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18.(주일) 베드로전서 2:18-25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
이효숙 평원지기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주님,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저도 약재료리사 이효숙 권사입니다.^^ 오늘은 목양국 헌신 예배로 드립니다. 목양국은 새가족부, 양육부, 중보기도부가 속해 있는데요. 저도 새가족부, 양육부, 중보기도를 다 거쳐왔는데 이 부서들이 전방위로 돕고 있지만 우리들교회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목장입니다. ‘우리들교회’ 하면 고난이 축복인 교회, 또 가정이 살아나는 교회, 또 큐티하는 교회, 또 목장 참석률이 최고인 그런 교회로 소문이 나 있는데요. 바로 제가 고난 가운데서 양육을 받고, 또 큐티하고, 목장을 참석하면서 살아나 지금까지 가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증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은 저에 대해 아는 분이 많으시겠지만 ‘저 여자가 누군가?’ 하고 지금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우리들교회 여자 평원지기이고 지금 대구 채플을 섬기고 있습니다. 올해 표어가 에스겔 47장 12절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인데요. 저의 약재료는 남편 25년 외도, 이중생활, 부도, 감옥, 또 큰아들의 비행, 가출, 자퇴, 정신병원 입원, 또 작은아들의 ADHD, 또 학교 안 가기, 또 큰아들의 혼전 임신으로 손녀 돌보기가 저의 약재료입니다. 오늘 제목이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인데요. 오늘 큐티인 본문의 제목입니다. 죽음을 앞둔 순교 전의 베드로의 당부이기도 하고요. 또 우리 고난당하는 우리들을 향한 당부이기도 합니다. 목양국에 딱 맞는 오늘 본문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한 우리 목양국 또 목장입니다. 설교 대지 외우기 좀 힘들어 하는 분들 많이 있으시죠? 오늘은 아주 쉽습니다.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첫 번째,
1. 큐티를 해야 합니다. (18절)
너무 뻔한 대지 같습니까?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또 잘 안되는 것이 바로 큐티인 것 같습니다. 18절입니다.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_벧전 2:18
‘사환들아’라고 부르는데요. 사환은 고대에 가정에서 일하던 하인이나 종을 부르는 말입니다. 신분 제도가 없는 지금에도 어디에나 상하관계의 질서는 존재합니다. 앞쪽에 13절에서도 질서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요.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 순종하라’(벧전 2:13)고 합니다. 성자 예수님도 인간의 질서 속에 들어오셔서 낮아지는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두려워함으로’라고 하는데 두려움은 주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입니다. 여러 질서에서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하는데, 여기서 ‘까다로운 자들’은 단순히 성격이 안 좋은 사람이 아니라 부당하게 다루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인격이 아닌 역할에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인들에게 순종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요? 예 큐티를 해야 합니다. 우리들교회에서 말하는 큐티는 그냥 조용히 묵상하는 그런 큐티가 아니고 질문하고 생각하는 큐티입니다. 내 삶 따로 성경 따로가 아니라 일원론적으로 내 삶에서 일어난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과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묻고 생각하는 큐티입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100% 옳으신 하나님의 뜻이라 일어나는 일이라면 내가 모르는 그 숨겨진 뜻을 말씀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큐티를 하지 않고는 말이 안 되는 부모, 남편, 상사에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이익을 생각해서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본인의 한계를 넘어가는 그런 까다로운 자, 부당한 자들에게는 참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임계점(臨界點)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여러 분야에서 쓰이는 용어인데 조금만 더 가면 성질 상태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그 경계선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내에도 이런 임계점이 온다는 것이지요. 결혼의 임계점에 달하면 이혼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외도하는 배우자, 또 생활에 무책임한 배우자, 또 언어 폭력에 신체적 폭력까지 쓰는 배우자, 또 피를 말리도록 괴롭히는 배우자. 이런 배우자들과 결혼을 지키기는 우리의 성품으로의 인내로는 한계가 올 수밖에 없고 “더 이상은 못 참는다. 최선을 다했고, 나의 결혼은 여기까지다”라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참 인내하기 힘든 결혼 생활을 지나왔습니다. 구속사의 큐티를 안 했더라면 100번 이혼했을 우리 가정입니다. 불신 가정에서 청소년 때 친구 따라 간 교회에서 수련회 때 방언도 받고 하나님이 만나주셨지만 말씀을 모르고 성경적인 가치관이 없어서 내 죄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교회가 좋아서 교회 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나의 삶과 말씀이 같이 가지 못하는 그런 이원론적인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S대를 가고 부잣집 아들인 남편을 만나 유학을 다녀오고 또 부자 동네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침내 제 인생에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시작이 되어서 친정엄마가 2년 동안 백혈병 투병 후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남편이 가출을 했고 여자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남편의 외도와 이중생활은 25년이 지속되었습니다. 