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05.(주일) 마가복음 16:1-11 「그가 살아나셨다!」 김양재 목사님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가 살아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어요. 우리도 살려주시옵소서. 오늘 부활의 아침에 찾아와서 말씀해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세속사와 구속사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기독교는 사실 이 세상과 함께할 수가 없는 가치관이에요.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은 100% 악하다고 그랬어요. 100% 죄인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심판을 몰라요. 심판을 모르면 회개는 더욱 몰라요. 그러면 악한 이 세상밖에 모르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되어서 악착같이 공부하고, 벌고, 뺏고, 쓰고, 모으고…… 그러다가 누릴수록 ‘죽으면 끝이지 뭐’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부활이라면 다 코웃음을 칩니다.
광대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잖아요. 나의 시력으로 볼 수가 없어요. 해, 달, 별이 떨어질 때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하셨잖아요(막 13:24-26). 이것은 “육이 무너져야 영이 세워지기 시작한다”는 것이고요. 이 말은 점으로 낮아지신 예수님의 렌즈를 그때부터 끼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한 단어예요.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부활을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부활은 이론으로 연구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은 수많은 논리로 수많은 사상가, 학자들이 부활을 증명하고자 했지만 다 실패했어요. 논리는 또 다른 논리가 나오면 바뀌잖아요. 부활은 생명인데 생명을 어떻게 논리로 증명하겠어요? 그래서 생명은 생명으로밖에 증명이 되지 않아요. 증명이 아니고 ‘증인’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그가 살아나셨다!”의 증인은 무엇이고, 누구에게 보일까요?
1. 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십니다(1-4절).
1절, 2절이에요.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_막 16:1-2
1절에 “안식일이 지나매”, 2절에 특히 “안식 후 첫날”은 모든 복음서에 나오는 거예요. 안식일이 너무 중요해요. 이때부터 구약 율법의 안식일에서 신약의 부활을 기념하는 생명의 주의 날(주일)로 바뀌기 때문인데요. 이날이 바로 부활절이고, 그러니까 주일은 날마다 부활절이에요. 따로 부활절 설교를 할 필요가 없이 매 주일이 부활절인 거예요.
이 역사적인 부활절의 주인공이 오늘 1절에 보니까 ‘막달라 마리아’라고 합니다. 새 시대가 도래한 이 중요한 일의 첫 목격자가 막달라 마리아라는 거예요. (동일한 말씀을) 마태복음으로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라고 했어요(마 28:1). 그렇다면 복수를 써야 하는데, 원어에 보면 3인칭 단수를 썼어요. 여인들 중에서도 막달라 마리아가 주인공이라는 뜻입니다. 왜 주인공이 됐을까요?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 때문에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모두 (그분을) 저주받았다고 할 때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갔어요. 로마 병정의 노리개인 창기로 일곱 귀신 들렸던 마리아가 주님 때문에 살아났는데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해 돋을 때 가려면 훨씬 더 일찍, 캄캄할 때 출발했다는 것이잖아요.
이 땅의 사랑도 ‘죽음같이 강하다’고 아가서 8장에 나오는데요(아 8:6).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가) 이 열심을 가지고 이제 무슨 말을 하는가 하니, 3절에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_막 16: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이러는 거예요. 이렇게 두려움 없는 담대함으로 새벽을 뚫고 왔는데 부활체인 예수님은 믿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애물이 너무 커. 100kg가 넘어 저 돌문!” 하고 염려, 근심을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하신 말씀 정말 맞고요(빌 2:12). 저에게도 “누가 돌을 굴려주리요”는 믿음의 분량대로, 시기마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걱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 중에 제자들의 멸시를 무릅쓰고 노동자 1년 품삯에 해당하는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들고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베다니 마리아의 얘기를 여러분이 들으셨어요(막 14장). 그녀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부활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보러 가지 않았어요.
주님은 ‘이 마리아를 세상 끝날까지 기념하여 전파하게 하라’는 최고의 칭찬을 하셨는데요(막 14:9). 말씀을 예수님 발아래에서 듣던 실력은 정말 최고인 것 같아요. 제가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왜 안 갔나?’ 생각을 해보니까, 이 세상은 부활을 너무 싫어한다고 그랬잖아요. 베다니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잖아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게 아니라 ’저것이!!’ 하면서 죽이고자 했잖아요. 이 세상은 내가 예수 믿는 거를 다 죽이고자 해요. 그래서 베다니 마리아가 그 공적인 자리에 안 나타났을 것 같아요. “안식 후 첫날”의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녀가 예수님의 무덤에 안 가는 것이 가는 것보다 훨씬 힘들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해요. ★구원 때문에 갈 수도, 안 갈 수도 있어요.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활의 현장에 꼭 안 가도 돼요. 왜요? 이미 믿기 때문에! 올림픽공원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면 우리 집 옆이라도 갈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구원의 일이 있다면 굳이 안 갈 수도 있는 거예요. 팔복산 기도회가 너무 중요하지만 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안 올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아무 일도 없는데 안 오는 건 이상한 거예요.^^ 이렇게 부활을 믿기에 부활의 현장에 안 오는 이런 모델도 사실 필요합니다.
