다윗이 눈물로 걸어간 그 장소에 평민의 묘지가 있어서 가루를 그 위에 뿌린 것은 부정한 시체와 관련해서 우상의 저주스러움과 멸망을 보이고자 함이었다. 이런 우상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존재하지 말아야 될 것을 상징했다. 그래서 기드론은 다윗이 맨발로 걸어가고, 우상을 제거하기 위한 평민의 묘지가 있고, 그리고 그것은 가장 거룩한 예루살렘 경계선에 있는 것이다. 구속사는 좋은 역할, 나쁜 역할이 없다. 그냥 이땅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는 기드론이 모든 우상의 제물을 받아내는 묘지가 되었다. 이 땅에서는 주어진 역할이 최고의 역할이고, 그것이 낮은 자리에서 바로 예수 믿게 하는 역할인 것이다. 어제의 좋은 환경에서 오늘은 나를 손가락질해도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기에 이 기드론의 다양한 역할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내가 예수 믿는가 아닌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아세라가 끝이 아니다. 남창의 집이 여호와의 성전 가운데 있었다. 여인들이 아세라를 위해 휘장을 짜던 곳인데 거기 남창도 살았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와 음란은 하나라는 것이다. 우상숭배 자체가 영적인 간음이다. 신랑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라가는 것이니 반드시 육적인 음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은 해도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다. 주님을 만나게 되면 당을 떠나 낙태법은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념이 하나님 자리에 가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념이 성력화가 되면 독재로 이어지는 것이다. 예를들어 북한을 생각해보면, 김일성이 하는 일에 대해 토를 달 수 없는 것이다. 가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내가 깨는 사람이 되면 안된다. 이혼은 하면 안되는 것이다. 요시아 개혁의 1단계는 성전에서 우상을 꺼내 불사르는 것이다. 성전은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자리다. 거룩이고, 팔복이다. 근데 바알과 아세라와 일월성신에게 제사한다는 건 이 땅에서 성공하고 번영하고 힘 있기를 비나이다 하는 것이다. 세상 행복이고 기복이다. 성전 안에 우상단지가 있다는 건 거룩의 자리에 세상 행복이 놓인 것이다. 이게 옛날 유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이야기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하신다. 우리 공동체가 성전이고 우리 각 사람이 성령의 전이다. 우리는 우상숭배 안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이것이 없이는 못 산다고 하는 것, 그게 다 우상이다. 우리 마음이 우상 공장이다. 우상은 만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스스로 만든 우상에 깔려 죽어가는 게 인생이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이 버리지 않고 찾아오셨다.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회개케 하시고 구원의 언약을 맺으셨다. 그래서 예수 믿은 순간부터 천국 갈 때까지 성도의 삶은 종교 개혁이다. 그 첫 단추가 우상을 마음에서 꺼내 불태우는 것이다. 우상은 안에 숨겨두면 절대 안 죽는다. 죄는 공동체 안에서 오픈할 때 힘을 잃는다. 내 우상을 내 입으로 꺼내놓는 순간 우상은 이미 타기 시작한다. 불사르는 것은 다시는 쓰지 못하게 없애는 것이다. 우상은 재활용하는 게 아니다. 반쯤 태운 우상은 반드시 다시 살아난다. 완전히 끊어내야 한다. 근데 우리에게는 이렇게 태울 불이 없다. 갈멜산에서 바알 제사장 450명이 빌고 빌어도 불이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야 한 사람이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물은 물론 나무와 돌과 흙까지 태우셨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불이 필요하다. 성령의 불이 임하셔서 우리 마음속 우상을 태워주시길 기도해야 한다.적용) 너무 가지고 싶어 달아오르는 건 무엇입니까? 아직 꺼내 오픈하지 못하는 내 안의 욕심은 무엇입니까? 이번 주 목장에서 오픈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불로 태워 주시길 간구하겠습니까? 구원의 역할은 좋은 역할, 나쁜 역할이 없습니다. 지금 무슨 역할입니까? 2. 더럽게 합니다.개혁이 성전을 나와 온 땅으로 흘러간다. 게바는 유다의 북쪽 끝, 브엘세바는 남쪽 끝이다. 삶의 길목까지 산당이 다 지금 서 있었다는 것이다. 산당은 높은 곳에 차린 내 방식의 예배이다. 