인격적인 부모님 밑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랐기에 낮아져 보지 않은 제가 순종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 교만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남편에게 순종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합당한 것은 따르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듣지 않았으니 그것이 무슨 순종이겠습니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가득했지만 말씀의 가치관이 없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니 순종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내 가정에서 윗질서는 남편이라는 것도 또 말씀을 보며 하나씩 알게 되었는데, 사환들이 주인에게 순종하듯이 순종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관용하는 남편이 아니고 까다롭기도 아주 까다로운 남편이니 순종이 더욱 힘들었습니다. 바람을 피우고 언어 폭력에 때리기도 하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은 저의 인내로는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남편의 바람을 처음 알았을 때 참기가 힘들어서 12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이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말씀도 보고 기도도 하면서 내 결혼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이중생활이 다 드러나게 된 날 말씀인 요한계시록 1장 9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는 말씀이 내 삶에 대한 해석으로 들렸고, 제가 요한처럼 남편의 이중생활이라는 그런 밧모섬에 갇혔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것이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의 고난이 해석이 되니 남편과의 삶이 힘들었지만 내가 얼마나 남편 질서에 순종하지 못하고 고난당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무시하고 차별하며 산 뼛속까지 100% 죄인임을 회개하게 되었고, “내 죄보다 내 고난이 약하다”라는 것이 인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내 삶이 해석이 되는 큰 은혜를 누렸지만 이후로도 변하지 않는 남편의 부당함에는 매일매일의 큐티가 없었다면 인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큐티를 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니 또 하루를 견디고 가정을 지켜올 수 있었습니다.
오랜 고난으로 큐티를 해 오면서 이제는 별다른 일이 없어도 습관이 되어서 아침에 눈을 뜨면 큐티인을 펼치고 ‘오늘은 무슨 말씀일까?’ 하는 그런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날이든 간에 ‘오늘은 주님이 내게 뭐라고 하실까?’ 하는 그런 마음속의 설렘이 있습니다. 제 표정이 편안해 보이죠? (답을 안 하셔^^) 네, 비결은 매일 아침 펼치는 큐티인입니다.
큐티는 욕심을 가지치기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육적인, 정신적인, 영적인 모든 욕심이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완벽주의와 그런 강박도 있어서 큐티를 잘 못하고 적용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잘 못한다는 그런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었습니다. 근데 내 영적인 수준이 이런 것이라면 이 수준으로 들어주실 그런 주님의 신뢰가 되니까 ‘아! 이런 죄책감도 영적인 이 욕심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솔직함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그날의 말씀을 쓰면서 큐티하고, 또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딱 한 가지만 적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게 있어 큐티는 떠남입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내 고정관념을 깨고, 오늘 주어지는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그런 떠남입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현재는 붙잡을 수 없고, 미래는 알 수 없다고 하는데 큐티는 현재 오늘 이 시간에 과거에 대해서 회개하고, 만물을 붙드시는 주님을 만나고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염려하고 고민하지 않고 현재를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주제 파악이라고 하면 뭔가 안 되는 사람이 자기 수준이나 역량을 아는 것만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요. 주님 안에서 주제 파악은 나를 부르신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안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큐티는 오늘 하루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안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게 해 줍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이게 되면 영육 간에 실력이 쌓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양육을 할 때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이 말은 ‘주머니 속에 송곳’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새해가 되어 직분이 새로 주어지고 할 때, ‘내가 왜 안 되었나? 내가 믿음이 있는데 직분이 안 주어졌다’ 또 ‘이런 억울한 평가를 들었다’ 하며 속상한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저는 낭중지추 얘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영육 간에 실력이 있다면 지금 비록 안 보인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송곳이 그 주머니를 뚫고 나올 수밖에 없듯이 인정을 받을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내 믿음과 없음과 실력 없음에 대해 겸손히 회개하며 주님을 만나가면 되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무능하고 무력한 나를 만나주시는 것 아시죠? (네!) 그걸 안 믿으신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 맞긴 맞습니다.^^ ‘큐티를 해야 하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새해가 시작되었는데 다른 어떤 결단보다 ‘매일 큐티를 해야겠다!’는 그런 결단을 합시다! 또 원조! 큐티의 자취잖아요. 새해에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를 많이 읽으셨겠지만 어 또 한 번 더 읽으시고, 또 아직 안 읽어보신 분은 꼭 읽어보시는 것을 권유합니다. ★우리들교회를 다니면서 큐티를 안 하는 것은 보물 창고에 들어와서 보물을 안 줍는 거랑 똑같은 것 같아요.
