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3.(주일) 시편 52:1-9 「돌이키실 때에 기뻐하리로다」
김현우 목사님
시편 52편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
1.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4.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7.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8.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하나님 아버지, 힘든 사람과 힘든 환경을 통해서 죄와 사망의 포로 된 우리를 돌이켜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나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악한 계획은 꺾이게 하시고, 주님만을 찬양하며 남은 성령의 행전을 써 내려 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도행전 큐티가 어제로 마쳤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데오빌로 각하에게 썼던 편지인데요. 편지이다 보니까 인사로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는 어제 우리가 큐티해서 알 듯이 사도행전 마지막 절에는 인사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고 마칩니다. 사도행전이 이처럼 인사도 없이 끝난 이유는, 우리가 잘 알듯이 성령행전은 마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우리들행전을 잘 써내려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같이 볼 건데요. 시편 52편입니다. 52편과 53편. 처음에는 제가 52편과 53편을 설교문을 다 작성해서 아내에게 보여줬어요. 그랬더니 아내가 한마디 하더라고요. “다 주무실 것 같은데……” 그래서 52편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52편을 우리가 묵상하다 보면 깊은 묵상 가운데 53편도 우리가 깊이 묵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편 52, 53편, 이 두 편은 공통적으로 ‘다윗의 지혜의 교훈’, [다윗의 마스길]이고요. 그리고 악인 때문에 고통하는 환경, 모든 사람이 악인이어서 고통하는 환경에서 내가 포로 된 것이 보이고 내 혀가 간사한 것이 보여서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시고 나의 기쁨이라고 고백하는 노래거든요. 그중에 시편 52편은 다윗이 구체적인 한 사람 때문에 너무나 큰 어려움을 겪는 말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엑’이라는 이 한 사람 때문에 이 52편이 나온 거예요. 한 사람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하는 그 한 사람을 묵상하다 보니까 오히려 내가 혀로 죄지은 그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걸 보게 되고, 이런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깨달아져서 아둘람 굴에서도 천국을 누리고 있더라’라는 고백이거든요. ‘저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왜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어야 되느냐고!?’ 화가 났었는데, ‘나는 더 그런 사람이었네!’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예요. 그래서 굴 속에서도, 작은 집에서도 정말 천국을 누리고 있는 거죠.
마찬가지로 53편은요, (오늘 큐티) 제목이잖아요? “돌이키실 때에 기뻐하리로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가 됐는데 하나님께서 (백성을) 돌이키셨다라고 마지막에 고백하거든요. 53편 6절 하반절 한번 같이 읽어볼게요.
[시 53:6b]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다윗이 이 시편을 쓰고 나서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긴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수백 년 뒤의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지금 내가 바벨론의 포로 될 것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지금 내가 이런 것의 포로가 됐다고 고백하는 것 같아요.
“미움의 포로, 옳고 그름의 포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것을 회개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의의 포로가 되었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돌이키셨네요.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포로가 된 것같이 그 억눌리는 그 힘든 환경이 오히려 내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천국을 여전히 누리게 하는 귀한 환경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통해 천국을 누리는 삶을, 그리고 삶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기뻐할 수 있는 줄로 믿어요. 함께 묵상할게요.
<돌이키실 때에 기뻐하리로다> 첫 번째는,
1.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 죄를 심판해 주십니다.(1-5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 죄를 심판해 주세요.
52편 표제어를 보면요. 아까 성경 읽으실 때 표제어가 나왔었잖아요?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아히멜렉이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 좋게 말해서 ‘말하던 때’고 ‘고자질하던 때’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당시에 다윗은 장인어른인 사울에게 쫓겨다녔습니다. 사울이 왕이잖아요. 왜 이렇게 쫓겨 다녔냐면 사울이 이런 노래를 들었거든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다 알고 계시네요?^^) 그러니까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질투해서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내 왕위를 노리는구나……’ 이렇게 가족이 나를 질투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도 너무나 힘든데 이제는 나와 상관도 없고 민족도 다른 도엑이, 심지어 계급으로는 나보다 한참 낮은 도엑이 나를 고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다윗이 억울했을까요? 화가 났을까요? 이 상황에서 노래를 하는 거예요. 1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볼게요.
1.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포악한 자여”라고 했으니까 표제에 나오는 도엑이라고 볼 수 있죠. 다윗은 도엑에게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라고 합니다. 무슨 계획일까요? 다윗의 위치를 알려줘서 다윗이 죽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고발해서 다윗이 죽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윗은 죽고 자기는 사울 왕한테 잘 보여서 세상 성공하려고 하는 거죠. 이런 이기적인 계획이, 남을 힘들게 해서라도 성공하려는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계획이 ‘악한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포악한 자가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할 때 다윗에게는 그것을 대적할 또 다른 계획이 있었을까요? 다윗이 (블레셋) 가드 왕 앞에서 침만 흘렸거든요. 계획을 세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에게는 그 계획을 뛰어넘는 든든한 뒷배가 있습니다. 바로 뭐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아멘! 여기서 인자하심은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헤세드”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하신지를 생각하려면 우리의 유한한 사랑의 한계와 비교해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사랑이 유한하다 보니까 분명한 한계를 자녀들 앞에서 보여줘요.