부활은 흑백론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이미 부활을 확실히 믿고 있는 베다니 마리아보다는 인류를 위해서 주님은 부활의 증인으로요 우리하고 너무나 비슷한, 더 가까운, 또 부족한 게다가 그냥 막 너무 열성 분자야, 근데 또 그냥 아리까리해요. 이런 가장 낮고 낮은 창기 막달라 마리아를 택하셨어요. 베다니 마리아가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증인으로 택하셨어요.
(누가 무덤 돌을 굴려주리요) 걱정을 하고 4절에 보니까,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_막 16:4
돌이 치워진 것은 과거 완료예요. 그러니까 이제 눈을 들어 보았을 때 이미 돌이 치워져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 사건을 사복음서 기자가 ‘지진이 났다’, ‘천사가 굴렸다’ 등등 여러 가지 얘기를 하지만, 사복음서 기자가 한결같이 얘기한 것은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빈 무덤!” 이것이 부활의 진정성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갈 마음만 있어도 심히 큰 돌을 이미 제거해 놓고 계셨어요.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 같아요. “아휴, 그 사람은 안 된다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제자들과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염려하지만 그래도 가요. 그랬더니 주님이 큰 돌을 제거해 주시고 양육해 주실 때가 많아요. 그래서 아예 믿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제자들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적용 질문
Q. 여러분은 부활이 확실히 믿어지세요, 아직도 머리로만 믿어지세요?
Q. 부활의 증명을 원하세요, 부활의 증인을 원하세요?
Q. 날마다 묘지 찾아가서 ‘누가 돌을 굴려주리오’ 하면서 죽은 자를 살핍니까? 그보다 더 중한 구원의 일이 있다는 것을 분별하세요?
“그가 살아나셨다!” 부활의 증인으로 (첫 번째) 뭐라 그랬죠? 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십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증인도 두 번째로,
2. 양육이 필요합니다(5-6절).
5절 6절입니다.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_막 16:5-6
아멘. 부활을 믿기가 왜 힘든가 하면요, 이 땅에서 부활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잖아요. 창조주 예수님도 하나님이잖아요. 그래서 그 부활하시는 장면은 볼 수도 없고, 본 사람도 없어요.
그러면 나사로와 나인 성 과부의 아들(눅 7장)하고는 어떻게 다를까요? 그들의 살아남을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다 보았어요. 그러나 그들은 잠시 후에 다시 죽었어요. 그들의 살아남은 ‘병 고침’ 정도의 살아남이었어요.
예수님은 부활체이기 때문에 돌을 굴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나오실 수 있는데 우리를 양육하기 위해서 돌문으로 양육해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여인들은 몸의 부활만 간절히 바라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은 유일무이하고 이게 아주 창조적인 일인 거예요. 그분이 창조주니까. 그래서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정말 이렇게 창조적이에요.
이게 ‘돌이 이미 치워져 있다’고 했는데요. 그러면 이때라도 부활을 믿어야 하잖아요?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한 그녀들이지만 부활을 믿지 못하는 증거가 여기 있잖아요.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막달라 마리아의 얘기가 요한복음에도 나오지만 예수님이 앞에 계신데 동산지기인 줄 알고 슬퍼했다고 그러잖아요(요 20:15). 그러니까 다 죽은 시체만 찾으러 댕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분은 말이죠, 정말 사별한 후 아름답고 비싼 꽃을 들고 날마다 묘지를 찾아가는 거예요.
마릴린 먼로의 두 번째 남편인 그 유명한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는 9개월간만 결혼 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먼로가 6.25 전쟁 때 한군에 주둔하는 미군 병사를 위해서 전설적인 위문 공연을 하는 바람에 질투심이 폭발해가지고 이혼을 했는데요. 세 번째 남편인 아서 밀러도 있건만 먼로 사후에는 디마지오가 매주 세 번씩 무덤에 찾아가서 84살까지 혼자 살면서 꽃을 바쳤다고 해요. 먼로를 그리워하면서 죽을 때도 “아, 이제 먼로를 만나겠구나” 하고 시신 보고 위로를 얻으려고 했는데…… 조 디마지오가 전설적인 야구 선수 아니에요? 예수 믿고 인생의 허무함을 전했으면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했을 것인데요.
어떤 분은 묘지 갔다 오면 4시간 이상 걸리는데 날마다 간다고 하는 거예요. 시간은 예수님인데, 이 땅에서 시체 찾아 삼만리 하면 아까운 이 세상의 시간을 무덤에서, 죽음에서 모두 허비할 수 있잖아요. 그것은 도리어 예수님을 천히 여기는 것일 수 있어요. 시간을 천히 여기는 거예요. 그래서 막달라를 택해서 양육해 주셔야 하는 거예요. 베다니 마리아가 아니고. 그래서 양육이 필요한 거예요.