적용 질문드리겠습니다.
Q. 나에게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환경은 무엇입니까?
Q. 그 사람이나 환경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큐티를 하며 나의 죄를 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인정되십니까?
Q. 날마다 큐티를 하며 영적 실력을 쌓고 계신가요?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이 살기 위해서는 두 번째
2.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19-20절)
우리 교회는 공식적인 양육 과정으로 기초양육, THINK 양육 & 양육 교사, 예목1, 예목2 등이 있지만 모든 목장과 교회의 모임이 양육을 하거나 양육을 받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9절, 20절 읽겠습니다.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_벧전 2:19-20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라고 하는데요. 저도 예전에는 고난이 축복이 아니라 고난은 없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고난을 안 당하고 살까’를 애쓰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축복이라는 걸 좀 받아들이는 시점에서 ‘고난에 대해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것인지?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것인지?’ 헷갈리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고난이든 고난은 힘드니 완전히 회개가 되기 전의 내 입장은 항상 부당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감옥에 가면 자신이 마땅히 죄가 있어 감옥에 가 있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다 부당하게 감옥에 갔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인데, 하지만 이런 부당한 고난에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받는 부당한 고난에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고난을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일 겁니다. 힘든 상황을 견디려고 하나님을 주문처럼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왜 이 고난을 내 삶에 주셨는지’ 그 이유를 귀를 기울여야 들어야 합니다. 내 죄를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뜻-과녁-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은 죄라고 합니다.
최근에 해외 관광지에서 큰 절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중얼거리면서 불경인지 뭔지 하여튼 주문 외우듯이 이렇게 외우고 있었습니다. 이단 중에서도 주문을 외워서 그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어떤 집사님이 암송을 많이 하셔서 툭 치면 성경 구절을 외우셨습니다. 너무 많이 알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이 모든 고난에 남 탓을 하고, 자신의 죄를 전혀 보지 못하는 걸 보면서 교회지만 그분의 암송이 성경 구절이지만 주문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큐티는 말씀으로 주문을 외우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나의 삶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일어난 사건을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그 생각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칭찬이 없고,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하는데요. 그러면 바람을 많이 피우는 나쁜 짓을 많이 하면 참아도 칭찬이 없습니까? 반대로 조강지처로 의로운 삶을 살면서 고난을 받고 참으면 다 아름다운 걸까요?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100% 죄인이고, 하나님의 기준에 죄에 안 걸리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온전히 선을 행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죄는 다 있을 것인데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선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그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양육을 받으면서 이전에는 남편에게 피해자로 억울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아, 내가 남편을 가해한 사람일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범생으로 항상 주변의 인정만 받던 제가 양육을 통해 죄인임을 깨닫게 된 것이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입을 꼭 다물고 있었을 저의 수치와 죄를 고백하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선을 행하게 된 것이지요. 일대일 양육 중에는 당시 운영하던 학원에 대해서 “경제적으로도 풍족한데 일을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냐?”는 그 양육자의 권유로 다 정리를 하게 되었고, 양육 교사 과정 중에 또 이사야 말씀으로 제게 닥쳐올 부도에 대한 준비도 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영혼 구원을 위해서 선을 행하는 우리들교회 양육의 과정이었기에 이후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해 주셨다 생각합니다.