제가 딸을 양육할 때 아침 점심까지는 제가 봐도 제가 너무나 자상한 아빠인 거예요. (딸이) “아빠, 물!” 하면 바로 물 갖다 주고 “아빠, 이거 해줘 저거 해줘” 하면 바로바로 해줬습니다. (딸이) 너무나 심한 장난을 칠 때가 있잖아요? 다 받아줬어요. 딸이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받아줬어요. 그런데! 저녁이 되면 체력도 방전, 인내심도 방전되잖아요? 낮에는 잘 받아주던 그 똑같은 장난을 저녁에는 갑자기 분조장(분노조절장애) 아빠가 돼서 받아주지 못하는 거예요.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고. 지킬 앤 하이드 아시죠? “지금 이 순간~” 저녁만 되면 제가 막 하이드가 돼 가지고 막 지킬 앤 하이드가 돼서 (그런 결론으로) 저희 딸이 유치원을 등원 거부, 초등학교도 등교 거부를 했습니다.
모범생이거든요.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서 (가서는) 딸이 너무 잘한대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선생님한테 혼날까 봐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유치원에 가기 전에, 초등학교 가기 전에 두세 시간을 울다가 가요. 지금은 좀 괜찮아졌지만요. 공동체의 사랑 덕분에요.
내가 넉넉하게 있을 때는 잘해주다가 내 능력 그러니까 체력이 떨어지고, 인내심이 떨어지니까 인자가 아니라(인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자(이제)부터 화를 내는 거예요.^^; 우리의 인자와 사랑에는 이렇게 한계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제 딸이 불안한 게 제 삶의 결론인 거죠. 그렇죠. 그래서 정말 회개하며 가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인자하심에는 한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이게 다윗이 비빌 언덕이었던 거예요. 밤이고 낮이고 꼭두새벽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악한 사람이 나를 고발하고 나를 힘들게 해도 내가 버텨낼 수가 있는 거예요. 비빌 언덕이 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번 생각하고 붙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실 요즘 자신에 대한 악플을 읽다가 감당이 안 돼서 잘못된 선택하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런 기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그런 상황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봤어요. 도엑이 완전 ‘손가락 파이터’가 돼 가지고 다윗에 대한 악플을 막 쓰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윗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분명한 자존감이 있기 때문에 나를 향한 악한 계획 그 악플을 담대하게 읽을 수 있는 거예요. 객관적으로 그 말을 직면하고 ‘진짜 그러한가’ 오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자존감인 줄로 믿습니다. 나를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가 항상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 존재만으로도 자존감이 있어야 돼요.
사실 이 말을 하는 저도 자존감이 좀 없어요. 하나님이 아니면 저는요 진짜 정말 이 앞에 서는 게 힘든 사람이에요. 근래에 방송 출연 제의를 받았거든요. 조금 아까 우리 목자님이 간증하신 것처럼. 다른 방송국에서 방송 (출연) 제의를 받았는데, ‘내 얘기를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악플을 쓰면 지난주에 등록한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될까, 내가 그 악플을 읽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니까 감당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직은 못 나가겠다”고 “우리 어머니의 구원을 위해서 좀 있어야겠다”고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요. 근데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자존감 없는 저를 이 다윗의 고백으로 또 같이 나누게 하신 게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 자존감이십니다!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십니다! 이걸 고백하고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다윗은 도엑의 악한 계획을 직면하며 2절을 노래합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게요.
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도엑의 혀가 인격이 있는 것 같아요. 마치 혀에 인격이 있는 것 같아요.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한다”고 해요. 그리고 “날카로운 삭도” 그러니까 ‘칼’같이 “간사를 행한다”고 합니다. 도엑은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잖아요. 에돔 사람이잖아요. 거기다가 자기가 고발하려는 사람은 왕의 사위입니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칼날 위의 물방울처럼 사울 앞에서 간사를 행해야 되고, 그러면서 동시에 그 말이 다윗에게는 날카로운 칼로 돌아오는 겁니다. 이렇게 높은 사람한테는 말(을) 조심(하면서), 낮은 사람한테는 마구 찔러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다윗은 왜 도엑의 혀가 이렇게 악을 행하는지, 직면하고 또 진단하는데요. 3절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게요.
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선이나 의보다 악과 거짓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보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아부하거나 상처를 준다는 거예요. 객관적으로 말을 못 하고 지나치게 아부하거나 지나치게 상처를 주는 인생을 사는 것이죠.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인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니까 어떤 말을 해도 자랑과 아부가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겐 상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게 도엑의 혀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혀가 아닐까 생각을 해요.
저희 어머니는 놀랍게도 친어머니십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 상처 주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저는 어머니의 말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말 좀 조심하시라고 대학교 때 사드린 책이 있습니다. <말의 힘>이라는 책이었어요. ‘말에 힘이 있으니까 어머니 말조심 좀 해주세요’(라는 뜻으로요.) 그런데 돌아보니까 어머니에게 상처되는 말이 무엇인지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말만 족족 골라서 어머니께 했던 게 저더라고요. 어머니는 감정적이시니까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계산적이어서 ‘어머니가 이 말을 하면 상처받겠지’ 하며 아주 정확하게 타격을 했던 제 혀가 간사한 혀가 맞더라고요. 정직하게 돌아보면, 사랑해야 할 것은 사랑하지 않고 거짓을, 악을 더 사랑하는 제 모습을 보게 돼요. 그러니까 제가 도엑이죠. 제가 도엑 맞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우리의 혀는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상처를 주게 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보다 누구를 더 사랑해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예요? 자기 자신이에요. 그래서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도엑이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주니까 상처만 주고 상처만 받습니다.