(천사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뭐라고 하나요? “놀라지 말라!” 지금 너무 놀라고 있어.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말씀 다 듣고 적용이 안 돼요. 마태복음에는 “무서워 말라!”(마 28:5) 누가복음에도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는데 온갖 두려워하는 모습이 다 나오는 거예요(눅 24:4~5). 그러니까 그 용맹스러운 병사들조차 두려움과 공포에 싸였다고 하는데, 부활도 아직 못 믿는 여인들은 얼마나 또 무서웠겠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 중에서 와! 이 여인! 막달라 마리아만 (주님이) 양육을 해 주세요. 이것이 은혜예요. 여러분, 양육받는 것이 얼마나 은혜인지 모르실 거예요. 양육자가 좋고 나쁘고 이게 상관이 없어요. 양육받는다는 것 자체가 택자로 인정해 주신다는 거예요.
이들이 뭐가 잘났어요? 우리가 다 교만하기 때문에 제 설교를 10년 이상 들어도 여러분은 부활을 경험하지 못해요. 그런데 양육을 받으면서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요. (양육을 통해) 여러분의 교만이 깨어지기 때문에. 설교 들어서 무슨 교만이 깨어지겠어요.
그래서 다시 얘기하시는 거예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만 집착하고 살아나신 예수님은 모르는구나!” 이 특별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요, 그들이 그리스도로 믿은 부활의 주님은 천히 여기는 나사렛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형으로 처형받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을 구세주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수치의 회개 간증을 하면, 여러분 가운데는 지질하다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제가 4대째 모태 신앙이고, 어려서부터 교회 다녀도 늘 잘 된 간증만 들은 것 같아요.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부활의 경험이 없으면, 이 솔직한 수치의 간증을 -남이 하는 간증을- ‘인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이야기예요. 계속 판단합니다. ‘저딴 얘기는 왜 하지? 어휴~’ 이런 얘기하는 거죠. 어찌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한 이 사건이 예수님의 계보에 오른다는 것이 어떻게 믿어지겠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조차 아무도 안 믿는 거예요. 지금 그러니까 지금 마가복음 10장에 그 반듯한 율법을 다 지킨 -십일조도 하고, 예배도 잘 드리고- 이 부자 청년이 재물 하나 내놓지 않았다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제자들도 놀라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으리요” 하잖아요. 그렇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고 그랬어요(막 10:17-27).
그럼 이 여인들은... 그래도 그만큼 낮아졌기 때문에 그래도 메시아를 알고 찾아왔어요. 근데 부활의 실체는 몰라요. 그거보다는 인간적인 사랑이 지금 앞서 있어요. 그래도 이 땅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마음과 육신이 가난한 것이 천국을 보기가 아주 쉬워지기 때문이에요. ‘부자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마 19:24, 막 10:25)고 했잖아요. 그거 다 대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실 유대인도 제자들도 여인들도 우리도 다 똑같아요. 제자들이 다 도망갔잖아요.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 부활의 증인 때문에 양육받아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체험했지요. 그들이 믿음으로 부활의 주님을 알아본 게 아니에요. 그들이 택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도하신 거예요. 여러분들이 오늘 택자로 인도함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뭐라고 또 얘기하셨냐 하면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이게 ‘과거 수동태 직설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으킴을 받아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고 따라서 무덤이 비워졌다’는 이것이 기독교의 우월성과 탁월성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다른 종교는 종교 창시자들의 무덤을 성지로 숭배하고 있잖아요. 기독교의 창시자인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셨기에 숭배받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예루살렘 성전에는 예수가 실종됐어요. 지금 막 4개 종파가 와서 다 다른 종파들이 각자 예배를 드려요. 그런데 거기는 예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부활로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드러난 거예요. 죄로 인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일으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무덤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숭배받을 이유가 지금 없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타 종교와 구별되는 결정적 차이예요. 그래서 ★기독교의 자랑은 화려하게 꾸민 무덤이 아니라 초라하게 비워진 ‘빈 무덤’인 거예요. 그래서 택자가 아니면 누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제가 설교를 잘해서 만날 수가 있는 게 절대로 아니에요. 이 부활의 특별한 경험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게 하실 수 있어요.