여호와를 섬긴다면서 성전이 아니라 내가 높은 자리에서 내가 편한 방식으로 드리는 예배가 산당 예배이다. 아사도 여호사밧도 좋은 왕들이었는데 성경은 꼬리표처럼 기록한다.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였더라." 산당을 한번 세워놓으면은 없애기가 힘들다. 요시아의 증조할아버지 히스기야가 마침내 여러 산당을 제거했다고 나왔는데 아들 므낫세가 금세 도로 세웠다. 없애도 다시 살아나는 거, 그게 산당이다. 온라인 예배가 편하다보니 갖은 이유를 대며 현장 예배를 오지 않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것을 못 버린다. 요시아는 제거만 하지 않는다. 다시는 예배처럼 못 쓰게 봉인한다. 산과 터는 태워 없앨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자리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는 거기서 아무도 예배를 못 드리게 만드는 것이다. 요시아의 개혁은 이렇게 구체적이다. 산당 제사장들에 대해서 조치를 내린다. 산당 제사장들은 죽이지 않고 먹고살게는 해준다. 다만, 다시는 제단에 못 올라가게 한다. 그러나 그들도 다시 양육받아야 했기 때문에 이 첨가물이 없는 무교병을 먹게 해서 다시 원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생계 유지 수단을 보호하여 주는 아량을 베푼다. 자녀 우상이 굉장했다. 지금까지 우상숭배의 끝판왕, 바로 자녀를 바치는 것이다. 그런 끔찍한 일이 저질러진 곳이 도벳이다. 우상숭배자들은 거기서 자기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했다. 얼마나 끔찍했으면 이 골짜기 이름 '게힌놈'이 신약의 '게헨나', 즉 지옥이라는 말이 됐다. 자녀 우상은 정말 지옥인 것 같다. 처음에는 우상이 복을 준다더니 결국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 자녀까지 내놓으라고 한다. 우상을 삼키는 것이다. 산당은 내가 높이 쌓아 올린 자리다. 성공, 승진, 사람들의 인정, 내 머리에 씌운 왕관 같은 것들이더. 도벳에 체면과 성공의 제단에 자녀를 올려놓는 것이다. 내가 높이는 그 자리를 부정하다고 선언해야 한다. 다 갖춘 것 같아도, 너무 오르고 싶어 보여도 그곳이 하나님 떠난 자리임을 인정하고 선언해야 하는 것이다. 산당은 높아지려고 하니까 생겼다. 성공으로, 인정으로, 자식으로 높아지려고 한 층 한 층 지금 쌓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산당을 더럽힌다는 건 결국 나를 낮추는 것이다. 우상을 가루로 만들려면, 산당을 다시 못 쓰게 하려면 내가 가루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앞에서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니" 고백해야 한다. 그래서 욥이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한다. 내가 가루일 뿐임을 인정해야 내 우상도, 산당도 가루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가루일 뿐임을 인정해야 내 우상을 가루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높인 것을 낮춰야 하나님이 높아지신다.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산당을 쌓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그걸 허무신다. 한번 스스로 물어보라. "이것만은 건드리면 안 돼" 하는 게 뭔가? 그걸 더럽히는 게, 그걸 더럽히는 게 상상도 못 할 일이라면 그게 바로 우상이다. "난 그거 없이는 못 살아, 상상이 안 돼", "나는 그건 너무 싫어, 그거 좋아하라고 그러면 상상이 안 돼" 다 우상인 것이다.적용) 나에게 "이것만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건 무엇입니까? 내 체면과 성공의 제단에 자녀를 제물로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삶의 어느 자리가 내 산당입니까? 어떻게 더럽혀 멀리하겠습니까?3. 파내립니다.태양의 말과 수레를 유다 여러 왕이 들였다. 그게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곳 근처에 서 있었다. 예배하러 들어가는 문 앞을 대대로 물려온 우상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고조할아버지 아하스가 다락 지붕에 세운 제단, 할아버지 므낫세가 성전 두 마당에 세운 제단 그러니까 요시아가 지금 자기 집안이 대대로 쌓아온 죄를 지금 헐고 있는 것이다. 헐어서 빻아내려 생각조차 나지않도록 가루를 만들어 기드론 시내에 쏟아렸다. 얼마까지 거슬로가면 솔로몬까지 간다. 300년 전, 성전을 지은 바로 그 왕이 이방 아내들을 위한 산당도 지었다는 것이다. 그게 300년 넘게 예루살렘 앞산에 그대로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산은 바로 기름 부음의 산인 감람산인데, 그런데 성경은 이름을 비틀어 '멸망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우상이 서 있는 동안 축복의 산이 멸망의 산이 된 것이다. 