이렇게 나 중심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말은 나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거예요. 결혼도 마찬가지잖아요. 나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복이라는 목적에 우리 초점이 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 가운데 살아요. 그러니까 나 때문에 말을 하고, 나 때문에 아침을 차리고, 나 때문에 적용을 하고 이러니까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런데 지난 주일에 놀라운 가정을 우리가 봤지 않았습니까? 아프리카 선교보다 힘든 재혼 가정이 이타적인 적용으로 심방하고 상담하다 보니까 싸움이 그쳤다. 싸우다 길게 늘어난 그 메리야스를 생각하면서 싸움이 그쳤다 하니까 너무 놀라운데, 제가 목장을 인도하다 보니까 아내 집사님들이 다 부러워하는 거예요. 싸움이 그쳤다고 하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사랑할 때에야 상처뿐인 가정에서 상처가 약재료가 되어 사람 살리는 가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은 “셀라”라고 해요. 잠깐 쉬면서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 나서, 혀에 대해서 묵상하다 보니까 이렇게 외치면서 시작하네요. 4절입니다.
4.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앞서 “포악한 자여”이러면서 도엑을 얘기했잖아요. 근데 다윗이 셀라의 깊은 묵상을 마치니까 포악한 자가 아니라 “간사한 혀여”라고 하고 노래를 부르네요. 간사한 도엑의 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혀를 묵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도엑이 아니라 이제는 혀에 대해서 집중을 합니다. ‘모든 혀가 간사하구나’ 이걸 또 고백하는 거죠. 이렇게 간사한 혀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한다고 해요. 예. 남의 수치를 나누는 말을 좋아한다는 거죠. 예. 우리가 목장은 좀 이렇게 3시간이 힘들어도, 남의 뒷담화 3시간은 쉽잖아요.^^;; 그렇죠? 뒷담화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아요. 우리가 다 간사한 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그 사람을 위한다고 하는 듯하면서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그 사람의 수치와 죄를 드러내는 혀가 우리의 혀예요. 내 혀지만, 내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게, 또 우리 혀예요. 그렇죠. 하지만 남에 대해서 험담하고, 고발할 때는 따발총이 되는 게 또 우리 혀예요. 네. 아주 날아다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혀가 창조하신 주님의 의도에 맞게 기능할 때가 딱 한 군데 있어요. 바로 공동체 안에서 말씀으로 깨달은 내 죄와 내 수치를 나눌 때, 비로소 내 혀가 제 기능을 합니다!
제가 어머니의 죄와 수치를 나눌 때는요. 정말 많이 나눴어요. 양육 때도 나누고~ 목장 때도 나누고~ 어디 초원 가면 나누고~~~. 어머니 죄송합니다. 많이 나눴어요. 그런데 그렇게 어머니의 수치를 나눌 때는 여전히 자존감이 낮고, 여전히 아침 점심 저녁으로 자살 충동이 올라오고, 매 순간 힘들었어요. vs. 그런데 저의 죄와 저의 수치를 나누기 시작하니까,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살 충동은 낮아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진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요. 그러니까 내 죄와 수치를 말씀 안에서 나누는 게 진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에요.
혹시 공동체 안에서 내 죄와 수치를 나누다가 힘든 일을 겪을까 봐 걱정이 되시는 분 계십니까? 저도 처음에 걱정이 됐어요. 놀랍게도 우리가 말씀의 공동체 안에서 오픈을 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지난 주일 장로님도) 된장국 먹다가 “이혼했어요.” 그랬더니 “이혼했대. 된장국 더 드려.” 이러시잖아요. 내가 당해야 할 수치를 겪고 가기를 각오하면 하나님이 지켜주세요. 여호와의 인자는 항상 있도다! 항상 있도다! 광풍 가운데서도 “이제는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말씀 안에서 깨달은 내 죄를 고백할 수 있고, 그것이 나를 보호하고 지키는 방법이에요.
이렇게 혀에 대해서 묵상하기를 마친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기 시작하는데요. 5절 말씀 한번 같이 읽어볼게요. 너무 통쾌하거든요. 시작.
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좀 잔인하지 않습니까? 혀 얘기하다가 장막에서 또 살아있는 땅에서 뽑아내신다고. 하나님이 영원히 멸하신대요. 하나님이 영원히 멸하는 지옥에 대한 말씀이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죠. 천국보다 더 많이 나와요. 그런데 이 심판은 장막에서 뽑아내고 땅에서 뿌리를 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영원히 된대요. 영원히 된대요.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회복될 수 없는 심판이 있대요. 믿으십니까? 네. 왜 이렇게 무시무시한 심판을 선포할까요? “그러니 이 땅에서 심판당하고, 고난받고, 회개하고, 멸망당하지 않는 게 최고다!”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 간사한 혀가 지금이라도 회개하는 게, 지금이라도 회개하는 게 최고다. 회개하라!”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잠시 장막에서 뽑아내시는 심판을 당하고, 살아있는 땅에서 뿌리를 빼시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죄를 짓든 말든 가만히 두시는 것은요. 사랑이 아닙니다.
정말 사랑하는 자녀가 수많은 차들이 달리는 곳으로 막 뛰어간다면 가만히 지켜보겠습니까? 뛰어가서 말리겠습니까? 우리는 말리잖아요. 방치하지 않잖아요. 사랑은 방치가 아닙니다.