그럼 이걸 어떻게 하나? 그래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했기 때문에 아주 쉬운 길이 또 있기도 해요.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에 이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놀라지 말라’고 그랬어요. 이걸 어떻게 삶으로 설명을 좀 해드릴 수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제게 하루 만에 간 남편의 죽음은 이 땅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이었잖아요. 근데 그거보다 더 놀라운 게 구원의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날마다 말씀을 보면서도 순간적으로 이 여인들처럼 죽은 예수님을 찾았기 때문에 병원에 있는 하루 동안은 ‘구원되었다’는 사실보다는 죽음 자체에 관한 인간적인 눌림이 더 앞섰어요. ‘내가 아직 30대인데 엄마로 과부로 사는 편견의 이 힘이 큰 돌을 누가 굴려줄까?’ 그러나 하루 만에 진리의 성령님의 도움으로 창조주가 말을 걸어주셨기 때문에 해석이 되어서 부활의 그 실체가 임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동안 들어두었던 말씀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살아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저는 막달라 마리아와 베다니 마리아를 왔다 갔다 하면서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한 인생의 나침판으로 삼고 걸어갈 때, 생명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거를 경험했어요. 이걸 믿어야 돼요. 주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죽은 남편 찾지 말아라” 그가 구원받고 부활했으니 무덤에 있지 않다는 것을 제가 알았어요. 어떻게요? 말씀으로요! 제 인생이 말씀이 저를 인도해 온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그것은 창조주와 대화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어떤 수백 명의 의사, 심리학자 상담가와도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물론 우리는 상담받고 병원 가야 돼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현대 사회 문제가 그토록 많은데 성경만이 문제의 해결점이 된다는 것을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간 날에 그날 말씀은 40년이 되어 오도록 저를 지켜주고 보호하시고 사명으로까지 인도하시기 때문이에요. ‘그까짓 말씀 하나가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냐?’고 하실 분이 있지만, 저도 남편이 죽은 그날 하나님께 물어보며 큐티한 것이 이렇게 쓰임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신학도 안 했고, 목사도 아니었는데, 제가 창조주 하나님이 살려주신 얘기를 하잖아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었어요! 이것이 부활의 은혜예요. 그러니까 부활을 경험해야 모든 것이 들리고, 풀리고, 모든 것에 증인이 될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6절만 봐도 마지막에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천사도 “그가(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6) 그러잖아요. 그렇죠. 제가 남편의 죽음을 겪고 나니까,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요. 말씀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에스겔 18장 28절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대로 남편이 회개하고 예수님 영접하고 갔기 때문에 반드시 살았다고 하잖아요. 제가 남편의 장례를 집에서 치렀는데, 시신이 3일 동안 안방에 있었어요. 그런데 장지에 묻고 와서 “이제 남편이 시신으로 누웠던 곳을 보라” 하면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런데 죽음이 이 땅에서 가장 무서운 고통이고 원수라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살았다고 하는데, 창조주가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왜 무서워합니까? 그러니 그때 아직도 새댁 같은 30대의 과부가 시신이 있던 자리가 하나도 무섭지가 않더라고요. 어떻게 슬프지 않겠습니까? 근데 무서운 것과 슬픈 거는 다른 거예요. 슬프지만 예수 믿고 갔기 때문에 무섭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여전한 방식으로 저는 남편을 보낸 후에 사람들이 다 가고 첫날 안방에서 시신이 누워 있던 그 자리에서 제가 혼자 잤어요. 저는 이미 집에서 시신과 같이 이틀을 안방에서 있었잖아요. 이것이 죽음을 정복하신 부활의 은혜인 거예요. 아들딸도 각자의 방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잤어요. 저는 사실 일부러 그랬어요.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 사실이 대단하다고 여겨지잖아요. 우리 집에 사람들이 막 웅성웅성 많이 오고 이러니까 ‘아! 이 구원은 굉장히 기쁜 일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이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양육이에요.
남편이 하루 만에 천국 가는 것도 기가 막히지만, 안방에서 있다가 간 것도 제가 경험한 결과, 하루 동안 무서웠지만 금세 살아났기 때문에 무서운 사건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은 이런 구절에서도 말씀과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제 남편을 안방에서 빈소를 차리게 하시고 가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40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은 이렇게 기획하셨을까요? 누가, 집에서 장례식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저는 그냥 그걸 그냥 다 오가는 사람한테 알렸어요. 그때 이미. 그리고 시신이 있던 자리에서 전이나 후나 똑같이 30년을 살고 사역하게 하셨어요.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이란 얼마나 우리 인생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인지 몰라요. 주님은 누우실 필요가 없음에도 우리를 위해 누우셨어요. “그 어두운 무덤 위에 누우셨던 것을 보라!!”고 하신 것처럼 저도 남편의 구원을 위해 내 의지를 다 꺾고 누워야 될 일이 있었던 거예요. 구원을 위해 누워야 될 일이 있고, 보라고 하기 위해서 6시부터 9시까지 암흑 속에 누워야 휘장이 찢어지는 이런 간증이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천사가 “보라”고 한 첫 사람이 여인들이 되었고, 이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장례식에서 슬퍼하고 눈물 흘릴 수 있어요. 하지만 구원받고 영생에 들어갔으면 슬퍼서 울고 난리 칠 일이 전혀 아닌 거예요.
적용 질문
Q. 우리의 사건에서 죽은 예수를 찾습니까, 살아나신 예수를 찾습니까?
Q. 교회를 다니고 큐티를 해도 아직도 죽음이 너무 두렵습니까?
Q. 그래서 간증을 들을 때 무시가 되세요, 부러우세요?
Q. 양육에 참여하셔서 실제적인 부활을 경험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가 살아나셨다!” 주님은 부활의 증인으로 이제 안식 후 첫날 낮고 낮은 막달라 마리아를 택하셨어요. 그러나 부활의 증인도 양육이 필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3. 사명 주시기 위함입니다(7-9절).
7절이에요.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_막 16:7
나를 무서워하지 않게 양육하시는 이유가 나 잘 먹고 잘살라고요? 그럴 리가요. 이 땅이 가장 무서워하는 죽음을 정복한 것을 전하라고! 나에게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어떤 환경이라도 사명을 주십니다.