양육의 힘이 놀라워 저의 가치관은 점점 더 말씀의 가치관으로 바뀌어져 갔습니다. 예목 훈련을 받고 제가 양육자로 양육을 하면서 점점 더 ‘나도 죄인, 너도 죄인’의 가치관을 가지게 되어 남편의 이중생활과 부도로 인한 경제적 궁핍의 고난으로 찌들릴 수도 있었지만 이런 눌림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나 아프리카의 여자들의 삶을 보며, 첩을 두고 사는 일을 ‘나는 당하면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생각에서 ‘이 시대에 한국에서 나도 당할 수 있는 것이구나’로 고난에 대한 시각도 변했습니다. 또 내연녀로 지냈던 분들과도 같은 목장을 즐겁게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나의 구속사가 조강지처이지 내연녀의 삶으로도 구원을 이루어 가실 수 있다’는 것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남편과 사이가 좋은 분들이 부러웠지만 오히려 ‘너무 사이가 좋아서 이 좋은 말씀이 안 들리면 어쩌나’ 안타까움마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자입니다”라는 고백까지 하는 그런 레아의 당당함이 생겼습니다.
저는 남편의 바람이 10년이 넘어가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섭섭함이 아주 조금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말씀 따라 살지 않았지만 이제는 말씀으로 돌아왔는데도 남편의 문제는 왜 해결을 안 해 주실까? 남편이 돌아온다면 믿음 생활도 잘할 수 있을 것인데...’ 하는 마음이 한 구석에 있었는데 새가족 교사를 하면서 새가족분이 한 분 오셨어요. 그런데 태도가 아주 부정적이셨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그러면 “하~ 남자들 바람 안 피우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러시고. 또 부도났다고 하면 “아휴~ 그런 건 기본이지” 이러면서 고난을 많이 겪어서인지 여러 고난에 콧방귀를 안기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희 남편이 10년 넘게 같은 여자와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더니 정말 이렇게 몸을 돌려 앉으시면서 “아! 참 그 힘들었겠네!” 이러시더라고요. 그때 저는 왜 남편 바람이 10년이 넘도록 해결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어차피 겪는 바람 고난인데 아! 그 전에 끝났더라면 이분은 내가 전하는 기쁜 소식을 듣지도 않았겠구나.’ 싶었습니다. ‘고난은 이러라고 있는 것이구나!’ 10년 넘는 바람이 잎사귀로 약재료가 되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접시 물의 고난보다 나일강의 고난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처음 오신 분들이나 아직도 목장에서 내 이야기를 못하시는 분들은 나의 나눔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시고 입을 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희 큰아들은 비행에 오토바이로 날마다 사고를 쳤고, 밤 2시에 거실 유리창을 다 깨고, 또 베란다 난간에 매달려 죽는다고 하고, 칼을 들고 소동을 일으키는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고, 자퇴하고 정신과 폐쇄 병원에 입원까지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문제의 자녀를 둔 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아이에게 사과를 하잖아요. 저도 아이에게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는 적용을 했을 때, ‘그는 나보다 옳도다.’의 고백으로 아이의 수고가 아니었다면 절대 깨닫지 못할 나의 죄들, 남편의 바람을 해석하지 못하고 내 생각과 감정에 갇혀서 우울에 빠져 있던 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명을 모르니 내 연민에 빠져 있었던 저였습니다. 그런 저를 아들이 수고를 해 주어 깨닫게 해 주었으니 ‘옳도다’가 되었습니다.
적용 질문드리겠습니다.
Q. 양육을 어디까지 받으셨나요?
Q. 모든 만남에서 양육을 하거나 양육을 받고 있나요?
Q. 나를 향한 어떤 불편한 소리도 나의 양육을 위한 것임을 알고 받아들이나요?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 번째
3. 목장에 가야 합니다. (21-25절)
대지는 딱 이 세 가지입니다. 21절입니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_벧전 2:21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는 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선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것이 선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자신이 당하는 고난 앞에서 ‘당신이 옳습니다.’의 심정으로 고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혼자서 회개를 하지만 공동체인 목장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은 같은 고난을 걸어가는 형제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와 ‘너희’라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지 한 사람 훌륭한 믿음의 인물이 걸어가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많은 목장을 거쳐 왔는데 처음에 목장은 즐겁기도 했지만 쉽지 않고 많이 힘들었습니다. 별별 소리를 다 들어야 하는 것이 더 고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나를 부르신 곳이고 오픈해서 내 얘기를 하면서 저도 본을 끼치는 목장의 자취를 따라가고, 또 저도 본을 끼치고 했습니다. 목장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이 이런 고난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말씀이 안 들릴 때는 뭐 이 얘기 저 얘기 다 하겠지만 목장은 욕을 하는 곳이 아니고 사건을 통해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곳이기에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무거운 나의 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예전에 설교해 주셨던 이야기인데 해외에 어떤 유명 목사님이 큰 음란의 사건이 생겨서 사역을 다 포기하게 되었는데 그 신실한 사모님이 계속되는 남편 목사님의 음란이 끊어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했지만 딱 하나 못한 것이 남편의 이야기를 오픈을 못 했다고 합니다. 오픈이라는 것이 정화조를 잔디로 덮을 게 없는 사람일수록 조금은 쉽겠지만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조금 더 가진 게 있으면 더욱더 힘든 것 같습니다.