제 딸이 미운 4살일 때 어느 날 저녁에 저와 아내와 딸이 산책을 나갔어요. 집 앞에 8차선 도로가 딱 있는데, 갑자기 얘가, 미운 4살 특징 아시죠? 손을 뿌리치고 차로 뛰어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빨간 불인데. 불러도 대답 없는... 정말 막 뒤돌아보지도 않고 뛰어가는 거예요. 여러분 “저러다 죽으면 내 탓 아니다~ 나는 열심히 소리 질렀어~” 이러면서 가만히 있는 게 사랑일까요? “나는 인격적으로 자녀를 길러야 되니까 가만히 냅 두고, 그의 행동에, 결정에 내가 동의해 줘야지.” 그런 부모가 어디 있어요? “안 돼!!!!” 이러면서 뛰어가 가지고 저는 또 그때 분조장이 발동했습니다. 4살 아이를 들쳐 업고 엉덩이를 얼마나 때렸는지. 제가 정말 이제 분조장이 맞아요. (그렇다고 또 그렇게 또 오해하시면 안 돼요. ‘조절이 아예 안 되시는구나.’ 이렇게 오해하지 마세요.^^ 네. 우울증이에요. 그냥 분조장은 아니고 네.)
마찬가지로요. 우리가 우리 말실수가 있잖아요. 사람이 살다 보면 말실수 하잖아요. 이게 공동체 안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거 수치를 당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챙겨주시는 사건인 거예요. 내 죄가 공동체에서 드러난 거 있잖아요. 하나님이 “안 돼!” 하면서 말리시는 사건인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 돼! 거기로 가면 죽어 큰일 나!” 하나님이 “항상 있도다” 하신 그 ‘하나님의 인자’로 우리를 막아주시는 거예요. 이것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붙어만 가도 수지맞는 공동체가 맞아요.
다윗이 쓴 시편 23편에 이 모습이 나오는데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면서 노래를 쫙 부르다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시 23:6) 하잖아요. ‘나를 따르리니’ 이 단어를 제가 신학교에서 배우고 나서 그 자리에서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나요. ‘따른다’는 표현이 마치 강아지가 뒤따라오는 것처럼 ‘졸졸 쫓아가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우리는 한국어는 좀 그렇게 느껴지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사냥개가 멧돼지나 사슴을 따라가는 것처럼 전속력으로! 따라가는 걸 얘기해요. 차도로 뛰어가는 우리를 전속력으로 따라와서 막아주시는 하나님이세요!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더라도, 고발을 당하는 고난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돌이키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사랑 받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내 힘으로 안 되는 사건을 맞으면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됐다는 간증을 제가 하나 읽어드릴게요. 너무 제 얘기만 하는 것 같아 가지고 간증을 좀 많이 찾아봤어요.
내 힘으로 안 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돌이키신 목자님의 고백.
저희 아들이 고등학생일 때 제가 상상도 못 한 일을 할 줄 몰랐습니다. 휴학을 한다고 하질 않나, 그냥 일탈인 줄로 알았지만 결국 나중에는 자퇴를 한다고 하질 않나. 그런 일이 있은 후 벌써 몇십 년이 지났습니다. 나중에 아내가 교회를 다니게 되었지만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은 이해도 안 되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습니다. 자연히 목장은 참석할 마음도 없었죠. 근데 둘째 아들이 방황하는 해달별이 떨어지는 사건이 생기면서 정말 기대를 걸었던 아들에게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상황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저의 삶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이 저를 놓지 않으셨기 때문에 결국 저도 목장도 참석하고 수요예배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찬송하면 눈물이 나오더랬습니다. 어느 날에는 한숨을 쉬면서 터덜터덜 휘문으로 걸어가면서 눈물이 나는데 ‘이 방법이 아니었다면 (그 아들이 속 썩이지 않았다면) 절대로 제가 교회를 다니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아신 하나님이 강제로 견인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인생의 논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 하나님이 계신다면 정말 열심히 한 사람은 당연히 성공한다고 생각했고, 그에게 맞게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제가 가진 이 세상의 이치와 논리에 맞지 않았던 사람들은 다 비난했는데 특히 제 아버지와 형이 그랬습니다. 그러니 용서가 안 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열심히 살았는데도 아들이 저렇게 되니 제 세상 이치에 맞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던 것이 저의 심각한 자기 중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박해와 울음의 사태였습니다. 결국은 그 사건으로 교회로 인도가 되었습니다.
그 둘째 아들이 보석인 거 맞죠? 이 둘째 아들 아니었으면 목자님이 목자님이 되셨겠어요? 심판 같은 사건인 것 같고, 정말 나를 고발하는 사건이 있어서는 안 될 사건 같지만,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거죠. 이 사건 통해서 도엑같이 비난하던 내 죄를 본 것이 항상 있는 하나님의 인자를 경험한 사건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적용 질문드릴게요.
Q. 힘든 사건과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있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Q.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수치와 죄를 드러내어 해롭게 한 적이 있습니까?
Q. 이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심판의 사건을 허락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제 주변에도 도엑이 있거든요.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근데 그분들 때문에 ‘죽겠다 죽겠다’ 하지만 ‘그분들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구나!’ 그래서 “너무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엑님들!” 꾸뻑.
<돌이키실 때에 기뻐하리로다> 두 번째로
2. 의인은 심판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6-7절)
심판 앞에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요. 6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볼게요.
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52편에서 의인이 최초로 등장합니다. 의인의 특징이 뭔가요? 악인의 심판을 보고 비웃기도 하는데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그 심판을 두려워한대요. 역전이 됐으니까 비웃는 거는 당연한 거죠. 근데 두려워한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의인인 줄로 믿습니다!