이 여인들에게 엄청난 명령을 주세요. 예수님을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에게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가서 전하라고 하는 거예요. 수제자 베드로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이 여인을 쓰십니다.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이니 우리가 먼저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기 때문에 늘 말씀 보고 큐티하고 적용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리는 처음으로 주님을 만났던 장소예요. 그리고 실패해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장소이기도 해요. 솔로몬 시대에 건축비로 이 가불 땅을 주었는데 두로왕 히람도 가지기 싫어했던 가불 땅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을 이제 그들의 고향 갈릴리, 옛날의 가불 땅에서 만나주십니다. 그런데 모든 제자가 주님이 돌아가시니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베드로가 그러니까 “나도! 나도!” 다 따라갔어요. 3년 동안 제자들을 공들여 양육했는데 모두가 떠나버리고 자기 생업으로 돌아갔습니다. 근데 이런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갈릴리에 먼저 가서 기다린다.” 예수님이 가주심으로 이 가불 땅 갈릴리는 시쳇말로 완전히 주 안에서 ‘강남땅’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가기도 싫을 뿐만 아니라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이 갈릴리인데요. 사람들에게 ‘갈릴리 당’이라고 멸시 천대 받았는데 베드로는 갈릴리가 너무 싫어요. 근데 부활의 증인이라면 주님이 나에게 어떤 자리에서 은혜 주셨는가를 기억하면서 첫사랑을 회복해야 돼요. 그러니까 예수 믿어도 생각도 하기 싫은 사람이 있고 만나기도 싫은 사람이 있다면 아직 주님을 시체로 보고 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나의 연약함을 아세요. 그러니까 “네가 너무 가기 싫어하니까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게.”^^ 내 삶의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기만 하면 가장 일류의 자리가 되는 줄 믿습니다! 모든 것을 가져도 예수님이 없으면 감사가 없어요. 그러면 그곳은 천한 자리가 되는 거예요.
이번 주 수요 설교하신 초원님이 그랬죠. 불교 믿으시는 친정어머니에게 “엄마, 저 올해 권사 됐어요. 제가 설교하니까 한번 오세요!” 하니까 “권사가 뭐냐?” 그래서 “음... 말하자면 삼성에서 임원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하니까 그렇게 몸이 아프신데 임원 됐다고 그러니까 수요일에 오셨어요.^^ 맞습니다! 사명의 자리는 가장 일류 자리입니다! (그렇다고 삼성만 인류는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이제 8절에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_막 16:8
마태복음에 보면 그 천사가 이제 얘기를 하니까 사도들에게 이 여인들이 큰 기쁨으로 소리쳤다(마 28:8)고 나왔는데 마가는 그 기쁨의 감정을 쓰지 않고 ‘도망하고 무서워하여’라고 불신앙적으로 묘사가 됐어요. 저는 이 말이 이해가 되는 게 죽음과 구원의 사건이 너무 하루 만에 다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하루 만에 구원이 됐어요. 우리 남편이 하루 만에 죽고 하루 만에 구원이 됐어요. 그러니까 이 성경이 너무 이해가 되는 거 있죠? 다른 복음서들은 다 ‘기쁨으로’인데 마가복음만 ‘놀라고 슬퍼했다’고. 이 마가복음이 처음에 쓰인 복음서거든요. 이것도 저것도 다 놀라운 일이에요.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너무 사랑하지만, 아직 양육이 안 됐어요. 조건 반사적으로 무서워할 수 있어요. 그래서 부활의 현장에서 온 인류를 양육시키려면 이런 막달라 마리아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목장에서도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 성도를 양육할 때 목장 모든 식구가 저절로 양육되는 거예요. 목장마다 베다니 마리아만 있다면 별로예요.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그래서 9절에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_막 16:9
제가 예수님이라면 부활의 주님을 누구에게 가장 먼저 보이고 싶을까 생각해 봤어요. 십자가의 부활을 가장 잘 외쳐줄 사람은 똑똑하고 마음씨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가장 비천한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인 거예요. 외모로 평가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이제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무서웠지만 그날 말씀으로 양육해 주시니까 살아났어요. 큰 기쁨이 왔어요.
무덤을 향해 앉은 이도 막달라 마리아! 부활을 처음 보러 온 이도 막달라 마리아! 인류에게 가장 잘 알려진 마리아는 베다니 마리아가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예요.
둘의 역할이 다르다고 봅니다. 그러나 베다니 마리아는 알려지지 않아도 미리 주님이 알아주셨잖아요.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기념하여 전파하라고 한 사람이 베다니 마리아예요. 주님이 알아주시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무서운 죽음을 갑자기 겪은 저로서는 막달라 마리아도 공감이 되고 베다니 마리아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둘 다 이걸 다 겪었잖아요? 그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여자 중에서도 창기, 귀신 들린 자를 택했다는 것이 주님이 부활하신 이유예요. 또 우리가 부활을 경험하고 찾아가서 양육해야 될 사람도 이런 분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돈 귀신, 음란 귀신, 술 귀신, 담배 귀신, 혈기 귀신, 여자 귀신, 남자 귀신 딱 일곱 귀신만 물러가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것 말고 그냥 그거 7개만 딱 없어지기를 오늘은 그걸 또 기도합니다. 이 일곱 귀신 들린 사람들은 반드시 부활을 경험하시기를 바래요.