처음 목장에 참석했을 때 말씀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목장에 너무 무시가 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부도가 나기 전이었는데 제가 입고 간 옷과 가방에 라벨을 들춰보고 그런 분이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너무 교양이 없는 분이셨어요. 그리고 어떤 분은 그 버스 지하철 환승에 대한 이야기를 1시간 동안 나눔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결론은 ‘어떻게 하면 몇백 원을 절약하느냐’에 대한 얘기를 계속하시는 거예요. 저는 듣고 있다 듣고 있다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 정말 지갑에서 1만 원을 딱 꺼내서 그 집사님 앞에 딱 놓고 ‘이제 좀 그만하시면 안 되겠냐!’ 하는 그런 정말 심정이었습니다. 목장에서 말씀을 따라 이제 거룩한 나눔을 하는 것을 기대했었지만, 이런 여러 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차별이 많은 사람인지’를 깨닫는 시간이었고, 점점 더 한 분 한 분의 아픔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목장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저의 밑바닥을 못 보았을 것 같습니다.
장애 아이 키우며 가시는 집사님의 나눔을 통해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지만 매일매일의 위급한 상황을 살아내야 하고 감옥같이 묶여 있는 답답함을 견뎌야 하고 그런데도 이것이 아이가 낫거나 더 나아지지 않는 끝이 안 보이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같이 느꼈고, 내가 수준이 안되어 이 고난을 안 받은 것이지 바로 내가 받아야 하는 고난이라는 것이 인정되었습니다.
간암 말기이신 남편 바람의 사건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시는 집사님의 나눔을 들으면서 본인의 죽음을 앞두고 암 투병을 하면서도 그런 큰 고난을 겪는다고 내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님도 느꼈습니다.
다른 분의 나눔이 나를 살리게 되고, 나의 지질한 얘기가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약재료가 되는 것을 조금씩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교회 목장은 예수님의 자취가 곳곳에 넘쳐납니다.
22절, 23절입니다.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_벧전 2:22-23
목장은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신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매주 목장 모임은 말씀을 가지고 나눕니다. 목장에도 온갖 욕이 난무해서 “하나님이 계시면 이러시냐? 이러면 이혼하겠다! 죽겠다! 목장을 떠나겠다!” 그러며 위협이 넘치지만,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갈 수 있는 것은 우리들 목장이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가는 삶을 사는 이들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_벧전 2:24
매주 하는 목장에서 이런 모든 이야기들을 실시간으로 나누고 가니 이전 같으면 아예 이야기 자체도 안 하고 갔을 것인데, 나눔을 오픈하기 시작했어도 어느 정도 또 마음의 정리를 하면서 그렇게 나누었을 건데, 양육이 되어 가면서는 사건도 휘몰아쳐 오고,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증인’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지질한 이 얘기 저 얘기들을 다 나누면서 올 수 있었습니다.