앞서 도엑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어요. 이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고 나서 이 사울이 아히멜렉 제사장 가문을 다 죽이려고 했을 때 이 사울의 군사들은 아무도 그 일을 못 했어요. 근데 도엑이 “내가 하겠다!”고 하고 진멸하는 일을 했습니다. 제사장 죽이는 일을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요. 용기가 아니라 심판받을 죄악이더라고요. “하나님도 없다! 나 내 힘으로 산다!!” 이러면서 사는데도 잘 되는 거는요 축복이 아닌 거예요. 이 하나님이 너무 두려워서 “하나님밖에 붙들 사람이 없다. 하나님밖에 없습니다!!”고백하는 게 그게 축복이더라고요.
심판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의인들이 그를 비웃어 말한다고 합니다. 역전이 되는 거예요. 심판의 때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고, 믿는 우리에게는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전의 은혜가 있어요.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에게 붙회떨감은 - 붙으면 회개하고 떨어져도 감사하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에요! 붙어서 감사하는 건 세상도 할 수 있어요. 떨어져서 자책하는 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붙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내 죄를 보며 회개하고, 떨어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인자가 항상 있도다”를 깨닫게 하신 사건인 줄로 알고 감사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저한테 왜 이렇게 이제 떨어지는 사건만... 우리 고3 아이들이 붙으면 연락을 안 해요. 떨어진 아이들만 연락해요. “목사님, 저 떨어졌어요. 단국대 떨어졌어요. 어제 떨어졌어요~~” 떨어진 것만 얘기해요. 그런데요. 이렇게 떨어진 아이들이 큐티를 더 잘해요. 신기하죠? 붙은 아이들은 더 잘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지만... 참 우리가 겸손한 사람은 없고 겸손한 환경만 있다 보니까 정말 회개하시기를 우리 붙은 붙은 고3, 또 재수생, 우리 모든 입시생과 부모님 정말 철저하게 회개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이렇게 역전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어요.
그렇다면 의인들이 뭐라고 하면서 비웃을까요? 7절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7.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 되신 모든 재물의 풍부함, 재물뿐이겠어요? 내 의를 막 쌓아 놓아서 내 곳간에 내 의가 가득 찼으니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의 풍부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겠죠. 그러니까 착한 게 악한 게 맞습니다. 하나님 대신 God(갓, 하나님)이 아니라 Gold(골드, 금(돈))를 의지하는 것이 악인의 특징인 거예요. God이 아니라 ‘L’ 하나 집어넣어서 Gold. 있으면 먹고 없으면 뭐 해야 돼요? 금식하고 죽으면 천국 가는 게 인생인데 하나님보다 더 의지해서 골드를 쌓아야 된다고 하는 게... 그게 없으면 자존감이 쫙 떨어지고 그게 있으면 자존감이 쫙 올라가는 게 악인의 특징인 거예요. 이렇게 자기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가 없대요.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하나님 만난 자존감-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의 자존감-으로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잔고가 많아도 감사하고 회개하고, 잔고가 없어도 감사하고 회개하고. 이게 돼야 되는데 참 이게 어렵죠. 우리 남자분들은 특히나 어깨가 쭉 같이 떨어지는 걸 경험하잖아요? 그런데 그 사건들을 통해서 정말 믿음의 대제사장으로 우리 가정마다 세워지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당시에 다윗은 어떤 상황이었나요? 사울에게 피하느라 진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였어요. 그래서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떡 좀 달라고 구걸하듯이 거짓말했던 게 다윗이었어요. 가드 왕 앞에 갔을 때 ‘내가 가드 왕 앞에 피하면 좀 살겠지’ 싶었는데 “앗!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던 그 다윗이 아닙니까?” 해서 수염에다 침 바르고 대문을 그적거리던 다윗이었어요. 그리고 이 사건을 겪고 겨우 갔던 곳이 굴속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든든하게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겸손한 상황이었죠. 그러나 굴 속에서도 자기의 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경험했으니! 나의 풍부함 나의 든든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자가 항상 있도다!”를 경험한 다윗이 이 노래를 부를 수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 내가 이렇게 겸손한 환경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런 의인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걸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내가 하나님만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내가 의지할 게 딱 생기면 바로 요동치며 흔들리는 인생입니다. 다윗이 편해지니까 옥상에서 여자 보고 데려다가 그렇게 동침해서 아기 만들고... 그리고 그 남편 우리아는 그렇게 죽이고.
그러니까 어떤 분이 저한테 솔로몬 같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저희 어머닌 과부, 아빠는 유부남인 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랬더니 그 외국인 분의 한 분이요. “Oh! You 솔로몬!!” 하시더라고요.^^ 예, 다윗의 아들 솔로몬 맞습니다. 할렐루야!! 제가 솔로몬인데요. 근데 그 겸손한 환경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의인일 수가 없는 거예요. 엎어지게 되고 넘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당한 고난을 보면서 ‘어쩌면 저럴 수가 있어! 나는 당하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나도 두려워 주님 붙드는 인생 살아야겠다.’ 이게 의인이 붙들 수 있는, 의인이 보일 수 있는 고백이죠. 두려워하여!!
붙들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서 주님 붙들게 된 자매의 나눔.