그러나 이렇게 여인들과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고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 마리아만 사랑하시는 것 같아!’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쓰신 일꾼은 예수님과 같이 옆에서 3년을 밥 먹고 양육받았던 그 믿음 없던 제자들을 쓰시네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성경을 보면서 ‘나는 옳고 너는 틀렸고’ 이런 건 없는 거예요. 각자 위치와 역할이 다 다른 거예요. 부활은 누구도 자랑할 거리가 없어요!
나중에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쫙 부활의 증인을 얘기하면서 사복음서에 다 다루고 있는 여자들 얘기는 안 썼더라구요. 저는 그런 걸 보면서 항상 제 주제를 알게 되요. 나 혼자 믿음 좋다고 떠들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적용 질문
Q. 내 삶의 자리는 천합니까, 일류입니까?
Q. 사명의 자리를 사모하세요, 세상의 높은 자리를 목말라하세요?
Q. 여러분은 누가 여러분의 부활 간증을 들어줬으면 좋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 같은 자입니까, 지식 있고 돈 있고 권세 있는 자입니까?
(여러분들이 얼마나 부활을 경험했는지 한번 띵크를 해보면 진단이 될거 같아요. 갑자기 설교가 너무 어렵죠? 뭐가 복잡해~ 그죠? 그래요? )
병상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마지막까지 사명 감당하신 목원 집사님.
자, 목자님이 한 목원의 부활의 증인으로 마지막 병상에서의 간증, 한 일주일 정도 적어 보내 주셨는데 너무 놀라웠어요. 이거를 읽어 드릴게요.
이분은 평범한 목원이에요. 의식을 잃고 입원해서 의식을 며칠 만에 되찾은 후에 그때부터 구원의 대상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불러 마지막 유언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한 아들과 딸에게는 아주 둘 다 우리들교회 청년 예배와 목장에 꼭 나갈 것을 약속받았어요. 시댁과 친정 식구들은 너무나 세상적으로 탁월하여서 복음 전하기가 너무 쉽지가 않았는데 그래도 지방과 각지에서 화급히 달려온 큰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데 암으로 죽음을 앞둔 동생이 복음을 전하고 지방 교회의 이름까지 정해 주며 나가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약속을 했어요.
눈뜨기도 힘들 정도로 진짜 소천하시기 진짜 2~3일 전인 거예요. 기운이 진하여 있다가 복음의 불모지인 친정 식구 한 사람 한 사람 올 때마다 상상할 수 없는 우렁찬 목소리와 미소로 안타까움으로 이 시대 최고의 축복이 암이라고 했는데, 그 권세로 복음을 전하는 그 모습은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는 거예요. 아들 친구가 오자 "세자야 세자야 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이렇게 와줘서 고맙고, 우리 아들과 친구해줘서 너무 감사해. 그런데 내가 네게 부탁이 하나 있는데 꼭 들어줘야 해. 들어줄 수 있지? 약속할 수 있지?" 그 아이가 엉겁결에 "예" 하니까 “너 이번 주부터 우리들교회 청년 예배와 목장에 꼭 나가 줄래? 그래서 예수 믿어라.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지? 자, 손가락 걸고 약속해. 도장 찍고 복사하고 그래 약속했다 꽝!꽝!꽝!” 그리고 위를 향하여 “하나님 보셨죠? 아멘! 세자야 너도 아멘 해” “아멘.” 전하고 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복사하고 꽝꽝꽝 하고 하나님께 보고하고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동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왜 빨리 오지 않느냐고! 오늘 꼭 와야 한다고! 시간이 없다고!” 계속 재촉하며 몇 번씩 “누구누구 출발했냐고! 어디쯤 오고 있냐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러온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온통 응급실을 가득 채우고 숨 가쁘게 복음이 전해지며 뜨거운 성령의 열기가 가득했습니다. 찾아온 사람 중 예수 믿지 않은 자는 손을 뻗어 재촉하며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기가 하는 말은 자기가 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이라며 반드시 예수 믿고 교회 나가겠다고 약속하되 서울에 있는 자들에게는 우리들교회와 목장에, 그리고 청년은 우리들교회 청년부와 목장에, 지방에 있는 자들은 꼭 가까운 교회에 이번 주부터 나가겠다는 약속을 다 받아낸 거예요. 성령이 집사님께 임하여 전해지는 복음의 권세 앞에 그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을 경험을 했어요. 임종 예배를 드린 후에는 목장 식구들을 바라보며 “모두들 여기 있지 말고 어서 나가 복음 전하라고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자들은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 하면서 재촉하면서 돌려보냈다는 거예요.