큰아이가 정신병원 입원하고 매일이 전쟁이었고, 작은아이까지 집에 있는 리모컨, 핸드폰, 노트북, 탁자 등을 다 부수고 욕설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침 삼킬 틈이 없는 시간이 계속되니 저도 믿음을 떠나서 육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 지쳐서 기도할 힘도 없이 숨을 헐떡이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목장 식구들과 목자님들이 나보다 더 나와 우리 가정을 위해서 애타게 기도해 주셨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가정의 죄를 담당해 준 목장이었습니다. 목사님과 목장의 지체들의 그 사랑을 기억하며 결초보은의 심정으로 교회의 부르심에 어떤 것이든 순종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목장의 한 집사님이 믿음도 없으시고 연약한데 (아까 그 간증한 분이시죠?^^) 남편이 혼외자를 낳는 사건이 오니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그 집사님을 진정시킬 수도 없고, 낳은 혼외자를 되돌릴 수도, 그 남편분을 돌아오게 할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고심 끝에 어느 날 담임 목사님과 통화 중에 “그 집사님을 제가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수는 없고, 가정이 회복된 목자님께로 목장을 옮겨 드리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라고 정말 아주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어떻게 전화가 끊어졌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하여튼 저는 제가 뭘 잘못했는지를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해결점을 찾아서 말씀드린 건데 왜 그러신 걸까?’ 이렇게 고민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 집사님은 제 목원으로 있게 되었는데 한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냉난방이 안 되는 휘문채플 강당에 제가 매번 앉던 앞쪽 창가 자리에서 수요 예배 후 기도 시간에 정말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주여!!”를 외쳤던 제 모습이 생각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는 기도를 간절히 해도 어느 정도는 교양 있게 기도했는데 그날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교양이 완전히 무너진 모습으로 기도했습니다. 저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그 집사님을 살려달라고! 안 그러면 집사님도 죽고, 그 가정도 죽고, 아이들도 죽는다고” 미친 듯이 기도했습니다. 아까 우리 목사님이 막 기도하셨죠? 저도 막 살려달라고 “주여!!” 미친 듯이 그렇게 진짜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그 순간은 저도 나무에 달려 집사님과 그 남편의 죄를 담당하면서 나도 그 집사님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려 하는 것이었고, 우리 주님이 채찍 맞으시는 것처럼 기도의 고통으로 저도 나음을 얻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기도의 응답으로 집사님도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목자로서 목장은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수고하는 가족과 마찬가지로 목원이 나의 양육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임이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이후 ★어떤 목원을 만나게 되든 내가 그 목원을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것보다 그 목원을 통해 내 죄를 깨닫기에 힘썼더니 저도 양육되고 목원들도 변화되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제야 목사님의 침묵이 무슨 의미인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_벧전 2:25
‘전에는’, ‘이제는’ 애를 먹이던 큰아들의 혼전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생명을 지키고 결혼하게 된 것은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아들도 저도 보았기에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생명을 지켜 손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어 “이래서 아이를 낳을 수 없고~ 저래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교회에서는 고등학생인데도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간증을 들어왔던 터라 이제는 우리들교회라는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을 사는 강한 공동체를 만났기에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온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손녀가 3학년이 되어 어린이 큐티인 간증자가 되었습니다. 아들 부부도 목장을 즐겁게 다니고 둘째도 태어나 큰아들은 회사 일도, 남편과 아빠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으니 이전을 생각하면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의 목장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사실 목원들이 저의 육적인 회복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 주셨습니다. 끝이 안 보이는 것처럼 오랜 고난에서 육적으로도 회복시켜 주셔서 돈도 주시고 남편도 외국에서 온라인 목장을 참석하고 작은아들은 목자로 또 교회 스텝으로 섬기는 이런 은혜를 주셨습니다. 길을 잃었던 우리 가정도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같은 나이의 친구들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요. 그 친구들을 믿는 친구들이었지만 어 부모님을 돌보는 문제로 또 자신의 노후를 대비하는 문제로 염려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저도 이전에는 먼 훗날의 일인데도 얼마나 노후 때문에 염려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염려는 안 합니다.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공동체에 있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SG에 가도 목장이 있고, 또 사명 따라 목사님이 항상 말씀해 주시잖아요. “사명 따라 이 땅에 와서 사명 따라 살고 또 사명 따라 죽는 것”이라고 이렇게 얘기해 주셨는데 우리의 노후가 어떠하든지 어디에서든지 그것이 사명이라면 사명 따라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병이 걸려도, 노년의 시간이 와도 이제는 길을 잃지 않고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는 목장이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들교회 목장 만만세입니다!! 목장에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적용 질문드리겠습니다.