붙들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서 주님 붙들게 됐다는 한 우리 청년부 자매의 나눔인데요. 너무 은혜가 되더라고요.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저는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화장하는 시간 내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화장하는 시간 내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나고 천국 가서 아빠를 볼 수 있을지 목사님을 붙들고 물어봤습니다. 목사님은 그에 대한 답으로 큐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 마음속으로는 ‘결국 목사님들의 처방은 늘 큐티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더 막연한 느낌을 받았대요. 그래서 그동안 자주 그랬듯이 또 자기 연민에 빠져서 며칠간 무기력한 상태로 처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소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 대신에 의지하고 있던 남자친구와의 이별까지 겪어 한순간에 제 모든 의지의 대상들이 사라지니 오히려 제 머릿속에 목사님이 큐티해 보라고 하신 말씀이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게 아빠가 돌아가셔도 남친이 헤어져주지 않으면 내려가질 않네요. 그렇죠? 그래서 속상해하지 마세요. 부모님들. 이게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인정하기 싫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지금이 내가 온전히 하나님께만 의지해 볼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인 것을 인정하고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이번만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라고 하면서 큐티를 하면서 매일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봤습니다. (너무 잘했어요.) 그랬더니 놀라운 경험을 했어요. 제가 가진 불신과 의문점들을 큐티하며 당사자인 하나님께 직접 물으니 그동안 빈껍데기 같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들었던 제 수많은 궁금증에 대해서 하나하나 다 답변을 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저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들까지도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강남 족집게 선생님처럼 다 짚어주시면서 명쾌한 답을 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강남 사시나 봐요.) 제가 이렇게 큐티를 하면 할수록 너무 두려움의 연속이었고, 하나님이 제가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저를 많이 사랑하시며 제가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보다 훨씬 답답하고 마음 아파하셨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왜 그동안 목사님들이 결론으로 늘 큐티를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원래라면 제게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정도의 사건이 온 것이지만 공동체와 말씀이 있었기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어요. 물론 아무리 하나님을 붙들고 가도 아직 제게는 아빠라는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고 눈물이 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받으며 조금씩 주님께 나아가는 중입니다. 이렇게 점차 말씀으로 회복해 가는 제 자신을 보며 아버지가 정말 마지막까지도 저를 위해 수고해 주신 것을 한 번 더 느꼈습니다.
너무 귀한 자매의 고백이죠. 이 자매가 사실 여기 제가 요약하면서 뺐는데 반려동물이 죽었고, 아버지가 오랫동안 암 투병하시고 소천하셨고 그리고 남친도 간 거예요. 남친이 마지막 이 키 포인트였네요. 근데 이 사건 가운데 의지할 게 하나도 없으니까, 자기를 스스로 풍부하게 하고 든든하게 할 게 하나도 없으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네요.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내 스스로 든든하게 하고... 우리 자녀에게 등록금 못 대주고 결혼할 때 좋은 거 못 해 주고, 내가 내 스스로 든든하게 할 게 하나도 없는 이 비천한 환경에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자체가 자존감이다! 이것이 나의 복이다!’ 고백할 수 있는 그런 복을 누리실 수 있길 바랍니다.
적용 질문드릴게요.
Q. 다른 사람의 고난과 심판의 사건을 들을 때, 내 죄가 보여서 두려워한 적이 있습니까?
Q. 내가 의지하는 것은 God(갓, 하나님)입니까? Gold(골드, 돈)입니까?
(이게 목사님이 맨날 물어보시는 건데 저도 물어보게 되네요. 저도 그렇거든요. 저도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조금이라도. 예 그러니까 자꾸 하나님 앞에 좀 불평하게 되는 게 그 문제인 것 같아요. 아직도 골드인 것 같아요. )
Q. 하나님 외에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남친, 여친, 든든한 우리 아들입니까?
저희 어머니가 지난주에 오셔 가지고 등록을 하셨어요. 그래서 수요 예배도 쫓아오셨어요. 근데 저희 어머니 좀 제가 든든한 사람이 돼서 너무 교만해지시면 안 되니까 이 얘길 드려요. “어머니 제가 다 수지 드러낼 거니까요. 든든해 하지 마세요. 네 죄송합니다. 미리 죄송합니다.” 너무 든든하면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께 제가 든든한 아들이 되는 게 적용일 것 같고, 또 저희 어머니는 아들을 너무 든든하게 여겨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게 적용일 것 같아요. 그렇죠?
<돌이키실 때에 기뻐하리로다> 세 번째,
3. 어디서든지 천국을 누리게 하십니다.(8-9절)
언제 어디서든지. 8절 같이 한번 읽어 볼게요.
8.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아멘. 다윗은 ‘그러나’의 신앙을 보입니다. 앞서 이 땅에서 포악을 행하며 다른 사람을 해치고 고발하는 도엑과 사울이 여전히 있지만 다윗은 ‘그러나’의 인생을 누리고 있어요. 그러나 왜냐하면 자신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올리브 나무-같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서 하나님의 집에 있는 다윗의 이 고백은... ‘하나님의 집에 있다!’라고 이렇게 고백하는 거는 어디서 했을까요? 사무엘상 21장 22장의 동선을 보면요. 다윗은 아둘람굴에 있었을 겁니다. 아둘람굴이 어딘지 아시죠? 환난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400명이 모여 있는, 남성들의 홀아비 냄새가 났을 것 같은 아둘람굴.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어서 아둘람굴에 있는 다윗은 내가 하나님의 집에 있는! 그것도 푸른 감람나무 같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왜 그렇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래요. “항상 있도다!” 한 그 하나님의 인자함이 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어요”라고 하는 거죠. 메마른 광야, 캄캄한 아둘람굴에 있어도 자신이 푸른 감람나무라고 하는 건데요.