집사님은 목자인 저를 보더니 “토요일 말씀 경계를 주셨고 어제는 도피성이었고 오늘 말씀은 뭐지요? 아, 슬로브핫의 딸들! 그런데 목자님, 우리 김양재 목사님께서 저를 아실까요? 기억하실까요? 저는 그 목사님 한 번만 안아보고 싶어요. 저의 간절한 소원이에요. 꿈을 꾸었는데 목사님이 저에게 (죄송해요. 오늘 실명을 쓰겠어요.) ‘김은자 집사, 참 예쁘다. 너무너무 예뻐서 내 입에 넣어도 혀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예뻐. 천사처럼 예뻐요.’ 그래서 내가 예쁠 게 없는데 무엇이 예쁘실까 (이 분이 말기암이신데) 그런데 바로 지금 제가 복음 전하는 이것 때문이라는 게 깨달아졌어요.” 했습니다. 그리고 암 투병하며 또 이제 같은 아파트에 사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아들 친구 엄마와 아들 친구를 전도하고 싶어서 자기가 이 말기암 가운데서도 얼마나 안식을 누리고 있는지 이런 주님 같이 믿자고 했지만 도무지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는데 소식을 듣고 휠체어에 엄마를 태우고 병원에 그 엄마와 아들, 그 친구 아들, 친구 아빠가 다 찾아와 가지고 그 자리에서 예수 믿고 교회 나가기로 다 약속을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남편이 우리들교회에 오지 않는 우리들교회 여자 집사님들의 남편들, 목장 식구들의 자녀 중 믿지 않는 아들들, 교회만 나오고 목장에 들어가지 않는 자녀들, 평소에 기도 제목으로 올리고 구원을 위해 기도했던 모든 영혼 하나하나를 다 거론하고 불러들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세자에게와 똑같은 방법으로. 또 저에게 그러더군요. “목자님, 제가 전할 자에게 복음 다 전했어요. 모두 다 약속했는데 딱 한 사람이 약속하지 않고 자기는 싫다고 거부했어요. ○○이에요. 그리고 오지 않은 사람도 딱 한 사람 아무개가 있어요. 이 좋은 축복을 주는데도 받지 못하니 어떡하죠? 할 수 없지요. 참 바보예요.” 정말 집사님의 모습은 안식과 평강이 넘쳐 흘러서 ‘아, 천사의 모습이 이렇겠구나.’ 너무 신기한 것은 복음 전하던 시간에는 그때가 정말 마지막 때였는데 진통제를 투여하지 않아도 하나도 통증을 느끼지 않고 복음을 전한 거예요.
그래서 드디어 전할 거 다 전하고 다시 의식을 잃고 처치실로 옮겼는데 그때 또 한 번의 기적을 허락하셨어요. 제가 수요예배 끝나고 그분이 목원이었는데 제가 (병원에) 간 거예요. 갔더니 “집사님” 부르니까 눈을 번쩍 뜨고 제가 “천국에서 만나요” 하는 말에 소리는 못 내고 혀로 ‘아멘’을 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너무 놀라운 것은 목사님께서 오시자마자 “아! 이 김은자 집사 어쩜 이렇게 예뻐요. 정말 천사 같아요. 이렇게 깨끗하고 마지막까지 사명 다하고 가는 은자 집사가 너무 부러워요. 나도 은자 집사처럼 살다가 천국 가고 싶어요.” 이렇게 제가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 은자 집사님 꿈속에서 하셨던 말씀 그대로를 제가 가서 한 것이잖아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의 전율을 느꼈어요. (이건 목자님이 저한테 써서 준 거예요.)
그런데 목자님이 목사님이 다녀가신 한 시간 후에 집사님이 정신이 깨 가지고 그렇게 사모하고 보고 싶어 했던 김양재 목사님 다녀가셨다고 하니까 “그때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냐고. 내가 목사님 배울 때 이 병원복 말고 예쁜 옷을 입고 있었더라면 너무 좋았을걸” 하면서 너무나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는 거예요. 너무나 신기하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이 남편 되시는 유성열 집사님이 그 얘기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남편 집사님과 마지막 임종을 하고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목사도 권사도 아닌 한 평범한 목원 성도가 이렇게 마지막 병상에서 확신을 가지고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부활의 증인’이 되어 주셨어요. 큐티의 꽃은 적용이고 결론은 영혼 구원! 맞지요? 저 또한 일개 집사 시절에 남편의 죽음에서 그가 회개하고 예수 믿고 천국 갔기 때문에 그 간증으로 수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했던 것처럼, 누가 죽음 앞에서 이렇게 확실한 천국을 보여줄 수가 있겠습니까?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밍웨이는 죽음 앞에서 권총 자살을 했어요. 천국에는 차별이 없어요. 이름 없는 성도들이 수두룩 있을 거예요. 암이 걸린 수많은 환자 앞에서 지금이 천국을 전할 기회라고 부르짖으라고 해도 그 누구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았는데, 우리들교회에서는 너무도 아름다운 죽음을 자주 경험하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직분도 없는 평범한 성도들이 한결같이 천국이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니 너무도 감사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심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되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어요. “그가 살아나셨다!”의 주님은 이렇게 증인으로 안식 후 첫날 낮고 낮은 막달라 마리아를 택하셨어요. 그래도 양육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명 주시기 위함이야 죽음을 정복한 부활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될 줄 믿습니다!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다시 주께로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갑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갑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갑니다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갑니다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갑니다
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갑니다
멸망의 포구 헤어 나와
평화의 나라 다다라서
영광의 주를 뵈오려고 주께로 더 가까이
주께로 갑니다 ♬
기도제목 주님을 사랑하는데도 ‘누가 이 돌들을 굴려 주리오’ 하면서 복음의 거부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죽은 자의 하나님만 찾기에 너무 두렵고 떨리고 무서워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우리가 택자가 되어서 주님의 양육을 받게 해달라고, 죽음을 정복한 간증을 가지고 사명 감당하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다 같이 주님 부르고 기도합니다.