누구도 말을 못하는 솔로몸을 건든 것이다. 요시아가 "이 산당의 원흉이 솔로몬이다." 하는 것이다. 요시아가 대단한 구체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 우리는 솔로몬은 그냥 맨날 그냥 그 재판에서 지혜가 넘친다, 그 얘기밖에 우리는 기억나는 게 없다. 요시아는 석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고 그 자리를 사람의 해골로 채웠다. 시체의 부정으로 영원히 봉인해서 다시는 거기에 아무것도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개혁에는 제외 구역이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단락의 우상들은 전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다. 뿌리다. 내가 만든 우상이 아니라 태어나 보니 이미 집안에 있던, 집안에 서 있던 우상이다. 물론 부모님이 물려주신 것 자체가 죄라는 말이 아니다, 근데 그것이 내 의지처가 되고 내 자랑감이 되고 내 피난처가 된다면 어떤 유산이 우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우상을 지금 붙들고 있는 건 부모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가장 깊은 뿌리는 가장 좋았던 시절에 심겼다. 솔로몬의 산당이다. 가장 지혜롭고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절에 심긴 죄가 가장 오래갔다. 아무도 못 건드린다. 내가 자랑이니까. 그럼 이 뿌리도 빻아내리면 되지 않겠나? 그릇은 꺼내면 되고 산당은 봉인하면 된다. 그런데 뿌리는 뽑으면 나무가 뽑힌다. 물려받은 기질, 가치관, 상처 그게 곧 나다. 성경이 '옛 사람'이라고 부르는 내 자아다. 결국 마지막 우상은 내 자신인 것이다. 내가 나를 빻을 수 없다. 내가 가루임을 인정하는 게 회개라고 했다. 그런데 인정까지는 하겠는데 이 마지막 우상은 내 손으로 안 부서지는 것이다. '빻아내리다'를 이게 히브리어를 보면 '상하다'라는 뜻이 있다. "상한 갈대, 애굽은 상한 갈대 지팡이라." 그 상한이 빻아내려진 것과 같다. 빻아져야 될 것은 우상만이 아니다. 우상을 만들고 산당을 쌓은 나, 이미 밑동 잘리고 허리 꺾인 상한 갈대 같은 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상한 갈대 같은 인생은 꺾지 않으시고 우상의 제단은 부수신다. 주님은 상한 갈대 같은 우리를 꺾지 않으시려고 자신이 대신 상하셨다.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예언했다. 그래서 성경이 내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못 빻는 내 뿌리를 빻으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이 가루가 되기까지 내어주신 것이다. 큐티에서 다윗이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아버지의 애끓는 정으로도 아들의 죽음을 대신해 주지 못하는데, 구원을 위한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대신할 수 있겠는가? 오직 예수님만 해주실 수 있다. 요시아는 이미 훌다 선지자에게서 재앙이 돌이켜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었다. 최선을 다해 회개했는데도 심판은 온다는 선고를 들었다. 억울해서 다 부숴버리고 싶은 자리 아닌가? 근데 요시아는 말씀을 찢지 않았다. 사명을 내려놓지 않았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해되지 않고 절망만 되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부쉈다. 그것은 바로 내 속의 우상을 말한다. 그러니 마지막 우상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내 힘으로 안 된다고 무릎 꿇고, 나 대신 상하신 주님께 의뢰하는 것 그래서 상한 갈대 같은 인생은 하나님을 의뢰할 때 살게 되는 줄 믿는다. 그래서 "주여, 살려주시옵소서!" 이거밖에 길이 없는 것이다.적용)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차마 못 건드리는 우상은 무엇입니까? "원래 우리 집안이 이래" 하며 정당화하는 뿌리는 무엇입니까? 부수고 있는 상한 사람은 누구이고 지키고 있는 오래된 우상은 무엇이에요? 내 힘으로 안 된다고 원망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무릎 꿇겠습니까?
기도제목헬륨- 큐티 2번으로 늘리기- 취침 전 기도할 수 잇도록아르곤- 욕심과 우상 (말투, 음주, 일확천금)을 내려놓을 수 잇길 - 큐티하기-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기제논- 공허함을 하나님께 내놓을 수 잇길- 인간혐오가 멈춰지길- 운동을 한 2번만 하기크립톤- 진로고민에 대해 잘 묻고 기도할 수 있도록- 큐티 열심히 할 수 있도록네온- 진로에 대해서 큐티와 기도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매일 기상부터 취침까지 규칙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