집에서 지중해 식물을 키워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저는 로즈마리를 되게 좋아해요. 로즈마리를 그래서 키워보려고 화분을 여러 개를 갖다 놓고 키워봤어요. 다 죽였어요. 로즈마리가 물 조금만 많이 줘도 죽고, 통풍이 안 돼서 죽고, 햇볕이 조금 안 들어와도 죽어요. 맞죠? 키워보신 분들 다 아시죠? 감람나무 올리브 나무는 더 예민해요. 더 빨리 죽어요. 그런데 햇빛도 들지 않는 아둘람굴 속에서 다윗이 “나는 푸른 감람나무 같도다!” 고백하는 거예요. 계시록에 보면요. 하나님이 태양이 되시기 때문에 천국에 태양이 필요 없대요. 바로 이 고백을 다윗이 천국을 누리면서 고백하는 거예요. 이 빛도 들지 않는 아둘람굴 속에 하나님이 친히 태양이 되시기 때문에 “나는 푸른 감람나무 같도다!” 이 고백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차 가지고 꼭 이렇게 비교하잖아요. 남자분들. 제가 수요일 날 진짜 너무나 주눅이 들고 눌렸습니다. 제가 우리들교회 처음 왔을 때 2005년식 그랜드 카니발을 끌고 다녔어요. 2023년도에 왔는데. 20년이 가까이 된 차에서 옆 도어에서 녹물이 흘러내리는데 정말 살벌하게 녹물이 흘러내리는데 점점 벌어지고, 뭐 깨지고, 달달달달 소리가 나고, 어느 날은 새벽기도 오는데 제 사역자 동료 사역자들이 다 놀래가지고 “목사님! 차 뒤에서 하얀 연기가 나요!” 그 차를 타고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들교회를 오는데 어쩜 그렇게 판교 채플에 독일 차, 일본 차, 하이브리드차, 전기차가 들어오는지 막 주눅이 들더라고요. 주눅이 들어요. 그러니까 우리 남자분들은 그런 게 있잖아요. 그렇죠? 집도 어떻습니까? 나보다 넓은 데 사는 사람들, 좋은 아파트 사는 사람들 보면 주눅이 들잖아요. 그렇죠? 저희 집은 저보다 한 살 어린 아파트. 한 살 어려요. 저보다 한 살 늦게 태어나서 너무 다행이더라고요.^^ 너무 주눅 들잖아요. 근데 그곳에서 10명이 둘러앉아서 꽉꽉 차요. 10명이 둘러앉아서 목장을 할 수 있으니 저희 집은 하나님의 집이 맞고요. 감람나무가 맞습니다. 여러분의 집은요, 다른 사람하고 비교할 게 없어요. 하나님을 함께 찬양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고, 그리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함께 주님 앞에 예배할 수 있으니 여러분의 집은 여러분의 처소는 하나님의 여호와의 집이고! 여러분은 푸른 감란나무인 줄로 믿습니다! 그게 우리의 자존감이고 이 고백인 거예요. 찬양이 하나 떠오르네요. 제가 부전공을 좀 했거든요.
♬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제가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형은 아버지가 다르고 제가 생각해 보니까 어떤 집사님이 이복형제, 이부형제가 다 있다고 해서 제가 쫄았거든요. 그런데 저도 다 있더라고요! 아버지 쪽은 이복형제가 있고, 그리고 저희 집은 이부형이 있어요. 19살 차이가 나는. 그런 집에서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항상 어린이날만 되면 아빠 엄마 손 붙잡고 있는 그 아이들이 너무 부러워서 저 스스로를 계속 갉아내고. 그러니까 이제 밥을 먹어도 몸에 안 좋은 것만 투게더(아이스크림)를 가장 큰 걸 사서 저녁에 다 먹고 그리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빨리 하늘나라 가고 싶은 마음을 이 투게더를 한 통으로 보여주는 거죠.^^;;
이런 인생이었어요. 주님이 저를 만나주셨기에 이렇게 아둘람 공동체 같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인생이 ‘여호와의 집에 푸른 감람나무다’ 고백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제가 공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치료할 약재료가 있어요. 해줄 말이 있어요. 아빠 없는 애들한테 해줄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푸른 감람나무 잎사귀로 사용하신 인생이라고 고백해요.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자존감이 되어 사명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아팠기 때문에 내가 힘들어 봤기 때문에 우리는 푸른 감람나무 나무가 돼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리게 될 줄 몰라요! 그 기대가 성령행전을 쓰는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천국을 누리는 것은요. 목자님 간증처럼 내가 노력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멱살을 잡아서 내 등을 잡아서 견인하신 거예요. 9절 말씀 마지막으로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어보겠습니다.
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아멘. 내가 천국을 누리는 이유는요. 놀라운 일을 다 행해주셨기 때문에 그래요. 여호와의 집에 푸른 감람나무가 되도록 심판해 주시고, 고난 가운데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나를 푸른 감람나무로 쓰시기 때문에 나는 할 게 없어요. 영원히 (뭐 해요?) 감사하리이다. 이 다윗이요. ‘주의 이름이 선하시기에 성도 앞에서 주의 이름을 사모한다’고 또 말하네요. ‘성도 앞에서’ 이 성도가 누굴까요? 아들랑 공동체! 빚지고 환란 당하고 원통한 그 400명의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공동체가 있어야 돼요. 위로를 어디서도 받을 수 없지만 하늘 위로로 사는 사람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찬양하며 함께 노래 불러야 할 공동체인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 땅이 아니라 오직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공동체가 된 것이 천국 공동체이고 천국의 맛보기인 줄로 믿어요.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비합리적인 사랑을 누리고 계신 성도님.