주님, 그가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이라는 원수를 아직도 정복하지 못해서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라고 연민에 사로잡혀 ‘누가 돌을 굴려 주리오’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예수님을 천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죄도 없으신 주님이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니 죄 많은 저는 당연히 죽어야 하는데 죽지 못해서 여러분이 살아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증인 되어 전하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제가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의 양이 차지 못해서 여러분이 고생을 하십니다. 주님, 저 좀 용서해 주시고 우리 모두 살려주시옵소서. 주님! 주님! 저 좀 용서해 주세요. 제가 모르고 그랬어요. 주여. 주님, 주님이 죄도 없는데 이렇게 죽음을 자처하셨는데... 주님, 죄가 회개해야 우리 모두를 살려주실 것 같아요. 주님, 저 좀 용서해 주시고 우리 모두 살려주시옵소서. 오늘 처음으로 오신 분도 문제 가운데 오셨다면 저 좀 용서해 주시고 모두 모두 살려주시옵소서. 얼마나 힘드세요. 주님, 살려주시옵소서. 살려주시옵소서.
오늘 “그가 살아나셨다!”를 믿고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그 자리에 일어나 주시면 오늘 하나님이 일으키신다고 하셨사오니 주님,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있으니 일어나시면 주님이 택자로 삼아주실 줄을 믿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오늘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을 양육하신 것처럼 오늘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어나기를 소원해요. 한 사람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우리에겐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우리가 시간이 있을 때 주님을 영접하셔야 해요. 우리는 내일 일을 몰라요.
저를 따라 기도하십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부활을 논리로 믿지 않고 생명의 증인으로 믿기 원합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내 인생의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지 않겠습니다. 택자가 되어 사명 감당하기 원합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살려주시옵소서, 살려주시옵소서.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줄 믿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사명 감당하게 될 줄 믿습니다. 살려주시옵소서. 살려주시옵소서. 살려주시옵소서. 살려주시옵소서.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그가 살아나셨다!”의 부활의 증인을 깨닫고 신앙 고백으로 드린 헌금을 받아주시옵고, 하나님께 드릴 것만 있고 사람들에게 줄 것만 있도록 저희들의 회사와 사업과 공부와 프로젝트와 아이디어에 또 물질과 건강과 관계와 목장에 기름을 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기도제목
A: 가족을 돌보는 책임이 내 몫이 아닌 '하나님의 몫'임을 인정하고 삶의 힘 빼기. 영적 부담을 내려놓고 목장에 돌아와 예배의 자리를 온전히 회복하기. 매주 어머니를 뵈러 부산을 오가는 그 수고로운 시간과 발걸음을 주님께서 다 계수하심에 감사할 수 있도록.
B: 곁에서 동행할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 (카드)가 아닌, 생명의 말씀(큐티)으로 깨어 준비하며 기도하기.
C: 달라 달라하며 염려 하는 것으로 1cm도 움직이지 않음을 알고 두려울 때 온 힘을 다하여 감사를 선택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적 자존감을 온전히 회복하기. 나의 갈 길을 이미 다 예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루만 말씀의 인도함을 받기.
D: 홀로 두 아이들 키우느라 마음 놓고 아플 수도 없었던 아버지의 애틋한 삶을 긍휼히 여기며, 지금까지 함께해 주심에 감사하고 살려 주시고 도와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찬양하기. (화내시더라도 잔소리x 입을 닫고 불쌍함으로 기도 하도록)
E: 인생의 막힌 문을 여실 예수님을 신뢰하며, 내일의 염려 대신 오늘 주신 말씀에 자족하기. 새로운 작업 시작하였는데 선한 사업되도록.
F: 미국 출장의 부담을 내려놓고(힘 빼고 배영하듯) 이 시간을 즐거운 경험으로 받아들이며, 내 힘으로 완벽하게 잘 해내려는 마음 멈추기. (코딱지)라고 무시하는 월급일지라도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며, 현재 내가 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자리'임을 잊지 않기. (노 땡큐 소리 할 수 있는 용기 주시도록)
G: 홍성, 광주, 대구로 이어지는 잦은 출장이 말씀이 전해져야 할 현장임을 깨닫고, 말씀에 하루만 살고 누리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