Q. 배정된 목장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장소라고 생각되시나요?
Q. 목장이 즐거우신가요, 힘이 드신가요? 힘들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Q. 나의 힘든 사건을 목장에서 온전히 오픈하고 있나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큐티를 하셔야 하고, 양육을 받으셔야 하고, 목장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면서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저의 삶에 이 비밀이 펼쳐지게 해 준 절대 공헌자는 남편입니다. 남편의 수고가 아니었다면 이 엄청난 천국을 어떻게 제 마음에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뜨겁게 사랑합니다.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내 죄가 깨달아지는 은혜가 임하고, 당신의 고난을 약재료로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자취를 따라가시는 분, 또 이 아름다운 덕을 널리 선포하시는 사랑하는 우리 담임 목사님의 자취를 우리도 따라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사랑스런 주님 음성
당신 곁에 가까이 이끄시네
주님 사랑을 나 누리며
그 아름다우심 나누기 원하네
예수 내 선하신 목자
나의 앞길 아시네
예수 신실하신 주께
내 삶을 드립니다♬
기도제목
“잎사귀가 약재료가 되리라”의 올해 표어대로 각자의 고난이 약재료가 되어야겠습니다. 각자가 당하는 부당한 고난을 큐티하며 해석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교회에서 주어지는 모든 양육을 통해 구속사의 가치관으로 변하고, 삶에서 적용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우리들 목장을 통해 여태껏 해왔듯이 사람들이 살아나고 가정이 살아나고 강에서 바다로 이 물결이 힘차게 흘러갈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우리가 주의 이름 한 번 부르고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도 저의 결혼에 허락하신 까다로운 남편이 부당하다고 남편의 질서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모르니 세상만 두렵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으로 제 인생에 남편의 이중생활이라는 고난을 주셨는데, 저는 부당하다고 부당하다고 여기까지라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말씀이 있는 우리들교회를 세워주셔서 양육을 받고 목장을 가면서 얼마나 많은 복을 누렸는지 모릅니다. 제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교만했는지, 저를 위한 인생을 살며 고난 당하는 지체들의 삶도 상관없고 영혼 구원과도 상관없는 삶을 살았는지 저의 죄를 끝도 없이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의 모든 악함과 음란함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님을 배반한 저 같은 사람도 구원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선으로 여겨 주셔서 길을 잃었던 우리 가정도 돌아오게 해 주셨으니 약재료로 다른 가정을 살리는 사명을 감당하게 해 주시옵소서. 매일 큐티하기를 결단하고 양육도 받아서 말씀의 가치관으로 세워지는 우리들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우리들 목장이 되도록 기름 부어주시옵소서.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고 가는 목장들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으로 사역에 힘쓰시는 담임 목사님의 영육 간의 강건함을 지켜 주시옵시고, 가시는 모든 곳에 구원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6.01.18.(주일) 베드로전서 2:18-25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
오늘은 목양국 헌신 예배로 드립니다. 목양국에는 새가족부, 양육부, 중보기도부가 있지만 “우리들교회”라고 하면 단연 ‘목장’입니다. 바로 제가 고난 가운데서 양육받고, 큐티하고, 목장에 참석하며 그 목양으로 살아나 지금까지 가정을 지키고 있는 증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순교를 앞둔 베드로가 고난 당하는 우리에게 전하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 목양국! 목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1. 큐티를 해야 합니다. (18절)
Q. 나에게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환경은 무엇입니까?
Q. 그 사람이나 환경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큐티를 하며 나의 죄를 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인정되십니까?
Q. 날마다 큐티를 하며 영적 실력을 쌓고 계신가요?
2.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19-20절)
Q. 양육을 어디까지 받으셨나요?
Q. 모든 만남에서 양육을 하거나 양육을 받고 있나요?
Q. 나를 향한 어떤 불편한 소리도 나의 양육을 위한 것임을 알고 받아들이나요?
3. 목장에 가야 합니다. (21-25절)
Q. 배정된 목장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장소라고 생각되시나요?
Q. 목장이 즐거우신가요, 힘이 드신가요? 힘들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Q. 나의 힘든 사건을 목장에서 온전히 오픈하고 있나요?
기도제목
A.
원칙과 순종의 때 잘 구분할 수 있고, QT 하도록
B.
두려움 떨쳐 버리기, 감사/경청/행동
C.
나태해 지려는 마음 내려놓고 불안해 하지 않기
안정 되찾고 한 주 평안하도록
D.
하루만 말씀에 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