결혼할 때 남편은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악과였나 봐요.^^) 학벌도 좋고 가방끈도 길었고 저 사람이면 내가 평생 편하게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저와 의논하지 않고 제가 수술받는 사이에 직장을 그만두고 10년 가까이 집에 있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을 주셨느냐고 많이 물었어요. 신앙적으로 학문적으로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습니다. 공동체에 와서는 ‘내 죄패는 하나님 앞에 한 발 앞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는데 지금까지 그 씨름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도 끝까지 믿었던 것은 남편의 머리였습니다. (그러니까 똑똑한 거예요.) 저렇게 있다가도 한 방이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믿던 남편의 머리를 뇌졸증 사건으로 가져가셨습니다. 운영하고 있는 학원이 어려워지면서 얼마나 내 열심이 많은지 돌아보며 회개했습니다.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는 내가 많은 짐을 지고 가며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 즐겁게 남들이 보기 좋게 인정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작년에 번아웃이 오면서 시아버지 시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다 해소됐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 여러 일로 나에게 다시 그렇게 대하면 그 감정들이 다시 올라옵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분노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교만해서 남의 잘못된 부분이 먼저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러나 공동체에서 남편을 퇴근해서 매일 2시간씩 운동시켜준 목자님, (이게 되게 쉽지 않잖아요. 퇴근해서 매일 2시간씩) 내가 퍼져 있을 때 문고리에 음식을 걸어 주었던 집사님, 내 손을 잡아주었던 공동체를 통해 여기까지 견뎌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앙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공동체 안에서 많이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비합리적이잖아요. 원수를 위해서 자기 외아들을 주셨어요. 이게 어떻게 합리적입니까? 비합리적이잖아요. 인간의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어요. 그러나 그 사랑을 받은 공동체가 있기에 우리도 비합리적인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정말 그냥 이렇게 가 가지고 막 정말 옳은 멍소리 하시면 안 돼요. “집사님, 지금 힘드니까 아둘람 공동체고요. 하나님의 집이고요. 푸른 감람나무가 될 겁니다”가 아니라.. 그렇게 옳은 멍소리 하시면 안 되고 가서 손 붙들어주고, 2시간 동안 운동시켜 주셨다잖아요. 손이 가는 수고로. 퍼져 있을 때 음식을 갖다 걸어주고 이 수고가 있을 때 나도 고백하지만 주의 성도들 앞에서 고백하는 찬양이 우리 공동체 안에 흘러나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적용 질문드릴게요.
Q. 나는 ‘그러나’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Q. 내가 천국을 누리게 해준 최고의 환경은 무엇입니까?
Q. 나에게 있는 환난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예배 공동체’는 누구입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돌이키실 때에 기뻐하리로다’
첫째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 죄를 심판해 돌이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거죠.
둘째는 의인은 심판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내가 당한 심판이 아니어도 그 나눔을 듣고 돌이킬 수가 있어요.
세 번째 어디서든지 천국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둘람굴에서도 돌이켜 기뻐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기도제목
세상적으로 보면 우리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재물의 풍부함도 없고, 자기 스스로 든든하게 할 것도 없어요. 계획을 짜서 계획대로 할 것도 없어요. 다 무너지니까. 도엑은 고발하고, 사울은 죽이려고 하고. 아둘람굴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환난다고 빚지고 원통한 400명하고 노래 부르는 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여호와의 집에서 하나님을 붙든 푸른 감람나무가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지금 나의 집의 상황은 내가 당한 이 상황은 정말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없지만 주님의 약속 믿고 주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다고 하였사오니 주님 붙들고 나아갈 수 있도록 주여 내 손 붙들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를 힘들게 하며 고발하는 어머니가 도엑인 줄 알았습니다. 왜 그렇게 상처를 줄까? 상처가 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까? 상처가 되는 상황을 왜 만들었을까? 원망하며 불평하며 그렇게 죽어가던 제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찬양하다 보니 제가 바로 도엑이었네요! 주님, 내 죄가 보이게 하시고 내 죄가 고백이 되게 하시니 이제는 살아 하나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로 이제 약재로 나눠주고 살게 하시니 주여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제 ‘힘들었다, 힘들고 끝났다, 도엑에게 고발당하고 끝났다’가 아니라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약재료가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정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인생이 돼야겠는데, 주여, 우리를 만나주시고, 아버지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힘든 가운데 있는 우리가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나무처럼 무성한 잎을 피워내고 아름다운 열매 맺어 주님 앞에 올려드릴 수 있는 찬양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주여 붙잡아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주 주님의 집에 푸른 감람나무로 세우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오늘 드린 헌금을 기쁘게 받아주시고, 주여, 사명 감당하기 위해 하는 모든 사업과 프로젝트와 아이디어에 기름 부어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눠줄 것이 있고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는 푸른 감람나무 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함께하시길 소망하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 죄를 심판해 주십니다.(1-5절)
Q. 힘든 사건과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있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Q.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수치와 죄를 드러내어 해롭게 한 적이 있습니까?
Q. 이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심판의 사건을 허락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2. 의인은 심판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6-7절)
Q. 다른 사람의 고난과 심판의 사건을 들을 때, 내 죄가 보여서 두려워한 적이 있습니까?
Q. 내가 의지하는 것은 God(갓, 하나님)입니까? Gold(골드, 돈)입니까?
Q. 하나님 외에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남친, 여친, 든든한 우리 아들입니까?
3. 어디서든지 천국을 누리게 하십니다.(8-9절)
Q. 나는 ‘그러나’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Q. 내가 천국을 누리게 해준 최고의 환경은 무엇입니까?
Q. 나에게 있는 환난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예배 공동체’는 누구입니까?